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앞에서 인간의 힘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얘기하지만,역사책을 들춰 보면 어떤 지도자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나라의 命運이 갈라지기도 하는 것을 흔히 본다.
  아니, 역사책까지 들춰볼 필요도 없다. 신문의 국제면만 열심히 들여다 봐도 나라를 망하게 하는 지도자, 흥하게 하는 지도자들이 금방 눈에 들어오지 않는가?
  
  여기 한때 「救國者」로까지 떠받들어졌다가, 결국은 독재자로 낙인찍혀 국민들에 의해 축출된 사람이 있다. 살리 베리샤- 前알바니아 대통령이 바로 그 사람이다.
  
  - 의사에서 민주투사로-
  
  1992년 4월 9일 살리 베리샤 민주당수는 알바니아 의회에서 46년 만에 처음으로 非공산계 출신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원래 알바니아에서 손꼽히는 심장병 전문의였다. 독재자 엔베르 호자를 비롯한 공산정권의 노멘쿨라투라들이 그의 환자였다. 호자의 공산정권이 극도의 鎖國(쇄국)정치를 펴던 시절 베리샤는 보건관련 각종 국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외국을 드나들었고, 그러는 가운데 점차 알바니아의 낙후된 정치·경제 현실에 대해 비판 의식을 갖게 되었다.
  
  1990년 8월 알리아 대통령과 지식인들의 회합 석상에서 베리샤는 그 자신 노동당(공산당) 당원이면서도 스탈린식 독재체제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알바니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해 12월에는 티라나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시위를 이끌었다. 이런 용기에 페인트칠도 안 된 시멘트 벽돌집에서 사는 청렴함, 5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국제감각, 사람의 마음을 끌어들이는 카리스마 등이 더해져 베리샤는 일약 민주화 운동의 기수로 떠올랐다.
  
  1991년 공산정권이 多黨制 도입을 승인하자 베리샤는 동지들과 함께 민주당을 창당, 1991년과 1992년 총선에서 잇달아 승리했다. 두 번의 선거에서 베리샤 자신은 각각 90%, 97%의 압도적 득표율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는 「救國者」로까지 떠받들어졌으며, 그를 찬미하는 대중가요가 여러 곡 만들어질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이 무렵 베리샤는 한 인터뷰에서 『나는 정치인이 되려고 한 적이 없으며, 알바니아를 민주주의 국가로 만들어야 한다는 시민적인 사명감에서 정치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공산체제의 청산을 다짐하면서도 『「마녀 사냥」은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등 합리적인 민주정치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민주당 일각에서 베리샤가 대중적 인기를 믿고 권위적이고 직설적인 言動을 일삼으면서 권력이나 추구하는 선동정치인에 불과하다고 경고하기도 했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한 경고는 베리샤가 대통령이 된 후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베리샤는 과거 청산과 개혁을 내세워 야당인 사회당(노동당의 후신) 지도자들을 투옥하고, 수많은 軍장교들과 관리들을 숙청했다. 그렇게 해서 비게 된 자리를 차지한 것은 베리샤의 친지들이나 고향 사람들이었다.
  
  - 숙청,언론탄압, 부정부패…, 시위 일어나자 공군기 동원 진압-
  
  
  언론이 그의 삐뚤어진 통치 행태를 비판하자 베리샤는 언론에 재갈을 물리기 시작했다.
  1993년 10월에는 신문의 자유로운 발간을 제한하는 내용의 법률을 제정했다. 대통령을 비판하는 기사를 쓴 기자는 명예훼손죄나 반역죄로 고발되었다. 1997년 미국 뉴욕에 있는 언론자유감시기구인 언론인보호위원회(CPJ)는 언론의 자유를 무자비하게 탄압한 「언론 10敵」 가운데 하나로 베리샤를 꼽았다.
  
  비밀경찰에 의한 공작 정치도 재개되었다. 1996년 실시된 총선은 부정시비로 얼룩졌다. 이런 독재 정치 앞에서 시장경제 도입, 나토(NATO)·이슬람평의회(OIC) 가입·평화유지군 활동 참여 등의 업적은 빛이 바래고 말았다.
  
  1997년 1월 피라미드식 금융투자회사들이 잇달아 파산했다. 우리나라에서도 곧잘 말썽이 되곤 하는 피라미드식 다단계 판매 방식으로 국민들의 쌈지돈을 끌어모았던 이들 회사들의 파산으로 알바니아 국민들은 세 명 가운데 한 사람 꼴로 피해를 입었다. 일확천금의 꿈에 젖어있다가 날벼락을 맞은 국민들은 이들 회사의 파산이 단지 경영상의 실패가 아니라 집권세력이 개입한 일종의 금융사기극이었으며, 정치권이 기금을 유용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거리로 뛰쳐 나오기 시작했다.
  
  베리샤는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공군기까지 동원해 가며 유혈진압했고, 시민들은 대공포와 전차를 탈취하여 軍警에 맞섰다.
  
  궁지에 몰린 베리샤는 시위 세력들을 反민주적 스탈린주의자들이라고 매도하는 한편, 지역감정에 의지하여 자신의 출신지역인 북부지방 주민들에게 무기를 나누어주면서 정권 옹호에 나설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 와중에서 1800여 명이 희생되었다.
  
  결국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한 베리샤는 그 해 7월 총선에서 패배한 후 권좌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