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 전 誤報를 재탕한 SBS, 장준하 失足死 목격자를 또 다시 犯人으로 몰다!
선진국에서 SBS처럼 생사람을 잡는 명예훼손 보도를 하면 문을 닫을 정도의 배상을 해야 한다. 한국에선 그게 이뤄지기 어렵지만 그래서 天罰이란 게 존재한다.. "直筆은 사람이 죽이고 曲筆은 하늘이 죽인다."
趙甲濟   
 요사이 또 張俊河씨의 명백한 추락사에 의혹을 제기하는 세력들이 나타나고 있다.
 좌파정권 시절 의문사 위원회가 두 차례나 조사한 뒤 타살혐의를 찾지 못하였다고 판단, 종결지은 사건을 선거를 앞두고 3탕, 4탕한다. 어제 저녁엔 SBS가 또 장준하 실족사 목격자 김용환씨를 사실상 범인으로 단정하는 프로를 내보냈다.
 
 19년 전에도 SBS는 장준하의 죽음을 타살로 단정하였었다. 수많은 왜곡으로 위험천만한 결론을 내렸지만 의문사 위원회조차도 '증거 없음'이란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으니 SBS는 이미 한번 명백한 오보와 명예훼손을 저지른 전과자인 셈이다. 어제 SBS는 과거의 오보에 대하여 사과도 하지 않고 또 다른 추측보도로 金씨를 몰아붙였다.
 
 거짓 폭로에도 윤리가 있다. 그만큼 조사하고 취재하였다면 누가(적어도 어느 기관이) 누구를 시켜 어떻게 장준하씨를 죽였다는 정도의 각본은 내어놓아야 할 것 아닌가? 죽음엔 항상 따라다니는 의문점들만 잔뜩 나열한 뒤 김용환씨를 사실상 살인범으로 단정한 SBS는 국민재산인 공중파를 관리할 자질이 없다. 공중파 방송이 의심만으로, 그것도 왜곡된 추리를 근거로 한 교육자를 살인범으로 단정하도록(그것도 두 번이나) 방치한다면 SBS는 공동체를 찌르는 흉기가 될 것이다.
 
 의혹제기 프로 진행자는 여러 번 '벽 같은 것을 느낀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는데, 그 벽이란 '진실의 벽'일 것이다. 아무리 추리소설을 써 보아도 김용환씨의 진실을 뒤집을 수는 없다.
 
 
 *5.16 군사혁명을 적극 지지한 적도 있는 장씨를 박정희 정권이 왜 죽이려 하였을까? 더구나 당시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이 政敵을 암살한 적은 한번도 없는데 왜 굳이 장준하를?
 *암살을 하려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지 왜 여러 사람들과 함께 山行하는 공개된 상황을 선택하였을까? 더구나 등산과 下山 코스는 장준하가 선택한 것이지 누가 유도하였다는 증거가 없다.
 *장준하 추락사 사건을 조사한 경찰이나 검사 그 어느 누구도 누군가로부터 간섭이나 압력을 받았다는 이가 없다. 유족들이 타살이라고 당시에 주장하였다는 기록도 없다.
 *SBS 진행자는 일행이 점심을 준비하는 것을 알고 있을 장준하씨가 가져간 샌드위치를 먹은 것도 이상하다고 억지를 부린다. 등산중 간식을 먹는 것도 의문점이라니?
 *김용환씨의 사건 前後 생활은 반듯한 교육자의 典型이다. 이런 사람을 살인범으로 단정하려면 누구로부터 사주를 받았다는 정도의 소설이라도 써야 할 것 아닌가?
 *사망 당시의 검안 소견(추락사)을 믿지 않고 37년이 흐른 뒤 파낸 유골의 사진을 놓고 '살인'이라고 주장하는 무모함은 언론의 領域(영역)을 떠난 행위이다. 막장 드라마의 본산인 SBS는 모든 걸 드라마화하는 체질이 있는가?
 
 김현희 가짜몰이와 광우병 선동엔 MBC가 앞장서더니 김용환 살인범 몰기엔 SBS가 19년만에 다시 나섰다. 19년 전엔 월간조선의 검증 취재에 걸려 SBS의 오보가 증명되었는데, 이번은 SBS의 악랄한 마녀사냥이 누군가에 의하여 응징당할 것 같은 느낌이다.
 
 수십 명의 정형외과 의사들에게 자문하고 컴퓨터 시뮤레이션을 하여 시청자들을 현혹하려 했지만 김용환씨의 '추락하는 순간을 내가 목격하였다'는 증언을 뒤집을 증거는 되지 못하였다. SBS의 잡다한 추리를 종합하면 장준하는 지름 6cm되는 망치에 머리를 딱 한번만 가격당한 뒤 즉사했고, 범인이 屍身을 짊어지고 그 험한 절벽을 내려오든지 허공으로 던져서 절벽엔 닿지 않고 땅바닥에 떨어지게 했다는 이야기이다. SBS는 다른 용의자를 대지 못하였으니 김용환씨가 그렇게 한 뒤 일행에게 알린 게 된다.
 
 登山과 下山은 장준하가 선택한 코스였다. 범인이 미리 길목에서 기다릴 수도 없었다는 이야기다. 김용환씨가 그 큰 망치를 갖고 다녔다는 증언이 없으니 그는 장준하를 따라가면서 그 산속에서 범행에 썼다는 망치를 어떻게 구할 수 있었나? 장준하가 그 코스로 올 것을 예측하고 어디에 숨겨놓았다는 이야기인가? 귀신이나 영화속의 수퍼맨이 아니면 할 수 없는 '神技의 살인' 시나리오를 그럴 듯하게 구성, 시청자를 홀린 SBS이다. 국민재산인 공중파를 악용, 한 교육자를 살인범으로 몰기 위하여 19년에 걸쳐 세 번(1993년에 2회, 이번에 1회)이나 드라마 수준의 추적물을 만든 것이다.
 
 TV가 발명된 이후 한 사람을 범인으로 몰기 위하여 이렇게 많은 정치인과 기자들과 국가기관이 동원된 적이 없을 것이다. 김용환씨는 1993년 SBS와 정치인들에 의하여 한 번, 좌파정권의 의문사委에 의하여 두 번, 2012년에 정치인과 SBS에 의하여 네번째로 마녀사냥을 당하고 있다.
 
 이럴 때 위안이 되는 말이 있다.
 "直筆은 사람이 죽이고 曲筆은 하늘이 죽인다."
 
 선진국에서 SBS처럼 생사람을 잡는 명예훼손 보도를 하면 문을 닫을 정도의 배상을 해야 한다. 한국에선 그게 이뤄지기 어렵겠지만 그러한 때 天罰이란 게 존재한다. 월간조선 취재팀이 19년 전에 추적하였던 SBS 오보 과정을 재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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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月刊朝鮮 1993년 5월호
 
  「그것이 알고 싶다」프로의 「張俊河 타살 단정」, 그 취재과정 정밀 추적
 
  SBS의 위험천만한 誤報
 
  「결정적 증언」이란 것도 수사에 아무 상관이 없는 군법무관 출신 변호사의 잡담을 몰래 녹음, 방영한 것이었다!
 
  月刊朝鮮 특별취재반
  崔壯源, 李政勳, 金演光, 禹炳賢 기자
 
  "張俊河는 타살됐다"
 
  "이제 18년 전에 일어났던 이 사건은 단순한 변사사건도 아니고, 더 이상 의문사도 아닙니다. 명백한 타살 사건입니다"
 
  지난 3월28일 밤 서울방송(sbs) '그것이 알고싶다'는 재야인사 張俊河의 죽음 제2부 '거사와 암살?' 편에서 이렇게 결론내렸다. 18년 동안 실족사와 의문사의 엇갈린 주장 소에서 논란을 빚어왔던 張俊河씨의 사인을 한 방송사가 자신있게 타살이라고 못박은 것이다.
  이 보도가 나가자 세상은 시끄러워졌다. 민주당에서는 즉각 張俊河 선생 사인 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韓光玉 의원)를 구성, 조사 활동에 들어갔다. 언론은 일제히 '張俊河 타살 의혹-18년 만에 새 사실 공개' 등의 제목으로 보도하는 등 관심을 보였다.
  동아일보는 방송 보도가 나간 뒤 '張俊河씨 사인 10가지 의혹'이라는 제목으로 민주당 조사위의 주장을 2면 박스기사로 실었고 다음 날에는 1면 횡설수설란에서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보도를 되풀이했다. 한겨레신문은 해설박스 기사와 사설을 통해, 국민일보는 사회면 기사와 박스 기사를 통해 서울방송의 보도내용을 소개하고 사인에 의혹이 있다고 보도했다.
  언론사 방송담당 기자들은 너나없이 이 프로가 '다큐멘터리의 진수를 보여준 작품'으로 극찬했다. 중앙일보 등 몇몇 신문만이 프로그램에 대한 칭찬과 함께 '다만 아쉬운 것은 명쾌하게 진실을 밝히지 못한 채 타살이라고 단정한 것이다'라는 단서를 달아 물증을 제시하지 못한 미흡함을 지적했을 뿐이다.
  이 프로를 제작한 서울방송 기획특집부의 洪淳澈 프로듀서(38)는 이 방송사가 자체 선정한 작품상을 수상했다. '그것이 알고싶다'는 '재야인사 張俊河의 죽음' 1부가 방송된 3월14일과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을 다룬 3월21일의 보도로 인해 그동안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시청률 1위를 지켰던 문화방송의 '제3공화국'을 제치고 시청률 44%로 1위에 나섰다(서울방송 3월29일자 사보).
  공교롭게도 두 방송사의 경쟁 프로그램이 모두 朴正熙 대통령과 직간접으로 연결된 것이다.
  화제를 모은 만큼 3월14일 밤 방송된 1부 '암살인가, 실족사인가'는 매우 치밀하게 만든 작품이었다는 것이 이 프로를 본 대부분의 반응이었다. 시청자의 입장에서 텔레비전을 본 우리 취재팀도 '張俊河씨는 타살됐구나'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텔레비전이라는 영상매체의 특성을 유감없이 발휘해 사고 현장을 재현하고 실측을 통해 등반 시간도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을 설명했다. 추락 현장에서의 마네킹 실험을 통해 실족했을 경우 상처가 어떻게 생기는지를 보여주었다.
  가족들의 요구로 몰래 검안을 했던 의사의 증언 및 시신 사진과 목격자 金龍煥씨(58)가 당시 가족에게 들려준 녹음 테이프 등을 새로 발굴해냈다.
  1부에서 타살의 심증을 강하게 암시한 채 3월28일 2부 '거사와 암살?' 편이 방송됐다. 제목에서부터 타살을 전제한 2부 방송은, 1부가 설득력있는 상황 재연 및 새로운 증언, 증거 제시로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던 것에 비추어 뭔가 결정적인 타살의 증거를 제시할지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대단한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2부는 그런 기대와 어울리지 않게 실망스럽게 진행됐다.
 
  김수환 추기경이 한 역할
 
  방송내용은 거의 대부분 '張俊河는 왜 타살되어야만 했는가'를 밝히기 위해 김수환 추기경과 김대중씨, 홍남순 변호사, 백기완, 이부영씨 등 당시 張俊河씨와 가까웠던 인사들의 증언을 통해 張씨가 당시 모종의 거사를 계획하고 있었다는 내용을 설명하고 타살의 정황증거와 심증을 다져가는 것이었다.
  특히 김수환 추기경은 "張선생이 돌아가시기 며칠 전 나를 찾아왔는데 마치 하직 인사를 하러 온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종교계 최고 지도자의 이 말은 일부 시청자들에게 張씨가 타살되었다는 심증을 주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날 서울방송측이 주장한 정황이란 이런 것들이었다.
  '張俊河씨가 당시 뭔가 중대한 계획을 하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 주요 재야인사들과 협의를 하고 있었다. 계획의 핵심내용은 張俊河씨 혼자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것은 성명서 발표의 수준을 뛰어넘는 거대한 시민 불복종운동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가 국회의원 당시 국방분과위원회 활동을 통해 군부로부터 양심적인 정치인으로 호감을 받고 있었으며 만약 모종의 기사를 계획하고 있었다면 군부의 양심적인 세력도 배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朴정권에게는 매우 심각한 위협이었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여기서 또 하나 살펴볼 것은 독립운동가 張俊河와 일본 관동군 출신의 朴正熙라는 두 사람의 숙명적인 갈등관계이다…'
  제작진이 갖고 있는 타살의 심증을 굳혀가기 위한 듯, 정황증거를 설명하면서'만일' '…가능성도 있다' 등의 단어를 동원해 대부분의 내용이 추측으로 시작해 추측으로 끝나고 있었다. 특히 '군부의 양심적인 세력도 거사에서 제외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대목은 지나친 비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군 법무관 출신의 '결정적 증언'
 
  결정적인 증언은 방송이 끝나갈 무렵 나왔다. 진행자 문성근씨는 "취재가 끝나갈 무렵, 싱가포르에 살고 있는 장남 豪權씨로부터 우리에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라고 말하면서 豪權씨가 서울방송에 전한 제보내용을 그의 전화목소리로 들려주었다.
  張豪權씨:"저는 텔레비전을 보지 못했는데 1부가 방송된 뒤로 생각되는데 서울에서 이상한 전화가 걸려왔어요. 당시 군법무관을 만나면 아버님 사건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였어요"
  문씨는 이 전화내용을 들려준 뒤 "우리는 지금까지 사건의 정황들을 점검해보면서 타살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심증을 굳혀왔다. 만일 豪權씨가 받은 제보내용이 거짓으로 판명된다 하더라도 우리로선 처음 찾게 된 '확증의 단서'였다"고 말했다.
  문씨는 "우리는 그 법무관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건에 대한 인터뷰를 거절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랜 고심 끝에 그와 나눈 대화내용을 공개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라고 말하고 증언자의 신원을 감추기 위해 목소리를 변조한 녹음테이프를 틀었다.
  "張俊河 선생 때문에 왔지. 난 할 얘기 없어. 일체 할 얘기 없어. 나중에 나중에 내가 죽을 때 회고록 쓸게. 암만 어떻게 해도 입 안 열테니까. 아직은 때가 아니란 거지. 직책상 가긴 했는데, 그때가 정말 절벽앞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주던 시절이었거든. 아주 콱 막혀가지고. 그 무렵에도 내가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분한테 가서 아주 답답한 마음을 하소연했어. 내가 법률 공부해 가지고 이런 식으로 권력의 주구 노릇을 해야 하느냐고.
  …감시하고 일시키고, 돈으로 떼우고 부려먹고 감시하고, 그래놓고는 또 당근주고. …내가 수사했을 때는 모든 자료를 양심껏 다 붙여놨으니까. 그 기록 정부 문서보관소에 다 있을 걸. …변사체 지휘보고도 어설프게 하고. …나로서는 책임있는 답변도 아닐 것이고 안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조금…"
  녹음테이프에 담긴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방송은 법무관의 증언 직후 張俊河씨가 타살됐다는 결론을 내리고 프로그램을 끝냈다. 누가 봐도 군법무관 출신의 증언이 타살 단정의 근거가 되었음을 알게 해주는 논리전개였다.
  취재팀은 서울방송의 두 차례에 걸친 보도를 보고 사건의 진실을 밝혀보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우선 방송 비디오를 구해 보도 내용을 다시 확인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3월14일의 첫 방송은 이렇게 시작했다.
 
