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응집력의 정체

일종의 동족집단

경북고 동문들은 문화인류학적 측면에서 몇 가지 뚜렷한 집단적 특징을 갖고 있다.
·경북여고출신 아내가 많다.
·조직이 다원화돼 있고 조직의 머리보다 허리와 하체가 튼튼하다.
·결혼에 의해 처남 남매 간 사돈간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경우가 많다.
·서로 자주 만난다. 이번 취재과정에서 굳어진 기자의 개인적 경북고 인맥관(觀)을 덧붙이자면 대강 이러하다.
·초면 인사가 끝나면 고향을 묻는다.
·언행이 신중하고 예절이 바르다.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다. 예컨대 盧대통령을 공공연하게 비판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단합된 힘으로 밀어준다. 말과 행동이 다른 경우가 많다. 단순·순진·직정과는 거리가 멀다.
·끈기가 있다.
·경북고 인맥이 불평등하게 중용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능력 없는 사람이 경북고 출신이기 때문에 요직에 앉았다」는 말을 듣기는 어렵다.
한 언론인은 경북과 경남인들의 기질을 비교하면서 『가장 전형적인 경남사람은 全斗煥, 가장 전형적인 경북사람은 盧泰愚일 것이다』고 했다. 『全斗煥·金泳三·許文道씨등 경남인과 朴正熙·盧泰愚·朴哲彦씨를 비교하면 차이가 단번에 드러납니다. 경남사람들은 직선적이고, 자기 중심적·영웅주의적 기질이 강한 반면에 뒤가 없는데 경북사람들은 신중하고 복잡하면서 속을 잘 드러내지 않지요』

盧대통령은 여러 면에서 가장 전형적인 경북고 출신이다. 신중한 사고방식, 부드러운 대인관계와 끈질긴 권력의지에서 그렇고 경북고 출신들을 중용하는 점에서도 그러하며 가계(家系)가 그렇다. 부인 金玉淑여사는 경북여고출신이며, 동생 노재우(盧載雨)씨도 경북중 출신이다. 대통령은 경북고 한 회 후배인 金復東씨와는 처남 관계이다. 안팎으로 경북고·경북여고와 얽히고 설켜 있는 것이다.

● 盧泰愚대통령과 동기생인 정소영(鄭韶永) 전 농수산부장관의 아버지와 장인은 다 같이 대구고보 12회이며 형인 정원영(鄭元永)씨(경북고 야구부후원회장 역임·제일산부인과원장)도 경북고 3회 선배이다. 대구고보15회인 전 법무장관 裵泳鎬씨는 鄭韶永씨의 이모부. 경북고 6회 후배인 신라교역 사장 박준형(朴埈亨)씨와는 처남매부간이며, 鄭씨의 부인은 고교 선배인 이효상(李孝祥) 전 국회의장의 사위인 박재양(朴載陽)씨(전 대구은행 감사)의 누님이 된다.

● 백남억(白南檍) 전 공화당 의장의 부인은 白씨의 대구고보 후배인 전 민정당 대표위원 박준규(朴浚圭)씨의 누님이다. 朴씨의 부인은 朴씨의 대구고보 후배인 조운해(趙雲海)씨의 사촌여동생이다. ·재무장관을 지낸 千炳圭씨의 부인은 검찰총장과 법무장관을 지냈던 경북고 2년후배 吳鐸根씨의 누님이다.

● 신현천(申鉉千)씨(전 경상대총장)는 경북고 26회로서 20회인 申鉉碻 전 총리의 동생이다. 고 朴대통령시절에 청와대 정무비서관(문교·사회담당)으로 있다가 申총리가 재임 중이던 80년 3월에 총장으로 임명되었었다. 申鉉碻, 申鉉千, 신현정(申鉉貞)씨(32회·서울시립강남병원 원장)등 세 형제는 모두 경북고 동문이자 박사들이다.

● 작고한 전 국회의장 李孝祥씨의 두 아들 文熙(32회) 문조(文助)씨(40회)도 경북고 출신이며 3부자는 모두 박사다.

● 송진훈(宋鎭勳.40회·대구고법부장판사) 송진현(宋鎭賢.52회·서울지법판사)형제와 두 형제사이의 송진혁(宋鎭赫)씨(42회·중앙일보 논설위원)등 3형제도 유명한 경북고 동문형제다.

