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오늘 KAL007점보를 격추, 269명을 죽인 소련 조종사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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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대한항공 007편 점보기가 사할린 상공에서 소련 미그機의 미사일 공격으로 격추되어 269명이 사망한 지 3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 사건은 冷戰 시대에 일어나 많은 미스터리를 남겼다. 냉전이 끝나는 과정에서 소련이 확보하였던 블랙 박스를 공개하고 미사일을 쏜 미그기 조종사의 증언이 나와 의문이 상당부분 해소되었다. 가해자인 소련 전투기 조종사 오시포비치 중령을 인터뷰한 월간조선 2003년 11월호 기사를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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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자 20년 만의 최초 인터뷰-KAL 007기 격추 소련 요격기 조종사 오시포비치

KAL 007편 점보기를 격추, 269명을 죽인 소련 요격기 조종사 오시포비치는 한국 유족들에게 사과했다

鄭昺善  조선일보 기자         

     
007機의 운명은 달라질 수도 있었다.
꼬리날개의 로고 조명등을 끄지 않았더라면


『엔진과 꼬리에 미사일 두 발 명중, 불길에 휩싸여 나선형을 그리며 추락했다. 여객기로 알았다면 격추명령에 이의 제기했을 것』

『공중에서 KAL 007기를 계속 추적하는 과정이었고 어느새 결국 사할린 항구도시인 네벨스크市 상공에까지 이르렀다. 이 순간이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사할린 해상이 아니라 네벨스크 상공이었다. 관제소로부터 두 번째로 「격추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그 순간, 나는 전투기 속도를 바짝 내어 비행기 앞으로 타원을 그리면서 회전한 뒤 미사일을 발사했다. 처음에는 熱유도 미사일을 발사해 날개 쪽에 달린 엔진 쪽에 명중했고, 두 번째는 방사능 미사일을 발사해 꼬리 부분에 명중했다. 처음 미사일을 발사했을 때 폭발음에 이어 섬광, 후폭풍 때문에 눈을 감았다. 약 0.5초의 순간으로, 눈깜짝할 새였다. 첫 미사일 발사 직후 폭발 여부를 감지하지 못했고, 2차 미사일을 발사한 뒤 미사일이 비행기에 명중하는 모습을 보았다.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이는 모습을 본 뒤 비행기지가 있는 소콜 기지로 기수를 틀었다. 그러고 나서 「목표물 격추, 임무 완수」라고 지상관제소에 보고했다』
269명의 생명을 앗아간 사람

月刊朝鮮이 1993년 7월호에 보도한 KAL 007기 관련 기사를 놓고 인터뷰에 응한 오시포비치.
  대한항공(KAL) 007機(기)가 격추된 지 20년. 기자는 당시 007기를 격추했던 소련군 조종사 겐나디 오시포비치(59)와 인터뷰하는 데 성공했다. 그와의 인터뷰는 피해자인 한국의 기자로서는 처음이었다. 20년 동안 그의 육성을 직접 들은 한국 기자는 없었다.
 
  인터뷰는 KAL 007기 피격 20주년을 맞아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추진됐다. 영문도 모른 채 숨져간 269명의 탑승객과 승무원들의 유가족들을 위해서라도 인터뷰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세월이 흐른 채 그냥 역사 속에 묻히고, 국민들의 뇌리에서 잊혀 간다는 것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 궁금증을 해소하는 게 당연하다는 확신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를 만난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오랫동안 그 방법을 두고 고민해 왔다.
 
  오시포비치를 만나기까지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가 과연 지난 세월 동안 어디에서 어떻게 어떤 기억 속에서 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소재를 알아낸다는 것도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사건이 발생한 지 20년이 지나 그를 찾아 낸다는 것은 여간 복잡한 일이 아니었다. 그를 추적하는 것은 하나씩 단서를 잡아 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어디선가 그와 관련된 소식들이 들려오면 기록하는 방법도 동원됐다. 주소나 전화번호도 어렵게 추적해야 했다. 그러나 KAL 007기 피격 20주년을 맞아 우연하게도 친분이 있는 知人을 통해 오시포비치의 주소와 연락처를 얻을 수 있었다.
 
   KAL 007기가 격추된 지 정확히 20주년이 되는 지난 9월1일에도 그와의 인터뷰를 위해 수차례 전화를 했지만, 통화는 쉽지 않았다. 겨우 가족들과 몇 차례 통화를 한 뒤 방문 일자와 시간 등을 미리 통보한 뒤 인터뷰 약속을 잡았다. 그는 러시아 남부 黑海(흑해)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크라스노다르市 주변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크라스노다르 시내가 아니고 그곳에서도 약 150km 떨어진 「마이코프」라는 곳에 살고 있었다. 전화 통화를 하며 『어떻게 가야 하느냐』고 묻자 『비행기, 버스, 택시를 차례로 타고 오라』고 말했다. 설명하는 사람은 쉬울지 몰라도 그 지역의 모든 것에 낯선 기자에게는 당혹스러웠다. 일단 메모를 한 뒤 地名만은 정확히 적었다.
 
  10월3일 크라스노다르行 비행기를 탔다. 모스크바에서 크라스노다르까지는 비행기로 두 시간이 소요됐다.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뭔가 새로운 사실을 밝혀질 수 있기를 기대했다. 기내에서 준비해 간 인터뷰 자료를 다시 한 번 챙기고 질문을 준비했다. 1993년 6월15일 「국제민간항공기구(ICAO)가 발표한 KAL 007기 피격 관련 재조사 보고서」도 다시 읽었다. 준비한 자료들과 ICAO 보고서를 반복해서 읽었다. 궁금한 것은 정확히 질문하고 답을 받아내야겠다는 생각에서 애매한 상황이 표현된 문구는 줄을 그어 가며 정리했다.
 
 
 
 백발이 성성한 시골 사람
 
   크라스노다르는 모스크바와 기온차가 많이 났다. 도착 당일 섭씨 20도를 오르내렸다. 섭씨 10도 정도의 모스크바 날씨를 감안해 입은 옷들은 거추장스럽고 덥고 땀이 날 정도였다. 기자가 탄 비행기가 도착하자마자 때마침 이곳을 방문했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이륙했다. 공항에는 경호원들이 곳곳에 있었다.
 
  저녁시간에 도착했지만 거리 곳곳에는 삼성과 LG 광고판이 나붙어 친근감이 들었다. 이곳에 사는 러시아인은 전체 인구의 약 20%에 불과했다. 카프카스 산맥에서 멀지 않은 곳이고 체첸에서도 멀지 않은 곳이라, 체첸人 등 카프카스 민족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인지 다양한 민족들이 어우러져 살고 있었다. 무엇보다 흑해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탓에 날씨가 좋아 天惠(천혜)의 穀倉(곡창)지대로 각광받는 곳이다. 도심 전체가 나무로 뒤덮인 녹색 도시였다.
 
