建國 과정에 대한 10문10답
대한민국은 李承晩이 좌익 및 미국과 싸워서 세운 나라. 단독정부수립이 없었다면 공산화되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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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은 북한지역을 점령하자마자 38線을 경계로 하여 남한지역과의 교통·통신을 단절하여 南北 주민들 간의 자유로운 통신·통행을 금지했다. 소련군은 이어 金日成을 앞세워 북한지역에서 토지개혁, 산업 국유화, 교육개혁, 주민 사상 개조운동 등을 실시하여 북한 주민의 생활방식을 남한 주민의 생활방식과 완전히 다르게 변질시켰다.
 
[月刊朝鮮 청년강좌 ①] 대한민국 建國 과정에 대한 오해와 이해 - 10問 10答
  
  대한민국 建國 과정에 대한 오해와 이해
  
  1 建準과 人共은 少數 左翼분자들의 조직
  2 군사분계선에 불과한 38線을 통치분계선으로 만든 소련이 분단의 元兇
  3 신탁통치 받아들였으면 全한반도가 공산화됐을 것
  4 李承晩은 미국과 싸우면서 대한민국 建國
  5 左右 合作은 呂運亨·金奎植이 아니라 美軍政의 작품
  6 美蘇共委 결렬은 右翼 배제를 주장한 소련 책임
  7 金九·金奎植의 南北협상은 성과 全無
  8 선거인의 95.5%가 참여한 5·10 총선은 건국 바라는 民意의 表出
  9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親日派 배제 노력
  10 북한이 먼저 단독정권 수립
  
  梁 東 安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1945년 전남 순천 출생. 서울大 정치학과 졸업. 중앙大 정치외교학 석사. 합동통신 기자. 경향신문 논설위원(비상임). 경기大 조교수 역임. 著書·논문 「대한민국건국사」, 「남로당의 조직과 활동에 대한 연구」, 「칼 마르크스의 諸이론에 대한 분석」 등.
  
  
  
   [편집자 注] 月刊朝鮮은 이번 호부터 「月刊朝鮮 청년강좌」를 연재한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분야 권위자들의 글로 꾸며지는 「月刊朝鮮 청년강좌」는 젊은 세대들에게 대한민국의 正體性과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 주는 자리가 될 것이다. 이번 호에는 梁東安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의 「10問10答-대한민국 建國 과정에 대한 오해와 이해」을 싣는다. 이 글은 梁교수의 허락을 받아 「대한민국건국사」(현음사刊, 2001년)에서 발췌한 것이다.
  
  
   1.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공화국은 민중의 뜻에 따라 左右의 모든 정치세력이 참여한 민족통일전선이었다?
  
   建準과 人共은 少數 左翼분자들의 조직
  
   解放 다음날인 1945년 8월16일에 구성이 발표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建準)」는 당시 서울에서 활동 중이던 少數의 左翼분자들이 만든 조직이다.
  
   日帝의 조선총독부는 일본의 항복이 임박하자 일본의 항복 후 초래될 한반도에서의 혼란상태와, 그로 인한 한반도 거주 일본인들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대책으로 조선인 정치 지도자에게 治安權(치안권)을 이양할 것을 계획했다. 조선총독부는 呂運亨(여운형)에게 치안권을 이양하기로 했고, 당시 서울에서 활동 중이던 공산주의자들인 정백·이강국·최용달·홍증식 등은 呂運亨과 접촉했다. 그들은 일본인들로부터 呂運亨이 치안권을 인수한 것을 근거로 우리 민족의 독립국가 건국을 준비하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기로 합의했다.
  
   출범 당시의 建準 중앙조직은 左翼세력과 安在鴻(안재홍)이 이끄는 中道派의 일부만이 참여한 左翼과 중도파의 연합체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建準 출범 15일 후인 8월31일의 建準 간부진 개편 후에는 安在鴻이 이끄는 중도파마저 탈퇴, 建準은 左翼진영만의 조직체로 축소됐다.
  
   建準이 출범 6일 만인 8월22일에 발표한 建準 간부 34명의 명단에 右翼진영 인사인 金俊淵(김준연)과 咸尙勳(함상훈)이 포함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간부 명단에 두 사람의 이름이 포함된 것은 右翼진영과의 합의는 물론이고 당사자들의 동의도 없이 建準 측에서 일방적으로 도용한 것에 불과하다.
  
