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李承晩 대통령의 미국 여행 이야기(上)
위대한 인물은 미국에서 더욱 빛났다.

이현표(李東馥소개)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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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 대통령의 미국 여행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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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박사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었는지를 대한민국의 젊은 세대가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은 민족적 비극입니다. 이 대통령이 초대 대통령으로 재임(1948-1960)하던 기간 중 정치적 독재에 흐르고 장기집권 논란을 불러일으킨 행적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평생을 바쳐서 일제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대한민국 건국을 이끌었으며 이 땅에 민주주의의 나무를 심고 공산주의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 낸 그의 위대한 업적은, 장공속죄(將功贖罪)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그의 과실(過失)을 가지고 시야비야(是也非也)하는 것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더구나, 이 나라의 젊은이들이 그를 상대로 심지어 ‘친일(親日)▪친미(親美)’의 누명을 씌우는 인격살인(人格殺人)에 동참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역사에 대한 중대한 왜곡이고 모독입니다.
  
   어째서 왜곡이고 모독인가를 밝혀 주는 귀중한 글을 上/中/下 세 토막으로 나누어 여기 소개합니다. 이 감동적인 글은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을 역임한 이헌표 선생이 1954년7월26일부터 8월13일까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국빈방문한 80세의 노(老) 대통령이 19일간에 걸쳐 전개한 외교활동을 엮어서 34회에 걸쳐서 <국방일보>에 연재한 내용입니다. 특히 이 글은 방미 기간 중 이 대통령이 행했던 모든 연설문을 담고 있는 소중한 사료(史料)이기도 합니다. 모쪼록 많은 분들이 이 글을 읽고 그 동안 사장(死藏)되었던 역사적 진실에 눈을 뜨고 왜곡된 사관(史觀)을 교정(矯正)하는 기회로 삼기를 바랍니다. 특히 초▪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이 이 글을 읽고 학생들이 읽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기를 바라 마지 않습니다. 2012년1월1일 李東馥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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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를 시작하며 (1)
  
  “나를 좀 우리나라에 데려다 달라”
  
  1965년 7월 21일(수요일) 저녁, 어느 여인이 울면서 하와이 호놀룰루의 한인교회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만 나이 64세로 보기에는 너무도 늙고 병약해 보이는 벽안의 여인이 31년이라는 영욕의 세월을 함께한 사랑하는 남편을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보내려고 힘든 발걸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25세 연상의 남편, 90세에 가까운 노령으로 병상의 신세를 지고 있는 지아비를 3년 반 이상 극진히 간호하면서 그녀의 심신은 극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더구나 남편이 영면하기 전 1주일 동안은 잠을 거의 못 이뤘던 그녀는 1965년 7월 19일 새벽 0시 35분, 싸늘하게 변해 버린 ‘파파’(평소 그녀는 남편을 이렇게 불렀음)의 손을 놓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식음을 못하고 혼절을 거듭하다가 양자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장례식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하얀 한복을 입고 반듯이 빗어 올린 머리칼, 검은 실 핀으로 머리칼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꽉 조인 모습. 그리고 통곡하지 않고 오른 손에 흰 장갑을 낀 채 하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범상치 않은 행동은 그녀의 품격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대한민국의 첫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리(Francesca Donner Rhee, 1900∼1992) 여사였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1875∼1965). 남북통일이 되기 전까지는 눈을 감을 수 없다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병마와 투쟁하던 그는 사랑하는 ‘마미’(이승만은 평소 아내를 이렇게 불렀음)를 두고 그렇게 떠났다. 향년 만 90세.
  
   1960년 4·19 혁명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난 후, 이승만은 부인 프란체스카와 하와이에서 인생의 마지막 5년을 보냈다. 1913년부터 1938년까지 하와이에서의 망명생활을 포함하면 그는 무려 30년을 하와이에서 보냈다. 공교롭게도 조국인 한국에서 45년, 하와이를 비롯한 미국에서 45년을 살았던 이승만에게 미국은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그렇지만 이승만은 나라를 빼앗겨 40년을 망명생활하면서 느꼈던 향수보다도, 권좌에서 물러난 이후 하와이에서 보냈던 5년 동안 더욱 애절하게 고국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이 시절, 그는 병상에 있으면서도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좀 우리나라에 데려다 달라”고 하소연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살아서 조국 땅을 밟을 수 없었다. 1965년 7월 21일 밤 11시(하와이 현지시각), 이승만의 유해는 미군 의장대의 호송을 받으며 하와이 히캄 공군기지로 향했으며, 미 공군수송기에 실려 조국으로 돌아왔다. 사랑하는 ‘마미’는 그곳에 남겨 두고!(프란체스카는 그 5년 후인 1970년에 귀국해 1992년 서울에서 서거했음)
  
   7월 22일, 김포공항에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3부요인, 그리고 많은 인사들이 그의 시신을 영접했으며 장례는 7월 27일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정동교회에서 영결식을 마친 후 국립묘지로 가는 그를 전국에서 모인 수십만의 국민들이 애도했다.
  
   당시 이승만의 장례 형식을 놓고 국장·국민장·사회장 등 논란이 빚어졌듯이, 주검이 돼 돌아온 그를 보는 시각이 달랐다. 그것은 어제의 일만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우리 사회 내에서 극과 극을 달리고 있으며 커다란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그러나 그를 존경하든 비난하든 우리가 알아둘 것이 있다. 이승만은 우리 기억 속에서 사라진 인물이 아니라, 이렇게 우리와 함께 호흡을 해 오고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왜 그럴까? 대답은 간단하다.
  
  美 골동품 상점서 뜻밖의 책 발견
  
   이승만만큼 우리 현대사의 흐름을 바꿔 놓은 인물을 찾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한국 근대화의 선구자로, 조국 독립의 구심점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이라는 자유민주국가의 건국과 발전을 위해서 남달리 헌신했다.
  
   반면에 그는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아집 때문에 장기집권을 도모했다. 그러다 보니 억지 개헌과 부정선거를 마다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1960년 4·19 혁명의 단초를 제공했고, 많은 젊은이들을 피 흘리며 쓰러지게 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국내외에서 이승만에 대한 수많은 저작물이 제작됐다. 그중에는 그를 직접 접할 수 있었던 이들의 기술이 담긴 중요한 저작물들도 있다.
  
   그러나 이승만과는 일면식도 없는 이들이 제3자의 입이나 글을 통해서 얻은 정보를 가지고 그를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 보니 구체적인 사실과는 거리가 멀고 검증되지 않은 정보가 생산되며, 첨단 미디어가 이런 정보를 넓게 그리고 빠른 속도로 확산시키고 있다.
  
   인간이 인간을 평가한다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을 것이다. 직접 접촉하고 교류했던 사람이 평가하는 것도 힘들거늘, 그렇지 못한 사람은 말해서 무엇하랴! 이는 정말 경계해야 할 일이다.
  
   오늘부터 선보이게 되는 연재물은 이승만에 관한 저작물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 저작물은 아주 특이한 존재다. 잠시 연재물이 등장하게 된 책에 관한 일화를 소개하는 것이 도리일 것 같다.
  
   이야기를 2005년으로 돌려야겠다. 필자는 당시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해 4월 초 골동품 상점을 찾았다가 뜻밖의 책을 만났다. “President Rhee Syngman’s Journey to 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이승만 대통령의 미국 여행)”라는 제목의 영어 원서였다.
  
   대한민국 공보처가 발간한 책으로 1954년 7월 26일부터 8월 13일까지 18박 19일 동안 이승만 대통령의 미국 방문 행적이 많은 사진들과 함께 수록돼 있었다.
  
   필자는 오랫동안 대한민국의 대통령들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 왔으나 그 책은 처음 봤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책에는 소장자가 보관하기 위해 꽂아 둔 특이한 사진 한 장이 꽂혀 있었다. 6·25전쟁 직후, 피란지에서 태극기를 들고 서 있는 이승만 대통령 사진이었다.
  
