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군 가는 길엔 승리뿐이다"
박정희 서거 30주년 기념 연재 43/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운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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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2월 22일, 박정희 대통령은 공군사관학교 제16기 졸업식에 참석했다. 박 대통령은 ‘諭示(유시)’를 통해 “호전적인 침략자와의 대결에서 협상이나 유화정책은 언제나 비극적 결과를 가져왔던 역사적 과오가 이 땅에서 재연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2월 23일 오후 3시, 박정희 대통령은 헬기 편으로 진해를 방문, 해군사관학교에서 열린 제22기 졸업식에 참석했다.
  
  박 대통령은 “우리는 북괴의 흉계가 전혀 오산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면서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하는’ 건설과 반공 투쟁의 범국민적인 국방 태세를 확립할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저녁 박 대통령은 진해 공관에서 전 국방부 장관 孫元一(손원일)·李鍾贊(이종찬), 전 해군참모총장 咸明洙(함명수) 등 예비역 장성들과 만찬을 하면서 환담했다.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鄕軍(향군) 무장 문제를 포함한 국방력 강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김성은 장관과는 국방부 장관의 후임 인사에 대해 조용히 의논했다.
  
  김성은 전 장관의 증언.
  
  “저는 쉬고 싶어 수시로 사임 의사를 말씀드렸지요. 그런데 이 무렵 야당에서 계속 저를 포함해 이호 내무부 장관에 대해서 1·21 사태의 책임을 물어 인책하라고 야단이었습니다. 진해에서 박 대통령께서는 저에게 ‘임자가 쉬겠다니까, 야당에는 임자를 내보내는 걸로 보여주겠소. 후임자가 누구면 좋겠소’ 라고 물어보십디다. 저는 몇 사람을 추천해 드렸지요.”
  
  2월 26일, 서울대학교 졸업식에 참석한 박 대통령은 절박한 내용의 연설을 했다.
  
  <공산주의자들과 타협이나 양보는 패배를 뜻하는 것이며 패배는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을 수 없습니다. 나도 살아야 하고, 너도 살아야 하고, 우리 민족도 살아야 하고, 조국도 살아야 합니다. 살기 위해서는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졸업생 여러분!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이 나라는 우리의 힘으로 지켜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우리의 힘으로 지키겠다는 결심과 지킬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하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우리의 힘이 부족할 때는 남의 도움을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남이 돕는 것은 어디까지나 도움이라고 생각해야지 남이 우리를 대신해서 지켜주기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이것을 국방의 주체성이라고 말합니다. 남이 우리를 도와주는 것도 우리에게 국방의 주체성이 있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자기 나라는 자기 스스로 지키겠다는 결심이 없는 국민을 남이 와서 도와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중략) 민족의 생명은 민족의 주체성에 있는 것입니다. 이 민족의 주체성은 한마디로 말해서 민족의 생명과 이익을 위해서 스스로의 결단하에 행동하고 또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온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하는’ 새로운 기운을 진작시켜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주체적 역량을 배양해야 하겠습니다>
  
  1968년 2월 28일, 고속도로 건설 재원으로 사용될 석유류세법 개정법안이 회기를 하루 남긴 시점에서 주무 부처 장관에 의해 공화당 의원들에게 전해졌고, 대통령의 지시를 어길 수 없었던 공화당 의원들은 국회에 이 안건을 제출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총비용은 330억 원. 석유류세법 개정을 통해 휘발유 값을 100% 인상해 상당 부분을 충당할 계획이었다.
  
  야당은 “사전에 무슨 설명도 없이 무조건 불쑥 들고 와 심의 상정해 달라는 데에 동의할 수 없다”며 오전 11시 30분 퇴장해 버렸다. 법안 개정의 목적은 고속도로 건설 재원 마련이었지만, 구체적인 내용에 관해서는 여당 의원들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날 오전 신민당에서는 국방장관 경질을 조건으로 공화·신민 양당 원내총무 사이에 이미 합의를 본 이호 내무장관 해임안 철회 문제가 다시금 불거지며 문제가 되고 있었다. 신민당 의원들은 이 문제로 두 시간 반 동안 설전을 벌였다.
  