서로 밀고 당겨주고

● 「경맥 65년」이란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李源京 동문은 문공부장관에 취임하자 당시 사무관이던 許萬逸동문을 비서관으로 기용했다. 장관비서관이라면 별정직이므로 특채하는 것이 상례인데, 許동문을 발탁한 것은 선배로서의 배려였다고 보여진다」

● 79년 12월 申鉉碻내각이 출범할 때 申총리는 상공부차관이던 배상욱(裵相稶) 씨를 체신부장관으로 끌어올렸다. 裵장관은 경북고 후배일 뿐 아니라 고향후배이며, 申총리가 대구대학(현 영남대학)교수일 때 학생이었다. 申씨는 상공부광무국장 시절에 고시행정과를 거쳐 관계에 첫발을 디딘 裵씨를 광무국에 끌어들여 돌봐주었다. 裵씨는 그 뒤 상공부에서 25년간 근무하면서 광무국장, 특허청장을 거쳐 차관에까지 올라갔던 것이다. 申총리는 또 경북고 후배인 박동진(朴東鎭)외무를 유임시켰고 서울신문 감사인 경북고 후배 문태갑(文胎甲)씨를 총리비서실장에, 문공부 공보국장이던 경북고 후배 黃善必씨를 공보비서관으로 발탁했다. 黃씨는 동아일보 기자시절에 경북고 선배 李源京 문공부장관에 의해 발탁돼 문공부홍보 조정관이 되었으니 두 선배들의 인수인계시 보살핌을 받은 셈이다. 신현확(申鉉碻)씨는 자유당 부흥부장관 시절에는 기자이던 경북고 32회 鄭春澤씨를 비서관으로 발탁, 그가 외환은행장으로까지 출세할 수 있는 길을 터 주었다.

● 申鉉碻씨는 1970년대 초 김성곤(金成坤)씨의 쌍용그룹에서 쌍용양회 사장으로 있었는데 정계로 나갈 때 후임자로 경북고 동기인 정수창(鄭壽昌) 당시 삼성물산 사장을 추천하려다가 鄭씨가 두산그룹으로 가버리자 3회 후배인 서성택(徐聖澤)씨를 추천, 사장직을 물려주었다.

● 경북고 선배들이 바톤 터치를 해가면서 후배를 아껴준 경우를 文胎甲 전 서울신문사장에게서 찾을 수 있다. 文씨는 경북고 선배 金成坤씨의 신임을 받은 기자로서 동양통신에서 15년간 일하면서 정치부장, 편집부국장을 거쳐 73년에 유정회 국회의원이 되었다. 79년에 서울신문 감사로 돌아와 있다가 그해 말에 경북고 선배 申鉉碻총리에 의해 총리비서실장으로 임명되었다. 文씨는 78년엔 경북고 동창회 중 엘리트 그룹인 경신회의 창립을 주도하여 초대회장이 되었다. 총리비서실장을 물러난 뒤에도 서울신문사장, 범민족올림픽추진중앙협의회 본부장을 지냈다. 그의 형 始甲씨는 외과의원 원장인데 경북고 27회이며, 文熹甲민자당의원은 그의 고교후배이자 사촌아우이다. 그는 서울신문 사장직을 그만둘 때도 경북고 선배인 이우세(李禹世)씨에게 물려주었다.

● 최근에 체육부의 3대자리-장관, 차관, 국민체육공단 이사장 자리가 바뀐 것과 관련해서 또 경북고인맥 이야기가 들먹여졌다. 정동성(鄭東星) 전 민정당 총무는 李漢東의원계열이었는데 친 朴哲彦계로 방향전환한 뒤 장관이 되었다는 소문이 나돌더니 차관에는 장관처럼 체육에 전혀 경험이 없는 김용균(金容鈞)변호사가 임명됐다. 金변호사는 서울법대 출신으로서 朴哲彦장관과는 국보위법사위원으로 함께 일했으며 민정당 동래을 지구당 위원장직을 맡고 있었다.

