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庾信, 지압, 폴 니츠의 대전략 : [군사력은 방패, 人權은 창이다]통일의 결정적 시기를 눈 앞에 두고도 우리의 對北전략목표가 평화공존인지 흡수통일인지를 알 수 없게 된 상황에서 통일선진조국으로 가기 위한 이 마지막 관문을 어떻게 통과할 것인가. 비굴한 평화와 값비싼 통일 사이에서 고민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오늘날 한국에 어떤 의미를 던지는가. 김춘추(金春秋)의 평화공존론을 반대하고 對唐결전을 선택하여 민족사의 황금기를 건설했던 金庾信, 민심을 얻으면 강대국을 이길 수 있음을 실증한 지압, 공산주의를 군사력으로 막은 뒤 인권으로 공격하라고 충고한 니츠, 합중국을 유지하기 위하여 남북전쟁을 선택했던 링컨. 이들은 통일에는 공짜가 없음을 가르치고 있다. 통일에 따른 희생을 요구할 수 있는 국가 지도부와 그런 희생을 각오할 수 있는 국민만이 1류 국가, 1류 시민을 만든다
<1997년 10월 월간조선>
니만의 기자들
기자가 다닌 하버드대학 니만 재단(財團)의 1996∼97년 연수생은 21명이었다. 이름의 영어 표기 알파벳 順으로 치면 밥 블라우 기자가 1번. 37세의 이 기자는 시카고 트리뷴의 특집부장으로서 키가 작고 재비른 유태인이었다. 아내 리어는 미국에서 돈을 가장 많이 버는 잡지인 피플誌의 기자 출신으로서 남편과 함께 한 해를 보내기 위해서 따라왔다. 니만 財團은 연수생으로 선발된 기자의 배우자와 자녀에 대해서도 연수생과 꼭 같이 대우하여 세미나는 물론이고 하버드대학의 강의를 들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블라우 기자는 야구 농구 팬으로서 나와 취미가 같았다. 서로 만나기만 하면 시카고 화이트 삭스와 시카고 불즈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이 부부는 지난 6월 우리 연수생들의 축하 속에서 첫 딸을 출산하였다. 이름도 유태인식으로 한나라고 지었다. 최근에 이 아기의 사진을 인쇄한 엽서를 보내왔다.
2번인 마리아 카발렐로는 34세의 콜롬비아 잡지 여기자. 수사식 보도전문기자인데 주로 코카인 밀매조직에 대한 폭로기사를 써서 유명하다. 조직 범죄자들로부터 여러 번 테러 위협도 받았으나 꿋꿋하게 취재를 계속하고 있다. 3번은 [Gab-je, Cho]로 표기되는 사람. 한 가지 기자가 후회한 것은 [Cho, Gab-je]로 표기하지 않은 것이었다. 미국 사람들은 친하다는 표시로 이름을 부르기 때문에 나는 [Gab-je]로 불리어졌다. 첫 만남 때 간단하게 [Cho]라고 姓을 불러달라고 주의를 주었는데도 이름을 부르는 이들이 많았다. 20대 기자가 60대 후반의 노기자인 니만 재단의 사무총장 빌 코바치씨를 {하이, 빌}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나도 {빌, 빌}해보았지만 아무래도 미안해져서 {미스터 코바치}라고 불렀다. 朴正熙를 [Park Chung Hee]이라고 표기하지 [Chung Hee, Park]이라고 표기하지 않듯이 우리式으로 영어표기를 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했다.
