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류국가 만들기의 新羅 모델
국가 엘리트층의 솔선수범으로 국내 정치가 안정되고 내부 단합이 이뤄졌다. 이 정치력은 외교력과 군사력을 국가 목표를 위해 동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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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류국가 만들기의 新羅모델
  
  
  조갑제
  
   대한민국의 꿈은 자유통일을 이룩한 다음 일류국가를 만드는 것이다. 이는 민족사의 두번째 선진화 경험이다. 첫번째는 신라가 서기 676년 한반도를 통일한 다음 약200년간 일류국가로 번영했을 때였다. 7~9세기에 유럽은 암흑시대라고 하여 로마 문명이 게르만족에 의하여 파괴된 뒤라서 교회를 제외하곤 이렇다 할 문화의 건설이 없었다. 아랍에서는 이슬람 문화가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이 시기 세계 2대 문화권은 唐과 신라를 중심으로 한 동양, 그리고 아랍권이었다. 예술, 군사력, 정신력에서 신라는 당시 세계의 일류국가였다.
   신라가 唐과 동맹하여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일본을 무력화시켰기 때문에 동아시아의 평화가 그 뒤 200년간 지속될 수 있었다. 고대의 황금기인 이 평화와 번영의 질서를 주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신라였다. 우리가 지금 두번째로 일류국가를 만들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었으니 첫번째 일류국가 新羅의 모델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신라를 일류국가로 만든 원동력은 이렇게 정의된다.
   1. 정치가 안정되었다. 왕권의 계승이 비교적 순리대로 이뤄졌다.
   2. 지배층에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전통이 확립되어 국민단합이 이뤄졌다.
   3. 외교를 잘하여 당시의 최강대국과 동맹관계를 맺었다.
   4. 종교와 권력이 이상적으로 결합하여 삼국통일의 2대 주체세력인 호국불교와 화랑도를 만들어냈다.
   5. 文武겸전; 나라의 기풍이 엄격하면서도 개방적이고 활달하면서도 절도가 있었다.
   6. 해양력이 강했다. 對唐결전에서 신라는 해전으로 결판을 냈다.
   7. 실용적 자주정신이 강했다.
   8. 행정 시스템이 잘 짜여져 유사시 동원력이 강했다.
   9. 불교 같은 외래문물을 사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조국의 현실에 맞게 주체적으로 수용했다.
   10. 수도를 옮기지 않았고, 한강유역을 잃지 않았다.
   11. 통일과정에서 백제, 고구려 유민들을 거의 차별없이 통합했다.
  
   위의 11개 조건은 대한민국이 일류국가의 꿈을 실현하는 데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자주정신, 실용정신, 해양정신, 文武통합, 애국종교, 행정력, 수도死守, 지도층의 솔선수범, 애국청년의 조직화, 정치안정, 동맹외교라는 키워드는 시간의 벽을 뛰어넘는 일류의 조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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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민족 세번의 세계화-일류 국가와 친했기 때문
  
  
  
   우리 민족사상 세번의 세계화 대세가 있었다. 우리 민족은 이 세번의 시기에 세계사의 중심에서 활약했다.
  
   첫번째는 7세기 말 신라 통일 이후 약200년간이다. 세계제국 唐과 결전하여 이김으로써 안동도호부(평양)를 한반도에서 추방하여 민족통일국가를 만들어낸 신라는 그 뒤 唐과 화해했다. 唐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발전시키면서 신라는 물질적, 외교적, 군사적으로 선진국 수준에 달했고 신라인은 중국, 일본 등 당시 세계사의 본무대에서 당당하게 활동했다.
  
   두번째는 13세기 약40년의 對蒙 항전 끝에 항복한 고려를 칭기스칸 제국인 元의 쿠빌라이가 부마국으로 대우하면서이다. 元의 황제들은 끈질기게 저항했던 고려가 존경스러워서 그랬는지 고려를 멸망시키지 않고 국체를 보존하게 했으며 고려왕을 사위로 삼고 고려인들을 우대했다. 당시 元은 세계 최강의 패권국가였다. 이 元과 친한 관계로 해서 고려 사람들의 행동 반경은 元나라의 통치 범위만큼 넓어졌다.
  