   「인민공화국(人共)」은 조선공산당이 꾸미고 연출한 정치적 연극에 불과했다. 人共의 선포는 철저히 조선공산당 지도자인 朴憲永(박헌영)에 의해 계획되고 공산당內 朴憲永派에 의해 실천됐다. 朴憲永은 人共의 형식적 母胎(모태)기관으로 建準을 내세우면서도 建準에서 人共 문제를 협의하도록 제안한 바도 없었다. 그는 建準의 위원장이며 人共의 중앙인민위원장으로 내정된 呂運亨과도 사전 협의하지 않은 채 人共 선포를 추진했다. 朴憲永은 人共을 선포하기 이틀 전인 9월4일에야 呂運亨에게 人共 추진을 통고했고, 人共을 선포하는 회의도 밤중에 左翼系 치안단의 본부가 있는 옛 경기女高 강당에서 개최했다.
  
   우선 국내외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라면 국내외 각계각층에서 공식적으로든 非공식적으로든 회의에 파견할 대표를 인선하는 작업이 있었어야 할 것인데, 그런 일이 전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중국 重慶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대표한 인사나 延安의 독립동맹을 대표한 인사, 미국의 독립운동 세력을 대표하는 인사는 물론이고 국내에 있던 右翼진영 및 중도파를 대표한 인사들이 그 회의에 전혀 참석하지 않았고 초청받은 일도 없다. 그날 밤 회의에 참석한 會衆은 조선공산당의 朴憲永派와 그들 휘하에 있는 京仁지역 노동자들이었다. 이 사실에 비추어 볼 때, 人共이 민중의 뜻에 따라 선포된 기구가 아니라는 것은 말할 나위 없이 분명하다.
  
   일부 연구자들은 9월5일 밤에 발표된 人共의 중앙위원 명단이나 9월17일에 발표된 人共의 부서 책임자(각료에 해당) 명단에 右翼진영 인사들의 이름이 포함된 것을 근거로 人共에 左右를 망라한 모든 정치세력이 참여한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人共의 간부 명단에 李承晩·金九를 비롯한 右翼진영 인사들의 이름이 포함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당사자들과의 아무런 사전 협의 없이 이뤄진 것이다. 다시 말해 建準과 人共은 민족통일전선기구와는 거리가 먼 左翼 통일전선기구에 불과했다.
  
  
   2. 미국은 한반도 분단의 元兇?
  
   군사분계선에 불과한 38線을 통치분계선으로 만든 것은 소련
  
   미국이 한반도에서 美軍과 소련군 간의 군사분계선으로 38線을 획정한 것은 이론의 여지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이 38線을 획정한 사실이 곧 한반도 분단에 대한 미국의 책임으로 연결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선 38線 획정만 하더라도 미국의 일방적 선언에 의해서가 아니라 미국과 소련이 합의해서 이뤄진 것이다. 따라서 만일 38線의 획정이 한반도 분단의 원인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미국의 책임이 아니라 美蘇의 공동책임이 되는 것이다.
  
   여러 나라의 例를 볼 때 군사분계선이 곧 국토분단선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군사분계선이 어떤 나라의 국토에서 활동하는 외국 군대들 간의 군사활동 분계선으로만 멈추고 거주민들의 생활이나 정치활동의 분리선으로 변질되지 않을 경우에는 그것이 국토 분단을 초래하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西獨지역의 美·英·佛 군대 간의 군사분계선이나 오스트리아에서 美·蘇·英·佛 군대 간의 군사분계선은 그 지역의 국토 분단을 유발하지 않았다. 1990년대 유엔 평화유지군이 파견된 여러 나라들에서 유엔군으로 참여한 각국 군대 간의 군사분계선도 마찬가지다.
  
   군사분계선이 국토 분단을 초래하는 것은 외국 군대가 군사분계선을 기준으로 자기들의 관할下에 있는 지역과 여타 지역 간의 교통·통신망을 단절시키고 그 지역 주민의 생활방식을 여타 지역 주민의 생활방식과 상이하게 만들 경우에 한정된다. 광복 직후 남한지역을 점령한 미국은 38線을 순수한 군사분계선으로 유지하려 했던 데 반해 북한지역을 점령한 소련은 38線을 통치분계선으로 변질시켰다.
  
   소련군은 북한지역을 점령하자마자 38線을 경계로 하여 남한지역과의 교통·통신을 단절하여 南北 주민들 간의 자유로운 통신·통행을 금지했다. 소련군은 이어 金日成을 앞세워 북한지역에서 토지개혁, 산업 국유화, 교육개혁, 주민 사상 개조운동 등을 실시하여 북한 주민의 생활방식을 남한 주민의 생활방식과 완전히 다르게 변질시켰다.
  
