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 세대들의 노고를 기억하자
초창기 유럽리거들의 애환: 희생과 고난 없이 피어나는 꽃은 없다. 축구든 경제든 다 마찬가지다.

장원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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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덜란드 페예노르드 구단에 입단한 이천수가 팀 내 분위기 및 현지 환경 적응에 어려움을 호소하며 일시 귀국했다. 시즌이 한창 진행 중이지만 구단 측의 특별배려로 두 주 간의 말미를 얻었다니 몸과 마음을 잘 추슬러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기 바란다. 네덜란드 진출 전날음주와 관련하여 몇 가지 시비가 있었던 모양이나, 앞으로 경기장에서 탁월한 성적과 능력을 보여주고 용서를 구하면 될 일이다. 이 모든 소동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데는 2002년 월드컵 이후 스페인리그에 진출했다 좌절한 경험이 보약이 될 것이다.
  
  2004년 3월 17일에 벌어진 올림픽 예선 대 이란 전 원정경기. 이란 축구팬들은 테헤란 국립경기장을 ‘성지(聖地)’라고 불렀다. 이 경기장에서 이란 대표팀은 월드컵과 올림픽 예선을 망라하여 지난 40년간 단 한 번도 패한 일이 없었다. 이 전통을 무너뜨린 것이 이천수의 한 방이다. 경기 도중 이란 수비수의 태클에 발목을 상해 도저히 뛸 수 없을 만큼 복숭아 뼈 언저리가 부어올랐지만, 이천수는 자신의 팀 내 비중을 감안하여 끝까지 버티었다. 이 경기 이후 스페인에 복귀한 이천수는 부상 후유증에 따른 부진한 경기력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고, 스페인 구단의 코칭 스텝은 ‘자신의 몸을 망쳐가며 대표팀 경기에 올인’한 이천수를 그다지 고운 눈으로 보지 않았다. 슬럼프가 길어진 건 당연지사다. 이것이 이천수의 제1차 유럽진출이 실패로 끝난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다. 그의 성공을 충심으로 기원한다.
  
  잉글랜드 프리미어 박지성은 11월 중순부터 야외훈련을 시작했다. 1월 중에는 현역복귀가 가능하다고 한다. 반가운 일이다. 한국인 제1호 프리미어 리거 이영표는 꾸준한 출장과 기여로 팀 내외에 신뢰를 쌓고 있다. 역시 잉글랜드에서 활약 중인 설기현과 이동국도 곧 좋은 소식을 잇달아 보내주리라 믿는다. 이들 외에도, 십여 명의 한국 축구선수가 러시아, 포르투갈, 벨기에, 루마니아 등지에서 꿈을 키우고 있다.
  
  객지에서 몸으로 부딪히며 생활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다. 언어가 다르고 음식이 다르고 관습이 다른데, 어떻게 하면 되는지를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외로움과 숙명처럼 어울리지 않으면 외국 생활을 버텨낼 수 없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선배들보다 행복하다. 선배들은 축구만 잘하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 상황에서 축구를 하지 못했다. 축구 선진국과의 문화적 격차를 홀몸으로 감당하며 경기에 나서야 했다. 국가나 기관이 해야 할 일을 개인이 감당한다는 건 어지간한 사람으로서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이다. 차범근(1978~88년 독일)과 허정무(1981~83년 네덜란드)라는 선수를 기억하시는지. 두 선구자가 유럽에서 활동하던 당시, 유럽 축구계와 한국 축구의 환경은 그야말로 천양지차였다.
  
  1979~80시즌 막판, 차범근의 프랑크푸르트는 리그 6위 이내의 팀에게 주어지는 UEFA컵 출전권 획득을 위해 사투를 벌였다. 그리고 시즌 종료 후 ‘내년도 UEFA컵 참가팀’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친선 경기가 벌어지는 한국으로 향할 수 있었다. 6월 13일 서울운동장에서 벌어진 첫 경기. 한국 최초의 유럽리거 그것도 세계 최고수준의 분데스리가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는 자랑스런 한국인을 보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경기장 주변은 인산인해였다. 그런데, 차범근은 오른쪽 허벅지에 붕대를 칭칭 동여맨 채 관중들 앞에 나타났다. 한국 의료진들은 “저런 식의 붕대처치는 근육손상 시의 전형적인 처방법이다. 마지막 몇 경기를 진통제를 맞고 뛰었음에 틀림없다”고 했다.
  
  차범근은 분명히 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부상이 심각하더라도, 몇 년 만에 금의환향한 고국에서 벤치에만 앉아 있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관중들은 프랑크푸르트팀의 기량보다도, 차범근을 보기 위해 운집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차붐은 무리한 출전을 강행했다. 이영무 현 기술위원장, 이강조 광주 상무 감독, 장외룡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 조영증 파주센터장, 이태엽 호남대 감독 등이 당시의 대표팀 멤버였다. 마침내 경기 개시 시간. 수비수 홍성호의 적극적 대인마크에 시달리기를 몇 번, 차범근은 어느 순간 비명을 지르며 그라운드에 쓰러졌고 후반 18분에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교체되었다. 관중들은 홍성호를 비난했다. 그러나 홍성호의 수비가 아니라 차범근의 몸 상태가 문제였다.
  