  타살을 전제로 시작한 느낌
 
  "우리는 오늘 오래 전에 일어났던 변사 사건을 다루려고 합니다. 18년 전에 일어났던 이 사건에 대해 어렴풋이 기억하고 계신 분이라도 아마 사건 내용을 정확히 알고 계실 분은 많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검찰은 사건이 일어난 지 단 사흘만에 현장검증도 없이 서둘러 단순변사로 발표하고 수사를 종결했고 사건에 대한 보도는 그후 거의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건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張俊河라고 하는 한 재야인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등산을 떠났다가 발을 헛디뎌 벼랑에서 추락해 숨졌다는 것입니다. 張俊河씨의 죽음이 의문사라고 믿어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검찰이 석연치 않게 갑자기 서둘러 사건을 덮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사건의 진정한 종결을 바라고 있습니다.
  시작 전에 먼저 약속할 게 있습니다. 어떠한 선입견이나 편견도 버리고 단순한 변사사건을 다루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행자 문성근씨의 말과 달리 첫 부분부터 취재팀은 '이 프로가 타살을 전제로 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사건 취재를 해본 기자라면 다들 느끼는 일이지만 사건 기사에서 금기시되는 것이 기자 본인의 생각이나 어느 한쪽의 주장만을 담은 주관적 표현이다. 본인의 의지가 강하게 들어가다 보면 오히려 기사의 신뢰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알고싶다' 진행자인 문성근씨는 단순한 변사사건을 다루므로 어떠한 선입견도 피하고자 한다고 말하면서 "단 사흘만에" "…도 없이" "석연치 않게" "갑자기 서둘러" 등의 단순 변사가 아니라는 암시를 주는 수식어를 말 그대로 '마구' 동원함으로써 사실상 타살을 전제로 하고 시작한다는 느낌을 갖게 했다.
  이런 느낌을 갖고 취재를 위해 다시 본 '재야인사 張俊河의 죽음'은 처음 봤을 때와 달리 어딘가 모르게 허술했다. 타살이라는 결론을 내리기엔 아무리봐도 결정적인 단서가 없었던 것이다. 유일하게 관심을 모은 것은 위에 지적한 2부 방송이 끝날 무렵에 소개된 법무관 출신의 증언이었다.
  방송 내용을 확인한 뒤 취재팀은 우선 이 프로를 제작한 서울방송의 洪淳澈 프로듀서를 찾아가 취재 도움을 받기로 했다. 洪프로듀서에게 서울방송의 보도를 토대로 張俊河씨 죽음의 실체적 진실을 밝혀보고 싶다고 취재 목적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이 사건과 관계된 사람들의 연락처와 프로그램 대본, 법무관의 증언내용 요약본 등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법무관에 대한 것은 일체 가르쳐주지 않았다. "張俊河씨 죽음의 비밀은 다 풀린 게 아니라 이제 시작에 불과하며 그 법무관이 스스로 입을 열어야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있을 텐데 언론에서 그를 다그치면 오히려 비밀이 묻혀버리고 만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타살 결론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럴 법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張俊河씨가 타살됐다고 마침표를 찍을 수 있게 한 사람이 법무관 출신인데, 사건의 비밀을 쥐고 있는 몇 안되는 사람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람에 대한 취재가 벽에 부딪혔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당 프로듀서를 만난 김에 취재과정에 있었던 궁금한 것을 물었다.
  洪프로듀서는 "처음 이 취재를 시작할 때 거듭 냉정하고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시작했다"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실 여부를 떠나 張俊河는 타살되었다고 믿고 있어서 나 역시 혹시 내 마음 속에 있을지 모를 타살에 대한 선입견을 배제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개인적으로는 처음 '그것이 알고싶다' 프로를 시작할 때부터 정치 미스터리들을 다루고 싶었고 이것이 구체화된 것은 지난 겨울"이라고 얘기했다. 그는 "우리가 한 작업은 張俊河씨의 죽음의 실체를 밝히는 첫 걸음에 불과하다"며 타살임이 명백하게 밝혀졌으므로 이제 책임있는 기관에서 그 구체적 진실을 밝힐 차례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취재를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이 18년 전의 일이어서 자료와 물증, 증언을 확보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또 사건과 관련된 사람을 찾는 자체가 힘들었고 찾더라도 다들 얘기하지 않으려는 데다 18년 전의 일을 시간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것도 거짓말이기 때문에 증언 내용 중에서 공통분모를 찾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고 했다.
  그런데, 張俊河씨 죽음에 군법무관은 왜 등장했을까. 과연 그는 張俊河씨의 죽음의 비밀을 밝힐 수 있는 인물인가. 洪프로듀서는 이에 대해 "당시는 비상군제였다. 형식적으로는 검찰에서 발표하고 실제 수사는 비상군제에서 한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더 이상의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으려 했다.
  타살이라고 못박은 것은 좀 성급한 일이 아니었느냐는 물음에 그는 "프로그램만 보면 다소 그런 점도 없지 않다. 그러나 미처 확인을 하지 못해 방송에는 담지 못한 것을 포함해 전체를 다 살펴본 나로서는 타살이라고 결론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타살일지 모를 때는 '타살일지 모른다'고 결론지어야 하지만 타살에 대한 확신을 갖고도 '…일지 모른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건 또 다시 18년 전으로 돌아가는 일이고 그렇다면 아예 방송을 하지 않은 것만 못하다는 생각이었다. 그 동안의 취재를 통해 타살이라고 확신한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행간을 읽어 보면 타살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체불명의 목격자는 교사
 
  洪프로듀서를 만나고 온 날 저녁 취재팀은 생각지 않은 소득을 얻을 수 있었다. 조선일보를 포함해 몇몇 언론에서 張俊河 사건을 취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조선일보에서 그 취재를 맡은 사회부 禹炳賢 기자는 법무관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禹기자를 만나 張俊河 취재가 어느 정도 진행됐는지를 확인하는 것으로 취재를 시작했다. 그러나 취재의 실마리를 풀었다는 생각으로 그의 얘기를 들으려던 기자는 처음부터 엉뚱한 말을 들어야 했다.
  "아무래도 조작된 것 같아요"
  禹기자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서울방송이 타살로 결론을 내리기 위해 몇 가지 사실을 조작한 것 같다는 것이었다. 법무관과 목격자 金龍煥씨를 만나봤는데 법무관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펄쩍 뛰고 서울방송이 직업도, 사는 곳도 밝히지 않은 목격자 金龍煥씨는 현직 교사로 신분도 확실한데다 사는 곳도 선대부터 계속 살아온 곳이어서 처음엔 어리둥절했다는 것이다. 그런 말을 처음 듣는 기자도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서울방송은 그가 한때 張俊河씨의 지역구인 동대문을 지구당에서 일을 도운 사람으로, 그동안 연락이 없다가 3년만에 난데없이 하필이면 사고 당일 나타났다고 방송했었다. 그런데 그 신원이 불확실하다는 사람이 사고가 났던 18년 전 그 당시부터 지금 현재까지도 같은 고교에서 윤리와 정치경제를 가르치고 있는 교사다.
  그렇다면 서울방송은 왜 金龍煥씨의 직업을 밝히지 않았을까.
  洪淳澈 프로듀서는 "만약 직업을 밝혔을 경우 국민정서상 현직 교사가 그런 혐의를 받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사람들, 특히 학생들이 그 프로를 봤을 경우 교사라는 이미지가 어떻게 될지 나는 책임질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金龍煥씨가 범인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나는 그가 살해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사람도 피해자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직업을 감춘 것이다. 그의 이름은 이미 75년에 나왔기 때문에 감춰줄 필요가 없었지만 교사라는 직업과 이름을 연결시켜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말에는 수긍할 수 없었다. 방송에서 金龍煥씨는 전혀 소식이 없다가 3년만에 느닷없이 타나난 의문의 인물로서 張俊河씨를 등산길에 유인한 사람인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방송에서는 또 金씨가 말한 등산 시간 등의 내용이 전혀 맞지 않으며 등산을 가지 않으려는 張俊河씨를 억지로 버스에 태운 사람이 金龍煥씨일지 모른다는 진행자 문성근씨의 설명을 통해 그의 인격에 이미 심대한 타격을 주었으면서 새삼스럽게 "그가 피해자일지 모르고 교사에 대한 국민정서를 생각해 직업을 감췄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책임없는 말을 몰래 녹음해서 방송하다니… 나쁜 사람들이다"
 
  오히려 의혹의 대상이 되고 있는 金龍煥씨의 직업이 교사이며 그것도 윤리교사라는 것을 밝혔을 때 국민들이 '설마 교사가?'라는 정반대의 인식을 해 극적 효과가 반감될 것을 우려한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를 정말 보호하려고 했다면 직업을 명시하고 그가 피해자일지 모른다는 내용을 프로그램에 넣었어야 마땅했다.
  이런 의문을 갖고 4월2일 조선일보 禹기자가 일러준대로 법무관과 金龍煥씨를 찾아갔다. 우선 법무관부터 만나기로 했다. 그는 현재 충남지방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李根一씨(51)였다. 마침 계류중인 재판변론 때문에 법원에 있던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벌컥 화를 냈다.
  기자들과는 말하지 않겠다며 말을 건네는 것조차 막았다. 그런 그를 설득해 張俊河씨와의 관계에 대해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李변호사가 張俊河씨 사건에 개입한 것을 서울방송을 통해 확인했다. 개입하게 된 경위를 설명해달라.
  "터무니없다. 나는 당시 강원도 원통에 있는 전방 12사단의 법무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張俊河씨 사건에 대해 알 만한 위치가 아니다"
  -그럼 보도된 육성 증언은 어떻게 된 것인가.
  "74년 張俊河씨가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구속됐을 때 나는 육군본부에 근무하다가 국방부에 차출돼 비상군재 검찰관 11명중의 한 명으로 근무했었다. 그후 74년 민청학련사건도 비상군재에 있으면서 처리했다. 서울방송 취재팀이 비상군재에 대해 모르는 것 같아 그 일을 설명해줬을 뿐이다. 나는 '사상계' 시절부터 張俊河씨를 존경했다. 또 張俊河 선생은 내 친구의 6촌 형이다. 그래서 張선생이 잡혀왔을 때 괴로웠다. 당시는 정의감이 앞서던 젊은 시절이어서 그 시절을 절벽 같던 시절이라고 묘사한 것뿐이다"
  -그래도 방송된 내용을 들으면 李변호사가 張俊河씨 사건과 깉은 관계가 있는 것처럼 들리는데.
  "그렇지 않다. 내가 張俊河 사건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사건 한참 뒤인 10월초쯤 존경하던 사람이 죽은 곳이 어딜까 하는 호기심에 사고 현장에 한번 가본 것밖에 없다. 서울방송 제작진이 나를 찾아왔길래 처음엔 깜짝 놀랐다. 기왕 온 손님이어서 한 10분 정도 의자 턱에 걸터앉아 웃으면서 잡담하듯 얘기했다. 그들에게 그 시대가 암울했었다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긴급조치와 민청학련 사건 등 내가 처리했던 사건을 얘기했을 뿐이다"
  -李변호사가 말한 내용이 보도된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나.
  "방송 며칠 전 洪淳澈 프로듀서가 전화를 걸어와 방송에 내겠다고 해 화를 내고 하지 말라고 했더니 '죄송하다. 목소리를 녹음했다'고 말했다. 책임없는 말을 몰래 녹음이나 해서 선정적으로 방송하다니 언론인의 직업 윤리로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나쁜 사람들이다"
 
  "18년 전에 할 얘기 다했다"
 
  이번에는 취재팀이 당황했다. 구체적으로 사실이 조작됐다면 이것은 차원이 다르다.
  퓰리처상까지 받았다가 기자가 만들어낸 이야기로 밝혀져 소동을 빚었던 워싱턴 포스트의 '지미의 세계'가 생각났다.
  張俊河씨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은 유일한 목격자 金龍煥씨였다. 그가 입을 열어야만 모든 것이 확실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찾아온 서울방송 제작팀에게 등반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는 것을 거부했다고 했다. 실족사를 입증하고 자신의 죄없음을 주장하려면 마땅히 이야기를 할 텐데, 왜, 거부했을까.
  오후 5시30분쯤 우리 취재반은 金씨의 집에 도착했다. 金씨는 아직 퇴근 전이었고 부인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다. 시골 어느 농가나 다름없는 집이었다. 논이 30여 마지기에 밭이 조금 있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金씨가 직접 농사를 지었다고 했다. 자식들은 모두 결혼을 했거나 서울에서 학교를 다닌다는 부인의 설명을 들으며 金씨를 기다렸다.
 
 
  "張선생은 추락사다"
 
  金씨는 禹기자의 말대로 18년 전 사고 당시에도 모 지방 중학교의 강사였으며 그후 현재까지 고등학교에서 윤리와 정치경제를 가르치고 있는 교사였다. 그는 11대째 현재의 고향에서 살고 있으며 그 사건 이후에도 당시 산행을 함께 했던 몇몇 사람들과는 계속 연락을 주고 받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그 일대에서는 점잖은 선생님으로 꽤 괜찮은 평판을 받고 있었다.
  부인은 예고없이 들이닥친 기자를 내켜하지는 않았지만 남편이 언론에 의해 18년 동안 의혹의 인물로 지목돼 고통을 받아 온 것을 감안하면 뜻밖이라고 여겨질 만큼 취재팀에게 적대감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최근 텔레비전 보도로 남편의 건강이 크게 악화됐다고 제발 괴롭히지 말라는 부탁만 했다.
  金씨를 찾아가기 전날 취재팀은 전화로 방문할 뜻을 비쳤었다. 金씨의 반응은 당연히 오지 말라는 것이었다. "할 얘기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으니 제발 괴롭히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걸 무시하고 찾아온 터였다. 오후 6시쯤 그가 집에 도착했다. 그는 처음 완강하게 돌아가 달라고 했다. 18년 전에 張俊河씨의 가족과 검찰에게 할 얘기는 다해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金씨의 증언은 반드시 들어야 했다. 차나 한잔 마시고 가겠다고 방에 들어가 앉았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조용히 있고 싶습니다. 18년 전에 이미 다 밝혀진 것을 가지고 이제 와서 또 되풀이해서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나는 18년 동안 선생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나를 의심하는 주위의 시선에 시달려 왔습니다"
 
  그가 처음 내뱉은 말이다. 그는 자신과 張俊河 선생간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張선생이 옥중출마를 했던 67년 7대 국회의원 선거 때부터 그 어려웠던 시절을 張선생 밑에서 고생해가며 도왔었다며, "우리의 관계를 아는 사람들은 내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나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고 나를 의심하는 사람들은 내가 어떤 변명을 하더라도 의심할 것ꡓ이라고 말했다. 그가 서울방송 제작진에게 당시 등반상황을 설명하지 않았던 이유가 어렴풋이 짐작됐다.
  -서울방송 '재야인사 張俊河의 죽음' 방송을 봤는가.
  "두번째 것을 봤다. 보지 않으려고 했는데 내 얘기가 어떻게 나오는지 불안하기도 하고 해서 아이들에게 녹화시켜서 봤다. 1부는 보지 않았지만 어떻게 만들었을지 안봐도 알 것 같다. 타살이라고 전제하고 그쪽으로 유리하게 만들었겠지"
  -金선생님이 張俊河씨 사인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하는데.
  "나는 당시 검찰에서 한 진술과 張선생 가족에게 말한 내용 이외에 더 말할 것이 없다. 추락사가 분명하다.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더 이상 무엇을 말하란 말인가. 나에게 당시 상황을 다시 말하라고 하는 사람들은 심정적으로 나를 불신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내가 타살이라고 말하길 원할 텐데 없는 것을 지어서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타살이 아니라고 하면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張俊河씨가 타살됐다는 서울방송의 결론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金선생님이 범인이거나 아니면 범인의 하수인 혹은 범행을 목격하고 뭔가 협박을 받고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데.
  "말을 삼가 달라. 張선생님의 죽음으로 인해 선생님을 모시면서 펼쳐보려던 내 꿈도 희망도 함께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지금은 이런 궁지에까지 몰리지 않았는가. 18년 동안 한시도 괴롭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고통스러웠지만 어디 호소할 곳도 없었다. 나도 피해자이지만 내가 선생님을 잘 모시지 못해 그런 일까지 벌어졌는데 그런 사람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또 張선생님을 모셨던 많은 사람들은 선생님이 타살됐다고 생각하고 있고 또 그렇게 믿고 싶어한다. 내가 이제 와서 사람들 앞에 나서서 '선생님은 타살되지 않았다. 실족사했다'라고 말한들 나를 믿겠는가. 18년 전에 이미 다 밝혀진 일인데 앵무새처럼 되풀이해 지껄이고 싶지 않고 시시비비를 하고 싶지도 않다"
 
