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 없었던 국가지도자의 末路(말로)
北宋(북송)의 敗亡史가 남긴 교훈(3)/궁중에는 아직 병력 1만 명, 戰馬(전마) 1000두가 남아 있었지만, 흠종은 대책 없이 통곡만 했다.

鄭淳台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禍를 자초한 漢族왕조의 국책以夷制夷(이이제이)

 

中國의 전통적 대외정책은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以夷制夷(이이제이)이다. 주변국들끼리 서로 물고 뜯으면 자신은 漁父之利(어부지리)를 누릴 수 있다는 계산인 것이다. 그러나 휘종의 외교는 오히려 망국을 재촉하고 말았다.

 

宋과 金 사이엔 海路를 통해 사절이 비밀리에 왕래했다. 1120년, 드디어 宋-金 군사동맹이 성립되었다. 그 조건은 (1)宋이 종래 遼에게 바쳤던 세폐의 동액을 金에 지급하고, (2)金은 長城 이북, 宋은 長城 이남을 평정한다는 것이었다.

 

동맹이 성립하자 金은 바로 대군을 동원하여 破竹之勢(파죽지세)로 長城 이북을 점령했다. 한편 宋은 마침 江南지방에서 봉기한 方臘(방랍)의 농민반란을 진압하는 데 시일이 걸려 원정군을 되돌려 북상시켰을 때는 遼의 영토 대분이 金軍에 의해 점령되고, 遼의 영토는 燕京(연경: 지금의 北京) 일대의 몇 개 州만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金軍은 宋과의 맹약에 따라 燕京 공략을 宋軍에게 양보했다. 그러나 宋軍은 약체였다. 20만 병력으로 燕京을 공격했지만, 곧 遼軍의 반격을 받아 무참하게 패퇴했다. 宋軍의 총지휘관인 童貫(동관)은 패전에 따른 문책이 두려워 가만히 金軍에 사자를 보내 원군을 요청했다.

金軍은 기다렸다는 듯이 居庸關(거용관)을 돌파, 燕京의 遼軍을 궤멸시켰다(1120년). 金은 즉각 宋에 사자를 파견하여 다음과 같이 통고했다.

 

“燕京은 우리 金軍이 함락했지만, 땅은 宋에 반환한다. 그 대신에 燕京 지구의 조세는 전액 金 측이 차지한다”

 

이에 宋은 사자를 보내 다음과 같은 협상안을 제시했다. (1)宋은 종래 遼에 지급했던 세폐(銀 30만 량과 비단 30만 필)를 金에 지급한다. (2)이밖에 燕京의 조세분으로서 매년 錢 100만 緡(민)을 지급한다. (3)그 대신에 金은 燕雲 16州를 宋에 반환한다.

 

협상 결과, 宋은 燕京을 포함한 6개 州를 반환받았다. 이에 따라 宋軍은 燕京에 입성했는데, 완전히 空城(공성) 상태였다. 金軍은 연경의 財寶는 물론 여자와 아이까지 깡그리 데리고 北上해 버렸던 것이다.

 

한편 遼의 天祚帝는 金軍이 남하하자 일찌감치 陰山山脈(음산산맥: 지금의 내몽골의 省都인 呼和浩特 市 북방)으로 도피했다. 그는 주변 부족의 힘을 빌려 보복전을 꾀했지만, 결국 金軍의 추격을 받아 포로가 되고 말았다. 遼는 태조 耶律阿保機(야율아보기) 이래 9代 200년 만에 멸망한 것이다(1125년).

 

宋의 背信(배신) 외교

 

宋은 金의 힘을 빌려 숙적 遼를 물리치고, 燕京 등 6州를 회복했다. 그러나 宋은 재정 악화를 이유로 金에 대한 세폐의 지급을 미루고 있었다.

 

이때 金에서는 太祖 아골타가 죽고, 그의 동생 吳乞買(오걸매: 太宗)가 즉위했다. 이러한 가운데 金에 대한 宋의 외교적 배신행위가 드러나고 말았다. 그것은 陰山산맥 지구로 도피해 있던 遼의 天祚帝에게 보낸 宋의 비밀 詔書(조서)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이 조서에는 宋-遼가 동맹을 회복시켜 공동의 적인 金을 공격하자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宋에 대한 金의 응징이 시작되었다. 1125년 겨울, 금군은 남진해 燕京을 점령했다. 宋軍의 총사령관 童貫은 太原(현재 山西省 省都)에 포진해 있었으나 燕京 함락 소식을 접하자마자 부하에게 방어의 책임을 떠넘겨 놓고, 자신은 수도 開封으로 도망쳐버렸다. 太原도 함락되었다.