   남한을 점령한 美軍은 美蘇공동위원회를 비롯하여 몇 차례에 걸쳐 38線을 경계로 단절된 南北韓 간의 교통·통신을 회복하고, 南北韓 주민 간의 자유 왕래와 자유로운 상거래 등을 회복할 것을 소련군에게 제의했으나 소련군은 일절 응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기준으로 할 때, 한반도 분단을 초래한 책임은 38線이란 군사분계선을 제안한 미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군사분계선으로 설정된 38線을 통치분계선으로 변질시킨 소련에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1945~1948년 사이 미국의 한반도 정책 및 남한에 대한 정책을 분석해 보면 어느 구석에도 남한을 식민지化·군사기지化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없다. 미국은 처음부터 남한지역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평가했다. 미국은 남한이 美軍을 주둔시켜야 할 전략적 가치가 없는 지역이며, 극동에서 전쟁이 발생할 경우 남한 주둔 美軍은 군사적 부담이 될 것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미국은 처음엔 소련군이 한반도 全域(전역)을 점령하는 것을 저지하려 했고, 그것이 저지된 다음에는 한반도 전체가 소련의 위성국이 되는 것을 방지하려고만 했다. 미국은 분명하지는 않지만 한반도에 左右연립 통일정부가 수립되고 나면 남한지역에서 조속히 군대를 철수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미국은 한반도 통일정부 구성이 불가능해지자 더 이상 헛돈을 쓰지 않기 위해 서둘러 남한에 정부를 수립해 놓고 남한 주둔 美軍을 조속히 철수하고자 했다. 이 사실은 1948년 8월 대한민국이 건국된 후 대한민국 정부와 국회가 駐韓美軍의 주둔 지속을 간곡히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서둘러 美軍을 철수한 사실에서 잘 확인된다.
  
  
   3. 우리 민족을 위해 信託統治를 받아들여야 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左翼이 對蘇 自主노선 견지
  
   미국과 소련이 1945년 12월 모스크바 협정에서 합의한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 실시를 우리 민족이 수용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우리 민족이 신탁통치를 수용했더라면 南北으로 분단되지 않고 통일된 정부下에서 민주적으로 발전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대부분 오스트리아가 제2차 세계대전 終戰 後 신탁통치를 받아들여 민족의 분단을 방지하고 민주적 번영을 이룩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들이 우선 범하고 있는 오류는 한반도와 오스트리아의 상황이 판이했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첫째, 오스트리아에 대해선 강대국들이 신탁통치를 실시한 바가 없다.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1945년 5월 오스트리아를 분할 점령한 美·蘇·英·佛 군대는 오스트리아를 신탁통치하는 협정을 체결한 것이 아니라 점령 통제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 그에 반해 한반도에선 미국과 소련이 신탁통치를 실시하려 했다.
  
   둘째, 외국 군대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한 직후부터 오스트리아의 정치세력들은 통일된 임시정부를 구성했으며, 한 번도 4개 외국 군대 점령지역별로 별개의 독립된 정치·행정기관이 구성된 일이 없었다. 그에 반해 한반도에서는 美蘇 양국 군대의 점령 지역 진입과 동시에 南北韓에 별도의 통치기구가 설립되어 각 지역을 상이한 내용으로 통치했다.
  
   셋째, 오스트리아에서는 각국 군대의 분할·점령지역 간에 교통·통신·商거래의 단절이 이뤄지지 않았다. 각국 군대 간에 군사분계선이 존재했지만 그 분계선은 군사 활동에 관한 경계선에 그치고 통치분계선으로 변질되지 않았다. 그에 반해 한반도에서는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하자마자 교통·통신을 차단하여 북한지역을 남한으로부터 분리함으로써 美蘇 兩國 군대 간의 군사분계선이 통치분계선으로 변질되었다.
  
   넷째, 오스트리아의 左翼세력이 소련에 대해 자주적 자세를 취하고 左右연합에 의한 통일정부 유지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당시 오스트리아에는 右翼진영에 인민당(舊기독교사회당), 左翼진영에 사회당(舊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 존재했다.
  
   온건 左翼노선의 사회당은 공산당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한 黨勢(당세)를 유지하고 있어 左翼진영內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사회당은 사회주의 노선을 취하면서도 오스트리아가 소련의 위성국이 되는 것은 절대 피하려는 입장이었으며, 오스트리아를 점령한 美·蘇·英·佛 4개 외국 군대에 대응함에 있어 右翼정당인 인민당과 확고한 공동보조를 취했다.
  
   그에 반해 한반도에서는 左翼진영의 주도권을 소련에 맹종하는 극좌노선의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공산당은 右翼진영과의 협력을 외면하고 소련의 한반도 정책 실천에 협력하려고만 했다.
  
  
   託治 수용은 全한반도 공산화 의미
  
   어떤 민족에 대해 신탁통치를 실시하는 것이 정당성을 인정받으려면, 그 민족 구성원들이 民度가 낮아 자치 역량을 갖추지 못하거나 독립을 희망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한국인은 당장 독립이 되더라도 독립국가를 유지·운영할 수 있는 民度와 자치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한국 민족은 일본에 강제 병합되기 전부터 장기간 독립적으로 국가를 유지·운영해 왔고,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받던 기간 중에도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왔다.
  
