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淳台의 6·25 南侵전쟁이야기(16)/ 손톱을 遺品으로 남기고 출전한 백골부대원
왜관전투, 기계·안강·영덕·포항 전투, 다부동 전투 당시 국군의 활약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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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전투]

B-29의 융단폭격
 
倭館(왜관)지구 전투는 8월3일 미 제1기병사단(게이 少將)이 왜관읍 주민들에게 疏開令(소개령: 적의 포화로 인한 피해를 줄이고자 대형의 거리나 간격을 좁히는 것)을 내리고,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의 진격을 차단하기 위해 왜관의 철교를 폭파함으로써 개시되었다. 미 제1기병사단은 미국 육군 탄생과 동시에 창설된 사단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부터 보병사단으로 개편되었으나 전통에 빛나는‘기병사단’의 호칭을 그대로 사용했다.

낙동강 左岸(좌안)의 왜관은 서울 남동쪽 300km에 위치한 군사적 요충지이다. 미 제1기병사단의 책임 방어선은 왜관 동북쪽 鵲烏山(작오산: 303고지)으로부터 낙동강을 따라 대구 서남쪽 20km지점인 達城郡 玄風面(달성군 현풍면) 북쪽까지였다.

미 제1사단의 왜관(마산 북방 90km) 정면에서는 8월9일 새벽, 북한군 제3사단의 1개 연대가 기습 도하를 성공해 어둠을 틈타 2km를 침투, 錦舞峰(금무봉)에 올라갔다. 금무봉은 그  서쪽으로 낙동강 본류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경부선과 4번 국도를 감제할 수 있는 268고지이다. 

그로부터 30분 후, 그 남쪽에서 敵 제3사단 주력의 도하가 시작되면 미 제1기병사단은 조명탄을 올리고 彈幕(탄막) 사격을 퍼부어 이를 격퇴했다. 후속부대를 차단했다고 판단했던 게이 사단장은 9일 아침, 예비인 제7기병연대 제1대대에 M24 경전차 4대를 배속, 금무봉 탈환을 명했다. 그러나 숲으로 가려져 북한군을 발견하지 못했고, 더구나 더위 때문에 일사병 환자가 많이 발생하는 형편이어서 공격은 진전되지 못했다.

10일 아침, 사단은 공군기에 의한 폭격과 포격에 의해 금무봉을 火力(화력) 제압하고, 금무봉의 뒤쪽에 전차대를 우회시켜 배후로부터 사격을 가했다. 이와 더불어 정면으로부터도 돌격해 금무봉을 탈환하고, 추격으로 전환해 敵 제3사단을 궤멸시켰다.

8월16일, 오키나와에서 발진한 미 공군 B-29폭격기 5개 편대 98대가 낙동강 서안인 若木(약목)면으로 날아들었다. 그 약목면 바로 위쪽이 지금의 구미 공단이다. 구미 공단에는 세계 제1의 휴대폰 생산기지가 입주해있다. 지금의 구미 제3공단 지역 일대에 絨緞(융단)폭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적의 주력은 이미 낙동강을 건너 아군 측(국군 제1사단·미 제1기병사단)과 맞붙은 낙동강 東岸(동안)으로 넘어온 후였다. 그 해의 여름의 심한 가뭄으로 낙동강 도하는 수위가 낮아져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북한군에 가한 심리적 타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융단폭격으로 낙동강 전선의 적은  전진기지에 준비해 뒀던 예비 병력과 야포, 그리고 탄약과 장비를 비롯한 군수품을 대거 잃었다. 전투를 장기간 치를 여력을 상실했던 것이다.

왜관읍에서 67번 국도를 타고 낙동강변 3.4km를 달리면 漆谷湺(칠곡보) 서쪽으로 작오산(303고지)이 강변에 다가서 있다. 이곳이 낙동강 방어전 당시 국군 제1사단과 미군 제1기병사단의 방어선이 교차하는 戰鬪地境線(전투지경선)이었다. 작오산 지역이 바로 왜관-영산-마산에 이르는 미군의 방어선인 X선(90km)과 왜관-다부동-영천-포항에 이르는 한국군의 방어선인 Y선(90km)이 서로 만나는 꼭짓점이었다. 당연히 언어가 서로 잘 통하지 않는 한미 兩軍(양군)이 왜관 303고지란 꼭짓점에서 만났던 만큼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매우 컸다. 따라서 이 지점이 북한군이 노리는 아킬레스腱(건)이었다.

