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病든 평화’ 또는 ‘毒 묻은 평화’
평양서 돌아오는 盧 대통령은 챔벌린일 수도 있고 브란트일 수도 있다

이동복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평양서 돌아오는 盧 대통령은 챔벌린일 수도 있고 브란트일 수도 있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내외가 드디어 오늘 평양방문 길에 나섰다. 필자는 이번 그의 평양방문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기왕 가는 것이니까 축복을 주어서 보내는 방법밖에는 없는 것이 아닌가. 2박3일간의 평양 나들이 기간 중 건강하게 사고를 저지르지 않고 무사하게, 그리고 가능하다면 성과를 생산하여 가지고, 돌아오기를 바라야 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떨어 버릴 수 없는 불안감을 느낀다. 왜냐 하면, 그는 이번 평양 나들이에서 북한의 믿기 어려운 독재자 김정일(金正日)을 상대로 ‘평화’라는 이름의 ‘화약(火藥)’을 가지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불놀이’를 하겠다고 다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반복(反復)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평양으로 떠나는 노 대통령이 일깨워 주는 환영(幻影)들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1938년9월28일 독일의 뮌헨으로 떠나는 네빌 챔벌린(Neville Chamberlain) 영국 수상의 모습이다. 그는 29일 뮌헨에서 에두와르 달라디에(Edouard Daladier) 프랑스 수상과 함께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독일 총통 및 베니토 무쏠리니(Benito Mussolini) 이태리 총통과 4자회담을 갖고 여기서 체코슬로바키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의 나치 독일에게 체코슬로바키아 국토의 1/3에 해당하는 주데텐란트를 넘겨주는 <뮌헨 합의>에 서명했다. 히틀러의 나치 독일에게 이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은 무력으로 다른 인접국가의 영토를 넘보는 일은 하지 말라는 고육지책(苦肉之策)이었다. 이를 가리켜 역사는 <유화정책>(appeasement policy)이라고 일컫는다.
  
  이 4자회담을 끝낸 뒤 챔벌린은 30일 아침 히틀러와 따로 단독회담을 갖고 히틀러에게 별도의 ‘합의문서’를 제시하면서 서명을 요구했다. 챔벌린은 그해 10월2일자로 그의 누이 힐다(Hilda)에게 보낸 편지에 그때 뮌헨에서 있었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4자회담에서 서명할 <뮌헨 합의>의 문안이 준비되는 동안) 나는 히틀러에게 나와 별도의 회담을 갖자고 제의했다…나와 히틀러는 (이 별도의 단독 회동에서) 스페인과 동남 유럽 및 군축 문제 등에 관하여 매우 우호적이고 즐거운 대화를 가졌다… 대화의 끝 무렵 나는 내가 미리 준비한 ‘선언문’(초안)을 그에게 내밀면서 그에게 여기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다. 문면에 대한 통역이 끝나자 히틀러는 ‘언제 서명하느냐’고 물었고 내가 ‘지금 당장’이라고 대답하자 그는 즉시 나와 함께 책상으로 가서 2개의 정본(正本)에 함께 서명했다. 그 중의 하나를 내가 가지고 귀국한 것이다…”
  
  이 ‘선언문’이 바로 같은 날 런던 서부 근교 헤스턴 에어로드롬(Heston Aerodrome) 공항에 도착한 전용기 타랍 위에서 챔벌린이 손에 들고 흔들면서 “우리 생애의 평화”를 구가(謳歌)한 한 장의 수치스러운 종이쪽지였다. 그는 이 자리에서 환영 나온 영국민들에게 목청껏 외쳤다 “친애하는 영국 국민 여러분, 영국 역사상 두 번째로 영국 수상이 명예로운 평화를 독일로부터 가지고 돌아 왔습니다. 나는 이 평화야말로 우리 생애의 평화라고 확신합니다.” 그는 “우리는 체코슬로바키아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전 유럽에 평화가 정착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고 주장하는 한편 “오늘 아침 나는 히틀러 독일 총통과 별도의 회담을 갖고 또 하나의 문서에 나와 히틀러가 공동으로 서명했다”면서 그 내용을 자랑스럽게 낭독했다. 다음은 그 문서의 내용이다.
  
  “독일 총통과 영국 수상은 오늘 추가 회담을 갖고 영-독 관계는 양국뿐 아니라 전 유럽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인정해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우리 두 사람은 어제 밤에 (4개국이) 합의하여 서명한 합의문(뮌헨 합의)과 영-독간의 해군협정은 양국간에 다시는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양국 국민의 소망을 상징한다. 우리 두 사람은 앞으로 양국간에 제기되는 모든 문제는 협상의 방법으로 해결되어야 하며 모든 분쟁의 가능한 요인들을 제거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유럽의 평화를 보장하는 데 기여하기로 결의(決意)했다”
  