   사진을 처음 대하는 순간 실망스러웠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왜 우리 대통령은 총이나 칼을 들고 결연한 의지를 보이지 못하고, 그렇게 나약한 모습으로 태극기를 들고 있을까? 그것도 1949년 법률로 정해진 태극기와 비교해 볼 때 태극과 괘의 모습이 사뭇 다른, 어느 장롱 속에서 꺼내 온 것 같은 태극기를!
  
   그날 밤, 필자는 그 사진을 책갈피 삼아 밤새도록 책을 읽으며 너무도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그간 알지 못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국제적인 위상이 극히 낮았던 그 시절, 그는 미국을 국빈 방문해 당당하게 미국 정치지도자들에게 한반도의 미래를 설파하고 있었다. 자유와 정의라는 이름으로!
  
  `… 미국 여행' 책 통해 다시 한번 조명
  
   책 읽기를 마치고 태극기를 들고 서 있는 이승만 대통령을 다시 곰곰이 살펴봤다. 처음 접했을 때 느껴졌던 실망스러운 감정이 이번에는 연민과 애정으로 변해 있었고, 그분의 용기와 배짱이 느껴졌다.
  
   그때 불현듯 이 책을 나만이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가 한 번쯤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승만 대통령을 이해할 수 있는 최적의 교재 중 하나라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다.
  
   이후 5년 이상이 훌쩍 지나버렸다. 그리고 이제 감히 국방일보 지면을 통해서 그 책의 내용과 관련 자료들을 바탕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말했던 자유와 정의, 그리고 대한민국의 비전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그때 책을 읽으며 필자가 느꼈던 그 감동을 되살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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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방문 배경 (2)
  
  6·25 총성 그후… 평화주의자, 반공투사가 되다
  
   1948년 7월 17일 제정된 대한민국 제헌헌법의 전문은 대한민국 건국의 기본이념을 자유와 정의에 두고 있으며, 이는 8차례의 헌법 개정에서도 변하지 않고 지켜지고 있다. 자유와 정의는 유엔의 설립 목적이며 모든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기본이념이기도 하다. 그런 대한민국이 수립된 지 채 2년이 못 돼 미증유의 시련을 겪게 된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의 무력남침으로 수백만 명이 생명과 재산을 잃었고, 국토의 전체가 전화로 완전히 초토화됐다. 이후 대한민국은 무력과 폭력을 앞세워 자유와 정의를 짓밟는 세력과 3년에 걸친 긴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으로 총성이 멎었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일시적인 방편이었다. 이후 1954년 4월 26일부터 6월 15일까지 51일간 제네바에서는 한반도 통일문제를 다룬 국제회의가 개최됐다. 휴전 뒤 3개월 내에 고위 정치회담을 열어 한국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권고한다는 휴전협정의 내용에 따른 국제회의였다.
  
   그러나 제네바 회담은 아무런 성과 없이 말잔치로 끝나고 말았다. 이제 바야흐로 국제사회는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의 노골적인 대립이 시작됐다. 구체적으로는 미국과 소련의 양극체제였으며, 중국(중공)이 신생국으로서 세계 무대에 등장하게 됐다. 이로써 한반도의 통일문제는 더욱 어두운 구름 속으로 잠겨 버리고 말았다.
  
   한편 휴전 직후인 1953년 8월 3일부터 대한민국과 미국은 한미 상호방위조약 협상에 들어가 같은 해 8월 8일 그 최종안을 서울에서 가조인했다. 그리고 동년 10월 1일 워싱턴에서 대한민국과 미국의 외무부장관이 서명했지만, 양국이 비준서를 교환하고 실제 효력이 발휘된 것은 1954년 11월 18일이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한반도에 자유와 정의가 넘치는 통일국가를 꿈꿨던 인물이다. 비록 그가 공산주의에 대한 지독한 혐오감을 갖고 있긴 했지만 당초 무력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일제 강점기 미국에서의 망명생활 중에도 그는 조국 독립에 관한 견해에 있어서 남다른 면이 있었다. 즉, 외교적인 노력으로 국권을 회복한다는 신념을 가졌던 인물이다.
  
   외교에 의한 독립노선은 당시 한국인들에게 너무 이상적이고 현실 회피적이며 유약한 노선이었던 것 같다. 때문에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자 목에 30만 불의 현상금이 걸린 일제의 공적 1호였지만, 동료들로부터 오해도 받았고 적대적인 세력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6·25전쟁은 이승만 대통령을 다른 인물로 바꿔 놓았다. 자유와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게 했다. 때문에 그는 휴전에 철저히 반대했고 전쟁을 서둘러 종식시키려는 아이젠하워 등 미국과 국제사회의 정치지도자들과 대립각을 세웠다.
  
   6·25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졌을 때인 1952년 11월,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다. 당시 공화당의 아이젠하워 후보는 그해 10월 24일 “I shall go to Korea(나는 한국에 갈 것이다)”라는 제목의 연설로 선거의 주도권을 잡았다. 연설은 그가 어떤 방식으로든 전쟁을 종식시키겠다는 의도로 받아들여져 미국 언론과 국민의 주목을 받았고 그를 대통령에 당선되게 했다.
  
   사실 아이젠하워는 군인으로서 평생을 살아온 인물이고, 일부에서는 그가 전쟁을 종식시키는 방식이 휴전이 아니라 북진 대공세로 전쟁을 마무리 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단지 그런 생각만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그를 설득해 남북통일의 꿈을 실현시키고 싶어 했다.
  
   아이젠하워는 약속대로 대통령 당선자 자격으로 1952년 12월 2일부터 2박 3일 일정으로 방한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그를 만나 자신의 계획을 설명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이승만과 생각이 달랐다. 이미 휴전으로 마음을 정한 그는 이승만 대통령과의 만남 자체를 탐탁해하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교수는 1978년에 발간된 저서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에 당시의 상황을 비교적 잘 기술해 놓았다. 그는 아이젠하워가 도착 즉시,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고는 더 이상의 접촉을 꺼렸다고 적고 있다. 더구나 아이젠하워가 3일 동안 체류하면서 밴플리트 장군의 戰況 보고를 듣지 않으려 했고 낮에는 미군부대 시찰, 밤에는 포커놀이를 즐겼다고 적어 놓았다.
  
   당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아이젠하워를 만났을 때 대형 태극기를 선물했다. 외국의 최고 지도자에게 국기를 선물한다? 정말 기발한 착상이 아닌가. 사실 이승만 대통령은 무슨 선물을 할지 상당히 고민했던 것 같다. 결론은 태극기였다. 물론 이승만도 상대가 반갑게 받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이지만 태극기를 통해 자유와 정의를 지키려는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때 현장을 목격했던 원로 언론인에 따르면 아이젠하워가 한 손으로 태극기를 받으려고 하자 이 대통령은 황급히 태극기를 거두며 정색을 하고 말했다고 한다. “한 나라의 국기를 받을 때는 두 손으로 받는 게 예의입니다”라고. 곧 아이젠하워는 두 손으로 태극기를 받은 다음, 왼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오른손으로는 이 대통령과 악수를 했다고 한다. 그때 장면을 담은 사진이 남아 있다. 자세히 보면 어딘지 두 사람의 관계가 어색함을 느낄 수 있다.
  
   아무튼 李承晩 대통령의 태극기 사랑은 유별났다.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조국의 독립을 그릴 때는 물론이지만, 어렵사리 광복을 맞고 수립한 대한민국 정부를 공산주의자들이 무력으로 짓밟으려 할 때 그의 태극기 사랑은 더욱 절실하지 않았나 싶다.
  
   아이젠하워에게 태극기를 선물하는 사진은 물론, 1950년 7월 21일 태극기를 들고 촬영한 사진, 태극기를 배경으로 이승만의 초상화가 실린 1950년 10월 16일자 ‘TIME’ 표지는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6·25전쟁을 겪고 나서 이승만은 어제의 순진한 평화주의자, 외교를 우선하는 합리주의자가 아니었다. 북쪽의 공산 정권을 반드시 무너뜨리겠다는 反共투사로 변해 있었다. 이승만에게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필요한 것이기는 했지만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敵의 도발을 응징하고 북진 통일하겠다는 이승만의 이러한 집념은 미국은 물론 국제사회로부터 큰 호응을 받지 못했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큰 불만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1954년 제네바 회담이 수포로 돌아가고 한반도에 暗雲이 드리우자 이승만은 자신의 주장이 옳았다는 것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
  
   반면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에 취임한 후 약속대로 6·25전쟁 휴전을 성립시켰다. 하지만 이승만의 불만을 잘 알고 있었고 어떻게든 그를 회유하고 싶었다. 그래서 존 덜레스(John Foster Dulles, 1888∼1959) 국무장관과 로버트슨 국무차관보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 미국을 방문해 주도록 요청했다.
  