   세번째는 1948년 이후 대한민국이 세계의 최강국인 미국과 동맹국이 되면서이다. 미국은 한국에 민주주의를 가르쳐주고 젊은 이들의 목숨을 4만 명 이상이나 바쳐 나라를 지켜주었으며, 전란으로 피폐한 한국에 군사 경제 기술 원조를 주어 근대화의 기틀을 만들었다. 미국은 또 근대화의 시기에 한국 상품의 수출시장이 되어주었고 민주화의 시기에는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여 권위주의 정부를 견제했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자 우리보다도 더 걱정을 많이 해주었고 잘 하면 통일로 나아갈 때 결정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反美세력을 누를 수 있다면).
  
   이상 세번의 교훈은 간단하다. 세계의 최강 선진국과 친하면 우리도 세계화되어 활동공간이 넒어지고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번영한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나라,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인권적으로 최첨단을 걷고 있는 나라와 친구가 되려고 경쟁이 치열한 판에 거짓과 선동으로써 잘 나가던 친구관계도 끊어버리자고 나서는 세력이 있으니 이들이야말로 민족과 국가가 못되게 하기 위해서 태어난 악의 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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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주의와 일류국가
  
  
  
   프로테스탄트(新敎)의 정통신학은 칼빈주의이다. 16세기 초 독일사람 루터가 종교개혁을 통하여 카톨릭의 관료적 병폐를 폭로하고 성경정신으로 돌아가 인간과 하나님의 직접 관계에 의한 구원을 제창한 것을 이어받아 세계사의 진보에 큰 영향을 끼친 사상이 칼빈주의이다. 지난 500년간 인류의 발전에 기여한 이념을 꼽는다면 칼빈주의가 단연 1위가 될 것이다. 인류 발전에 가장 나쁜 영향을 끼친 이념은 물론 공산주의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칼빈주의를 받아들여 조국발전에 기여했고, 북한의 지배층은 공산주의를 받아들여 조국을 망쳤다. 사상은 이처럼 무서운 결과를 내는 것이다.
  
   칼빈주의가 근대화에 끼친 공로는 칼빈주의 神學이 들어간 나라가 거의 예외없이 1류 선진국이 되었다는 점으로 증명된다. 프랑스 출생인 그는 종교탄압을 피해서 스위스 제네바로 건너와 집권자가 되면서 자신의 신앙을 世俗에서 적용할 수 있었다. 그 이후 칼빈주의는 당시의 신흥 시민계층이 받아들이면서 북쪽으로 확산되었다. 칼빈주의는 독일, 네덜란드, 영국, 미국으로 퍼져가면서 인류발전에 이정표가 될 만한 역사적 사건들을 일으킨다. 네덜란드의 독립전쟁, 영국의 청교도 혁명, 미국의 건국은 칼빈주의자들 또는 칼빈주의 정신이 주도한 사건들이었다. 여기에 한국의 기적적인 발전이 칼빈주의의 승리 목록으로 덧붙여질 수 있다.
  
   한국 기독교의 정통세력도 칼빈주의를 받아들였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주류인 장로교가 바로 칼빈주의 종파이다. 한국 기독교가 칼빈주의를 신념으로 하여 개화기, 독립운동기, 건국기, 호국기, 근대화 및 민주화 시기에 역사의 흐름 한복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자유통일기에도 그럴 것이다.
  
   1885년 부활절 아침에 제물포에 상륙했던 미국 장로교 선교회 호레이스 언더우드 선교사가 칼빈주의 신앙을 갖고 한국에 온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칼빈주의를 매개로 하여 유럽의 종교개혁과 산업화 민주화, 그리고 미국의 건국정신과 맥을 통하게 되었다. 유럽과 미국에서 칼빈주의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뒷받침한 가장 강력한 종교적 신념체계였다. 하나님의 主權인정, 성경의 무오류성 인정, 종교와 신앙의 자유, 不義한 권력에 대한 저항권 인정, 근면하고 성실한 직업윤리의 강조를 핵심으로 하는 칼빈주의는 국민국가 건설기의 한국에 맞는 시대정신이 되었다. 한국 기독교가 대팽창한 것은 국민국가건설기의 참여했기 때문인데 이것을 가능하게 했던 신학이 칼빈주의였던 것이다.
  