  이 같은 챔벌린 수상의 귀국 보고에 대한 영국 국민들의 환영(歡迎)은 가히 광적(狂的)인 것이었다. 영국 국민들은 챔벌린 수상이 손에 들고 돌아온 ‘평화’에 현혹된 나머지 그를 개선장군으로 환영했다. “사람들아 기뻐하라. 이제 우리들의 자녀들은 안전하게 되었다. 우리의 남편과 아들들은 전쟁터로 가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이것은 1938년10일1일자 한 영국신문 사설의 한 구절이었다. 그러나, 챔벌린이 뮌헨으로부터 가지고 돌아온 ‘평화’는 독(毒)이 묻은 ‘가짜 평화’였다. 히틀러는 이렇게 하여 공짜로 거두어들인 주데텐란트에 만족하지 않고 1939년 봄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 국토마저 무력으로 병합했으며 같은 해 9월에는 팬저 탱크를 몰고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전쟁을 하지 않고 모든 문제를 대화로 해결하겠다'는 독재자의 약속은 ‘빈 약속’이었던 것이다.
  
  이때도 선각자들은 있었다.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과 앤토니 이든(Anthony Eden) 같은 이들이다. 이든은 챔벌린의 대독 유화정책에 항의하여 외상(外相) 직을 사임했고 처칠은 영국의 우매한 대중들이 챔벌린이 가지고 돌아 온 가짜 ´평화´를 환호할 때, 영국 의회에서, 챔벌린 수상이 독재자 히틀러에게 '완전히 항복' 했으며 이로 인하여 오히려 '영국은 전쟁을 회피할 수 없게 되었다' 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의회는 찬성 369, 반대 150으로 챔벌린 수상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이때의 영국민들의 도취(陶醉) 상태는 1년 이상 계속될 수 없었다. 영국은 처칠이 경고한 대로 히틀러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에 말려들어 갔고 뒤 늦게 처칠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을 인정한 영국민들은 챔벌린을 내치고 처칠을 수상으로 맞아들여 전쟁수행의 대권(大權)을 맡겼고 처칠은 미국과의 동맹의 힘으로 히틀러를 쳐부수고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챔벌린은 뮌헨에서 히틀러와 불과 1년도 지속되지 못한 ‘우리 생애의 평화’에 합의하고 또 이를 옹호하는 과정에서 많은 ‘어록(語錄)’을 남겨 놓았다. 그 가운데 흥미를 끄는 것이 그가 뮌헨으로 출발하기 전날인 9월27일 영국 국민들에게 행한 연설의 몇 토막이다. 이 연설에서 그는 “제1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 우리가 체험한 일들에 비추어 볼 때 과연 새로운 전쟁이 일어나면 그 전쟁이 이제는 마지막 전쟁이 될 것이라는 보장이 있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우리는 우리 국방태세의 강점과 약점을 새삼 점검해 보게 되었다”면서 “우리는 그 결과 가장 최단 시일 안에 우리 국방태세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어떤 조치들을 취해야 할 것인지에 관하여 즉각적이고 철저한 조사를 시행하도록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챔벌린과 마찬가지로 노무현 대통령도 이번 평양 방문 등정(登程) 전야(前夜)인 10월1일 충남 계룡대에서 있었던 국군 창설 59주전 기념식에서 챔벌린의 1938년9월27일자 연설을 연상시키는 연설을 했다. 이 연설에서 노 대통령은 “앞으로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가 본격화되면 군사적 신뢰구축과 평화협정, 나아가 군비축소와 같은 문제도 다루어질 것”이라고 예고(?)하면서 한국군에게는 “한반도, 나아가 동북아 정세변화에 발맞추어 한반도 평화정착과 동북아 안보 협력을 또 하나의 안보전략으로 수용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군사적 신뢰 구축과 평화를 위한 협상, 동북아 안보 협력에 유연하고 적극적인 자세로 대처해 나가는 전략적 사고를 가지라”는 충고(?)를 던졌다. 1937년9월27일자 챔벌린의 연설과 10월1일자 노 대통령의 연설 사이에 무언가 통하는 맥(脈)은 없는 것인지 관심 있는 국민들이 판단할 문제가 아닌가 싶다.
  
