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뒤흔든 격동의 10일간 完 김재규 최후의 날(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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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의 종말, 다른 시대의 개막
  
  = 10월 26일
  
  이날은 朴대통령이 5·16쿠데타로 집권한 지 18년5개월11일째, 유신선포란 제2의 변칙으로 장기집권을 기도한 지 7년10일째, 부신시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지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한 시대의 마지막이요, 다른 시대의 시작이 될 날이었다. 이날의 朴대통령은, 그의 비극이 시작된 7년10일 전의 朴대통령과는 많이 달라진 사람이었다.
  
  = 회고 : 유신선포날의 아침
  
  10·26때 청와대 특별보좌관으로 근 10년째 일하고 있었던 박진환특보는 유신선포 당일의 朴대통령 보습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아침에 우리 특보들은 부름을 받고 대통령의 집무실 안쪽에 있는 방에 모였읍니다. 분위기가 팽팽하고 싸늘하더군요. 朴대통령은 그때 양복을 입고 있지 않았읍니다. 어떤 옷을 입었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상황실에 좌정한 야전 지휘관 같은 옷차림이었읍니다. 커피가 나오고 이어서 소책자 한 권씩을 돌립디다. 표지를 넘기니까 「국회해산」 「비상계엄령 선포」란 글이 눈에 홱 들어오지 않겠읍니까.
  
  저는 뒤통수를 한 방 맞은 것처럼 머리가 핑그르하는 기분이었읍니다. 배경설명을 읽어도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읍니다. 한참 있다가 대통령은 「어때요?」라고 물어요. 아무도 대답을 안 하길래 제가 「정치문제는 모르겠고 자원파동으로 인한 세계경제의 위기는 이걸로 극복이 될 것 같습니다」고 했읍니다.
  
  나중 이야깁니다만, 朴대통령은 「그자리에서 누가 반대할 줄 았았는데 아무도 하지 않더군」이라고 했답니다. 조금 있으니까 이후락 부장이 들어오더니 미국 대사관측에서 연락이 왔다고 해요. 유신선포의 배경설명에 「미국과 중공의 접근」 「월남 평화 협상」의 예를 들면서 급변하는 주변정세에 대응하기 위한 조처라는 내용이 있었읍니다. 미국쪽에선 그 대목을 빼달라고 한다는 거예요. 朴대통령께선 「뭐, 내가 거짓말 했나. 미국×들이 안 그랬으면 내가 뭐 답답해서…」라면서 못마땅해 하셨어요.
  
  金정렴 비서실장이 옆에서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라면서 설득을 하니까 「그래, 빼줘!」라고 하셨어요. 얼마 있다가 또 金실장이 들어왔어요. 이번엔 일본대사관에서 배경설명에 있는 「일본도 중공과 국교를 정상화시키고…」하는 대목을 빼달라고 한다는 겁니다. 대통령께선 대뜸 일본말로 「호네누끼노곤야꾸다」라고 내뱉았어요. 「뼈를 빼버린 곤야꾸다」는 뜻인데, 핵심을 뺀 이야기가 되지 않겠나 하는 뜻으로 하신 것 같아요. 결국 일본측의 요구대로 해주었읍니다. 그때 朴대통령의 비장한, 결연한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朴대통령, 최상의 기분
  
  = 26일 새벽 2시 朴鐘圭 집
  
  잠자리에서 박종규는 전화벨 소리를 들었다. 시계를 봤다. 새벽 2시였다. 수화기를 드니 대통령이었다. 『자네 어제 낮에 나한테 한 말이 틀림없지? 아침에 삽교천에 가는데 돌아와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도록 하세』 대통령은 상당히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 26일 오전 청와대
  
  김재규는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행사에 자기도 참석하고싶다는 뜻을 경호실에 알려 왔다. 이날에 삽교천 행사 이외에 김재규의 업무와 관계가 있는 시설의 준공식도 있을 예정이었다. 차지철은 매정하게 金의 제의를 거절했다. 이것이 이날 김재규에겐 첫번째의 기분 나쁜 일이었을 것이다. 김계원비서실장은 부산·마산을 다녀온 박승규(朴升圭)민정수석비서관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계엄군의 강경책이 민심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내용도 있었다. 金실장은 『내일 대통령께 보고할 때 車실장의 월권행위에 대한 보고도 같이 하라』고 지시했다.
  
  金실장은 얼마 전 朴대통령에게 『정치문제에 청와대가 직접 손대는 것은 좋지 않다』고 완곡하게 말한 적이 있었다. 朴대통령은 금방 알아듣고 『車실장은 국회의원을 지냈으니 알아서 할 것이다』고 했었다. 金실장은 김재규가 車의 견제를 받는 바람에 부하들로부터도 『왜 우리가 할 일을 못 찾아먹느냐』는 반발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를 도와주고 싶어했다.
  