   이제 한국의 칼빈주의는 金正日 정권을 어떻게 규정하고 자유통일에 어떻게 기여해야 할 것인가 하는 또 다른 과업을 눈앞에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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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들
  
  
   칼빈주의와 미국의 건국
  
   1517년 독일의 가톨릭 승려 마르틴 루터가 [95개 명제]를 발표하여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 교황과 성당의 부패를 고발함으로써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다. 루터가 주장한 핵심은 인간은 성경을 통해서 하느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지 가톨릭처럼 권위주의적인 계급구조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하느님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인간과 절대자 사이에 있는 교회의 중계역할을 부정한 것이다. 이 주장에 동조하는 봉건영주와 국가들이 생겨나면서 유럽은 백년을 넘게 종교분쟁에 휩싸였다. 이 종교 분쟁에서 어느 쪽에 섰느냐에 따라서 나라의 성격이 바뀌게 되었다. 대체로 영국 독일 스칸디나비아 같은 투톤族 나라들이 루터 편을 들어서 개신교(改新敎) 국가가 되었고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같은 라틴系 국가들이 가톨릭 국가로 남았다. 종교개혁을 받아들인 나라들에서는 그 뒤에 산업혁명과 민주화가 상대적으로 잘 진행되어 이 나라들이 제국주의 시대의 패권을 잡게 되었다. 스위스에서도 종교혁명을 받아들여 많은 州가 로마 교황의 지도력을 거부하게 되었다. 제네바市는 프랑스 신학자로서 종교박해를 피해서 망명한 존 칼빈을 종교개혁의 지도자로 모셨다. 칼빈은 이 도시를 자신의 신학에 따라서 통치하게 되었다. 그의 유명한 저작인 [그리스도교의 원칙](1536년)은 아주 주목할 만한 구원관(救援觀)을 내놓았다.
  
   그는 인간이 구원을 받아서 천국에 갈 것인가 말 것인가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하느님이 창세기(創世記) 때부터 이미 누가 구원을 받을 것인가를 결정해 놓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인데 칼빈은 무궁한 하느님의 지혜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인간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구원이 예정되어 있지 않다면 천국에 갈 수가 없다. 그러면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타락한 생활을 할 것인가. 칼빈은 누가 구원을 받을지는 알 수 없으나 누가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인가 하는 사실은 확실히 알 수가 있다고 했다. 타락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확실하게 지옥으로 떨어질 자들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지옥행(地獄行) 열차를 타지 않으려면 평소 사회생활과 신앙생활을 건실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엄격한 도덕률과 근면성을, 그는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는 인간의 조건으로 제시한 것이다. 인간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건실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절묘한 논리가 탄생했다.
  
   칼빈의 淸富사상
  
   이 윤리는 그 때 유럽에서 형성되고 있었던 시민계층의 행동철학으로 받아들여지기에 적합하였다. 말하자면 역사의 흐름과 맞는 신학이 되었다. 이 사상은 그 뒤에는 프로테스탄트의 윤리로 확대되고 자본주의의 정신으로 연결되었다. 돈을 버는 행위를 천한 것으로 보는 종교의 일반적인 경향과는 달리 칼빈주의는 인간의 경제활동은 신성한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파악했다. 돈벌이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신성한 가치를 지니려면 돈을 벌고 특히 쓰는 행위가 정당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인간이 돈을 버는 것은 개인의 부(富)를 증식한다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몫을 잘 관리하여 크게 키우는 행위이다.
  
