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 일으키기 위해 학생들을 선동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21)/ 혁명 모의 세력은 학생들을 포섭하여 시위를 일으키도록 하는 이른바 ‘데모 유치 공작’을 꾸민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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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 유치 계획
  
  박정희 혁명 계획의 핵심은 1961년 4월19일 혁명 1주년 기념일에 대규모 시위가 발생할 것이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서 수도권의 부대들이 폭동 진압에 동원되면 이미 포섭한 장교들에 의해서 이 부대가 쿠데타 군으로 돌변, 정권을 전복시킨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의 전제가 되는 것은 4월19일에 과격한 학생 시위가 발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혁명 모의 세력은 학생들을 포섭하여 시위를 일으키도록 하는 이른바 ‘데모 유치 공작’을 꾸민다. 이 공작 이야기는 일종의 公刊社(공간사)인 《韓國軍事革命史(한국군사혁명사)》(1963년 8월 한국군사혁명사편찬위원회 발간·위원장 장경순 소장)엔 빠져 있다. 이 혁명사의 원본이 된 비공개 <革命實記(혁명실기)>엔 적혀 있고, 이낙선의 <혁명 참여자 증언록>엔 자세히 그 경과가 실려 있다.
  
  혁명사가 발행될 때는 박정희─윤보선 후보가 대결한 제5대 대통령 선거 투표일을 앞두고 있어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해서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내용을 빼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혁명실기>는 ‘데모 유치 공작’이 김종필 중령과 박종규 소령에 의해서 주로 이루어졌다고 적고 있다. 국방부에서 근무하고 있던 박 소령은 미국 보병학교에서 유격 특수 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었다. 김종필은 평소 자신의 은혜를 많이 입은 박종규에게 특명을 내렸다.
  
  3월 초순 박종규는 우선 서울대, 고려대, 건국대 학생들을 포섭하여 의식화하는 일에 착수했다. 영어를 꽤 잘 하는 박종규는 알고 지내는 터키계 미국 여성 사이데 양의 신당동 집을 의식화 토론 장소로 빌렸다. 첫 회합은 3월7일 저녁 8시에 있었다고 <혁명실기>는 적고 있다. 참석한 학생들은 ‘건국대 정치과 조병규, 이두현, 고려대 정외과 김수길 등 학생회 간부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유 토론에서 4·19 의거 학생들의 열망을 배신한 장면 정부를 뒤엎어야 한다는 과격한 토로를 했다. 박종규는 이들의 토론 상황을 미리 장치한 녹음기에 담았다.
  
  박 소령은 이틀 뒤엔 10여 명의 학생회 간부들을 다시 불러 모아 의식화 토론을 가졌다. 박종규로부터 학생들의 동태를 전해 들은 김종필은 행동대를 조직하도록 지시했다. 박 소령은 학생회 간부 5명을 뽑아 각자 10명씩의 학생들을 포섭하도록 지시했다.
  
  박종규는 이들을 일종의 특공대로 만들어 비밀 훈련을 실시했다고 한다. 이런 공작과 포섭엔 자금이 필요했다. <혁명실기>는 ‘당시 비용은 김종필 중령이 金龍泰(김용태·공화당 원내총무 역임)의 협조를 얻어 부담했는데 300만 환이 소요됐다. 김 중령도 전역하며 받은 퇴직금 100만 환을 다 쓰고도 모자라 부인의 곗돈까지 동원하여 학생들이 데모 때 뿌릴 전단 2만 장을 인쇄했다’고 기록했다. 전단의 서두는 이러했다.
  
  <학생이여 궐기하자! 4·19의 피가 헛되었다. 이런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피를 흘렸던가!>
  
  박종규는 학생들과 자주 접촉하는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서 기자를 사칭했다. 친구가 경영하는 대륙통신사에 가서 “이번에 군에서 제대를 했는데 내 취미가 사진 찍는 것이다. 사진을 찍어 전시회를 열려고 하는데 기자증을 하나 만들어 주게”라고 부탁했다. ‘사진기자’ 박종규는 카메라를 메고 다니면서 학생들을 만났다.
  
