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왕년(往年)에는’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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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카오톡을 통해 짧은 글 하나가 왔다. 사십 년 전 초급장교 시절 선임하사가 보낸 글이었다. 부대에서 일 년간 근무하면서 스쳐 지나간 사이인데도 오래 기억해 주는 게 감사하다. 그는 칠십대 중반을 넘었고 나도 육십대 중반의 고개를 넘어섰다. 카톡의 내용은 노년에 지켜야 할 사항이었다. 첫째가 '내가 왕년에는'이라는 말은 하지 말라고 했다. 검증할 수 없는 지나간 이야기는 듣는 사람을 피곤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왕년에 화려한 직책에 있었어도 거부반응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었다.
  
  친구의 민사소송을 해주고 있던 중이었다. 그의 건물에 세 들어 살고 있던 사람이 나가지 않아 소송을 제기했었다. 매월 내는 차임도 내지 않고 배째라고 하는 상태였다. 어느 날 갑자기 나의 핸드폰이 부우하고 진동했다. 액정화면에 떠오른 번호가 낯설었다. 키를 누르고 전화를 받았다.
  
  “나 000입니다. 아시죠?”
  전화 저쪽에서 그가 자기의 이름을 댔다. 전직 검찰총장이었다. 그는 내가 당연히 자신을 알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압니다. 전 검찰총장님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나는 일단 그를 존중해 주었다.
  “지금 서초동의 건물에 세 들어 살고 있는 사람 명도소송 중이죠? 그 사람 내가 관여하는 사회단체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이에요. 좀 잘해 주면 어때요?”
  
  “아, 상대방 측 변호사 되시는군요? 소송보다는 조정이나 합의로 원만하게 해결되기를 저도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죠.”
  “나 그 사람 변호사 아니에요. 저는 변호사 안 하기로 한 사람입니다.”
  
  그가 말하는 어조에는 변호사라는 직업을 깔보고 무시하는 기운이 확연히 서려 있었다. 수십 년 동안 검사를 하면서 와서 사정하면서 비굴하게 구는 변호사들의 모습이 그 업무의 모두라고 생각하고 경멸하는 게 확실한 것 같았다.
  
  “법률가가 변호사를 안 하시고 무엇으로 밥을 먹고 삽니까?”
  내가 약간 뒤틀린 마음이 되어 되물었다.
  
  “나 골프장도 가지고 있고 회사도 있어요.”
  그가 말했다. 없는 사람 앞에서 재물 자랑 왕년의 관직 자랑을 노골적으로 하는 사람은 모자란 인간이다. 정면으로 받아쳐도 될 것 같았다.
  
  “변호사도 아닌 사람이 왜 남의 소송에 대해 말합니까? 당신이 나 압니까? 왕년에 검찰총장 할 때 이런 방식으로 압력을 행사하고 권한을 남용했어요? 할 말이 있으면 정식으로 변호사 자격을 얻어서 법정에서 해요. 이런 전화 건방지게 함부로 하지 말고.”
  “......”
  
  그가 전화기 저쪽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얼마 후 신문보도에서 그가 나타났다. 그가 사장인 골프장의 캐디 방에 들어가 추행을 했다는 지저분한 기사였다.
  
  전직 언론사 사장과 정치부 기자 모임에 나가다가 그만둔 적이 있다. 왕년에 김대중, 김영삼이나 장관들과 만나 어떻게 했다는 얘기가 만날 때마다 끝도 없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정재계 거물이나 고위관료들과의 관계나 인맥을 끝없이 자랑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제는 자리를 떠나 노인이 된 전직 언론인들을 안다고 할까 의문이었다. 자리를 떠났는데도 왕년에 잠시 했던 관직은 끝까지 따라다녔다. 왕년에 장관인 친구가 말을 끝없이 해대면 다른 동창들은 끝없이 앉아서 듣고 있는 풍경을 보기도 한다. 파고다 공원에 모여있는 노인들 사이에서도, 서울역 앞에서 옹기종기 앉아 있는 노숙자들도, 감옥에서도 모두 왕년에 자기가 한 가닥 했다는 말들을 한다. 허풍이거나 검증할 수 없는 왕년이었다.
  
  왕년은 이미 지나간 과거를 말한다. 노년의 강가에 도착했다면 어두워가는 저녁 강을 보면서 강물이 속삭이는 진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게 아닐까. 얼마 남지 않은 시간과 에너지를 가지고 마지막으로 아주 작은 사랑들을 나누어야 하지 않을까.
  
[ 2019-08-06, 21:4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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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피리1    2019-08-08 오전 9:16
엄상익 변호사님, 매번 좋은 글 잘 읽습니다. 감사합니다. 무더위에 건강 조심하십시요.
   이중건    2019-08-06 오후 10:46
또 사색하게 만드는 경전같은 얘기 잘 봅니다.
얼마전에 원로한분을 만나뵙는데 사실 저에게 북한얘기 듣고 싶다고 만났지만 2시간 반동안 자신 경력만 얘기하다 시간 다가 헤어졌습니다. 그냥 들어주면서 나는 절대 저러지 말아야겠다고 잘 배워져 감사할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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