  몸도 몸이었지만 팀과 함께 움직인 ‘한국에서의 며칠’이 차범근에게는 훨씬 더 안타까웠다. 유럽에서는 어지간한 동네 팀들도 몇 면의 잔디 구장을 보유하고 있다. 독일 선수들은 아시아의 축구강국에 대표팀 전용 잔디연습장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틀 간격으로 네 도시를 돌며 네 차례나 경기를 치르는 일정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훈련용으로 맨 땅 구장이 배정된 사실을 납득하지 못했다. 경기장에 도착해서도 연이어 사소한 문제가 발생했다. 샤워실에 더운 물이 나오지 않았다. 동료들은 차범근에게 사정을 말했다. 차범근은 보일러실로 뛰어가 선처를 부탁하고, 라커룸으로 달려와 ‘한국에서는 경기가 끝난 후에만 샤워를 하는 것이 관례’라고 동료들을 달랬다. 이번에는 다른 선수가 화장실로 차붐을 잡아끌었다. 좌변기 사용법을 알려주었더니 그게 아니었다. 차범근은 매점으로 달려가 두루마리 화장지를 한 무더기 구입하고 화장실마다 하나하나 휴지를 비치했다.
  
  한 해 전인 79년 7월, 분데스리가 챔피언 함부르크 SV가 한국을 방문, 대표팀에 1-0, 1-0, 4-2로 3연승을 거뒀다. 한 골을 넣은 뒤 설렁설렁 경기를 하는데도 우리 대표팀은 별다른 반격을 하지 못했다. 3차전에서 0-2로 밀린 후 유건수가 두 골을 넣으며 2-2로 동점을 만드는데 성공했지만, 그 중 한 골은 왼쪽 골라인 근처 사각에서 절묘하게 감아 찬 변화구 슛이었지만, 함부르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곧바로 두 골을 더 득점하며 가볍게 경기를 마무리했다.
  
  문제는, 79-80시즌 프랑크프르트와의 맞대결에서 그들이 고도의 심리전을 도발했다는 사실이다. 함부르크는 ‘차붐의 고국은 수준 높은 축구문화가 없는 나라였다. 관중들의 열기는 대단했지만, 경기장 시설이나 서비스는 형편 없었다’라며 상대팀 에이스의 자존심을 긁었다. ‘오만한 챔피언은 내가 맡는다.’ 차붐은 두 골을 터뜨리며 함부르크를 침몰시켰다. 그런데, 자신의 팀을 이끌고 찾아온 고국의 환경이 함부르크 선수들이 묘사한 바와 그다지 다른 점이 없었다면? 그날 밤 차붐은 서럽고 외로움에 한바가지 눈물을 흘렸을 터이다. ‘어린 선수들이 마음 놓고 잔디구장에서 공을 차는’ 축구교실의 꿈은 이 무렵부터 그의 가슴 속에서 뿌리를 내렸음이 거의 틀림없다.
  
  허정무의 전략은 우회상장이었다. 축구 변방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온 이 미드필더는 자기가 아시아를 대표하는 플레이어였다는 생각을 버렸다. 구단 직원들에게 한국 인형과 부채 같은 가벼운 선물을 돌리고, 최미나(전 방송진행자. 허정무의 부인)은 ‘한국요리’를 만들어 동료 선수 부인들과 친교를 다지고 신비의 스테미나 식품 ‘인삼’을 나눠주기도 했다. 데뷔 네 번 째 게임에서 허정무가 골을 터뜨리자 최미나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터뜨렸고 선수 부인들이 흐느끼는 최미나를 일일이 안아주며 ‘축하한다’라는 인사를 건넸다. 세 시즌 동안 15골을 기록하는 수준급 활약을 펼쳤으면서도 갓 출범한 한국 프로축구를 위해 고국으로 돌아가는 융뮤 후를 위해 구단에서 먼저 선물 보따리를 풀었다. ‘1983년 6월에 열리는 대통령배에 출전할테니 함께 한국행 비행기를 타자’는 제안.
  
  생각지도 않았던 제안에 대한축구협회는 함지박만큼 입이 벌어졌다. 세계 일류의 유럽 프로구단이 자기가 먼저, 별도의 출전료도 요구하지 않고, 그것도 정예멤버를 모두 거느리고 대회에 참가하겠다니. 허정무는 이때부터 동료 선수들에게 유럽과는 차이가 나는 한국의 환경을 설명하고 미리미리 양해를 구하며 ‘한국 경기’를 준비했다. 필립스 아인트호벤은 가나, 수단, 뉴질랜드, 유공(현 제주 Utd), 미국, 한국 대표팀을 연파하고 6전 전승의 기록으로 우승컵을 품에 안는다. 결승전에서 한국을 3-2로 물리친 후 아인트호벤 선수들은 허정무를 무등 태우고 트랙을 돌며 한국 관중들에게 자신들이 이 한국인 동료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지금도 아인트호벤 클럽하우스에는 허정무의 전신사진이 자랑스럽게 걸려 있다.
  
  홀몸으로 험로를 개척해간 선배들의 노고를 가슴에 새기자. 지금 대한민국이 누리는 번영과 풍요는 결코 한 순간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희생과 고난 없이 피어나는 꽃은 없다. 축구든 경제든 다 마찬가지다.
  
  
  장원재(숭실대 문예창작학과)
[ 2007-12-03, 10:1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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