  "모든 것이 운명이다"
 
  金龍煥씨는 張俊河씨를 존경했기 때문에 따랐을 뿐이라고 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하필 그때 서울에 가서 인사를 드리려 했던 일이며, 산에 따라간 일, 함께 하산하면서 그 어려운 길로 접어든 일 모두가 운명처럼 느껴집니다…"
  그 말을 하던 金씨는 감정이 복받치는 듯 돌아앉아 말을 잇지 못했다.
  -3년동안 소식을 끊고 있다가 이날 갑자기 산행에 동행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오랫동안 소식을 끊은 적이 없다. 7대 국회의원 선거 때 선생님을 돕기 시작해 선생님이 74년 구속됐을 대도 사람들과 함께 자주 선생님을 찾아갔고 또 출감해서 종로의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병문안을 가기도 했다. 물론 자주 연락도 드렸었다. 내가 시골로 내려간 것은 75년 초다. 마침 아버님이 병중에 계셔 맏이라는 책임감도 들고 해서 고향의 중학교에 강사로 취직했다. 첫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 張선생께 인사를 드릴 생각으로 사고 전날인 8월16일 서울에 갔다"
  -서울에 올라와서는 누구를 만났나.
  "그날 저녁에 종로 4가에 있던 호림산악회 사무실로 金容德 회장을 먼저 찾아갔다. 金회장에게 '張선생께 인사드리러 가려는데 함께 가자'고 했더니 張선생이 내일 함께 산에 가니 거기서 뵈면 어떻겠느냐고 권해 17일 산행에 동행했다. 잠은 청량리에 있던 동생 집에서 잤다"
  -사건 당일 계곡에서 張俊河씨와 단 둘이서 산행을 하게 된 경위는.
  "일행이 점심식사를 준비했던 계곡에 한 발 뒤처져 도착했더니 張선생이 보이질 않았다. 선생님 어디 가셨느냐고 물었더니 혼자 산에 가셨다고 해 찾아 올라갔다. 어른이 보이지 않으면 찾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닌가"
  -텐트를 치고 있던 군인 2명과 張선생이 함께 있던 장면을 보았는가.
  "군인 2명은 마침 일요일이어서 근처 부대에서 외출나온 사병들처럼 보였다. 계급은 이등병(졸병)에 새카만 얼굴이었다. 특수부대 요원설은 어처구니가 없다. 텐트설도 엉터리이다. 張선생이 이들과 함께 차를 들고 있었지만 텐트는 없었다. 이들이 암살요원이원 내가 이들로부터 협박을 받았다면 군인을 봤다는 이야기를 하겠는가"
  -배낭은 누가 멨나.
  "처음에 내가 멨다가 산 정상에서 점심식사를 한 뒤 張선생이 멨다"
  -張선생이 추락하게 된 과정을 다시 한번 말해달라.
  "張선생과 산 정상에서 샌드위치를 먹었다. 그러다가 선생께서 '어이쿠 사람들 기다리겠다. 빨리 가자'며 일어나 직선으로 계곡쪽으로 갔다. 張선생이 앞장서고 내가 뒤따라갔다. 처음엔 나무를 붙잡고 어렵지 않게 내려갔는데 갈수록 길이 험해졌다. 겁이 나서 '선생님 못가겠습니다. 돌아갑시다'라고 말씀드렸더니 張선생이 먼저 계곡을 훌쩍 뛰어넘었다.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갈수록 계곡이 험해져 그때부터는 젊은 사람이 앞장서야 할 것 같아 앞장서긴 했는데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사람이 살다 보면 되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수 없고 위험해도 어쩔 수 없이 앞으로 가야 하는 상황이 있다. 그때가 그랬다. 조심스럽게 발을 디디는데 뒤에서 뭔가 '휙' 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아 돌아보니 張선생이 떨어지셨다"
 
  추락지점은 고운 모래밭
 
  -그 다음엔 어떻게 했나.
  "허겁지겁 내려왔을 때까지 선생님은 의식만 잃었을 뿐 돌아가시지는 않았었다. 입으로 인공호흡을 하다가 일행들에게 알리러 갔다"
  -정상에서 추락한 지점까지는 도저히 맨손으로 내려올 수 없는 곳이라고 하는데.
  "거기가 접근할 수 없는 곳이다, 어떻게 내려갔는냐고 하는데 못 내려갈 게 뭐가 있나. 극한상황인데"
  -그 험한 곳에서 떨어진 사람이 상처가 없다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예외가 있지 않은가. 꼭 그렇게만 된다는 건 아니잖은가. 몇 층 높이에서 떨어져도 산 사람도 있고 죽는 사람도 있는 것이고, 예외란 있는 것이다. 또 張선생이 떨어진 곳은 지금은 돌투성이라고 하지만 당시는 고운 모래로 덮여 있었다. 내가 張선생을 눕히고 인공호흡을 했기 때문에 틀림없다. 내가 본 건 정확하다. 괴로운 이야기를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다. 張선생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노리고 거짓증언을 하겠는가. 내 뒷조사를 해보라"
  -군 법무관에게 조사를 받은 적이 있나.
  "방송에 군 법무관이 왜 등장했는지 알 수 없다. 검찰 조사 이외에는 88년 曺萬厚 의원이 주도한 국회 조사에서 포천경찰서 사람에게 재조사를 받은 것밖에 없다"
  (현재 안기부장 특보인 曺萬厚씨는 ?년 국회 내무위 정기 국정감사 때 張俊河씨의 부인 金熙淑씨로부터 張선생의 사인에 여러 가지 의혹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趙鍾奭 치안본부장에게 재수사를 요구했었다. 경찰은 그 뒤 수사를 벌였으나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서면보고를 해왔다ꡓ고 밝혔다)
  -서울방송 취재팀과 만난 경위를 설명해달라.
  "2월13일 서울방송에서 전화가 오고 며칠 뒤 洪淳澈 프로듀서를 포함한 세 사람이 찾아왔길래 2시간 30분 동안 심정적인 이야기만 했다. 그 뒤 金容德씨가 전화를 걸어 '서울방송이 약사봉에서 사건을 재연하는데 와서 협조하라'고 말하길래, '내가 죄가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니지만 교직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 산에 가면 기자들이 전부 달려들어서 사진 찍고 야단할 텐데 신분이 밝혀지지 않겠는가. 못하겠다'고 말했다"
 
  "양심에 조금도 부끄러움 없다"
 
  -서울방송 보도 이후 많은 사람이 金선생님의 얘기가 거짓이었음이 증명됐다고 말하고 있다.
  "오직 진실은 張선생님과 선생이 추락한 것을 본 나 혼자 알고 있을 뿐이다. 매사를 부정적으로 보면 모든 게 부정적으로 보인다. 나를 의심스런 눈으로 보면 내가 어떤 말을 하건 모든 것이 의심스럽게 들릴 것이나 내가 본 것이 틀림없다. 張선생의 우연한 죽음으로 내가 18년 동안 다른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온 것도 다 운명이다.
  내 양심에 조그만한 부끄럼도 없기에 이 운명을 받아들일 뿐이다. 그동안 잡지, 신문, 방송에 보도된 것 중에 명예훼손으로 걸고 싶은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나는 조용히 살고 싶을 뿐이다. 더 이상 괴롭히지 말아달라"
  이날 여섯 시간 가까이 그를 만나면서 취재팀은 金龍煥씨가 무척 답답하게 여겨졌다. 자신이 본 것이 확실하다면 왜 좀더 당당히 나서지 않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심정적으로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다른 설명을 하지 않아도 실족사라고 한 내 말을 믿을 것'이라고 한 말이 이해가 갈 듯 말 듯 아쉽기만 했다.
 
  두 사람을 만나고 나서 취재팀은 서울방송의 보도 내용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텔레비전을 봤을 때의 충격은 사라지고 의혹만 남을 뿐이었다. 생각지 않은 복잡한 상황이었다.
  18년 전 사고 당시 상황을 좀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를 느꼈다. 관련기사 스크랩을 찾았다. 드문드문 張俊河씨 추모기사와 함께 85년 4월 신동아에 尹在杰 기자가 '張俊河 그 의문의 죽음ꡑ이라는 제목으로 쓴 장문의 기사가 있었다. 거의 유일한 참고서라고 할 수 있었다.
  반가운 마음으로 그 기사를 읽어본 기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8년 전에 尹기자가 쓴 기사와 이번 서울방송의 기사가 그 전개방식과 내용에서 매우 흡사했던 것이다. 서울방송에서 제시한 여러 가지 증거들은 모르는 사람이 볼 때는 하나 같이 새로운 내용이었지만 그것은 이미 尹在杰 기자의 기사에 거의 들어 있는 것들이었다. 심지어 朴正熙와 張俊河의 갈등관계를 그린 부분까지 기사내용이 거의 같았다.
  다소 길지만 서울방송 보도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尹기자가 쓴 기사의 주요 내용을 살펴본다. 尹기자는 張俊河씨가 타살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그 근거로 당시 張씨가 하려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이렇게 썼다.
 
  '그것이 알고 싶다'와 尹在杰 기자의 기사
 
  '張俊河씨는 75년 여름, 해방 30주년을 맞아 김대중, 함석헌시 등과 함께 긴급조치 9호 해제를 위한 범국민운동 형태의 거사를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이 논의가 있은 뒤 張씨의 거동은 눈에 띄게 달라져 갔다. 그것은 주요 재야 지도자에 대한 맨투맨식 접근이었다. 이 때문에 張씨가 의도했던 기사의 규모나 그 조직 형태에 대해서는 張씨만 알 뿐, 아무도 속시원히 알지 못했다.
  서울방송 역시 張씨가 타살되었다고 가정할 때 그가 타살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張俊河는 시민 불복종 형태의 중대한 거사를 계획하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 은밀히 홍남순 변호사와 김대중씨 등 재야인사들을 만나고 있었다. 하지만 張씨는 점조직식으로, 핵심은 자시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그 정확한 거사 내용을 몰랐다"
  해방 직후 일본 군복을 벗고 북경 광복군을 찾아간 朴正熙가 張俊河를 만났다는 서울방송의 잘못된 보도 내용(朴正熙는 북경에서 張俊河를 만난 적이 없다)도 신동아에서 그대로 찾을 수 있다.
  방송에서는 朴正熙가 일본 관동군 출신이라고 오보를 했는데(朴正熙는 만주군 소속이었다) 이것도 앞에 적은 신동아 尹기자의 기사중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일본군 소위로 임관됐다'는 부분을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또 방송에서는 67년 張俊河씨의 옥중 출마 부분을 설명하면서 그가 신동아 67년 7월호에 정치참여의 이유를 밝힌 글을 성우의 육성으로 인용하고 있다. 이 부분 역시 尹기자가 쓴 85년 기사 그대로다.
  張俊河씨를 따라나선 金龍煥씨가 10여분 뒤 군인들과 커피를 마시고 있는 張씨를 만나는 현장을 연기자들의 연기로 재연한 부분에서 서울방송은 張씨와 金씨, 군인 2명이 서 있는 옆에 텐트를 세워놓고 있다.
  金龍煥씨는 서울방송 취재팀을 만난 자리에서 분명히 텐트가 없다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텐트가 있었다는 내용은 어디에 나오는 것일까.
  서울방송 洪프로듀서는 ꡒ텐트가 화면에 나오는 것은 金씨를 만나기 전에 이미 張俊河씨가 사고를 당할 때까지의 약사봉 등산 상황에 대한 현장 재연 장면을 촬영했기 때문이다.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지만 텐트 부분만 다시 촬영할 수가 없어서 화면만 내보내고 진행자의 설명에서는 텐트에 관한 것은 뺐다ꡓ고 해명했다.
  그렇다면 서울방송은 金씨를 만나기 전에는 張씨가 산에서 만난 군인들이 텐트를 치고 있었던 것으로 알았다는 얘기가 된다. 서울방송 제작팀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역시 尹기자는 신동아에서 金씨가 張씨를 찾아 10분쯤 올라갔을 때 군인 2명이 텐트를 치고 있음을 발견하고 "60세쯤 되는 노인을 보지 못했느냐"고 물었더니 텐트 속에서 張씨가 "나 여기 있네" 하면서 나와 군인들과 함께 커피를 마신 뒤 산 정상쪽으로 올라갔다고 묘사하고 있다.
  서울방송은 또 張俊河씨가 죽음을 불사하는 중대 결행을 계획하고 있었으며 이를 감지할 수 있는 정리적 자세의 예로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張씨가 부인의 종교인 천주교식 혼배성사를 올린 것과 함께 張俊河씨가 백범 金九 선생에게서 넘겨받아 소중히 간직해오던 태극기를 이화여대 박물관에 기증한 일을 들고 있다.
 
  공통된 誤報
 
  이 부분에서 서울방송은 이 태극기가 金九선생과 윤봉길 의사, 張俊河씨 셋이 1932년 홍구공원에서 尹의사가 거사를 치르기로 한 그날 아침, 식사를 함께 한 뒤 결별식을 그 앞에서 행한 역사적인 태극기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1918년 출생인 張俊河씨가 14세 때인 1932년에 중국 대륙에서 金九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다는 말이 된다. 張俊河씨가 1944년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했다는 것은 그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상식적인 얘기이다.
  서울방송은 어떻게 해서 이런 오보(誤報)를 했을까. 유감스럽게도 역시 尹기자의 신동아 기사에서 서울방송의 오보와 똑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張俊河씨의 나이만 생각하면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이 8년 전의 신동아 기사와 지금의 서울방송 보도에서 공통되게 틀리게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앞의 내용들 외에도 이번에 서울방송에서 제기한 의혹들 대부분이 당시 신동아에서 이미 제기됐던 것이라는 점도 확인됐다.
  尹기자가 당시 기사에서 張씨의 사인에 대한 의문점으로 지적한 것은 ▲14.7m 높이 암벽에서 떨어진 시신이 골절상, 찰과상 등 외상이 거의 없고 ▲사고지점까지 도달하기 위한 코스가 너무 험해 그 코스를 택하지 않고 우회해서 하산하는 것이 정상적이었다는 점 ▲의문의 인물이 金龍煥씨가 사고 당일 갑자기 나타나 張俊河씨와 동행했고 일행을 떠나 우연하게도 단둘이만 등반을 했다는 점 ▲사고 현장의 소나무 높이가 4~5m이고 張씨가 이를 잡았다면 소나무의 밑둥부터 3분의 1 정도 높이인 1m20~1m40 부분이므로 절대 소나무의 본체가 휘어질 수 없을거란 점 ▲그 높은 데서 떨어졌는데 커피를 담은 보온병이 깨지지 않고 멀쩡했다는 점 ▲등산길에 만났던 텐트 속의 군인 2명의 정체 ▲검찰이 현장검증을 하지 않은 채 사건을 실족사로 처리한 점 등이었다.
  이번에 서울방송이 새롭게 제기한 의혹은 尹기자가 제기한 것에 덧붙여서 가족들이 처음으로 공개한 시신 사진과 金龍煥씨가 가족들에게 들려준 사고 당시의 얘기를 녹음한 테이프, 가족들의 요청으로 몰래 검안을 했다는 의사 趙澈九씨가 주장한 후두부 함몰 골절상의 상태와 주사바늘자국 등으로 여기에다가 위생병과 군 수사관의 증언 및 법무관의 증언이 더해진 것이었다.
 