미 제1기병사단은 이 303고지에 제8기병연대 제2대대장 해럴즈 존슨 중령을 배치했다. 존슨 중령은 나중에 미 육군참모총장(1964-68)까지 올랐던 제1급 군인이었지만, 한국과도 인연이 깊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필리핀 바탄 전투에 참가했다가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3년간 仁川에 있던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었다. 이런 이유들도 해서 존슨 중령은 상당한 知韓派(지한파)였다.

낙동강 東岸 4번 국도에 놓여진 불탄 적 전차
 
그래서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의 방어지역에 미군 1개 소대가 들어오고, 대신에 미 제1기병사단 방어지역에 한국군 1개 소대가 들어가는 방식의 교차배치를 실시함으로써 연합작전의 난점을 극복했다. 작오산에 올라가면 동북쪽 7km에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의 左일선이었던 숲데미산(519m)이 보인다. 숲데미산은 한자로는 水岩山(수암산)이라고 쓰는데, 대구 북부의 八空山(팔공산)과 함께 고려 태조 王建(왕건)과 후백제 국왕 甄萱(견훤)이 한반도의 패권을 놓고 전투를 벌였던 곳이었다.

작오산 기슭에는 왜관전적기념관이 있다. 이곳에는 왜관전투의 관계자료가 잘 정리‧ 전시되어 있다. 졸자는 67번 국도를 남하하여 왜관에서 보행자 전용의 ‘호국다리’를 건너 若木에 도착했다. 약목은 1950년 8월16일 오키나와에서 출격한 B29 폭격기 98대가 융단폭격을 했던 현장이다. 그때의 융단폭격으로 약목 일대는 10년간 풀도 자라지 않았다고 한다. 약목면 바로 위쪽이 구미공단이며, 구미공단을 품은 구미시는 지금 한국에서 가장 소득이 높은 市이다. 구미공단 바로 옆은 금오산(977m)이고, 금오산 동쪽 기슭인 上毛洞(상모동)에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의 생가가 있다.

졸자의 답사 차량은 왜관교를 통해 약목에 와서 필자를 다시 실었다. 약목에서 4번 국도를 타고 낙동강 西岸의 강변도로를 따라 남하, 船南(선남)농공단지 인근에서 30번 국도로 좌회전하면 곧 星州(성주)대교이다. 다리를 건너 霞山里(하산리)에 와서 다시 좌회전, 67번 지방도로를 낙동강 東岸(동안)을 따라 10여km 북상하면 오른쪽으로 왜관전투의 격전장 금무봉(268m)이 보인다. 금무봉을 끼고 4번 국도와 경부선 철로가 나란히 달린다.
 
1950년 10월, 여섯 살 배기였던 필자는 어머니와 두 동생과 함께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대전으로 이사를 갔던 만큼 금무봉 앞을 지나쳐 갔을 것이다. 그때 필자 가족은 지금 같으면 1시간 남짓한 거리인 대전에 기차로 가는 데 이틀이 걸렸다. 부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대구에 와서 역전 여관에서 1박 하고 다음날 아침 ‘따로국밥’을 먹은 후 다시 기차를 타고 점심때가 훨씬 지나서 대전역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그때 기차 차창을 통해 연화역 부근 4번 국도변에서 평생 잊지 못하는 전쟁의 흔적을 목격했다. 그것이 연화역 부근이라는 것은 그때의 기차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차역(아마도 왜관역인 듯함)에 한참 정차 후 출발했는데, 곧 낙동강에 걸린 철교 위를 엉금엉금 기어가듯 건너간 상황 등이 필자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꿈에도 가끔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때 길가에 주저앉은 적의 T34 탱크들이었다. 지금 생각이지만, 시커멓게 불탄 모습으로 보아 유엔 항공기에게 네이팜彈(탄)을 얻어맞은 것으로 보인다.


