법에 규정한 절차를 무시하는 건 적폐다. 나랏돈을 펑펑 쓰는 건 적폐다. 사법최고기관의 장을 코드인사로 채우겠다는 건 명백한 적폐다.

어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라는 임모 씨가 경향신문에 실은 '적폐청산 없이는 국민통합도 없다'라는 글을 읽었는데 두 번 세 번 읽어도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거기에도 '적폐'라는 게 구체적으로 뭘 말하는지 설명 않고 오로지 청산만을 강조하고 있었다.

'적폐청산'은 촛불시위의 구호이자 문재인의 선거구호였다. 그런데 취임 후 지금도 적폐청산이 유행어가 되고 있고 위 임혁백처럼 '청산 먼저'를 많은 인사들이 외치고 있다.

1. 대체 무엇이 적폐인가?

국어사전을 검색하면 적폐란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폐단'이란 풀이가 나온다. 한영사전을 검색하면 'deep rooted evil'이라 나온다. 뿌리 깊은 악(惡)이란 뜻이다.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으니 추정할 수밖에 없다.

'군사정치'를 말하나? 그거라면 1987년에 끝났다. '보수주의자의 행태'를 말하나? 그건 아닐 거다. 그러면 국민 절반 이상을 청산해야 한다.'이승만, 박정희'를 말하나? 그것도 아닐 게다. 사람에겐 평인이나 지도자나 누구나 장단점이 있다.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거라면 '청산'이 아니라 '숙청'이 맞을 것이다.

'정경유착'을 말하나? 이는 적폐이기는 한데 어느 정권에나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이는 '청산'한다고 끝나는 일도 아니고 꾸준히 '감시'해야만 한다.

어느 구 야권 인사는 한 종편에서 “박근혜 정권이 워낙 못했기 때문에 박근혜가 한 걸 거꾸로 하기만 하면 지지율이 치솟는다, 그래서 문재인의 국정 지지율이 높다”고 얘기하는 걸 봤는데 그렇다면 박근혜와 그 일당이 한 모든 게 '적폐'가 되는 것인가? 그런데 대한민국 대통령들은 임기 말에 가면 예외 없이 수직 추락한다. 반면 취임 초엔 지지율이 보통 80~90%다. 그러니 특정인의 행위를 대상으로 적폐를 논할 수는 없다.

검찰 모두가 적폐세력인가? 그도 아닐 것이다. 행위는 미워해도 사람을 미워하진 말자는 게 진심이라면….적폐가 쌓이고 쌓인 뿌리 깊은 거라면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는 왜 청산을 못했나? 혹시 대한민국 수립을 미 제국주의자의 식민정권으로 보고 건국세력, 산업화세력, 민주세력을 통틀어 '적폐'로 보는 북한정권의 식민사관 입장에 동조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탄핵 감이다.

그러니 문 대통령은 국정을 투명하게 운영하기 위해서라도 '적폐'가 무언지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한다.

2. 상식적 적폐

필자는 한나라당원도, 민주당원도, 국민의당 당원도 아닌 정치, 정파와 관계없는 대부분의 대한민국 서민과 같은 무당파, 무정파이다. 이런 입장에서 본 한국의 오랜 폐단은 다음과 같다.

1)상대방 물어뜯기
아무리 같은 행위도 우리 편이 하면 로맨스, 상대방이 하면 불륜 식이다. 편싸움 와중에는 국가도 국민도 뒷전이다. 이것은 600년이나 된 적폐이지만 아직도 진행 중이다. 임진왜란 이전 선조가 통신사를 파견해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살피라 했을 때 황윤길과 김성일이 정반대 보고를 했고 이는 당파싸움이 원인임은 누구나 알고 있다.
조선 말, 대원군과 민비는 개화당이 아니면서도 고부간에 권력다툼이 극심했고, 외세들은 이들을 교묘히 이용했다. 지금 정치판도 대강 비슷하다. 상대방의 인정이란 없다. 죽을 때까지 물고 늘어진다.

2) 집단이기주의, 떼법주의
나와 내 집단의 이익은 결코 양보하지 않으려 한다. 사드 배치가 타당하지만 우리 동네에 들어오는 건 반대라는 주민들이나, 같은 노조라도 우린 특권을 누려야 한다는 이른 바 귀족노조도 집단이기주의의 일부분이다.