   1945~1948년 당시 한국인의 民度와 自治역량은 그 시기에 신탁통치를 거치지 않고 독립한 인도·파키스탄·버마·인도네시아 등 국민의 民度와 비교할 때 결코 떨어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실제로 美軍政의 정치고문으로 일했던 사람도 私席에서는 한국인의 자치 능력을 인정했다.
  
   당시 한반도의 정치세력들에 대한 대중의 지지도, 소련과 미국의 한반도 정책, 중국의 공산화 등을 고려할 때, 5년 동안의 신탁통치를 거쳐 독립이 됐을 경우 한반도는 전체가 공산화되지 않았으면 두 개의 국가로 분단되었을 것이다.
  
   당시 한반도의 정치세력들에 대한 대중의 지지도를 보면, 공산당을 비롯한 左翼세력이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선, 북한에서는 1946년 전반기의 토지개혁 실시 이후 공산당이 압도적 지지를 받게 됐다고 봐야 한다.
  
   남한에서는 신탁통치 반대 운동으로 인해 右翼세력이 左翼세력에 대한 초기의 열세를 크게 만회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左右 진영에 대한 대중의 지지도가 거의 비슷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李承晩과 金九는 지도자로서 대중의 존경을 받았지만 左翼정당들의 토지개혁 공약 등에 대한 대중적 지지도가 높아서 李承晩과 金九에 대한 존경이 右翼진영에 대한 지지로 바로 연결되진 못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정치세력들의 대중 지지도를 고려할 때, 통일 임시정부가 구성되고 그 임시정부에 의해 선거가 실시됐다면 한반도 전체에서 左翼진영이 과반수에는 미달하지만 최다 득표를 획득했을 것이다. 右翼진영은 左翼보다 약간 적은 득표를 했을 것이다. 중도파는 미미하지만 일정한 득표는 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左翼과 중도파 및 右翼의 金九-臨政系가 참여하는 연합세력이 집권연합을 구성하게 되고, 李承晩과 한국민주당은 野黨이 되었을 것이다. 「左翼+중도파+臨政系」의 집권연합은 신탁통치가 종료된 후에도 계속됐을 것이고, 그 집권연합은 북한에서 1946년에 실시된 것과 동일한 토지개혁과 산업국유화를 남한지역까지 확대 실시했을 것이다. 따라서 다른 요인들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의 길로 접어들었을 것이다.
  
  
   4. 李承晩은 미국의 앞잡이며 민족 분단을 추구했다?
  
   美軍政, 李承晩을 家宅 軟禁하기도
  
   李承晩을 미국의 앞잡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李承晩이 (1)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나 고국이 해방된 후 귀국할 때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았으며 (2)귀국 후 남한지역에 親美반공정권을 수립하려는 미국의 지시에 따라 남한지역에 민족을 분단하는 단독정부를 수립했다고 말한다.
  
   李承晩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미국 정부의 지원을 특별히 받은 것도 없지만 미국 정부와 관계가 나쁘지도 않았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終戰까지의 수년간 미국 정부, 특히 미국의 한반도 정책 주관부처인 국무성은 李承晩의 활동을 지원하기보다는 방해했다.
  
   李承晩과 美 국무성 간의 관계가 「불만족스러웠던」 원인은 美 국무성內의 左翼관리들의 李承晩에 대한 혐오 때문이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히스 특별정치국장, 빈센트 극동국장 등과 같은 親蘇·親中共 인사 내지 공산주의자들이 제2차 세계대전 말기 美 국무성에 침투해 있었고, 중국과 極東문제를 담당하는 관리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이 민족 자주의식이 강하고 확고한 反共·反蘇 입장을 취한 李承晩에게 非우호적인 태도를 취했을 것은 설명이 필요 없다.
  
   李承晩이 1946년 6월부터 전개한 남한지역 자율정부 수립 운동도 미국의 한반도 정책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적어도 그 시점에서의 미국의 한반도 정책과는 배치되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문제와 관련해서도 李承晩과 미국은 대립했다. 미국은 모스크바 협정에 입각, 소련과 합의해서 한반도 통일임시정부를 구성하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에 반해 李承晩은 소련이 북한에서 일방적으로 단독 공산정권을 구성하고 토지개혁 등 사회주의로 가기 위한 조치들을 단행하고 있으며, 공산당이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는 통일임시정부가 아니면 통일임시정부 구성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려는 술책을 취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정책은 실현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李承晩과 미국 정부의 이러한 입장 차이로 인해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이 확정되는 단계에 이를 때까지 李承晩과 미국 정부(駐韓 美軍政)는 크게 갈등·대립했다. 李承晩이 1945년 6월 「井邑발언」을 통해 남한에 독자적으로 정부를 수립할 것을 천명하자 美軍政은 李承晩을 강력 비난했다. 美軍政은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순종적인 金奎植(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중도파 세력을 美軍政의 협조자로 삼고 남한에 자율정부를 수립하려는 李承晩과 金九를 적대시하면서 두 사람을 한국 政界에서 退出시키려 노력했다.
  