4번은 세르비아, 즉 구(舊)유고슬라비아의 잡지 기자 드라간 치칙. 33세의 이 기자는 만물박사였다. 나는 이 기자와의 대화를 통해서 유럽의 역사 공부를 많이 했다. 드라간은 보스니아 내전(內戰)의 취재담을 털어놓으면서 {보스니아系, 크로아티아系, 세르비아系 사람들끼리 꼭 이렇게 싸워야 할 이유가 없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잠자던 종교갈등을 부추기고 이를 피비린내 나는 인종청소로 몰고 간 것은 세르비아의 독재자 밀로세비치}라고 했다. 정치인들이 사적(私的)인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종교적 증오심을 부추긴 것이란 얘기였다. 지난 겨울 베오그라드에서 反정부시위가 일어나자 그는 신이 났다. 미국 방송에 출연하여 자국(自國)정부를 공격하곤 했다. 드라간은 그러나 밀로세비치의 정치술이 워낙 고단수이기 때문에 이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의 아내는 지금도 세르비아와 함께 유고 연방을 구성하고 있는 몬테네그로 출신이었다. 몬테네그로는 아드리아 海에 면한 산악국가인데 한번도 외세에 굴복한 적이 없다는 기록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 나라 사람들은 총기를 자유롭게 소지하고 있는데 아기의 생일이나 경축일에는 하늘을 향하여 총을 난사하는 것을 폭죽(爆竹)놀이처럼 즐긴다고 했다.
보겔 교수
5번은 호주 시드니 모닝 헤럴드紙의 워싱턴 특파원 필리타 클라크. 36세인 그녀는 아주 활달한 키다리 아가씨였다. 호주는 문화적으로는 英美계열이지만 경제적으로는 아시아, 그 중에서도 동아시아와 밀접하게 엮여있다. 필리타도 호주와 동아시아의 경제적 관련성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그녀와 나는 [일본 제일]이란 책을 써서 더 유명해진 에즈라 보겔 교수가 자신의 집에서 10여명의 학생들을 모아서 진행하는 세미나에 함께 참석하기도 했다. 보겔 교수는 東아시아를 전문으로 하는 학자로서 일본 중국 한국의 지도층 인사들과 교분이 두터워 미국의 對外정책에도 깊게 관계하고 있다.
지금은 하버드대학의 정치 행정 대학원인 케네디 스쿨 학장으로 있는 조셉 나이 교수가 미 국무부 차관보로 있을 때 입안한 [나이 이니셔티브]는 미국의 對아시아 정책의 골간이 되었다. 이 정책은 미국과 일본 간의 안보협력체제를 기본축으로 하여 중국에 대해서는 [인게이즈먼트 앤드 인라즈먼트](Engagement and Enlargement), 즉 경제적 교류를 확대함으로써 정치적 자유와 시장경제를 확대시킨다는 것이다. 이 新아시아 정책을 처음 발상한 사람이 보겔 교수였다. 그래서 [보겔－나이 이니셔티브]라고 불려지기도 한다.
보겔 교수는 하버드 대학에서 안식년을 얻어 미국 중앙정보부의 東아시아 담당 분석관으로 근무한 적도 있다. 한국에서는 교수가 정부에 들어갈 때는 적어도 장관 정도는 해야 한다는 식인데 미국에서는 국장급으로 들어갔다가 좋은 경험을 쌓고 돌아오는 세계적 학자들이 많다. 자리의 높고 낮음보다도 정부에서 일한 경험이 강단에서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필리타 기자는 한국에 보신탕用으로 사육하는 대규모 개농장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꼭 취재하러 가겠다고 했다. 나는 개의 권리도 중요하지만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서 유태인들처럼 도륙당하고 있는 북한 사람들을 취재해보라고 영문으로 번역된 月刊朝鮮의 특집기사를 주었다. 며칠 뒤에 만났더니 {이런 이야기가 여태까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니}라고 흥분하면서도 {문제는 이 세 명의 수용소 체험자들이 말한 내용을 객관적으로 뒷받침해줄 수 있는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편집책임자를 설득하여 한국으로 출장을 갈 수 있을 텐데…}라고 했다.
