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1일 오래 알고 지낸 일본인 친구와 3년 만에 遭遇(조우)했다. 저녁 늦게 도착한 친구에게 편의점 외부에 진열된 빼빼로를 가리키며 일본에도 '빼빼로 데이' 문화가 있는지를 물어봤다. 그는 없다면서 신기해했다.

일상적인 3일간의 여행이 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다. 금요일 저녁 8시쯤 광화문에 있는 필자 집에 짐을 풀고 인근 식당을 향해 가고 있었다. 가는 도중 초록색 有光점퍼를 입은 경찰들이 一絲不亂(일사불란)하게 소리를 지르며 골목길 여기저기를 누볐다. 일본인 친구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고 해 필자는 내일 있을 대규모 시위에 대비, 연습 중인 것 같다고 했다.

친구는 경찰들이 왜 다 어리고 귀여우냐고 했다. 한국의 군대 문화를 소개하며 義警 및 戰警으로 군생활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알려줬다.

12일 점심 다시 집을 나서 명동의 한 백화점을 향했다. 집회는 5시 예정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점심 시간부터 여기저기서 시위를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무대를 설치하고 ‘박근혜 하야’가 적힌 푯말을 하늘에 걸어놓고 있었다. 통행하는 차들은 답답한 마음에 계속 경적을 울렸다. 한국을 처음 방문한 친구는 한국인은 원래 이렇게 경적을 많이 울리냐고 했다. 오늘따라 차가 막혀서 그런 것이라고 설명해줬다.

토요일 2시쯤 다시 시내로 나왔다. 시청 일대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보였다. 꽹과리와 장구를 치는 사람들, 길거리에 들어선 노점상들, 똑같은 옷을 맞춰 입은 아주머니들의 모습이 그의 눈엔 신기했는지 그는 계속해서 핸드폰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마포 부근에서 저녁 식사를 한 뒤 광화문으로 들어오는데 지하철에서 안내방송이 나왔다. “현재 광화문역이 집회로 인해 매우 혼잡하니 서대문역을 이용하시길 바랍니다.”

서대문역에서 내려 걸어서 광화문을 향했다. 강북삼성병원 쪽에서 광화문 네거리 쪽으로 향하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수많은 인파가 ‘박근혜 하야’가 적힌 푯말이나 촛불을 들고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친구는 이를 보고 “좀비 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 했다.

시위를 구경하는 도중 친구는 ‘마쓰리’ 같다고 했다. 일본인이 자주 하는 축제나 잔치 같다는 뜻이었다. 모든 사람이 알지 못하는 노래를 다 같이 열창하고 구호를 외쳤다.

시위 인파를 뚫고 집에 도착했으나 건물 앞에 시위대들이 돗자리를 깔고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담배를 피우고 술판을 벌이는 모습을 보고 일본인 친구에게 조금 창피해 근처에 자주 가는 작은 선술집을 찾았다.

평소 손님이 많지 않은 선술집에도 손님이 가득 차 있었다. 친분이 있던 사장님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자 시위하러 온 사람들이 찾은 것이라 했다. 근처 식당들도 마찬가지였다. 평소 주말엔 9시 정도면 문을 닫는 광화문의 식당들은 11시가 넘어서도 영업을 했다. 한 식당에는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이 끊이지 않았다. 선술집 사장님은 “저 옆에 식당은 재료가 떨어져서 더 이상 팔지 못한다고 한다”며 씁쓸해했다. 손님들이 맥주 한두 병씩만 먹고 가는 선술집 사장님의 아쉬움이 느껴졌다.

이 선술집은 손님들이 서로 대화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날도 마찬가지였지만 평소와는 달랐다. 모두 정치적이고 흥분해 있었다. 같이 온 사람이 일본인이라고 하자 이번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손님이 많았다. 원래 정치적 성향을 밝히지 않는 이 친구는 “술을 마시며 정치 얘기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들 이해했지만 자신들의 시위에 동의를 받지 못해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2008년 광우병 시위를 광화문에서 경험한 필자가 느낀 바는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시위 참가자 모두가 狂氣(광기)에 빠져있어 보였지만 이번에는 일반인이 많이 보였다. 물론 일부 노조를 비롯한 전문 시위꾼이 보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선술집에서 만난 40~50대 아줌마 아저씨들은 박근혜가 정말 싫어서 나온 사람 같았다.

전혀 시위할 것 같지 않은 복장과 외모의 40대 아줌마들의 얘기를 엿들었다. 오후 3시 정도부터 나와서 시위를 했다고 한다. “아 다리가 아파 죽겠는데 그냥 좀 下野하면 안 되나”라며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다른 30대 남성들의 대화는 더욱 정치적이었다. ‘민주주의’니 ‘60일 이내 선거’라는 등 보다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건배를 하기 전에 꼭 나오는 말은 “박근혜 정말 미XX”이었다.

선술집 사장님께는 사람들이 너무 정치적이라 오늘은 일찍 돌아가겠다고 말한 뒤 집에 돌아와 친구와 얘기를 나눴다.

친구는 “뉴스를 잘 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내가 아는 거는 박근혜 대통령이 친구에게 상담을 하고 조언을 받았다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렇게 데모를 할 사안이야?”라고 했다. 나는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그는 이어 “내가 보기엔 사람들이 악에 받친 게 아니라 그냥 놀러 온 사람들 같았다”며 “데모로 어차피 변화가 생기지 않을 걸 알고 있는 것 아니냐”고 했다.

그와 알고 지내온 5년 동안 그가 정치적인 사안에 관해 얘기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그에게 “아베 총리가 만약 친구에게서 상담을 받아 國政을 운영했다면 어떻게 됐을 것 같으냐"고 물었다. 그는 “좀 이상하긴 한 거 같은데 시위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세 아이의 아버지인 그는 왜 어린 자녀들까지 데리고 와서 어른들이 술판을 벌이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8시쯤 길거리에 앉아 같은 도시락을 먹는 걸 본 그는 ‘불쌍해 보여’라고 했다.

오늘 출국하는 그는 ‘박근혜 하야’가 적힌 빨간 푯말을 받아놓지 못한 게 아쉽다고 했다. 평생 기억에 남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평생 어디를 여행가도 이런 경험을 하지 못할 것 같아. 정말 고맙다”며 작별인사를 했다.

“내가 언제 그렇게 넓은 大路 위에서 걸어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