  취재팀의 현장 검증
 
  이번 방송에서 과학적 실험의 하나로 행한 마네킹 실험도 당시 사고 직후 張俊河씨의 사인에 의문을 품고 있던 추모 등반팀이 추락 현장에서 통나무로 비슷한 실험을 했었다는 신동아 기사와 유사하다.
  물론 두 기사가 거의 흡사한 것은 사고 당시 품었던 의혹이 지금도 여전히 남아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두 기사가 틀린 내용까지 거의 닮은꼴이라는 점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취재를 시작하자마자 갖게 됐던 방송내용의 진실성에 대한 의문이 점점 명확해짐을 느꼈다. 어쩌면 서울방송의 보도는 8년 전 신동아 기사에서 한 걸음도 더 나가지 못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張俊河는 타살됐다'는 서울방송의 결론은 위험천만한 선정주의로 추락하게 된다.
  2부에서 아무런 물증없이 타살이라고 결론 내릴 때 허전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방송 보도를 바탕으로 사인의 실체적 진실을 파고 들어가자던 처음의 생각 대신, 서울방송 보도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는 쪽으로 취재방향을 잡았다.
  金씨를 만나고 온 다음날 약사봉 사고 현장에 갔다. 현장을 봐야 구체적으로 어느 쪽이 진실인지 감이 올 것 같았다. 약사봉에 가는 길에 포천경찰서에 들러 사고 기록이 남아 있는지를 확인했다. 경찰서측은 자신들도 방송 보도를 보고 기록을 뒤졌지만 찾지 못했다고 했다. 경찰은 "단순 변사 사건 기록은 보존기간이 3년이기 때문에 다 폐기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후 3시 포천군 이동면 도평3리 약사봉에 도착했다. 등산로 입구는 유원지가 되어 있었다. 유원지를 지나서 계곡에 흐르는 냇물을 따라 등산로가 나 있었다. 약사봉은 등산로를 따라 왼쪽에 있는 산이었다. 길을 따라 15분쯤 올라가자 길 왼편에 '張俊河 선생 돌아가신 곳'(추락지점이 아님)이라고 쓴 흰색 나무 팻말이 보였다.
  팻말이 있는 곳을 지나 길을 따라 10여분을 더 걸어 올라가자 계곡이 끝났다. 이곳이 당시 張俊河씨 일행이 등산로 입구에서 40여분을 걸어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머물렀다는 곳이었다. 취재팀이 등산로 입구에서 이곳까지 걸은 시간은 25분이었다. 당시 張씨 일행이 이곳에 온 때가 8월 중순으로 가장 더운 때라는 점을 생각하면 비슷하게 걸린 셈이다. 등산로 입구에서 이곳까지는 대략 1.75km였다.
  그곳에서 왼쪽으로 약사봉 능선이 나 있었다. 능선을 따라 정상을 향해 걸었다. 4월 초인데도 잡목들이 상당히 많았다. 정상에 도착한 것은 張씨 일행이 점심식사를 한 곳에서부터 따져 35분 뒤였다. 텔레비전에서 봤을 때는 매우 험한 산이라고 여겼는데 생각밖에 빨리 정상에 도착했다.
  金龍煥씨가 약사봉을 묘사하면서 "야산 같았다"고 한 말이 생각났다. 취재팀이 뒤에 확인한 바로는 약사봉은 해발 4백89m였다. 정상에서 張씨 등이 내려갔을 계곡을 찾아 20여m쯤 내려갔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왔던 길로 되돌아 내려와 張俊河씨가 추락한 곳으로 갔다.
 
  "계곡으로 내려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지 않다"
 
  사고 지점은 팻말이 있는 등산로에서 30여m쯤 걸어 올라간 곳에 있었다. 추락 지점으로 올라가는 길은 바위와 잡목들이 뒤엉켜 있었다. 서울방송이 마네킹 실험을 하고 간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마네킹의 한쪽 손이 떨어져 있었고 그 옆에는 張俊河씨를 추모하는 '석판'이 있었다. 4월 초인데도 張씨가 떨어졌다는 절벽은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다만 텔레비전에서 봤을 때보다는 많이 녹아 있었다.
  절벽은 60~70도 각도쯤 되어 보였다. 절벽 윗쪽으로 소나무 몇 그루가 보였다. 張씨가 잡았다는 소나무가 어느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서울방송은 등산전문가를 동원해 산정상에서 취재팀이 서 있는 곳까지 "장비 없이 맨손으로 내려온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유감스럽게도 취재팀은 정상에서 계곡을 통해 소나무가 있는 지점까지 내려오는 길을 직접 답사하지 못해 서울방송의 보도 내용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 대신 張씨가 잡으려 했다는 소나무가 있는 곳에서 추락 지점까지도 장비없이는 내려올 수 없다는 주장이 틀렸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방송에서 등산전문가는 "절벽 양쪽이 깎아지른 곳이어서 장비없이는 도저히 추락지점까지 내려올 수 없고 돌아오는 길도 없다" 했는데 취재팀은 추락지점에서 절벽을 오른쪽으로 돌아서 소나무가 있는 곳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올 수가 있었다. 소나무가 있는 곳에서 추락지점까지 우리가 내려오는 데는 13분 정도가 걸렸다. 金龍煥씨는 張俊河씨의 가족들에게 절벽 위에서 추락한 바닥까지 15분 정도 걸려 내려왔다고 했다. 취재팀이 내려온 시간과 비슷하게 걸린 셈이다.
  정상에서 소나무가 있는 곳까지 가보지 못했다는 것이 못내 찜찜했지만 그냥 되돌아 와야 했다. 그러나 취재팀은 호림산악회 회장 金容德씨를 만났을 때 계곡에 대한 궁금증을 풀 수 있었다. 金씨는 75년 張씨가 추락사 한 뒤 추모등반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산길이 험하긴 해도 여름이면 나무를 잡아가며 정상에서 추락지점까지 충분히 내려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자신도 추모등반 당시 맨손으로 내려왔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산을 타는 것이 사람마다 똑같을 수는 없으며 내려올 수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서울방송의 '절대불가'란 결론과는 상반되는 증언이었다.
  서울방송은 또 張俊河씨가 타살됐다는 근거로 등반에 걸린 시간을 들었었다. 즉 金龍煥씨가 12시10분쯤 張씨와 함께 등반을 시작해 張씨가 추락한 것을 일행에게 알리고 사고현장에 되돌아 와 잠시 인공호흡을 하다 시계를 확인한 시간이 2시10분이었다고 한 것과 관련해서 서울방송은 자신들이 실측한 결과로는 두 사람이 등반을 시작해 시간을 확인한 때까지는 3시간 5분 이내일 수가 절대로 없다고 했었다.
  특히 등반을 시작해 절벽에서 추락한 張씨를 따라 내려와 인공호흡을 하는 데까지 걸렸다는 1시간 30분 동안에 서울방송팀은 정상을 지나 계곡이 시작하는 지점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고 했다.
  金龍煥씨는 "글쎄, 약사봉이야 작은 산인데 3시간이야 걸리겠느냐. 9백 고지도 3시간이며 왕복하는데…"라고 말했다. 취재팀이 정상에서 계곡의 절벽까지 직접 확인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뭐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金容德씨의 말을 생각하면 계절과 사람의 차이를 무시하고 절대적으로 등반시간을 못박는 것은 무모한 일이라고 생각됐다.
 
  "金龍煥씨가 張선생 따라 간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그에게서 75년 당시 등반을 가게 된 경위와 金龍煥씨가 등반하게 된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8월16일 오후에 張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그래서 '휴식하러 갑니다. 같이 가십시다'라고 권했지요"
  金龍煥씨가 산악회 사무실로 찾아온 것은 金容德씨가 張俊河씨와 전화를 한 뒤 그날 저녁 때였다. 웬일이냐고 반기는 金容德씨에게 金龍煥씨가 말했다.
  "張선생 뵈러 왔어요. 함께 갑시다"
  "내일 산에 가시기로 했는데"(金容德)
  "래, 잘됐네요. 그런데 나는 신발이 없는데"
  "신발은 뭐, 계곡 가서 있다가 올건데"
  金容德씨가 들려준 이 말은 金龍煥씨의 설명과 다름이 없었다. 金龍煥씨가 張俊河씨의 산행을 따라가게 된 이유가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다.
  일행은 오전 10시에 金容德씨가 회장으로 있던, 호림산악회가 마련한 전세버스편으로 서울운동장에서 출발해 오전 11시를 전후해 약사봉에 도착했다.
 
  "당시는 한 여름이어서 아예 정상에 올라갈 생각은 하지 않고 계곡에서 멈추기로 예정하고 있었습니다. 계곡에 도착해보니까 건너편에 초가집이 몇 채 보여 잠깐 다녀왔더니 선생님이 보이지 않더군요. 일행에게 물어보니까 張선생이 혼자서 산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뒷동산 같네요. 내 잠시 갔다올테니 밥 좀 지어놓으세요'라고 말하고는 산에 오르더라는 겁니다. 그게 12시쯤이었습니다. 곧이어 金龍煥씨가 올라와 선생님 어디 가셨느냐고 묻고는 뒤를 따라갔다고 하더군요ꡓ
  -사고가 일어난 뒤에 金龍煥씨가 혼자 따라간 것을 의심해보지 않았습니까.
  "모시던 어른이 혼자 산에 갔다는데 그냥 내버려 둘 수 있습니까. 만약 金龍煥씨가 따라가지 않았으면 제가 따라갔을 겁니다"
  -그 뒤의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오후 1시30분쯤 됐을까요. 계곡 아래쪽에서 金龍煥씨가 옷에 흙투성이에다 땀에 범벅이 된 모습으로 뛰어오면서 '張선생이 운명하실지 모르겠다'고 외치더군요 울음이 잔뜩 섞인 목소리에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어요. 일행이 얼른 뛰어가 반듯이 누이고 시계를 푼 뒤 인공호흡을 했지요. 張선생은 흙 묻은 데 없이 깨끗했었다고 기억합니다"
  -당시 張선생이 추락한 절벽은 어땠습니까.
  "당시는 물도 흐르지 않고 물기도 거의 없었습니다. 바닥에는 고운 모래와 돌 등이 섞여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나는 서울방송에서 인형을 떨어뜨려 실험을 한다길래 기분이 썩 좋지 않았습니다. 인형을 떨어뜨리는 것은 오히려 판단을 흐리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부분에서도 金龍煥씨와 金容德씨의 증언이 일치했다. 당시 張俊河씨가 추락한 지점이 고운 모래 바닥이었다는 것이다.
  취재팀은 앞서 서울방송이 보도한 것을 토대로 金龍煥씨에게 "정말 3년만에 나타난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어봤다가 "그렇지 않다. 계속 연락했었다"는 대답을 들었었다.
  金龍煥씨가 말한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똑같은 질문을 金容德씨에게 했다.
  "아마 그 친구가 74년 말쯤 시골에 내려갔을 겁니다. 그 전에는 지구당 총무도 하고 간사도 맡아서 張선생님 밑에서 함께 고생 많이 했었지요"
  역시 그 부분도 金龍煥씨가 취재팀에게 했던 말과 일치했다.
 
  "金龍煥씨 의심하지 않는다"
  -金선생님은 金龍煥씨를 의심하십니까.
  "그 당시는 아주 어려웠던 시절입니다. 야당이 입을 열 수가 있었습니까, 언론이 입을 열었습니까. 오직 張俊河 선생만이 외롭게 투쟁했고 그 밑에서 우리가 일을 했었습니다. 金龍煥씨는 67년에 張선생이 옥중출마를 했을 때 유세반을 꾸려 목이 터져라 하고 선거운동을 다녔던 사람입니다. 그런 우리들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들은 金龍煥씨가 張선생을 밀어 떨어뜨리지 않았겠느냐고 말하기도 하지만 험난하던 시절 우리들의 관계를 아는 사람들은 절대 金龍煥씨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럼 金선생님은 張俊河씨가 타살됐다고 보십니까, 실족사라고 보십니까. 유일한 목격자인 金龍煥씨를 의심하지 않는다면 누가 어떻게 죽였다고 보십니까.
  "내가 답답한 게 바로 그겁니다. 金龍煥씨와의 관계 속에서 얘기하면 단정을 짓지 못하겠습니다. 金龍煥씨가 하도 답답하게 아무 말도 안하길래 내가 화가 나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네가 돈을 받고 침묵하는 거냐. 아니면 말 그대로 실족사냐. 말을 해야 할 것 아니냐'고요. 워낙 성격이 내성적이고 답답해서 '사람이 왜 그렇게 대담하지 못하느냐. 이제 당신이 얘기할 차례다'고 화를 냈었습니다. 사인이 밝혀져야 영혼이라도 위로될텐데…"
 
  "張선생이 어린애입니까"
 
  서울방송은 3월28일 2부 방송에서 함석헌씨가 사고가 난 뒤 수소문해 알아봤다는 내용이라고 전제한 뒤 이런 말을 했다. 張씨가 사실은 등반하던 날 아침 함석헌씨 집에 찾아와 "산에 가기로 했었는데 안갈까 한다" 말했다는 것이다. 그런 뒤 張씨가 일행을 만나기로 한 상봉동 약속장소에 가서 가지 않겠다는 말을 하려는데 누군가가 반갑게 맞이하여 억지로 버스에 끌어올려 하는 수 없이 따라 갔다는 것이었다.
  이 모습은 서울방송에 의해 연기자들의 연기로 재연됐고 진행자 문성근씨는 ꡒ가지 않으려는 張선생을 끌어올린 사람이 문제의 金龍煥씨일지도 모른다ꡓ고 덧붙였다. 金씨가 계획적으로 張俊河씨를 등산에 끌어들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투였다. 그것은 곧 金씨가 범인일지 모른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했다. 과연 張씨가 못가겠다고 말하려 했다는 속마음을 알 수 있었던 사람이 누구인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金容德씨에게 그런 일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아니 張선생이 어린애입니까. 억지로 끌어당긴다고 갑니까"
  金容德씨와 金龍煥씨에 대한 인터뷰를 토대로 취재팀은 중요한 사실 하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서울방송의 洪프로듀서는 "張俊河씨가 그 절벽에서 추락하지 않았고 타살됐다면 어떻게 살해됐다고 보는가ꡓ라는 취재팀의 물음에 추측이라는 단서를 달고 ꡒ張俊河씨는 아예 산을 타지 않았으며 어디선가 살해된 후 현장에 옮겨졌을 것으로 본다. 목격자 金씨는 범인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봐서는 안될 것을 보고 협박을 받았거나 길안내 역할 정도가 아니었겠나 생각한다"고 말했었다.
  85년 신동아에서 尹在杰 기자 역시 洪프로듀서의 이같은 추리와 똑같은 추리를 제시했었다. 두 사람의 추리가 일치하는 것은 아마 그 방법밖에는 다른 살인의 방법을 생각하기 힘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취재팀은 金龍煥씨와 金容德씨 두 사람의 증언을 통해 그같은 추리가 전혀 근거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張俊河씨가 등산을 결정한 것은 사고 전날인 16일 오후였다. 목격자 金龍煥씨가 산악회에 들러 張씨가 등산에 동행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 이후인 16일 저녁(늦은 오후)이었다. 더욱이 산악회는 날이 더웠기 때문에 애초부터 정상에 올라갈 계획이 없이 계곡에서 점심을 먹고 하산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같은 점을 전제하고, 우선 張俊河씨가 다른 곳에서 살해돼 현장에 옮겨졌다면 살인자는 1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시체를 혼자서 옮길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살인은 분명히 약사봉 어디에선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 점은 張俊河씨가 일행과 떨어져 능선을 타는 것까지의 목격자들이 있기 때문에 재삼 의심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살인자들은 미리 산길 어디에선가 숨어 있다가 범행을 했어야 하는데 張씨 일행은 처음부터 정상에 올라가지 않고 계곡에 있다가 내려오기로 했으며 張씨가 일행과 떨어져 등반을 한 것도 현장에서 우연히 결정된 일이므로 산길에 미리 숨어 있었다는 추측은 성립되지 않는다.
  또 목격자 金龍煥씨가 살인자들의 길안내자라고 가정하고 살인자들에게 張俊河씨의 산행 정보를 미리 알렸더라도 그 내용은 "약사봉 계곡에 가며 정상에는 오르지 않고 계곡에 있다가 오기로 했다"는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살인자들은 계속 일행과 함께 행동하다가 張씨가 산에 오르기 시작한 뒤 몰래 일행을 빠져나가 뒤따라갔다고 볼 수밖에 없다.
  또 산에서 살해했더라도 시신을 옮기려면 일행이 있는 계곡을 피해 내려와야 하는데 약사봉의 등산길은 張俊河씨가 올라간 길 외에는 딱히 길이라고 부를 만한 곳이 없다. 그렇다면 살인범들은 등산 일행이 식사하고 있던 계곡을 피해서 반대쪽으로 우회하여 절벽아래 현장으로 시신을 옮겨야 하는데 그럴 경우 金龍煥씨가 일행에게 사고 소식을 알렸다는 1시30분에는 도저히 계곡에 나타날 수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尹기자와 洪프로듀서의 추리대로 누군가가 계획적으로 張씨를 다른 곳에서 살해하고 현장으로 옮겼다는 얘기는 설득력이 없다.
 