나는 {그런 식으로 객관적 증거를 요구한다면 아마도 북한이 붕괴된 뒤에나 기사를 쓸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아우슈비츠 같은 유태인 수용소도 그에 따른 정보는 많았으나 이 수용소들이 연합군에 의해서 해방된 뒤에 보도되었다. 통일된 뒤에는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처럼 세계가 경악할 것이 틀림이 없는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문제는 영어권 언론에서 본격적으로 제기하지 않는 한 국제적인 뉴스가 되지 않는다. 미국 정부는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지금으로선 외교적으로 이롭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다. 우리나라 언론도 수십만 동포가 도살당하고 있는 이 문제를 철새들의 수난 기사보다도 더 냉담하게 보고 있다. 북한에 무조건 식량을 보내야 한다고 나서고 있는 종교계 지도자 그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하여 입을 여는 사람이 없다. 고향에서 무시당하고 있는 기사거리를 영어권 기자들에게 써달라고 한다는 것도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베이브 루스의 저주
6번은 로리 코헨. 보스턴에 있는 미국 PBS(Public Broadcasting System)의 지방방송에서 주로 경제문제를 담당하는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는 40세의 여자였다. 남편은 사회복지 전문가. 이 부부는 어린 자매를 두고 있었다. 부부가 번갈아서 아이를 돌보아야 하기 때문에 세미나 때는 아이를 데리고 참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제르미란 이름을 가진 초등학교 2학년생은 우리 니만 연수생들 사이에서 많은 귀여움을 받아 한 가족처럼 가까워졌다. 이 부부도 유태인이었다. 작년 추수 감사절 때 로리의 집에 초청을 받아 갔는데 친가와 처가 식구들이 다 모여서 놀고 있었다. 유태인들은 여러 가지로 한국인들과 공통점이 많은데 가족 간의 유대가 강하다는 점도 그 중의 하나다. 미국에 사는 한국 교포들 중에는 유태인과 결혼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이런 가족문화의 공통성도 한 이유라는 것이다.
로리와 남편 리차드는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의 아메리칸 리그에 속하고 있는 보스턴 레드 삭스의 팬이었다. 리차드는 특히 보스턴 레드 삭스에 대해서 아주 냉소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 항상 팬들을 실망시킨다는 것이었다. 보스턴 레드 삭스는 시즌 초반에는 죽을 쑤다가 종장에 가면 분발하기 시작하여 팬들로 하여금 기대를 잔뜩 갖게 만들어 놓고는 결정적인 게임에서 결정적인 실수나 실투(失投)를 하여 팬들의 가슴에 상처를 남기는 전통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보스턴 레드 삭스는 2차세계대전 이후 네 번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으나 한 번도 이기지 못하여 1918년 이후 근 80년간 챔피언이 된 적이 없는 팀이다. 그래도 보스턴 사람들의 이 팀에 대한 충성심은 눈물겨울 정도로 끈질기다. 보스턴 사람들은 레드 삭스의 불운(不運)을 [베이브 루스의 저주]라고 풀이하고 있었다. 그 유명한 강타자 베이브 루스를 뉴욕 양키즈로 방출한 바보짓을 한 팀이라서 보복을 당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7번은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紙의 환경부장 마크 재피. 40대 중반인 그는 자기 소개 시간 때 한 시간 동안 괌섬의 뱀에 대한 생태조사 기록영화를 상영해주면서 취재담을 털어놓은 바람에 그날 밤 기자는 뱀에 물리는 악몽을 꾸어야 했다. 8번은 스리랑카 여기자로서 IPS(Inter Press Service)의 도쿄 특파원인 수벤드리니 카쿠치. 43세인 카쿠치 기자는 일본 교수와 결혼하였다. 카쿠치는 자기 소개 시간에 일본여성들의 직장생활을 다룬 다큐멘터리 필름을 보여주었다. 가정주부가 취직하고 싶어서 남편으로부터 어렵게 어렵게 허가를 받는 과정이 半드라마式 다큐멘터리로 소개되는 동안 니만의 美國系 여기자들은 웃기도 하고 한탄도 했다. 하도 동양의 남존여비(男尊女卑) 풍조를 비판하기에 내가 나서서 {그래도 한국에서는 남편이 월급을 받으면 아내한테 다 맡기고 매일 아침 일당을 받아 출근한다}고 했더니 조용해졌다.
