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格으로 혁명한 사람”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9)/ 박정희가 많은 부하들을 死線으로 끌고 갈 수 있었던 비결의 한 핵심이 청렴이었다
趙甲濟   
 道義 對 氣魄 논쟁
 
 자신이 뒤집어엎으려고 했던 이승만 정권이 학생 시위로 넘어가는 것을 바라보는 박정희 소장의 심정은 복잡했다. 4·19 이전에 박정희를 만났을 때 친구 황용주(당시 부산일보 주필)가 전국으로 번지고 있는 학생 시위를 설명해 주면 박 소장은 “에이, 술맛 안 난다”고 내뱉었다고 한다. 학생들에게 先手(선수)를 빼앗기게 되었다는 안타까움의 표현이었다.
 
 이낙선이 작성한 《5·16 혁명 참여자 증언록》에 따르면 4월19일 유혈 사태로 서울, 부산 등지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자 그날 밤 부산 동래에 있는 박정희 관사엔 김동하 해병상륙사단장과 홍종철 중령이 마주 앉았다고 한다. 박정희는 “학생들이 맨주먹으로 일어났으니 그들을 뒷받침해 주자”고 말했다는 것이다.
 
 4월26일 밤 박정희는 관사로 찾아온 유원식 대령이 “이제 혁명을 해야 할 때입니다”라고 하자 “혁명이 됐는데 또 무슨 혁명을 하자는 거냐”고 핀잔을 주었다.
 
 박정희는 이승만 하야 직후 황용주를 만나자 대뜸 “아이고, 학생놈들 때문에 다 글렀다”고 했다. 황용주는 놀리듯이 말했다고 한다.
 
 “봐라, 쇠뿔도 단김에 빼라카니.”
 
 소설가 이병주가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있던 <국제신보>의 4월27일자 사설은 ‘李大統領(이대통령)의 悲劇(비극)! 그러나 조국의 운명과는 바꿀 수 없었다’는 제목이었다.
 
 <지금 이 대통령의 功罪(공죄)를 논할 시기가 아니다. 功(공)을 枚擧(매거)하기 위해서도 신중해야 하며 죄를 따지기 위해서도 신중해야 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어쩌면 평생을 조국광복에 바친 지도자이며 이 나라의 元首(원수)가 이처럼 증오의 대상이 되었는가에 있다. (중략)
 
 面從腹背(면종복배), 또는 피동적이었든 해방 전, 해방 후 이날까지 위대한 지도자로서 존경한 그분에 대해서 설혹 본심의 발로일지언정 결정적인 반대 감정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건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저를 사랑한다. 그러나 로마를 더 사랑한다. 브루투스는 시저를 죽이고 나서 그의 소신을 이렇게 피력했지만 대의와 명분, 정의와 이상에 卽(즉)한 百千(백천)의 이론을 준비해도 우리들의 감정으로서는 넘어설 수 없는 딜레마가 있다. (중략)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항거한 젊은 학생들과 항거를 당한 이승만 박사가 결코 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인식해야 하고 끝내 그렇게 되도록 彼此(피차)의 성의가 있어야 되리라고 믿는다>
 
 며칠 뒤 박정희는 이병주, 황용주와 어울린 술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두 주필의 사설을 읽었는데 황용주의 論斷(논단)은 명쾌한데 이 주필의 논리는 석연하지 못하던데요. 아마 이 주필은 情(정)이 너무 많은 것이 아닙니까.”
 
 “밉기도 한 영감이었지만 막상 떠나겠다고 하니 언짢은 기분이 들데요. 그 기분이 논리를 흐리멍덩하게 했을 겁니다.”
 
 “그거 안 됩니다. 그에겐 동정할 여지가 전연 없소. 12년이나 해 먹었으면 그만이지 四選(사선)까지 노려 부정선거를 했다니 될 말이기나 하오? 우선 그, 자기 아니면 안 된다는 사고방식이 돼먹지 않았어요. 후세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도 春秋(춘추)의 筆法(필법)으로 그런 자에겐 筆誅(필주)를 가해야 해요.”
 
 이에 대해서 이병주는 “평생을 조국독립을 위해 바친 前功(전공)을 보아서도 이승만을 가혹하게 비판할 수 없었다”는 심경을 피력했다. 박정희의 반응은 차가웠다(이병주의 《대통령들의 초상》).
 
 “미국에서 교포들을 모아 놓고 연설이나 하고 미국 대통령에게 진정서나 올리고 한 게 독립 운동이 되는 건가요? 똑바로 말해 그 사람들 독립 운동 때문에 우리가 독립된 거요? 독립 운동했다는 건 말짱 엉터리요, 엉터리….”
 
 황용주가 끼어들어 “그렇게 말하면 쓰나?” 하고 나무랐다.
 
 “물론 엉터리 운동가도 더러 있었겠지. 그러나 싸잡아 독립 운동한 사람을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돼. 진짜 독립 운동한 사람들도 많아. 그 사람들 덕분에 민족의 체면을 유지해 온 것이 아닌가.”
 