   결국 이승만의 방미계획은 구체화돼 갔고 1954년 7월 14일, 엘리스 브리그스 주한 미국 대사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아이젠하워의 초청장을 전달하자 이승만은 訪美를 최종 결심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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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外交와 弘報의 達人 (3)
  
  “국가홍보는 외교관만이 아닌 국민의 몫”
  
   “과거 40년간 우리가 국제적으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은 세계 모든 나라가 우리와 접촉할 기회가 없었던 까닭입니다. 세계가 일본인들의 선전만을 듣고 우리를 판단해 왔었지만 지금부터는 우리가 우방들의 도움으로 우리 자리를 찾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우리말을 할 수 있고, 우리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세계 모든 나라는 남의 말을 들어 우리를 판단하지 말고 우리가 하는 일을 보고 우리의 가치를 우리의 중량대로만 판정해 주도록 요청하는 바입니다.
  
   “우리 정부와 민중은 해외 선전을 중요히 여겨서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각국 남녀에게 우리의 올바른 사정을 알려 줘야 합니다. 이렇게 서로 간에 양해를 얻어야 정의가 상통해 교제가 친밀해질 것이며, 이는 우리의 복리만 구함이 아니요, 세계 평화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 1948년 초대 대통령 취임사 중에서
  
   이승만(1875~1965) 대통령은 1948년부터 1960년까지의 재임기간 중에 전부 6차례 외국을 방문했다. 1948년 10월, 맥아더 장군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한 것을 시작으로 일본만 세 차례 방문했으며, 6·25전쟁 중인 1953년 1월 자유중국 방문, 1954년 7월 미국 방문, 그리고 1958년 11월 월남 방문이 그것이다.
  
   요즘은 정상외교가 매우 잦아졌지만 반세기 전만 해도 외교활동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으며, 초청국이나 방문국 모두 汎국가적인 행사였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의 미국 방문은 우리 대한민국 국가원수로서는 첫 미국 방문이었고, 더구나 방문 형식이 정상외교의 형태 중 가장 높은 격식의 의전이 따르는 國賓방문(정상외교에는 국빈방문 이외에 공식방문, 실무방문 등이 있음)이었다.
  
   국빈방문의 경우 통상적으로 21발의 예포 발사, 양국 국가 연주 등 공식 환영행사, 국빈만찬(남자는 검정 혹은 흰색 나비넥타이와 연미복 착용), 의회 방문 및 연설, 정상 간 선물 교환, 양국 간 공연 등 문화교류 행사가 수반된다. 때문에 적어도 방문이 시작되기 2~3개월 전부터 초청국과 방문국의 외교부와 공관에서는 방문 일정 등 세부사항에 대해 준비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의 미국 國賓방문의 경우, 준비 기간이 겨우 1개월 남짓밖에 되지 못했다. 물론 韓美 양국 간에는 6·25전쟁 휴전 이후 1년 이상 방미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나 실제로 李 대통령의 訪美 의사가 미국 측에 전달된 것은 1954년 6월 15일 제네바 회의가 성과 없이 끝나고,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양유찬 駐美 한국대사가 미국의 수도 워싱턴으로 귀임한 이후였다.
  
   사정이 이러하니 준비 기간이 짧을 수밖에 없었지만 이승만 대통령과 경무대, 외무부, 그리고 주미 한국대사관, 美 국무부는 한미 양국 간의 첫 국빈방문 행사를 차분하고 철저하게 준비했다. 당시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실무를 총괄했던 한표욱 공사는 그때의 준비상황을 ‘이승만과 韓美 외교’(1996)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해 놓았다.
  
   “당시 외부부가 업무를 관장했으나 모든 훈령은 거의 李 대통령이 직접 내렸다. 대통령 연설은 자구 하나하나를 경무대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대통령이 타고 올 비행기를 물색하고 교섭하는 문제도 쉽지 않았다. 우리도 대한민국항공사(KNA)가 있었으나, 비행기가 낡은 고물이었다. 미국은 최신형 공군기를 내줬다. 비행기는 100명이 탈 수 있었고 機內에서 서울과 교신할 수 있는 통신시설도 있었다.”
  
   사실 이승만은 외교, 특히 홍보에 있어서 대한민국은 물론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達人이었다. 망명 시절 40여 년간 그의 외교와 홍보활동은 접어 두고라도 1948년 7월, 초대 대통령 취임사는 달인으로서의 탁월한 재능을 잘 증명해 주고 있다.
  
   “과거 40년간 우리가 국제적으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은 세계 모든 나라가 우리와 접촉할 기회가 없었던 까닭입니다. 세계가 일본인들의 선전만을 듣고 우리를 판단해 왔었지만 지금부터는 우리가 우방들의 도움으로 우리 자리를 찾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우리말을 할 수 있고, 우리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세계 모든 나라는 남의 말을 들어 우리를 판단하지 말고 우리가 하는 일을 보고 우리의 가치를 우리의 중량대로만 판정해 주도록 요청하는 바입니다.”
  
   “우리 정부와 민중은 해외 선전을 중요히 여겨서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각국 남녀에게 우리의 올바른 사정을 알려 줘야 합니다. 이렇게 서로 간에 양해를 얻어야 정의가 상통해 교제가 친밀해질 것이며, 이는 우리의 복리만 구함이 아니요, 세계 평화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필자는 당시 취임사에서 가장 강조됐던 부분이 바로 국가 홍보에 국민이 앞장서야 한다는 이 대목과 이에 앞서 나오는 외교에 관한 부분이라고 본다. 즉, 국가 홍보와 외교가 외교관이나 특정인의 몫이 아니라 국민 전체의 책무라는 것이다. 63년 전의 이 취임사는 우리 국가 위상이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진 오늘, 아니 대한민국이 존속하는 한 우리 국민들이 늘 되새겨 보고 실천에 옮겨야 할 명언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렇게 방문 준비가 구체적으로 마무리돼 가자 1954년 7월 14일 양국 정부는 李 대통령의 訪美를 공식 발표했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國賓방문에 대해 미국 언론은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7월 15일자 워싱턴포스트의 보도를 보기로 하자.
  
   “이승만 대통령이 다음 주에 미국을 국빈방문한다고 7월 14일 주한 미국대사관이 발표했다. 브리그스 대사는 토요일, 李 대통령 방미 준비를 돕기 위해 워싱턴으로 향할 예정이다. 李 대통령은 아이젠하워의 초청에 감사하지만 이번 訪美의 중요한 이유는 개인적인 관심사가 아니면서 한국과 미국이 적에 대한 공동조치를 취하는 데 합의한다면 자유라는 大義의 선양에 큰 진전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만은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 벌써 40년간을 미국에서 망명생활했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독립운동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다. 미국 대통령을 비롯해 여야 지도자와 미 국무부 등의 인사들을 만나기가 힘들었고, 국권을 잃은 국민으로서의 푸대접을 받을 만큼 받았다. 더구나 광복 이후 정부수립, 6·25전쟁과 휴전에 이르기까지 이 대통령에 대한 미국의 괄시는 심각했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그런 데에 주눅이 드는 위인이 아니었다. 비록 미국에 불가피하게 신세를 지고 원조는 받더라도 할 말은 하고 할 일은 해 버리는 인물이었다.
  