  10월4일 오전 일찌감치 아우디 승용차를 렌트해 마이코프로 향했다. 시내에서 교외로 약 2시간을 자동차로 달려야 했다. 크라스노다르 시내의 좁고 긴 도로를 빠져나오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마이코프는 우리로 치면 시골 읍내쯤 되는 곳이다. 도로는 비교적 포장이 잘돼 있어 속도를 내는 데 별 문제가 없었다. 수시로 시속 180km를 넘게 달리기도 했다. 인터뷰를 빨리 해야겠다는 마음이 급해서였다.
 
  마이코프라고 적혀 있는 이정표를 보면서 줄곧 내달렸다. 가는 길에 소들을 대량으로 방목하는 곳도 보았고, 길거리에서 과일을 파는 시장도 보았다. 체로노젬으로 불리는 黑色土(흑색토)로 이뤄진 끝없는 대평원이 펼쳐졌고, 해바라기 재배 현장도 보였다. 흑해가 가까워서인지 곳곳에 간척지도 보였다.
 
  마이코프에 도착한 뒤에는 「셈나차치 레트 악차브랴(17년 10월)」라 불리는 마을을 찾아가야 했다. 아마도 볼셰비키 혁명이 발생했던 1917년 10월을 상징하는 마을 같았다. 오시포비치가 살고 있는 최종 목적지였다. 마이코프에서 다시 5km 정도 차를 더 타고 들어갔다. 시내에서 마을로 가는 입구를 물어본 뒤 오시포비치가 살고 있다는 마을 「17년 10월」로 갔다. 마을은 우리로 치면 읍내에서 더 떨어진 시골 마을이었다.
 
  도로포장도 안 된 상태였고, 그냥 울퉁불퉁한 신작로가 펼쳐진 그런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일자형으로 50여 채의 시골 가옥이 늘어선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을 입구의 처음 본 집 한 채는 집짓기가 한창이었다. 마을 주민들에게 오시포비치 댁을 물었다. 36번지라고 알려 주었다. 차를 돌려 몇 집을 지나갔다. 36번지라고 적혀 있는 집 앞에 도착했더니, 오시포비치와 부인 루드밀라가 나무의자에 나란히 앉아 기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트레이닝 바지와 티셔츠 차림이었다. 둘 다 아무 꾸밈 없는 시골 사람과 같은 첫인상이었다. 오시포비치는 내년이 환갑의 나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백발이 성성한 것 같았다. 키는 170cm에 못 미처 보였지만 체중은 상당히 나가 보였다.
 
  한국에서 온 기자라고 소개했더니 아주 반색을 했다. 그는 기자를 마당으로 안내했다. 오시포비치가 살고 있는 집은 1985년 사할린에서 이사 오면서 지은 방 두 칸짜리 시골 집이었다. 지금은 그 집 바로 옆에 2층짜리 벽돌집을 새로 짓고 있었다. 지금 오시포비치에게는 이 집을 빨리 짓는 게 가장 큰 소망이다. 그는 『2년내 집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목재를 사고, 전기·가스 문제를 해결하는 게 급선무』라고 했다. 아직 기초공사와 건물 벽만 지어졌지만 겨울이 오기 전에 할 수 있는 작업을 더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학생 시절부터 조종 배워
 
   부부는 마당으로 나무책상을 들고 나와 인터뷰 준비를 했다. 나무로 된 책상 위에 하얀 천을 깔았다. 기자는 오시포비치와 마주 앉았다. 부인은 배를 내놓았다. 그리고 직접 집에서 재배한 것이라며 한사코 권했다. 한입 맛을 본 뒤 인터뷰를 시작하자 이런저런 반응을 보이며 말을 이어 갔다. 질문에 대한 그의 태도를 보니 솔직하고 진실한 모습이었다. 러시아에서 만날 수 있는 아주 순수하고 착한 인상의 할아버지와 같았다.
 
  그는 『한국에서 온 기자를 만나니 적잖이 긴장된다』면서도 『그동안 왜 한국 기자가 오지 않았는지 궁금하다』고 의아해했다. 그동안 그는 영국과 독일, 미국, 일본 기자 등을 만나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사진을 자꾸 찍자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고 했다. 이런 모습이 나가면 좀 추해 보인다며 양해를 구했다. 나는 오히려 그런 모습이 더 괜찮다며 사진을 계속 찍었다. 그러나 부인이 자꾸 옷을 갈아입으라고 성화였다. 하지만 내 주장을 받아들여 그냥 그런 순수한 모습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인터뷰는 현 생활부터 격추 당시 상황까지 20년을 넘나들며 시작했다.
 
  ―어떻게 이 마을에 와서 살게 됐는가.
 
  『사할린에서 KAL기를 격추한 뒤 5일째 전출 명령을 받았다. 당시 상관들은 어디로 가고 싶냐고 희망지를 물었다. 妻家가 있는 마이코프로 가겠다고 했다. 모스크바나 대도시가 아닌 이곳으로 가겠다고 하자 상관들이 모두 황당해했다. 춥고 눈이 많이 오는 등 별로 환경이 좋지 않은 사할린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따뜻한 남쪽이 그리웠다』
 
  ―이곳과는 어떤 인연이 있는가.
 
  『나는 시베리아 출신이다. 태어난 곳은 시베리아 케메로보라는 곳이다. 서부 시베리아 중심지인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약 260km떨어진 곳이다. 18년 동안 그곳에서 살았다. 학교 다니면서 항공클럽에 가입해 비행기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조종을 하기도 했다. 6개월 동안 이론교육과 실제 비행교육을 받았다. 학교를 졸업하기 전 지도 선생님이 「조종사가 되어 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 후 이곳에 있는 군사학교에 입학하게 됐다. 클럽 회원 16명 중 5명이 합격했고, 그 5명에 내가 들었다. 이곳 학교에 다니면서 아내를 만났다』
 
   ―부인과 결혼하게 된 과정을 말해 달라.
 
  『이곳 군사학교에서 4년6개월 동안 공부하면서 이 도시와 정이 많이 들었다. 학교에서는 군대 내무반과 같은 곳에서 생활했다.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었다. 군사학교는 학년당 150명씩이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외박을 나와, 담배를 사러 가게에 들렀다. 당시 상점 점원이었던 지금의 아내를 본 뒤 첫눈에 반했다. 그 뒤 댄스 파티 등에 아내를 초청하면서 자주 만나게 됐고, 결혼하게 됐다』
 
  ―첫 부임지는 어디였나.
 
