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犬猿(견원)의 동반자’ 李承晩과 하지
김일성은 소련주둔군 사령관의 꼭두각시였고, 이승만은 미군 사령과 하지와 거의 원수지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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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共-反美노선
  
  
   1945년 10월21일 서울에서 열린 미 점령군 환영대회에서 하지는 그 자리에 참석한 李承晩을 ‘위대한 독립투사’라고 극찬했으나 李 박사는 답사에서 소련의 야욕을 맹렬히 비판했다. 영어와 한국어로 한 연설에서 그는 미 국무부와 군정당국에 도전적인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하지 장군이 말한대로 미군이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온 것인지, 아니면 우리나라가 분단되고 그 한 쪽은 또 다른 주인 아래서 노예 신세가 될 것인지 알기를 원합니다.”
  
   국무부는 李 박사의 反蘇的 발언에 대해서 주의를 주라고 도쿄의 연합군 사령부로 전보를 쳤다. 그는 미국인 고문 올리버에게 “나는 평생을 선동가로 살아 왔음으로 말 조심이 안 된다”고 실토한 사람이다. 건국 시기에 李承晩은 진실과 예견력에 기초한 선동으로 좌익들의 거짓선동을 무력화시켰다. 선동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정치적 무기였다. 李承晩이 광복한 지 겨우 두 달이 지난 시점에서 연합군의 한 축이었던 소련의 야욕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은 과격한 발언으로 여겨졌으나 지금의 역사가들은 그의 지적이 정확했다고 평가한다.
  
   스탈린이 한반도의 38도선 이북 지역에 '민주정권', 즉 단독정부 수립을 결정한 것은 1945년 9월20일이었다. 스탈린은 그해 8월 초순 런던에서 열린 외상회담에서 미국이 反蘇的 태도를 보이는 것을 보고 미국과의 대결을 결심한다. 이에 따라 중국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북한에서 공산정권을 공고화한다는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다.
   미 국무부는 이런 사정을 모르고 소련과 협력하여 한반도에 신탁통치를 실시한 뒤 독립시킨다는 방침을 순진하게 밀고 나갔다. 1945년 12월27일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美英蘇 외무장관 회의는 최장 5년간의 신탁통치 방침을 발표했다. 李承晩은 “託治(탁치)가 강요된다면 우리는 열국의 종속민족으로 전락하고 生殺여탈권을 타인에게 맡겨놓는 격이 될 것”이며 공산주의자들의 讚託論(찬탁론)은 “영원히 우리 반도와 국민을 팔아먹으려는 가증스러운 행동”이라고 규탄했다.
  
   李承晩, 金九의 右翼진영은 反託, 남북한의 좌익진영이 소련의 지시에 따라 讚託으로 돌았다. 이는 좌익의 치명적 실수였다.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여론이 압도적이었음에도 좌익들은 소련의 지시를 받아 反민족적 노선을 선택했다. 李承晩이 좌익세력을 ‘소련에 조국을 팔아넘기려는 매국세력’으로 규정한 것을 뒷받침한 셈이었다.
   李承晩은 反託노선은 反共-反美 노선이었다.
  
   신탁통치안을 논의하기 위하여 1946년 3~5월 서울에서 열리 美蘇 공동위원회는 소련이 李承晩 등 반탁세력을 협의대상에서 제외하려 하고 미국은 이에 반대함으로써 결렬되었다. 그 직후인 6월3일 정읍에서 李承晩은 “통일정부 수립이 여의치 않게 되었으니 우선 남한에서라도 정부를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군이 철퇴하도록 세계공론에 호소하자”고 연설했다. 좌익들은 이 발언을 트집 잡아 李承晩이 분단에 책임이 있다고 공격하지만, 李承晩이 소련의 계획을 간파하고 적절한 대응책을 내어놓은 것이다.
   소련군은 북한지역에 공산정권을 세우려고 38선의 통제를 강화하여 군사주둔의 경계선을 일종의 국경선으로 바꿨다. 대한민국 건국 이전에 이미 南北분단을 현실화한 소련과 김일성이 分斷의 책임자인 것이다. 소련은 1946년 말에는 사실상 정부인 북조선 인민위원회를 세우고, 그 이듬해엔 군대를 만들고, 헌법제정에 착수한다. 대한민국이 건국되기 전에 이미 북한에선 정부형태의 조직이 작동하고 있었다.
  
   미군사령관에게 선전포고
  
   李承晩의 정부수립론을 반박한 것은 좌익만이 아니었다. 하지 미군 사령관은 올리버에게 “이승만은 미국이 후원하여 설립될 정부에 결코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고 말했다. 러치 군정장관은 출입기자들에게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에 절대 반대한다”고 말했다. 하지는 소련과 타협할 수 있는 남한 정치세력의 중심을 만들기 위하여 극우(이승만)와 극좌(공산세력)를 배제한 온건 좌우파 합작을 추진했다. 金奎植-呂運亨이 좌우합작 운동을 주도했다. 李承晩은 하지의 노선을 공격하기 위하여 미국을 방문한다.
  