   좋은 예의 하나가 반공포로 석방이다. 이승만은 미국이 자신의 의사에 반해 6·25전쟁을 휴전으로 마무리하려 하자, 휴전 직전(1953년 6월 18일) 일방적으로 포로를 석방해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는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런 행동은 막가파식의 만용이 아니었다. 철저히 계산된 외교와 홍보활동이었다. 그의 말과 행동은 동양과 서양의 학문 및 교양을 두루 갖춘 당대 최고 지성인으로서의 자존심과 당당함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이승만은 만 나이 4살 때, 3개월 만에 천자문을 외는 신동이었다. 또 동양의 고전을 공부해 13살 때 과거시험에 첫 응시한 후 수년간 도전했었다. 하지만 관직에의 길이 실력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과거를 포기하고 20살의 나이에 서양학문과 문물을 배우고자 배재학당에 들어갔다.
  
   곧 이승만은 조국의 근대화에 눈을 뜨게 되며 선구적인 개혁운동에 가담한 대가로 종신형을 선고받지만, 다행스럽게도 5년 7개월간 옥살이 끝에 석방돼 1904년 11월 미국행 배를 타게 된다. 미국에서 그는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학사,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 등 전 과정을 놀랍게도 5년 만에 마쳤다.
  
   이후 무려 35년간을 미국에서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하다가 광복 후 귀국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됐고 귀국 후 9년 만에 국빈으로 초청받아 자신의 제2의 고향인 미국에 가게 됐다. 그는 앞서의 워싱턴 포스트의 보도대로 개인의 관심사 때문이 아니라, “자유라는 대의를 선양”하러 미국에 간다는 자신감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그는 당당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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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4년 7월 워싱턴 방문 (4)
  
  통일의 신념, 美 심장서 목놓아 외치다
  
   1954년 7월 14일 이승만 대통령의 국빈방문 공식 발표와 동시에 대통령 공식수행원 명단이 공개됐다. 총 27명의 명단 중에는 손원일 국방부장관, 정일권 육군참모총장(대장), 김정렬 국방부장관 보좌관(중장), 김일환 육본관리부장(중장), 최덕신 육군작전기획부장(소장), 장건식 국방부 제5국장(대령) 등 국방부 관리들이 포함됐다.
  
   군 요직이 이렇게 공식수행원 명단에 다수 포함된 것은 이 대통령 방미의 중요한 목적의 하나가 한미 군사협력 강화와 미국의 군사원조 요청에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즉, 이 대통령은 제네바 회의의 결렬에 따라 한반도의 상황이 다시 악화되고 있으므로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한반도의 통일을 앞당길 수 있는 방안을 심도 있게 논의하고 싶어 했다.
  미국 방문에 나선 이승만 대통령이 1954년 7월 26일 워싱턴 공항에 도착한 후 닉슨 부통령 주재 환영행사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1954년 7월 25일 소나기가 쏟아지던 날 오후 5시,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김포공항에서 환송식을 마치고 미국 정부가 제공한 군용기편으로 미국으로 향했다.
  
  비행기는 일본에는 절대 들르지 않겠다는 이 대통령의 고집으로 알류샨 군도의 에이댁(Adak) 섬과 시애틀을 경유해 7월 26일 오후 4시(미국 동부시간) 워싱턴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는 사열대와 환영식장이 마련됐고 미국 정부를 대표해 닉슨(Richard Nixon, 1913∼1994, 1953∼1961 : 부통령, 1968∼1975 : 대통령 역임) 부통령 내외, 덜레스(John Foster Dulles, 1888∼1959) 국무장관 내외 등 정부 고위인사, 래드포드(Arthur W. Radford, 1896∼1973) 합참의장 내외,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1895∼1993) 육군참모총장 내외 등 군 장성들이 도열해 있었다. 재미동포 100여 명도 한복에 태극기를 들고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일행을 마중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79세의 노인답지 않게 당당한 걸음으로 트랩을 밟고 내려왔다. 이때 동포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 대통령은 닉슨 부통령 내외 등 미국 측 환영인사들과 악수를 나누고, 다정하게 동포들의 손도 잡아줬다. 21발의 예포가 울리고 미군 군악대가 애국가와 미국 국가를 연주하는 동안 모두가 차려 자세로 서 있었다.
  
  무려 15분 동안 즉흥 연설
  
   이어 이승만 대통령은 닉슨 부통령의 안내로 미국 육·해·공군 의장대를 사열한 후 행사장에 마련된 마이크를 잡고 닉슨의 간단한 환영사에 대한 답사 형식으로 도착 인사를 했다. 당초 이 대통령은 짤막하게 인사를 할 것으로 예정됐으나 무려 15분 동안 즉흥 연설을 했다.
  
   그렇게 오래 연설을 했는데도 그간 국내에서 발간된 책자에는 그 내용이 무엇인지 거의 기술돼 있지 않다. 공보처에서 발간한 국문 책자 ‘이승만 대통령 방미 수행기’(1955)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영문판 ‘President Syngman Rhee's Journey to America’(1955·국내 번역판 제목 : ‘이승만 대통령 방미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President Rhee said that American ‘cold feel’ prevented the reunification of Korea during the fighting, but God Almighty will see to it that we shall carry out our program.”
  
   이 문장을 번역하자면 이렇다.
  
   “이 대통령은 도착 연설에서 미국의 ‘cold feel’이 6·25전쟁에서 한반도의 통일을 막았지만, 전지전능한 신은 우리의 계획이 기필코 성취되도록 해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
  
   이 문장에서 ‘cold feel’이라는 단어는 분명 ‘cold feet’의 오타다. ‘cold feet’이란 겁을 먹는다는 뜻이다. 즉,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이 겁을 먹어 한반도 통일을 막았다는 얘기를 한 것이다. 그런데 공보처가 그런 중대한 오타를 낸 것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공보처의 ‘cold feel’이 오타라는 것은 그때 공항에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가 1978년에 발간한 저서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에서도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올리버는 “미국이 겁을 먹어(American cold feet) 한반도 통일을 여태껏 막았다”는 이 대통령의 발언을 소개하면서 “그가 싸우려는 마음을 갖고 왔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그는 “닉슨 부통령이 이승만 박사의 뜻하지 않은 비판적인 발언에 당황해했다”고 적었다.
  
  마음속 있는 말 다 쏟아내
  
   그러나 올리버도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날 공항에는 다수의 기자들이 있었다. 이들 중 워싱턴 포스트 신문의 에드워드 폴리아드(Edward Foliard) 기자는 그때의 분위기를 매우 상세하고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1954년 7월 27일자 워싱턴 포스트 신문의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그의 기사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보통 외국의 국가원수가 워싱턴에 도착하면 외교적인 어투로 사랑의 밀어를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승만 박사도 그런 선에서 도착 인사를 준비했었다.
  
  그러나 닉슨의 환영사에 이어 공항에 마련된 마이크 앞에 선 그는 준비된 이야기를 하지 않고 그의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쏟아냈다. 그는 미국인들이 한국을 어떻게 구해줬는지,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의 남침야욕이 어떻게 좌절됐는지를 우선 설명했다. 그리고 이승만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에 우리가 조금만 더 용기가 있었다면 압록강까지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한반도의 통일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이 조금 겁을 먹어(a little cold feet) 우리는 다 차려 놓은 밥상을 차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가 한국, 미국과 유엔, 그리고 모든 자유국가들에 최상의 기회였는데 놓친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은 확실한 승리를 위한 우리의 계획이 기필코 성취되도록 보살펴 주실 것입니다.’”
  
   “이 박사는 낮은 목소리로 연설을 해서 그의 음성은 비행기 엔진의 소음 속에 묻혀 버렸다. 때문에 닉슨 부통령, 덜레스 국무장관, 그리고 다른 고위인사들은 그의 연설을 거의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스피커 앞에 있던 통신사 기자들은 그의 발언 대부분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 박사는 기대했던 것보다 상당히 오랫동안 연설했기 때문에 백악관 도착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통일막은 사람들에게 선전포고
  
   워싱턴 포스트 신문의 기사가 올리버 박사보다 더 정확해 보인다. 아무튼 이승만 박사는 겁을 먹어 한반도의 통일을 막았던 바로 그 일부 사람들과 싸움을 하겠다는 선전포고(?)를 공항에서 한 것이다.
  