   심지어 남한 政界의 지도자들로 위촉하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官選의원에 당시 남한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 지도자인 李承晩과 金九를 배제했다. 美軍政은 李承晩이 남한지역 정부 수립에 대한 미국內의 지지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訪美 외교활동을 떠날 때는 그의 出國을 방해했고, 그가 귀국했을 때는 정부 수립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한때 李承晩을 가택연금했다.
  
  
   5. 左右합작은 金奎植이나 呂運亨이 주도했다?
  
   左右합작 운동은 美軍政 작품
  
   左右합작 운동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은 左右합작 운동이 金奎植 혹은 呂運亨이 민족주의적 동기에서 발의한 것이며, 그것이 성공했으면 南北통일이 되었을 텐데 李承晩과 韓民黨의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다고 주장한다.
  
   1946년 5월부터 시작된 남한에서의 左右합작 운동은 金奎植이나 呂運亨이 민족주의적 동기에서 발의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미국 정부가 自國의 한반도 정책을 원활히 집행하기 위해 남한 정계에서 李承晩과 金九를 무력화하고 새로운 협조세력을 확보하려는 계획에 따라 시작한 것이다. 그에 관한 각본을 마련하고 배후 조종한 것은 美軍政 당국이었다.
  
   金奎植이나 呂運亨이 左右합작의 필요성을 주장한 일이 없는 것은 아니나, 1946년 5월부터 전개된 左右합작 사업은 그들이 계획하고 발의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사실은 세 차례에 걸친 左右합작 예비회합을 美軍政의 정치고문인 버치의 집에서 가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입증된다.
  
   金·呂 兩人의 左右합작 참여 동기도 꼭 민족주의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특히 呂運亨의 경우, 左右합작과 관련된 그의 행동은 민족주의적 동기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점들이 많다. 呂運亨은 左翼진영에서 朴憲永의 주도권 강화로 자신의 입지가 약해지면 左右합작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입지가 회복될 가능성이 보이면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또 金日成에게 左右합작을 발전시켜 美軍政의 영향력을 감소시킨다는 내용의 密書(밀서)를 보낸 바 있으며, 남한지역에서 左右합작을 하고 나서 그 토대 위에 다시 南北韓이 합작한다는 노선을 취하고 있었다.
  
   李承晩과 한민당이 左右합작을 방해했다는 주장도 타당하지 않다. 李承晩의 경우는 金奎植으로 하여금 左右합작에 나서도록 종용했으며, 左右합작의 정신을 지지했다. 한민당도 左右합작을 반대하지 않았다.
  
   左右합작이 실패하게 된 주된 원인은 남한의 左右 정치세력의 입장이 정면 대립하여 절충이 불가능했던 데 있다. 左右 진영의 입장이 크게 대립했기 때문에 左右합작委가 1946년 10월 초 左右 양측 입장을 적당히 절충한 「左右합작 7원칙」을 발표했을 때 左右 진영의 핵심부에 위치한 공산당과 한민당이 다 같이 그것을 거부했고, 그에 따라 左右합작이 실패했던 것이다.
  
   남한에서 左右합작이 성공하고 그를 토대로 南北합작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통일정부에서는 左翼이 헤게모니를 장악할 것이 분명했다.
  
   단순한 산술적 계산을 해 보면, 1946년 2월 이후 북한에는 左翼정권이 수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남한의 左右합작 체제와 북한의 左翼정권이 합작하면 그 南北통일 정권에서 左翼은 75%의 지배력을 장악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산술적 계산에 더하여 남한의 공산당은 북한 공산당에 완전히 지배되어 있었고, 呂運亨은 金日成과 긴밀한 내통관계에 있었다. 左右합작 성공으로 金九系와 金奎植系가 통합, 李承晩-한민당系와 갈등할 것이며, 토지개혁으로 한민당의 경제적 지지 기반이 약화될 것이라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남한의 左右합작을 토대로 한 南北합작의 통일정부에서는 左翼의 헤게모니가 확고하게 보장될 것임이 분명하다.
  
   左翼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확고한 헤게모니를 장악한 정부가 통치하는 한반도는 필연적으로 사회주의화되었을 것이다. 左右합작이 성공하여 통일이 이뤄졌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말하는 것은 한반도가 공산화 통일이 됐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해 아쉽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다.
  