  高興門(고흥문), 김대중, 金相賢(김상현), 金守漢(김수한), 宋元英(송원영) 의원 등은 “이미 원내총무가 당을 대표해서 공화당과 약속을 한 이상 신의를 지키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으나, 金應柱(김응주), 鄭雲甲(정운갑), 朴炳培(박병배), 鄭相九(정상구) 의원들은 “인책의 대상을 당초 국무총리 등 네 사람에서 두 사람으로 압축한 것도 부당한데, 이제 다시 이 내무 해임안을 철회하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맞섰다.
  
  정상구 의원은 총무단의 일원이면서도 27일의 합의 내용을 전혀 몰랐다면서 “이 내무 해임안을 관철하면서 당의 신의를 지키고, 공화당 총무에 대한 김영삼 총무의 신의는 총무단이 사퇴하는 것으로 대신하자”고 주장했다. 이날 신민당 의원들이 내린 결론은 ‘이호 내무장관 해임안 관철’이었다.
  
  이날 오전, 박 대통령은 재향군인 제9차 전국대회에 참석해 즉흥 연설을 통해 향군무장 계획을 밝혔다.
  
  제63회 임시국회 마지막 날인 2월 29일 오후 4시 40분, 국회 본회의가 석유류세법 개정법안과 도로정비촉진에 관한 법 개정법안을 상정시켰다. 이때부터 야당 의원들은 본격적인 지연 전술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김영삼 총무와 김수한 의원은 의사 진행 발언을, 송원영 의원은 1시간 25분 동안 단상을 점거한 채 연설을 강행하자 이효상 국회의장은 오후 6시 40분, 정회를 선언했다. 이후 여야 총무단이 회담을 열었지만 타결책은 나오지 않았다.
  
  공화당 측은 이효상 의장에게 야당 측의 발언자 수를 제안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이 의장은 “지난번 ‘28 파동’ 때문에 내가 지금 이 꼴이 됐는데 지금 또 다시 변칙 사회를 하란 말이냐”며 반발했다.
  
  밤 9시 30분,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이 국회를 방문, 이효상 의장을 포함한 공화당 간부들과 대책을 협의했다. 이 비서실장이 다녀간 뒤인 밤 10시 30분경, 김종필 당의장, 길재호 사무총장, 김진만 원내총무와 이만섭 부총무 및 국회 상임위원 전원이 청와대로 박 대통령을 찾아갔다.
  
  청와대 집무실에는 박 대통령이 담배를 피우며 무거운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박 대통령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는 이효상 국회의장과 국무위원 및 총무단이 앉고, 왼쪽으로는 김종필 당의장 등 공화당 간부들이 앉았다. 이만섭 부총무의 자리는 오른쪽 맨 끝이었다.
  
  김종필 당의장이 굳은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박 대통령에게 당 대표로서 말을 꺼냈다(이만섭 전 국회의장의 증언).
  
  “각하, 야당이 농성을 해버리니 도저히 정상적으로는 불가능하겠습니다. 다음 회기에 통과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김 당의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박 대통령의 高聲(고성)이 터져 나왔다.
  
  “뭐? 무슨 소리야! 내가 이 나라 경제 발전을 위해서 경부고속도로를 만드는데, 뭐? 야당이 반대한다고 국회에서 통과를 못 시켜? 뭐 이런 게 다 있어!”
  
  박 대통령보다 나이가 많은 이효상 의장의 얼굴도 하얗게 질려 있었고 고개를 팍 숙인 김종필 당의장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박 대통령은 다시 한 번 소리를 질렀다.
  
  “내가 나라 살리겠다고 산업도로 만들려고 하는데, 야당이 반대한다고 여당이 그걸 하나 통과 못 시켜? 여당은 뭐하는 놈들이야!”
  
