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의 음모(中)
“맥아더의 진정한 목표는 중국으로 전쟁을 확대시켜 마오쩌둥을 몰아내고 장제스를 복귀시키려는 것”

趙甲濟 / 金永男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트루먼 시대의 가장 중요한 회의들 중 하나’
 
  11월 28일은 마오쩌둥(毛澤東) 판 인천상륙작전이었다. 중공군이 청천강을 건너 군우리로 진출, 8군의 배후를 친 것을 1940년 5월 나치 독일군의 아르덴 숲 돌파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다. 세계사적 의미를 지닌 전략적 승리였다는 이야기이다. 11월 28일 밤 마오쩌둥은 흥분했다. 그는 중공군 현지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 앞으로 보낸 전보에서 “7개 미국과 영국 사단, 5개 한국군 사단을 섬멸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호기(好機)가 왔다”라고 했다.
 
  11월 28일 오후 3시 백악관은 국가안보회의(NSC)를 열었다. 트루먼 전기(傳記)의 저자 데이비드 매클러프는 이 회의가 트루먼 시대의 가장 중요한 회의들 중 하나였다고 평가했다. 그는 “그날 아침 맥아더는 워싱턴으로 보낸 전문에서 최대한의 추가 파병, 대만 장제스 군대의 투입, 중국의 해상봉쇄, 중국 본토 폭격, 확전의 권한 등을 요구하였다”고 했는데 우리는 그 문서를 확인하지 못하였다.
 
  이날의 NSC 회의록은 공개되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브래들리 합참의장이 한국 지도(地圖)를 준비한 것을 보고는 각료회담이 열리는 4시까지는 설명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애치슨 국무장관에게 첫 발언을 요청하였다. 애치슨은 종일 의회에 나가 있었으므로 한국 상황에 대한 최신 동향을 알지 못한다면서 대통령의 허락을 받아 브래들리에게 발언을 요청하였다.
 
  합참의장은 전선(戰線)의 다급한 상황과는 동떨어진 낙관적 분석을 내어놓았다. 그는 맥아더가 새로운 전쟁 지침을 요구하였으나 상황이 명확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면서 2~3일 내로 결정을 내리겠다고 했다. 브래들리는 또 신문과 방송의 중공군 전력에 대한 보도는 과장된 것이라고 했다.
 
  〈방어에 유리한 지형과 수송의 문제로 해서 중공군이 그렇게 깊숙이 진격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트루먼, “맥아더를 욕해선 안 된다”
 
조지 마셜 국방장관.
  이 분석은 크게 잘못된 것으로 판명난다. 조지 마셜 국방장관은 “유엔군이 전선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논의를 해야 한다”면서 “한국 문제에서 미국은 단독으로 행동해서는 안 되고 유엔과 같이 가야 한다”는 취지의 강조를 했다.
 
  그는 “8000마일이나 떨어진 워싱턴에서 맥아더에 대하여 전술적 지시를 이러쿵저러쿵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는 “발지 전투에서 전쟁부(국방부)는 전선 사령관들에게 단 한마디의 전술적 질문을 한 적이 없다”면서 “중공군의 개입에 대하여 면밀한 관찰을 계속하되 맥아더에게 전술적 계획에 대하여는 질문도 하지 않을 것이다”고 했다. 페이스 육군장관은 “지금 미국 내에서 쓸 수 있는 사단은 제83공수사단뿐이다”고 상기시켰다.
 
  이때 부통령 앨번 바클리가 나섰다. 그는 이런 자리에선 발언을 삼가던 이였지만 이날은 달랐다. 부통령은, “맥아더가 왜 ‘크리스마스 공세’라고 떠벌렸는가” 하고 따지기 시작하였다. 11월 24일 대공세에 즈음하여, 맥아더가 “크리스마스 이전에 적을 섬멸하고 미군이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하겠다”고 한 말을 비판한 것이다. 페이스 육군장관이 “맥아더는 공식적으로 그런 표현을 한 적이 없다”고 변호하였지만 로벳 국방차관은 “그의 기자회견 기록에는 분명히 그런 표현이 있다”고 했다. 브래들리는 또 맥아더를 변호한다.
 
  “맥아더가 그런 말을 한 것은 중국을 향하여 던진 메시지일 것이다. 우리는 한반도에 오래 머물거나, 만주로 확전할 생각이 없다는 의미로 한 말이 아니겠습니까.”
 