분권화된 조직

朴哲彦씨의 차관 추천설이 나도는 가운데 이번엔 文胎甲·전 범민족올림픽 추진중앙협의회 본부장이 국민체육진흥공단 이사장으로 내정되었다. 文씨가 임기 2년을 남기고 있는 金玉珍이사장을 밀어내는 식으로 들어오자 체육계에선 그의 사촌동생 文熹甲의원과 朴哲彦씨의 작용설을 퍼뜨리면서 『체육엔 경험이 없는 이들이 정치적 배려에 의해 체육계의 지휘부를 장악했다』고 반발하였다. 경북고 재경동창회의 회장은 고려병원 이사장 조운해(趙雲海)씨다.

재경동창회 89년도 예산은 3천3백42만원이었는데, 동기별 회비와 회장협찬금이 약 70%를 차지했다. 재경동창회사무실은 쌍용빌딩 3층에 있는 약 5평 짜리 방인데, 경북고 인맥의 큰 봉우리였던 고 金成坤씨가 영구임대 해준 것이다. 재경동창회는 새 오피스텔을 구해서 옮기기도 하고 지금 3억 원의 조성사업을 벌이고 있다. 재경동창회 상근 직원은 사무국장 노정식(盧正植)씨와 여직원 등 두 명이다. 경북고 출신의 위세에 비해서 동창회 사무실의 규모는 작은 편인데, 이는 경북고 동창회가 기별중심으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동기회 중에는 별도 사무실을 가진 곳도 있고, 운영예산이 동창회를 능가하는 동기회도 있다고 한다. 경북고 동창조직은 중앙집권적이라기보다는 지방분권적이며, 정치제도에 비교한다면 대통령중심제가 아니라 내각책임제적이다. 머리도 튼튼하지만 허리와 하체가 더 강건한 것이 경북고 동창조직의 강점이다.

경북고 동창조직의 특징은 자율적이고 다원화돼 있다는 점이다. 총동창회의 직속은 아니지만 외곽조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으로는 노동(老童)동창친목회, 경신회(慶信會), 경맥회(慶脈會), 경록회(慶綠會), 경백회(慶白會), 경맥산악회가 있다. 노동회는 일제시절 대구고보에 다녔던 노년층의 조직이다. 경신회는 해방 뒤 경북고교를 졸업한 40대중반∼50대후반의 유명인사들 모임이다. 경북고 출신자들 중 핵심인사들의 모임인 것이다. 1978년에 창립되었고 동기회의 추천을 받은 사람들이 수십만 원 이상의 회비를 내고 입회했다. 회원은 4백여 명인데 지금 회장은 서울대경제학과 박우희(朴宇熙)교수이다. 白南檍, 申鉉碻, 金埈成, 吳鐸根, 朴東鎭, 金容喆, 李源京씨 등이 고문으로 있고, 盧泰愚, 권영각(權寧珏.건설부장관), 권오기(權五琦.동아일보 부사장), 文胎甲(전 서울신문 사장), 徐東權, 鄭鎬溶, 金復東, 함태용(咸泰埇.장기신용은행회장), 정소영(鄭韶永.전 농수산부 장관), 鄭春澤(전 외환은행장), 金滿堤(전 재무장관), 李鍾九(육군참모총장), 盧載愚(대통령 동생), 朴鍾喆(서울지검장), 姜信玉(민자당 의원), 丁海昌(전 법무부장관), 徐榮澤(국세청장), 이진설(李鎭卨.경제기획원 차관), 李秀正(대통령 공보수석 비서관), 金榮馹, 朴哲彦, 孫普坤, 조해영(曺海寧.내무부 지자제준비단장), 이해봉(李海鳳.총리실 제3조정관), 최기홍(崔基洪.수도방위사령부 참모장), 안택수(安澤秀.토요신문 편집국장) 등 사회의 각 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이들이 경신회원으로 망라돼 있다.