뉴욕 타임스를 읽는 재미
9번은 AP통신 로라 킹 기자. 41세인 이 여기자는 도쿄 특파원으로 있으면서 한국에 와서도 여러 번 취재를 하여 한반도 사정에 대해서도 밝았다. 킹 기자는 아일랜드系였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성격이 솔직하고 감정적인데다가 노래 부르고 술마시기를 특히 놓아한다. 얼굴이 발갛게 홍조를 띠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서양 사람들은 한국인을 [동양의 아이리쉬]라고 얘기한다. 킹 기자는 {일본에서는 서양기자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사회의 깊은 곳으로 뚫고 들어가기가 힘든데 한국에 오면 마음이 편해지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미국 여자답지 않게 부끄럼도 타는 킹은 니만 프로그램이 끝나자 예루살렘 특파원으로 발령을 받아 히브리語를 배운다고 하버드에 남아 있었다.
10번은 보니 라파브. 캐나다 토론토의 CBC 방송사 프로듀서. 38세인 이 여성은 프랑스系 캐나다 사람이었다. 행사 때마다 항상 사진기를 갖고 다니면서 스냅 사진을 찍어서는 연수생들에게 선물하곤 하는 등 어떻게 하면 남을 기쁘게 해줄 것인가만 생각하는 듯한 여자였다. 스튜어디스 출신인 보니는 다큐멘터리 필름에 관심이 많았다.
미국 제1의 다큐멘터리 필름 제작자는 켄 번즈인데 그는 방영시간이 수십 시간이나 되는 [남북전쟁] [야구]를 제작하여 공영방송인 PBS를 통해서 방영했다. 그의 동생도 유명한 다큐멘터리 제작자인데 보니의 소개로 니만에서 초청하여 강의를 들었다. 이 형제의 작품은 서부개척시대의 이야기가 많이 있어 동화상(動 像)보다는 정지화면이 많았다. 그런데도 지루하지가 않은 것은 격조 높은 해설과 긴장감이 유지되는 줄거리 때문이었다. 영상은 정지되어 있어도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 속은 움직이도록 하였다. 켄 번즈는 하버드 대학이 초청한 강연회에서 {미국이 발명한 가장 아름다운 것 세 개는 헌법, 야구, 재즈이다}라고 했다.
11번은 필리샤 리. 뉴욕 타임스의 사회부 여기자였다. 40세의 흑인여성인 리 기자는 이탈리아系의 남편이 뉴욕에 살고 있어 주말부부 생활을 하고 있었다. 리는 흑인문제가 화제가 되면 {여러 가지 학설로 그 원인을 설명하려고 하지만 결국은 교육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기자는 니만의 세미나에서 뉴욕 타임스의 편파적인 한국관계 보도에 대해 여러 번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경우가 많아 리 기자에게 {미안하다}고 했더니 {미국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뉴욕 타임스를 욕하기 때문에 아무리 해도 괜찮다}고 웃었다. 기자는 하버드 근방에서 자취생활을 하면서 아침마다 던킨 도너츠점(店)의 국 같은 커피와 빵 두 조각, 그리고 1달러를 주고 산 뉴욕 타임스를 싸들고 찰스 강가의 벤치에 나가서, 또는 잔디밭에 앉아서 신문을 읽었다. 뉴욕 타임스의 국제면, 칼럼, 그리고 사망한 저명인사들에 대한 기사에 눈이 자주 갔다.
이 묵직하고 우직한 신문을 읽고나면 꼭 기사 몇 꼭지는 찢어서 호주머니에 넣게 되는 것이었다. 아무리 방송의 영향이 세다고 하더라도, 또 활자매체의 쇠퇴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아가더라도 뉴욕 타임스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매체]로서의 자리를 내놓지 않을 것이다. 뉴욕 타임스는 소우주라는 느낌이 들었다. 세계적 시각을 가진 점에서도 그러하고 어떤 현상에 진지하게 접근하여 그 본질을 보여주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미국인의 교양을 풍부하게 한다는 점이 이 신문의 가장 큰 기여가 아닌가 생각되었다. 하버드 대학의 강의실에서 교수들이 교재로서 가장 자주 배포하는 자료가 뉴욕 타임스와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 기사였다. 뉴욕 타임스는 미국을 움직이는 사랑들에게 일상적인 화제의 주제(主題)와 화제(話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12번은 ABC 방송의 프라임 타임 라이브 프로 담당 여자 프로듀서 테리 리히스타인. 36세의 이 유태인 금발여자는 니만 연수생 사회에서는 총무역할을 했다. 월요일 저녁마다 있었던 사운딩(Sounding : 자신을 소개하는 시간)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위원회의 의장이었다. 음식을 준비하고 물건을 나르며 자리를 배치하고 하는 궂은 일에 앞장서고 생일을 맞은 연수생들을 위한 파티를 잊지 않고 마련해주며 화제의 인물들을 초청하여 대화의 기회를 주선하는 일들을 도맡아 했다. 테리는 뉴욕에 있는 ABC 방송국 건물 맞은편에 있는 음식점에서 종업원으로 일했다고 했다. 이 음식점에 자주 오는 ABC 방송국의 간부들에게 부탁, 프로듀서 보조원으로 취직하여 지금 자리까지 올라간 행동파 여성이었다.