   우리의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정부의 환심을 사러 미국을 방문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나 덜레스 국무장관 등 미 행정부는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에 반대하고, 어떻게든 한반도 통일을 달성하겠다고 주장하며, 전후 복구를 위해 더 많은 경제지원을 해 주도록 요청한 데 대해 골치 아파하고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李 대통령은 미국 정부의 이런 분위기에 굴복하거나 화해를 통해 실질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얄팍한 술수를 부리지 않았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공산주의의 전략에 말려든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세계 정책에 대해 공개적으로 신랄한 공격을 퍼부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의 미국 방문 목적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미 행정부의 유약한 태도에 대해 투쟁을 선언하고, 미국 국민의 여론에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호소해 보려고 방문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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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악관 國賓 晩餐 (5)
  
  아이젠하워 남북공존 암시에 이승만 共産軍 축출 의지로 응수
  
   미국 워싱턴 시는 외국의 국빈이 방문할 경우 백·청·적색의 끈이 매여 있는 놋쇠에 금도금한 열쇠를 선물한다. 전달 방식은 시청 앞에 환영식장을 마련하고 시장이 국빈에게 직접 전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경우에는 달랐다. 1954년 7월 26일 사무엘 스펜서 워싱턴 시장이 공항으로 와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열쇠를 증정했다.
  
   열쇠를 받은 李 대통령은 미소를 지으며 “내가 이 열쇠를 들고 있는 한 워싱턴으로 들어갈 때 나를 막는 사람은 없겠구먼. 내가 최대한 빨리 시내로 차를 타고 들어갈 테니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아무도 나를 못 잡을 걸”이라고 말하고는 손으로 열쇠를 흔들어 보이며 마치 어린아이같이 즐거워했다.
  
   이윽고 李承晩 대통령과 닉슨 부통령, 래드포드 美 합참의장이 탄 제1호 리무진과 퍼스트레이디 프란체스카 여사와 닉슨 부통령의 부인이 탄 제2호 리무진 등 자동차 행렬이 워싱턴 시내로 향했다. 차량 행렬은 메모리얼 브리지, 링컨기념관을 지나 수많은 인파가 양국 국기를 흔들며 환영하는 가운데 23번가와 펜실베이니아 거리를 지나 백악관 서북문을 통해 백악관 안으로 들어섰다.
  
   이승만 대통령 일행이 도착하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백악관 건물 계단에서 내려와 차에서 내리는 이승만 대통령을 영접해 계단을 다시 올라와 그의 부인에게 안내했다. 이어 아이젠하워는 다시 계단을 내려가 프란체스카 여사를 마중했다.
  
   이날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백악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저녁 8시 20분, 아이젠하워 대통령 내외가 베푸는 國賓만찬에 참석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내외는 공산침략에 맞서 싸운 李 대통령과 한국 국민에게 존경과 경의의 표시로 성대한 만찬을 마련했다.
  
   만찬회는 백악관의 국빈연회장에서 개최됐다. 연회장은 약 150명이 함께 만찬을 즐길 수 있는 고전적 향취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이날 만찬회 참석자 수는 통상 백악관의 국빈만찬 참석자 수보다 상당히 적은 총 60명이었다.
  
   한국 측에서는 李 대통령 내외를 비롯해 최순주 국회부의장, 정일권 육군참모총장, 양유찬 주미 한국대사, 임병직 주유엔 한국대사, 백두진 경제조정관 등이 참석했다.
  
   미국 측에서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내외를 비롯해 닉슨 부통령, 조셉 마틴 연방하원의장, 덜레스 국무장관 내외, 조지 험프리 재무장관 내외, 찰스 윌슨 국방장관, 로버트 앤더슨 국방차관 내외, 래드포드 합참의장 내외, 밴플리트 장군 내외, 스펠만 추기경, 주한 미 8군사령관 맥스웰 테일러 부인, 엘리스 브리그스 주한 미국대사 등이 참석했다.
  
   만찬회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환영 연설로 시작됐다. 아이젠하워는 자기가 육군참모대학 재학 중에 들었던 강의, 즉 모든 것은 변한다는 논리를 근거로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쟁이 아니라 남북한의 평화 공존을 암시하는 발언을 했다. 아이젠하워의 연설 일부를 인용해 보기로 한다.(영어학습에 관심 있는 분들을 위해 국방일보 인터넷판에 영어연설 全文과 번역문을 게시했음)
  
   “이승만 대통령님이 오늘 이 나라를 방문해 주시고, 만찬에 참석해 주신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잠시 내가 참모대학 시절에 들었던 강의를 회상코자 합니다. 당시 강사는 삶의 기본적인 특성은 변화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전쟁에서 수송 수단, 사용 무기, 물자 공급 방법 등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항상 변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소위 文明국가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규칙도 때로는 변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 다음, 강사는 결코 변하지 않는 요소가 단 하나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아무리 장구한 역사와 오랜 신화를 들춰 봐도 용기·정력·신뢰·희생정신을 찬양하지 않고 편협성·사악함·이기주의를 경멸하지 않은 경우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용기·정력·신뢰·희생정신에 충실한) 한국 국민과 李 대통령에게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국 국민들이 시련 속에서, 고통 속에서, 야수적인 공격에 의한 노예 상태에서, 용기를 갖고 용감하게 대항하는 것을 봤습니다. 미국인들이 한국 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랑거리의 하나입니다. 그런 자랑스러운 국민의 용기를 위해, 한국의 번영과 미래의 행복을 위해, 여기 참석하신 한국 국민들의 대표이신 李 대통령과 함께 나는 축배를 제안합니다.”
  
   이어 이승만 대통령이 답사를 했다. 李 대통령은 아이젠하워의 연설에 대해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고, 6·25전쟁에서 보여 준 미국의 지원에 대해 아래와 같이 고마움을 표시했다.(영문연설 全文과 번역본은 국방일보 인터넷판에 게시)
  
   “오늘 밤 한국을 위해서 이같이 영광스러운 자리가 마련된 데 대해 내 개인적으로나 우리 국민의 감회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찹니다. 친구들이여, 이 자리에 있는 우리 일행이나 한국에 있는 우리 국민의 가슴속에는 여러분과 미국 정부 그리고 미국 국민에게 고마움과 감사의 마음이 넘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 줬으면 합니다. 여러분은 한국 국민의 용감성에 대해서 말들을 합니다. 한국군 장병들, 물론 용감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우리는 우리 영토가 외래 공산군에게 점령돼 있는 한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육·해·공군의 장병들뿐만이 아니라, 남녀 또는 지위의 상하를 막론하고 나라를 통일하지 않으면, 공산 침략군을 우리 땅에서 몰아내지 않으면 우리가 살 수 없다는 점에서 온 국민이 모두 하나가 돼 있습니다.
  
   “바로 이런 정신이 한국인으로 하여금 아시아 최대의 반공 방위력을 자랑하는 군대를 갖도록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한국군 장병들은 기꺼이 죽을 각오가 돼 있습니다. 그들은 기꺼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돼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왜 그렇게 용감한 것일까요? 왜 그들은 목숨을 던질 각오가 돼 있을까요? 그 이유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들은 거의 40년간 외부의 통치하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외래의 군국주의 통치하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경험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확신을 심어 줬습니다. 독립해 우리 정부를 갖지 않고는 우리 생명이 우리 것이 아니요, 자유를 가진 것도 아니라는 확신 말입니다.
  
