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내가 삼십대 대통령 직속기관에 있을 때 상관으로 모셨던 분을 만나 함께 점심을 한 적이 있다. 젊은 시절 그 분은 감히 가까이 할 수 없는 높은 위치로 여겨졌다. 검사 출신인 그는 안전기획부의 수사와 정보의 책임자를 지냈고 대통령의 민정수석비서관과 장관을 역임했다. 그리고 국회의원도 했었다. 중요회의 때마다 톡톡 튀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서 대통령과 권력의 핵심들을 흐뭇하게 하는 걸 봤었다.

나는 그를 삼국지의 위나라 책사 ‘사마의’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영특하고 무서운 조조 앞에서 무서울 정도로 자신을 낮추어 권력의 경계심을 희석시켰다. 사마의는 제갈공명을 심리적으로 이긴 승리자이기도 했다. 한번은 제갈공명이 적군의 총사령관인 사마의에게 여성이 입는 붉은 치마를 보냈다. 사령관이 아니라 여염집 여인보다도 못하다는 모욕의 의미였다. 사마의는 전군 병사가 도열한 앞에서 능멸하기 위해 보내온 여인의 치마를 입고 사열을 했다. 그의 부하 장수들이 사령관의 수모에 모두 분노하고 이를 갈았다.

사마의는 “내가 살아오면서 모욕을 한두 번 당했겠어?”라고 하며 껄껄 웃었다. 그리고 부하들의 증오를 하나로 묶어 날 선 전투력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조조가 세운 나라를 뒤엎어 버리고 주인이 된다. 젊은 시절 내가 잠시 모시던 상관은 그런 유형의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젊은 시절 상관이었던 그는 가지고 있던 권력에 비해 나같은 하급자에게도 항상 형같이 다정하게 다가오고 배려해 주는 사근사근한 모습이었다. 부하들의 마음을 잡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대통령이 유럽순방을 갈 때였다. 그 상관은 내게 이런 은밀한 명령을 내렸었다.

“대통령이 도착하기 한 달 전쯤 미리 가서 대사관의 준비상황이나 북한 측의 동향을 소리 없이 잘 살펴봐. 만약 대통령에게 아웅산 사태 때 같이 폭파라던가 암살 같은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어. 그런 상황이 되면 정확한 현지 상황을 파악해 나에게 즉시 연락해야 하는 거야. 기존 정보망하고는 달리 자네는 비선의 개인적인 정보망인 거야. 그런 정보를 먼저 장악해야 국내의 상황을 통제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혀를 내두를 정도로 그렇게 철저한 분이었다. 어느새 세월이 흐르고 그도 팔십의 노인이 되어 있었다. 사마의가 흰 머리를 날리면서 손자를 안고 있다가 눈을 감는 모습이 그의 얼굴에 겹치는 느낌이었다.

“그때 국무총리나 대통령 꿈을 꾸어 보지 그러셨어요?”
내가 말했다. 그는 대통령의 두뇌였다. 제갈공명이 유비의 아들 유선을 딱한 눈으로 보듯 나는 대통령이 그보다 지혜가 훨씬 못하다고 생각했다.

“아직 젊었던 그때 법무장관이나 검찰총장을 하라고 하더라구. 그런데 나보다 선배 기수가 있는데 그걸 뛰어넘으면 신상에 좋지가 않을 것 같아 사양했지. 그 다음에는 내무부장관을 하라고 해. 당시는 경찰을 장악하고 지자제가 실시되기 전이니까 전국의 도지사 시장 군수를 임명하는 자리였지. 그런데 보니까 대통령이 내무부장관한테 수시로 전화를 걸어 지시를 하더라구. 수석비서관을 할 때 지시를 받아봤는데 장관까지 하면서 간섭받기는 싫을 것 같더라구. 그래서 비교적 한가한 장관을 맡았었어. 그 다음에 정권이 바뀌고 총리 얘기가 나온 적도 있어. 전혀 권한이 없는 총리를 해서 뭐해? 사양했지.”

그의 말의 이면에는 여러 가지 계산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 같았다. 그가 불쑥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자네를 조직에 끌어들였는데 키워주지 못했어.”
나는 일하다가 조용히 사표를 내고 나왔었다.

“아닙니다. 그때 이상한 신비체험을 하고 그곳을 나오게 됐습니다.”
“어떤 체험인데?”
그가 물었다.

“어느 날 내면에서 알 수 없는 힘이 나보고 성경을 읽으라고 하는 거에요. 강하게 나를 몰아 붙였어요. 그래서 그 분위기에 걸맞지 않게 근무시간에도 성경을 내놓고 읽었죠. 그렇게 삼십 번 가량을 읽으니까 성경 속에 있는 그 분이 사표를 쓰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리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라고 했어요. 그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그렇게나 많이 읽었어? 대단하네.”

당시 권력의 핵심이었던 그에게 기대는 마음을 끊어 버렸던 게 수십 년 동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힘이 되는 것 같았다. 그는 권력을 가르쳐 준 상관이었지만 성경은 십자가의 근원적인 행복을 내게 알려주었다.






내 눈에는 대통령을 빼고는 세상이 말하는 권력은 다 가져 본 것 같았다.
[출처] 삼국지의 '사마의' 같았던 상관|작성자 엄상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