  4월19일을 거사일로 잡은 혁명 주체들은 이즈음 조직 확대와 점검을 서두르고 있었다. 3월 15일 김종필, 오치성, 柳承源(유승원), 이석제, 옥창호, 길재호, 김형욱, 신윤창, 박종규는 명동 신도호텔 2층 객실에서 만났다. 이들은 몇 가지 사항에 합의했다.
  
  <1군 사령부 내의 공작은 조창대 중령에게 일임하고 수시로 감독한다. 해군, 공군, 해병대 등 타군 및 2군과의 연락은 사장(박정희)과 김종필에게 맡긴다. 공수단은 오치성과 김형욱이 책임진다. 33사단은 작전참모 오학진 중령을 포섭하여 책임을 맡긴다. 박종규 소령은 사장의 신변 경호에 책임을 진다>
  
  다음날 金東煥(김동환), 김형욱 중령이 대구로 내려가 박정희로부터 새로운 지침을 받고 올라왔다. 3월22일에는 군인들뿐만 아니라 장면 정권과 보수층을 크게 자극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혁신계가 주동한 악법반대궐기대회가 폭력화된 것이다. 4·19 이후 표면으로 나온 혁신계 속에는 좌익도 포함되어 있었다.
  
  1961년 2월13일에 趙鏞壽(조용수)를 사장으로 하여 창간된 민족일보는 장면 내각 비판을 극렬하게 전개했다. 당시 장면 정부는 좌익의 발호를 차단하기 위해서 보안법과 반공법을 강화한 ‘반공임시특례법안’을 만들어 국회에 제출해 놓고 있었다. 혁신계와 민족일보는 이 법이 통과되면 자신들이 설 자리를 잃게 된다고 판단, 공세를 강화했다.
  
  3월22일 오후 2시 서울 시청 앞 광장에는 약 1만 명의 군중이 모였다. 그들은 ‘밥 달라고 우는 백성, 악법으로 살릴소냐’라고 외치면서 연좌 농성을 벌인 뒤 장면 총리의 사저가 있는 명륜동으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혜화동에서 경찰은 약 30발의 최루탄을 쏘아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밤이 되자 시위대는 횃불을 들고 중앙청 문을 부수고 일부는 택시를 잡아타고 난동을 부렸다. 이 시위에 맞서 우익 단체에선 ‘반공법 지지’ 시위를 벌였다. 마치 광복 뒤의 좌우익 대결을 연상시키는 사건이었다.
  
  그 다음날 김종필과 오치성은 서울 근교에 주둔하는 33사단 작전참모이자 육사 동기인 오학진 중령을 서울 소공동 일식집 ‘남강’으로 초대하여 자연스럽게 어지러운 시국에 관련한 이야기를 유도했다.
  
  “민주당 정부는 반공에선 자유당보다 더 무능하다. 이대로 가다가는 공산당과 싸워 보지도 못하고 저들의 수중에 들어갈 판이다.”
  
  “조국을 구출하는 일은 우리 장교들이 궐기하는 것뿐이다.”
  
  “그러면 육군 장성들 가운데서 가장 신망이 높고 양심적인 사람을 꼽아 보라.”
  
  “박정희 장군, 한신 장군….”
  
  “우리하고 생각이 같다. 우리가 바로 그 박 장군과 손잡고 일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포섭된 오학진 중령은 33사단 병력을 혁명에 동원하기로 합의했다는 것이다. 이 무렵 졸업을 앞둔 육사 17기 생도들 가운데서도 쿠데타 계획을 세우는 이들이 있었다. 이 사실을 탐지한 한 장교가 주동 생도를 찾아가서 “야, 좀 기다려. 우리가 다 준비하고 있어” 하고 말렸다. 정부가 무능하고 만만하게 보이니까 생도들까지 정권 탈취를 꿈꿀 정도였다.
  