  무성의한 민주당 진상조사단
 
  4월2일 민주당 진상조사위원회가 사고 현장을 답사했다는 기사가 동아일보에 나왔다. 동아일보 정치부의 洪銀澤 기자는 현장에서 조사위가 발표한 '張俊河씨 사인 10가지 의혹'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민주당이 현장답사 및 자료 조사를 통해 '타살'이라는 심증을 굳혔다고 보도했다.
 
  민주당이 주장한 열 가지 의혹은 우선 張선생이 추락했다는 사고지점이 경사 75도, 높이 14.7m의 가파른 암벽이어서 장비없이는 내려 갈 수 없는 곳이라는 점과 전혀 외상이나 골절상이 없고 휴대한 커피 보온병과 안경이 깨지지 않았다는 점, 金씨의 진술대로 등반을 시작해 사고가 날 때까지의 시간을 실측해본 결과 도저히 사고 시간에는 사고지점까지 도달할 수 없다는 점. 사고 당일 일행과 떨어져 혼자 산길을 오른 張선생을 뒤쫓아갔고 실족사의 유일한 목격자가 된 金龍煥씨의 정체가 불분명한 점 등을 들었다.
  金龍煥씨의 정체가 불분명하다는 점을 의혹의 하나로 들고 있는 것이 이상했다. 전혀 조사를 하지 않은 듯 했다. 韓光玉 조사위 위원장 비서관으로 조사위 실무간사격인 尹昊重씨와 洪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산 어디까지 가봤는지를 물었다. 두 사람 모두 "張선생이 추락한 지점과 金씨가 군인들과 함께 있는 張선생을 보았다는 곳까지 가 보았다"고 말했다. 군인들과 함께 있는 곳이라면 계곡 끝에서 10분 정도 올라간 곳을 말한다. 거의 등반을 하지 않은 셈이다.
  그래 놓고서 어떻게 등반시간을 실측한 결과를 말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다 못해 서울방송에 물어보기만 해도 金龍煥씨의 정체를 알 수 있었을텐데. '진상조사위원회'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건 그들의 과연 張俊河씨 죽음의 진실을 밝혀낼 의지가 있는 사람들인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서울방송이 보도한 것을 최소한의 확인 절차도 없이 그대로 옮겨놓은 무성의한 진상조사단이었다.
 
  여기까지 취재가 되자 당시 서울지검 의정부지청에서 이 사건을 담당한 徐燉洋 변호사의 증언이 무엇보다 필요했다. 그러나 徐변호사는 계속 취재팀과 만나기를 거부했다. 완강한 그의 모습에서 '혹시 이 사람이 뭔가 비밀을 갖고 있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서울방송이 "당시 실족사라고 주장했던 검찰과 경찰 및 목격자는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다"고 말한 것이 생각났다.
  몇 차례의 접촉 끝에 4월12일 오전 안계신다며 출입을 막는 사무원을 밀치고 어렵게 徐변호사를 만날 수 있었다.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 앉아 기자를 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부터 물었다.
  -기자를 피하면 의혹만 증폭되는 것 아닙니까. 徐변호사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인상만 줄 뿐인데요.
  "증거도 없이 타살이라고 우기는 시대상황이라면 더 이상 말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지난번 서울방송에서 張俊河씨 일에 대해 묻길래 추락사로 기억한다고 말해줬지요. 그런데 전혀 내 말을 믿지 않더군요. 처음부터 타살이라고 전제하고 묻는데야 더 이상 할 말이 없지 않습니까"
 
  당시 검사, "최선 다해 수사했다"
 
  -사고 당일 있었던 일을 다시 한번 말씀해주시지요.
  "그날 내가 당직 검사였습니다. 저녁 때 잠시 서울 녹번동 집에 와 있는데 연락이 왔더군요. 경찰보고가 '張俊河씨가 등반 도중 사고를 당했고 추락사인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변사사건은 흔한 것이기 때문에 가지 않고 경찰 조사를 토대로 처리하면 그만이지만 숨진 사람이 張俊河씨라는 얘기를 듣고 현장에 갔습니다"
  -현장에 도착해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내가 아마 새벽 1시쯤 도착했을 겁니다. 포천 지역 의사회장이던 심구복씨(사망)와 함께 산에 갔지요. 이미 시신은 옆으로 치워져 있었고 피가 꽤 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심구복씨가 시신을 살펴보는 동안 플래시로 떨어졌다는 지점을 비췄더니 절벽에 비스듬히 나 있는 소나무가 아래쪽으로 휘어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높이가 12m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 옆에는 기자들도 많이 와 있었는데 저마다 그 소나무를 가리키면서 '저 소나무를 잡으려다가 떨어졌다'고 얘기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분명히 소나무가 휘어져 있었습니까.
  "적어도 내 느낌으로는 그랬습니다. 가족들도 그분이 오랫동안 감옥생활을 하면서 몸이 쇠약해졌는데 아마 현기증이 일어서 추락한 모양이라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또 시신도 그렇게 깨끗하지 않았었다고 기억됩니다. 18년 전의 일이어서 확실치는 않지만 시신을 살폈던 심구복씨가 후두부와 다리에 골절이 있다고 말한 기억도 나고요. 별로 의심할 만한 점이 없었습니다"
  -유일한 목격자인 金龍煥씨에 대한 조사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때 金龍煥씨가 저에게 호되게 닦달을 당했습니다. 저는 타살 가능성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의문을 갖고 그를 추궁했습니다. 하지만 타살에 대한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건 현장에서 사진도 수십 장 찍었는데 그것도 없어졌고 기록도 없으니 저도 답답합니다"
  -기록이 없는 이유가 뭡니까.
  "모든 기록은 보관 기관이 있는 겁니다. 아주 중요한 기록이야 정부기록보존소로 가지만 단순 변사 사건기록이 정부기록보존소로 갈 리도 없고…. 내가 검사 생활하는 동안 변사사건만 1천여 건을 넘게 했어요. 그 사건도 그중의 하나일 뿐입니다ꡓ
  -왜 날이 밝은 뒤에 현장검증을 하지 않았습니까.
  ꡒ뭔가 의혹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의문날 만한 것이 없었어요. 저는 최선을 다했다고 지금도 얘기할 수 있습니다"
 
  가족측 검안의사 인터뷰
 
  -혹시 외압은 없었습니까.
  "외압이 있을 일이 뭐가 있습니까. 텔레비전을 보니까 단 사흘만에 허겁지겁 종결했다고 말하던데 아무런 물증도 없이 뭔가 흑막이 있는 듯한 암시적인 표현으로 마치 검찰이 숱한 궁금증을 억지로 덮은 것처럼 얘기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사건은 경찰의 1차 조사 서류에다가 제가 金龍煥씨를 조사한 기록 등을 첨부해서 그걸로 끝난 겁니다"
  -당시 張俊河씨 변사 사건에 대한 의문 제기로 동아일보 기자가 구속되고 서울지검 공안부에서 사흘만에 단순 변사라고 굳이 발표까지 한 것은 오히려 의혹을 더 깊게 해 주는데요.
  ꡒ"건 검찰의 사고조사와 다른 내용을 보도했기 때문이고 또 그것이 마치 의문사인 것처럼 재야에서 증폭시킬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겠지요"
  -그럼 정말 의혹은 없는 겁니까. 당시 법무관이라는 사람의 증언은 어떻게 된 겁니까.
  ꡒ" 사람 뭐하는 사람입니까. 지금도 법무관입니까. 저는 당시 최선을 다해 조사했다고 생각합니다. 검사들은 단순 변사체의 경우 대부분 현장에 잘 가지 않고 경찰조사만으로 처리하는데 저는 목격자를 마치 피의자 다루듯 꼬치꼬치 조사했습니다. 열심히 조사를 한 것도 의문이라고 한다면, 아마 일반적인 변사사건처럼 경찰조서만으로 처리했을 때는 또 그렇게 했다고 의문을 제기할 겁니다"
  사체의 손상에 대해 더 자세히 알기 위해 당시 가족측의 요구로 사체를 검안했다는 趙澈九씨(민주당 인천 서구 지구당 위원장)를 만났다.
  張俊河씨의 시신에 주사바늘 자국이 있었다는 趙澈九씨 증언은 서울방송이 타살의 근거로 새로 발굴해낸 몇 안되는 증거자료였다. 서울방송은 이 주사바늘 자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파고들지는 않았다. 다만 시청자들은 서울방송이 심혈을 기울여 찾아낸 이 주사바늘 자국이 張俊河씨 타살의 중요한 단서일 것이라는 강한 암시를 받았다. 인천시 서구 석남동에 있는 자신의 지구당 사무실 바로 아래층에서 '구세의원'을 경영하고 있는 趙씨를 인터뷰했다.
  재야의 입장에서 張俊河씨의 사체를 검안한 의사 趙澈九씨는 자신의 검안소견을 타살의 근거로 삼으려는 서울방송의 시도에 대해 분명히 거리를 두는 모습이었다. 趙씨는 "서울방송의 방송 내용이 암시만 깔아놨지, 타살을 입증할 설득력 있는 자료를 제시하지 못했다" 입장을 보였다.
  趙씨는 사건 발생 이틀 뒤인 8월19일 오전 처음으로 張俊河씨의 시신을 대면했다. 그는 17일 저녁 張俊河씨의 죽음을 연락받았으나 현장으로 달려가지는 못했다. 취재팀에게 趙씨는 다른 재야인사들처럼 張俊河씨가 타살됐다고 단정했고, 張씨와 함께 등반한 金龍煥씨가 살해에 직접 관계돼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스스럼없이 표현했다. 趙씨가 말한 張俊河씨가 추락했을 당시의 정황과 사건 전개과정은 서울방송의 설명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듯했다.
  자신이 체험하지 못했거나 증인이 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서울방송의 추론을 신뢰했고, 서울방송 이상의 확신으로 타살임을 자신했다. 그러나 부검의로서의 판단을 요구받을 때는 신중한 자세를 견지했다.
 
  "심정적으로는 타살이다"
 
  趙씨는 桂勳梯씨로부터 사체검안을 의뢰받고 張俊河씨의 집으로 가 사체를 세밀히 살펴보는 과정을 1시간 가량 설명했다. 그는 감정의 기복이나 과장없이 18년 전의 일을 차분히 기억해 냈다.
  4.19 직후 고려대 의대 학생 신분으로 민주당의 인천시당 청년부장을 맡은 이후 한결같이 야당에 몸담아 온 趙씨는 지난 92년 2월 민주당 인천시 서구 지구당 위원장으로 임명됐고 비슷한 시기에 병원도 인천으로 옮겼다.
  -타살이냐 실족사냐에 대해 검안의로서 어떻게 결론을 내리겠는가.
  ꡒ검안의로서는 추락사는 아니지 않느냐는 결론이다ꡓ
  -그렇다면 타살이라고 보는가.
  "2㎝ 크기의 후두부 함몰이 직접 사인이다. 멍든 것처럼 피가 맺혀 있고 가운데 쪽으로 피가 배어나왔다. 가격으로 그런 상처가 나면 죽는 거고, 가격 물체가 뭐냐에 따라 그런 상처를 낼 수 있다고 본다. 14m 높이에서 떨어지면 두개골이 박살나는 것 아니겠나. 또 아래가 수풀 우거진 곳도 아니고 엄청난 돌밭인데. 그리고 수직의 낭떠러지가 아니고 몇 차례 굴러 떨어져야 하는 경사진 지형인 걸 염두에 두면 결론적으로 추락사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타살이다'라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사람이 실족해서 턱 넘어지면 그렇게(사망) 될 수 있다"
  -타살이라고 단정하려면 여러 보충자료와 정황증거가 필요하다는 것인가.
  "그렇다. 그래서 이번에 민주당 조사위원회에서 내가 얘기한 게 있다. 서울방송이 조사한 것은 늘 나오던 얘기고 그 범주를 못 벗어났다. 그렇지만 어쨌든 '이것은 추락사가 아니다. 타살이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걸 답습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다른 각도에서 논의를 하고 조사해 나가자고 제안했다"
  -서울방송의 결론이 비약이 있다는 것인가.
  "서울방송이 방송한 걸 보면 딱 꼬집어 확신할 만한 게 별로 없으나 뚜렷한 암시는 몇 가지 있다. 유일한 목격자 金龍煥씨가 대답한 것이 조금 나왔고, 그 당시 법무관이라는 사람이 나와 '죽을 때나 얘기하겠다'고 증언했다. 당시 군 수사관으로 있던 사람이 시체가 잠자는 것처럼 깨끗해서 추락한 것 같지 않아 아침에 다시 조사하려니까 상부에서 손떼라고 했다고 했는데 추락사가 틀림없다면 왜 그렇게 얘기했겠나. 의문이 간다. 하지만 서울방송은 확신이 갈 만한 암시에 그쳤다. 민주당이 국회차원의 조사위를 구성하면 애매한 소리를 한 법무관과 金龍煥씨도 앞으로 확실히 얘기를 하지 않겠나 기대한다"
  -두 사람이 얘기를 해야 사건의 진상이 드러날 것이라는 말인가.
  "그래야 진상규명이 한걸음 더 나 갈 수 있을 것이다"
 
  주사자국은 타살의 증거 아니다
 
  張俊河씨의 죽음에 대해 그는 심정적으로 타살이라고 단정했다. 또한 金龍煥씨를 타살 관련자로 지목했고 金씨의 행적을 의심했다.
  "金龍煥씨와는 전혀 모르는 사이다. 처음에 金龍煥씨는 張俊河 선생을 찾아 올라갔더니 군인 두 사람이 있어 따라 올라갔다고 얘기했다. 지금 와서는 체계화되어서 산에 올라가다 보니 군인 두 사람이 텐트를 치고 있는데 張선생이 커피를 같이 마시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앞뒤가 안맞는다.
  이번에 능선 따라 현장을 올라가 보니 무척 힘들었다. 金龍煥씨가 주장한 시간에 추락이 일어날 수 없다. 서울방송의 얘기가 다 맞더라. 나는 처음부터 어떤 계획이 돼 있어 張俊河 선생을 ꡐ이쪽으로 가셔야 정상으로 가는 길ꡑ이라고 안내한 사람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張선생은 산 정상에 올라갔다가 떨어져 죽은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에게 이끌려 가다 돌아가신 것이다.
  군인이 두 사람 있었다는 암시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張선생은 그들에게 이끌려 가서 다른 곳에서 죽었다. 그리고 사체가 발견된 곳으로 옮겨졌다. 金龍煥씨는 다른 사람(살해 가담자)이 돌아갈 시간을 번 뒤 등산을 함께 간 사람들에게 알리러 간 것일 거다. (살해가) 계획된 일이었다면 달아난 사람이 상부에 성공했다고 보고하고, 그러다 보니 가족들에게도 연락된 것 아니겠는가"
  -金龍煥씨에게 상당히 혐의를 두는 것 같은데.
  "나는 민주당 조사위에서 '金龍煥씨가 주도자는 아니다 연락책임자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金龍煥씨는 자기도 모르게 자기변명을 하다 보니 군인 두 사람을 끼워넣은 것이 아니겠느냐"
  서울방송은 趙씨를 "은밀히 張俊河씨의 사체검안을 실시한 의사"라고 힘주어 설명했다. 즉 다른 사람들 몰래 사체검안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趙씨가 사체검안을 하기 전에 이미 張俊河씨의 주치의인 趙光賢씨(사망) 등 2명이 검찰측 검시의사로 사체검안을 마친 상태였고, 趙씨는 이들과 인사를 나눈 뒤 사체검안을 시작했다. 그리고 30분에 걸쳐 사체검안을 마친 뒤 계훈제, 함석헌씨, 조광현씨 등 검찰측 검시의, 張俊河씨 가족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자신의 검안소견을 밝히고, 검찰측 검시의들과 주사바늘 자국에 대해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이때 趙씨는 "후두부 함몰골절이 직접사인이다. 외상이 없어 추락사로 보기 어렵다"는 검안소견을 말했고 당시 검찰측 검시의들은 조용히 趙씨의 얘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으며 논란이 없었다고 趙씨는 기억했다.
 
