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
“부자들은 속이 우리같이 뒤틀어지지 않았어. 있는 환경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선량해. 그리고 잘 속아.”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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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기생충'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혼자 표를 사서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는 ‘기생충’이라는 제목의 작품이었다. 반(半)지하방에 사는 한 가족의 척박한 삶이 나오고 있다. 피자 상자를 접어 가족이 연명하고 있다. 술주정꾼들이 골목길이 보이는 작은 창문 앞에서 수시로 오줌을 갈긴다. 비가 오면 침수가 되어 근처 학교 강당으로 피난을 간다. 가족마다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 아들은 스카이 대학에 들어가는 데 실패했다. 그들은 마음마저 황폐해 있다. 입만 열면 쌍욕이 흘러나온다. 우연히 아들이 학력을 속이고 부잣집의 고교생 딸의 과외선생으로 들어가게 된다. 아들은 순진한 부잣집 여자의 믿음을 얻자 백수로 있는 여동생을 미국 유학을 한 미술심리 전문가라고 포장을 해서 부잣집 꼬마를 가르치는 여선생으로 취직시킨다. 남매는 모략으로 부잣집에 있던 기사와 가정부를 몰아내고 아버지를 그 집 기사로, 엄마를 가정부로 취직시킨다.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사정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은 너무나 잘 속는 부잣집 여자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부자들은 속이 우리같이 뒤틀어지지 않았어. 있는 환경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선량해. 그리고 잘 속아.”
  
  대사 속에 청빈이 아닌 적빈(赤貧)의 개념이 압축되어 있다. 그들은 집주인 가족이 며칠간 캠핑을 간 사이에 그 집의 넓은 거실에 모여 부자놀이를 한다. 비싼 양주를 마시며 통유리창에 비친 초록에 물든 정원을 보며 자축파티를 한다. 천방지축으로 뛰어노는 그 집의 꼬마는 수시로 선생님이나 가정부 기사 아저씨에게 안긴다. 어느 날 퇴근하고 들어오는 아빠한테 안긴 꼬마 아들은 이런 말을 한다.
  
  “아빠, 가정부 아줌마나 기사 아저씨나 선생님한테서 모두 똑같은 냄새가 나.”
  
  그 말을 듣는 그들 가족은 속으로 뜨끔했다. 그리고 그날 밤 그게 무슨 냄새일까 하고 서로 고민한다. 같이 쓰는 비누를 떠올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한 마디 한다.
  
  “우리한테 공통된 건 반 지하방에서 나는 독특한 냄새일 거야.”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는 의미가 담긴 대사였다. 영화 속의 갈등은 가난한 사람끼리의 부딪침으로 시작된다. 쫓겨난 전에 있던 가정부는 그 집 주위를 맴돌았다. 남편이 부잣집 지하실에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부잣집의 설계자는 유사시를 대비해서 지하에 벙커같은 피난시설을 만들어 놓았다. 전에 있던 가정부만 그 사실을 알고 새 주인은 모르고 있었다. 전의 가정부는 사채빚에 쫓기던 남편을 그 지하 벙커에 숨겨 놓았던 것이다. 그 여자에 의해 기생충같이 달라붙은 그들의 관계와 모략이 들통이 나 버렸다. 가족은 전에 있던 가정부와 그 남편을 지하 벙커에 감금해 버렸다. 거기서부터 가족들은 고민에 빠진다.
  
  “아버지 어떻게 하실려구요?”
  걱정이 된 아들과 딸이 아버지에게 묻는다.
  
  “너희들은 아무걱정 마라. 이 아버지한테 계획이 있다.”
  무기력한 아버지에게는 그래도 자식들에 대한 사랑이 있다. 한참 후에 아들은 안심이 되지 않는 표정으로 다시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의 계획이 구체적으로 어떤 건가요?”
  그 말에 아버지의 얼굴에는 야비한 듯한 희미한 미소가 지어지면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모든 계획은 대개는 실패하거나 완성이 되지 않았지. 그런데 이번의 내 계획은 절대 그런 실패가 없지.”
  “그게 무슨 계획인데요?”
  아들이 다시 물었다.
  “무계획이란다. 그건 실패가 없어.”
  
