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옥, 최은희의 북한 탈출기(下)-오렌지 주스와 빨간 장미꽃 한 송이
前 CIA 요원 마이클 리의 現代史 秘話-22/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신 감독과 최 여사는 죽을 힘을 다해 미국 대사관 정문을 향해 달렸다. 신 감독은 최 여사의 손도 잡지 않고 혼자 앞에서 달리고, 최 여사는 뒤에서 한쪽 신발이 벗겨진 채로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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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 이 문제를 둘러싸고 무슨 일들이 그 후에 진행되었는가. 무엇이 그들에게 용기를 주었는가. 이후 그들의 꿈이 현실로 나타났다. 1986년 3월13일 오후 1시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에서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여사가 미국 대사관에 뛰어들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신 감독과 최 여사는 1986년 2월에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영화제에 참석한 후, 평양으로 돌아가기 전에 영화 촬영 기자재 구입을 위해 비엔나에 왔다. 그들 뒤에는 여러 명의 경호감시원들이 따라다녔다. 신 감독은 비엔나 ‘금별은행’에 비엔나 주재 북한 대사관 직원과 공동명의 구좌로 예치되어 있는 230만 달러를 크레디탄슈탈트 은행(Creditanstalt Bank)에 신상옥 단독명의 구좌로 이체하고 수표책을 받았다. 사전에 연락하여둔 일본인 전직 <교도통신> 비엔나 특파원과 은밀히 접촉하고, 북한에서 따라온 경호감시원들을 따돌리고 탈출하기 위한 위장전술을 논의했다.
  
  신 감독은 1986년 3월13일 아침 북한 경호감시원들에게 “오늘은 일본에서 온 모 영화제작사 대표들과 영화제작 합작을 논의하기 위해 그들이 묵고 있는 다른 호텔에서 오찬을 하기로 되어있으니 따라오라”고 통보했다. 그들은 그 말을 그대로 믿었다. 그날 12시 30분경 교도통신 특파원이 공개적으로 호텔에 나타나 일본 영화제작사 대표단의 한 사람으로 행세하고 택시 두 대를 불러, 첫차에는 자기와 신 감독 부부를 태우고, 다음 차에는 북한 경호감시원 네 사람을 태우고 길을 떠났다. 길을 떠나면서 <교도통신> 특파원은 택시운전기사에게 유창한 독일어로 수단과 방법을 다해 뒤에 따라오는 택시를 따돌리라고 강요했다.
  
  그런데 영화의 한 장면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앞차가 어느 교차로를 통과하자마자 빨간 신호등이 들어와 따라오던 택시를 차단시켰다. 그러자 <교도통신> 특파원은 택시기사에게 최대한의 속도로 미국 대사관으로 질주하라고 했다. 그때가 오후 1시,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신 감독과 최 여사는 죽을 힘을 다해 미국 대사관 정문을 향해 달렸다.
  
  후일 최 여사가 원망할 정도로 신 감독은 최 여사의 손도 잡지 않고 혼자 앞에서 달리고, 최 여사는 뒤에서 한쪽 신발이 벗겨진 채로 달렸다.
  
  전 세계에 나가있는 미국의 외교공관의 경비는 미국 해병대가 담당한다. 정문과 건물 입구에서 미국직원과 현지직원들은 신분증을 제시하고 출입을 한다. 외부 방문객들은 정문에서 신분증을 제시하고 방문목적을 확인하고 내부에 연락해 승인이 떨어지면 그때 신분증을 정문경비실에 맡기고 출입증을 가슴에 달고 들어가도록 되어있다.
  
  그런데 신 감독과 최 여사가 뛰어들었을 때 정문에서 신분증검사나 방문목적을 확인하지도 않고 그 육중한 철문이 자동적으로 열리고 그들이 들어서자마자 도로 닫쳤다. 미국 해병대원 한 사람이 접근해 아무 말도 없이 그들을 건물 안으로 안내했다. 그때 뒤따라 오던 택시의 북한 경호감시원들이 어떻게 알고 찾아와 대사관 정문 밖에서 소란을 피웠다. 신 감독과 최 여사가 눅눅하고 곰팡이 냄새가 나는 어떤 지하실에 들어가 약 15분간 초조한 시간을 보낸 후, 턱수염이 더부룩한 미국 외교관 한 사람이 한 손에 오렌지 주스와 다른 손에는 빨간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계단에서 내려왔다.
  
