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의 변천-송두리째 무너지는 전통윤리2
부자를 증오한 마르크스와 재산을 증오한 어떤 아메리카 원주민

최성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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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현상은 동물 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먹이를 저장할 줄 모르는 동물들은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군거 생활을 하더라도 자기들끼리 전쟁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싸움은 대부분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개별적으로 벌어질 뿐이다. 편을 갈라서 싸우는 경우는 아주 희귀하다.
  
   개미나 벌꿀같이 먹이를 저장할 줄 아는 동물 사이에선 심심치 않게 전쟁이 벌어진다. 개미가 인간 생활과 가장 유사한 사회 생활을 하는데, 이들은 아예 전투 담당 개미 전사가 따로 있다. 이들은 머리와 턱이 유난히 발달하여 단번에 적의 몸을 두 동강낸다. 만약 적이 쳐들어오면 입구를 몇 마리가 큰 머리로 막으면 절대 쳐들어오지 못한다. 그러나 자기편은 정해진 어떤 신호를 주고받은 후에 들여보낸다.
  전쟁을 해서 훔쳐온 적의 알을 부화시켜 노예로도 부린다.
  
   한국의 토종벌은 평화를 지나치게 사랑하여 전쟁을 싫어한다. 그래서 서양벌이 쳐들어오면 집을 다 내 주고 산골로 산골로 계속 들어간다. 그러다가 지금은 거의 멸종 단계에 이르렀다.
   이처럼 꿀벌도 부가 축적되면 그 부를 손쉽게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한다.
  
   이로 미루어 동물의 세계에서도 부의 축적이 전쟁의 원인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아메리카 인디언 부족 중에 정기적으로 전쟁을 해서 서로가 상대방의 재산을 파괴하는 풍습이 있다.
   이것은 바로 구석기 시대의 윤리와 신석기 시대의 윤리가 타협을 한 결과가 아닐까 한다. 축적된 재산이 갈등의 주원인임을 알고서 그들은 아예 재산 자체를 서로가 파괴해 주는 것이다.
  철저히 파괴할수록 칭찬을 받는다.
  
   이미 사유 재산을 인정하는 윤리가 확고하게 정착된 문화 속에 사는 우리에게는 그 풍습이 우스꽝스럽기 그지없지만, 그들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굉장한 지혜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다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 미워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그들의 눈에는 전쟁을 벌여 수많은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다른 문화의 사람들이 더할 수 없이 어리석고 못된 야만인으로 비칠 것이다.
  
   그들은 사람을 대량으로 죽이는 전쟁의 참혹함을 피하고 단지 축적된 재산을 파괴함으로써 자기들의 문화와 생존을 항구적으로 보존한다. 부족간의 갈등과 증오는 축적된 부 때문이라는 것을 그들은 정확히 꿰뚫어 본 것이다.
  
   이들의 지혜는 어쩌면 복잡하기 그지없는 마르크스의 과학보다 한 차원 높은 단순명쾌하면서도 현묘한 지혜라고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느 집단이 다른 집단에 대한 증오심을 갖고 인간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한 마르크스와는 달리,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기본으로 해서 갈등과 소외의 원인인 재산만을 파괴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들 인디언 부족은 인간을 사랑하고 재산을 미워했지만, 마르크스는 재산을 사랑하고 인간을 미워했다.
   누가 더 지혜로운가?
  
   마르크스는 부를 축적한 지주와 부르주아를 폭력으로 제거하고 그들이 가진 부를 모두 빼앗는 것을 정당화했다. 인간은 죽여도 좋지만, 재산은 파괴할 수 없었다.
  
   그는 이를 교묘히 속여서 인간을 가장 사랑하는 척했다. 인간 소외를 엄청나게 강조했다. 휴머니즘을 누구보다 크게 부르짖었다.
   그가 사랑한 인간은 누구였던가? 과정은 다 생략한 채 오로지 결과적으로 부를 갖지 못해 소외된 인간을 사랑했을 따름이다. 만약 부를 갖지 못한 사람이 부를 차지하게 되어 다시 상류층으로 올라가면, 그 상류층은 다시 증오의 대상이 된다. 왜?
  인간보다 귀중한 재산을 가졌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부에 대한 탐욕을 숨기기 위해 그 부를 공평하게 나눠갖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이미 인간보다 부를 더 사랑하게 된 인간이, 단지 자기가 못 가진 부를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른 인간을 죽인 인간이 그 부를 공평하게 나눌 수 있을까.
  