   “바로 헨리 패트릭이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말한 것과 같이 말입니다. 한국인들은 놀라운 투쟁정신을 갖고 있으며, 모두가 놀라운 병사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원조가 없었다면 사정은 매우 달라졌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여러분의 장병들이 한국에 와서 그들을 훈련시키고 사기와 정신을 앙양시켜 줬으며, 무기까지 줬습니다. 여러분이 준 원조가 그들에게 어떤 성과를 이뤄 놓았는지 보십시오. 내가 일선을 시찰할 때면 그들은 모두 기립해 나를 맞이합니다. 모든 장병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두 미국 제품으로 무장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의 젊은이들을 강력한 병사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날 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가 백악관에서 머물도록 각별한 배려를 했다. 수행원들은 영빈관인 블레어 하우스와 헤이 애덤스 호텔에 나뉘어 투숙했다. 특히 아이젠하워는 이승만 대통령 내외에게 링컨 대통령이 사용하던 침대에 잠자리를 마련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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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ext of President Eisenhower‘s Remarks
  아이젠하워 대통령 연설문(1954.7.26)
  
   Mr. President, Mrs. Rhee, Your Eminence, my friends:
   이 대통령님, 여사님, 추기경님, 나의 친구여러분,
  
   I am sure there is no one at this table who does not have, Mr. President, a feeling of distinction in your visit to this country and your presence at this table. I think it is not difficult to discover the reasons for this sense of pride and distinction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서 대통령님이 이 나라를 방문해주시고, 만찬에 참석해주신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분은 없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이렇게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느낌을 갖는 이유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고 봅니다.
  
   I hope I will not be considered guilty of filibustering if I ask you for a moment to go back with me to a lecture I heard in my staff college days.
   잠시 내가 참모대학시절에 들었던 강의를 회상코자 하오니, 바라건대 만찬 진행을 방해하는 죄를 짓는 행위로 간주하지는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The lecturer was pointing out that the principle characteristic of life is change. And since he was talking about war, he talked about the changing factors that the fighting man had to consider in his calculations as to war.
   당시 강사는 삶의 기본적인 특성은 변화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전쟁에 관한 얘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투하는 군인이 전쟁에서 고려해야만 하는 변화의 요인들에 대해 말했던 것입니다.
  
   He pointed out that there are constant changes in the means of transportation, in the weapons to be used, in methods of supply─everything that we do─and the rules that sometimes obtain among so-called civilized nations are subject to change.
   강사는 전쟁에서 수송수단, 사용무기, 물자공급방법 등,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항상 변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소위 문명국가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규칙들도 때로는 변한다고 지적했습니다.
  
   And then he pointed out that there is one factor that is completely unpredictable, completely unreliable and untrustworthy and yet never changes─only one─that is human nature.
   그 다음 강사는 완전히 예측불가능하고, 전혀 믿을 수도 신뢰할 수도 없지만, 결코 변하지 않는 요소가 단 하나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본성이라고 지적했습니다.
  
   In support of this thesis he pointed out that there is no history so old, no mythology so venerable that it does not glorify the qualities of courage or stamina or reliability or sacrifices and does not treat with contempt all of the opposites of intolerance, evil and selfishness.
   강사는 자신의 논지가 옳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즉, 아무리 장구한 역사와 오랜 신화를 들춰보아도 용기·정력·신뢰·희생정신을 찬양하지 않고, 편협성·사악함·이기주의를 경멸하지 않은 경우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So I think that in our feeling of pride in the Korean people and the presence here of their chief representative, we are merely responding to an age-old instinct of man to venerate these qualities that we call ennobling, that we believe are somewhat godlike in their quality.
   그러므로 나는 한국 국민에 대해, 그리고 오늘 여기 참석하신 그분들의 수석대표에게 우리가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이런 느낌을 갖는 것은 바로 인간의 고귀한 품성들과 그 품성 중에서 어느 정도 성스럽다고 믿어지는 것에 대해 존경하는 인간의 오랜 본성에 부응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And we have seen the Korean people through tribulation, through troubles, through enslavement under brutal attack, respond gallantly and with courage. It was a source of pride to Americans that with them as allies in the Western world we could join with Korea in seeing that the country should not be overrun by the invading hordes from the north.
   우리는 한국 국민이 시련 속에서, 고통 속에서, 야수적인 공격에 의한 노예상태에서, 용기를 가지고 용감하게 대항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서방세계의 동맹국으로서 미국인들이 한국인들과 손잡고, 한국을 북쪽의 침략무리들에게 전복되지 않도록 한국 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랑거리의 하나입니다.
  
   And to the courage of that people, to its prosperity, and to its future happiness, I think we may drink a toast, doing so in the name of their representative here present, President Rhee.
   그러한 자랑스러운 국민의 용기를 위하여, 한국의 번영과 미래의 행복을 위하여, 여기 참석하신 한국 국민들의 대표이신 이 대통령과 함께 나는 축배를 제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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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ext of President Syngman Rhee’s Remarks
  이승만 대통령 연설문(1954.7.26)
  
    The honor which has been paid to Korea tonight is beyond any words of mine to express my feelings, and those of my people. I want you, my friends, to know that the hearts of Koreans who are here in our party and the hearts of all the Koreans in Korea are full of gratitude and thanks to you and the American Government and the American people.
   오늘 밤 한국을 위해 이같이 영광스러운 자리가 마련된 데 대해, 나 개인적으로나 우리 국민의 감회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찹니다. 친구들이여, 이 자리에 있는 우리 일행이나 한국에 있는 우리 국민의 가슴속에는 여러분과 미국 정부 그리고 미국 국민에게 고마움과 감사의 마음이 넘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합니다.
  
   I would like very much to tell something about what American aid and assistance have done, what the American fighting men have done in Korea, to save at least half of that war-torn peninsula. And I would like to say how much the American citizens, individually and collectively, have done in the way of relief work for Koreans.
   나는 미국의 원조와 지원이 한국에서 무엇을 이뤄 놓았는지, 그리고 미군 장병들이 전쟁으로 반쪽이 된 한반도의 절반이나마 구하기 위해서 행한 일에 대해 얘기하고 싶습니다. 또한 얼마나 많은 미국인들이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한국인들을 구호하는 사업에 기여했는지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But I can‘t. I don’t know how to start, or how to end. All that ask of you, my friends, is to know that we are grateful to you for everything you have done, and for everything that you are doing. We are grateful. And we will remain grateful.
   그러나 그럴 수가 없습니다.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어떻게 맺어야 할지 모르겠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이여, 단지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모든 일에 대해서, 그리고 여러분들이 지금 우리를 위해 하고 모든 일에 우리가 고마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감사한 마음을 가질 것입니다.
  
   You talk about bravery of the Korean people. The Korean fighting men, yes. We thank God. We are willing to fight to the finish, as long as there are territories still occupied by a foreign Communist army.
   여러분은 한국 국민의 용감성에 대해 말들을 합니다. 한국군 장병들, 물론 용감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우리는 우리 영토가 외래 공산군에게 점령되어 있는 한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And not only soldiers of the Army, Navy and Air Force but the people, the men and the women regardless of rank and file, are all one in that we cannot live unless we unify our country, unless the aggressive Communist armies are out of our land.
   육해공군의 장병들뿐만이 아니라, 남녀 또는 지위의 상하를 막론하고 나라를 통일하지 않으면, 공산침략군을 우리 땅에서 몰아내지 않으면 우리가 살 수 없다는 점에서 온 국민이 모두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That same spirit proves that the Korean people have an army known to be the biggest anti-Communist defensive force in Asia.
   바로 이런 정신이 한국인으로 하여금 아시아 최대의 반공 방위력을 자랑하는 군대를 갖도록 했습니다.
  
   Yes, I say that they are willing to die they are willing to give their lives. Why are these Koreans so brave? Why are they so willing to give up their lives? I will tell you why.
   그렇습니다. 한국군 장병들은 기꺼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기꺼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왜 그렇게 용감한 것일까요? 왜 그들은 목숨을 던질 각오가 되어 있을까요? 그 이유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합니다.
  
   Their country was occupied by an alien rule for nearly forty years. They have experienced how terrible it is to live under a foreign military rule. That gave them the conviction that unless we have our independence and our own government, our lives are not ours and we have no freedom, just as Patrick Henry said, he would rather die than live as a slave.
   그들은 거의 40년간 외부의 통치하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외래의 군국주의 통치하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경험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확신을 심어줬습니다. 독립하여 우리 정부를 갖지 않고는 우리 생명이 우리 것이 아니요, 자유를 가진 것도 아니라는 확신 말입니다. 바로 헨리 패트릭이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말한 것과 같이 말입니다.
  