  이만섭 전 국회의장의 회고.
  
  “그때 박정희 대통령의 붉으락푸르락하는 화난 얼굴은 무섭다는 표현 말고는 어울릴 말이 없을 정도였어요. 모두 고개를 푹 숙이고는 숨소리조차 안 들릴 정도로 조용했습니다. 그런 침묵이 한 1분 이상은 갔을 겁니다. 맨 끝에 앉아 있던 제가 나서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지요.”
  
  박 대통령은 손을 덜덜 떨면서 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었다. 이만섭 부총무가 입을 연 것이 이때였다. 이 부총무는 경상도 억양을 그대로 살리면서 애원조로 한마디를 했다.
  
  “각하-, 고마 한번만 봐 주이소-.”
  
  표준어투의 사무적인 말들이 긴장감을 타고 오갈 분위기에 난데없는 경상도 사투리의 애원하는 말이 흘러나온 것이다. 조금 후, 박 대통령이 참느라고 애쓰던 웃음을 “쿡쿡” 하며 흘려버리고 말았다. 이 틈을 이용해 다른 의원들도 웃음을 참다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살벌했던 분위기가 일순 뒤바뀌었다.
  
  李萬燮(이만섭) 부총무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한 번 더 애원했다.
  
  “각하, 그만 저희들한테 맡겨주십시오. 잘해보겠습니다.”
  
  박 대통령은 웃음을 참는 표정으로 손을 내저으며 “알아서 하라고!”라고 말했다.
  
  “예!”
  
  대답은 모두가 이구동성이었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의 회고.
  
  “대답이 끝나자마자 허겁지겁 청와대를 빠져 나오기 바빴습니다. 밖에서 제가 김진만 총무에게 ‘이거, 합시다. 해야지 어쩝니까’ 라고 말했지요. 이때부터 국회에 돌아와 단상 점거하고 법안을 통과시킬 때까지 불과 30분도 안 걸렸을 겁니다. 사람이 한번 혼이 나니까 전부 달라집디다.”
  
  이들은 회기 종료 40분을 남긴 밤 11시 20분에 국회로 돌아왔다. 이만섭 부총무는 공화당 의원들에게 덩치 큰 의원들이 앞장서서 단상에 접근하라고 지시했다. 밤 11시 48분, 공화당 의원들이 정회 중이던 대회의장에 들어서자 신민당 의원들은 미리 단상을 점령, 뒤늦게 올라오는 공화당 의원들과의 격돌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李萬燮 전 국회의장의 회고.
  
  “그때만 해도 감정싸움은 없었습니다. 신문을 보면 아주 격앙된 싸움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 대부분은 ‘야, 살살해라’거나 ‘내 체면 좀 봐주라’는 말들을 하며 옷을 잡아당기곤 했거든요.”
  
  여야 의원들끼리 고성을 주고받으며 단상 점령 공방전을 벌이던 그 순간 유도 고단자인 장경순 부의장이 재빨리 의장석에 접근했다. ‘2·28 파동’ 때에도 장경순 부의장이 부러진 의사봉을 들고 변칙 통과를 시킨 주역이어서 이날 장 부의장의 행동은 이미 신민당 의원들에게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신민당 의원들은 단상에서 의장 전용 출입문을 막았다. 김상현 의원은 의장석에 마련된 의사봉과 마이크를 철거시키고 있었다.
  
  이 순간 공화당 柳凡秀(유범수) 의원이 김상현 의원으로부터 의사봉을 빼앗아 장경순 부의장에게 던졌다. 허공을 가로지르던 의사봉이 장경순 부의장의 손에 닿으려는 순간 달려든 다른 신민당 의원들의 손으로 옮겨가 버렸다. 당황한 장경순 부의장은 의사봉 대신 손바닥으로 책상을 치며 속개를 선언하고 두 개 법안을 일괄 상정한다고 소리쳤다.
  