[기계·안강·영덕·포항 전투]

백골부대원은 유서 쓰고 손톱을 유품으로 남기고 출전

동해안은 태백산맥이 바다에 바짝 다가선 지형인 만큼 피아 모두가 기동에 어려움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해안을 따라가는 도로는 끊어지기 쉽고, 그것과 험악한 태백산맥 중의 전선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가 국군 수뇌부가 고민했던 점이었다.
 
국군은 동해안에 육본 직할의 제3사단을 배치하고, 태백산맥 중에 제1군단(김홍일 소장) 예하의 수도사단(백인엽 대령)과 제8사단(최덕신 대령)을 병렬하는 태세로서 釜山圓陣(부산원진)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해안의 제3사단과 태백산맥 중의 제1군단 사이에 큰 틈새가 생겼다. 부산교두보전이 시작된 직후부터 북한군은 이 틈새에 敵 제12사단, 제5사단 일부, 유격대인 제766부대를 침투시켜 남하를 계속하고 있었다.
 
8일, 북한군 제12사단은 돌연 청송 남방 30km의 立岩里(입암리)로 진출하여, 부산교두보의 동북부 전선에 큰 구멍이 생겼다. 미 제8군은 경악했다. 국군은 편성중인 제25연대를 급파했지만, 북한군에게 격퇴되고 말았다. 10일, 북한군은 杞溪(기계)에, 다시 일부는 興海(흥해)에 진출, 흥해 북쪽인 盈德(영덕)에 있던 국군 제3사단의 후방을 차단했다. 이리하여 8월 중순, 부산교두보에 최대의 위기가 닥쳤다.

제8군은, 미 제9연대 3대대를 기간으로 하는 브래들리 지대를 편성, 포항 남쪽 延日(연일)비행장의 확보를 명했다. 연일비행장은 지금의 송장동 포항공항이다. 미 제5공군기의 발전기지이며, 미 항공모함 함재기에게는 사활적인 비행장이었다. 특히 被彈(피탄) 함재기는 항공모함으로 歸艦(귀함)할 수 없기 때문에 작전지역의 부근의 육상 비행장으로 불시착해야 했던 것이다. 바로 이때 국군 병사들은 적의 연일비행장에 접근 저지를 위해 그 길목인 형산강에 들어가 목만 내놓고 매복, 水中(수중) 격투에 대비하기도 했다.

태백산맥을 돌파한 북한군은 2개 제대로 나눠 하나는 포항으로 진출하고, 다른 하나는 杞溪(기계)로부터 安康(안강)으로 진출했다. 국군은 포항지대를 급파, 북한군을 저지하려 했지만, 포항 서쪽 산악지대로부터 흘러들어온 북한군에게 포항을 점령당하고 말았다. 그때 건재한 것은 安康(안강)에서 고군분투하던 17연대뿐이었다. 이에 정일권 참모총장은 수도사단을 杞溪(기계)로 전용한다는 중대 결심을 했다. 수도사단은 주력을 안강 정면으로부터 북쪽으로 진격시키고, 또 제18연대(임충식 대령)를 道坪(도평)-立岩(입암)을 따라 적중을 돌파, 배후로부터 남진시켜 남북으로부터 끼고 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때 敵中(적중) 돌파를 감행한 제18연대의 장병은 모두 유서를 쓰고 머리카락과 손톱을 모아 사령부에 맡겼다고 한다. 戰死(전사)에 대비한 비장한 조치였다. 이후 제18연대엔 ‘白骨(백골)부대’라는 별호가 붙었다.
 
또 포항에서는, 미 제5공군의 항공기가 연일비행장을 포기하고 일본으로 물러나버렸다. 국군은 2개 대대를 기간으로 하는 민기식 支隊를 편성, 포항의 탈환을 명했다. 閔지대는 브래들리지대와 함께 공격을 개시, 18일 포항시내에 돌입했다.  미 해군은 이미 해상으로 포항시내를 초토화하여 적의 사기를 꺾었다.

한편 동해안의 국군 제3사단(金錫源 준장)은 7월17일 이래 영덕 부근에서 북한군 제5사단을 저지하고 있었지만, 8월8일 야간에 감행된 적의 파상공격으로 방어선이 와해되어 남쪽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때 제22연대장은 임의로 오십천교를 폭파함으로써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고, 이에 따라 영덕-강구 전투도 종료되었다.