   That is feeling there. But that is not what I mean to say. The Koreans must have a wonderful fighting spirit, they are wonderful soldiers, and all that. But without your aid, things would have been quite different. Fortunately, your fighting men came over there, trained them, helped them build up their morale and their spirit, and gave the weapons.
   한국의 분위기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한국인들은 놀라운 투쟁정신을 갖고 있으며, 모두가 놀라운 병사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원조가 없었다면, 사정은 매우 달라졌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여러분의 장병들이 한국에 와서 그들을 훈련시키고 사기와 정신을 앙양시켜 주었으며, 무기까지 주었습니다.
  
   Look what all that has done for them. When I go over to the front lines, they are all standing up, every soldier equipped from head to foot, all from America. This is what makes Korean boys strong fighting men.
   여러분이 준 이 모든 원조가 그들에게 어떤 성과를 이뤄놓았는지 보십시오. 내가 일선을 시찰할 때면 그들은 모두 기립해 나를 맞이합니다. 모든 장병들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두 미국 제품으로 무장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의 젊은이들을 강력한 병사로 만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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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차 韓美 정상회담 (6)
  
  대한민국 대통령, 미국 대통령과 첫 정상회담
  
   링컨 대통령이 사용하던 침대에서 1박을 한 李承晩 대통령 내외는 1954년 7월 27일 아침 9시에 아이젠하워 내외, 그리고 그의 손자 손녀들의 전송을 받으며 숙소를 영빈관(블레어 하우스)으로 옮기기 위해 백악관을 나섰다. 백악관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영빈관에 이 대통령 내외가 도착한 것은 9시 15분이었다. 30분간 휴식을 취한 이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다시 백악관으로 향했다. 역사상 최초의 韓美 정상회담에 임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감회는 남달랐다. 이 대통령은 꼭 50년 전인 1904년, 30세의 나이로 미국행 배를 탔다. 고종 황제의 밀서를 테오도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런 만남은 실현되지 못했고 이후 40년간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미국 대통령은 고사하고 각료급 인사와의 접촉도 힘들었다.
  
   그런데 이제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미국 대통령과 처음으로 공식 대좌를 하게 된 것이다. 사실, 李 대통령은 1952년 12월 아이젠하워와 한국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당시 대통령 당선인 신분이었고 둘 사이의 만남은 휴전에 대한 서로의 입장 차이 때문에 매끄럽지 못했다.
  
   그 후 휴전이 성립되고 제네바회의가 성과 없이 끝나자 李 대통령은 미국의 정치지도자들, 특히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할 말이 많았다. 이 대통령은 아이젠하워의 천진난만한 웃음 뒤에 가려진 이중적인 인격에 대해 신뢰하지 않고 있었다. 아이젠하워가 군인 출신의 정치인답지 않은 인기에 영합하는 유화주의자라는 사실을 이승만은 간파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7월 27일 오전 10시 백악관 회의실로 들어섰다. 그는 한편으로 역사적인 頂上회담을 한다는 흐뭇한 감회를 가졌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과 스타일이 너무 다르며 인상이 별로 좋지 않은 미국 대통령과 대좌해야 하는 불편한 심기를 감출 수 없었다.
  
   우리 측에서는 손원일 국방부장관, 백두진 경제조정관, 양유찬 대사,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이 이 대통령을 보좌했고, 미국 측에서는 아이젠하워를 비롯해 덜레스 국무장관, 윌슨 국방장관, 브리그스 주한미국대사, 타일러 우드 경제조정관 등이 참석했다.
  
   참고로 이 회담에 참석했던 손원일 국방부장관은 우리 해군을 창설해 행동과 정신으로 큰 가르침을 줬기에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의 홍보에 대한 식견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손원일 장관이 이승만 대통령을 수행해 미국 방문을 끝낸 지 2개월 만에 국방부는 ‘방미-리승만 대통령 연설집’(1954년 10월· 사진)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공보처에서 ‘President Syngman Rhee's Journey to America’와 ‘리승만 대통령 각하 訪美 수행기’를 발간하기 수개월 전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대한민국 대통령의 해외순방 기록을 최초로 남긴 것은 홍보를 관장하던 공보처가 아니라 국방부였다.
  
   이 책의 머리말에서 손원일 장관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한 목적은 우리 국민과 약소민족의 소리를 호소함으로써 양보에 양보를 거듭하는 자유 진영의 새로운 각성을 촉구함이었다. 이 연설문집을 간행하는 목적은 (李 대통령의 연설을 통해서) 우리 스스로의 목소리를 다시금 상기하며 조국 통일을 싸워서 얻어 내기 위해 더욱더 분발하자는 데 있다.”
  
   특히, ‘訪美-리승만 대통령 연설집’은 제목처럼 연설문과 사진만을 수록했지만 공보처에서 발간된 책자에는 보이지 않는 귀중한 자료인 ‘한미 공동성명’과 ‘중립감시위원회 철수 요구에 대한 성명서’가 국문과 영문으로 수록돼 있음을 알려 둔다.
  
   孫元一 장관이 이렇게 공보처보다 연설문집을 먼저 만든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단순히 대통령을 수행만 하지 않았다. 오히려 韓美 정상회담에서 한국 측 의제를 마련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등 대통령 방미에 관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었다.
  
   孫 장관은 회담에 앞서 1) 韓日 공동방위체제문제, 2) 미국의 對 한국 지원증가와 군사원조 및 민간원조 분리문제 등에 관한 의제를 마련하고, 3) 일본 문제에 있어서 미국과의 의견이 엇갈리더라도 회담을 결렬시켜서는 안 될 것이라고 李 대통령에게 보고했었다고 한다.
  
   韓美 양국 대표가 백악관 회의실의 타원형 테이블에 마주앉자 이승만 대통령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제네바회의가 예상대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앞으로 어떤 수를 써서라도 북한에 주둔하고 있는 100만 중공군을 철수시켜야 합니다. 늦기는 했지만, 미국의 유럽 중심 세계 전략을 이제라도 수정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지금은 아시아의 安保에 대한 배려가 절실한 시점입니다.”
  
   이렇게 미국의 세계 전략의 부당성을 지적한 李 대통령은 이어서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 및 경제원조를 역설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구체적으로 답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문제는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좋습니다”라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함으로써 李 대통령의 입장에 대해 유보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이어 화제가 韓日 국교정상화 문제로 넘어가자, 이승만 대통령은 크게 화를 내며 언성을 높였다.
  
   “한일회담의 일본 수석대표 구보다라는 자가 일본의 한국 통치가 유익했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당신네는 알고 있는가? 이런 성의 없는 자들과 어떻게 國交를 정상화하라는 말인가?”라고 신랄하게 따졌다.
  
   회의장의 분위기가 긴장되고 무거워지자 아이젠하워가 덜레스 국무장관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덜레스는 즉시 구보다의 망언으로 한일회담이 결렬됐다고 보고했다.
  
   여기서 잠시 구보다 발언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1953년 10월 15일 개최된 제3차 한일회담 재산청구권분과위원회 제2차 회의에서 일본 측 수석대표였던 구보다 간이치의 발언은 예나 지금이나 문제가 되는 한일관계 전반에 관한 일본인들의 시각을 잘 대변하기 때문이다.
  
   이 회담에서 구보다의 발언은 다음과 같다.
  
