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태어난 재벌 아들
“자기 아들이 돌아간 후에 비서들을 모아놓고 ‘나 행동 잘했지?’ 하고 웃는 걸 보니까 나이를 먹어도 한심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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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대의 양순해 보이는 남자가 가족관계 증명서를 들고 사무실을 찾아온 적이 있다. 그의 아버지를 나타내는 칸은 백지상태로 있었다. 그는 재벌회장인 아버지와 여배우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였다. 그 자신도 인테리어업을 하면서 이미 중년에 들어선 나이였고 자식도 있는 가장이었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를 호적에 바로 잡는 인지청구소송을 내게 부탁했다.
  
  “평생을 조용히 살다가 왜 이제 와서 그러는 거죠?”
  
  재벌회장의 상속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 집안에 커다란 파문이 일고 사회적으로도 뉴스거리가 될 게 틀림없었다.
  
  “어머니와 평생을 죽은 듯 숨어서 살아왔습니다. 저는 건축을 공부하고 인테리어 일을 하게 됐어요. 어느 날 아버지 그룹에서 하는 인테리어 하청 일을 따내고 그곳에 가게 됐어요. 그런데 아버지 그룹의 직원들이 어떻게나 무시하고 갑질을 하는지 모멸감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제가 태어난 게 무슨 잘못입니까? 제가 왜 평생을 그림자 인간을 해야 하죠? 이제 제 자식들도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대한민국 재벌 회장인 걸 자랑스럽게 알려주었으면 합니다.”
  
  소송이 제기되자 그 회장은 유전자 검사를 받지 않기 위해 외국으로 피했다. 재산 문제는 피보다 훨씬 중요한 것 같았다. 내가 그 아들에게 물어보았다.
  
  “중년에 이를 때까지 혼자의 힘으로 공부하고 살아왔고 지금도 당당한 자기 직업을 가지고 가족이 살아가지 않습니까? 지금 굳이 소송을 하는 진짜 이유가 뭡니까? 수천억에 해당하는 상속권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냥 아버지를 만나 한번이라도 아들이라는 인정을 받고 정을 나누었으면 합니다. 회장인 아버지가 가족들 눈치 때문에 그러지 나와 단 둘이 만나면 따뜻하게 해 줄 거라고 확신합니다.”
  
  평생을 냉기서린 그늘에서 살아온 모자에게는 아버지의 따뜻한 체온이 필요한 것 같았다. 나는 그 재벌회장이 도망한 곳을 은밀히 수배했다. 그는 개인재산과 기업의 경영권을 본처 자식들에게 모두 넘겨주고 유럽의 한 호텔에 몇 명의 비서들과 묵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게 소송을 맡긴 그의 아들에게 장소를 알려주면서 가서 아버지를 만나 정을 나누라고 권했다. 그 얼마 후 재벌회장인 아버지를 찾아갔던 아들이 변호사 사무실로 왔다. 그가 절망하는 표정으로 이렇게 입을 열었다.
  
  “공항에서 내려 아버지가 묵고 있는 호텔로 찾아갔어요. 때마침 아버지 주변의 비서들이나 경호원도 어디 갔는지 없는 것 같았어요. 아버지 방에 들어갈 수 있었죠. 혼자서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계시더라구요. 제가 아버지를 부르면서 왔다고 했죠. 사실 아버지를 고등학교 때 몰래 몇 번을 봤어요. 아버지는 내게 그때 쓰던 금촉으로 된 만년필을 기념으로 주기도 했었어요. 그러면서 잘 살라고 다독거려 준 적도 있어요. 그런데 이번에 만난 아버지는 내쪽으로 눈길을 주지도 않고 계속 텔레비전 화면만 보고 있더라구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아요. 옆에서 십분 정도 머쓱하게 서 있다가 씁쓸한 마음으로 호텔 방문을 나섰어요. 이제 아버지 찾는 건 그만두고 싶습니다. 안 간 것보다 못했어요.”
  
  나는 그 철저한 외면과 침묵의 의미가 무엇일까 생각했었다. 딱딱한 지각 속에서 끓어오르는 마그마처럼 속에는 더 뜨거운 사랑이 들끓고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며칠 후 내가 은밀히 부탁했던 재벌회장의 측근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기 아들이 돌아간 후에 비서들을 모아놓고 ‘나 행동 잘했지?’ 하고 웃는 걸 보니까 나이를 먹어도 한심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얼마 전 그 회장의 죽음이 신문 사회면의 커다란 박스기사로 났다. 그는 어떤 아버지였을까.
  
  [출처] 잘못태어난 재벌아들|작성자 엄상익
  
  
언론의 난
[ 2017-04-21, 11:10 ] 조회수 : 1998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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