제3사단은 제23연대로 오십천 남안에 방어선을 형성하고, 제22연대를 남호동으로 철수시켰으나 앞에서 쓴 것처럼 8월10일 적이 태백산 줄기를  따라 내려와 흥해를 점령하자 퇴로가 차단되어 長沙洞(장사동) 부근의 좁은 지역에 갇히고 말았다. 미 해군과 공군은 바다와 공중으로부터 엄호했지만, 진지는 점차 축소되어 탄약도 바닥을 치고 있었다.

미 제8군은 제3사단을 해상을 통해 철수시키기로 결의했다. 제3사단은 그런 기도를 감추고 8월16일 밤부터 17일 아침에 걸쳐 독석동 해변에서  LST(전차양륙함) 4척에 분승하여 포항 남쪽 포항 동남 九龍浦(구룡포)로 철수한 뒤 바로 전선에 가입했다. 19일에는 포항을 탈환했다. 
 
 
[다부동 전투]
 
遊鶴山은 학이 노니는 산이 아니었다

多富洞(다부동)은 富者(부자)가 많은 동네가 아니었다. 다부동의 遊鶴山(유학산)도 학이 노니는 산이 아니었다. 고지마다 시체가 쌓이고 골짜기 마다 피가 흘러내린 부산교두보 최대의 결전장이었다. 다부동은 지금의 경북 칠곡군 架山面(가산면) 다부리이다.

경부선을 따라 오산-평택-천안-대전-황간 등지에서 스미스지대를 비롯한 미 제24사단의 방어를 뚫고 남하한 적의 主攻 제3사단(사단장 李英鎬)이 국군 제1사단 정면을 엄습해 왔고, 이화령과 조령을 넘어온 敵 제15사단(사단장 朴成哲)과 제13사단(사단장 崔庸縝)이 여기에 가세, 당장 大邱(대구)를 삼킬 듯한 기세였다.

미 제1기병사단과 접하는 국군 제1사단의 좌익인 제15연대는 낙동강이 내다보이는 328고지에, 제11연대는 가산을 포함하여 전차접근로인 泉坪洞(천평동) 좌우 계곡(5번 국도)에, 12연대는 유학산(839m)과 숲데미산(519m) 일대에 橫(횡)으로 포진할 계획이었다. 

8월 중순, 국군 제1사단의 방어선은 왜관의 작오산(303고지)?고지(석적읍 浦南)-숲데미산(518고지)-유학산-다부동으로 이어졌다. 그 정면에는 북한군 제3사단의 主力, 제15사단, 제13사단, 제1사단의 1개 연대 등이 몰려와 8월 부산교두보 최대의 결전장이 되었다  이때, 국군 제1사단은 미 제27연대, 미 제23연대, 국군 제10연대의 증원을 받고 사투를 벌여 북한군을 격퇴했다.

피아의 격전은 대구 방어의 관문이자 전술적 요충인 遊鶴山(유학산)에서 벌어졌다. 동서로 4km 정도 뻗어있는 遊鶴山은 이름 그대로 학이 노니는 로맨틱한 산이 아니었다. 유학산이야말로 다부동전투의 승패를 가름하는 요지 중의 요지였다. 防者(방자)가 이 산을 장악하면 적의 步戰(보전) 협동부대의 主접근로인 5번 국도를 제압하는 지형적인 이점을 최대로 활용할 수 있고, 攻者(공자)가 이를 확보하면 대구 공격에 유리한 발판이 되는 군사적 요지 중의 요지였다.

이토록 중요한 고지가 상급 사령부의 잘못으로 아군 병력이 배치되기도 전에 적의 수중에 먼저 들어가고 말았다. 이로 인해 유학산의 이름 없는 골짜기 골짜기마다 엄청난 피를 뿌리고 말았다.