  = 26일 오전 삽교천
  
  오전11시 정각 朴대통령은 헬리곱터 편으로 당진에 도착했다. 李희일 농수산부 장관의 경과보고에 이어 朴대통령의 치사가 있었다. 이날 치사를 라디오나 텔레비젼을 통해 들은 사람들중엔 『대통령의 목소리 같지 않다』고 느낀 이들이 많았으나 식장의 참석자들은 그런 걸 못 느꼈다고 한다. 단상행사를 마친 뒤 朴대통령은 준공 테이프를 끊었다. 이 마을 최고령자인 83세의 李吉淳노인을 나오게 하여 같이 끊었다. 李노인이 당황하자 대통령은 『하나, 둘, 셋하면 자르십시오』라고 가르치기도 했다.
  
  테이프를 자르고 배수갑문 스위치를 눌렀다. 용트림하듯 쏟아져나가는 물줄기를 바라보는 대통령의 표정은 밝았다. 방조제 위의 포장도로를 시주한 뒤 삽교호 기념탑 제막식에 참석, 제막용 줄을 잡아당겼다. 기념탑에 씌워진 커튼이 반밖에 걷히지 않는 「사고」가 났다. 朴대통령은 삽교호를 떠나 다른 준공식장에 참석한 뒤 점심을 들기 위해 헬기 편으로 도고 온천 관광호텔에 도착했다.
  
  = 26일 정오 도고온천
  
  헬기가 내릴 때 두번째 「사고」가 났다. 이 호텔에서 사육하는 노루가 프로펠러 소리에 놀라 뛰다가 무엇인가에 부딪쳐 즉사 한 것이었다. 이날 朴대통령의 기분은 최상이었다. 언제나 농촌에만 나서면 신이 나고 힘이 펄펄 솟는 사람이었다. 73년 11월 광주의 전국 새마을지도자대회에서 『후세에 너의 조상이 누구냐 묻는다면, 나의 조상은 1970년대의 새마을 운동에 앞장서서 알뜰하게 일한 바로 저 마을의 농민이었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유산을 후손에게 남겨주자』는 즉석연설을 한 사람이었다.
  
  이 대회가 끝난 뒤 서울로 돌아오는 도중 내장사의 숙소에서 그날의 감격을 「새마을 노래」의 제4절 작사로 푼 사람이었다. 음악과를 나온 둘째 딸과 함께 피아노를 치면서 「나의 조국」을 작사, 작곡한 사람이었다. 「나의 조국」가사를 직접 지어 노산 이은상에게 교열을 부탁했더니, 노산은 빨갛게 고쳐 가지고 돌려주었다. 「백두산의 푸른 정기 이 땅을 수호하고…」식의 가사는 고무하고 궁상맞게 들리니 정의와 자유라는 낱말을 많이 쓰는 게 좋겠다는 의견까지 달았다. 朴대통령은 이에 대해 여러 사람의 의견을 구한 뒤 자신의 고집대로 해버렸다.
  
  74년 8월 16일 새벽 陸여사의 빈소를 지키고 있는 장관들에게 『국민장이라고 해서 모든 장관들이 있을 필요가 없으니 수원새마을 연수원에 입교하도록 된 장관들은 예정대로 들어가라』고 당부한 사람이 朴대통령이었다. 이날 점심을 들면서 朴대통령은 7일전에 있었던 李光耀수상과의 대화를 소개했다. 『李수상이 그러는데, 공산당과의 싸움에선 내가 죽든지, 적을 죽이든지 하는 두 길 밖에 없다는 거야. 어중간한 방법으론 안 된다는 거야』
  
  서울 상공 한 바퀴 돌며…
  

  = 26일 오후 2시 아산만
  
  도고호텔을 떠난 헬리콥터 1번기는 朴대통령을 태우고 아산만 상공으로 향했다. 대변인 등 청와대 참모들이 탄 2번기는 1번기로부터 『먼저 통과, 서울로 가라』는 연락을 받았다. 경호원이 탄 3번기는 기체고장으로 이륙이 약간 지체됐다. 이것은 이날의 세번째 「사고」였다. 朴대통령의 1번기는 제2종합제철 후보지로 거론되던 아산만 상공에서, 또 대통령이 가장 존경하던 충무공의 현충사 상공에서 한참 머물러 있다가 서울로 향했다. 朴대통령의 공중시찰 때문이었다. 청와대엔 2번기가 먼저 착륙했다. 청와대 참모들은 1번기를 기다렸으니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겼나』생각이 들 정도로 오래 기다렸다. 이때 朴대통령은 1번기로 서울상공을 한 바퀴 돌고 있었다. 6·25의 폐허 위에서 그의 의지로 이룩한 세계적 대도시의 모습을 그는 마지막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 6일 오후 청와대
  
  한참 만에 청와대에 착륙한 1번기에서 朴대통령은 내리면서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아주 다정하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계속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오후 5시 조금 넘어 임방현대변인은 국민학교 동창회에 참석하기 위해 퇴근채비를 하고 있는데, 朴대통령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연두 기자회견준비는 어떻게 돼가나?』라고 물었다. 『이미 착수 했읍니다』고 했더니 대통령은 매우 기분이 좋은 듯 『참, 잘했어. 아주 잘했어』라고 칭찬을 한 뒤 전화를 끊었다.
  