  국가 근대화
  
  1961년 4월7일 저녁, 서울 명동 양명빌딩 4층 姜尙郁(강상욱) 중령 집으로 수십 명의 장교들이 모여들었다. 4월19일을 거사날로 내정했던 박정희 소장은 포섭한 주체 세력 전체 회의를 소집한 것이다. 많은 영관 장교들은 이날 비로소 박정희 소장과 처음 만났다. 비공개 자료 <5·16 혁명실기>는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의 명단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박정희 소장, 김재춘 대령(6관구 사령부), 이병엽 대령(33사단), 오치성 대령(육본), 유승원 대령(육본), 박치옥 대령(공수단), 문재준 대령(6군단 포병단), 김제민 중령(공수단), 김종필 예비역 중령, 김형욱 중령(육본), 옥창호 중령(육본), 길재호 중령(육본), 이석제 중령(육본), 김동환 중령(육본), 신윤창 중령(6군단 포병단), 정문순 중령(육군대학), 조창대 중령(1군 사령부), 김용건 중령(육본), 박원빈 중령(6관구 사령부), 강상욱 중령(육본), 이백일 중령(30사단), 오학진 중령(33사단), 박순권 중령(육본), 최홍순 중령(육본), 정치갑 중령(육본), 홍종철 대령(6군단), 이지찬 중령(육본), 이낙선 소령(육본), 차지철 대위(공수단)>
  
  5·16 거사가 성공한 이후 이들 29명 가운데선 한 사람의 대통령, 세 사람의 중앙정보부장, 두 명의 대통령 경호실장, 일곱 명의 장관과 국회의원이 배출된다.
  
  이날 회의에서는 4월19일을 거사일로 결정한 것 외에 몇 가지 중요한 방침을 확정했다. 혁명지휘부의 구성을 작전반, 행정반으로 나누고 작전 책임자는 박원빈, 행정 책임자는 이석제 중령으로 삼았다. 박정희 소장의 명을 받들어 행정반과 연락할 담당자는 오치성 대령, 작전연락은 강상욱 중령, 이들 두 班(반)을 통합하여 조정하는 임무는 김종필에게 주어졌다. 1군 사령부의 조직은 조창대 중령에게 맡기기로 했다. 조직이 확대되어 보안의 필요성이 한층 높아졌으므로 앞으로의 회합은 班 중심의 소규모로 하기로 했다.
  
  이틀 뒤 명동 신도호텔에선 작전반 회의가 열렸다. 연락 장교 강상욱은 박정희의 지시를 전달했다. 중앙청, 반도호텔(총리실), 방송국, 송신소, 육본 등 주요 시설의 점거 계획을 만들고, 공수단 병력으로써 총리와 장관 등 정부 요인들의 체포 계획을 세우라는 지시였다. 아울러 가두 방송과 전단 공중 살포 계획 수립도 지시했다.
  
  행정반은 그동안 이석제 중령이 중심이 되어 계속해 왔던 혁명 정부의 권력 구조 및 정책안의 작성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국민, 학생, 재향 군인, 유엔군 사령관에게 보내는 메시지 작성에 골몰했다. ‘전국 학생에게 고함’이란 제목의 글은 거사의 명분을 ‘배신당한 4·19 혁명 정신을 되살리는 것’에 두었다.
  
  <(전략) 군은 이 모든 亡國滅民(망국멸민)의 화근을 과감히 拔本(발본)하여 정치를 혁신하고 국가 경제의 안정, 국민 도의의 앙양, 반공 자주 통일을 성취해서 국운의 신장을 기함과 아울러 세계 자주 열강과 더불어 공존공영, 세계 평화에 공헌함이 시대적인 요청이며 국가민족의 지상 명령임을 신념하고 궐기 행동한 것이다. (후략)>
  
  행정반장 이석제 중령은 한때 고시 공부를 한 적이 있어 그 법률 지식을 아주 요긴하게 쓸 수 있었다. 그는 도서관을 누비고 신문을 참고하며 명치유신 등 외국의 혁명 사례들을 연구했다. 4월 초 그는 서울대학교로 韓泰淵(한태연) 교수를 찾아갔다. 고시 공부를 할 때 한 교수의 저서를 달달 외우다시피 했던 이석제 중령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생각을 떠보려고 했다. 한 교수는 우리 사회에 무엇인가 큰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데는 공감하면서도 군인들이 집권할 가능성을 아주 낮게 보고 있었다.
  