제1사단의 중앙 일선으로서 숲데미산-유학산 일대를 담당할 제12연대는 8월13일 아침 제2대대를 숲데미산에, 제3대대를 유학산 주봉인 839고지에 각각 배치했다. 海平(해평) 일대에서 제11연대의 지연전에 참가했던 제12연대 제1대대는 主저항선인 유학산으로 철수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사단사령부가 설치된 東明국민학교까지 내려가 거기서 부대를 정비한 다음에 다시 유학산으로 올라가라는 사단의 명령이 내려왔다. 분초를 다투는 긴박한 상황 하에서 主저항선에 배치될 제1대대를 왜 主진지 후방 8km나 되는 사단사령부까지 행군시켜 아까운 시간을 낭비했는지, 그 이유가 모호했다. 그때의 상황은 이러했다.
 
12일 아침, 1대대장 韓順華(한순화) 소령은 철수 개시 때 멀리 남쪽에 솟은 유학산을 바라보며 행군 상황을 확인하러 나온 副(부)연대장에게 “이곳에서 곧장 유학산에 올라가 방어진지를 구축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다. 부연대장은 “연대에서도 그 점을 착안하여 사단에 건의했으나 사단에서 ‘지시받은 대로 하라’고 하니 난들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했다.

그 결과, 제1대대가 배치될 유학산의 제2봉인 837고지(主峰 동쪽 1.8km)는 공백상태가 되고, 추격에 나선 적은 이 틈에 재빨리 837고지를 점령하고, 다시 동남쪽 1.3km 지점의 674고지까지 진출했다. 대번에 다부동은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제1대대가 부대정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8월13일 14시경, 사단장은 제12연대장과 사단작전참모를 대동하고 제1대대장에게 다가와 “順華(순화)야, 유학산에 적이 왔다. 네가 공격해야겠다”고 명령했다.

이에 대대장 한순화 소령은 “어제 아침 행군하면서 유학산에 올라가겠다고 했을 때에는 못하게 하고 이제 와서 공격하라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울분을 터뜨리기도 했다. 어떻든 유학산·숲데미산 등을 중심으로 한 다부동의 처절한 고지 쟁탈전이 밤낮없이 벌어졌다. 다부동전투에서 국군의 사상자 1만여 명, 적군 사상자 1만 7500여 명을 기록했다.

다부동 전투는 부산교두보 방어전의 클라이맥스였고, 8월15일은 위기의 절정이었다. 김일성은 8월15일까지 부산을 함락시키려던 당초 계획을 수정, 8월15일을 ‘대구해방의 날’로 정하고 총공세를 걸었다. 치열한 방어전으로 국군의 피로도 한계점에 도달했다. 적은 화력이 우세한 미군의 방어지역을 회피, 제1사단 정면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당시 제1사단장이었던 백선엽 대장은 졸자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피아가 너무 가까이서 대치해 사격보다 수류탄을 주고받는 혈투가 사단 정면 20km  全 전선에서 밤낮으로 계속되었습니다. 고지마다 시체가 쌓이고 시체를 방패 삼아 싸운 겁니다. 드디어 한계상황에 이르렀어요. 나는 8월15일 미 제8군사령부와 국군 제2군단 사령부에 증원부대를 요청했습니다. 곧 “미 27연대와 국군 제10연대가 증원부대로 투입될 테니 그때까지 전선을 지탱하라”는 회신이 날아왔습니다.>


최초의 韓美연합작전

북한군의 ‘8월공세’ 기간 중 최대 결전은 최초의 전차 對 전차의 격투로 전개되었다. 8월17일, 미 제27연대(마이켈리스 대령)가 증원부대로 도착하면 백선엽 사단장은 국군 제11연대와 제15연대의 중앙에 미 제27연대를 넣어서 진지를 구성했다. 즉, 서쪽 산 위에는 제11연대 제1대대·제2대대, 동쪽 산 위에는 15연대 제2대대가, 그 사이의 천평동 계곡(5번 국도)을 미 제27연대가 점령하는 형태였다. 한미 연합작전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더욱이 어느 쪽이건 돌파당하면 남은 부대는 고립되고 만다. 참으로 아슬아슬한 연합작전이었다.

18일 밤부터 북한군 제13사단의 야습이 시작되었다. 북한군은 맹렬한 공격준비포격에 이어 T34 전차를 선두로 해서 탐색공격을 하면서 천평동 골짜기를 따라 전진했다. 국도라고 하지만 지금처럼 4~6차선 고속화도로가 아니고  폭 10m 에 불과한 非포장도로였다. 양측 산지를 따라서는 적의 보병부대가 공격을 거듭했다.