국내파

회원이 1백50여명인 경맥회는 50대 후반 이상의 노년층 골프모임이며, 경록회는 40대후반∼50대중반 층의 골프모임이다. 경백회는 테니스 동호인 모임. 경북고 동문들은 매년 5월 대구의 모교 운동장에서 열리는 경맥제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올해가 18회 축제. 수천 명의 경북고 동문들이 부부동반으로 전국에서 몰려와 이틀간 야구, 바둑, 윷놀이 등을 하는데, 대구전체가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다. 경북고 43회의 경우, 동기생은 약 7백 명(경북중 졸업자 포함)인데 서울거주자는 2백10여명이다. 미국에 이민간 동기생은 20여명으로서 다른 명문고교에 비해 퍽 적은 편이다. 경북고 출신들은 스스로를 국내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경기고 52회(56년 졸업자)의 경우 4백74명중 약 30%인 1백47명이 해외에 거주하고 있다. 경북고 43회 서울거주자들은 근무지 중심으로 지역분회까지 조직해 놓고 있다. 명동회, 서소문회, 서남회, 서강회(서초·강남구)등이다. 이들은 분회별로 매달 한 번씩 모이는데 출석률이 30∼40%나 된다고 한다. 43회 출신들은 또 테니스, 골프, 등산 등 취미서클을 조직하여 매주 행사를 갖고 있다.

법조계 근무 경북고교출신들은 경법회를 조직,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직업별(또는 직장별) 동문 조직도 잘 짜여져 있다. 경북고교출신들의 아내들 중에는 경북여고 출신들이 유난히 많다. 경북지방의 남녀 고교중에서는 두 학교가 독보적인 존재이므로 자연스럽게 결혼으로 맺어진 경우가 많은 것이다. 『집사람이 경북여고출신이 아니면 소외감을 느낀다』고 우스개를 하는 경북고출신도 있다. 경북여고출신 아내들은 그들대로 자주 만나고 있어 안팎으로 끈끈하게 엮이어 있다. 그러다가 보니까 서로 중매를 많이 하고 있다. 경북고교출신 ㄱ씨는 동기생의 여동생과 결혼하고, ㄱ씨의 누님은 경북고 선배의 아내가 되는 식의 인척관계로 얽히는 예가 많다. 사회적 유동성이 높지 않았던 대구사회를 배경으로 한 이런 독특한 관계의 확산은 경북고동문이 일종의 동족집단이 아닌가 할 정도의 끈끈하고 복잡한 조직을 만들어낸 것이다.

경북고 41회인 이양무(李良武)외환은행 장안동지점장은 『우리는 가족 다음으로 동기생들을 자주 만날 것이다. 일요일에는 거의 동기생들과 어울려 운동하고 노느라고 시간을 다 보낸다. 「친구 있고 마누라 있다」는 농담까지 할 정도이다』고 했다. 최근에 부인과 사별한 한 경북고교출신은 『요사이는 먼저 간 집사람한테 미안한 생각이 든다. 친구 좋아하다가 보니까 동문들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밤 12시가 넘었는데도 술내라, 밥내라 하면서 집사람을 부렸으니 약한 몸이 더 나빠지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우스개 반 진담 반 같은 얘기를 했다.

남의 눈치 안 봐

경북고의 군집력이 강한 것은 학연, 혈연으로 얽혀 있는 데다가 조직이 다원화 돼 서로 자주 만나기 때문이다. 자주 만나니 정도 생기고 의리도 굳어지며 단결력이 강화될 수밖에 없다. 한 경기고 출신 공무원은 『우리는 열 명이 있어도 서로 연결이 되지 않고 낱낱인데 경북고 출신들은 직렬로 엮으니 큰 힘이 생기는 것이다』고 했다. 朴哲彦정무1장관의 동기회는 몇 년 전 朴장관후원회 성격의 청민회(靑民會)를 조직했다. 청민은 朴장관의 호. 청민회 회원은 주로 중소기업체를 운영하는 사주들이다. 입회비는 수백만 원 정도이고, 기금이 10억원에 육박한다고 한다. 지난해 2월 10일에 있었던 경북고교 제70회 졸업식에서 朴哲彦씨는 청민회 회장 자격으로서 4백만원의 장학금을 학교에 전달하였다.