   그리하여 그 富를 사회에 환원하여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빛내는 행위이다. 이러한 칼빈주의의 경제관은 청부(淸富)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경제활동을 경멸했던 주자학의 청빈(淸貧)사상과 정반대이다. 청빈사상은 위선적이고 선언적이며 패배적인 생각이라면 청부사상은 적극적이고 실용적이며 실천적이다. 淸貧의 사조에서 자란 한국의 자본주의가 아직도 천민적(賤民的)이란 비판을 듣고 있는 것은 철학이 돈을 미워하면서 다투기만한 때문이다. 반면에 칼빈주의는 돈과 정신을 통합할 수 있는 경제윤리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 칼빈주의는 개신교의 주류(主流)신학이 되어 프랑스의 위그노派 독일과 네덜란드의 개혁교회,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그리고 영국 청교도의 신학적 근거가 되었다. 미국의 건국정신은 이 영국 청교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렇게 된 데는 재미있는 역사의 우연이 있었다.
   16세기 초 영국왕 헨리 8세는 원래 로마 교황과 사이가 좋았다. 헨리 8세는 루터의 영향을 차단하는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로마 교황으로부터 [신앙의 수호자]란 칭호까지 받았다. 그런데 헨리 8세와 결혼한 스페인의 아라곤 왕국 캐서린 공주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 남아(男兒)를 출산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헨리 8세는 로마 교황에게 이혼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보통 때 같으면 이런 요청은 허락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는 사정이 묘하게 꼬이게 되었다. 헨리 8세의 왕비 캐서린은 스페인의 전성시대를 연 카를로스 5세의 숙모였다. 카를로스 5세는 합스부르그 왕조(王朝) 출신으로서 스페인왕뿐 아니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겸하고 있었다. 스페인과 네덜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그리고 이탈리아의 일부도 통치하고 있었다. 당시 유럽은 세속적인 권력은 카를로스 5세가, 정신적 권위는 로마 교황이 나누어 갖고 있는 형국이었다. 로마 교황은 카를로스 5세의 후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숙모 캐서린과 영국왕 헨리 8세가 이혼하는 것을 허용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화가 난 헨리 8세는 영국 교회와 로마 교황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는 앤이라는 여자와 결혼해버렸다. 이 사건은 유럽에서 로마의 교황권이 약화되는 중대한 계기가 된다. 하나 재미있는 것은 헨리 8세가 아들을 얻기 위해서 맞아들였던 앤은 딸을 낳았다는 사실이다. 이 딸이 커서 엘리자베스 1세가 되고 그의 치세(治世)에 영국은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여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극단적인 개혁파 청교도
  
   그런데 영국 교회를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로 논쟁이 일어났다. 칼빈주의의 원칙을 도입하여 영국 교회에 남아있는 가톨릭적인 잔재를 청소하자는 개혁세력을 퓨리턴(Puritan)이라고 불렀다. 영어로 퓨리파이(Purify), 즉 청소한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이 퓨리턴, 즉 청교도 중에는 영국 교회자체를 부정하고 완전히 결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극단적인 개혁파가 있었다. 이들을 분리교도(Separatists)라고 부르게 되었다. 미국에 건너간 것이 이 분리주의자들이었다. 당시로서는 가장 개혁적인 기독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미국으로 건너가 이상향을 건설하려고 했다는 이 점이 미국의 국가적 성격을 상당 부분 규정했다.
  
   영국의 동쪽 스크루비에 있던 분리주의 집단은 종교적 박해를 피해서 1607년에 네덜란드로 이주하였다. 여기서 10여 년 살다가 보니 문제가 생겼다. 네덜란드의 칼빈주의 신도들은 이 분리주의자들에게 종교의 자유는 허용했으나 일자리는 하층민 수준으로 제한하였다. 선원, 병사로 나아가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네덜란드의 습관에 동화되어 조국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다. 이들이 영국을 떠난 것은 조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인데 이곳에 오래 살다가는 후손들이 동화되어버리겠구나 하는 걱정이 생겼다. 그렇다고 영국으로 다시 돌아가기는 싫고, 그리하여 이 분리주의자들은 미국으로 건너가서 새로운 영국, 즉 뉴 잉글랜드를 건설하자는 꿈을 키우게 되었다.
  