  바클리 부통령은 “맥아더 장군은 그의 발언을 미국인이 듣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여기서 트루먼 대통령이 나섰다.
 
  “그의 발언에 대하여 무슨 생각을 하든 그가 밟고 있는 양탄자를 끌어당겨 넘어지도록 해선 안 된다는 점에 주의를 해야 합니다. 이 시점에서 맥아더의 명성을 훼손해선 안 됩니다.”
 
 
  바클리 부통령, “이건 믿을 수 없는 사기”
 
앨번 바클리 부통령.
  그래도 부통령은 화가 풀리지 않는 듯했다.
 
  “이건 믿을 수 없는 사기예요. 여러 가지 의혹을 불러일으킵니다. 내가 의회에 가면 이와 관련하여 수많은 질문을 받아야 합니다.”
 
  브래들리가 “맥아더가 중공군이 전선의 중앙부에서 매복하고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진격한 것 같다”고 하니 부통령이 또 나섰다.
 
  “그렇다면 왜 수색을 하지 않았습니까? 왜 그곳에 공산군이 있다는 걸 몰랐습니까?”
 
  마셜 장관은 “맥아더는 10만명 정도의 중공군만 상대한다고 생각한 듯하다”고 브래들리 편을 들었다.
 
  부통령은 설득당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맥아더를 믿을 수 있습니까? 일주일 전에는 10만이라고 한 사람이 지금은 20만이라고 하니. 20만명이 아니고 30만명과 싸우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런 중공군이 총공세로 나오면 우리는 전선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군인과 관료들은 조심스럽게 이야기하였지만 부통령 바클리의 직격탄이 핵심을 찌른 말이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부통령의 추궁에 마셜 국방장관은 “즉답을 드릴 순 없지만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투입하는 식으로 한국에 붙들려 매여선 안 된다”고 했다.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은 “우리가 새로운 증원 부대를 한국으로 보낼 순 없지만 손실 인원을 대체할 순 있다”면서 “이미 맥아더 휘하 부대는 30% 정도의 병력 부족 상태이다”고 했다. 누군가가 맥아더가 지휘하는 총병력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자신 있게 답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콜린스는 “10군단이 고립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전선을 지킬 수 있다”고 했고, 트루먼 대통령도 “맥아더 장군이 한국에서 전선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애치슨, “한국에선 중국을 이길 수 없다”
 
딘 애치슨 국무장관.
  애치슨 장관이 처음으로 발언을 시작하였다. 그는 세계적 관점에서 한국전을 바라보아야 한다면서 “중국의 뒤에는 소련이 있으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중국과의 본격적인 전쟁에 말려들어선 안 된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서 우리는 중국이 투입하는 병력만큼 보낼 수 없으므로 이길 수가 없다”고 했다.
 
  “우리는 이 모든 사태 뒤에 소련이 있지만 그렇게 말해선 안 됩니다. 그렇게 말을 해 놓고 소련에 대하여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세계적으로 평판이 약해질 것입니다.”
 
  그는 절대로 소련이 만든 함정에 빠져선 안 된다고 힘주어 말하였다.
 
  “만주를 폭격할 일이 있어도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처음엔 성공하겠지만 소련은 즐겁게 대응할 것입니다. 우리가 많이 투입할수록 그들은 더 많이 그것도 즐기면서 그렇게 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바닥을 알 수 없는 구덩이로 빠져들게 됩니다. 우리는 출혈(出血)로 하얗게 될 겁니다.”
 
  그는 한국전에서 미국이 빠져나오기 위한 전략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우리는 한국의 한구석을 지켜내야 합니다. 그러고는 이 지역을 한국 정부에 넘겨주곤 나와야 합니다. 그런 다음 우리의 힘을 길러야 합니다. 특히 유럽에서.”
 
  트루먼 대통령은 재무장관의 의견을 물었다. 장관은 “미국의 재정 상태는 튼튼하므로 비상상황에 대응할 수 있다”고 자신하였다. 한국전을 계기로 미국의 국방비는 네 배로 늘어 소련과 본격적인 군비(軍備)경쟁이 시작된다. 40년 뒤 소련은 군비(軍費) 부담으로 무너진다.
 