  
   6. 美蘇공동위원회 결렬의 책임은 미국에 있으며, UN의 남한 총선 실시 결의는 잘못된 것이다?
  
   美蘇共委 결렬은 右翼 배제 주장한 소련 때문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美蘇공동위원회(美蘇共委)」를 결렬로 이끈 핵심적 쟁점은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참가한 정당과 사회단체 및 개인을 한반도 통일임시정부 구성문제와 관련하여 美蘇공동위원회의 협의대상에 포함시킬 것인지 여부였다.
  
   소련은 그런 정당·단체·개인을 협의대상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미국은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美蘇共委의 결렬이 미국 때문이라는 주장은 한반도 통일임시정부 수립과 관련한 美蘇共委의 협의대상에서 反託운동 참가 세력, 즉 남한의 右翼진영 전체와 일부 중도파를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과 동일하다.
  
   美蘇共委의 협의대상에서 반탁운동 참가 세력을 배제한다는 것은, 南北韓 정치세력 전체의 절반을 협의대상에서 배제한다는 의미다. 그것은 또 통일임시정부 구성에 관한 협의를 美蘇共委와 南北韓의 左翼진영 세력 간에만 전개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 협의 결과 구성될 한반도 통일임시정부는 누가 생각해 봐도 左翼지배 정부일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볼 때 美蘇共委의 결렬 책임이 미국에 있다는 주장은 곧 左翼지배의 통일임시정부가 구성되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동일하다.
  
   한국 문제를 UN총회에 상정한 미국의 조치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한국문제를 美蘇共委에서 계속 다루도록 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이 주장의 타당성은 美蘇共委에서 한국 문제를 계속 협의했을 경우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전제下에서만 인정될 수 있다. 그런데 미국과 소련의 입장은 너무도 거리가 먼 것이어서 절충이 불가능했다.
  
   UN총회가 남한 총선 실시를 결의한 1948년 2월 현재 북한지역에서는 북조선인민위원회라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정권」이 조직되어 강력한 통치를 실시하고 있었고, 공산주의 사상으로 무장된 간부들이 지휘하는 공산당에 충성하는 대규모 병력의 강력한 군대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남한에서는 한국인 스스로 조직한 정부기관이 존재하지 않은 채 美軍政이 극히 非효율적인 통치를 하고 있어 정치·사회적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남한의 군대는 규모가 작고 장비도 빈약한데다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침투해 있어 右翼정당에 대한 충성심도 약했다.
  
   이처럼 극도로 불균형한 南北韓의 상황 속에서 남한 주둔 美軍과 북한 주둔 소련군을 철수해 놓고 한반도의 운명을 南北韓 정치세력들 간의 협상에 맡길 경우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남한 右翼진영의 입장과 南北韓 左翼진영의 입장 차이가 너무 커서 협상은 곧 결렬되고 말 것이며, 그 후엔 內亂상태에서 각 정치세력의 동원 가능한 군사력과 군중 동원 역량이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반도 전역은 틀림없이 공산화되고 말았을 것이다.
  
  
   7. 金九·金奎植의 南北협상은 올바른 것이다?
  
   金九·金奎植의 南北협상은 성과 全無
  
   金九와 金奎植의 南北협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 근거를 제시한다. 하나는 1948년 4월 평양에서 전개된 南北협상이 실제로 성과를 거뒀다는 견해다.
  
   그러나 南北 要人회담의 합의 내용을 담은 공동성명서를 면밀히 검토해 보면 南北협상의 성과라 할 내용이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다.
  
   南北 要人회담 공동성명서는 ① 美蘇 군대의 즉시 철수, ② 美蘇 군대의 철수 후 내란·무질서 발생 부정, ③ 美蘇 군대 철수 후 全조선정치회의를 통한 통일임시정부 수립과 임시정부의 주관에 의한 南北韓 총선 실시, ④ 남한 단독선거와 그에 입각한 남한 단독정부 不인정 등 4개의 합의사항을 내포하고 있다.
  
   南北협상을 긍정 평가하는 사람들은 그 중 ②항과 ③항의 합의를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내란이나 무질서의 발생은 본질적으로 口頭약속이나 문서로 저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②항의 합의는 무의미한 것이다. 그것은 美·蘇軍이 철수하고 나면 내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남한 민중들의 우려를 불식하기 위한 선전에 불과하다.
  