  뮌헨에서 챔벌린과 만난 뒤 히틀러가 측근들에게 밝힌 ‘챔벌린 관(觀)’은 한 마디로 ‘경멸(輕蔑)’이었다. 그는 챔벌린을 가리켜 “철 지난 민주주의에 관한 터무니없는 허튼 소리나 지껄이는 버릇없는 참견꾼”(an impertinent busybody who spoke the ridiculous jargon of an outmoded democracy)이라고 혹평(酷評)했다. 일반적으로 독일인들은 챔벌린이 늘 들고 다니는 우산(雨傘)을 ‘평화의 상징물’로 받아들였지만 히틀러에게는 한 낱 ‘조롱거리’에 불과했다. 그는 툭하면 “만약 앞으로 그 맹랑한 늙은이가 우산을 들고 나타나 다시 우리 일에 참견하려 하기만 하면 나는 그를 발길로 걷어차서 아래층으로 떨어뜨리고 그의 배 위에 뛰어올라 사진사들로 하여금 그 장면을 촬영하도록 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뮌헨으로부터 귀국한 챔벌린의 ‘히틀러 관(觀)’이 이와는 극적으로 대조적이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챔벌린은 10월3일 의회 하원에서 뮌헨 회담 결과를 보고하는 가운데 그의 긍정적인 ‘히틀러 관’을 피력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오늘은 물론 과거에도 히틀러 독일 총통에 관해서 오갔던 많은 설왕설래(說往說來)에도 불구하고 나는 히틀러가 그의 지지자들로부터의 그 같은 열광적인 환호 속에서 그렇게 강력하게 천명했던 그의 입장을 철회하는 것이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었고 또한, 그것도 최종적 순간에, 이미 확정했던 그의 입장을 양보하는 문제를 다른 나라 지도자들과 논의함으로써 (평화를 성취하는 데) 실질적인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영국 의회가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히틀러를 치켜세우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1938년에 영국과 독일간에 있었던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은 2000년6월 한반도의 남북간에 반복되었었고 이제 이번에 노 대통령의 방북을 통하여 또 한 번 반복되려 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이 10월4일 평양으로부터 서울로 귀환할 때 그의 손에 어떤 종이쪽지를 쥐고 돌아 올 것인지 지켜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문제는 10월4일 군사분계선을 다시 걸어서 넘을 것이 분명한 노 대통령의 모습이 과연 챔벌린의 모습을 재연(再演)하는 것일까의 여부일 것 같다.
  
  평양으로부터 서울로 귀환하는 그의 모습은 다른 것이 될 수도 있다. 그 하나는 1970년3월19일 동독의 조그만 변경도시 에르푸르트에서 동ㆍ서 양독간의 첫 정상회담을 마치고 귀환하는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서독 수상의 담담한 모습이다. 에르푸르트로 가는 브란트 수상 일행의 규모는 불과 20명 내외의 단촐한 것이었다. 에르푸르트에서 브란트를 맞이한 빌리 슈토프(Willy Stopf) 동독 총리의 인사도 “초청을 수락해 주어서 감사하다”는 정도였고 3시간30분이 소요된 회담 결과에 대한 브란트 수상의 자평(自評)은 “심각한 견해 차이를 확인했다”면서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독 관계는 그 2년 뒤인 1972년 <양독 기본조약>으로 이어졌고 그로부터 19년 뒤인 1989년부터 동독 주민들의 ‘엑소더스’(대탈출)의 봇물이 터져서 다음 해인 1990년 동독의 붕괴와 서독에 의한 흡수통일 실현으로 대단원(大團圓)이 이루어졌다.
  
  이때 발생할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브란트 수상의 측근에서 그의 대 동독 ‘동방정책’(Ostpolitik)을 실무적으로 챙겨주던 최측근 보좌관이던 ‘군터 기욤’(Gunter Gillaume)이 동독의 국가정보기관 STASI가 심어놓은 동독 간첩이었다는 사실이 1974년에 들어나서 이로 인하여 브란트 수상이 사임하는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우리의 경우에도 하나의 타산지석(他山之石)이 아닐 수 없다.
  
  노무현 대통령은 10월4일 평양으로부터 서울로 귀환할 때 그의 손에 ‘평화’를 들고 돌아올 생각이다. 문제는 그가 들고 돌아오는 ‘평화’가 어떤 ‘평화’냐는 것이다. 그가 들고 돌아오는 ‘평화’가 챔벌린 식 ‘가짜 평화’라면 이는 남북의 우리 민족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재난(災難)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특히 우리는 이번 노 대통령의 일행에 김장수 국방부장관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려하는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이 나라 군의 최고 책임자인 그가 만약 ‘病든 평화’ 또는 ‘毒 묻은 평화’를 식별(識別)해 내지 못 하거나 아니면 식별하고도 이에 제동(制動)을 걸지 못 하는 경우가 생기면 어찌 되는 것이냐는 불안감이 많은 사람들의 뇌리(腦裏)를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필자는 김장수 장관이 중국(中國) 남송(南宋) 초기 국가안보를 위해 생명을 버렸던 악비(岳飛)의 고사(故事)를 머리속에 간직하고 이번 평양 길을 다녀오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 남은 일은 모든 국민이 눈을 크게 뜨고 귀를 크게 연 가운데 오는 4일 군사분계선을 넘어서 서울로 돌아오는 노 대통령이 챔벌린의 모습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빌리 브란트의 모습을 하고 있는가를 지켜 볼 일인 것 같다. 대책이 필요할 경우 그 대책을 챙기는 문제는 그 다음의 일이다. 우선은 2박3일 동안 평양에 머무는 동안 노 대통령이 부디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지 않기를 간절하게 바랄 뿐이다. [끝]
  
[ 2007-10-02, 14:2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리버티헤럴드  |  뉴스파인더  |  이승만TV  |  장군의 소리  |  천영우TV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