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는 血書를 쓰고 滿軍에 갔다"
연재5/교사의 길에서 군인의 길로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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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박정희를 '교사, 군인, 혁명가'라고 표현한다. 이 세 가지 이력과 性格이 한 몸에 통합되어 있다. 그는 국민들을 군대식으로 가르치고 국가를 혁명적으로 改造한 사람이다. 그가 문경 산골의 국민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고 군인의 길로 가지 않았더라면 혁명가는 될 수 없었을 것이다.
  
  
  1998년 서울 강남구에 살고 있던 유증선 할아버지는 나이가 87세였지만 상당히 또렷한 기억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박정희와 함께 교사 생활을 했던 분들 중에서는 유일한 생존자이다. 지금까지 박정희 선생에 대한 증언들은 거의 전부가 제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자연히 과장과 오해, 그리고 미화가 있을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동료 교사 유증선의 증언은 객관적이고 좀더 정확할 것이다. 그의 증언을 요약해본다.
  
  <내가 문경공립보통학교에 부임한 것은 1938년 4월 초로서 박정희 선생이 근무 중일 때였다. 나의 아내는 임신 중이라 친정으로 보내고 하숙집을 찾아야 했다. 그때 학교 숙직실은 박정희 선생이 이미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박 선생의 양해를 얻어서 한 방에서 同宿(동숙)했다. 당시 나는 50원의 월급을 받고 있었다. 생활비를 줄이려고 시작한 숙직실 생활은 아리마 교장이 개입하면서 중단되었다. 그는 점잖게 ‘숙직실은 숙직 교사들을 위한 것인데 두 분이 여기서 잠을 자면 곤란하지 않은가’라고 했던 것이다. 나는 짐을 싸들고 하숙집을 구해서 내려갔다. 박 선생은 김순아 여인의 하숙집으로 돌아갔다.
  
  우리가 숙직실에서 가까이 지낼 때 박정희 선생은 도무지 말이 없었다. 그러나 할 말은 반드시 하는 사람이었다. 강직한 성품에서 나는 ‘이 사람은 군인이 되어야 할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가 바로 대쪽이었다. 남이 싫어하고 피하는 일도 자신의 판단에 따라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거침없이 자신의 소신을 밝히고 해치우는 것이었다. 나는 어떻게 이런 성격을 갖게 되었는지 신기했다. 한번은 운동장에서 나를 옆에 세워놓고 기계체조를 해 보였다. 그는 가볍게 철봉을 잡더니 ‘大車輪(대차륜)’을 하는 것이었다. 철봉에 매달려 몸을 쉬지 않고 휘휘 돌리는 것이었다. 꼭 철봉에 붙어 있는 것같이 자유자재였다. 공부벌레들만 있다고 하는 대구사범에서 저런 운동을 언제 배웠는지 놀랄 따름이었다.
  
  박 선생은 교사들과는 비사교적이었지만 희한하게도 어린이들에게는 다정다감하게 대하는 것이었다. 코흘리개들과도 사근사근 이야기를 잘도 하는 것이었다. 보통 교사들이 제자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것은 권위를 지키는 것이 교육상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 선생은 반대였다. 소풍을 가면 박 선생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아이들과 어울려 웃고 노래 부르는 것이 꼭 어린아이 같았다>
  
  유증선 할아버지는 안동교육대학 국문학과 교수를 지낸 뒤 은퇴했다. 그는 박정희가 왜 만주군관학교에 갔느냐에 대해서 通說(통설)과는 다른 새로운 증언을 했다.
  
  <1938년 5월경이라고 생각된다. 숙직실에서 같이 기거하면서 솔직한 이야기를 서로 털어놓을 때였다. 박 선생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는 아무래도 군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제 성격이 군인 기질인데 문제는 일본 육사에 가려니 나이가 많다는 점입니다. 만주군관학교는 덜 엄격하다고 하지만 역시 나이가 걸립니다.”
  
  박 선생은 호적상의 나이를 고치기 위한 방도를 이야기하면서 형 박상희에 대해서도 주섬주섬 말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존재에 비해서 형은 굉장한 사람이라는 의식을 깔고 하는 말이었다.
  