   “한국 측에서 對日청구권을 주장한다면, 일본으로서도 대한청구권을 주장할 수 있다. 일본은 조선의 철도나 항만을 만들고 농지를 조성했으며, 대장성이 당시 매년 많은 돈을 들였는데 많게는 2000만 엔을 내놓은 해도 있었다. 이것들을 돌려달라고 주장해서 일본 측의 對韓청구권과 한국 측의 對日청구권과 상쇄하면 되지 않겠는가?”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내가 외교사 연구를 한 바에 따르면 당시 일본이 한국에 가지 않았다면 중국이나 러시아가 들어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세계정책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비판에 이어, 韓日 국교정상화에 대한 미국 측의 입장과 우리 측의 입장 간에 현격한 차이를 보인 제1차 한미 정상회담은 별다른 소득 없이 1시간 반 만에 폐회됐다. 역사적인 회담이었지만 회담에 임하는 兩國 간, 아니 양국 지도자 사이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거리감이 존재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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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덜레스 국무장관과의 회담 (7)
  
  反共보다 日에 대한 적대감이 더 큰 `李承晩'
  
  1954년 7월 27일 오전 11시 30분, 아이젠하워와의 역사적인 제1차 韓美 정상회담을 마친 이승만 대통령은 영빈관으로 돌아와 과거 워싱턴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만났던 방문객들을 사적으로 접견하며 오찬을 함께 했다. 오후 2시, 李 대통령은 美 국무부로 가서 덜레스(John Foster Dulles, 1888∼1959) 국무장관과 회담을 가졌다. 덜레스는 19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국무장관으로 발탁돼 1959년 대장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아이젠하워로부터 가장 신임을 받는 각료였다. 그는 종교적인 신념에 따라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심을 가졌다. 상대의 의견이나 여론에 따르기보다는 상대를 설득시키고 여론을 주도해 나가는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국제법률가로서 조약의 가치에 대해 강한 신념을 가졌던 인물이다.
  
  덜레스 국무장관과의 회담
  
   특히 덜레스의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감은 그의 외교정책 근간을 이루는 것이었다. 미국은 소련의 어떠한 침략에 대해서도 ‘대량 핵 보복’으로 응수할 것이라고 한 그의 발언은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덜레스 장관은 그의 성격대로 이승만 대통령과의 회담에서도 일방적으로 미국의 세계전략, 對 한국정책을 설명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유진영의 집단 안전보장체제 확립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덜레스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중앙조약기구(CENTO), 중동에서의 대소련군사조약기구, 앤저스(ANZUS : 호주·뉴질랜드·미국 간의 공동방위기구) 등을 예로 들면서 동북아시아에도 이들과 유사한 기구를 만드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일본까지 포함시키는 태평양·아시아조약기구(PATO)를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덜레스의 얘기를 경청하던 이승만 대통령은 태평양·아시아조약기구 얘기를 듣고는 즉각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李 대통령은 일본이 개입하는 집단 안보체제는 극히 위험한 발상이라면서, 일본이 한국에 발을 다시 들이는 것은 한국의 독립을 위태롭게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승만은 덜레스보다도 더 반공적인 인물이었지만 그에게는 우리를 침탈해 근대화를 지연시켰던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 反共보다 훨씬 더 우위에 있었다.
  
   6·25전쟁 초기에 우리의 戰勢가 불리하자 미군 고위인사들 간에 대만이나 일본군을 투입하면 어떻겠느냐는 견해가 대두됐었다. 이 소문을 들은 이승만 대통령은 노발대발하면서 “만일 일본 군인이 단 1명이라도 우리 땅에 발을 디디면 한국군은 북한과 중공군을 향하고 있던 총부리를 일본군에 돌리게 될 것”이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덜레스도 물론, 이승만 대통령의 이 같은 對일본 강경 자세를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얼른 말꼬리를 돌려 미국의 핵 우위를 강조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그러나 李 대통령의 불편한 심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덜레스 국무장관 주최 만찬회
  
   이날 저녁 8시, 덜레스 국무장관 내외는 이승만 대통령 내외를 비롯한 우리 공식 수행원들을 위한 만찬을 베풀었다. 만찬회에는 우리 측 인사 이외에 미국 각료, 상하원 의원, 이승만 대통령과 각별한 친분관계에 있는 스펠만 추기경, 미군 장성, 언론사 발행인, 국무부 또는 국방부 고위관리 50여 명이 초대됐다.
  
   만찬 행사는 앤더슨 하우스(Anderson House)에서 개최됐다. 앤더슨 하우스는 워싱턴 중심부인 듀퐁 서클에 위치한 미국과 이탈리아의 건축양식이 조화를 이룬 고색창연한 건물이다. 이 건물은 신시내티협회(The Society of Cincinnati) 소유의 건물이며, 1905년 완공된 이후 주로 외교적인 사교 모임에 이용되고 있다. 1783년 미국 독립전쟁의 이상과 동지애를 기리기 위해 발족한 신시내티협회는 미국과 프랑스의 저명인사들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대표하는 사교 모임의 하나다.
  
   덜레스는 이날 오후 회의에서 서먹했던 이승만 대통령과의 관계를 만찬회에서 화해의 분위기로 일신하고자 나름대로 노력했다. 덜레스는 이승만 대통령을 참석자들에게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은 멘트를 덧붙였다.
  
   “연로하신 李 대통령께서 미국을 방문하시게 되면 어떻게 기쁘게 해 드릴까 나름대로 궁리를 했습니다. 좋은 방법이 없던 차에 문득 지난해 李 대통령께서 저희에게 보내 주신 반달곰 한 쌍을 떠올렸습니다. 현재 워싱턴 국립동물원에 있는 반달곰 2마리를 백악관에 데려다가 대통령님께 보여 드리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즉시 동물원에 확인해 봤으나 그간 너무 크게 자라서 데려올 수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무튼, 대통령님께서 이 곰들처럼 노경에 들어 더욱 원기 왕성하시니 기쁩니다.”
  
   이 말은 들은 李 대통령은 즉석에서 응수했다.
  
   “내가 기증한 곰들을 기억해 주니 고맙습니다. 그런데 어떡하죠? 나도 지금 동물원의 우리 안에 들어 있는 곰과 같이 행동의 자유가 없는 것을 느낄 때가 자주 있답니다.”
  
   李 대통령의 발언으로 장내에는 폭소가 터졌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자신의 방식대로 통일을 이루지 못하는 답답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이렇게 즉각 화답하는 기발한 지혜의 소유자였다. 이어서 이 대통령은 따끔한 말을 덧붙였다.
  
   “미국 정부와 정치 지도자들에게는 공산 침략자들에 대해 더욱 단호하고 적극적인 방침과 전략이 필요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반달곰 기증에 얽힌 사연
  
   이야기가 나온 김에 반달곰에 대한 사연을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1953년 초, 국군 장병들이 강원도에서 가슴에 하얀색 V자가 새겨진 반달곰 한 쌍을 포획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선물했다. 그는 수개월 곰을 키우다가 문득 주미 한국대사관으로 電文을 보냈다. 워싱턴 국립동물원장에게 곰 기증의사를 전달하고 결과를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워싱턴 국립동물원장 윌리엄 맨(William M. Mann, 1886∼1960) 박사는 李 대통령과 막역한 사이였다. 워싱턴 망명 시절 이승만은 자신이 살던 집 바로 인근에 있던 동물원을 자주 찾았고, 맨 박사와 사귀었다. 社交의 달인으로서의 이승만의 면모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1년 후 나타난다.
  
  1949년, 우리 어부로부터 수명이 수백 년이 넘는 거북을 선물 받은 이 대통령은 주미 한국대사관을 통해 맨 박사에게 그 사육 방법을 물어봤다. 그런데 그렇게 거대한 거북이는 사육할 방법이 없다는 말을 듣고 거북이를 방류한 적이 있다.
  
   이후 4년 만에 다시 이승만은 맨 박사에게 반달곰 기증의사를 전달했고, 맨 박사는 이를 쾌히 수락했다. 1953년 6월, 이승만은 사랑했던 곰들을 워싱턴으로 보냈다. (1953년 6월 23일 ‘대한뉴스’) 곰을 미국에 데리고 간 인물은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 곽영주(1924∼1961, 후일, 부정선거 주동자로 교수형에 처해졌음)였다. 미국 언론은 콜라를 잘 마시는 2마리의 반달곰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이 곰을 미국에 보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그는 곰의 가슴에 새겨진 V자를 강조해 한국 국민 결사항전의 의지를 미국인들에게 과시하고 싶었다고 측근들에게 털어놨다. 하지만, 이승만이 무엇을 의도했든 한 쌍의 반달곰이 워싱턴 동물원에 들어간 지 꼭 1개월 만에 6·25전쟁은 휴전을 맞게 됐다.
  
  ·1954년 李承晩 대통령의 미국 여행 이야기(中)
  ·1954년 李承晩 대통령의 미국 여행 이야기(下)
[ 2012-01-01, 14:0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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