  서울방송은 趙씨가 밝힌 오른쪽 팔과 엉덩이의 주사바늘 자국을 처음으로 밝혀진 사실이라며 큰 의미를 부여했다. 정작 趙씨는 이같은 의미부여에 크게 흥분하지 않는 자세였다. 그는 "사체검안 당시부터 주사바늘 자국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앞서 검시한 분들이 주사바늘 자국을 발견하지 못한 것을 알고 나의 사체검안 의견을 설명하면서 강조했을 뿐"이라고 했다.
  "주사바늘 자국에 상당히 의문을 갖는데 나는 그 당시 그 점에 대해 의문을 안가졌다. 그 양반이 건강치 않고 협심증도 있어서 병원에서 주사를 맞았을 것으로 생각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에 제일 의심을 갖더라. 주사놓고 기절시킨 뒤에 추락사를 가장하고 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趙씨는 검사의 지휘를 받지 않고는 사체검안을 할 수 없는 규정 때문에 '몰래' 사적으로 검안을 한 것이지 검찰측 검시의 등이 사적인 검안에 문제를 제기하고 검안을 저지하는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다.
  張俊河씨의 사체를 왜 부검하지 않았느냐는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들의 기억과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趙澈九씨는 "사체검안이 끝난 뒤 함석헌 계훈제 선생에게 ꡐ추락사로 보기 어렵다. 꼭 부검을 하자"고 얘기했다. 다른 분들도 반드시 부검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검찰이 부검을 하자는 얘기를 안들어줘서 말이 많았다ꡓ고 말했다.
 
  부검주장은 있었나
 
  검찰이 부검을 거부했다는 주장이다. 趙씨는 가족들이 반대해서 못한 것이냐를 분명히 해달라고 하자 어떤 것이었는지 확실치 않다고 대답했다.
  변사 사건이 발생하면 검사는 경찰에서 올라온 변사사건 보고를 토대로 사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지휘한다. 사인이 명백할 경우에는 사체를 가족에게 인도하도록 조처한다. 그러나 사인에 의문이 제기될 경우에는 반드시 사체부검을 실시하는 것이 검찰의 관행이다.
  가족이 완강히 반대할 경우에는 법원으로부터 사체에 대한 압수 수색영장을 발부받아 공권력을 동원해서라도 부검을 강행하는 게 흔한 일이다. 사인에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죽음의 원인을 규명할 '증거의 보고'인 사체를 파묻어 썩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건을 지휘한 徐燉洋 검사는 "타살의 의문이 없었고, 가족들도 추락사로 인정해서 부검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張俊河씨의 부인인 金熙淑씨는 전화 인터뷰에서 "張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나한테 부검해야 된다고 하는 사람이 재야에서고 어디서고 없었다. 다들 일체 입을 떼지 않았다"고 밝혔다. 검찰이 부검을 반대해서 부검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해진다.
  金熙淑씨는 그러나 부검을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부검을 안해도 모든 게 확실했다. 나는 그날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고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당시는 밤에 돌이 날아들어 집 유리창이 깨지고 청와대에 있는 분은 '張선생님 외출하지 말고 당분간 가만 계시라'고 얘기까지 하는 상황이었다"며 張俊河씨의 죽음은 의심할 바 없는 타살이라는 입장이었다.
  金씨는 "청와대에서 연락을 해 준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차차 알게 될 것이다. 앞으로 또 밝혀질 게 있다"고 대답했다.
  서울방송은 "趙澈九씨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은 뒤 이 사건에 대해서 발설하지 말라는 협박을 받고 각서를 쓰고 풀려났다"고 했다. 여기서도 서울방송은 강력한 암시를 하나 던졌다.
  趙씨는 "당시 잘 알고 있던 중앙정보부 요원 한 사람이 백병원 옆 라이온스 호텔로 안내했고 다시 고개를 숙인 채 승용차에 실려 중정 건물로 보이는 곳으로 옮겨졌다"며 "중정이 자신들이 무슨 일(타살)을 저질러 놓고 발각될까 두려워 나를 추궁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체검안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기자들이 몰려왔다. 처음에는 모르겠다고 하다가 나중에 부근의 다방으로 가서 얘기를 해줬다. 구체적으로 기억이 안난다. 그래선지 다음날 중정에 불려가 5~6시간 조사를 받았다. 중정에서는 '당신이 어떻게 검사의 지휘도 없이 사체검안을 할 수 있느냐' '뭐 안다고 까불어'라며 추궁했고 검사 지휘없이 사체검안을 하면 형사입건할 수도 있다는 점을 주지시키면서 '괜히 말썽을 피우지 말라'는 쪽으로 다그쳤다.
  집으로 돌아오니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그래서 가지고 있던 20여장의 검안의견서를 불태워 버렸다. 그 뒤 창피해서 사체검안 얘기를 꺼내지도 못했다. 야당 총재도 중정을 겁내던 사회분위기를 이해해야 내 행동이 이해될 것이다"
 
  다시 군 법무관 말을 검토키로
 
  趙씨는 "정보부가 아니더라도 보안사나 경호실 등의 충성경쟁을 벌이다가 張선생을 살해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며 기관에 의한 타살 가능성을 견지했다.
  서울방송에는 趙씨가 민주당 지구당 위원장이라는 내용이 빠져 있다. 洪淳澈 프로듀서는 이에 대해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했었다. 같은 질문을 趙씨에게 했다. 趙씨는 "내가 민주당 지구당 위원장인 사실은 서울방송 취재팀을 만날 때부터 그 쪽에서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의문점을 발견했다. 서울방송은 앞서 목격자 金龍煥씨가 교사라는 사실을 명시하지 않았었다. 이번에는 趙澈九씨가 민주당 지구당 위원장이라는 사실을 적시하지 않았다. 민주당 지구당 위원장이라고 밝히면 증언의 신뢰도가 떨어진다고 생각한 것일까.
  趙澈九씨와 인터뷰를 하면서 재미있는 사실 한 가지를 알 수 있었다. 서울방송은 타살 근거의 하나로 趙씨가 검안했던 내용들을 들었고, 정작 趙씨는 자신의 검안소견에 대해서는 신중한 자세를 취하면서 서울방송의 보도를 토대로 타살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서울방송이 발굴했다는 趙씨의 검안소견 등 새로운 증거자료 중에 타살을 뒷받침할, 딱 맞아 떨어지는 증거는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은 셈이다. 이제는 서울방송이 '최초의 타살 확증'으로 소개했던 '법무관'의 증언 내용을 추적해 볼 필요가 있었다.
  "張俊河 사건에는 관여할 입장이 아니었다"는 법무관의 주장과 서울방송의 방송 내용은 철길처럼 끝없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거짓말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쉽게 할 수 있었다.
  洪淳澈 프로듀서를 다시 찾아갔다.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법무관을 만났으며 그가 서울방송의 증언을 정면으로 부인하고 있다"고 말을 꺼냈다. 洪프로듀서는 법무관 얘기는 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처음 그를 찾아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張俊河씨 죽음의 진상조사는 이제 첫 걸음에 불과하므로 그가 스스로 진상을 털어놓도록 설득하기 위해서는 언론이 그를 건드려서는 안된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당시는 비상군재 아니었다"
 
  洪프로듀서는 이에 앞서 취재팀이 처음 "법무관이 이 사건에 왜 개입했느냐"고 물었을 때 "당시는 비상군재였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날 그는 기자가 '법무관'인 李변호사를 만났다고 말하자 "얘기하면 복잡한데 그는 사실 법무관도 아니다. 그런데도 내가 그렇게 밝힌 것은 그래야만 했던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張俊河 선생의 사인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에 언론에서 맞다, 틀리다 라고 싸움을 붙이면 사실이 왜곡될 수가 있다"고 말했다.
  洪프로듀서에게 李변호사 녹취했다는 테이프를 돌려달라고 했다.
  洪淳澈 프로듀서는 거듭 "李변호사 부분은 진실 공개를 위해 보호되어야 한다ꡓ며 만약 자신들의 녹취한 테이프를 보고 자신의 말이 옳다는 것이 확인되면 법무관 얘기는 기사에서 빼준다는 약속을 하면 테이프 원본은 보여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李변호사가 張俊河씨 사건에 관련되어 있다는 자신의 생각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의 제안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그의 말이 옳다면 기자가 갖고 있던 의문도 동시에 풀리는 것일 테고 그렇지 않다면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약속을 하고 서울방송 제작팀 3명과 함께 녹취 테이프를 듣기로 했다. 10여분 동안 계속된 원본은 녹음테이프가 아니라 비디오였다. 몰래 찍은 듯 카메라 앵글의 높낮이 조절이 맞지 않아 사람 얼굴이 잘렸다가 나타나는 등 흔들거렸지만 내용은 원본이 맞다고 생각됐다.
  비디오에는 어디에도 민청학련이나 긴급조치 1호때의 얘기는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張俊河 사건에 관한 내용이었다. 李변호사가 기자에게 "張선생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민청학련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던 것과는 달랐다.
  그날 밤 '李변호사는 왜 뻔한 거짓말을 했을까'를 곰곰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洪프로듀서의 말대로 '그가 비밀의 열쇠를 쥐고 있다면 그를 통해 진실을 밝히면 될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한번 그를 만나야 했다.
 
  법무관의 정체는?
 
  다음 날 아침 당장 그를 만나기 위해 그가 사는 곳으로 갔다. 그는 마침 재판중이었다. 재판정 앞에 내걸린 '오늘의 재판' 목록에는 그가 변호인으로 참석하는 재판이 7건이 있었다. 3시간을 기다려 재판을 끝내고 나오는 그를 만났다.
  李변호사가 서울방송 제작팀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처음부터 다시 확인하는 절차를 밟았다. 그러나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에게 "당신이 말한 것이라고 방송에 보도된 내용이다. 맞는지 확인해 달라"고 말하고 방송에 보도됐던 내용 원고를 넘겨줬다. 잠시 원고내용을 훑어보던 그는 의외로 순순히 모두 자신이 한 말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변함이 없었다. "말은 맞되 그 내용은 분명 긴급조치와 민청학련에 관한 것이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아무리 상업방송이라도 몰래 녹음기를 품고 와 책임없이 한 말을 녹음하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이냐"고 반박했다. 그는 그때까지도 녹음이 아니라 비디오로 몰래 촬영된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 사실까지 얘기해주고 "비디오 원본 어디에도 민청학련이라거나 긴급조치라는 말은 없었다. 도대체 당신 말을 믿으란 말이냐"고 다그쳤다.
  李변호사는 당황해하는 눈치였다. 곰곰이 기억을 더듬더니 "만약 내가 그런 말을 한 것이 사실이라면 내가 녹화되는 것도 모르고 젊은 사람에게 말이 헤펐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정말 그 사건과는 관계가 없다. 만약 민청학련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내 머리 속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진담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자신은 개인적 호기심으로 현장에 가 본 일밖에 없으며 그 사실을 얼마 전 동창회 모임에서 張俊河씨의 6촌 동생이자 자신의 친구인 張모씨에게 말한 것뿐이라고 했다. 더 이상의 진전이 없었다.
  방향을 바꿔 그의 과거 경력을 물었다. 그는 72년 張俊河씨가 숨진 포천에서 근무하다가 월남에 다녀온 뒤 74년 1월부터 그를 포함해 군 법무관 6명과 일반 검사 5명 등 모두 11명으로 구성된 비상군재 검찰관으로 근무했다고 했다. 74년 10월 비상군재가 끝난 뒤에는 다른 사람들이 귀대한 뒤에도 남아 잔무를 처리하고 75년 4월 강원도 원통의 12사단 법무관으로 전출돼 근무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 서울방송에 자신의 말을 제보한 사람이 친구인 張씨일 것이라고 말했다. 텔레비전에서는 싱가포르에 살고 있는 張俊河씨의 장남 豪權씨가 서울에서 익명의 제보를 받고 서울방송에 연락한 것으로 나와 있다. 어디까지가 맞는 말이고 어디부터 거짓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여하튼 모두 확인해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사단장 증언…"그 법무관은 張씨 사건 수사와 무관"
 
  당시 신문스크랩을 뒤졌다. 긴급조치는 74년 1월15일 제1호가 발표됐었다. 긴급조치 1호로 구속된 사람은 張俊河와 白基玩씨. 긴급조치 4호는 민청학련 사건에 관련된 것으로 그해 4월에 발표됐다. 경제와 관련한 것을 띠고 고려대에 위수령이 발동된 긴급조치 9호는 75년 5월에 있었다.
  그 중 비상군재가 재판권을 행사한 것은 법무관의 말대로 긴급조치 1호부터 4호까지였다. 그 뒤의 것들은 모두 일반 법원에서 재판권을 행사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비상군재는 74년 10월 관할 재판권 행사를 모두 끝내고 임무를 마감했다. 긴급조치 4호에 대한 대법원 항소심은 75년 4월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李변호사가 한 말이 처음으로 맞아 들어갔다. 張俊河씨가 숨질 당시에는 비상군재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도 확인됐다.
  75년 당시 원통에 위치한 사단의 사단장은 白행걸 장군(예비역)이었다. 재향군인 수첩을 통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18년 전의 일이어서 그가 기억을 하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白장군에게 李변호사의 이름을 얘기하고 혹시 그 사단의 법무관으로 근무한 적이 있는지를 물었다.
  생각과 달리 白장군은 쉽게 그를 기억했다. 틀림없이 75년 당시 자신의 사단에서 법무참모로 일했다는 것이었다. 혹시 육군본부나 국방부에 차출되어 몰래 張俊河 사건을 다루었을지 몰라 상급부대에서 그를 차출한 일이 있는지 확인을 요청했다.
  "글쎄요. 군 지휘계통이 있기 때문에 사단 근무지를 떠나려면 사단장의 명령이 있어야 하는데 나로서는 그런 기억이 없습니다. 만약 특별히 중대한 일이 있었다면 내가 기억하고 있을 텐데 그런 일도 없었고, 육군본부나 국방부에도 법무관들이 많은데 구태여 전방사단의 법무참모를 차출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내 기억으로는 특별한 사건으로 그 사람이 차출된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있었다면 야전군 지휘소 훈련 때 심판관으로 차출된 일은 있습니다"
  그렇다면, 李변호사가 75년 사건 당시 전방 사단의 법무관으로 근무한 것이 확인된 이상 "법무관이 아니었다"는 洪프로듀서의 말은 사실이 아닌 것이다. 또 비상군재도 없어진 시점에서 포천에서 멀리 떨어진 전방 사단의 법무관이 張俊河씨 사건을 조사한다는 것도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것이 엎치락 뒤치락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허세 부린 것인지 모른다"
 
