性理學(성리학)은 왜 나라를 救하지 못했던가?
奸臣(간신) 3人 때문에 멸망한 경제대국 南宋 ②: 한탁주는 대궐에 들어가다가 붙잡혀 쇠몽치로 박살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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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鄭淳台st-jung@hotmail.com

 

 

朱熹(주희)와 宋學派를 숙청한 權臣 한탁주


科擧(과거) 출신의 士大夫가 관료로서 국가 운영을 주도하는 구조는 北宋에 이어 南宋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그 정신적 지주가 된 것이 新儒學, 즉 宋學이며, 이를 집대성한 것이 朱熹(주희: 1130-1200년)이다. 朱熹는 만년에 ‘僞學黨(위학당)의 首魁(수괴)’로 탄압을 받았지만, 사후에 명예를 회복하여 東아시아의 사상계에 군림했다.

 

▲ 南宋의 무기들: 왼쪽부터 鐵刀(철도), 屈刀(굴도), 戟刀(극도), 大斧(대부), 坐+刀 手斧(좌수부)

鐵刀/ 송대에는 이런 모양의 폭 넓은 곡도가 유행이었다.

屈刀/ 칼날 부분이 더욱 뒤쪽으로 휜 것이 偃月刀(언월도)이다.

戟刀/ 창의 양단이 밖으로 휜 戟의 가장 마지막 형태.

大斧/ 開山, 靜燕, 日華, 無敵이라고도 한다.

坐+刀 手斧/ 성을 지키는 병사가 성벽을 오르는 병사에게 사용했다.


朱子라는 존칭을 받은 朱熹는 南宋 개국 3년 후에 태어나 19세에 과거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다. 관리 등용문을 19세에 통과했다는 것은 그가 대단한 수재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는 縣(현) 서기관이 되었지만, 사임하고 학문에 전념했다. 중년을 지나 다시 出仕(출사)하여 두 郡의 태수를 역임하다가, 寧宗(영종)이 즉위하자마자 侍講(시강:왕 또는 세자 앞에서 학문을 강의하는 사람)으로 발탁되었다.

          

                                                                                                     ▼ 朱熹

그때 재상은 趙汝愚(조여우)였다. 그는 君子를 등용하고 小人을 배척했다. 朱熹를 천거한 것도 조여우였다. 당시 實勢(실세)는 황태후와 짜고 寧宗(영종)을 옹립한 공적을 내세우는 韓侂冑(한탁주)였다. 한탁주는 각별한 恩賞(은상)을 기대했지만, 조여우는 한탁주의 승진을 막았다. 한탁주는 깊은 원한을 품었다. 朱熹가 侍講으로 발탁된 시기의 상황은 이러했다.

 

朱熹는 영종에게 국가의 긴급과제 등을 진언했지만, 그의 주장은 모두 한탁주의 생각을 거스르는 것이었다. 朱熹는 侍講職(시강직)에 취임한 지 46일 만에 파면되었다.

                                                                                            

한탁주는 조여우의 실각을 노렸지만, 당장에 좋은 구실이 없었다. 이때 어떤 자가 다음과 같은 계책을 한탁주에게 제공했다.


“조여우는 북송 태종의 아들로부터 계산하면 7世孫입니다. 그런 만큼 그가 황위를 노리고 있다고 中傷(중상)하면 아무튼 그를 옭아 一族(일족)을 일거에 멸할 수 있을 겁니다.”          

 

▼南宋의 系譜

 이 대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北宋의 태조 趙匡胤(조광윤)은 와병중에 그의 동생 趙匡義(조광의)에게 시해당했다. 조광의가 바로 北宋의 太宗이다. 太祖의 두 아들 德林(덕림)과 德芳(덕방)이 제거되어 이후 北宋의 황위는 太宗의 후손들이 계승했다. 北宋의 멸망 당시 황족은 모두 金軍에게 끌려가고, 휘종의 제9자인 趙構(조구: 高宗)만 도망쳐 南宋을 창업했다(1127년). 高宗은 35년간이나 재위했지만, 後嗣(후사:대를 이을 아들)를 두지 못했다. 이로써 황위는 太宗에게 숙청된 太祖의 차남인 德芳의 5대손 孝宗(효종)에게 넘어가 이후 南宋은 太祖의 후손이 황위를 이어가게 되었다.


 한탁주의 모략에 의해 조여우는 재상의 지위에 오른 지 불과 수개월 만에 파면되었다. 조여우는 일찍이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진사가 된 이래 재상까지 나아가면서 朱熹 등 宋學의 선비들을 천거했다. 조여우는 재상에서 물러난 후 좌천에 좌천을 거듭하다가 끝내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1196년).


 朱熹와 조여우를 면직시킨 한탁주는 宋學 일파를 탄압, 그것을 僞學(위학: 가짜 학문)이라고 규정하고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그들의 官途(관도)를 원천 봉쇄했다. 이를 ‘僞學의 黨禁(당금)’이라고 부른다. 한탁주는 太師(황제의 스승), 平原郡王, 平章軍國事라는 직위를 누렸다. 그의 권력은 황제를 능가하여 九錫(구석)을 받았다. 九錫은 天子가 원훈에게 부여하는 賜品(사품)이다. 사품은 馬車・의복・악기・斧鉞(부월) 등 아홉 가지다. 이것은 權臣이 禪讓(선양)의 형식으로 帝位(제위)를 빼앗는 前단계를 의미한다.