  아우성치는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의장석을 점령했던 신민당 의원들은 수가 많았던 공화당 의원들에게 점차 밀려나기 시작했다. 약 7분 동안의 변칙 의사 진행을 통해 두 법안은 비로소 통과됐다. 장 부의장은 폐회 선언도 하지 않고 내려가 버렸다. 신민당 의원들은 퇴장하는 공화당 의원들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그리고 5분 뒤 임시국회는 회기를 다하고 막을 내렸다.
  
  3월 1일 새벽, 김영삼 신민당 원내총무는 “국민과 더불어 분노를 금치 못하며 예고도 없이 강도적인 수법으로 의장석에 앉지도 않고 날치기 통과를 자행했다”고 비난하고 “이같이 의회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다수의 폭력을 자행한 것은 구제받기 어려운 일”이라면서 “장 부의장이 동물적인 방법으로 통과시킨 것은 눈물을 금치 못한다”고 말했다. 김진만 공화당 총무가 “미안하지만, 다음에 신민당이 요구하는 다른 안건하고 바터하자”고 제의하자 김영삼 총무는 “버터는 고사하고 치즈도 못 해 주겠다”고 맞섰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의 회고.
  
  “고속도로 건설은 아무리 야당이라고 해도 반대할 이유가 없는 일이었는데 왜 그토록 반대에 집착했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됩니다. 그때 국회에서 석유류세법 개정법안이 통과되지 않았더라면 고속도로 건설이 중단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중대한 사안이었는데 야당은 한사코 반대만 했다는 인상을 저도 받았습니다. 박 대통령도 야당이 항상 반대만 한다는 선입견을 결코 버릴 수 없었을 겁니다.”
  
  
  1968년 3월7일, 오전 8시쯤 집을 나선 김상현 의원은 문이 닫힌 국회의사당을 지나 서울 시청 부근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사람들과 만나 환담을 나누다가 오전 11시쯤 평소처럼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 국회의원들은 집에 가설된 전화를 사무용으로 쓰던 때였다.
  
  전화를 받은 김 의원의 부인은 “청와대에서 이후락 비서실장이 아침부터 두 번씩이나 전화를 걸어오며 찾아달라고 재촉했어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김 의원은 부인이 급히 불러주는 청와대 비서실의 직통 번호를 받아 적고 다이얼을 다시 돌렸다. 이후락 비서실장이 직접 전화를 받았다.
  
  “아이고, 김 의원님. 어디 다니시면 어디 다니신다고 행선지를 남겨놓고 가시지, 아침부터 김 의원님 찾느라고 욕봤습니다. 오늘 오후 2시까지 청와대로 들어와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지요.”
  
  당시 김상현 의원은 이후락 비서실장이 자신을 부른 이유가 면담 의도와 내용을 사전에 알기 위한 것인 줄로만 알았다고 한다. 청와대에 도착하니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후락 비서실장이 “지금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라며 곧바로 박 대통령 집무실로 안내했다.
  
  김상현 전 의원의 증언.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대통령께서는 돋보기로 여러 장의 흑백 사진들을 찬찬히 살펴보고 계십디다. 한 3분 동안 저와 이후락 비서실장은 머쓱하게 앉아 있었지요. 집무실 벽을 둘러보니 벽면 전체가 대한민국 지도로 도배되다시피 되어 있더군요. 각종 도표도 중간 중간에 붙여져 있고 마치 전쟁 중의 작전 상황실 같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지도는 그 해에 막 시작됐던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관련된 것이란 걸 한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색연필로, 연필로, 사인펜으로 예상 도로를 그려 넣거나 수정한 부분들이 여기저기 보였습니다. 이런 걸 구경하느라 한참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각하께서 돋보기를 책상 위에 놓더니 ‘아, 김 의원. 미안합니다’라며 악수를 청하러 걸어 나오시는 겁니다. ‘정말 잘 오셨습니다. 반갑습니다’라고 악수를 하더니 당신이 보고 계시던 사진들을 가리키며 이렇게 설명을 하는 거예요.
  