지난해 말 경기고출신 공무원들은 홍성철(洪性澈)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이상훈(李相薰)국방장관, 이종찬(李鍾贊) 민정당 의원 등 경기고출신 고위인사들을 중심으로 하여 망년모임을 가지려고 했으나 『오해를 받는다』고 말리는 사람들이 많아 성사가 되지 못했다고 한다. 경기고 출신의 한 고급 공무원은 『한때 우리도 李鍾贊의원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모임을 만들려고 했으나 李의원이 조심하고 동문들이 소극적이라 성사되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남의 눈치 안 보고 朴哲彦씨를 밀어주는 경북고출신들과 다른 점이 바로 이런 면이다』면서 『경기고 출신들은 모래이고 경북고 출신은 찰흙 같다』고 했다. 남의 눈치를 별로 안 보고 잘 어울려 다니는 경북고 출신들의 기질을 「배짱좋다」고 부러워하는 시각도 있지만 「공조직보다 사조직을 더 중요시한다」는 비판도 있다. 마찬가지로 남의 눈치를 많이 보는 경기고 출신들의 기질을 「소신이 약하다」고 비난하는 쪽도 있지만 「지연이나 학연을 드러내놓고 보이지 않으려는 건전한 상식」이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많다.
부산고 출신 한 변호사는 『경기고 출신들이 그 수많은 인재들을 중심으로 경북고처럼 집단주의적 행동을 취했다면 한국은 침몰했을 것이다』고 했다. 경북고출신의 집단주의가 전 근대적인 것이며 경기고 출신들의 개인주의가 오히려 민주사회에 적합한 덕목이라는 것이다.

한 경남고교 출신 중견 언론인은 이렇게 말했다. 『지난 87년 선거 때, 경북고출신 동료기자가 한 사람 있었어요. 이 기자는 야당성향이 강한 사람인데 동문들로부터 「왜 어제(盧泰愚후보지지)모임에 나오지 않았느냐」는 식의 전화를 하루에도 얼마나 받는지 옆에서 보기에도 딱할 정도였어요. 그 무렵 경남고 동기 모임이 부부동반으로 있었는데 그런 자리에서는 정치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뭣해서 모두 사담만 하고 있었지요. 이때 정부기관에서 일하는 한 동기생이 단상에 올라갑디다. 「여기 여자분 중에서 경남고교 나온 사람 없지요」라고 하더니 「경남고 나온 남자분들은 金泳三선배를 찍겠지만 경남고를 안나온 여자분들은 남편 따라가지 말고 소신대로 찍으세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경북고와 경남고 출신의 너무 다른 행태를 보고는 이 선거는 金泳三씨가 진 선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조직의 체질화

경북고교 출신 정치인들의 행태를 연구하는 데는 서울법대 학생회장 선거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지금 권부 깊숙이에서 힘을 쓰고 있는 경북고 출신들의 핵심은 서울법대 출신이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 서울법대 재학생의 고교출신별 분포는 경기고 출신이 늘 제일 많았다. 2위는 서울고와 경북고가 엇비슷했고, 그 밑으로는 경남고, 부산고, 경복고, 광주일고, 전주고 출신들이 깔려 있었다. 경북고 출신들은 반(反)경기고 연합전선을 만들었다. 즉, 서울고 및 경남고 출신들과 손잡고 학생회장을 이 3개 고교 출신들이 돌아가면서 하기로 약속, 10여 년간 경기고 출신은 학생회장 선거에서 떨어지기만 했다. 60년대 말에 경기고 출신들은 광주, 전주고, 부산고 출신들과 제휴하여, 이 경북고 중심의 카르텔에 도전한 적이 있었다. 부산고 출신 모임에서 한 학생이 『대학교 선거에서 출신학교별로 표를 모아주는 것은 지성인답지 못하다』면서 반발, 부산고 표는 경기고 후보에게 집중되지 못했다. 결국 이 도전은 실패했는데, 이 사건을 두고 정치적인 행동이 뛰어난 경북고 출신의 성향과 직정적인 대신에 전략적 사고가 부족한 부산고 출신의 특성을 비교하는 이들도 있다.

3당합당에 의한 민자당 출현이나, 요직에 앉힐 경북고 출신이 없을 때는 친경북고 인물을 미는 요사이의 인사경향이 일부 경북고 인맥의 오래된 관행이라는 얘기다. 최근 개각돼 朴哲彦장관이 법무장관 자리에 이종남(李種南)씨를 민 것은, 경남고 출신이며 朴씨와 가깝다고 볼 수 없는 김기춘(金淇春)검찰총장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었다.