기자의 거짓말과 몰래카메라
그런 대담한 기질을 취재전선에서도 발휘하여 세계적인 특종도 많이 했다. 리비아 폭격 뒤에 있었던 가다피와의 인터뷰, 걸프戰 직전에 있었던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과의 인터뷰를 성사시킨 테리의 취재담은 듣는 이들을 흥분시키는 힘이 있었다. 몰래 카메라를 동원하여 정신병자 요양소의 비행(非行)을 취재한 과정은 탐정소설 같았다. 그 요양소에 어린 아들을 보내놓고 있는 부모를 찾아가서 {혹시 당신의 아이가 가혹한 대우를 받고 있을지 모르니 다음에 면회가실 때는 이 몰래 카메라를 천장 부근에 붙여놓고 오라}고 부탁한다. 비밀리에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서 요양소의 직원들이 환자들을 두들겨 패는 장면을 잡은 다음에는 취재팀의 한 사람을 그 요양소에 위장취업시켰다. 물론 허리춤에 몰래 카메라를 차고 돌아다니면서 문제될 만한 장면을 찍기 위해서였다. 20분짜리의 이런 프로를 만드는 데 보통 여섯 달이 걸린다는 것이었다.
요사이 미국 언론계(言論界)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은 몰래 카메라의 윤리 문제이다. ABC 방송국의 프라임 타임 라이브에서 방영한 식료품 상점 사건 때문이었다. ABC에서는 식료품 연쇄점에 한 직원을 위장취직시킨 다음 몰래 카메라로써 식품관리를 엉망으로 하고 있는 현장을 잡아 방송했다. 이 식품연쇄점에선 ABC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방송국에 대하여 수백만 달러의 배상판결을 내렸다. 비록 방송된 내용은 사실이지만 취재방식이 시민의 기본권을 침해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재판을 둘러싸고 취재를 할 때 신분의 위장이나 거짓말 같은 편법이 허용될 수 있는가 하는 논쟁이 벌어졌다. 테리는 문제의 프로를 만든 프로듀서는 아니었지만 같은 팀의 입장에서 ABC의 입장을 변호하느라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13번은 칠레의 주간지 카라스의 발행인이자 편집장인 베로니카 로페즈. 51세인 이 여기자는 자기 소개 시간에 하버드 스퀘어에서 활약하고 南美계통의 거리의 악단을 초청하여 우리의 귀를 즐겁게 했다. 칠레의 아옌데 민선(民選) 좌익정권을 무너뜨리고 군사정권을 세워 20년 이상 통치하고 있는 피노체트 장군에 대하여는 의외로 호평(好評)을 했다. 경제발전을 이룩하였고 건실한 중산층을 만들어 나라를 안정시켰으며 부패를 상당히 줄여 외국 언론의 보도와는 반대로 국민적인 지지가 높다는 것이었다. 베로니카는 아들 곤잘레스를 데리고 와서 하버드의 음악수업을 듣게 하고 있었다. 그는 음향전문가가 되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하버드 대학의 학보(學報)인 크림슨 기자들과의 소프트볼 게임에선 나와 함께 철벽 수비를 보였다(나는 유격수, 그는 2루수였다).