  고참 외교관 해리먼은 트루먼 대통령이 발언을 권하자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의 지도력이 결정적이다”면서 “상황에 대한 주도권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의회에 나가 특별연설을 할까 생각했다가 취소하였다. 그런 개별적 접근방법은 세계적 중요성을 가진 문제해결엔 맞지 않다”고 했다. 그는 국가위기 상황에서도 자신을 헐뜯는 정파적(政派的) 언론의 선동과 왜곡을 비판하였다. 해리먼은 “대통령의 지도력이 있어야 미국이 단합할 것이다”고 했다.
 
 
  먹히지 않는 맥아더의 擴戰論
 
‘전략두뇌’ 소리를 들었던 전략가 폴 니츠.
  트루먼 대통령이 사이밍턴 상원의원에게 발언권을 주자 그는 “최대한 빨리 한국에서 나와야 한다”면서 “노동자와 기업인들에게도 우리가 지금 얼마나 위급한지를 알리고 국력(國力)을 증강시키는 일에 협조하도록 호소하자”고 했다. 베델 스미스 CIA 국장은 “중공군이 우리를 수세로 몰아갈 수 있지만 쫓아내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진단하였다.
 
  부통령은 애치슨에게 “우리가 체면을 구기지 않고 한국에서 빠져나올 방법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애치슨은 “없다”고 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우리는 한국에서 오래 버텨야 할 것이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제섭 국무부 순회대사는 “인도가 휴전안을 마련할 것 같은데, 현 위치 휴전이 아니라면 반대할 필요가 없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로벳 국방차관은 전략문서 NSC-68에 따른 군비 증강은 너무 늦다면서 최대한 빨리 전력을 증강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바클리 부통령은 “이번 회기의 국회는 대통령이 무엇을 요구하든 다 들어줄 것이다”고 주장하였다.
 
  이날 회의는 결론이나 결정 없이 끝났지만 한국전을 어느 방향으로 끌고 갈 것이냐를 놓고 벌인 최고위급의 토론회로서, “한국전에 참전하는 결정을 내린 회의에 버금가는 회의였다”(트루먼 전기작가 매클러프)고 했다.
 
  ‘아무리 한국전이 참혹해지더라도 세계전쟁으로 악화되도록 해선 안 된다는 결론’이 허심탄회한 대화를 통하여 저절로 도출되었다.
 
  미국의 지도부가 총망라된 회의에서 자연스럽게 결정된 전쟁 지도 방향을 뒤집으려는 노력이 맥아더에 의하여 그 뒤 수개월간 진행된다. 중국 봉쇄, 만주 폭격, 장제스 군대의 투입 등 중국으로 전쟁을 확대하지 않으면 한국 방어가 불가능하니 한국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그의 압박은 먹히지 않았다. 교통사고로 죽은 워커 8군 사령관의 후임인 매튜 리지웨이가 평택-삼척 선까지 내려온 전선에 대한 반격을 개시, 두 달 만에 서울을 다시 수복하여 맥아더의 아우성이 과장임을 증명하였다. 맥아더에게 끌려가던 합참과 국방부도 돌아섰다. 맥아더의 중공군 개입에 대한 오판, 부정확한 정보보고, 잇단 항명(抗命)이 워싱턴에서 그의 권위와 신용을 떨어뜨렸다. 이런 과정에서 한국의 운명은 몇 차례 지옥의 문턱까지 갔다가 생환한다(《월간조선》 7월호, 〈현대사 발굴/ 대한민국이 지옥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온 한국전쟁 5일간〉 참조).
 
  맥아더가 ‘정일권이 본 편지 내용과 비슷한 맥락에서 중국으로 전쟁을 확대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고 주장한 이가 또 있다. 트루먼부터 레이건 행정부 시절까지 미국의 외교정책 수립과 집행에 핵심적으로 관여해 온 폴 H 니츠(전 국방차관)의 《히로시마로부터 글라스노스트까지》란 회고록이 그것이다. 니츠는 대소(對蘇)전략과 안보정책 수립, 그리고 미소(美蘇) 전략무기 감축 협상 등에 핵심적으로 종사해 왔다. 조지 캐넌과 함께 가장 명석한 ‘전략 두뇌’로 평가 받는다. 딘 애치슨 국무장관 밑에서 정책기획실장 자리에 있을 때 그가 입안한 대소전략 기본계획서인 ‘NSC-68’이란 문서는, “이 전략으로 미국이 냉전(冷戰)에서 이겼다”는 평가까지 들을 정도이다. 정책기획실장 시절에 그는 한국전을 겪었다. 회고록엔 이런 대목이 있다.
 