  『1967년 군사학교 졸업 후 중위 계급장을 달고 간 첫 부임지는 極東(극동)의 「소콜로브코」였다. 「우수리스크」 하면 잘 알 것이다. 한국인(고려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다. 중국과 국경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무엇보다 고향과 가까운 기지에서 근무하고 싶었던 욕망에서 그곳을 선택했다. 기회가 되면 부모님을 뵐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사할린에서는 몇 년 동안 근무했는가.
 
  『7년 근무했다. 근무지를 다섯 번 바꿨지만 가장 오랫동안 있던 곳이기도 하다. 사할린 하늘을 날면 두 눈을 감고도 어디가 어딘지 눈에 선할 정도였다. 정도 많이 들었다. 어디보다도 긴장감이 넘치는 근무지이기도 했다』
 
 
 
 『그 일 뒤로 정신이 나간 것 같기도』
 
   ―언제 전역했는가.
 
  『1986년 전역했다. 지금은 연금으로 생활을 꾸려 나가고 있다. 공군 전투조종사들의 정년 퇴임은 소련시대부터 45세였다. 그 나이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퇴역한다. KAL기 격추사건 발생 후 강압적으로 퇴역한 것은 아니다』
 
  ―KAL기 격추 사건 발생 직후 KGB (국가안보회의)에서 입조심하라고 당부하진 않았는가.
 
  『처음에는 나 스스로 영문을 몰라 조심했다. 軍에서도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자유스러워졌다. KGB에서도 특별한 감시나 교육을 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내 마음대로 살고, 하고 싶은 말도 다 할 수 있는 입장이다』
 
  ―자녀들은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아들 알렉(27)은 직업군인으로 재직 중이다. 공군 소속이지만 조종사는 아니고, 비행기 정비병으로 일하고 있다. 아들이 아버지의 이런 모습을 보고 적잖이 실망한 듯하다. 딸 올랴(35)는 결혼해서 마이코프에서 살고 있다. 다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 週末에는 늘 찾아온다.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재미로 산다. 딸이 낳은 손자들도 있다. 손자 녀석들이 얼마나 귀여운지…』
 
   ―본인 성격은 어떤 편인가.
 
  『내 성격을 내가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아내가 대신 말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부인 루드밀라氏가 거들었다.
 
  『남편은 성격이 침착하고 차분하다. 친정어머니가 참 좋아했다. 시간이 나면 家事를 돕는 등 무척 가정적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에게 자상한 아빠였다. 20년 전 사건 발생일도 아이들과 학교에 가기로 했었다. 아들 초등학교 입학식 날이었기 때문이다. 1991년 시아버지와 1996년 시어머니가 돌아가실 때도 눈물을 많이 흘린 사람이다. 친정 어머니가 돌아가신 1993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983년 KAL기 격추 사건 이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우울해하기도 하고, 술과 담배를 많이 하는 등 심리적 변화를 많이 겪었다. 한동안 정신이 나간 사람 같기도 했고, 많이 아픈 사람같이 보이기도 했다』
 
  ―지금도 술·담배를 많이 하는가.
 
  『지금은 하지 않는다. 1996년부터 다 끊었다. 한번 기침을 심하게 하면서 기관지 문제로 고생을 했다. 그 후 술과 담배를 끊었다. 한참 때는 보드카는 2병, 담배는 1갑 반에서 2갑을 피웠다』
 
   ―요즘 하루 일과는.
 
  『군대에서 지냈던 것처럼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아침 6시쯤에 일어나 20분 정도 체조를 하고, 매일 수염을 깎고, 그러고 나서는 집안일을 시작한다. 요즘은 집 짓는 데 대부분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집 짓는 데 드는 비용도 만만찮을 것 같은데.
 
  『연금을 받아 쓰고 있지만 많이 모자란다.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푸틴 대통령을 두고 하는 말. 러시아에서는 보통 이름과 父稱을 쓴다)가 별로 돈을 주지 않는다』
 
  그는 매달 자신이 6000루블(약 200달러)의 연금을 받고, 부인 루드밀라는 1500루블의 연금을 받아 생활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돈으로 먹고 살기도 힘들고 집을 짓는 데 사용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같은 조종사지만 퇴역 후 대우나 연금 지급 등에서 러시아 조종사들은 미국과 비교가 안 된다며 혀를 찼다.
 
  그는 『미군 조종사 출신은 전역 후 연간 20만 달러가 넘는 연금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곳에 태어난 게 죄』라고 말했다.
 
  오시포비치는 1985년에 현재 살고 있는 집을 샀다. 거실과 방이 하나 딸린 가옥이었다. 그리고 1988년 집을 증축했고, 이번에는 다시 방 4개와 주차장 등이 딸린 집을 짓고 있었다. 최근에는 집 짓는 데 쓰라고 시베리아 고향에서 살고 있는 누이동생이 돈을 보내왔다고 했다. 얼마나 보내왔는가고 물었더니 1만 루블(약 40만원)이라고 말했다. 형편없는 돈이지만 그래도 시베리아에 살고 있는 누이동생의 정성이 고맙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시작한 뒤 얼마 있다가 오시포비치는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 그 사이 집 주변을 둘러보았다. 닭들이 한가롭게 마당에서 노닐고 있었다. 부부는 그리 크지 않은 고양이와 개들도 키우고 있었다. 전형적인 우리네 시골집과 같았다. 집안에는 큰 사과나무가 있었는데 사과가 떨어져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집 안쪽으로는 텃밭이 있었고 얼마 전 감자를 수확했는지 마른 잎새들이 보였다.
 
  오시포비치가 옷을 갈아입는 방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었더니 뭘 이런 것까지 찍느냐고 사진 찍는 것을 거부했다. 그가 잠자는 안방 한쪽 벽면에는 아직도 전투기 조종사에 대한 미련이 많이 남아서인지 큼지막한 수호이 전투기 사진이 걸려 있었다. 안방과 거실에는 대우와 골드스타(LG의 전신) 마크가 찍힌 TV가 각각 놓여 있었다.
 
 
 
 KAL기에 300m까지 접근
 
   옷을 갈아입고 나온 오시포비치와 KAL 007기 격추사건에 대해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그는 『그날 사건(KAL기 격추사건)이 인생을 바꿔 버렸다』고 말했다. 『그 사건은 내 마음을 오랫동안 짓눌렀고 평생 괴로움 속에 살게 했다』고 말했다. 그는 『군인으로서 정당한 일을 했으며 명예로운 임무를 수행한 군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지나고 보니 사건은 一波萬波(일파만파)가 됐다. 세상에 난리가 났었지』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는 그날 KAL 007이 피격된 당시를 마치 어제 일처럼 시간과 정황들을 모두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더구나 『9월25일이 자신의 생일로, 생일을 앞둔 시기여서 더욱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건 발생일에 전투조종사복과 군화를 신고 근무 대기 중이었다. 국경을 침범한 비행물체가 포착됐다는 소식을 듣고 출격했다. 현지 시간 새벽 5시쯤(한국시각 자정)이었다. 긴급 출동 명령이 하달됐다. 통상 긴급 발진을 요할 때 발령되는 명령이었다. 나는 특별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인 1983년에는 미국 정찰기가 러시아 영공 주변은 물론 영공을 수시로 들어왔다 나갔다 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당연히 미국 정찰기 견제 차원이 아닐까 짐작했다. 당시에는 낮 근무조와 밤 근무조가 교대로 임무를 수행했는데 그날 나는 밤 근무를 지원했었다. 밤 근무는 비교적 한가하고 비상 출격하는 횟수가 낮보다 적었기 때문이다. 보통 조종사 2명이 한조를 이뤄 근무했는데 타라소프라는 동료와 한조였다』
 
  ―당일 언제 처음으로 KAL 007기를 목격했는가.
 