  그때 장면 총리가 여러 차례 쿠데타 계획에 대한 정보 보고를 받고도 신속히 조치를 취하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로 민간 정치인들의 머릿속에는 ‘군사 쿠데타에 의한 집권’이란 개념이 아예 들어 있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조선조 개국 이후 정치를 독점해 온 문민 정치인들의 입장에선 군인에 의한 정변은 외국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12세기 고려 무신의 난이란 단 한 번의 군사정변밖에 없었던 우리나라의 정치 생리에 비추어 군인이 무력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한다는 것은 그들의 상상력 바깥에 존재했다.
  
  이석제가 혁명 이후의 국가 구조와 정책을 그리는 데는 박정희와 김종필로부터의 지침과 제안이 뼈대가 되었다. 이석제는 일찌감치 富國强兵(부국강병)과 반공을 국정 목표의 제1儀(의)로 삼았다. 이 중령을 비롯한 주체 세력의 태반이 공산당이 싫어서 월남한 장교들이었으므로 노골화된 좌익 활동에 대한 반응은 유달리 예민했다.
  
  이석제가 계획서를 만들고 있을 무렵에 김포 해병여단 소속 장교 두 사람이 한낮의 종로 뒷골목에서 깡패들에게 몰매를 맞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소식을 들은 해병여단에선 트럭 두 대에 군인들을 태우고 달려와 종로 일대를 포위하곤 깡패들을 잡아내 개 패듯이 두들겼다. 경찰력이 약화되니까 곳곳에서 군인들과 깡패들이 격돌하는 풍경이 벌어졌다. 이석제는 ‘깡패 소탕’을 혁명 후 사업 리스트에 올렸다. 혁명 후의 국정 방향 수립에 참여한 박정희, 김종필, 이석제 세 사람은 일본의 자주적인 근대화 혁명인 명치유신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자연히 ‘국가 근대화’란 말이 혁명이념으로 등장했다.
  
  당시 제3세계에서 유행하던 군사 쿠데타의 대부분은 민족주의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반면, 박정희는 근대화, 즉 경제 발전을 핵심 목표로 하는 혁명을 추진한 점에서 특이하다. 박정희는 1951년 6·25 동란 중에 이미 “공산화를 막기 위해선 빈곤 퇴치뿐이다”고 말하곤 했다.
  
  5·16 혁명의 특이점은 민간 정치인이나 관료 출신도 아닌 군인이 경제 개발을 혁명의 중점 목표로 설정한 점이다. 박정희는 정치적 문제의 근본이 경제라는 점을 이해한 사람이었다. 그가 한때 사회주의에 傾倒(경도)되었다가 배우고 나온 점이 하나 있다면 ‘경제란 하부 구조가 정치, 문화 등 상부 구조를 지배한다’는 시각이었을 것이다.
  
  국가재건최고회의와 경제기획원, 그리고 중앙정보부 설치는 김종필의 발상이었다. 정보장교 출신인 김종필은 미군으로부터 미 CIA에 대한 강의를 여러 번 들었다. 그는 여러 정보기관을 통합, 조정하여 국가적 차원의 정보 판단을 할 수 있는 기관으로서 CIA와 같은 국가 정보기관의 설치를 생각했다고 한다.
  
  “아울러 혁명을 뒷받침할 무서운 기관으로서 수사권을 부여하기로 했습니다. 혁명이 끝나고 민간 정부가 세워질 때는 수사권을 분리시켜 FBI와 같은 기구를 만들고 국가 안전에 관한 수사를 전담시킬 생각이었습니다.”
[ 2011-02-11, 11:3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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