  〈내 책상에 올라오는 맥아더의 교신 감청 자료에 의하여 맥아더의 진정한 목표는 중국으로 전쟁을 확대시켜 마오쩌둥을 몰아내고 장제스를 복귀시키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맥아더가 매우 위험한 방향으로 가고 있음이 확실했다. 나는 언젠가는 대통령이 맥아더를 해임해야 할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 일이 아무리 인기 없고 어려운 일일지라도.〉
 
  퇴임 후인 1975년 8월 6일에 진행된 트루먼 도서관의 구술역사(口述 歷史·Oral History) 인터뷰에서 니츠는 ‘교신 감청 자료’에 대하여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구술 내용은, 트루먼 도서관 인터넷에도 올라 있다).
 
 
  “맥아더‑스페인 대사 대화록에서 본심이 드러났다”
 
맥아더와 주일 스페인대사 간의 교신 감청에 대한 폴 니츠의 구술 역사 기록.
  리처드 D. 매킨지라는 인물이 질문을 한다.
 
  〈38선을 넘는다는 결정을 하고 북진이 시작되자 전혀 새로운 문제가 제기되었습니까.
 
  니츠: 그렇습니다. 38선을 넘어 북진하는 기간에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깊은 걱정이 생겼습니다. 사실은 중국군이 우리 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1950년 10월 하순 이후를 가리키는 듯). 중공군이 개입한 증거가 드러나고 청천강에서 공세를 펼칠 때까지 5주(週)가 지나갔습니다.
 
  이 5주간 맥아더 장군은 모든 것이 잘되어 간다고 우리에게 보고를 하였지만 우리의 입장에서는 잘되어 가는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우리는 마셜 국방장관을 통하여 맥아더에게 북진을 중단하고 방어력을 강화하고 증강하길 명령하도록 만들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두 방향으로 병력을 분산시켜 진격을 하고 있었는데 양군(兩軍·서부전선의 8군과 동부전선의 10군단) 사이엔 아무런 연결이 없었어요. 맥아더가 정말 위험한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도쿄 주재 대사들의 외교 교신 기록을 읽어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스페인 대사가 맥아더와 나눈 대화를 보고한 내용을 읽어 보고는, 그가 직접 보내 오는 보고에서는 볼 수 없는, 맥아더 장군이 진정으로 의도하는 것에 대한 더 정확한 시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들 교신 감청 기록으로부터 맥아더가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완벽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북한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두든지, 중국이 개입할 경우엔 중국 본토로 전쟁을 확대하여 전쟁의 목적을 마오쩌둥의 축출과 장제스의 복귀로 변경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원한다면 원자폭탄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중국 공산주의자들을 쳐부수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맥아더의 의도라는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그가 너무 심하게 모험을 감수한 이유의 일부는 우리가 중국 공산주의자들과 전쟁 상태로 들어가도록 하는 상황을 조성하는 것이었습니다(Part of the reason he took these excessive risks was to create a situation in which we would be involved in a war with the Chinese Communists). 그 방향으로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할 겁니다. 나는 재앙적 결과가 빚어졌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계속)
언론의 난
[ 2015-08-21, 09:52 ] 조회수 : 58614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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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玉環     2015-08-22 오전 1:48
일본을 당연히 중시하고 일본의 안보가 태평양, 그리고 나아가서는 미국의 안보에도 중요하다고 인식했기 때문에 중공을 무너뜨릴 계획은 했지만 일본의 입김은 별로 없었던 것으로 압니다. 나중에 맥아더가 퇴역하던 때던가요 미국 의회에서 그런 뉘앙스를 풍기는 연설을 한 것을 기억합니다.
   정중히     2015-08-21 오후 9:18
맥아더가 중국이 공산주의의 대부가 되리라는 것을 미리 간파하여서 기회가 생겼을때 싹을 제거하려 하였거나, 일본의 대리인으로서 일본의 잠재적 적인 중국 공산당을
제거하려 하였거나 인 것 같다.. 일본의 힘도 작용하지 않았나? 알 수 없다.
그 당시 맥아더는 한국전쟁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일본의 통치자로서의 임무도
있었기에 일본의 입김이 작용하였는 지... 일본의 비밀문서까지 공개되어야
맥아더의 진심을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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