  『8500m 상공에서였다. 출격 명령을 듣고 공중으로 치솟았는데 소련 영공을 침범한 비행기가 있다며 무선 연락이 왔다. 순간적으로 그 고도로 발진했다. 전투기 전방 30km 지점에 비행물체가 있다는 것을 육안으로 확인하고 접근했다. 비행기는 점멸등을 깜빡거렸다. 이날 주위는 어두웠고, 회색 안개가 끼어 있었지만 비행기를 보니 창문이 아래 위로 2중으로 된 것임을 확인했다. 보잉 747 여객기의 1층과 2층으로 된 창문이었던 것 같았지만 창문 사이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움직이는 물체가 식별되지 않았다』
 
  ―지상관제소에서 「점멸등을 깜빡거리고 있는가」고 물어 왔는가.
 
  『물어 왔다. 나는 「깜빡거린다」고 보고했다. 이는 통상 여객기나 화물기에 채택된 것으로, 전투기 조종사로서 기본적으로 확인하는 사항이다. 그러나 당시는 미국 정찰기가 수도 없이 출몰하던 때였고, 군부의 분위기도 날카로웠다. 사할린 주변 상공은 미국이 소련 방공망과 지상 레이더 기지 정보를 캐내기 위해 혈안이 돼 있는 곳으로, 말 그대로 전쟁터였다. 말이 첩보전이지, 거의 전쟁하는 분위기였다』
 
  ―비행기를 발견하고 추격을 시작했는가.
 
  『비행기에 접근을 시도했다. 가깝게는 300m까지 근접했었다』
 
 
 
 조명탄 발생해도 無반응… 미사일 두 발 발사… 엔진과 꼬리날개 명중
 
 
 
 
  ―언제 격추 명령을 받았나.
 
  『비행기가 캄차카 상공에서 사할린 반도 상공을 향해 계속 접근해 오자 「비행기를 격추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소련 영공을 침범했기 때문에 상대 비행기를 격추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돌연, 관제소에서 명령취소 지시가 내려졌다. 그리고는 비행기를 지상에 착륙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아마도 지금 생각하면 소련 군부도 비행기가 여객기였을 가능성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착륙지시를 받고 어떤 행동에 취했는가.
 
  『KAL 007기와 같은 고도로 날아가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날개 쪽에 달린 경고등을 깜박거리며 수차례 신호를 보냈다. 국제신호 규정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비행기에서는 아무 응답이 없었다. 지상 관제소에서는 소형 조명탄 미사일을 발사해 보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래서 네 차례 발사했다. 연발형식의 조명탄 미사일을 네 차례 발사했다. 아마도 조명탄을 네 차례 발사했으니, 250여 발의 산탄이 발사됐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너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혹시 조명탄이 아닌 철갑탄을 발사한 것은 아닌가.
 
  『조명탄을 발사했지만, 철갑탄을 발사했다 하더라도 불꽃이 일기 때문에 밤에 식별이 가능했을 것이다』
 
  ―재차 격추 명령을 받은 때는 언제였는가.
 
  『공중에서 KAL 007기를 계속 추적하는 과정이었고 어느 새 결국 사할린 항구도시인 네벨스크市 상공에까지 이르렀다. 이 순간이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사할린 해상이 아니라 네벨스크 상공이었다. 관제소로부터 두 번째로 「격추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그 순간, 나는 전투기 속도를 바짝 내어 비행기 앞으로 타원을 그리면서 회전한 뒤 미사일을 발사했다.
 
  처음에는 熱유도 미사일을 발사, 날개 쪽에 달린 엔진 쪽에 명중했고, 두 번째는 방사능 미사일을 발사, 꼬리 부분에 명중했다. 처음 미사일을 발사했을 때 폭발음에 이어 섬광, 후폭풍 때문에 눈을 감았다. 약 0.5초의 순간으로, 눈깜짝할 새였다, 첫 미사일 발사 직후 폭발 여부를 감지하지 못했고, 2차 미사일을 발사한 뒤 미사일이 비행기에 명중하는 모습을 보았다.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이는 모습을 본 뒤 비행기지가 있는 소콜 기지로 기수를 틀었다. 그리고는 「목표물 격추, 임무 완수」라고 지상관제소에 보고했다』
 
  ―비행기를 격추했는데 여객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가.
 
  『내가 격추한 비행기는 점멸등이 깜빡이는 것을 제외하고 식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창문을 통한 기내의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내가 격추한 비행기가 아직도 정찰기라고 확신한다』
 
  그는 전투기를 몰고 사할린의 방공군 공항에 착륙해 보니 사령관과 동료 비행사들이 도열해 축하해 주었고, 또 지휘관들로부터는 탁월한 비행술과 사격술로 적의 비행기를 격추했다며 칭찬을 받았다고 말했다. 오시포비치는 그 순간 자부심을 느꼈다. 그러나 다음날 이 사건은 희대의 여객기 격추사건으로, 세계적인 스캔들로 비화하면서 그의 인생은 지옥으로 빠져들었다.
 