   ③항은 全조선 정치회의에 참여하게 될 南北韓의 정당과 사회단체들의 성격 때문에 결정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③항은 全조선 정치회의에 참가할 南北韓의 정당과 사회단체 56개의 명단을 제시했는데 그 명단에는 평양의 연석회의에 참석했던 정당과 단체들만 기재되어 있고, 남한 右翼진영에 속하는 정당과 사회단체는 단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다. 남한 右翼진영의 정당과 사회단체들을 전면 배제한 全조선 정치회의를 구성하자는 합의를 南北협상의 성과로 본다는 것은 한반도의 공산화 통일을 위한 중간단계의 조치를 지지하는 것과 동일하다.
  
   金九와 金奎植의 南北협상 노력을 긍정 평가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또 하나의 근거는 南北협상을 추진한 金九와 金奎植의 민족주의적 의지다.
  
   아무리 고상한 뜻에서 비롯된 행동이라 할지라도 그 행동이 他人이나 공동체에게 큰 피해를 줄 경우에는 긍정 평가해선 안 된다. 북한 공산세력은 공고한 단독정권을 수립해 놓고 북한지역을 사회주의화하기 위한 노력을 확고하게 전개하면서 군사력을 강화하여 그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남한까지 공산화하려는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1948년 봄은, 남한만이라도 공산화를 방지하려면 남한 민중의 의사에 근거한 민족정부를 수립하여 남한의 혼란을 방지하고 북한 공산세력의 공산화 기도에 대응해야 했던 시점이다.
  
   金九와 金奎植이 추구한 南北협상은 비록 민족분단을 막아야 한다는 고상한 뜻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남한지역의 공산화 방지 노력에 막대한 부정적 영향을 미친 어리석은 행동이었음이 분명하다.
  
   金九와 金奎植의 南北협상 노력을 당시 남한 중도파의 핵심적 지도자의 한 사람인 安在鴻의 입장과 비교해 보면 兩金의 南北협상 노력이 어리석은 것이었음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安在鴻은 金九·金奎植과 동일하게 민족분단에 반대하고 남한의 단독선거에 비판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북한에 이미 단독정권이 수립되어 사회주의화를 실천하고 있으며 공산군의 강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남한에 정부를 수립하여 그에 대처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5·10 선거에 불참했으나 南北협상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安在鴻은 또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그 정당성을 인정했다.
  
  
   8. 5·10 선거는 民意에 반대되는 것이었다?
  
   선거인의 95.5%가 5·10 총선 참여
  
   대한민국의 건국을 비판하고 南北협상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기반이 되는 1948년 5월10일의 선거가 남한 민중의 뜻에 반대되는 것이었고 공명한 분위기 속에 진행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남로당은 선전선행대, 백골대, 유격대 등 무장투쟁 조직을 결성하여 경찰관서 습격, 선거사무소 습격, 선거시설·관공서·右翼인사 가옥 등에 대한 습격과 방화, 통신·운송기관 등 공공시설과 생산시설의 파괴, 경찰관·右翼인사·선거위원·통반장 등에 대한 살상 등 각종 형태의 무장공격을 감행하여 선거를 저지·파탄시키려 했다. 이런 左翼세력의 투쟁으로 인해 제주도에서는 선거가 실시되지 못했다. 경찰과 右翼단체들은 左翼세력의 이러한 선거파탄 투쟁으로부터 선거를 보호하기 위해 활동했던 것이다.
  
   5·10 선거가 民意에 반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무엇보다 높은 선거인 등록률과 투표율이 잘 말해 주고 있다. 선거인 등록 마감일인 4월9일까지 선거인으로 등록한 유권자는 전체 법정 유권자의 91.7%에 달했다. 5월10일의 투표에 참가한 인원은 등록 선거인의 95.5%에 달했다.
  
   이처럼 높은 선거인 등록률과 투표율은 선거가 공명한 분위기 속에 이뤄지는지 여부를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UN 조선위원단과 西方 주요 국가의 신문기자들이 감시하는 가운데 산출된 것이기 때문에 크게 부풀려진 것이라 볼 수 없다.
  
   유엔 조선감시단에 참여한 중립국 인도의 대표 싱은 『유권자들이 엄숙한 중에서도 자기 나라를 세운다는 긴장 속에 새벽 일찍부터 투표장에 모여든 것에서 애국애족의 열성을 볼 수 있었다. 개표도 질서정연하게 진행되는 것을 볼 때 세계 어느 나라의 선거에도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자유 분위기가 완전히 보장된 것을 확인하는 바이다』고 논평했다.
  
  
   9. 대한민국은 미국의 앞잡이와 親日派들에 의해 建國됐다?
  
   親日派들의 선거권·被선거권 박탈
  
   대한민국이 미국의 앞잡이와 親日派(친일파)들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주장의 근거로 대한민국 建國운동의 핵심 지도자인 李承晩이 미국의 앞잡이며, 李承晩과 더불어 대한민국 건국을 위해 활동한 한민당이 親日派들의 집단이라는 점을 제시한다.
  