  오렌지 주스는 신 감독에게, 그리고 장미꽃 한 송이는 최 여사에게 주면서 “Welcome to the west” (서방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하고 인사를 했다. 후일 신 감독이 자유스러워졌을 때, 앞으로 영화제작 활동을 계속하게 되면 그들의 납북과 탈출을 영화화해야겠는데, 나는 그 제목을 ‘Welcome to the west’아니면 ‘From Hong Kong to Vienna’ 로 하자고 건의한 바가 있었다.
  
  그날 오후 4시에 신 감독과 최 여사는 간단한 식사 후 옷을 갈아입고, 가발을 쓰고, 굵은 검은 테 안경을 쓰고, 두꺼운 머플러로 목을 휘감고, 미국 외교관 차를 타고, 에스코트 한 사람과 동승해 대사관 뒷문으로 빠져 은밀히 비엔나를 떠났다. 제3국으로 가기 위해 국경을 넘는데, 그때가 3월 중순인데도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국경에 도착했을 때 양국 출입국 관리소에서도, 신 감독과 최 여사가 탄 외교 차량번호만 확인하고 승객들의 신분을 묻지도 않고 무사통과시켰다. 차의 앞 유리창에 싸이는 함박눈을 와이퍼가 서서히 헤치며, 그들이 미지의 나라로 들어갈 때 신 감독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으며 최 여사의 손을 꼭 쥐어주었다.
  
  타. 그 후 필요한 망명 입국수속을 모두 마치고, 신 감독과 최 여사는 비행기를 타고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들은 법적으로 아직 이혼상태였기 때문에 전부터 잘 알고 있는 이경재 신부를 한국으로부터 초청해 가톨릭교 의식으로 재결합하는 혼례식을 올렸다. 입국 3년 후 미국 시민권을 받았으며 신 감독은 이름을 사이몬 신(Simon Sheen)으로, 최 여사는 테레사 신(Theresa Sheen)으로 바꾸었다. 이 과정이 모두 끝난 후 나는 그들의 요청으로 최 여사와 의남매 결연을 했다.
  
  그 고통스러운 시련을 겪고도 신 감독의 영화에 대한 열정은 식지를 않았고 제작활동을 계속했다. 탈출 후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제작한 영화로는 ‘마유미’, ‘증발’, ‘닌자키드2’, ‘돌아온 닌자키드’, ‘닌자키드3’ 등이 있다.
  
  특히 1990년 서울에서 제작한 ‘마유미’는 1987년 말 KAL-858기를 폭파한 김현희 사건을 주제로 한 작품이었다. 1994년에는 신 감독이 매년 5월에 열리는 프랑스의 칸 영화제(Festival de Cannes)의 심사위원이 될 만큼 그의 영화인으로서의 명성은 변함이 없었다.
  
  그에게는 죽기 전 꼭 하고 싶은 작품이 있었다. 그의 납북과 탈출을 주제로 하는 작품이었다. 또 하나는 1950년 말 6·25사변 때의 흥남철수를 주제로 하는 작품이었다.
  
  그 일을 위해 신 감독과 나는 1998년 말 버지니아 노포크(Norfolk)에 있는 맥아더기념관에 가서 그곳에 소장되어 있는 6·25동란 전사에서 필요한 자료를 수집했다. 北버지니아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 있는 美 재향군인회 본부에 가서 6·25참전용사들을 만나기도 했다. 영화제작이 시작되면 그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왔다. 이 일을 위해 극작가 신봉승 씨가 시나리오를 완성했고 흥남철수 때 남으로 피난온 실향민들 중에서 돈을 많이 벌어 재벌이 된 인사들이 자금을 대기로 하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당시 김대중 대통령 밑에서 문화공보부 장관을 하던 〇〇〇이 ‘북한을 자극하는 작품’이라는 이유로 제작을 좌절시켰다.
  