  ‘김신조가 참 정직한 사람입니다. 이 사진들은 김신조가 얘기해서 찍은 항공사진들인데 북한이 산 밑에 굴을 파 요새화한 지하 활주로 입구를 찍은 것들입니다. 이리 와서 한 번 보시지요.’”
  
  
  항공사진들을 보고 자리에 앉은 김상현 의원이 먼저 말을 꺼냈다.
  
  “각하께서 오늘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는 적을 상대하더라도 진실로 대하고, 진실하게 대하는 길만이 대화도 될 수 있고 갈등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 의원이 ‘진실’을 강조하자 박 대통령은 너무나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 진실로 정치 얘기 한번 합시다. 도대체가 야당이 말이오, 반대를 위한 반대만 하고 말이오”라면서 집무실 벽을 가리켰다.
  
  “김 의원, 저것이 고속도로요. 내가 헬기를 타고 수십 차례나 다니면서 직접 그려서 하고 있습니다. 고속도로라는 것이 앞으로 산업화 시대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데 야당은 그것도 이해하지 않으려 들고, 무조건 반대만 하고 말이오.
  
  석유류세 인상법안도 고속도로 건설자금 마련을 위한 조치인데 그것 가지고도 야당은 반대하고…. 지난번 6·8 선거에서는 다소 문제가 있었지만, 여당도 이걸 인정하고 양보해서 야당과 의정서까지 만들어 놓고도, 또다시 야당이 깨버리면 도대체 정부와 여당은 뭘 어떻게 하란 겁니까.”
  
  김상현 의원은 박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여당 입장만을 전해 듣고 있다고 느꼈다고 한다.
  
  “각하께서 일방적인 정보만 보고받고, 야당이나 국민들의 정치 상황에 대해 보고받지 못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게 뭐요?”
  
  김 의원은 여당의 실책을 사례를 들어가며 나열한 뒤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처칠이나 루스벨트 같은 사람은 국가의 중요 정책 결정 과정에서는 야당을 먼저 만나 설득시키고 이해시키고 하면서 일해 나가는데, 대통령께서는 언제 야당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고 토론하고 하셨습니까. 국회 문제라면 여당 총무 보고를 받으셔야 하지만 야당 총무 보고도 받으시는 길을 만들어 놓으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
  
  김상현 의원은 박 대통령 앞에서 기선을 잡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뜸 박 대통령은 이렇게 받아쳤다고 한다.
  
  “아, 내가 그래서 김 의원 만나고 있는 거 아니오. 지금 우리 여당 국회의원 예순일곱 명이 날 만나자고 면담 신청해놓고 있소. 이 실장, 육십 몇 명이지? 그런데 내가 오늘 아침 10시에 전국 도지사 회의가 있어 참석하러 가는 길에 김상현 의원의 면담 신청이 왔다는 말을 듣고 오전에 만나려다가 연락이 안 되어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거요.”
  
  다시 김 의원의 이야기가 계속됐다.
  
  “전 국민들이 파행 국회를 보고 우리나라 정치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기에 야당 총재와 영수회담을 하시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유진오 총재와 영수회담 기회를 한번 마련해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좋소! 유진오 총재가 영수회담을 제안하는 것이 유 총재 입장에서 좋다면 내 그걸 수락하겠소. 내가 유 총재에게 영수회담을 제안해서 유 총재가 유리하다면 내가 그렇게 하겠소. 그리고 장소도 꼭 청와대가 아니어도 되오. 우이동 같은 데도 좋습니다.”
  
  김상현 전 의원은 당시 박 대통령의 화답에 몹시 기뻤다고 회고했다.
  
  “각하,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대화로 정치 문제를 풀어나가면 국민들도 기뻐할 겁니다.”
  
  “김 의원, 술은 얼마나 합니까?”
  