  『소련 정권은 여객기 격추 이유에 대해 거짓 이유를 찾았으며, 진실 공개를 회피했다. 소련 영공을 침범한 여객기가 점멸등을 켜지 않았다고 했다. 전투조종사는 그 비행기가 어떤 類(유)의 비행기인지 식별할 수 없는 상태였고, 비행기 측과 교신을 시도했는데도 아무런 답신이 없었다고 발표했다. 턱도 없는 거짓말을 해댔다. 너무도 뻔한 사실을 왜 은폐하려고 했는지 모를 일이다. 정당하게 있는 사실을 밝혀도 됐을 텐데 말이다. 이런 것을 러시아 속담으로 「하얀 실로 검은 천을 꿰맸다」고 한다. 진짜 속이 다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을 한 것이다. 사고 당시 미국과 일본은 일본 군 기지에서도 나와 지상 관제소 간 교신 내용을 모두 도청하고 있었을 텐데 뭣 때문에 당시 소련 정부가 거짓말을 했는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영웅인지, 살인범인지』
 
   그는 이어 『소련 당국은 내가 점멸등을 보았다고 했지만 이를 보지 않았다고 속였고, 비행기와 교신 노력을 한 적이 없는데 했다고 말했다』고 했다. 그는 『상대 비행기와 교신을 하려면 적정한 주파수가 있어야 했는데 주파수를 찾지 못했고, 언어장애로 무선 연락을 할 수도 없었다. 사고 직후 모스크바에서 정보 전문가들이 사할린 기지에 급파돼 왔다. 나와 地上 관제소 간 무선 교신 내용을 위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교신 내용을 바꿨다. 점멸등이 깜박이지 않았다고 녹음했다. 그리고 9월3일에는 TV 방송 인터뷰를 했는데 그때 공군사령관 참모들이 「당신 이렇게 말하라」며 원고를 다 적어 주었다』고 말했다. 그 순간부터 그는 KAL 여객기 격추범으로 낙인되는 운명으로 바뀌었다. 사실 사건 직후 그는 그 파장이 엄청난 방향으로 일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해 그의 말이 계속된다.
 
  『사건 직후, 처음에는 소련 당국으로부터 영웅 칭호를 받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며칠 지난 뒤에는 어떤 죄과를 받을지 몰랐다. 극형을 받을 수도 있거나 아니면 감옥까지 갈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 사할린에는 4만여 명의 고려인(韓日동포)이 살고 있어 소련 정부는 이들이 무슨 행동을 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가졌던 것 같았다.
 
   사건 발생 이후 우리 가족은 「낯선 사람에게 대문을 열어 주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는 등하교시 경호원이 배속됐다. 사할린을 떠나라고 명령을 받은 것도 하루 전 기습통보를 받았다. 겨우 하루 만에 짐을 챙겨 떠나라는 명령을 받고서 불이 났거나 난리를 당한 사람처럼 쫓겨났다. 옷가지 등 필요한 짐은 컨테이너에 던져 두고, 가구는 다 두고 떠나올 수밖에 없었다. 지금 살고 있는 이곳에는 내가 졸업한 학교가 있었는데 교수들 역시 「졸업생인 나에 대해 훌륭한 선배로 재학생들에게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고 말했지만, 어느 날부터는 그런 말도 아예 못 하게 했고, 나 자신이 어느 곳에서라도 떳떳하게 그날의 일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도 금지됐다. 그리고 나는 언론과 세상에서 잊혀져 갔다. 한동안 내 자신이 영웅인지, 살인범인지, 정부가 나를 어떻게 대우하려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당시 소련 정권도 국제적 비난에 직면하면서 다급해졌다. 사건 직후 안드로포프 당시 소련공산당 서기장은 1983년 9월1일(모스크바 시각)에 생애 마지막 정치국원 회의를 열었다. 안건은 당시 국내 경제문제와 국제관계 등이었다. 회의 직전 우스티노프 국방장관이 한국 민간항공기를 격추시켰다고 전했지만, 안드로포프 서기장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요양차 크림반도로 떠났다. 그러나 국제여론이 예상 외로 들끓자, 안드로포프는 모스크바에 있던 당시 제2인자 격인 체르넨코에게 전화를 걸어 공세적인 자세를 취할 것을 지시했다. 다음날 체르넨코가 서기장을 대신해 비상 정치국원 회의를 소집했고, 사건 발생 일주일 뒤인 9월7일에 소련 정부는 특별성명을 통해 『KAL기가 첩보행위를 하다 격추됐다』고 발표했다. 소련은 당시 사할린 해역에서 블랙박스를 건져냈지만 숨길 수 있는 모든 것을 비밀로 한다는 원칙에 따라 이 사실은 비밀로 분류됐고 숨겨졌다.
 
 
 
 『여객기는 미국이 격추, 나는 정찰기 격추』
 
   오시포비치는 20년 동안 똑같은 질문을 받고 있다고 했다. 「격추시킨 여객기에 승객이 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가」라는 질문이다. 『솔직히 나는 탑승객들이 있다는 인식도 못 했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여객기라는 생각도 했지만, 여객기를 개조한 정찰기로 생각했다. 지금까지도 분명히 확신하는 것은 그 비행기는 정찰기였을 것으로 믿고 있다. 승객들은 분명히 없었다고 확신했다』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당일 KAL기가 사할린 상공에 이르기 직전 美國 첩보기 RC 135기가 주변 지역 정찰을 시도했고, 소련 레이더망에 잡힌 뒤 곧바로 KAL기가 나타난 것도 우연의 일치치곤 비극이었다. 美 첩보기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생길 수 있다. 더구나 RC 135기가 KAL 007機와 같은 보잉기를 개조해 만든 것이어서 정확한 식별이 불가능한 상태에서는 충분히 착각을 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오시포비치는 사건 발생 후 6년 만에 외국인과 처음으로 접촉했다. KAL 007機를 소재로 책을 쓴 영국 작가 케리와의 만남이었다. 이후 사건 발생 10년째인 1993년 이즈베스티야紙와 인터뷰를 했고, 美 언론과는 1996년 뉴욕타임스와 첫 인터뷰를 했다. 이후 일본 기자가 다녀갔지만 한결같은 질문들이었다고 말했다. 20년 만에 찾아온 한국 기자마저 같은 질문을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격추 직후에도 기내 승객들이 없었다는 얘기들이 곧바로 나왔다. 시신들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여객기가 추락한 지점 사할린 해상에서는 이상한 것들이 있었다, 여성 화장품 파운데이션 통, 헌 옷들이 발견됐지만 시신은 그리 많이 발견되지 않았다. 당시 소련 정부는 여객기 잔해를 찾기 위해 비밀 작전을 펼쳤다.
 
  이 작전에 참석했던 특수부대는 해저 잔해 수거 작업을 비디오로 촬영했다. 이 테이프는 정보기관에 넘겨졌고, 비밀정보로 분류됐다. 하지만 나는 이 비디오 테이프를 봤다. 발견된 시신은 물론 팔·다리 등 시신의 일부였다. 시신을 수거한 결과, 겨우 6~7명 정도의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그 인원 정도가 비행기에 타고 있고 있었을 것으로 전문가들도 추정했다』
 