  “우리 형님은 지금 고향에서 면장을 하고 있소. 성격도 활달하시고, 저는 이렇게 작고 보잘 것이 없지만 형님은 체격이 크고 외모도 훤칠하시지요. 저는 형님을 존경합니다.”
  
  나는 박 선생에게 “그러면 그 형님의 도움을 받아서 호적을 고칠 수 있지 않느냐”고 했다. 박 선생은 며칠동안 고향에 다녀와서 나이를 고친 것으로 알고 있다. 그가 한 살 낮추었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으로 문제가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신원조회를 하면 학교에 있는 박 선생의 기록과 호적이 서로 틀려 말썽이 생길 것 같았다. 나와 박 선생은 숙직실에서 밤새 고민했다. 우리가 연구한 것은 ‘어떻게 하면 만주군관학교 사람들이 환영할 수밖에 없는 행동을 취할 것인가’였다.
  
  내가 문득 생각이 나서 “박 선생,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면 어떨까”라고 했다. 그는 즉각 찬동했다. 즉시 행동에 옮기는 것이었다. 바로 옆에 있던 학생 시험 용지를 펴더니 면도칼을 새끼손가락에 갖다 대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설마 했는데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는 것이었다. 박 선생은 핏방울로 시험지에다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고 썼다. 그는 이것을 접어서 만주로 보냈다. 그때 편지가 만주까지 도착하는 데는 1주일쯤 걸릴 때였다. 한 보름이 지났을까, 누군가가 만주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박 선생 이야기가 실렸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 혈서가 신문에 보도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때 만주에 가 있던 대구사범 교련주임 아리카와 대좌가 도와줘서 그 혈서건이 신문에 났는지, 아니면 만주군관학교에서 신문에 자료를 제공했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목적은 달성된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 뒤 아리카와가 보낸 편지가 박 선생 앞으로 도착했다.
  
  박 선생은 “아리카와 대좌가 그렇게 군인이 되고 싶으면 자기에게 한번 다녀가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 며칠 뒤 박 선생은 만주에 다녀온 것으로 알고 있다. 아리카와를 만난 모양이었다. 그는 옆구리에 《동양사》 등 몇 권의 책들을 들고 왔는데 “한번 시험을 쳐보라고 했으니 해볼 수밖에 없지”라고 했다.
  
  그 직후에 우리는 교장의 지시로 숙직실을 떠나 하숙집으로 옮겼던 것이다. 박 선생은 아마도 교장한테 다시 양해를 얻어 숙직실로 돌아온 것 같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이 숙직실에도 나폴레옹 초상화를 걸어놓은 박 선생이다. 붉은 망토에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말을 탄 나폴레옹이었다. 내 아들 柳浩文(유호문·전 건설부 산업입지국장)은 1939년에 문경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담임선생은 박 선생이었다. 이 해 가을에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에 입학 시험을 쳤다. 박 선생이 일본인 교장과 싸우고 만주로 떠났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싸운 일이 없다. 내가 1939년 봄에 한 3주간 일본시찰 여행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그런 일이 있었다면 몰라도. 나는 박 선생이 만주군관학교로 떠날 때쯤, 즉 1940년 봄에 영주로 전근을 갔다. 그 뒤에 소식을 들으니 박 선생이 만주군관학교를 거쳐서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에 긴 칼을 차고 문경에 들러 대환영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역시 가야 할 길을 갔구나’하고 생각했다. 5·16 혁명 직전에 그가 대구에서 2군 부사령관으로 있을 때 만났더니 그는 영어책을 읽고 있다가 불쑥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가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뭔가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될 기운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어 그런 건 잘 모르겠습니다”고 말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박 선생을 만난 것은 그가 죽기 석 달 전이었다. 내 아들과 제자들도 함께 청와대로 초청하여 옛날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대통령은 나를 보고 “어. 대머리가 되셨네요”라고 말하여 좌중이 폭소를 터트렸다>
  