  살의의 탄생
  

  = 26일 오후 정보부장실
  
  오후 4시쯤 김재규는 집무실에서 차지철의 전화를 받았다 『오후6시부터 궁정동에서 「대행사」를 갖는다』는 전갈이었다. 궁정동의 정보부장 공관 옆 가, 나, 다 동(棟)에선 한달에 열번쯤의 만찬이 있어왔는데, 「대행사」란 여자 2명과 대통령, 경호실장, 비서실장, 정보부장이 참석하는 모임을 이르는 말이었다. 궁정동 행사는 보안유지를 위해 이후락부장 때부터 시작했고 申직수부장 때부터 본격화됐다. 車의 전화를 받은 김재규는 15분쯤 있다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저녁이나 같이 하자』고 했다. 『사복으로 갈아 입고 저녁 6시30분까지 궁정동의 부장집무실로 오라』고 했다.
  
  金은 이어 김정섭 제2차장보에게 『5시30분까지 궁정동으로 오라』고 지시했다. 김재규는 대통령과의 만찬이 있는 줄 알면서 鄭총장을 겹치기로 초대했다. 그것을 바로 「살의의 탄생」이었다. 결행 뒤 육군참모총장의 힘을 빌겠다는 계산의 실천이었다. 車의 전화를 받은 그가 정승화 총장에게 전화를 걸기까지의 15분 사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추리만 가능할 뿐이다. 확실한 것은 이 날 朴대통령의 기분은 최상이었는데, 김재규의 기분은 최악이었다는 점이다.
  
  김재규가 朴대통령에게 26일까지 마무리짓겠다고 약속했던 「신민당 당직자 사퇴 및 鄭대행 출범 공작」은 전날에 완전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황락주, 최형우의 설득이 실패한 것은 물론이고, 당직 백지화운동을 벌이던 비주류 ㄱ, ㅅ의원까지도 갑자기 金泳三총재 지지쪽으로 돌아버렸다. 이런 급변은 25일에 공화당이 신민당의원직 사퇴서를 일괄반려할 방침을 밝힌 것과도 유관했다. 이것을 여당측도 金泳三 체제를 인정한다는 인상을 주어 신민당에서의 金총재 입장을 주어 신민당에서의 金총재 입장이 강화됐던 것이다. 김재규는 『공화당의 발표가 대(對)신민당 공작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고 화를 냈고 金차장보는 朴준규 공화당 의장서리에게 이 불만을 전달햇다.
  
  어쨌든 김재규는 또 다시 실패, 대통령을 볼 면목이 없게 된 것이었다. 김재규는 이때쯤 김치열법무가 정보부장 후임 물망에 올라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본인은 재판정에서 시종 몰랐다고 했으나 부마사태 이후 청와대 주변에선 개각설과 「정보부장 교체설」이 파다했었다. 김재규는 朴대통령으로부터 버림받는다는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동시에 자신의 관리하에서 「해치울 수 있는」기회는 오늘이 마지막이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부산사태의 현장 시찰에서 민심이 朴정권에서 떠났다는 판단을 했고 그런 생각은 그에게 용기를 더해주었을 터이다.
  
  더구나 金은 전날 『오는 28일에 전국적으로 큰 데모가 터질 것 같다』는 징후보고를 받았다. 그의 법정진술대로 유신의 심장만 쏘면 정권은 저절로 붕괴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여기에다가 車실장에 대한 증오감은 극에 달해 있었다. 더구나 이날 아침에 자신의 대통령수행제의도 거절하지 않았던가.
  
  명예롭게 죽을 명분의 발견
  
  좌절, 분노, 소외, 초조가 뒤범벅된 이런 감정의 바탕에는 그의 인격을 형성해온 과대망상증이나 사생관이 깔려 있었다. 『내 목숨을 독재와 맞바꿔 역사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것만큼 매력적인 명분은 달리 없었다. 치욕적으로 쫓겨나갈 것이 확실한 그 시점에서 그런 명분은 기막힌 유혹이었다. 김재규가 대통령 살해 이후에 있어서의 조처에 대해 바보처럼 소홀했다는 점을 들어 석연치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바로 그것이 김재규의 개성을 정직하게 반영하고 있는 점이다. 사물에 대한 판단력이 무딘 金은 모든 걸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정보부장이란 막강한 자리에서 척 내려다볼 때 김재규는 자신을 가졌던 것 같다.
  