  그는 기자에게 『269명이 타고 있었다면 이보다 훨씬 많은 시신이나 시체 조각들이 발견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도대체 269명의 시신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고 기자에게 반문했다. 그는 미국 등에서는 해상에서 유실됐거나 바닷가재 등이 시신을 먹어치웠을 것으로 추정했지만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오시포비치는 『혹시 당일 격추된 비행기와 동시에 또 한 대의 여객기가 사할린 상공을 날고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는가』라고 되물었다. 『내 생각으로는 당일 비슷한 항로에 시차를 두고 보잉 여객기 2대가 비행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1대는 캄차카에서 사할린 상공으로 날아오다가 사할린 상공에서 격추됐고, 다른 한 대의 여객기는 정상 항로를 따라 비행하며 일본 관제소 측과 교신을 했다고 본다. 그 여객기도 누군가에 의해 격추됐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 미국이 격추했을 것이다. 나는 이 비행기에 269명의 탑승객들이 탔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의 추정은 ICAO 보고서에 언급된 내용과 단순 비교해 보면 어느 정도 추정이 가능할 수도 있다. 보고서에는 미국 정찰기 RC 135기가 KAL 007機가 출현하기 직전 사할린 주변 상공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는 보고가 있다. 오시포비치는 당시 이 정찰기를 자신이 격추했고, 뒤따라오던 여객기는 미국이 격추했을 것이라는 논리였다. 그는 특히 『내가 격추한 비행기는 정상 항로를 무려 600마일이나 벗어났기 때문에 여객기가 길을 잃을 수는 없는 일이다. 여객기 조종사는 물론 지상 관제소도 이를 방치할 수 없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사람이 타고 있었다면 정말 유감』
 
   ―ICAO 조사에서 KAL기는 관성항법장치(INS) 대신, 나침반 방위 비행을 한 것으로 보고됐다. 이 때문에 항로를 이탈했다고 조사됐다.
 
  『아무리 나침반 방위 비행을 했다고 하더라도 조종사는 물론 부기장들마저 그런 착각을 하며 비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조종사들이 다 눈을 감고 조종석에 있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격추된 비행기는 여객기로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불가능한 항로로 비행을 했다』
 
  그는 비행기의 위치와 정상적인 여객기 항로를 직접 그림을 그려 가며 600마일이라는 것은 엄청난 차이라고 단정했다.
 
  ―KAL 007기가 여객기가 아닌 정찰기라는 확신을 아직까지 갖고 있는가.
 
  『그렇다. 하늘에 맹세한다』
 
  ―실제 전쟁에 참여해 본 적이 있는지.
 
  『전쟁에 참가한 적은 없지만, 모의 전쟁은 많이 치렀다. 훈련 중에 실제 상황을 가상한 훈련을 자주 했다』
 
  ―당일 실제로 KAL기에 가장 근접한 것은 몇 미터 정도였는가.
 
  『약 300m까지 접근했었다. 비행기를 격추하기 직전 착륙을 誘導(유도)하기 위해 가장 근접했던 거리이다. 양측 날개에 부착된 녹색과 붉은색 경고등을 깜빡이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반응이 없었다. 이때 제대로 신호에 응했더라면 사고는 면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유도 순간 비행기와 전투기의 위치를 직접 그렸으며, 그 위치는 피격된 비행기 우측에 나란히 붙어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소련 당국의 미사일 발사 명령에 대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나는 군인 신분이었다. 군인은 명령에 복종할 뿐이다. 당시 나는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다고 생각했다. 미사일 발사도 오차 없이 정확히 명중시킨 데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
 
  ―당시 KAL기와 교신은 불가능했는가.
 
  『교신을 시도해 보려는 생각은 있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교신하려면 주파수도 동일해야 하고 언어가 통해야 한다. 나는 영어를 하나도 모른 상태였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데 어떻게 교신을 시도할 수 있겠는가. 결국 교신 시도도 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당신이 격추한 그 비행기는 KAL 여객기로 확인됐고, 승객과 승무원 등 269명의 탑승객이 타고 있었다.
 
  『사람이 타고 있었다면 정말 유감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유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기내에 아무도 없었다고 확신했다. 솔직히 말해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오직 창문을 통해 움직이는 물체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앞에 말한 대로 움직이는 물체를 전혀 보지 못했다』
 
 
 
 『여객기임을 확인했다면 격추 명령에 이의 제기했을 것』
 
   ―당시 격추한 비행기에 「대한항공」이라는 한글이나 한자, 「KAL」이라고 쓰인 영문자를 보지는 않았는가. 또 KAL기는 꼬리 부분에 스팟 라이트(로고등)을 켜고 다녔는데, 꼬리 부분에 등이 켜져 있지 않았는가.
 
  『본 적 없다. 점멸등 외에 어떠한 등도 켜고 있지 않았다. 아무런 문자나 글자, 그리고 대한항공 마크 등 어느 것도 볼 수 없었다』
 
  기자는 月刊朝鮮이 1993년 6월 ICAO 보고서를 중심으로 보도한 기사 全文을 보여 주었다. 月刊朝鮮이 보도한 기사에는 피격된 KAL기와 동일한 기체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있었고, 대한항공의 영문표기와 한자표기 그리고 로고등을 보여 주었다. 오시포비치는 『당시 비행기에는 아래·위 층으로 2중으로 창문이 있었는데, 모양이 좀 달라 보이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비행기에 표시된 어떠한 표시나 글자를 본 적이 없었다고 강조했다.
 
  ―만약 사람이 탄 여객기라고 생각했다면 미사일 발사를 하지 않았을 수 있었으리라고 확신하는가.
 
  『그런 가정은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면 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상부에 보고했을 것이다. 여객기라는 사실을 확인했다면 격추를 분명히 반대했을 것이다』
 
  ―격추 명령을 어길 수도 있었다는 말인가.
 
  『지금 생각하면 그랬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도 착륙을 시도하라고 했을 때는 어떤 심정이었나.
 
  『지상 관제소에서도 심각하게 행동하라고 했듯이, 나 역시 아주 조심스럽고 긴장된 상태에서 유도 착륙 시도에 나섰다. 그러나 비행기가 중립지역으로 공해상으로 빠져나가려고 했었다. 만약 유도에 응했더라면 사고를 면할 수도 있었으리라고 확신한다』
 
  ―격추된 비행기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는지. 어떤 모습이었는가. KAL 007기 최후의 모습을 본 마지막 당사자인데.
 
  『첫 미사일이 발사돼 엔진 부분에 명중된 것은 불과 0.5초의 짧은 순간이었다. 순간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리나 두 번째 미사일이 비행기에 명중된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비행기는 화염에 휩싸여 폭파됐고 불길이 솟구쳤다』
 
  ―비행기가 공중에서 완전히 산화했는지, 아니면 몇 조각으로 분리돼 떨어져 나갔는지 보았는가.
 
  『그렇게 자세히 볼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비행기가 불길에 싸여 나선형으로 추락해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가 비행기가 화염에 싸여 폭파하는 순간 기수를 돌려 기지로 귀환했다』
 
  ―왜 육지 상공에서 피격됐는데 해상에서 잔해가 발견됐는가.
 