3) 권력의 갑질
임기가 아직 많이 남았으니 좀 무리하게 칼을 휘둘러도 납작 엎드리겠지 하는 것, 권력자의 주변엔 항상 맹목적 충성파들이 모여드는 것, 문고리 권력, 내시권력이 생기는 게 모두 권력의 갑질 때문이다. 최순실 사태도 이중 일부가 아닌가? 그러나 이미 대통령이 탄핵되었고, 유죄 여부는 사법부에서 밝혀질 일이지 이게 연속 청산거리는 아니지 않는가?

3. 새로운 적폐는 이미 시작되었나?

문재인 정부는 아직 출범한지 한 달도 채 되지 않는다. 오바마 흉내를 내어 인기도가 많이 올라갔다. 반면 트럼프 흉내를 내어 새로운 적폐를 만들고 있지 않나 하는 의혹이 벌써부터 제기되고 있다.

1)어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정책을 두고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이를 비판하였고 문 대통령은 이를 정면으로 '양극화를 만든 한 축'이라며 맞받아쳤다.
시장경제체제 하에서 수요는 공급을 창조한다. 정규직, 비정규직 문제도 수요·공급의 원칙에서 자연발생한 것이다. 국가권력으로 무조건 왜곡할 수 있다 생각하면 오산이다. 국가권력은 보완에서 그쳐야 한다.

2)검찰 인사에서 절차를 무시하였다.
불과 며칠 차인데 그것을 못 참아 법에 규정된 절차를 무시하고 검찰 인사를 해 버렸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시 한다” 이는 공산주의식 논법이다. 일당독재국 하에서는 재판이란 절차 없이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문화혁명'은 절차 없이도 국가 전체를 광풍으로 몰아넣을 수 있음을 보여준 극단적 사례다. 법에 규정한 절차를 무시하는 건 적폐다. 유신헌법도 그런 발상 하에서 나온 것이다.

3) 대통령이 너무 나선다.
위 경영자총협회의 비판에 대해 대통령이 직접 나선 것도 아주 어색했다. 밑의 수석들은 뭣하러 둔 것인가? 또 4대 강 감사를 감사원에 지시한 듯하는 인상을 주었다. 4대 강 문제는 논란이 첨예한 만큼, 별도 용역을 주어 충분히 장단점을 밝힌 후에 조치하겠다로 끝내고 추가 감사는 감사원에 맡기면 될 일이다. 대통령이 너무 설치면서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하면 전체 능률이 확 떨어진다. 좀 아는 척 자주 나서다가 결국 실패한 이명박을 따라하겠다는 건가?
그리고 너무 덤벙거려서는 안 된다. '적폐'라는 게 존재한다면 이는 인체로 따지면 고질병, 내지 오래된 종양인 셈이다.
우발적 사고에 의한 부상은 후딱 손써서 처치하면 되지만 고질병, 종양은 전문의라면 일단 조직검사를 행하고, 검진을 하고, 수술의 필요성이 인정되면 침착하게 도려낼 부위를 정하고, 메스를 정확하게 놀려 최단시간 내에 봉합할 것이다. 반면 돌파리는 보호자들의 성화에 못 이겨 조급히 칼을 댔다가 “아차 이게 아니구나” 하고 옆을 또 찌르고, 이리저리 칼질만 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종합병원으로 가세요” 하여 이송 중 환자를 죽인다. 이 꼴이 되기 쉽다.

4)나랏 돈을 펑펑 쓰는 건 적폐다.
지금 문재인의 선거 중 공약을 다 집행하면 재정은 큰 부담을 안게 된다. 결국 세금을 더 걷거나 국채를 더 발행해야 하는데 이는 차기 정권 또는 지금의 청소년들이 자라서 부담해야 한다. 과도한 재정부담으로 나라가 망해버린 사례는 역사에서 부지기수이다.
수양제가 고구려 침략으로 재정적자에 허덕이다 망했고, 조선 말 대원군은 경복궁 증축자금을 마련하느라 '당백전'을 남발하는 바람에 경제를 혼란에 빠뜨렸다. 정책 실현에 혈안이 되어 국가 재정을 휘청거리게 만드는 거야말로 아주 오래된 적폐이다.

5) 헌법재판소 소장을 극소수의견파로 임명하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19일 헌법재판소장에 김이수 헌법재판관을 헌재소장으로 지명하고 국회동의를 앞두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헌법위반을 가리는 최고기관이다. 극소수 의견을 낸 사람을 지명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임기가 얼마 안 남았고 또 최연장자이기 때문이라는 건 궁색한 변명이다,
행정부에 나와 코드가 맞는 사람을 쓰겠다는 건 정책의 일관성 유지를 위해서라는 이유가 성립할 수 있다. 그러나 사법최고기관의 장을 코드인사로 채우겠다는 건 명백한 적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