  “저는 술이라면 부끄럽게도 한도 끝도 없습니다. 장가갈 때는 제 처 얼굴도 모른 채 양조장집 딸이라는 소리에 결혼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껄껄 웃으며 자신의 술 실력을 털어놓았다.
  
  “나도 군대 때 너무 마셔 가지고, 지금도 속이 쓰리고… 이거 죽겠습니다. 김 의원, 거, 술 적게 자셔야 됩니다. 이 실장, 언제 저녁에 우리 김상현 의원하고 술자리 한번 갖자고. 그리고 앞으로 우리 김상현 의원으로부터 연락이 오면 언제라도 즉시 나한테 보고하도록.”
  
  “알겠습니다.”
  
  다시 이야기는 장기 집권 문제로 옮아갔다. 박 대통령은 정색을 하며 이렇게 말하더란 것이다.
  
  “만약에 내가 장기 집권한다든가 국민의 기본권을 유린한다고 하면 야당이 극한투쟁을 해도 좋습니다. 내 임기가 3년 정도밖에 안 남았습니다. 내가 만약 장기 집권한다면 김 형이 극한투쟁에 앞장서시오.”
  
  “각하께서 그런 불행한 일은 하셔서도 안 되지만, 만약에 그런 일이 있을 때는 각하와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웃음으로 대화가 매듭지어질 즈음 배석했던 이후락 비서실장이 끼어들었다.
  
  “각하, 사실 김상현 의원이 청와대까지 들어왔다는 것은 보통 용기가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여기서 각하를 만났다는 것을 야당에서 알면 사쿠라로 몰아 김상현 의원의 정치 생명이 끝장날지도 모릅니다.”
  
  박 대통령은 놀란 얼굴이 되더니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김 의원, 그런 정도라면 우리 오늘 만난 것을 비밀로 합시다.”
  
  “각하, 그 점에서는 제 의견은 각하와 조금 다릅니다. 각하께서 불편하시지 않으시다면 오늘 제가 대통령과 면담한 것을 공개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것이 정치인으로서 正道(정도)를 걷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요? 이 실장, 신범식 대변인에게 연락하도록 하시오.”
  
  이때 박 대통령은 신 대변인이 발표할 문안을 직접 작성하더니 김 의원에게 보여 동의를 구한 다음 잠시 후 들어온 신 대변인에게 건네주었다. 이날 오후 청와대 대변인실에서 기자들은 신범식 대변인이 발표하는 내용을 받아 적어 ‘-언제든 유 당수 만나- 박 대통령 ‘대화의 풍토’ 강조-김상현 의원 맞아’라는 제목하에 보도했다.
  
  <김상현 의원의 면담을 요청받은 박 대통령은 “야당도 정부의 옳은 일에 대해서는 협조하는 태도를 가져달라. 국민이 볼 때 야당이 정권을 인수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춤으로써 앞으로는 평화적인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기 바란다”고 강조했다. (하략)>
  
  이날 약 1시간 20분 동안의 면담을 마치고 악수를 나눈 뒤에 집무실을 나오려는데 박 대통령은 “김 의원, 가지 마시고 잠깐 밖에서 기다리시오” 라고 했다. 그리고 박 대통령은 이 실장을 따로 부르더니 뭐라고 지시를 하고 있더란 것이다.
  
  김상현 의원은 청와대 2층의 이후락 비서실장 방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잠시 이 실장이 분주하게 들락거리더니 두툼한 봉투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고 한다.
  
  “제가 청와대에 있으면서 각하께서 이런 일을 부탁하신 것은 처음 있는 일입니다. 이것 얼마 안 되지만 정치자금에 보태어 쓰십시오.”
  
  김 의원은 놀라서 두 손으로 돈 봉투를 막으며 거절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받은 걸로 하고, 저는 정치자금 필요 없습니다.”
  