   구석기 시대처럼 먹을 것을 마련하는 대로 쌓아놓을 줄 모르고 그 자리서 다 먹어 버리는 세상이 다시 오지 않는 경우에는, 설령 부를 똑같이 나눠 주었다고 하더라도 누군가는 그 부를 다 쓰지 않고 저축하는 사람이 생기게 마련이고 그렇게 모은 부가 시일이 지나면, 남보다 수십 배 커질 수가 있다.
  그러면 그는 부르주아가 된다. 이렇게 해서 재산을 많이 갖게 되는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발생하게 마련인데, 그 순간 그 인간은 증오의 대상이 된다.
   왜 인간보다 더 귀한 부를 가졌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공평하게 분배한 부를 오직 절약해서 모아서 부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마르크스는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마르크스는 부의 다과를 말했을 뿐, 부의 축적 과정은 무조건 사악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정당한 노력의 대가와 창의성에 의한 부의 축적, 절약에 의한 부의 축적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걸 인정하면 그의 이론은 설 자리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베짱이가 놀 때 개미가 땀 흘려 벌어 모은 것이, 다시 말해서 오로지 자기 자신을 착취해서 모은 것이 남을 착취해서 번 돈 못지 않게 많을 수도 있다는 걸, 그는 인정하지 않았다.
   실컷 잘 놀아놓고는 남이 땀흘려 마련한 식량을 보고 그 인간을 미워하고 그 식량을 빼앗기를 간절히 바라는 탐욕을, 그는 무의식적으로 사모했지만 의식 차원에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로 확신했다. 부에 대한 탐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남들이 아무 씨나 뿌릴 때 많은 경험과 예리한 관찰력으로 좋은 씨앗을 확보하여 남보다 소출을 많이 내서 쌓은 부도 그는 인정할 수 없었다. 설령 그렇더라도 왜 알려 주지 않고 자기만 재미 봤느냐고 우겼을 사람이다.
  
   그는 부정이 개입되지 않으면 절대 많은 부를 쌓을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가 돈을 벌어 본 적이 없었던 개인적 경험도 이런 확신을 강력히 뒷받침했다.
  
   어린애에게 똑같이 과자를 나눠 주어도 어떤 아이는 그 자리서 다 먹고 어떤 아이는 아꼈다가 나중에 먹는 아이가 있다는 것도, 그는 인정할 수 없었다. 그건 틀림없이 그 아이를 편애하는 누군가가 몰래 하나 더 준 것으로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사실은 그는 그 자신의 부에 대한 탐욕 때문에 축적된 부는 모조리 악하게 보았다. 부는 오로지 노동 착취만으로 축적된다고 그는 우겼다. 왜?
  그래야만 자기가 부에 대한 탐욕 때문에 인간을 증오한다는 것을 숨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이미 재산을 파괴하고 인간끼리 오순도순 사는 것을 꿈꾸기에는 너무나 재산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구석기 시대의 윤리를 받아들이기에는 이미 신석기 시대 이래의 재산에 대한 강한 탐욕에 너무 깊숙이 빠졌다. 이 탐욕은 그의 무의식 세계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것이 탐욕이라는 걸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소외된 자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확신했다.
  
   마르크스가 체계화한 증오의 과학을 받아들인 사회나 국가는 필연적으로 또 다른 갈등이 생겨서 서로 다른 계급이 편을 갈라,
  끝없이 때로는 눈에 보이게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게 싸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들 현명한 인디언 부족은 정기적으로 갈등 요소 자체를 없애 버림으로써 인간끼리는 증오하지도 않고 서로 싸우지도 않고 영원히 공존한다.
   먹을 게 적기 때문에 인구도 별로 늘어나질 않는다.
   어찌 보면 인간이 의학의 발달로 태어나는 대로 다 생존하는 것은 자연 질서를 위배한 것이다.
  