  계엄사령부의 「12·12사태 조사 발표문」에 따르면 정승화 총장은 김재규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었다고 한다. 군 복무를 통해 두 사람은 매우 가까왔고 3군단과 경북출신 재경 장성모임을 인수인계한 인연도 있었다.
  
  정병주(鄭炳宙)특전 사령관은 김재규의 안동농림 후배였고 매월 정기적으로 금품을 받는 등 추종관계에 있었다.
  이건영(李建榮)3군사령관은 김재규정보부장 밑에서 제1차장보 겸 제2차장으로 일한 심복이었고, 金의 추천으로 육군참모차장과 3군사령관의 요직을 맡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서울주변의 군 부대 지휘관으로 이런 심복들이 있기 때문에 구태여 사전모의를 같이 하지 않아도 朴대통령과 車실장만 제거하고, 계엄령을 선포, 정승화가 계엄사령관이 되면 자신의 영향 아래로 대권이 들어오게 될 것이라고 「단순하게」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김재규였다.
  
  그러나 김재규가 결정적으로 놓치고 있었던 사항이 있었으니, 그것은 우리나라가 살인자를 통치자로 받든 적이 없었다는 점이고, 18년 통치로 쌓아올린 朴대통령의 카리스마는 그의 죽음으로 단박에 허물어질 만큼 허약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김재규가 시해후의 사태장악에 실패한 결정적인 원인은 대통령의 시신이 바깥으로 나갔기 때문이었다. 김재규는 법정에서 시신을 정보부가 장악, 수사를 전담하려고 했으며 국민들의 반응에 따라선 『내가 했다』고 나설 작정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金이 육본으로 떠난 뒤 궁정동에 남아 있었던 朴善浩는 시신의 처리에 대한 지침을 전혀 받지 않고 있어 김계원이 朴대통령을 업고 나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
  
  김재규의 인격에 나타나는 지리멸렬상이 가장 중요한 시기에 그대로 드러난 것이었다. 김재규는 朴대통령 살해범이란 사실이 알려진 그 순간, 파멸을 맞았다. 유신의 심장만 멎게 하면 체제도 자동적으로 붕괴될 것으로 판단했다면, 오산이었다. 18년간 朴대통령이 구축한 체제는 엔진은 꺼졌지만 상당기간 그 관성으로 달려갈 것이다.
  
  『車智澈, 저 놈이…』
  
  = 4∼6시 궁정동
  
  김재규는 오후 4시 30분쯤 궁정동에 도착, 2층 사무실로 올라갔다. 금고에서 7연발 웰터 권총을 꺼내 노리쇠를 전진, 후퇴시켜 고장유무를 확인한 뒤 서가 뒤에 숨겼다. 5시 10분쯤 김계원 비서실장이 왔다. 궁정동엔 비서실장도 비서를 대동치 못하며, 식당에도 직접 들어갈 수가 없고, 반드시 안내원의 안내를 받아 부장 사무실로 가야 한다. 김계원은 김재규의 사무실에서 그를 위로했다. 金부장이 이 며칠간 야당공작에 애를 썼으나 실패한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도 정보부장을 지냈지만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정치요』 『사회의 공기가 얼마나 험악한지 실장님은 모르실 겁니다. 계엄선포로 며칠은 조용하지만 얼마나 가겠읍니까. 車실장 저놈이 무슨 일만 있으면 야당의원 한두 명의 이야기만 듣고 쪼르르 달려가 고자질만 해서 각하의 판단을 흐려놓고 있읍니다. 오늘 그 친구를 해치우겠읍니다』
  
  대강 이런 이야기가 사무실과 정원에서 오갔다. 김재규가 『형님, 뒷일을 부탁합니다』는 말을 했다는 데 대해서 김계원은 법정에서 부인했다. 김재규는 식당으로 가는 도중 『오늘 갑자기 웬일입니까』하고 물었다. 김계원은 『나도 몰라요. 삽교천제방공사 준공식에 참석, 먼 곳으로 여행하신 후라 피로하여 일찍 쉬실 줄 알았는데…』라고 답했다. 『나도 갑자기 연락을 받았는데, 그전에 鄭총장을 초대해 놓았읍니다』 이 대화로 보아 갑작스런 궁정동 만찬은 車실장이 朴대통령을 위로하기 위해 마련한 것임이 거의 확실한 것 같다. 부마사태로 심기가 불편하던 대통령이 농촌바람을 쐬고 기분이 좋아지자 여흥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출처 : 월조
[ 2003-07-14, 15:1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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