  파. 신 감독과 최 여사의 북한 탈출 사건이 그 당시 전 세계에서 일면뉴스로 도배를 하였다. 특히 한국에서는 전례가 없는 대형뉴스로 떴고, 그들이 한국으로 돌아와 주기를 애원하였다. 그분들의 형제들과 특히 양자 신정균과 양녀 신명희는 애절한 편지를 써서 그들이 하루속히 서울로 와 달라고 호소했다. 한국정부에서는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2차장(국제담당) 이학봉과 제3국 부국장 및 수사단장을 미국에 파송해 신 감독과 최 여사를 접촉하고 한국으로 가자고 설득하였으나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들이 한국으로 가지 않고 미국으로 망명한 것을 섭섭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으나, 그들은 절대로 조국을 배신한 것이 아니었으며, 후에 그들이 쓴 수기를 읽어보면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고 그리워했는지를 알 수 있다.
  
  다만, 그들이 미국을 선택한 이유는 그들만이 아는 고민과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 집권당시 노 대통령과 가까운 사이로 알려진 강원룡 목사가 신상옥 감독을 만났고 서울에 오라고 설득했다. 신 감독과 강 목사는 청진을 고향으로 하는 동향인이었다. 두 분 다 고집이 센 것도 비슷했다. 노 대통령은, 신상옥 부부가 서울에 오게 되면 그들을 철저히 보호하고 편히 머물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강 목사는 이 말을 신 감독과 최 여사에게 전달해 탈출 3년 후인 1989년 5월에 그들이 서울에 갔다. 그들이 김포공항에 도착하던 날 공항 주차장에는 보도진들의 차량으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신 감독이 北으로 납치되어간 후 오수미는 아들 상균과 딸 승리를 혼자 키웠고 1982년에 사진작가 김중만과 재혼했다. 신 감독과 최 여사가 돌아와 미국 L.A.에 정착하였을 때 오수미는 아이들의 교육문제도 있고 해서 상균과 승리를 미국에 있는 아버지에게로 보내기를 원했다. 그런데 오수미도 기구한 운명의 여자였다. 1992년 6월30일 하와이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이 소식을 들은 최 여사는 L.A.에서 급히 달려와 남편의 전 애인인 오수미의 장례식을 잘 치르고 돌아가 상균과 승리를 친엄마처럼 돌보았다.
  
  하. 신 감독이 늘 내게 충고하는 말이 있었다. 그는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지 불타는 열정이 없으면 별 볼일 없는 인생을 살다가 가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분은 아마 그렇게 평생을 살았을 것이다. 그 나이에 그 많은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았으며, 항상 두 눈에는 빛나는 서기가 있었고 새로운 창작활동을 하려는 열정이 불타고 있었다.
  
  그분의 그런 기질을 잘 아는 친구들과 유력한 인사들이 신 감독을 계속 뛰게 했다. 안양시에는 ‘최은희 거리’라는 길 이름이 있고, 안양시장은 신 감독 부부와의 인연을 소중히 여겨 안양시를 영화예술의 메카로 만들겠다는 꿈을 갖고 안양시 명학에 있는 전에 안양 경찰서가 사용하던 건물을 개수, 초급대학 과정의 ‘申(신)필름 예술학교’를 설립했다. 이 일을 위해 신 감독과 최 여사는 2000년도에 미국에서 한국으로 아주 돌아와 여생을 보람 있게 살려고 정착했다. 그러나 세상만사는 모두 무상하다. 2006년 4월11일, 그는 지병을 이기지 못하고 떠나버렸다. 그를 아끼고 존경하던 모든 사람들이 그의 떠남을 슬퍼했다. 역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영원한 우정의 영토를 남겨두었다.
  
  <계속>
[ 2014-10-16, 17:4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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