경북고 출신들의 중요한 특성중 하나는 사조직을 잘 만들고, 잘 움직여 나간다는 점이다. 끈끈한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경북고 동문 조직이 있으므로 가능한 것이다. 우리 사회 요소 요소에 자리잡고 있는 막강한 경북고출신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있으므로 이 집단 자체가 한국최대의 사조직인 것이다. 공조직이 법규와 합리화 능률을 바탕으로 존립하는 데 대해 사조직은 인간관계나 공동의 이해관계를 존립근거로 삼게 된다. 우리나라의 가장 유명한 사조직인 하나회는 全斗煥·盧泰愚·金復東·鄭鎬溶·權翊鉉·白雲澤 등 대구출신 장교들에 의하여 조직되었다. 그 중심은 경북고 출신이었다.

공무원이 선거운동

경북고 인맥이 움직이는 또 하나의 최신 사조직은 朴哲彦의 월계수회다. 1987년 7월 월계수회는 세종문화회관 뒷편의 로얄빌딩 520호실에 지휘부를 개설했다. 「컴퓨터 연구원」이란 위장간판을 달고 내부적으로는 DQ(Data Quest)라고 불렀다. 朴씨는 이를 점조직으로 운영하고 있다. 월계수회는 전국에 40여 개의 분회를 갖고 있는데 각기 이름을 독립적으로 붙여 별도의 조직인 것처럼 위장하고 있다. 예컨대 서울의 지역별분회는 서부문화 연구회, 팔공회, 심지회, 경맥, 금진회 등으로 불리고 있다. 부산의 분회조직은 지역문제연구소, 청소년문제연구소로 불리며, 광주분회는 무등회, 충북분회는 충우회, 대전분회는 청림회 식이다. 월계수회의 주요 간부는 경북고 출신이다. 월계수회의 조직상 특성은 경북고의 사조직 문화를 반영하는 구석이 많다. 월계수회의 발기인이거나 핵심적 역할을 하는 경북고 출신으로는 강재섭(姜在涉)의원, 현재의 사무국장 金正一씨(전 한국해원노조연맹 기획실장·41회), 조영승(曺英承) 체육부 국제국장(41회) 등을 들 수 있다고 한다. 월계수회의 회원들은 대부분 자영기업 사장들로서 이들은 운영자금을 자체적으로 조달하고 있다.

월계수회 발기인에는 朴씨를 비롯 姜在涉(당시 안기부 근무)·曺英承(당시 서울올림픽 조직위 파견 근무)·주혜란(용산구보건소장) 등 공무원이 네 명이나 끼여 있었다. 일부 경북고 인맥의 단점인 공사구분의 불명확성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제대로 된 나라라면 선거법위반으로 형사소추를 받았어야 할 이 공무원들의 선거개입행위는 그 뒤 제재는 커녕 격려만 받았다. 盧대통령은 월계수회의 관리를 민정당에 맡기지 않고 친척인 朴씨에게 맡김으로써 사조직화해 버렸다. 이것이 민정당내 불협화음의 한 요인이 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朴哲彦의원은 사석에서 대담한 이야기를 더러 한다.
『나는 全대통령 시절부터 盧泰愚대통령 만들기에 주력했던 사람이다』
『나는 대통령선거에서 월계수회를 조직, 운영하였다』
全대통령시절 朴씨는 청와대 비서관과 안기부장 특별보좌관으로 있었다. 그런 그가 두 주인을 섬긴 것도 문제이지만 공무원 신분으로서 대통령선거에 깊이 개입했다는 얘기를 털어놓은 저의는 무엇인가. 朴의원의 한 측근은 『이제는 공소시효도 지났는데...』라고 했다. 그래도 숨겨야 할 공무원 선거운동 사례를 자랑삼아 말하는 태도에서 일부 경북고 출신들이 가진 자신감과 초법적 특권의식을 읽을 수 있다. 안기부 특별보좌관이 金大中후보지원운동을 공공연히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월계수회를 취재했던 한 기자는 朴씨의 태도는 『법이란 것은 원래 힘없는 사람들이나 지키는 것이다』는 식의 오만이라고 비판하면서 월계수회의 비밀 결사적인 속성이 더 우려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