   1946년 12월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 그는 하지를 만났다. 하지 사령관은 李 박사에게 “귀하의 집권을 허용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고 이야기했고, 李 박사도 “앞으론 하지 장군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겠다”고 응수했다. 李承晩이 미군사령관에게 정치적 선전포고를 한 이 무렵 북한에선 김일성 일파가 소련군 사령부가 써준 시나리오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스탈린은 金日成과 朴憲永(남로당 당수)을 모스크바로 불러 시험문제를 냈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방에 들어가 답안을 써서 스탈린에게 제출했다. 金日成은 생전에 黃長燁 선생에게 “내가 답안지를 잘 써 스탈린으로부터 지도자로 발탁되었다”고 자랑했다고 한다.
  
   미국에 도착한 李承晩은 언론과 미 정부를 상대로 정부 수립의 당위성을 홍보하고, 하지 중장의 공산당 옹호 노선을 집중적으로 비판했다. 李承晩은 미국에서 미군사령관 축출운동을 벌인 셈이다. 하지 사령관도 이 무렵 본국정부의 소환을 받고 5년만에 워싱턴에 왔다. 그는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 “미국과 소련이 협력하여 한국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하지는 미 상원 군사위원회의 비공개회의에 참석하여 어두운 전망을 내어놓았다.
   “미국이 남한에서 철수하면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북한이 남한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한국문제는 계속적인 점령정책이 아니라 美蘇의 협상을 통하여 해결되어야 한다.”
   1947년 트루먼 대통령은 미 의회에서 유명한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다. 그리스와 터키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자유를 위협하고 있는 점을 지적한 트루먼은 공산주의의 세계적 확산을 저지하겠다고 천명했다. 소련과 대결자세를 선언한 셈이다. 이때부터 동서냉전이 본격화된다. 李承晩이 몇 년 전부터 경고해왔던 소련의 야욕에 대해서 미국도 비로소 동의한 셈이었다. 하지만 미국 군부는 한국을 그리스나 터키처럼 지킬 필요는 없다는 전략적 판단을 내린다.
  
   犬猿의 동반자: 하지와 李承晩
  
   트루먼 대통령의 적극적인 反蘇的 개입 원칙이 한반도에선 적용되지 않았다. 미국 육군성은 가능한 빨리 한반도로부터 철군할 것을 주장했다. 미군철수를 가장 강력히 주장한 것은 아이젠하워 육군참모총장이었다. 그의 주장을 받아들인 합참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철군을 건의하여 승낙을 받았다. 아이젠하워는 나중에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나와 “트루먼 대통령의 실책이 북한의 남침을 초대했다”고 비난했다. 자신이 추진했던 주한미군 철수가 그런 초대장이었음을 무시한 이 배신적 발언을 듣고 분노한 미 국무부 고관 폴 니츠는 黨籍을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바꿨다고 한다.
   미국 정부는 1947년 7월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양하기로 했다. 그들은 소련과 합의하여 한반도에 통일정부를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미군을 남한에 계속 주둔시킬 필요도 없으므로 李承晩이 요구해온 정부수립을 허용하고 물러나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李承晩은 미국과 소련, 그리고 국내 공산세력과 대결하여 反共자유민주체제하의 建國노선을 관철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주한미군을 붙들어둘 순 없었다.
   하지 사령관은 李承晩과 대결하면서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그도 신탁통치는 불가능하고 李承晩이 한국의 공산화를 막을 유일한 인물임을 잘 알았으나 워싱턴으로부터 내려오는 명령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는 한때 李承晩을 정치자금 조성과 터러 모의 등의 혐의로 체포할 결심을 여러 차례 했지만 번번이 마지막 순간에 포기했다고 한다. 李承晩 이외엔 代案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측으로선 ‘李承晩의 代案이 없다’는 점이 그와 대결하는 데서 항상 약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충남대 사학과 차상철 교수는 ‘이승만과 하지’란 논문에서 두 사람을 ‘犬猿(견원)의 동반자’라고 평했다.
  
   <이승만은 하지가 군정의 최고 책임자라는 엄연한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하지 또한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막강한 정치적 세력을 확보하고 있는 이승만의 정치적 위상을 현실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서로 상대가 정치적으로 제거되기를 바랐지만 그것은 그들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 불가피한 동반자임을 서로 인정해야만 했다>
  
   유엔의 임시한국위원단은 하지와 협의한 후 남한만의 총선거를 1948년 5월10일에 실시하기로 한다. 공산당의 방해와 金九 세력의 불참에도 불구하고 90%의 투표율을 기록한 총선거는 대한민국의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했다.
   일본의 法政大 교수 시모도마이 노부오(下斗米伸夫)가 쓴 '아시아 冷戰史'에 따르면 1948년 4월24일 모스크바 교외에 있는 그의 별장에서 스탈린은 몰로토프와 주다노프 등 소련공산당 간부들과 만나 북한 헌법 제정 등의 절차를 결정했다.
  <헌법은 1947년부터 소련헌법을 기초로 하여 준비되었으나, 일부는 스탈린 자신이 집필했고, 또 당초 있었던 임시헌법에서 임시라는 표현을 삭제한 것도 스탈린이었다. 이 회의에는 북한 지도자는 아무도 참가하지 않았다. 소련이 일방적으로 결정했다. 이 4월 회의의 결정에 따라 8월에 조선최고인민회의 선거가 이뤄지고 9월2일에 제1회 회의를 소집했으며, 8일엔 헌법을 채택, 9일엔 인민공화국 창설이 선언되었다. 國名이 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러시아語로부터 直譯한 것이다>
  
  
  
[ 2008-09-20, 00:3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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