  『비행기는 육지 상공에서 해상으로 이동 중이었다. 즉 사할린 상공을 지나고 있었다. 격추된 비행기는 진행방향으로 가면서 나선형으로 약 5km를 날아가며 사할린 해상 마네론 섬 주위에 잔해들이 떨어진 것이다』
 
 
 
 미군 정찰기 요격에 500회 출동
 
   ―당시 소련 공군 조종사들에게는 격추를 할 수 있는 독자적인 권한이 없다고 들었다. 사실인가.
 
  『공군 전투조종사들은 명령에 의해 움직인다. 敵機(적기)를 발견하더라도 독자적인 판단으로 격추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반드시 관제소의 명령에 따라 격추할 수 있도록 수칙이 정해져 있다』
 
  ―사건 발생 당시 사할린 소콜 基地(기지)는 어떤 명령 시스템이 놓여 있었는가.
 
  『소콜 基地는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약 140km 떨어진 곳에 있다. 소콜 기지는 하바로프스크 사령부 지시를 받고, 하바로프스크 사령부는 몽골과의 접경에 있는 시베리아 울란우데에 있는 상급 사령부 지시를 받고, 울란우데 사령부는 모스크바 사령부의 최종 명령 지시를 받도록 돼 있다. 즉 모스크바→울란우데→하바로프스크→사할린으로 이어지는 명령 체계 속에 놓여 있었다. 당시 미사일 발사 명령도 결국 모스크바에서 최종 명령이 하달된 것이다』
 
  ―최초 KAL기가 캄차카 상공 소련 영공을 침입했을 때 소련이 격추 기회를 놓친 것으로 알고 있다. 혹시 당시 소련 영공을 침범한 이 비행기를 놓쳤을 경우, 상부에 의해 담당자들이 모두 숙청되거나 문책될 것으로 두려워하고 강박 관념에 사로 잡힌 나머지 재차 격추에 나섰다는 설도 있다.
 
  『아니다. KAL기가 캄차카 상공에 접근했다가 잠시 공해상으로 나가자, 첫 격추 명령을 철회한 것이다. 만약 캄차카 상공에서 공해상으로 접근했을 때 격추를 했다면 문책이 따랐을 것이다. 국제적으로도 문제가 생긴다. 그런데 공해상에 잠시 나갔던 비행기가 사할린 영공 정면으로 접근해 왔다. 관제소에서는 이미 선을 넘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리고 유도 착륙에 응하지 않자 다시 발사 명령이 하달된 것이다. 정말 당시 상황은 마치 평상시 미군 정찰기의 움직임을 방불케 한 것이었다』
 
  ―당시 사할린은 美蘇 간 첩보전이 치열하게 펼쳐지는 등 「공중 전쟁터」로 불렸다고 들었는데 어느 정도였는가.
 
  『낮에는 거의 매일 美 정찰기가 소련 영공을 파고 들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래서 낮 근무하면 지치고 힘들며 위험하기도 했다. 매일 전쟁을 치르는 기분이었으니까. 적이 먼저 공격하면 공중전을 치러야 할 판이었다. 나도 처음에는 낮 근무를 하다가 밤 근무로 옮긴 것도 이 때문이다. 밤에는 정찰기의 활동이 뜸하고 月光(월광)이 없으면 비교적 정찰기의 출몰도 적었다. 내가 근무했던 7년 동안 美 정찰기를 감시하고 영공에서 경계 비행을 한 것만도 500차례 이상 된다. 이 정도면 이해가 된는가』
 
  ―미국 정찰기는 어떤 식으로 활동을 했나.
 
  『사할린과 쿠릴 열도 사이에 나타나는 게 일반적이다. 그리고 사할린 상공인 소련 영공으로 침입했다. 그 순간이 되면 소련 사할린 소콜 基地는 조종사들에게 발진 명령을 내린다. 미국과 일본은 이를 다 알고 이용한 것이다. 미군 첩보기의 활동은 순전히 정보를 파악하기 위한 말 그대로 첩보활동이 목적이었다. 미국은 러시아 군 기지 운영방법과 레이더 통제 시스템을 확인하기 위해 출격했다. 물론 지상과 조종사 간 交信 내용을 모조리 도청했다. 사할린에는 소콜 기지 위쪽에 공군 비행기지가 한 곳 더 있었다. 사할린을 남북으로 나눠 이 기지와 소콜 기지가 임무를 나눠 분담했다. 정찰기가 북쪽으로 가면 북쪽기지에서 감시를 했고 양쪽에서 출동 임무를 이양하는 식이었다. 美 첩보기는 한마디로 지그재그로 사할린 소련 영공을 침했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즉, 격추를 하려면 공해상으로 빠져나가는 식이었다. 특히 3개월에 한 차례씩 집중적으로 정찰활동을 했다. 그때가 되면 기지는 아예 비상상태에 돌입했다. 소련도 마찬가지로 그런 정탐 활동을 했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정찰 업무와는 상관없는 전투조종사들이었다』
 
 
 
 『내가 격추한 비행기가 KAL기라면 정말 머리 숙여 용서를 빌겠다』
 
   ―지금 활동은 자유로운지. FSB(연방보안국: KGB 후신)으로부터 제약은 받고 있지 않는가.
 
  『활동에 제약받지 않고 있다. KGB역시 변화와 격동의 시대여서 그런지 별 제약을 가해 오지 않았다. 물론 초창기는 으레 조심스럽게 행동을 했다. 사건 발생 10년이 지난 뒤부터는 행동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소련이 붕괴되면서 민주주의로 가는 과정 때문에 그랬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아무런 제약도 없고 해외여행에도 지장이 없다』
 
  ―해외여행은 한 적 있는지.
 
  『1993년 사건 발생 10주년을 맞아 독일에 갈 기회가 있었다. 이즈베스티야紙 주선으로 독일 쾰른, 함부르크에 갔었다. 일본에서도 초청 움직임이 있었는데 웬일인지 연락이 없다』
 
  ―아직도 정부가 제대로 대우를 못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솔직히 말해, 미국 같았으면 나는 국민들의 영웅이 됐을 것이다. 내가 받은 것이라고는 훈장뿐이다. 훈장에는 명령 완수에 대한 영웅 훈장이 아닌 단순히 우주 훈련자에게 주는 훈장에 불과한 것이었다. 정치 군인들이 모두 짜 맞춘 듯하다. 그래서 더욱 속상하고 괴롭다』
 
  오시포비치는 이제 평범한 농민으로 전락한 자신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전투기 조종사로서, 퇴역 후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최소한의 명예를 간직하지도 못한 채 결국 너무도 평범한 사람으로 살고 있다는 데 분을 참지 못했다.
 
  ―한국에서 유가족이나 누군가가 초청을 한다면 갈 것인가.
 