  한 가지 의문이 풀리자 더 큰 의문이 생겼다. '그러면 그 사람은 왜 서울방송에 그런 책임지지 못할 얘기를 한 걸까' '서울방송은 李변호사가 張俊河씨 사건에 어떤 형태로든 개입됐다는 구체적인 흔적을 찾아내서 그를 찾아갔을 텐데 그 흔적은 무엇일까' 등 새로운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張선생님이 洪프로듀서에게 법무관 얘기를 제보하셨다면서요?"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던진 질문이었는데 張씨는 "그 사람 별 얘기까지 다했군"이라며 멋적게 웃었다. 제대로 짚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張씨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끝까지 얘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우리 형님에 대한 방송이 나가기 한 열흘 전쯤에 동창 모임이 있었습니다. 친구들에게 며칠 뒤 서울방송에 우리 형님 얘기가 나오니까 보라고 했조. 그랬더니 그 친구가 갑자기 말을 꺼내는 겁니다"
  두 사람이 나누었다는 대화내용은 이렇다.
  "내가 자네 형님 현장검증한 거 모르지"(李根一 변호사)
  "자네가 어떻게 아나"(張씨)
  "검찰총장 지낸 鄭銶永씨랑 함께 갔었다"
  "그래! 형님은 왜 죽었나"
  "다 그런 거 아닌가. 하수인이 한 명 있었는데 5년 뒤에 죽었다"
  張씨는 이 말을 고심 끝에 "확정적인 것은 아니다"는 전제를 하고 洪프로듀서에게 얘기했다고 말했다. "확정적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그 친구가 동창들과 만났을 때 자기가 비상군재에 있을 때 긴급조치 1호로 형님이 구속되자 형수님과 큰아들 豪權이가 자신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는 말을 했는데 확인해보니까 두 사람 모두 검찰관을 찾아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혹시 이 친구가 허세를 부리는 것은 아닐까 싶어서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고 했다.
  이로써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이 확인된 셈이다. 싱가포르에 있는 豪權씨가 서울로부터 받았다는 '이상한 전화'는 7촌 아저씨인 張씨가 한 것이고 서울방송은 이것을 알고도 '신분을 밝히지 않은 익명자의 제보'로 과대포장을 한 것이다.
 
  鄭銶永씨의 정면부인
 
  그렇다면 李根一씨는 왜 그런 책임지지 못할 말을 했을까. 친구에게 한 말은 무슨 이유로 했는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서울방송 취재팀에 한 말은 만약 카메라와 녹음장치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면 허세를 좀 부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李根一변호사가 현장검증을 함께 했다고 말한 鄭銶永 전 검찰총장에게 확인을 요청했다. 鄭씨는 "李根一이라는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또 특히 "75년이면 나는 대검찰청 연구관으로 총무업무를 담당하고 있을 때여서 어떻게 갖다 붙여도 내가 張俊河씨 사건을 몰래 수사하기 위해 포천에 현장검증을 갈 위치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서울방송이 타살의 결정적인 증언자라고 단정한 법무관 출신 李변호사의 이야기를 근거로 張俊河 타살의 시나리오를 만들어보면 이런 결론이 나온다.
  〈모 기관은 金龍煥씨를 하수인 혹은 길안내자로 삼아 張俊河씨를 살해했고 살해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 당시 대검 연구관으로 총무 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鄭銶永 검사와 전방사단에 근무하던 李根一 법무관을 사후 현장 확인 책임조로 편성해 살해 현장에 내보냈다〉
  과연 이런 시나리오가 가능한 것인지, 서울방송은 李변호사로부터 들은 말에 대해 검증작업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이다. 다만 그 법무관의 신뢰하기 어려운 말만을 근거로 갑자기 몇 단계를 뛰어넘어 타살로 결론을 내렸다. 지금까지 취재팀이 취재한 바에 따르면 서울방송에서 방영한 李변호사의 '잡담'(정식으로 인터뷰한 것이 아니고 李변호사 본인도 자신의 말이 녹음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므로 책임질 수 없는 잡담 수준이었다)은 다른 모든 관계자들의 증언을 종합할 때 거의 신뢰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즉 그는 張俊河 사건 수사에 직·간접으로 관계한 적이 없고 따라서 결정적인 증언을 할 위치에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엉뚱한 사람을 잡았다.
 
  끝내 그 법무관이 왜 그런 허튼 말을 했는지는 확인할 길은 없었다. 그러나 취재 결과 서울방송은 전혀 사건과는 상관없는 엉뚱한 사람을 찾아가 책임없는 답변을 들은 셈이었다. 그것도 정식으로 인터뷰를 하지 않고 마치 촬영을 하지 않는 것처럼 어깨에 걸어야 할 ENG 카메라를 허리춤에 감추고 몰래 촬영해 張俊河씨 타살 단정의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한 것이다.
  이로써 張俊河씨가 타살됐다는 서울방송 '그것이 알고싶다'팀의 보도는 타살을 입증시켜줄 근거가 없는 오보임이 확인됐다. 재야인사 張俊河씨가 타살되었다는 단정적 보도가 끼친 파장을 생각하면 어이없는 결론이었다.
  어째서 서울방송은 이같은 무리한 취재를 했을까. 조금만 더 취재를 했으면 李根一씨가 당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그 사람의 말이 신뢰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쉽게 알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다는 생각과 함께 오보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텔레비전이라는 전파매체가 갖는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갈 때 사회에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서울방송은 이 프로로써 진실을 밝히는 데 실패한 대신 불신풍조를 부채질하고 서로를 의심하는 역기능의 확대에는 성공했다.
  "서울방송의 첫 보도가 나간 뒤 동료 교사가 '텔레비전에서 봤다'고 말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수업을 들어갔는데, 자꾸 가슴이 떨리고 진정이 안되더군요. 자꾸 한 말을 또하고 또하고…. 어떻게 수업을 마쳤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았습니다. 가슴은 답답한데 하소연할 곳도 없고…'
  金龍煥씨가 취재팀에게 했던 말이다.
  서울방송의 근거없는 타살 결론은 한 성실한 현직 교사의 인권을 제멋대로 유린했다는 비판을 면할 길이 없다. '거대한 공룡' 텔레비전 채널의 일방적인 공격을 받고도 공식적인 대응을 하지 않은 金龍煥씨의 상처받은 인권은 어디에서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인지…. 취재진이 기사를 쓰고 있던 4월12일 밤, 金龍煥씨가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자신의 얘기가 기사화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명예회복도 필요없고 그저 조용히 살고 싶다는 거였다.
  "서울방송 보도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겠지요. 굳이 아니라고 해봐야 그 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보복하지 않겠습니까. 단 한 명이라도 내 진실을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모든 변사사건에는 의문이 있기 마련이다. 죽음 순간의 모든 상황을 산 사람이 완벽하게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산 사람들은 죽은 자의 한을 푼다는 명목으로 자신이 풀지 못한 의문을 증폭시켜 완벽한 해명을 요구한다. 죽은 이가 되살아나서 자신의 죽음을 설명해주지 않는 한 누가 완전하게 죽음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기자는 신이 아니므로 張俊河선생이 어떻게 죽었는지 명쾌한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서울방송이 '타살의 결정적인 증인'이라고 소개했던 주장은 거짓말인 것으로 확인된 반면 의문의 인물로 묘사했던 金龍煥씨의 진술은 제3자에게 의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진술은 일관됐고 인간대 인간으로 공감할 수 있었다.
  또 하나 확실한 것은 서울방송이 제시한 근거로는 절대 타살이라고 인정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타살의 확증이 드러나지 않는 지금, 누구도 75년 당시의 실족사 추정을 뒤엎을 수 없고 따라서 金龍煥씨는 결백한 것이다.
 
  우리 취재반의 허탈감-'애초부터 필요가 없었던 취재였다'
 
  우리 취재반은 이번 취재를 마치면서 허탈감을 느꼈다. 애초부터 필요가 없었던 취재였기 때문이다. 서울방송 '그것이 알고싶다' 제작팀이 군 법무관 출신의 잡담 내용을 검증해 보았다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타살 단정도 하지 못했을 것이며, 우리도 취재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 법무관의 말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해서 검증을 하지 않았다는(더구나 그 말의 의미가 타살유무를 결정하는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데도) 기자의 초보적인 취재원칙도 지키지 않았다는 얘기가 되며 서울방송이 선정주의를 택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게 한다.
  문제의 핵심의 고교 윤리교사 金龍煥씨의 인권이다. 성실하게 살고 있는, 그것도 윤리 과목을 가르치고 있는 사람이 수백만이 시청하는 텔레비전에 의해서 하루아침에 살인사건의 범인(서울방송을 봐서는 그가 주범인지 공범인지 종범인지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범죄에 가담한 것으로 해석되게 돼 있다)으로 몰려버린 상황을 상상해보라.
  서울방송이 아니라 다른 조직이나 인간이 金씨를 사실상의 살인공범자로 몰았다면 金씨는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만나본 金씨는 거대한 영상매체에 저항하기를 포기하고 있었다. 金씨의 미 무력감을 서울방송 제작팀이 또 다시 '뭔가 켕기는 것이 있어서 그러겠지' 식으로 비웃지 말기를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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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月刊朝鮮 1993년 6월호 기사
 
  張俊河 추락사의 유일한 목격자, SBS 방송과 민주당이 의혹의 눈길을 보냈던 金龍煥씨, 18년 만의 최초 手記
 
  죽음으로의 下山, 그뒤
 
  『고향으로 돌아온 것도 잠적이라고 몰아 붙인다. 나는 할 말을 다 했는데 의심하는 사람들은 내가 말을 하지 않았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없었던 일을 지어서 말하라는 것인가. 말해도 믿지 않을 것이고 없는 것도 마음대로 만들어 한 방향으로만 몰고가는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하란 것인가』
 
  金 龍 煥 고교 교사
 
  두통에 시달리며…
  나는 지금 18년 전 張俊河 선생님의 가족과 친지를 앞에서 선생님의 마지막 가시던 모습을 얘기한 뒤 18년 만에 처음으로 의지에 의해 그때 일을 적고 있다.
  18년이 지난 오늘, 지난 날들을 다시 생각해본다. 그동안 겪었던 숱한 일들이 떠오른다. 존경했던 선생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나를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살아온 시간이었다.
 
  사람들은 張俊河 선생님이 타살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유일한 목격자인 내가 했던 말은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분명히 18년 전 가족들에게 선생님의 실족 당시의 모습을 본대로 말씀드렸는데….
  18년 간 겪어온 고통의 매듭을 짓는다는 생각으로 이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생각들은 어디 갔는지 도무지 명하기만 할 뿐,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張선생님의 마지막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내내 두통에 시달려야 했다.
 
  그 어려웠던 세월들…
 
  1967년 張俊河 선생님이 7代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동대문 을구에 옥중 출마하셨을 때 나는 동대문구 청량리 2동 산 1번지에 살고 있었다. 평소 張선생님을 존경하였기에 선생님을 돕고 싶은 생각에서 신민당 서울 제4지구당 사무실을 찾았다.
  그때 나는 지구당 사무실에서 오랫동안 야당 생활을 해온 金容德씨(호림산악회 회장)를 만났다. 金씨를 주축으로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유세반을 편성해 선거 운동을 도왔다. 張俊河 선생님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옥중에서 당선된 선생님은 출감해 議政활동을 하셨다. 金容德씨는 지구당 상임위원회 의장직을 맡게 되었고 나는 상임위원으로 지구당 활동에 참여했다. 지구당 간사는 최인규씨가 맡고 총무는 사상계에 있었던 김동준씨가 맡았는데, 최인규씨가 간사직을 그만두게 되어 내가 68년에 간사직을 맡았다. 또 한 해 뒤인 69년에는 김동준씨가 도서출판 법문사로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총무직도 겸해서 맡게 되었다.
  생각하면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8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연설회 장소의 사용 승락서를 받기 위해 청량리 로터리에 있는 서울대학교 사범대 부속 고교에 갔을 때 교장선생님이 내가 인천 동산중학교 3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이어서 나를 반갑게 맞아주시던 일, 1969년 5월 張선생님께서 이스라엘에 국회 국방위원 자격으로 방문하시고 귀국하실 때 지구당 당원들과 공항에 나갔던 일이 생각난다.
  지구당 창당 대회를 위해 친구들과 동생, 동생 친구들을 동원해 선생님을 경호하게 했던 일, 1972년 10월 유신 단행 후 73년 유신헌법 개정 청원 서명운동 전개과정에서 통일당 최고위원으로 계실 때 張선생님께서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삼각동에 있던 중앙당사로 오실 때 주변의 통행을 통제하고 중앙당사 입구에서 선생님을 호위하고 회견장으로 모시던 일 등 당시 겪었던 일들이 모두 기억이 새롭다.
 
  그 살벌한 시절, 선생님의 승용차 뒤에는 항상 어떤 차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 어려웠던 세월들….
  선생님께서 당원 교육하시던 일들, 지구당 창당대회를 하면서 눈 코 뜰 사이 없이 바빴던 일들, 제기동 선생님 댁에 갔을 때 이력서를 가져오라고 하시던 일,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있었던 일,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 이 모두가 지금도 내 마음을 뜨겁고 무겁게 한다.
  1969년 대통령 3선 개헌반대 투쟁 때는 지구당 사무실의 옥상에 마이크를 가설해 張선생님의 비서 김상석씨와 함께 대통령 3서 개헌반대 방송을 했었다. 살을 에이는 듯한 추운 겨울날 신민당보 「민주전선」을 들고 지구당 사무실에서 일하던 최군과 함께 중화동, 상봉동을 다니면서 주택가에 돌리던 일도 떠오른다. 최군은 그 때 야간 고등학교 1학년에 다니고 있었는데 추위에 몹시 고통스러워하던 모습도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마지막 동행길
 
  나는 1974년 1월14일 선생님께서 대통령 긴급조치 1호에 의해 구속되신 뉴스를 호림산악회 山行을 마치고 돌아온 회원들과 함께 다방에서 들었었다. 그해 12월3일 구속된 지 10개월 20일 만에 형집행정지 결정으로 출감하시어 종로구 견지동 조광현 내과에 입원하신 선생님을 지구당 당원들과 함게 병문안 갔을 때 선생님은 浮氣가 있었고 병원의 분위기는 어둡고 무거웠다.
 
  나는 張선생님을 돕는 일에서 마음의 위안과 보람을 느꼈다. 선생님이 계시기에 내가 있었다. 그러나 1975년 초 나는 張선생님을 떠나 낙향했다. 아버님게서 병환주이었고 큰아들된 입장에서 병간호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고향인 충남 당진으로 돌아왔다. 그해 3월 당진중학교 강사로 교직에 들어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몇 년 있으면서 내일을 기약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1975년 8월16일 여름 방학이 거의 끝날 무렵, 張선생님께 인사도 드릴겸 해서 서울에 올라갔다. 농사 일도 있고 가축도 기르고 해서 시간을 내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래서 방학이 거의 끝날 무렵에야 서울에 올라가지 않았나 기억된다.
  상경 후 저녁 무렵, 金容德씨와 함게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종로 4가에 있던 호림산악회를 찾아갔다. 金씨에게 張선생님댁에 함께 가자고 했더니 金씨는 『선생님께서 내일 산에 가시니 그 때 인사드리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제의하였다.
 
