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운전을 하면서 골목골목이나 경치 좋은 곳을 보는 게 저는 즐겁습니다. 어제도 손님을 삼청각에 모셔다 드렸는데 그 주변의 숲이 참 아름답더라구요.”
초가을의 따뜻한 햇볕이 내려쬐는 오전 열한 시다. 나는 서초역 네거리 부근에서 택시를 탔다.
“광화문 쪽의 프레스센터로 갑시다.”
오늘은 한 달에 한 번씩 모이는 대학 동기들의 모임이었다. 이제는 거의 다 직장에서 퇴직을 하고 조용한 노년을 보내고 있었다. 혼자만 집에 있으면 우울할 때가 있다. 친구들은 어떻게 노년을 즐겁게 보내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어느새 차는 반포대교를 건너고 있었다. 넓은 한강물이 마음으로 흘러들어오는 것 같았다. 문득 택시운전사에게 말을 던졌다.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뒷통수에 흰 머리가 듬성듬성 나 있었다.
“그러시죠”
그가 백밀러로 나를 힐끗 보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택시운전을 하면서 어떤 때가 즐겁습니까?”
나의 질문에 그가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택시운전을 하면서 골목골목이나 경치 좋은 곳을 보는 게 저는 즐겁습니다. 어제도 손님을 삼청각에 모셔다 드렸는데 그 주변의 숲이 참 아름답더라구요.”
똑같은 광경이라도 그걸 볼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 그런 눈을 가진 사람만이 밤하늘의 별이나 노을 지는 황혼의 주인일 것이다.
“택시운전을 하면 어떤 손님은 기사가 말을 하는 것을 아주 싫어하시는데 그렇지 않으신 것 같네요”
그는 대화를 하고 싶었던 사람인 것 같았다. 말문이 터지자 그의 입에서 얘기가 흘러나왔다.
“얼마 전 국세청 고위간부를 했다는 분이 퇴직을 하고 택시운전을 하는 걸 봤죠. 그 정도 경력과 전문지식을 가졌으면 로펌에 고문이라도 갈 텐데 택시를 모는 걸 이해하기 어렵더군요. 그 분 자신도 세력을 부리고 대접만 받다가 택시운전을 하게 되니까 엄청나게 박탈감을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분에게는 이 택시운전이 지옥일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저에게는 다릅니다. 이 택시운전이 사람을 이동시켜 주지만 이 좁은 공간 안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을 구경하고 좋은 관계를 맺기도 합니다. 저는 하루 열한 시간을 일해도 달리는 일이 즐겁습니다. 집에 들어갈 때 많은 돈은 아니더라도 내가 벌어가지고 가는 것에 감사하구요. 저도 나이가 육십이 넘었는데 할 수 있는 만큼 이 일을 하다가 죽었으면 좋겠어요. 뭐 물론 더러 트집을 잡고 행패를 부리는 손님도 있죠. 그런 때 바로 마음에서 털어내 물에 흘려보냅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처받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는 직업인이 아니라 운전을 통해 득도를 한 것 같아 보였다. 어느새 택시가 프레스센터 앞에 도착했다.
“손님 즐거운 하루 되십시오”
그가 대시보드에 있는 기계에서 영수증을 뽑아주면서 인사했다.
프레스센터 19층의 식당에는 대학 동기 몇 명이 먼저 와서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몇 년 전 은행지점장을 마지막으로 퇴직한 친구가 나와 있었다. 머리가 많이 빠져 듬성듬성했다.
“요즈음 어떤 걸 하면서 즐겁게 보내나 얘기해 봐”
내가 말했다.
“피아노와 중국어를 배우고 있어. 그렇게 자꾸만 공부해야지”
옆에서 듣고 있던 인도 지사에 오래 근무하던 친구는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요즈음 판소리를 배우고 있어.”
“우리들이 모두 이제는 노년이 됐는데 노년이라는 게 뭘까?”
내가 거기 있는 몇몇 친구들에게 물었다. 조용히 앉아 있던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나이를 먹었다는 건 행운이라고 생각해. 우리가 밀려나고 박탈된 게 아니라 살아온 시간만큼 확보한 거잖아? 젊은 사람들이 우리만큼 세월을 확보한다고 어떻게 보장하겠어? 그리고 우리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가족이나 친구와 그만큼 작은 일상의 행복을 누려왔잖아? 그만큼 좋았던 거지. 난 요새 젊은 사람들한테 당당하게 말해. 너희들은 나만큼 세월도 행복도 아직 확보하지 못했다고 말이야.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들은 모두 행복을 확보한 행운아들이었지 뭐.”
마음먹기에 따라 순간 행복은 가득 찰 수도 있는 것 같았다.
행복한 노인(老人)들
- 엄상익(변호사)
-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2017-10-04, 00: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