 “민족의 체면을 유지했다고?”
 
 박정희는 흥분했다.
 
 “해방 직후 雨後竹筍(우후죽순)처럼 정당이 생겨나고 나라 망신시킨 자들이 누군데, ‘독립 운동 했습네’하고 나선 자들이 아닌가.”
 
 “그건 또 문제가 다르지 않는가.”
 
 “무슨 문제가 다르다는 기고. ‘독립 운동을 합네’하고 모두들 당파 싸움만 하고 있었던 거 아이가. 그 습성이 해방 직후의 혼란으로 이어진 기란 말이다. 그런데도 민족의 체면을 유지했다고?”
 
 “그런 식으로 문제를 세우면 되나, 내 말은….”
 
 이때 同席(동석)했던 박정희의 대구사범 동기 조증출이 “느그들 이랄라면 나는 가겠다”고 일어서는 바람에 논쟁이 중단되었다. 이병주는 이런 자리에서 있었던 황용주와 박정희의 논쟁 중 다른 한 토막을 기록했다.
 
 <박정희가 일본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5·15 사건, 2·26 사건을 들먹이면서 찬사를 늘어놓자 황 주필이 “너, 무슨 소릴 하노. 놈들은 천황 절대주의자들이고 케케묵은 국수주의자들이다. 그놈들이 일본을 망쳤다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가”라고 반박했다.
 
 “일본의 군인이 천황 절대주의자 하는 게 왜 나쁜가. 그리고 국수주의가 어째서 나쁜가.”
 
 황용주가 ‘그것은 고루한 생각으로서 세계 평화에 해독이 된다’고 반박하자 박정희는 열을 올렸다.
 
 “그런 잠꼬대 같은 소릴 하고 있으니까 글 쓰는 놈들을 믿을 수 없다. 일본이 망한 게 뭐꼬. 지금 잘해 나가고 있지 않나. 역사를 바로 봐야 해. 패전 후 얼마 되지 않아 일본은 일어서지 않았나.”
 
 “국수주의자들이 망친 일본을 자유주의자들이 일으켜 세운 거다.”
 
 “자유주의? 자유주의 갖고 뭐가 돼. 국수주의자들의 기백이 오늘의 일본을 만든 거야. 우리는 그 기백을 배워야 하네.”
 
 “배워야 할 것은 기백이 아니고 도의감이다. 도의심의 뒷받침이 없는 기백은 야만이다.”
 
 “도의는 다음 문제다. 기백이 먼저다.” >
 
 시위대와의 결별
 
 <국제신보> 편집국장 겸 주필이던 이병주는 5·16 뒤 군사 정권에 의해서 옥살이를 하게 되는데 집권하기 전인 4·19 전후의 박정희 모습을 실감 있게 묘사했다(<월간조선> 1991년 7월호에 실렸던 ‘대통령들의 초상’). 그가 타계하기 전에 쓴 이 글을 통해서 떠오르는 박정희의 이미지는 ‘청렴한 唯我獨尊(유아독존)’이다. 부산일보 주필이자 대구사범 동기인 황용주가 군수품을 횡령한 죄로 군법회의에 넘어간 한 장성을 화제로 올리면서 개탄을 하니 박정희는 어깨를 펴면서 결연하게 말하더란 것이다.
 
 “여기 도의적으로 말짱한 사람이 있어. 걱정하지 마.”
 
 박정희는 좀처럼 자신의 청렴함을 드러내거나 부하들에게 강요하지는 않았으나 강한 自意識(자의식)을 갖고 있었음은 확실하다. 이런 자의식을 품고 있었기에 그는 많은 상급자들을 속으로는 경멸하고 있었고 상관들은 금전적인 면에서 약점이 없는 박정희를 어렵게 생각하고 있었다. 박정희가 1軍司(군사) 참모장일 때 그 밑에서 참모로 일했던 朴敬遠(박경원·소장 예편)은 “그분은 총으로 혁명한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 혁명한 사람이다”라고 했다.
 
 박정희가 혁명군을 조직한 것은 그가 實兵(실병)을 지휘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직할 병력이 1개 소대도 안 되는 2군 부사령관으로 있을 때였다. 자신의 직위가 아니라 자신의 인격을 통해서 많은 부하들을 死線(사선)으로 끌고 갈 수 있었던 비결의 한 핵심이 청렴이었다. 이 무렵 박정희를 가깝게 모신 한 인사는 익명을 조건으로 하여 이런 증언을 했다.
 
 어느 겨울날 신당동 자택으로 찾아가니 육영수가 가족들과 한방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연탄이 모자라 한 방에만 불을 넣는다’는 설명이었다. 이 장교는 다음날 연탄을 한 차 사서 신당동으로 가져갔다. 연탄을 부리고 있는데 박정희가 나타났다. 평소보다 일찍 퇴근하는 바람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박정희는 화를 냈다.
 
