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을 憑藉(빙자)하여 사람을 증오할 수 있나
理念이란 무엇인가 (23) 이념과 동물애호

朴京範(소설가)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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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을 憑藉하여 사람을 증오할 수 있나

여느 누구와 마찬가지로 동물을 좋아한 바 있으나 여건이 되지 않아 동물과 함께 살지 못하고 있는 형편에서 유튜브 동영상에 동물이 나오면 즐겨보는 편이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동물의 미담 등을 보다보면 꼭 우려되는 게 있다. 거기에 나쁜 사람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십중팔구 세상에는 동물보다 못한 인간이 있다느니 하며 사람을 욕하고 저주하는 댓글이 달리는 것이다.
이렇게 동물을 憑藉(빙자)하여 사람을 증오하는 것은 흔한 경우가 되어 버렸다. 어느 쪽을 사랑하고 어느 쪽을 증오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우주에서의 영적인 비중을 따져볼 때 동물을 사랑한다 해도 동시에 인간을 증오한다면 결코 우주에 긍정적 영향을 주는 정신상태 라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어찌해서라도 세상에 변화를 주려는 일부 집단의 행위는 그간 약자의 편에 선다는 誇善(과선)에 바탕을 두고 여성과 어린이를 수단으로 삼아 남녀역할의 동일화 그리고 어린이와 청소년의 뜻에 따르는 교육 등을 주장하며 많은 모순적인 문제를 야기해 왔지만 이제는 동물에까지 그 손길이 뻗친 것이다.
동물사랑은 인간이 어느 정도의 생활수준이 된 다음에 가능한 것이므로 진보적인 것이다. 인간의 선함을 증명하는 한 척도이기도하다. 다만 현실을 도외시한 좌경화의 부작용에서 동물사랑도 예외가 되지 않는 것이 되고만 것이다.

애완동물은 사람에게 과중한 부담을 주지 않는 것에 의미가 있어

유기견의 문제가 있어 애완동물을 버린 자를 향한 비난과 저주를 쉽게 볼 수 있다. 이렇게 한번 맡은 동물이라면 평생 책임지라는 윤리적 요구가 강해지고 있다.
애완동물을 소유함은 자식양육과도 같이 세상에서 자기를 따르는 下位(하위)의 존재가 있음으로 해서 세상에서 말단이 아닌 자기의 上位(상위)의 位相(위상)을 확인하는 효과가 있다. 그런데 자식양육은 무거운 책임이 따르는 반면에 비슷한 효과를 얻으면서도 책임이 중하지 않은 것에서 애완동물사육은 장점을 가진다.

사실 인간의 아이에 관해서도 과거에는 부모에게 과중한 책임은 있지 않았다. 그 때는 아이의 수가 마음껏 늘어났지만 지금에 이르러 각종 과외수업 등 남들만큼 좋은 환경을 제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막중한 부담 때문에 아이는 줄어들었다.
인간의 아이도 부담 때문에 줄어드는 상황에서 애완동물의 사육부담이 커지면 대중이 애완동물과 접하고픈 욕구를 제한하게 된다. 애완동물이 기르기 까다로워지면 동물의 영혼이 저들의 목적을 위하여 지구상에 태어날 권리도 억제된다.
애완동물사육은 사랑을 내려주고픈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높은 문턱 없이 개방되어야 한다. 기르다 부담되면 큰 비난을 받지 않고 포기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애완동물의 존재의 의미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사육동물과 인간과의 인연은 중요한 것

이미 인간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사육동물이 있지만 본래 야생이었다가 인간에 의해 사육되는 동물들도 있다. 이들에 관하여는 자연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소리가 적지 않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많은 예산을 들여 사육중인 돌고래를 방사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가축의 번성은 인간에게 길러짐으로서 개체 수를 늘려 저네들이 지구상에 뿌리내리기 위한 수단이다. 동물은 인간과의 인연을 통해서 그들 존재의 발전을 꾀한다.
인터넷에는 태국에서 코끼리에게 일을 시키는 것을 비방하면서 관광도 하지 말자는 목소리가 있다. 그런데 인간끼리의 노예관계도 수 천 년을 이어왔는데 코끼리와 인간의 인연을 왜 그리 서둘러 끊으려 하는가. 노예는 나쁜 주인을 만날 수도 있지만 좋은 주인을 만날 수도 있다. 우선은 좋은 주인이 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채식주의만이 도덕적일까

채식주의는 개인의 체질이 용납할 수 있으면 좋은 식습관의 하나이다. 다만 윤리적인 동기를 두어 상대적으로 육식을 비하하는 것이 되면 그 의미를 다시 분석할 필요가 있다.
지상에서 자신의 업을 갚고 해탈을 향하여 나아가는 길의 하나는 스스로 남에게 신세를 지지 않아 뒷날 갚을 일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승려가 채식을 하는 것은 사바세계와의 인연을 줄이는 수단이다. 동물의 고기를 먹으면 아무래도 그 동물이 평생 동안 쌓은 물질에 신세를 지는 격이니 갚아야 할 업이 쌓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식물도 엄연한 생물이니 크게 보면 마찬가지겠으나 식물계는 인간계 그리고 동물계보다 영적밀도가 낮으므로 채식은 지상에서의 어쩔 수 없는 생존수단을 얻으면서 최소로 신세를 지는 방법이다.

영양섭취의 완전한 도덕성을 실현하기 위해 과일만을 섭취하자는 쪽도 있다. 과일은 식물이 원래부터 먹히려고 만든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먹는 것은 배추처럼 잎을 먹거나 쌀처럼 씨를 먹는 것과는 달리 식물에게도 아무런 해를 가하지 않는 도덕적인 식사라는 것이다.
그런데 식물이 과일을 만드는 것 역시 무조건적으로 베풀기 위한 것은 아니고 씨를 멀리 뿌려주기를 바라는 데서 말미암는 것이다. 과일을 먹는 사람이 과일나무를 기만하는 죄를 범하지 않으려면 먹은 과일의 씨를 모아서 쓰레기통이나 아스팔트바닥이 아닌 흙 위에 반드시 뿌려줘야 한다. 그러면 주고받는 것이 성립되어 완전한 도덕적 식생활이 실천될 것이다.

언론의 난
[ 2017-04-19, 13:50 ] 조회수 : 814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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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석영   2017-04-19 오후 3:30
좋은 말씀입니다 이 각박한 세상에
영혼이 께끝한 분의 글에 감동이 생깁니다
저는 가을에 감을 먹고 씨았을 모아 북한산에 가서 여러번 꼬챙이로 파고
심어 준적이 좀 됩니다
사랑이나 보은 보다 그것이 싹이나 고염이라도 열린다면
뭔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것이라는 생각 입니다만
아무튼지 선생님의 주장과 조금 비슷한거 같기도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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