이에 대해 미 제27연대는 전차포와 무반동포로써 적 전차를 사격하고, 국군은 파상공격을 되풀이하는 적 보병부대에 대해 양측의 山地(산지)로부터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날만 새면 미 제5공군이 출격해, 북한군을  공격했기 때문에 적은 晝間(주간)전투는 기피했다. 이러한 전투가 일곱 밤이나 계속되었다.

그런 중에도 21일의 야습은 특히 대규모적이었다. 적의 大야습을 예감한 마이켈리스 연대장은 陣前(진전)에 2중의 지뢰밭을 구성했지만, 앞쪽의 지뢰밭은 매설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 지상에 지뢰를 살포했다.


한국전 최초의 전차 對  전차의 결전- 볼링場의 격투

밤이 되자 북한군은 진지 일대에 격렬한 포격을 가했다. 이어 5번 국도를 따라 步戰(보전)협동부대가, 그리고 양쪽 산지를 따라서는 보병부대가 공격을 개시했다.

미 제27연대는 전방에 배치되어 있던 C중대로부터 북한군 접근의 보고를 받으면 즉각 조명탄을 쏘아 올렸다. 휘영한 조명탄 밑에는 북한군 전차 9대, 자주포 약간을 포함한 19대의 차량이 전진하고, 많은 보병이 뒤따라오고 있었다. 미군은 여기에 화력을 집중시켰다. 살포해 두었던 지뢰의 처리를 위해 적 보병이 접근해 오면 기관총의 급습 사격을 퍼부어 저지했다.

또 제1선에 전개하고 있던 M26퍼싱 전차는 약 200m의 거리로부터 전차포를 발사해 적 전차를 파괴하고, 3.5인치 로켓포는 적 자주포를 격파했다. 이리하여 개전 이래 최초의 전차 對(대) 전차의 포격전이 전개되어 미군은 적 전차 7대와 자주포 3대, 차량 수대를 파괴했다. 좁은 골짜기(5번 국도)에 굉음이 울려퍼지고 섬광이 번득이며 교차하는 처절한 전차전이었다. 미군들은 좁은 협곡에서 불덩이가 수없이 교차되는 모습에 빗대 이 전투를 ‘볼링장의 격투’라고 명명했다.

한국전쟁에서 이름을 떨친 미군의 M26퍼싱은 제2차 대전 중 독일의 重(중)전차에 대항할 목적으로 개발된 전차이다. 제2차 대전에서는 거의 실전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한국전쟁 당시 적의 T34에 대항하는 비장의 카드로서 휴전 때까지 계속 활약했다. 강력한 90mm포를 갖추고, 裝甲(장갑) 방어력도 튼튼하여, 미군의 主力(주력) 전차가 되었다.

1950년 9월의 金泉(김천)전투처럼 T34에 대해 고전한 적도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T34를 압도했다. 이후 한국전에 등장하는 미군의 M46패튼은 기본적인 능력 면에서 M26퍼싱과 거의 동일하지만, 그 엔진을 강화하여 기동력을 높이고 主砲(주포)와 照準器(조준기)를 개량한 전차이다.
  
이날 밤 불덩이가 5시간 동안이나 불꽃을 튀기면서 밤하늘을 수놓았고, 그 굉음은 산야에 진동했다. 5시간의 교전에서 미 제8포병대대는 B중대만으로 1661발, 重박격포소대는 1200발, F중대의 60mm박격포는 385발을 발사했다. 엄청난 탄약소모량이었다. 이 사이, 양쪽 산지의 국군도 북한군 보병의 파상공격에 노출되었지만, 陣前에서 사격을 퍼부어 수차 격퇴했다.

북한군도 필사적이었다. 이미 식량 보급은 끊기고, 보충병의 다수는 적 치하에 강제 징병된 병력이었기 때문에 탈주병도 많았다. 그러나 상급부대의 요구는 가혹해 독전대가 뒤에서 위협사격을 한다든지, 술을 먹여 돌격시킨다든지, 또는 기관총 사수를 쇠사슬로 묶어 도망을 방지한다든지 했다.

[ 2013-09-17, 18:1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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