  돈 봉투는 두 사람 사이에서 세 번을 왕복했다가 결국 이후락 실장의 손에 돌려졌다고 한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정치자금을 대통령으로부터 받는다는 것은 야당 의원으로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러 복잡한 생각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1968년 2월 6일 밤, 청와대에서 김성은 국방부 장관에게 지시한 예비군 조직 편성은 한 달여 동안 곡절을 거쳤다.
  
  김성은 전 장관의 회고.
  
  “예비군 조직을 기획해 보라고 합참에 주었더니 며칠 뒤에 ‘예비군 사령부-군 사령부-군단-사단…’식으로 군 조직처럼 만들어 갖고 왔어요. 공비를 잡기 위해서는 지휘 계통과 통신이 간단해야지 복잡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끔 수해가 나서 경제기획원에 가보면 각 부처에서는 피해 보고와 복구 비용을 산출한 액수가 거의 동시에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군에서는 일주일이 넘게 걸렸어요. 군인들은 꼼꼼했지만 중대-대대-연대-사단-군단 식으로 全軍(전군)의 통계를 잡으려다 보니 꼬박 일주일이 넘게 걸리곤 했습니다. 그래서 수해 복구 추경예산은 다른 데서 다 따가고 국방부는 거의 빈손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즉각 대응을 위한 군의 조직체계가 현대화되지 않았던 겁니다.
  
  공비 출몰 시엔 즉각 대응해야 하는 관계로 상부에 보고한 뒤 지시받고 출동하는 식을 지양하고 예비군은 면·읍 단위에 중대급 규모를 넘지 않으니 1개 면마다 중대를 편성하게 하고 경찰 지서장이 마을 예비군을 지휘해서 선 조치, 후 보고하는 방식을 취하게 했습니다. 공비 출몰 신고는 합동참모본부에 보고되므로 여기서 전국 예비군망을 통해 비상을 걸면 공비들은 예비군이란 그물에 갇히게 됩니다. 거기에 현역 군인들을 기동타격대로 투입하면 섬멸된다는 구상을 하게 되었지요.
  
  즉, 예비군들은 자기 구역 내에 침투한 공비들을 꼼짝 못 하게 가두는 역할을 하고 섬멸은 현역이 하는 개념이었다. 며칠 뒤 이 안을 대통령께 보고하자 박 대통령은 매우 기뻐하면서 ‘김 장관 案(안)대로 밀고 갑시다’라고 말했지요.”
  
  김성은 국방장관은 예비군의 무장 문제도 해결했다. 그는 본스틸 유엔군 사령관을 통해 미군이 M16을 주력화기로 선택함으로써 폐기 장비가 된 카빈 소총과 M1 소총 100만 정 및 실탄 5,000만 발을 무상으로 지원받을 수 있게 했다.
  
  향토예비군이 창설되는 과정에는 洪鍾哲(홍종철) 공보부 장관과 작곡가 李熙穆(이희목) 씨의 노력도 있었다. 홍 장관은 당시 유행하던 군가 ‘맹호는 간다’와 ‘우리는 청룡이다’를 작곡한 이희목 당시 중앙방송국 음악계장에게 예비군가의 작곡을 의뢰했다.
  
  ‘맹호는 간다’ 작곡 당시의 이희목 씨 회고.
  
  “누군가가 이 노래를 듣더니 서두에 호랑이가 포효하는 소리를 넣자는 제안이 나왔어요. 창경원 동물원에서 방송요원이 호랑이 울음소리를 녹음하느라 애를 먹었지만 성공했지요. ‘맹호는 간다’ 노래는 당시 최고 인기곡이 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 노래를 아주 좋아한다는 것을 안 홍종철 장관은 박 대통령이 KBS 라디오 정오 뉴스를 꼭 청취한다는 것을 알고 매일 뉴스가 끝난 뒤엔 반드시 이 노래를 보낸 뒤 정규 방송을 진행토록 했습니다. 홍 장관은 결재서류가 있으면 라디오에서 이 노래가 끝난 직후에 대통령께 결재를 받으러 갔다고 제게 말한 적도 있습니다.”
  