  
  박정희 선생이 혈서를 써서 만주군관학교에 입학 시험을 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는 동료 교사 유증선의 증언은 지금까지의 통설과 상반된다. 통설은 박정희가 교장과 싸우고 교사직을 그만둔 뒤 만주로 갔다는 것이다. 이런 통설은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있을 때 많이 유포되었다. 이 통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박정희가 ‘독립운동을 할 힘을 기르기 위해서 滿軍(만주군) 장교가 되려고 했다’는 신화로 발전하기도 했다.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종합할 때 혈서說(설)이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박정희는 대구사범 재학 때나 문경 교사 시절에 늘 군인이 되겠다는 꿈을 키워 가고 있었다. 교장과의 불화 때문에 충동적으로 군인의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오랜 집념의 실천이었다. 1962년에 당시 최고회의 의장 비서였던 이낙선 중령이 정리해둔 비망록에서도 비슷한 대목이 발견된다.
  
  <원래 일본 육사는 연령초과였고 만주군관학교도 연령초과였으나 군인이 되고자 하는 일념에서 군관학교에 편지를 하였다. 그 편지가 만주 신문에 났다(이렇게 군관을 지원하는 애국 정신이 있다고…). 이 신문을 보고서 姜(강) 대위가 적극적으로 후원하게 되었고 그와의 상면은 만주의 여관에서였다. 그로부터 강은 박의 引導人(인도인)이 되었고, 강은 당시 시험관이었다. 강-울산인>
  
  이낙선 중령이 당시 취재한 내용도 유증선의 증언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그러면 신화는 어떻게 탄생했던가. 대구사범 동기생으로서 그때 문경과 가까운 상주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권상하(전 대통령 정보비서관)의 증언.
  
  <1939년 10월 아니면 11월에 박정희가 보따리를 싸들고 나를 찾아 왔다. 머리를 길렀다고 질책하는 視學(시학·장학사) 및 교장과 싸운 뒤 사표를 던지고 나오는 길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만주로 가서 대구사범 교련주임 시절에 자신을 총애해 주었던 아리카와 대좌를 만날 예정이라고 했다. 우리집에서 하룻밤을 잔 뒤 열차편으로 떠나는 정희를 전송했다>
  
  박정희는 권상하 이외에도 몇 사람들에게 비슷한 말을 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박정희는 1939년 10월에 만주군관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고 학교로 돌아와서 계속해서 근무하다가 다음해 3월에 만주로 떠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박정희가 아리마 교장을 패주었다느니 술상을 뒤엎었다느니 싸우고 갔다느니 하는 말들은 뒷받침되지 않고 있다. 더욱 이상한 것은 1976년 2월 17일 대통령 공보비서관 鮮于煉(선우연)이 작성하여 박 대통령의 결재까지 받아둔 ‘대통령 이력서’의 내용이다. 이 자료는 박 대통령이 읽고서 교정을 본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자료는 박정희가 만주로 떠난 동기에 대해서 ‘道(도) 장학사가 나이가 많은 아리마 교장에게 불손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보고 혐오를 느낀 것이 교사직 사임 원인의 하나이다’고 했다. 아리마 교장이 여기서는 동정의 대상으로 둔갑하고 있다. 박정희는 그러면 왜 이런 신화가 만들어질 소지가 있는 말을 했을까. 혹시 자신의 만주行(행)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스스로 꾸며낸 말이 아닐까. 박정희보다 네 살 위인 누님 박재희는 생전에 이런 증언을 남겼다.
  
  “동생이 가끔 내 집에 와서는 ‘죽어도 선생질 더 못해 먹겠다’고 말하곤 했어요. 어느 날 밤늦게 동생이 또 저를 찾아왔습니다. 만주군관학교로 가기로 결심했다고 하는 거예요. 아버님과 상희 형에게 교사를 그만두겠다는 이야기를 꺼냈다가 호통만 들었다면서 만주로 갈 수 있도록 노자를 달라고 했습니다. 며칠 뒤에 돈을 받아서는 본가에 들르지도 않고서 만주로 갔지요.”
  