   李承晩이 미국의 앞잡이는커녕 미국 정부에 맞서 싸우면서 대한민국의 건국을 추진한 것은 앞에 서술했다.
  
   한민당에 親日활동을 했던 사람들이 상당수 참여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親日활동 경력자들을 모두 「親日派」로 규정할 수는 없다. 광복 직후 親日派 숙청을 강하게 주장했던 左翼진영의 통일전선기구인 「민주주의민족전선(民戰)」은 親日派를 「일본 제국주의에 의식적으로 협력한 자들」이라 정의했다.
  
   民戰의 親日派 정의를 기준으로 할 때 한민당에 참여한 親日활동 경력자들의 대부분은 친일파로 규정하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그들 대부분은 「親日을 해야겠다」는 의식을 가지고 親日활동을 전개한 것이 아니라 日帝의 강요 때문이거나, 日帝 말기 사회단체나 기관의 책임자였기 때문에 마지못해 日帝가 조직한 단체의 임원 명단에 포함되거나 親日的인 연설을 하고 글을 썼던 인사들이다.
  
   左翼의 呂運亨이 日帝 말기 상당한 親日활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親日派로 규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민당에 참여한 親日 경력자의 대부분도 親日派로 규정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한민당 간부진 중 親日 경력자의 비율은 日帝 치하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했던 인사의 비율보다 훨씬 적다. 즉, 한민당은 親日派들의 정당이 아니라 극소수의 親日派를 내포한 온건한 민족지사들의 정당으로 규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대한민국의 建國과정에서는 親日派를 배제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전개됐다. 대한민국 건국세력은 선거법을 제정할 때 親日 附逆者(부역자)들의 被선거권은 물론 선거권까지 박탈하는 조항을 포함시켰다. 또한 李承晩은 대한민국의 첫 번째 내각을 구성하면서 親日 경력자를 철저히 배제했다.
  
  
   10. 대한민국 建國으로 인해 南北이 분단되고 6·25 전쟁이 발발했다?
  
   먼저 單政 수립하고 분단으로 간 것은 북한
  
   8·15 광복 이후 南北韓에서 전개된 정치변화를 면밀히 비교해 본 사람이라면, 남한에서 단독정권인 대한민국 정부가 먼저 수립되고 그에 따라 북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됐다는 주장을 누구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단독정부가 먼저 수립된 것은 북한이다. 1946년 2월에 수립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토지개혁, 산업 國有化, 주민 사상개조 운동, 경제계획 수립 등 정부만이 할 수 있는 사업들을 수행한 분명한 정부이다.
  
   金日成은 1946년 2월20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제1차 회의에서 행한 연설에서 『지난 2월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됨으로써 우리 인민은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진정한 중앙정권기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북한의 역사학자 김한길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인민민주주의 독재정권」이라 기술했다.
  
   북한은 1946년 11월에 道·市·郡 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하고 1947년 2월과 3월에 里(洞)·面 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했다. 이를 기초로 1947년 2월 국회에 해당하는 북조선인민회의를 구성했으며, 그 북조선인민회의가 행정부인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구성했다.
  
   요컨대 북한에서는 남한에서 단독선거인 5·10 선거가 실시되기 1년 수개월 前에 단독선거를 실시해 단독국회를 구성하고 단독정부를 수립한 것이다.
  
   따라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민족이 분단된 것이 아니라, 북한의 단독 공산정권 수립으로 이미 민족이 분단된 상황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 사실을 알면서도 대한민국 정부 수립 때문에 민족이 분단됐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우리 민족이 공산주의로 통일될 수 있었는데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을 아쉬워하는 것으로 해석돼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으로 인해 南北韓에 대립적인 정권이 수립되고 6·25 전쟁이 일어났다는 주장은, 독일에서 東西獨의 대립적 정권이 수립됐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비춰 볼 때 분명히 잘못된 주장이다. 상대방을 무력 침공하여 굴복시키려는 노력이 전개되지 않으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북한 공산정권은 1946년부터 인민군을 급속하게 강화해 왔으며, 남한의 左翼세력은 남한군대에 左翼분자들을 대대적으로 침투시켜 놓았다. 1948년 3월에는 중국 공산당 정권과 비밀 군사협정을 체결했다. 非군사적 방법으로 남한을 공산화할 수 없을 경우 군사적 방법을 동원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이같이 볼 때, 6·25 전쟁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때문이 아니라 남한을 공산화하려는 북한의 의지 때문에 발발한 것임이 분명하다. 누군가 이런 사실을 알고도 대한민국 건국 때문에 6·25 전쟁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면 남한의 공산화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돼야 할 것이다.●
  
  
  
[ 2006-01-08, 10:5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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