 

金軍이 수도 開封으로 진격해 오자 휘종은 자신의 失政을 사죄하는 조서의 발표와 함께 太子에게 양위하고 자신은 上皇(상황)으로 물러났다. 휘종의 후계자가 欽宗(흠종)이다. 흠종은 방위군사령관 李綱(이강) 등 主戰派(주전파)를 해임하고, 재상 李邦彦의 건의를 받아들여 金에 대해 화의를 요청했다. 金軍은 다음과 같은 화의 조건을 제시했다.

 

(1)배상금으로서 金 500만 량, 銀 5000만 량, 牛馬 1만 두, 비단 1백만 필 지급. (2)中山․河間․太原 등 3鎭(진)의 할양. (3)재상․親王을 인질로 바칠 것.

 

가혹한 조건이었지만, 宋 조정으로서는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화의 협상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주전파 장군이 金軍 진영에 야습을 감행했으나 결과는 무참한 패퇴였다. 흠종은 군사령부를 해산하고, 李綱(이강)을 해임함으로써 금군에게 陳謝(진사)했다.

 

金은 화의 조건의 이행을 촉구했다. 宋은 3鎭의 할양을 보증하는 흠종의 조서를 金軍 진영에 보냈다. 이때 宋의 정부 금고에는 金 20만 량, 銀 400만 량밖에 남아 있지 않아 배상금 지급은 어려웠다.

 

금군은 개봉을 포위한 지 33일째, 宋의 배상금 지급을 기다리지 않고 철군했다. 금군이 철수하자 都民 수만 명이 들고 일어나 주전파 李綱의 복직을 탄원했다. 이강은 다시 방위군사령관으로 복귀했다.

 

靖康(정강)의 變金軍, 휘종․흠종 一家를 납치

 

宋은 3鎭의 할양을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금군이 철수하자 그 인도를 거부했다. 주전파․주화파의 싸움 때문에 宋 조정은 아무 결정도 내지 못하고 표류했다. 격노한 金은 수개월 후 대시 대군을 남하시켰다. 宋의 廟議(묘의)는 다시 和議로 기울어, 주전파인 李綱을 파면했다. 그러나 金의 태도는 초강경이었다. 이번에는 河北(北중국) 전역을 넘기라는 것이었다. 비록 약소국이긴 했지만, 宋은 그 조건만은 삼킬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開封城에 농성하면서 金의 대군을 迎擊(注·공격하는 적을 나아가 맞받아 침)했다.

 

농성 40일, 드디어 개봉 落城(낙성)의 날을 맞았다(1126년). 흠종은 대책 없이 통곡만 했다. 궁중에는 아직 병력 1만 명, 戰馬 1000두가 남아 있었지만, 최후의 일전을 벌여 성돌을 베개로 삼겠다는 용기는 없었다. 휘종은 음독자살을 하려 했지만, 신하에게 독약을 빼앗겨 미수에 그쳤다.

 

흠종・휘종・황후・황태자・친왕・공주・황족 등 3000여 명이 金軍 진영에 연행되었다. 금군은 개봉성의 子女, 金銀綾綿(금은능면), 차량, 일용잡화, 서적 등 갖가지 재물을 깡그리 약탈했다. 성내는 빈 집들만 남았다. 이것을 중국사에서는 ‘靖康(정강)의 變(변)’이라고 부른다. 靖康은 패망 당시의 年號(연호)이다.

 

金의 황제는 조서를 통해 宋왕조의 소멸을 선포했다(1127년). 금군은 휘종・흠종 一家를 납치해 북상했다. 이들의 억류된 곳은 하얼빈(현재의 흑룡강성 省都) 동북쪽 五國城이었다. 五國城이라면 海東靑의 명산지임은 앞에서 거론했다. 휘종․흠종은 이곳에서 병사했다.

 

황족 중에서 납치를 모면한 남자는 흠종의 동생인 康王뿐이었다. 康王은 멀리 江南으로 도피하여 臨安(임안·지금의 절강성 성도 항주)에다 수도로 삼고 황제로 즉위했다(1127년). 그가 南宋을 세운 高宗이다. 역사에서는 흠종 때 망한 나라를 北宋, 高宗이 세운 나라를 南宋이라고 부른다. 南宋 역시 경제적으로 번영했으나 군사력과 외교력이 허약해 北宋 시대의 처럼 북방의 기마민족 국가에게 민족적 굴욕을 겪었다. 南宋의 성립, 성격, 그리고 패망에 이르는 과정은 다음 기회에 쓸 예정이다. (계속)

[ 2009-10-27, 10:1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리버티헤럴드  |  뉴스파인더  |  이승만TV  |  장군의 소리  |  천영우TV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