  박정희의 둘째 형 박무희의 장남 재석에 따르면 박상희는 동생이 안정되고 대우받는 교사직을 팽개치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을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여러 번 경찰서와 감옥에 끌려간 적이 있는 항일투사 박상희는 동생의 변절을 허용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이러한 비난에 대한 일종의 변명거리로서 일본인 교장 및 시학과의 충돌설을 꾸며내거나 과장하여 퍼뜨린 것이 아닐까. 모든 신화에는 작은 근거가 있듯이 박정희의 신화도 작은 사실에서 출발했을 가능성이 있다. 박정희가 만주로 시험을 치러 간 시기에 어떤 사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제자 황실광은 박 선생보다는 다섯 살 아래로서 졸업한 뒤에도 박 선생한테 자주 놀러갔다. 1939년 10월 어느 날 하숙집에 갔더니 그는 화를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너하고도 자주 만날 기회가 없을 것 같다. 나쁜 놈 같으니 센진(鮮人)이 뭐야, 센진이. 그래 놓고도 지서장을 불러와 화해를 하라니. 내가 다른 것은 몰라도 그런 것으로는 화해 못 한다.”
  
  박 선생이 전해준 사연은 아리마 교장이 視學을 접대하는 술자리에서 조선인을 모욕하는 발언을 했고 자신이 크게 반발했는데 이런 논리였다는 것이다.
  
  “내선일체의 정신은 조선인과 일본인이 하나가 되어 美英鬼畜(미영귀축)을 몰아내자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당신들은 조선인을 차별함으로써 천황의 뜻을 어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朴교사가 천황을 들먹이면서 교장을 몰아세우자 아리마가 당황하여 일본 경찰을 중간에 넣어 화해를 꾀했다는 것이다. 이 정도의 충돌이 우연의 일치로 만주군관학교 시험 시기와 비슷한 때에 발생했기 때문에 ‘항일 의식이 강렬한 박 선생이 악질 일본인 교장과 싸우고 독립을 준비하기 위하여 만주로 갔다’는 과장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정작 박 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소년용 傳記를 준비하고 있던 김종신 공보비서관이 “각하는 왜 만주에 가셨습니까”라고 묻자 단순명쾌하게 이야기했다.
  
  “긴 칼 차고 싶어서 갔지.”
  
  사소한 사연은 어쨌든 이 말이 박정희의 만주행 미스터리에 대한 가장 정직한 해답일 것이다. 박정희는 1939년 10월 만주 무단장(牧丹江)성에 있는 만주군 6관구 사령부內 장교구락부에서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2기 시험을 치렀다. 시험과목은 수학, 일본어, 작문, 신체검사 등이었다. 李再起(이재기·작고·육군 대령 예편)도 같은 장소에서 시험을 치렀다. 이재기는 시험이 시작되기 직전에 만주군 대위가 국민복을 입은 청년을 데리고 들어오길래 시험 감독관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청년이 수험생 자리에 앉는 게 아닌가. 나중에 알고 보니까 대위는 간도 특설대에 근무하던 강재호였고 수험생은 박정희였다. 다음해 1월 4일자 <만주국 공보>에 ‘육군군관학교 제2기 예과생도 채용고시 합격자 공보’가 실렸다. 박정희는 240명 합격자(조선인이 11명 포함된 만주계) 가운데 15등, 李翰林(이한림·전 1군사령관)은 봉천에서 시험을 치렀는데 20등이었다.
  
  박 선생을 졸졸 따라다니던 5학년생 강신분, 어유남, 서광옥은 박 선생이 만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하숙집을 찾아갔다. 울면서 매달리는 이들에게 박 선생은 “우리 조선 사람은 조선 사람으로서 할 일이 있다”면서 선물들을 하나씩 나누어주더라는 것이다. 박정희가 문경을 떠날 때는 많은 유지들과 학부모, 학생들이 버스정류장에 나와서 전송했다. 박정희는 고향에 들렀다가 3월 하순에 구미역 北行線(북행선) 플랫폼에서 어머니와 헤어졌다.
  
  칠순 나이의 백남의는 박정희의 옷자락을 붙들면서 “늙은 어미를 두고 왜 그 먼 곳에 가려고 하느냐”고 했다. 老眼(노안)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뒤로 하고 박정희는 기차에 올랐다. 박정희가 뒤돌아보니 그의 어머니는 흰옷 그림자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들어 흔들고 있었다.
  
  
  
  
  
  
  
  
  
  
  
[ 2009-02-19, 10:1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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