  아버지에게 자기 가족 외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가득찬 아들이 부잣집 지하 벙커로 들어간다. 그 안에서 전에 있던 가정부는 죽어 있었다. 세상을 향해 공허한 구조신호를 보냈던 가정부의 남편은 짐승이 되어 있었다. 그가 아들에게 역습을 가하고 땅 위로 나온다. 푸른 잔디밭에서 부자들이 모여 가든파티를 하고 있다. 반지하방의 가족들이 그 집의 파티를 거들고 있었다. 짐승으로 변한 남자는 부엌에서 칼을 뽑아 들고 무차별 살인을 시작한다. 반지하방 가족 중 딸의 가슴에 제일 먼저 칼을 박아 넣었다. 순간 파티장은 공포의 도가니가 되었다. 딸이 흘리는 피를 본 반지하방의 아버지는 그 살인귀를 죽이고 순간 분노가 부잣집 남자에게 터졌다. 그는 칼로 부자의 가슴을 찌른다. 그리고 그 집 지하 벙커로 내려가 오랜 세월 기생충 같이 그 집 내부에 숨어 살게 된다.
  
  감독은 많은 의미를 함축한 영화를 만들어 낸 것 같았다. 그 판단은 관람객 각자에게 맡기기로 한 것 같다. 나는 도대체 가난이란 뭔가, 부자란 어떤 것인가 다시 생각해 봤다. 영화 속의 부자는 타고난 머리로 IT쪽의 기업을 일으킨 수재 같았다. 도덕적으로 욕을 할 게 별로 없었다. 칼을 맞은 원인이 있다면 자신은 사장 그리고 반지하방 아버지는 기사라는 잠재적인 차별의식 때문인지도 모른다.
  
  타고날 때부터 인간은 지능이 다르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 있고 평범한 사람이 있고 더러 바보도 있다. 영화 속 그가 칼로 찌르듯 좋은 머리를 가진 사람의 머리통도 깨버려야 하는 것인가. 지능의 불공평과 그 세상적인 결과는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육십대 중반을 넘긴 나는 요즈음 과거를 회상하면서 생각이 달라지고 있다. 고등학교 때 삼백 등 아래로 있던 열등한 성적도, 최고 일류대 법대를 나오지 못한 것도 결국 당연히 내가 받아들여야 할 섭리였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연출자인 하나님은 사람을 세상이라는 무대에 보낼 때 각자 배역을 주는 것 같다. 어떤 사람에게는 왕이나 왕비의 역을 주고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경비병이나 시녀의 역할을 준다. 내가 왕이나 왕비역이 아니라고 그 연극을 거부할 수 있을까. 경비병이나 시녀가 자기는 그런 역을 맡을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서 왕이나 왕비같이 행세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연극이 될까. 역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무대를 뛰쳐 내려온다면 그건 무엇일까.
  
  젊은 시절 탐욕에 젖은 채 세상에 미혹되어 살았다. 부자가 되고 싶고 권력을 잡은 높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게 못 되서 불행했다. 질투와 분노가 속에서 불같이 타오를 때가 있었다. 어느 순간 하나님이 내게 맡긴 배역이 경비병이라면 그 역에 충실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연출자가 가난한 사람이라 거지의 역할을 맡기면 그걸 받아들여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왕의 배역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연기력이 훌륭했는지로 관객은 점수를 매길 것 같았다.
  
  그걸 아는 종교적 천재들이 있었다. 부처는 왕자의 배역을 거절하고 세상의 거지가 되었다. 남이 버린 똥 묻은 옷을 빨아 입고 동냥 그릇 하나 들고 세상을 사십 년 떠돌았다. 예수는 마굿간에서 태어날 정도의 가난한 평민 목수의 아들로 세상 무대에 등장했다. 인생무대가 5막이라면 예수는 3막 정도에서 비참한 사형수로 십자가 위에서 처형됐다. 젊어서부터 내가 맡은 세상의 배역을 인정했더라면 많은 고뇌의 시절이 충만한 행복의 시간이었을 것 같다.
  
  
  
[ 2019-06-11, 17:1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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