 1200년, 주희가 세상을 떠났다. 당시 ‘僞學派’에 대한 禁令이 극히 엄중했는데도 불구하고 장례 참석자는 수천 명에 달했다. 한탁주는 국내의 반대세력을 잠재우고 독재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전쟁을 선택했다. 마침 북방에서 새로운 정세가 전개되었다. 金에 대해 북방으로부터 몽골족의 압력이 날로 증가했던 것이다.

 

▲ 몽골·金·南宋의 형세도

 

1206년, 한탁주의 주장에 의해 南宋은 金을 토벌하겠다는 조칙을 발했다. 그러나 막상 교전을 해보니 金은 아직도 南宋에겐 벅찬 상대였다. 南宋의 북벌군은 각지에서 대패, 철군했다. 金은 南宋에 대해 전쟁도발의 책임자를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당황한 寧宗은 密旨(밀지)를 내렸다. 

  

어느 날, 한탁주는 參內(참내:대궐에 들어가는 것)하다가 경비병에게 붙잡혀 御苑(어원)에서 쇠몽치로 박살을 당했다. 南宋은 한탁주의 首級(수급:베어낸 머리)을 상자에 담아 金에 바쳤다. 그런데 金에서는 ‘한탁주야말로 南宋의 忠臣’이라고 해서 후하게 장례를 치러 주었다. 

이미 쇠퇴해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무력에 自信이 있었던 여진족의 國民主義는 적국의 입장에서 易地思之(역지사지)할 만큼의 아량이 있었다. 이에 반해 무력이 약해 항상 적국으로부터 경멸을 받아온 南宋 측은 이제 겨우 민족주의에 눈뜨기는 했지만, 그것은 신경질적인 적개심의 발로에 다름 아니었다.

 

 

性理學 원리주의의 弊害(폐해)


 사실, 한탁주가 ‘간신’으로 매도되어 온 것은 그가 儒學徒(유학도)를 탄압했기 때문이라는 측면도 없지 않다. 그 결과, 그는 훗날 사필을 독점한 儒學徒 출신 사대부에게 筆誅(필주)를 당했다고 볼 수 있다. 원래 儒學은 난세를 극복하는 학문은 아니었다. 儒學의 開祖(개조) 孔子는 무려 18년 동안 春秋시대의 여러 제후들을 찾아다니며 自身의 이상 실현을 위해 獵官(엽관:관직을 얻으려 야심적으로 경쟁)) 운동을 벌였지만, 그 누구도 그를 등용하지 않았다.


儒學은 漢 武帝 이래 역대 중국 왕조의 官學이 되었지만, 實事求是(실사구시)의 학문은 아니었다. 유학이 지향하는 德治(덕치)는 어디까지나 왕조의 겉모습을 꾸미는 名分이었다. 그것은 漢왕조의 最盛期(최성기)를 이룩했던 宣帝(선제) 때의 에피소드 하나로 짐작할 수 있다. 다음은 <十八史略>의 기록. 


<태자 奭(석)은 원래 온화한 성격으로 儒學을 좋아했다. 太子는 父帝(부제)가 法治主義에 기울어 법률에 밝은 인물만을 重用해 통치하고 있다고 보았다. 어느 날, 太子는 차분한 목소리로 宣帝에게 호소했다.

 “폐하는 지나치게 法家에 의지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꼭 儒者를 채용해 聖人이 가르친 王道정치를 하시지 않으렵니까?”

 宣帝는 싹 안색을 바꾸었다.

 “漢家(한가: 한나라 왕가)에는 漢家의 제도가 있다. 覇道(패도)와 王道(왕도), 두 개를 倂用(병용)하는 것이 전통으로 되어 있다. 무슨 까닭에 그 한쪽인 德治主義만 써서 周代의 정치를 흉내 내지 않으면 안 되는가? 儒者들의 말은 時宜(시의)에 맞지 않다. 그들은 입만 열면 옛날을 칭찬하고, 現代를 비방해서 세상 사람의 판단을 혼란에 빠뜨린다.>


사실, 武帝 시대 漢나라에는 酷吏(혹리: 가혹한 관리)가 판을 쳐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고단했던 반면 宣帝 시대의 漢나라는 循吏(순리: 규칙을 잘 지키며 열심히 일하는 관리)가 잇달아 宰相 등 요직을 맡아 太平聖代(태평성대)를 이루었다.


南宋에서는 한탁주의 집권과 함께 호기 있게 추진되었던 北伐(북벌)이 완패로 끝나면서 朱子의 性理學만이 代案이 되었다. 그러나 성리학자들이 제시한 君子像은 그 外延(외연)과 修飾(수식)에도 불구하고, 南宋을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 데 실패했고, 積弊(적폐)를 개선하지도 못했다. 性理學은 어디까지나 觀念論的(관념론적) 범위 내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학문이었다.

   

中國에서는 왕조의 裝飾用(장식용) 또는 名分用이었던 朱子의 性理學을 國是(국시)로 삼고 속마음까지 바쳤던 유일한 나라가 朝鮮王朝였다. 조선왕조의 士大夫들은 朱子學의 原理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儒學의 다른 갈래인 陽明學(양명학) 서적을 가진 사람들까지 斯文亂賊(사문난적:儒敎 교리를 어지럽히고 사상에 어긋나는 언행을 하는 사람)으로 매도・숙청했다. 정치학에서는 어떠한 思想이든 同居(동거)는 할 수야 있지만 婚姻(혼인)을 해서는 안 된다는 警句(경구)가 있다. (계속)

[ 2009-11-19, 09:4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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