   그때, 즉 1620년 무렵 워싱턴 남쪽에 있는 지금의 버지니아 지방에서도 영국인들이 식민지를 개척하고 있었다. 버지니아 회사라는 식민지 회사가 개척민을 데리고 와서 농사를 짓고 담배를 재배하고 있었다. 분리주의자들 35명은 이 버지니아 회사로부터 토지사용권을 얻어서 주식회사를 설립한 뒤에 이 회사소속으로서 총 1백2명의 이주자들을 모집하여 1620년 9월 영국의 플리머스항(港)을 떠나 미국으로 출발하였다. 이들을 태운 1백80t짜리 메이플라워호(號)가 대서양을 건너 그해 12월에 도착한 곳이 지금 매사추세츠州에 속하는 해변으로서 플리머스라고 이름지었다. 이들은 원래는 버지니아로 가려고 했으나 폭풍 때문에 이곳에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메이플라워는 다음해 4월까지 머물면서 겨울에는 이주민들의 피난처로 쓰였다. 혹독한 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순례자(Pilgrims)로 불리게 된 이들 중 반이 죽었다. 근처에 있는 인디언들에게 약점을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시체를 묻어도 표시를 남기지 않았다. 다음해에는 근처에 살고 있던 인디언들로부터 옥수수 재배법을 배워서 풍작을 이루었다. 이를 기념하여 추수감사절이 생겼다. 보스턴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쯤 달리면 도착하는 플리머스港에는 메이플라워號의 복제품과 최초의 상륙자가 밟았다는 돌, 그리고 민속촌으로 재현된 농장이 있다.
  
   이 플리머스 농장에는 청교도 복장을 한 사람들이 영국 억양의 중세영어를 써가면서 관광객들을 즐겁게 한다. 비행기가 상공으로 날아가는 것을 가리키면서 {무슨 새가 저렇게 크지}라고 능청을 떨고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코리아, 코리아, 그런 나라도 있나}라고 고개를 갸우뚱한다. 청교도들이 건설한 이 농장에는 교회, 감옥, 요새가 있다. 인간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시설인 것이다. 종교적인 열정으로써 뭉쳤다고 해도 질서를 유지하면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감옥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순례자들은 영국의 보호로부터도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당시로선 어느 나라의 주권 아래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들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규율을 잡지 않으면 공멸(共滅)할 것이라는 공포에서 자신들이 선출한 대표자들이 만든 법에 복종하겠다는 서약을 하게 되었다. [메이플라워 맹약]이라고 불리는 이 약속을 기초로 하여 자치기구를 설립했다. 교회의 간부들이 자치기구의 간부를 겸하였다.
  
   교회에서 태어난 국가
  
   메이플라워 맹약에 서명한 사람들이 총회(General Court)를 구성하고 여기서 지사를 뽑았다. 이렇게 하여 미국은 교화를 요람으로 하여 탄생하게 되었다. 이런 배경을 이해해야 왜 아직도 미국에서 청교도적 정신의 영향이 그토록 뿌리깊은지를 알 수가 있다. 버지니아보다도 매사추세츠 지방의 개척이 늦게 되었는데도 미국의 발상지라고 하면 이곳 뉴 잉글랜드가 연상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버지니아의 개척은 영국사람들이 돈벌이를 위해서 식민지로서 경영을 한 것이고 매사추세츠 코네티컷 등 뉴 잉글랜드는 여기에 새로운 영국을 건설하겠다는
   신념을 공유한 사람들이 세운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먹고 산다는 차원과 정신적인 자유를 목적으로 삼아 모험을 결행한 것의 차이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철학적인 바탕을 깔고 하는 것과 그냥 편의대로 하는 것 사이에는 시간이 흐르면 크나큰 차이가 나게 되는 것이다.
  