14번은 마이라 밍. 41세인 그녀는 로스앤젤레스 KTTV 방송국의 보도 프로그램 수석 프로듀서였다. 중국인과 흑인 사이에 태어난 마이라는 20여 년 전 로스앤젤레스에서 발생했던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기소되어 장기 징역형을 살고 있는 반체제 흑인단체의 한 간부 이야기를 추적하고 있었다. 이 흑인은 감옥에서도 무고함을 주장하면서 재심을 해달라고 호소하고 있었다. 백인 경찰관들이 사건을 조작했다는 것이었다. 지난 6월 로스앤젤레스의 법원은 이 흑인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받아들여 형집행정지로 석방한 뒤 재심을 받도록 허가해주었다.
미국인은 왜 노래를 두려워하는가
15번은 오레곤주에서 나오는 유명한 지방지 오레고니언紙의 리처드 리드 기자 부부. 39세의 리처드는 도쿄 특파원으로 있으면서 한국, 중국, 홍콩을 두루 취재한 아주 부지런하고 아시아의 문화를 이해하는 기자였다. 그의 아내 킴은 부산에서 한 1년간 산 적도 있었다. {나는 김씨다}라고 말하곤 했다. 동양을 취재한 미국 기자들과 만나서 이야기하면 마음이 편했다. 서구 중심의 편협한 사고(思考)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동양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동안 그들의 몸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동양적 분위기가 묻어 있게 된 때문이리라. 리처드 부부와 밥 브라우, 그리고 나는 보스턴 시내 한국인이 운영하는 노래방에 간 적이 있었다. 한 세 시간 동안 노래를 불렀다. 기자는 염치불구한 배짱으로 음치를 교정한 사람인데 이들은 나에게 [싱잉 조]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미국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여러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색해하는 춤은 술기운을 빌지 않고도 잘 추는데 노래는 좀처럼 부르지 않는다. 그들은 {노래부르기는 전문가가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한 여자는 {아버지가 음치였는데 우리가 집안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도 싫어하셔 우리도 음치가 되었다}고 억울해 하는 것이었다. 영어로 음치를 톤 데프(Ton-Deaf)라고 한다. [음정 귀머거리]란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귀명창]이란 말이 있다. 노래 부르는 데는 음치이지만 노래를 듣는 데는 명창이란 뜻이다. 기자는 후천적 음치인 사람들이 왜 음치가 되었는지를 알아본 적이 있었다. 놀라운 사실은 초등학교 음악시간에 처음 노래를 부른 것이 마지막 노래였다로 말한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었다. 처음 노래를 불렀을 때 교사로부터 꾸중을 들은 것이 잊을 수 없는 수치로 남아 그 뒤에는 노래를 할 마음도 용기도 사라졌다는 것이 공통점이었다. 노래를 잊은 인간은 인생을 상당히 메마르게 살고 있다는 것이 기자의 소신이기도 한데 어린 마음으로부터 영원히 노래를 빼앗는 교사가 없도록 하자?
16번은 AP통신의 前모스크바 특파원 스위드 데비. 40세의 데비는 키가 작고 몸은 빠른 맹렬 사회부 기자型이었다. 남편은 러시아인으로서 한때 권투선수였던 니콜라이. 니콜라이는 데비를 따라와서 소설을 쓰고 있었다. 데비는 AP통신에서는 동구권 취재로 유명한 기자였다. 1980년대부터 1996년까지 동구권과 러시아에서 벌어진 내전, 쿠데타, 정변, 혁명을 쫓아다닌 체험담을 듣고 있으면 이 여기자가 바로 현대사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데비는 남편이 러시아人인데도 러시아 사람들의 소극적 정신자세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폴란드 사람들은 저항할 줄을 아는데 러시아 사람들은 어떻게 된 판인지 참기만 하고 고개를 치켜들 줄을 모른다. 러시아가 제대로 된 나라가 되기까지는 수십 년이 걸릴 것이다}