 “이놈아, 누구한테 뇌물을 받아먹고 이런 짓을 하나. 이 돈 어디서 났어?”
 
 이렇게 혼을 내더니 “내일 군법회의에 넘기겠어”라고 호통을 쳤다. 이때 육영수가 남편에게 “당신은 뭘 해주셨나요”라며 대들었다. 입장이 난처해진 박정희는 부하를 보고 다시 한 번 “넌 내일 군법회의야”라고 말하고는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박정희의 이런 청렴성은 그의 생리이기도 하지만 야망을 품은 사람의 의도적 결심이었다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4·26 이승만 하야 직후 이병주는 황용주와 박정희 사이에 이런 대화를 목격했다고 쓰고 있다. 황용주가 “통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군인들이 정권을 잡고 즉시 북쪽의 김일성을 판문점으로 불러 당장 휴전선을 틔워 한 나라를 만들어 버리는 일이다”라고 했다. 박정희는 얼굴이 일순 핼쑥해지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너 무슨 말을 해. 위험천만한 놈이로구나. 너 같은 놈하고는 술자리 같이 못 하겠어”라면서 방문을 걷어차 열곤 돌아가 버리더란 것이다. 이병주가 모르고 있었지만 이때 황용주, 박정희 두 사람은 이미 쿠데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박정희의 이 날 행동은 虛(허)를 찔린 사람의 반사적 행동이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이승만 하야 뒤부터 학생들의 시위에 대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승만 하야 뒤의 시위는 그 전의 시위와는 성격이 달랐다. 부정 선거 규탄 시위가 ‘어용 총장, 교장, 교수, 교사 물러나라’는 식의 학내 사태로 변질되었다. 4·26 전에 ‘용감한’ 시위를 못 했던 학교에선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도 데모를 해야 했다. 그때 중학교 2학년생이던 기자도 무엇을 위한 데모인지도 모르고 상급생이 이끄는 대로 시내로 나가 시위 행진을 했다. 박정희 소장의 계엄군이 엄호하는 가운데.
 
 이 시점부터 박정희와 학생들의 蜜月(밀월)이 끝나고 사이가 벌어지게 된다. 박정희는 反이승만이란 점에서는 학생들의 시위에 공감했으나 이승만이 물러난 뒤의 무질서와 난동을 용인할 생리도 입장도 아니었다. 박정희가 학생시위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상을 굳히게 된 것도 4·26 후부터였다.
 
 4월27일 밤 부산에선 전 농림부 장관 梁聖奉(양성봉), 錦城(금성)중고교 교장 禹德俊(우덕준)의 집을 군중이 습격하여 군인들이 공포를 쏘아 해산시켜야 했다. 경남 의령에서는 군중이 자유당 간부들 집을 파괴하고 전기회사를 습격, 送電(송전)을 중단시켰다.
 
 4월28일 박정희 부산 지구 계엄사무소장은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트럭 100대를 뺏어 타고 마산, 밀양, 창녕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형무소와 경찰서를 습격하고 약탈을 일삼던 난동자 86명을 붙잡아 왔다. 39사단 병력이 출동하여 이들에 대한 ‘소탕전’을 벌였다고 한다.
 
 박정희 소장은 4월28일 계엄사무소에서 학생, 언론인, 군인 대표들을 초청하여 시국간담회를 열었다.
 
 학생들은 이런 말들을 했다.
 
 “우리는 부정선거 원흉과 부패한 공무원부터 拔本塞源(발본색원)해 주기를 바랍니다.”
 
 “군인들 가운데도 부정선거에 앞장선 인물들이 많은데 이런 사람들을 자율적으로 처단하지 않으면 국민을 떳떳하게 대할 자격이 없습니다.”
 
 “때 묻은 기성세대는 물러나고 혁명주체인 학생들이 정권을 잡아야 합니다.”
 
 한 중견 언론인이 일어나더니 “학생들은 정권을 잡으러 데모했나. 4·19에 양아치가 앞장섰으니 그러면 양아치가 정권을 잡으란 말인가. 남들이 다 해놓은 다음 체면치레한다고 데모한 주제에 큰 소리를 치는 것은 부끄러운 이야기다”라고 나무랐다. 다혈질인 부산일보 김종신 기자는 취재하러 들어왔다가 열이 나서 일어났다.
 
 “지금은 무정부 상태입니다. 불량배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거리를 휩쓸면서 방화, 강탈을 일삼고 있습니다. 차제에 군인들이 나서서 민족의 앞날에 참신한 바람을 불어넣어야 합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 黃弼周(황필주) 참모장이 일어서더니 김 기자를 반박했다.
 
 “군인이 정치에 발을 들인다는 것은 중이 고기 맛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벽에 붙은 빈대가 남지 않아요.”
 
 김종신은 이 말에 다시 반박하여 두 사람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박정희는 눈을 지그시 감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김종신이 보니 참모장의 말에 못마땅한 표정이었다고 한다.
[ 2011-01-23, 1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