   (태어난 생명 중에 일부가 죽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라고 한다면,
  현대인이 뱃속의 아이를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서 죽이는 것은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기 위해, 인간이 자연의 질서를 깨뜨린 의학의 힘을 본능적으로 다시 이용하는 서글픈 역설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들 부족은 갈등의 원인이 부를 많이 가진 특정 계급의 인간 집단이 아니라 부 자체라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재산을 파괴해서 그들은 갈등을 원천적으로 소멸시킴으로써,
  재산이 지나치게 쌓여 이미 파괴하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생각이 들게 되는 순간, 상대방의 재산이 그 인간보다 더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닥쳐올 대량 살상을 피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그들이 서로 상대방의 재산을 파괴하는 행위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어리석어 보이지만, 오히려 그 순간 이들 부족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부 때문에 혼탁해진 영혼이 맑게 정화된다.
  이들이야말로 노자의 무위자연 사상을 철두철미하게 실천하는 부족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증오는 또 다른 증오를 낳아서 평등한 사회 건설이라는 원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지만, 이들 부족의 사랑은 또 다른 사랑을 낳아서 인간은 미워하지 않고 단지 재산만을 미워하여 평등하고 순수한 사회 건설이라는 목적에 쉽게 도달한다.
   외부의 간섭만 없으면 그들의 문화는 영원히 계속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의 에덴 동산은 아마 청동기시대에 구석기시대를 그리워해서 창조한 것인지도 모른다. 에덴 동산에 대한 신화는 유태 문화 이전의 문화에서 그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문화 인류학자들이나 심리학자들은 1만년 이전 곧 농업이 시작되기 전 구석기시대에 실지로 낙원이 존재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먹을 것만 풍부했으면 구석기시대는 낙원일 수밖에 없었다.
  
   공자의 사상이 한 마디로 표현해서 청동기시대에 대한 향수인 점과 노자의 사상이 석기시대에 대한 향수인 점이 선명하게 대조된다.
   당연히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는 말을 듣고 둘이 만난 적이 있지만 얘기가 전혀 안 통했다. 노자에게 공자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였고 공자에게 노자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세계를 꿈꾸는 이상주의자였다.
  노자에게 공자는 교활한 자였고 공자에게 노자는 몽상가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는 서로를 전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두 문화의 언어가 의미하는 바가 달랐듯이 공자와 노자의 언어는 그 의미가 전혀 달랐다.
   노자의 말은 석기 시대의 언어인 만큼 아주 단순했지만, 뜻은 현묘하기 짝이 없었고 공자의 언어는 청동기시대의 언어였던 만큼 복잡하고 정교했다.
  철기시대에 접어든 사람들에게 둘 다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노자가 더 어려울 것은 불문가지다. 그의 사상은 인류 99만년의 지혜를 농축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당시의 효는 아들이 어머니 곁을 떠나면 자연스럽게 끝이 났다. 이에 대해 서로가 별로 아쉬워하지 않았다. 때로 다시 만나서 서로 즐거워 하는 수도 있었지만, 영원히 만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어머니와 딸은 대체로 가까이 살면서 서로 자매와 같이 지냈다.
   수렵채취시대의 효는 자연발생적인 것으로 군거 생활을 하는 동물 사이에 존재하는 것과 비슷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효는 새끼가 어미의 사랑에 대해 자연스럽게 응답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의무란 생각이 거의 없었다.
  
   이 시기의 가장 큰 특징은 모성애와 효 사이에 갈등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아버지가 끼어 들어 방해하는 일도 없었다. 아버지가 분명하고 늘 가까이 살 때는 그에게도 어머니에 대한 것만큼은 아니지만, 사랑 표시를 하였다.
  갈등이 없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왜 나에게 더 잘해 주지 않느냐고 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상상한 것과 같은 왜곡된 부모 자식 관계는 이 시기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인류학자들의 연구가 나의 이 주장을 뒷받침한다.
   --계속--
  
  
  
[ 2006-10-17, 23:5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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