  『물론이다.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한국민 모두에게 당일 발생한 모든 진실을 밝히고 싶다. 이번에 보도를 통해 제 신상이 자세히 나가리라고 본다. 저의 진실된 마음을 그대로 전해 주기 바란다. 만약 내가 격추한 비행기가 정말 269명을 태운 KAL 여객기였다면 유족들에게 머리 숙여 용서를 구하겠다』
 
  오시포비치는 A4 용지에 자신의 심정을 적었다.
 
  「유가족들 여러분 죄송합니다. 내가 격추한 비행기는 여객기가 아니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탑승객이 있고 여객기였다면, 내 행동은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군인으로 명령을 수행한 것은 당연하지만 말입니다. 유가족들에게 사과를 드립니다. 만약 탑승객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면 다른 행동을 했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유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오시포비치 겐나디 니콜라예비치 드림」
 
  그는 친필 사인까지 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표시했다.
 
  인터뷰는 한나절 이상 계속됐다. 점심 시간이 되자 부인은 「♥메니」라 불리는 러시아식 만두와 야채 샐러드를 차려두고 식사를 하자고 했다. 그리고 보드카와 맥주 등을 내놓았다. 러시아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이 식사하며 알코올 40도가 넘는 보드카를 권했다. 부인은 나와 자신의 자리에만 술잔을 두었다. 그리고 보드카를 가득 따랐다. 7년째 술을 끊은 남편에게는 보드카를 주지 않았다. 부인은 『그가 오랫동안 맘고생을 한 대가로 몸이 피폐해졌다』며 『지금은 금주금연으로 건강을 생각하며 살고 있다』고 말했다.
 
 
 
 『진실이 다 밝혀질 때 나는 이 세상에 없을 것』
 
  부인과 둘이서만 보드카를 석 잔 이상 마셨다. 예의상 한 잔만 마시겠다고 했더니 『코샤크 기병대들이 터전을 잡고 있는 이곳 전통이 그렇지 않다』며 석 잔을 연거푸 권했다. 취기가 약간 돌자 기자는 아예 「요르쉬」라고 불리는 「러시아식 보드카 폭탄주」를 마셨다. 한국 기자들은 폭탄주를 즐겨 마신다며 폭탄주 시범을 보였더니 관심을 보였다.
 
  KAL 007기가 피격된 지 20년이 지났다. 오시포비치의 주장과는 반대로 그가 격추시킨 비행기는 미군 정찰기가 아니고 KAL 007편 점보였음이 부인할 수 없는 물증으로 확정되었다. 남은 의문은 왜 KAL 조종사들이 INS를 끄고 나침반 비행을 하여 소련 영공으로 들어갔는가이다. KAL 007기를 격추한 소련 전투기조종사 오시포비치조차 1983년 9월1일 새벽 어떤 비행기를 향해 미사일을 발사했는지 그 진실을 모르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가해자의 무지, 또는 변명으로 볼 수밖에 없다. 오시포비치는 무엇 때문에, 왜 러시아(사건 발생 당시 소련)가 여객기 격추 사실을 사실대로 발표하지 않고 진실을 공개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기자는 2년 전 2001년 사할린을 방문, KAL 007기 문제를 취재한 적이 있다. 州道(주도)인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자동차로 4시간 거리의 네벨스크까지 가 KAL기 희생자 추모비를 찾아간 적이 있다. 그러나 추모비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희생됐던 일본군을 추모하기 위해 일본 측이 조성한 공동묘지가 있는 곳 한켠에 위치해 있었다. 마음도 아프고 속도 상했다. 눈에 띄지도 않는 추모비가 그날의 비극을 상징하고 있는 것도 가슴 아팠거니와 아무도 돌보지 않고 이제 관심조차 없는 듯하다.
 
  오시포비치와 인터뷰를 마치고 준비해 간 선물과 약간의 사례금을 내놓았다. 마지막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오시포비치 부부와 작별을 고했다.
 
  『아마도 20년 전 피격 사건의 진실이 모두 공개되는 순간,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오시포비치가 인터뷰 중 한 말이 아직도 귓전에 생생하다.
 
 
 
 KAL 007機는 운명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서 중요한 사실을 하나 확인할 수 있었다. 오시포비치氏는 KAL기가 꼬리날개에 달린 조명등을 켜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만약 KAL 조종사가 이 조명등을 켜 놓았더라면 오시포비치氏는 밤하늘에 환하게 비치는 꼬리날개의 KAL 로고 표시를 보고 민간 여객기라고 확신하여 관제사의 격추 명령에 강력한 이의를 제기했을 것이고, 007의 운명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月刊朝鮮 趙甲濟 기자는 1984년 4월호의 「KAL에 칼을 댄다」는 심층취재 기사에서 이 문제를 이렇게 제기했었다.
 
 
  「달은 하현이었고 수평선 위 60도 각도에 있었으며 야간의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이 보고서는 또 「KAL기의 수직 꼬리에 달린 로고(社章) 조명등은 보통은 켜지만 켜고 안 켜고는 기장 마음대로다」고 했다. 이 문제는 KAL 조종사들 사이에 한동안 화제가 됐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ICAO 보고서는 잘못 적고 있다. 「로고 조명등」은 보잉 747, DC10, A300 등 대형기의 꼬리날개에만 있다. 수직 꼬리에 크게 그려진 KAL 마크를 양쪽의 수평 날개에 붙은 조명등이 비춰 주면 야간비행 때 환하게 보인다. KAL에선 3년 전 이것을 켜지 말도록 조종사들에게 지시했다. 『전구수명을 아끼자』고 그랬다는 말도 있고 『정비 부서 쪽의 요청 때문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고공에선 충돌 위험이 없으므로 켤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랬다는 말도 있다. 항법등과는 달리 이 조명등을 켤 법적 의무는 없다. 일부 조종사들은 그러나 회사의 소등 지시에 반대했었다고 한다.
 
  『비행기 회사에서 만든 것은 그대로 작동하는 게 원칙이다』는 반론이었다. KAL은 007機 피격 뒤부터는 이 조명등을 다시 켜도록 했다. 『만약 그때 KAL 007기가 로고 조명등을 켜고 있었더라면 소련 요격기들은 6~8마일 바깥에서도 민항기임을 알았을 터이고 KAL기를 스파이기라고 한 그들의 거짓말은 더욱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철면피 같은 소련 요격기 조종사도 너무나 뚜렷한 KAL 표시를 보고서는 생각을 달리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 로고 조명등이 켜졌더라면 사건의 파국을 막아 주었을지도…. 당시의 어둠에선 요격기 조종사가 2000피트 위에 있는 KAL기의 동체에 쓰인 글씨를 판독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판독 가능 거리에 접근했을 때는 이미 발사 명령을 받은 뒤여서 그런 문제엔 신경도 안 썼을 터이고…』
 
  이런 부질없는 상상을 하는 것은 나뿐만 아닌 듯하다>●
[ 2013-09-03, 11:2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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