  홍종철 장관으로부터 ‘우리 맹호부대 계장’이란 별명을 얻었던 이희목은 평북 선천에서 태어나 1947년 월남하여 서울사대부고를 나왔다. 그는 이봉조, 박춘석 등 당대 유명 작곡가들과 어깨를 겨룰 만한 실력을 갖고 있었지만, 대중가요보다 국민가요에 능해 방송국 직원으로 일하며 부업으로 작곡을 했다. 무명이었던 이희목은 민정이양 직후 국민 계몽성 가요 ‘일하는 해’를 작곡하면서 정부와 관계를 맺었다.
  
  이희목은 1968년 3월 초, 공보부 직원으로부터 “예비군가를 만들어 주되 작사자는 선생께서 알아서 선정하십시오” 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한다. 이 씨는 당시 <아리랑> 잡지 기자 출신의 작사가 전우(작고) 씨에게 가사를 부탁한 뒤 일주일 만에 곡을 완성했다. 녹음 때는 봉봉 사중창단이 노래를 불렀다.
  
  홍종철 장관은 공보부 직원들을 모아 놓고 李씨가 작곡한 노래를 함께 들은 뒤 “어때? 어때?” 하며 반응을 듣고는 그대로 박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박 대통령은 흡족해 하며 가사를 직접 옮겨 적었다고 한다.
  
  1968년 4월 1일 대전 공설운동장에서 거행된 향토예비군 창설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은 연설 마지막 대목에서 이 노래의 가사를 언급하기도 했다. 이날 박 대통령은 “지난날 멸공 전선에서 조국 수호를 위해서 같이 싸우며 생사고락을 같이하던 전우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20여 분간의 연설을 했다.
  
  <예비군의 이상적인 모습은 논밭이나 직장에서 자기 일에 충실하고 훈련에 힘쓰다가 일단 공비가 나타나면 즉각 출동하여, 그 마을 그 직장에서 공비와 싸우는 전사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주민들도 산에서 들에서 길에서 바다에서 가정에서 일터에서 수상한 자가 나타나면 즉각 신고하여 ‘눈’이 되고 ‘귀’가 되는 것입니다. 경찰이나 군은 즉각 출동하여 적을 소탕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간첩이나 공비의 침투를 알리는 경종이나 ‘사이렌’이 울려 퍼지면 모든 주민들이 순식간에 공동 전선을 형성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입체적인 작전을 전개할 때, 적은 ‘독 안에 든 쥐’처럼 꼼짝 못 하고 섬멸되고야 말 것입니다. 이러한 전술은 적에게 우리가 거꾸로 ‘게릴라’를 하는 전법입니다. (중략) 자유는 목숨을 건 싸움에서만 얻어지는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한 방어만이 자유를 수호할 수 있습니다. 국가 안위에 관한 대비책을 당리당쟁의 대상으로 삼는 자유가 있다면, 그것은 정녕 ‘자기 파멸의 자유’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국가 방위는 우리가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각오가 섰을 때에만 비로소 튼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북괴가 또다시 이 땅을 침략했을 때 나의 집, 나의 고향, 나의 직장에서 한 치도 양보해서는 안 됩니다. 끝까지 싸워서 지켜야 합니다. 내 마을 내 직장은 내가 최후까지 사수해야 할 방위선인 것입니다. (중략) 나는 예비군이 국난 극복의 신기원을 개척하고, 조국 근대화의 역군이 되어줄 것을 기대하면서 동지 여러분이 즐겨 부를 예비군가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여러분의 전도와 조국의 앞날을 축복하고자 합니다.
  
  ‘歷戰의 戰友들이 다시 뭉쳤다.
  총 들고 건설하며 보람에 산다.
  예비군 가는 길엔 승리뿐이다.’
  
  감사합니다>
  
  
  
  
  
  
  
  
  
  
  
  
  
  
  
  
  
  
  
  
  
  
  
  
  
  
[ 2009-03-27, 23:3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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