   플리머스 정착촌의 인구는 7천 명을 넘은 적이 없었다. 뉴 잉글랜드의 중심지는 곧 그 북쪽에 있는 보스턴으로 옮겨갔다. 순례자들(분리주의자)보다는 다소 온건한 영국 청교도들이 1620년대 말부터 보스턴으로 건너오기 시작했다. 변호사이자 청교도 지도자인 존 윈스롭의 지휘하에 이들은 청교도정신을 구현할 수 있는 장소를 보스턴에서 구하여 [언덕 위의 도시], 즉 신시(神市)를 만들겠다고 1630년에 알벨라號를 비롯한 일곱 척의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왔다. 그들은 매사추세츠만(灣)회사라는 일종의 무역회사를 만들었다. 이 회사의 이사회에 해당하는 사령탑에는 [자유인]이라고 불린 교회의 간부들이 주주(株主)의 자격으로 포진하였다. 이사회는 정착민들의 자치기구 책임자를 선출하였다. 이민자가 많아지자 이사회의 구성원은 교회가 아닌 마을을 대표하는 사람들로 확대되게 되었다.
  
   즉, 교회에서 회사가 생기고 회사에서 정부와 의회가 생겨난 과정이다. 교회로 상징되는 정신, 회사로 상징되는 물질, 그리고 정부로 상징되는 권력, 이 세 가지 상반되는 요소가 미국에서는 그 요람기에서부터 한 덩어리로 결합되어 있었고 지금도 그러하다는 점을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한 국가의 3대 구성요소인 종교(또는 이념), 경제, 권력의 관계가 갈등하면 그 국가는 통합성을 상실한다. 이 관계가 견제와 균형을 바탕으로 하여 한 덩어리로 되어 있을 때 그 국가는 건실하고 생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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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주의와 일류국가
  
  
   인륙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혁명가와 혁명이론은 칼빈과 칼빈주의이다. 프랑스 사람 칼빈은 프랑스 왕조의 신교도 탄압을 피해 스위스 제네바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제네바 시장이 된 그는 칼빈주의에 따라 이 도시를 다스렸다.
  
   칼빈주의의 핵심은 구원예정설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 천당에 갈 것인가, 아니면 지옥에 갈 것인가는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되어 있다.
   인간은 누가 구원받을 사람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아는가. 누가 구원받을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누가 구원받지 않을 사람인가는 알 수 있다. 구원받지 못할 자는 인생을 낭비하는 자, 도둑질 하는 자, 게으른 자, 거짓말 하는 자들이다.
  
   이런 구제불능의 그룹에 들지 않으려면 인간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의심을 갖지 말고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야 한다. 성실히 일해서 돈을 벌고 재산을 늘리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다.
   16세기 이런 칼빈주의는 그때 서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던 상공업자들과 시민계급의 윤리(막스 베버가 말한 자본주의의 윤리로서의 프로테스탄트)가 되었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여 번 돈을 좋은 데 쓰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거리낌 없이 돈을 벌자! 이른바 淸富 사상인 것이다.
  
   칼빈주의가 주도권을 잡은 나라는 따라서 富强했다. 칼빈주의자들은 또 왕정과 독재를 미워했으므로 곳곳에서 혁명과 봉기를 일으켰다. 네덜란드에선 칼빈주의자들이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전쟁을 일으켜 성공했다. 영국에서는 퓨리탄이라고 불린 칼빈주의자들이 크롬웰의 지휘하에 청교도 혁명을 일으켜 카톨릭 세력뿐 아니라 왕정을 결정적으로 약화시켰다.
  
   크롬웰의 등장 이전 영국 청교도들이 카톨릭왕의 탄압을 피해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간 것이 미국 독립정신의 시초였다. 네덜란드, 영국, 미국, 즉 17세기부터 약300년간 세계를 주도해온 선진해양산업강국의 정신적 엔진이 칼빈주의였다.
  
   부국강병, 법치, 인권, 개인주의, 경쟁, 근로의 보람을 확산시킨 칼빈주의는 서구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초석이 되었다. 칼빈주의는 영국에서는 장로교에 들어갔다. 19세기말 개화기 때 이 장로교가 한국으로 들어와 그들의 칼빈주의가 한국인의 개화, 독립투쟁, 건국, 근대화, 민주화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자유통일의 시기에도 그럴 것이다. 세계적인 성공모델인 대한민국의 발전에 끼친 칼빈주의의 역할을 추적하면 한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소 넓어질 것이다.
  
  
  
  
  
  
  
  
  
  
  
  
  
  
[ 2006-03-13, 19:1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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