  원래 내 생각은 그날 저녁에 인사 드리고 다음날 내려오는 것이었다. 서울에 볼 일이 있더라도 특별한 일이 아니면 아침에 일찍 서울에 왔다가 밤늦게라도 내려가야 마음이 편한 성격이기 때문이었다. 요즈음도 서울에 올라가면 당일 내려온다. 그러나 그날은 金容德씨의 권유대로 8월16일 저녁에 인사드리지 않고 산에 가면서 인사드리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선생님께서 버스를 타신 곳은 상봉동 댁 근처인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그곳에서 타시는 것을 보지는 못하고 타신 후 좌석에 가서 인사드린 것으로 기억된다.
 
  선생님을 비롯한 우리 일행은 약사봉 계곡을 오르고 있었다. 우리 일행이 식사 준비를 하는 지점에 내가 조금 늦게 도착하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金容德씨인지, 김희로씨인지 누구인지는 잘 기억되지 않지만 『선생님께서 어디 가셨느냐』고 물으니까 『저 위로 가셨다』고 하여 그 위를 향해 선생님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어찌하여 혼자 찾아 나섰느냐고 하지만 선생님께서 안 계신데 모시고 있던 사람으로서 찾아 나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닌가.
 
  몇 분 올라가다 왼쪽으로 길이 있어서 그 쪽으로 올라가게 되었고 5분 내지 10분 정도 그 길을 따라가 산 입구에 도달하게 되었다. 산 입구에 올라가니 그곳에서 선생님이 군인 두 사람(시골 출신 같은 이등병)과 커피를 드시고 계셨다.
  나는 『선생님 여기 계시는군요』라고 말씀드렸고 그곳에 앉아 선생님께서 주시는 커피를 마시고 다시 산을 오르게 되었다. 그곳에서 배낭은 내가 메고 선생님은 앞서 가셨다. 선생님은 『여름 등산은 긴 팔, 긴 옷을 입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오르셨다(나는 그때 반팔 점퍼를 입었다).
 
  아찔한 계곡
 
  그런데 사람들은 산 입구에서 선생님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 이상하다고들 한다. 그래서 그곳에 없던 텐트도 설치해 놓고 그곳에서 함게 커피를 마셨던 이등병 두 군인이 어떤 뜻이 있었던 사람들인 것처럼 서울방송에서는 암시했다. 산에 가다 보면 놀러나온 민간인도, 군인도 있을 수 있는데 부정적으로 보면 한없이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산을 조금 올라가니 야산 같은 등성이가 나왔다. 나무도 별로 많지 않았다. 북쪽(뒤쪽)의 경관을 보니 뒤쪽 산 밑에 군 부대가 보였고 부대 뒤에 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었다. 선생님께 그곳을 가리키면서 저쪽으로 가면 어떠냐고 말씀드렸더니 『그곳은 軍 통제지역이라 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님께서는 그쪽 지역 사정을 알고 계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등성이를 따라 올라갔다. 큰 소나무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잡목은 그리 많지 않아 쉽게 산에 올라갈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이 있는 곳에 식사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선생님께서는 『샌드위치 2인분을 해왔다』고 말씀하셨다.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파키스탄 政情(정정)이야기를 하였다. 식사를 끝내고 조금 있다가 일행이 기다린다고 하시면서 배낭을 들고 일어나셨다. 『배낭은 제가 메고 가겠다』고 말씀드렸더니 『빈 배낭이다』고 하시면서 선생님이 메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선생님은 일행이 기다릴 테니 식사 준비하던 곳으로 직선으로 하산하자고 하셨다. 나는 올라왔던 길로 등성이를 따라 내려가서 일행과 같이 오던 계곡을 따라서 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선생님께서는 일행이 기다리니 빨리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의 뜻이 그러한데 더 반대할 수도 없어서 선생님의 뒤를 따랐다. 후에 생각하니 「왜 선생님의 뜻을 더 막지 못했나」하고 후회가 된다.
 
  선생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인간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길을 택하지 않으셨나 생각된다(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을 느낀다. 안경을 벗었다가 다시 썼다, 이런 행동을 반복하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우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울려면 마음 속으로 울든지, 아니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울든지 하라고 몹시 꾸짖기도 한다).
 
  선생님의 뒤를 따라갔다. 평평한 능선 두 개를 넘은 것으로 기억된다. 능선을 돌아가니, 급경사를 이루는 계곡이 시작되는 제일 윗부분에 서게 됐다.
  『선생님, 더 못가겠습니다. 되돌아 가시지요』라고 말씀드렸다. 선생님게서는 그곳에 좀 서 계시더니 건너편으로 뛰어 넘으시면서 나더러 건너오라고 하셨다. 선생님이 뛰어 넘으셔서 나도 그곳을 뛰어 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곳을 뛰어 넘어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급경사를 이루고 있는 계곡, 아찔함을 느꼈다.
 
  추락, 인공호흡, 절명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위기에 처해 있을수록 냉철해야 한다는데 나는 그것을 잊고 있었던지 몹시 긴장해 위기감이 나를 억누르고 있었다. 뛰어넘은 부분(급경사 계곡의 왼편)부터는 경사가 급했고 암석으로 된 地形이어서 몸의 자세를 낮추고 비스듬한 자세로 그곳을 내려오고 있었다.
 
  암석 사이로 나무도 나 있고 해서 나는 그 잡목을 잡고 내려오고 있었다. 얼마를 내려오니 병풍같이 펼쳐진 단애가 있었다. 단애 밑에는 소나무가 나 있어서 나는 그 나무를 잡고 단애를 뛰어 내렸다. 그 단애의 높이는 1.5m 정도 된다고 생각된다. 단애의 밑은 평평한 지형이었다. 게속 내려가고 있었다. 그 때 뒤에서 무슨 소리가 나 뒤를 돌아보니 선생님께서 떨어지고 있었다. 순간적인 일이었다.
 
  허겁지겁 선생님이 떨어진 쪽을 향해 내려갔다. 선생님은 그곳에 누워 게셨다. 의식은 없었으나 호흡을 몰아쉬고 계셨다. 선생님을 반듯이 눕히고 손을 대고 인공호흡을 하면서 『선생님, 선생님 정신차리세요. 선생님 정신차리세요』라고 외쳤다.
  그러나 선생님의 호흡은 점점 약해져갔다. 호흡이 멎는 순간이 왔다. 입으로 인공호흡을 계속했다. 그러나 선생님이 호흡을 다시는 하지 못했다.
  아! 이것이 무슨 운명이란 말인가.
 
  이제는 일행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일행이 있는 식사준비 지점을 향해 달렸다. 어떻게 달려갔는지 모르겠다. 돌에 미끄러지고 물에 빠지면서 달려갔다. 산악회 회장 金容德씨에게 『선생님께서 떨어지셨어요. 빨리 갑시다』라고 말했다. 金씨와 김희로, 김용봉씨(金容德씨의 동생)와 함께 그곳으로 달려갔다.
 
  다시 인공호흡을 하였으나 회생하시지 못했다. 그곳에 계신 분들과 상의하여 길 옆으로 선생님을 모시기로 하였다. 옷을 벗어 들것을 만들어서 선생님을 길 옆으로 모시고 점퍼를 벗어서 선생님의 얼굴을 가려드렸다. 金容德, 김희로씨와 상의하여 군부대에 협조를 요청하기로 하였다.
 
  김희로씨가 군부대에 가서 군의관과 위생병을 데리고 왔으나 회생할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나는 파출소로 가고 그곳에서 포천 경찰서로 가 그곳 구치소에서 하루저녁을 자고 다음날 오후 의정부 검찰지청으로 가게 되었다. 張선생님 사모님께서 신원보증을 해주셔서 의정부 검찰지청을 나오게 되었다. 의정부 검찰지청을 나와 이문동 집에 들렀다가 선생님 댁으로 갔다.
 
  그날 저녁 선생님 댁에서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사고 상황을 말씀드렸다(함석헌 선생님, 계훈제 선생님, 張선생님의 숙부님 그리고 한두 분이 더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통일당 주도의 영결식이 명동 성당에서 있었다. 영결식이 끝난 뒤 전세 버스를 타고 葬地로 가서 하관식에 참석했다. 제일 뒤에서 몸둘 바를 몰랐다. 장례식이 끝난 다음날 고향 당진으로 돌아왔다.
 
  1975년 봄의 귀향은 내일을 기약하며 희망을 가지고 돌아오는 길이었으나 그날의 귀향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절망과 체념과 슬프고 공허한 귀향이었다.
  선생님! 홀로 길거리에 남겨두고 가셨습니다. 길거리의 돌처럼 이 사람한테 차이고 저 사람한테 차이는 가련하고 방황하는 초라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선생님!
 
  SBS팀에게 한 말
 
  지난 2월13일 오후 2시쯤 서울방송에서 전화가 왔다. 몸이 불편하여 자고 있는 중이었다. 여자분의 목소리였는데 선생님의 山行 사고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기획중이라고 했다. 오후 9시30분쯤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몸도 좋지 않고 하여 잠을 청하고 있는 중이었다. 방에 있는 점퍼를 아무렇게나 걸치고 나갔다. 문밖에는 ENG 카메라를 멘 기자 등 서울방송에서 온 사람 세 명이 張선생님 관계에 대한 취재차 왔다고 했다. 방으로 안내했다.
  『張선생님이 너무 쉽게 잊혀져 가고 있어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려 한다』고 했다. 선생님의 업적도 많은데 왜 하필 그 부분을 다루려 하느냐고 항의했다.
 
  『18년 전에 결론이 내려진 것인데 무얼 더 말하라는 것인가. 그리고 당시 사모님께서도 신원보증하여 주셔서 종결된 것인데 무엇을 더 말할 것이 있는가. 나는 그 당시 선생님 댁에서 함선생님, 계선생님 등에게 사고 상황을 소상하게 말씀드렸다. 그 외에는 더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선생님댁에서 당시 가족, 친지들에게 설명드렸던 사고 상황 테이프를 가지고 있다니 그것을 참고해보라. 불행했던 그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다. 나더러 그걸 또 반복해서 말하란 말인가. 이건 혹독한 고문행위이다. 나는 싫다. 누가 무어라 말해도 나는 싫다』
 
  자정이 가까와 오고 있었다. 가시는 손님에게 자고 가시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내 본의는 아니엇을 것이라고 하며 나를 위로해 본다.
 
  지난 3월14일 방영된 서울방송 「그것이 알고 싶다」 제1부를 나는 보지 않았다. 예고 선전 때에 보니, 선생님을 인형으로 만들어 마구 절벽에서 굴렸고 타살이라고 선전하는 것을 보고 그 이후 서울방송 프로는 보지 않았고 제1부 방영시간에 잠을 자버렸다. 다만 서울에 있는 아이들에게 녹화해두라고만 일렀다.
 
  5월4일 저녁, 이 글을 쓰기 위해 보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녹화해둔 것을 보았으나 이 글에 쓸 것은 머리에 떠오르지 않고 머리만 아프고 잠도 오지 않고 마음에 괴로움만이 자리잡고 있었다. 집 주위를 몇십번 돌다가 하루를 보내고 말았다. 다음날도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해 머리는 무거웠고 아무 것도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무슨 말을 또 하란 말인가
 
  3월28일 방영된 「그것이 알고 싶다」 2부는 타살로 이끌어가기 위해 상봉동에서 「산에 가지 못하겠다」는 말을 전하러 오신 선생님을 내가 「억지로 끌어올렸을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모시던 선생님이었고 존경하는 분이었는데 그 분께 인사도 올리고 『타십시오』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가지 않겠다는 선생님을 억지로 끌어올렸을 것이라고 묘사할 수 있는가.
 
  방송과 신문에서는 또 「金씨는 張俊河씨의 장례 직후 잠적했고 최초의 진술 외엔 아직도 입을 열지 않고 있다」고 적고 있었다. 선생님을 잃어버린 이 초라한 사람이 갈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는가.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나 슬플 때나 나를 포근하게 감싸주는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도 잠적이라고 하는가.
 
  고향으로 가지 않고 親知들을 찾아 다니며 서로 어색한 대면을 해야 하는 환경에 머물러 있으란 말인지…. 나는 그런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다.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는 것을 나는 싫어한다. 이해가 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선생님과의 山行에서 있었던 불행했던 일들을 다시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 나는 할 말을 다했는데 나를 의심하는 사람들은 내가 말을 하지 않는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없었던 일을 지어서 말하라는 것인가. 시작도 끝도 없고, 새로운 사실도 없는데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이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을 나 혼자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이해하려고 하지는 않고 부정적으로만 보는 불신 풍토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말해도 믿지 않을 것이고 없는 말도, 없는 것도 마음대로 만들어 한 방향으로만 몰아가고 있는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하란 말인가.
 
  나는 힘을 잃은 사람이다. 나의 입장에서서 나를 이해하려고 하고 심정적으로 도와주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괴롭기만 하다. 「힘이 정의인지, 정의가 힘인지」 어떤 것이 옳은지 몰라도 나에게는 그런 진실을 밝힐 힘이 없다. 나는 말할 수도, 말하지 않을 수도 없는 처지에 서서 갈 곳을 잃은 거리의 고아가 되어 버렸다.
  신문, 잡지, 텔레비전, 정치권에서 나를 향해 공격해오고 있다. 유일한 등산 동반자이며 목격자의 증언도 부정한다면 그곳에서 어떤 진실이 밝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부모님이 자식을 데리고 외출하거나 집안에서 한 방에 같이 있었는데 불의에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면 자식이 부모님을 돌아가시게 했다고 말할 것인가. 자식이 갑작스럽게 변고를 당하면 부모가 그렇게 했다고 할 것인가.
 
  운명이었다
 
  8년여 동안 존경하고 따르며 모시던 분을 무엇 때문에 일부러 위험한 경지로 몰아가려고 했겠는가. 명예, 돈 때문인가. 아니면 정치적 목적 또는 원한 관계에서였겠는가. 나는 정치적으로는 선생님이 계셨기에 내가 있다고 생각했고 선생님을 떠나 생각해 본 일이 없다. 명예, 돈 때문에 눈이 멀어버린 사람은 결코 아니다. 선생님께서 他界하신 후 나는 정치적 욕망도 꿈도 다 버렸다. 선생님과 가까웠던 분들도 만나지 않았다.
 
  단절된 18년! 선생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는 도의적 책임감에 억눌려 한스러운 18년을 보냈다. 선생님을 존경했기 때문에, 선생님을 모셨기 대문에, 선생님과 산행을 함게 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온갖 공격을 받으면서 짓눌려 살아왔다.
 
  18년!
  선생님과 함께 산행을 하게 됐던 것은 운명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나는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는 운명 찬양론자는 아니다. 나는 교단에서 「자기의 운명은 누구에 의해 개척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 의해 개척된다」고 강조하는 때가 자주 있다.
  그런 내가 운명을 거부하지 못하고 그것을 개척하지 못했다 하는 自責을 해본다.
 
  75년 8월16일 저녁 선생님댁에 가려고 했을 때 선생님께서 산행을 하신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그냥 인사만 드리고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산행 때 식사 준비 지점에서 하필 내가 선생님을 찾아나섰던 일, 선생님을 찾아나섰을 때 길도 여러 갈래가 있었을 텐데 하필 선생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 등산로 입구에서 군인 두 명과 커피를 드시고 있던 선생님을 만난 일, 일행이 기다린다고 하시면서 바로 질러 가자고 했을 때 말리지 못하고 따라갔던 일, 벼랑이 나타났을 때 더 이상 가지 못하겠다고 주저 앉아 버렸다면, 그리 위험하지 않다고 느껴지던 곳에서 선생님이 떨어지던 그 운명의 순간들….
 
  인간의 힘으로 그 순간을 거역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위대한 순간이 되었겠나. 그러나 나에게는 그런 위대한 힘이 주어지지 않았다.
[ 2012-09-02, 00:5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