기자와 데비의 남편 니콜라이는 만날 때마다 화제가 두 가지였다. 권투와 몽골. 기자는 한때 권투광(狂)이었고 니콜라이는 권투선수였기 때문이고 러시아 사람들은 징기즈칸 시대부터 몽골의 지배를 수 백년간 받아왔기 때문이다. 러시아 사람들의 얼굴 가죽을 벗기면 타타르(몽골族)의 얼굴이 나타난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러시아人의 피와 문화에는 몽골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이 몽골의 지배를 받을 때는 서구에서는 르네상스가 일어나 암흑의 중세로부터 벗어나고 있던 시기였다. 이 전환기의 서구 역사 흐름에 러시아가 참여하지 못한 것이 후진성을 결과하였다고 불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시 만난 무하마드 알리
17번은 南아프리카의 요하네스버그에서 발행되는 소웨탄紙의 정치부장 마타타 체두. 그는 고아로 자라났다고 했다. 마을에서 자신을 키워주었다는 것이다. 44세의 마타타 기자는 흑인 부족장처럼 생겨 우리는 그를 [추장](The Chief)이라고 불렀다. 그는 흑백분리정책에 항의하여 지하투쟁을 벌인 과정을 소개했다. 백인 경찰관들에게 붙들려가서 물고문을 당한 이야기를 하면서 {물을 억지로 마시면서 생각한 것은 인간의 몸에서 물의 성분이 70%나 된다}는 사실이었다고 했다. 그는 만델라 대통령의 취임식을 취재하던 현장에서 자신을 물고문했던 경찰관을 만나서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다고 했다. 마타타 기자가 {요사이 뭘 하느냐}고 물었더니 만델라의 경호관으로 일하고 있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는 만델라 대통령이 백인 인권탄압자들에게 취한 [고백 뒤 사면] 정책을 비판하고 있었다.
기자는 한국에서 벌어진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소위 [역사 바로세우기] 수사를 설명해주면서 만델라의 용서가 당장은 정의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 같겠지만 길게 보면 그것이 더 큰 정의를 구현하게 될 것이라고 충고했다. 기자는 동양의 정의 감각은 형평과 관용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했으나 마타타는 내 말에 동의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18번은 체코 프라하에서 발행되는 신문사의 논설위원인 조셉 투첵. 36세인 이 유쾌한 체코人은 니만 연수생들 중에서 유일한 전직 공산당원. {당신 같은 사람이 어떻게 공산당에 가입하게 되었느냐}고 추궁하면 {편집국의 다른 사람이 다 가입하는 데 따라서 했을 뿐이다}라고 하면서 {체코 사람들처럼 공산당하는 데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고 했다. 비밀경찰도 反共지식인들을 불러서 고문하는 식이 아니라 조용히 찾아와서는 {외국에 가서 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는 식이었다.
지금 하벨 대통령이 존경을 받고 있는 것도 극작가이자 부자인 그가 그런 외유권유를 뿌리치고 국내에서 남아 공장 노동자로 일했다는 점이라고 했다. 하벨은 물려받은 유산이 많아 공장에 출근할 때도 벤츠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우리 같으면 노동자 신분으로 외제 호화 승용차를 타다니 하고 욕을 퍼부을 텐데 체코 사람들은 벤츠를 타고다닐 정도인 사람이 노동자로 일한다는 점을 높게 평가했다는 것이다. 19번은 마조리 발브룬. 아이티에서 이민 온 34세의 여성으로서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紙 기자. 쾌활하여 항상 웃음꽃을 몰고오는 그녀는 1994년 미군이 진주하여, 군사 쿠데타에 의해 쫓겨났던 아리스티드를 다시 대통령 자리에 앉히는 작전을 취재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미국 시민이 되어 다시 찾아간 조국의 절망적인 상황을 설명하는 마조리의 목이 메였다.
20번은 뉴욕에서 발행되는 고급잡지 뉴요커의 편집부장 로버트 바레. 그도 유태인이었다. 미국기자 12명 중 4명이 유태인이었다. 바레는 뉴욕에서 나오는 대중신문 뉴욕 포스트에서 경찰기자를 했고 뉴욕 타임스로 자리를 옮겨서는 이 신문의 일요판에 끼워지는 주간 잡지의 편집부장으로 일했다. 그는 무하마드 알리와 프레이저, 무하마드 알리와 포먼의 세기적 시합을 취재한 적이 있는 권투 전문기자이기도 했다. 바레와 나는 나이도 비슷하고 1960∼70년대의 반항적 문화를 상징하는 무하마드 알리를 좋아하는 점에서도 같아 만나기만 하면 그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바레와 같이 본 영화가 [우리가 모두 왕이었을 때]란 다큐멘터리 영화였다. 무하마드 알리가 1974년에 자이레의 수도 킨사샤에서 챔피언 조지 포먼을 KO로 눕히고 헤비급 챔피언을 되찾는 과정을 찍은 영화로서 올해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다큐멘터리 부문의 수상작품으로 선정되었다.
이 영화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무하마드 알리가 연속 강타로써 포먼을 쓰러뜨리는 장면이었다. 연타를 맞고 몸을 완전히 열어놓은 채 고목처럼 넘어가는 포먼을 향하여 회심의 한 방을 더 날릴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한 알리는 주먹을 뻗다가 순간적으로 다시 거두어들이는 것이었다. 포먼이 넘어가는 모습을 보니 KO가 될 것이 확실한데 구태여 한 방 더 갈길 필요가 있겠나 하고 생각했다는 것이 그 순간적인 동작에서 느껴졌다. 동중정(動中靜)의 이런 여유가 바로 알리의 위대한 점이라는 데 바레와 나는 합의했다.
{나는 중이기 이전에 新羅人이다}
필요없는 가혹행위는 하지 않는 것이 무사나 운동선수들의 기본 윤리이다. 신라(新羅)의 원광(圓光)법사가 지은 화랑의 세속오계(世俗五戒) 중에서 살생유택(殺生有擇)이란 말이 있다. 필요 이상의 살생을 하지 말라는 이 경고는 삼국시대처럼 난세를 살아가는 군인들의 좌우명으로서는 동서양과 시대를 뛰어넘어 통용될 수 있는 위대한 각성인 것이다. 圓光법사는 이 화랑 세속5계를 지으면서 살생을 금하는 불교와 국가의 요구 사이에서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살생유택이란 말을 쓰고는 {나는 중이기 이전에 新羅人이다}고 선언하듯이 말했다고 한다. 이것은 종교와 국가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근대적인 정신을 이 고대인(古代人)이 소유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아무리 고급 종교라도 국익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활동할 수는 없다는 이 각성은 서구의 경우 교황이 신의 이름을 빌어 국가를 지배하려고 하다가 암흑기를 만들었던 중세를 거치면서 생긴 사상이었다. 圓光은 그런 선진된 생각을 서구 지식인보다도 한 천년쯤 먼저 가지고 있었던 진보적 지식인이었다는 얘기다.
나는 하버드를 떠나기 이틀 전날 밤 바레의 집에서 타이슨－홀리필드 시합을, 유료 텔레비전을 통해서 구경했다. 타이슨이 심판의 경고를 무시하고 홀리필드의 귀를 두 번째로 물어뜯는 바람에 홀리필드가 실격승(失格勝)을 거두었다. 바레와 나는 늘 {무하마드 알리가 전성기 때 타이슨과 붙었더라면 갖고 놀았을 텐데}라면서 옛날을 그리워하기도 했었다. 다음날 펜 웨이 파크로, 보스턴에서는 마지막이 될 야구구경을 하러 가는 택시 안에서 운전사가 말했다. {어제 타이슨은 가장 비싼 스테이크를 먹더군요} 21번은 미국 남부 사우스 캐롤라이나 샤로테市의 유명한 지방지 샤로테 옵저버紙의 페이지 월리엄즈. 29세의 이 여기자는 니만 소프트볼 팀의 주장이었다. 체력이 얼마나 좋은지 장타를 남자보다도 더 잘 치고 포수를 거뜬히 해냈다. 결혼식의 날짜를 받아놓은 같은 신문사 동료기자 댄도 장기 휴가를 내고는 페이지를 따라와서 하버드에서 연수를 하고 있었다. 페이지는 남부에선 링컨이 지금도 인기가 없다고 했다. 남부 사람들은 링컨이 주도한 남북전쟁 때문에 북부에 비해서 경제적으로 낙후되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