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發掘 <27> 인류가 건설한 유토피아
배고픔을 해결하기 전에 신전부터 먼저 세운 페루의 인디언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350년 뒤

 新(신)잉카제국의 소식이 끊어진 지 350년 뒤. 1909년 2월 한 미국 청년이 쿠스코 북서쪽으로 걷고 있었다. 그는 히람 빙햄(Hiram Bingham). 예일대학을 나와 4년 전 하버드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33세의 엘리트. 제1회 아메리카주과학회에 미국대표로 참석했던 그는 新잉카제국 탐험에 나선 참이었다. 쿠스코知事(지사) 누니에스가 “잉카제국의 보물을 찾자”고 그를 유혹했다. 보물에 대한 욕심보다 학자적 호기심에서 그는 승낙. 안데스 산맥은 11~4월이 雨氣(우기). 미끄러운 잉카시대 王道(왕도)를 따라 그는 노새를 타고나갔다. 그는 깎아지른 절벽과 엄청난 폭포, 눈부신 열대화초와 계단식 옥수수밭을 지나 울반바 계곡 깊숙이 들어간다.

 그가 발견한 첫 유적은 초케키라오 빌가콩가山 雪峰(설봉)에 연결된 주능선 위에 건설된 新(신)잉카제국도시였다. 계곡 바닥에서 거의 수직으로 2000m 솟아오른 요새. 빙햄은 올라보고서야 이 도시의 난공불락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요새는 3면이 절벽으로 막혀 외부에 가려져 있었고 정상에 이르는 길은 계곡을 끼며 도는 오솔길뿐. 그러나 꼭대기엔 광활한 분지가 펼쳐져있었다. 神殿(신전)집터 광장을 계산한 빙햄은 이 도시의 상주인구를 1만5000명으로 추정했다. 여기서 보물발굴에 종사한 빙햄을 토기파편만 얻고 쿠스코로 돌아갔다.

일단 미국으로 돌아간 빙햄은 예일대학을 주축으로 탐험대를 조직, 1911년 6월 다시 新잉카제국으로 들어갔다. 목표는 이 제국의 수도를 찾는 일. 빙햄은 초케키라오가 新잉카제국의 외곽도시에 불과했다고 확신한다. 초케키라오를 지나 탐험대는 안데스 계곡으로 더욱 깊이 들어갔다. 그들은 계곡바닥을 훑으며 진행했다. 계곡은 계속 좁아지고 양쪽 절벽은 높아져갔다.

1917년 7월14일 그들은 토론토이란 곳에 도착. 협곡이 막혀버린 진퇴양난의 지형이었다. 아침 안개가 걷히자 인디오 안내소년이 머리 위로 치솟은 마추픽추 산꼭대기를 가리켰다. 그곳에 유적이 있다는 소년의 말이었다. 아무도 믿으려하지 않았다. 빙햄은 쿠스코 知事(지사)가 보낸 3명의 호위병만 데리고 올라갔다. 협곡에서 1000m쯤 등산했을 때 옥수수밭이 나타났다. 희망에 부푼 빙햄은 단숨에 정상에 도달했다. 그를 맞은 것은 훌륭한 新잉카제국의 도시였다. 광장과 신전은 잡초에 가렸지만 여기저기 드러난 석조물 파편의 규모만 봐도 이 도시가 보통도시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능선을 깎아 계단식으로 건축한 도시 길이 약 700m, 너비 약 400m. 동, 서, 북쪽은 절벽 남쪽만 틔어있었다.

이들은 어떻게 대리석을 해발 3000m까지 운반, 이 도시를 세웠을까. 빙햄은 이런 의문을 뒤로 하고 마추픽추 부근의 유적 발견에 정열을 쏟는다. 350년 전에 잃어버린 도시들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모두가 산꼭대기에 세워져 있었다. 문제는 이들 도시 중 과연 어느 곳이 수도였던가를 밝히는 것이었다. 빙햄탐험대는 길을 찾아 나섰다. 新잉카제국의 도로망을 벗기면 중심지가 드러날 일이었다. 그 결과 마추픽추가 수도로 유력시된다. 모든 山頂(산정)도시는 비밀의 연락망을 통해 마추픽추와 이어지고 있었다. 빙햄탐험대는 그들이 발견한 잉카 도로를 따라 돌파 불가능한 것으로 믿어져온 초케타칼峰(봉)을 넘는데 성공, 체험으로 이를 증명했다.

그러나 1949년 미국사진작가 진사보이는 빙햄이 발견한 에스피리트판 유적을 대청소한 결과 이 도시가 마추픽추를 능가하는 新잉카제국 최대 규모임을 밝혀냈다. 사적은 이 도시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1000m 밑의 계곡에서 끌어올린 水路(수로)가 광장과 도로를 가조 지르고 있을 만큼 현대적이다. 과연 어느 곳이 수도였던가. 또 다른 도시가 안데스에서 발견될 것인가.


엉뚱한 文明

 1960년 도쿄대학발굴단은 페루의 안데스 산맥에서 돌무지 石塚(석총)을 발굴하고 있었다. 해발 2000m의 계곡, 코토슈라 불리는 先史(선사)유적. 이 유적에선 다섯 겹의 文化層(문화 층)이 밝혀졌다. 제일 밑에 있는 最古(최고)문화층은 와이라힐카層(층)으로 유명한데 기원전 1800년으로 탄소연대측정이 됐다. 페루에서 가장 오래된 토기가 나오는 문화층이다. 도쿄대학발굴단은 와이라힐카層(층)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발굴 뒤처리를 하기 시작했다.

이때 발굴단원 마츠자와 씨가 혹시나 싶어 바닥에 우물처럼 구멍을 파 들어갔다. 약 3m 내려갔을 때 건물의 벽 같은 석조물이 나타났다. 벽을 노출시켜 나가니 돌 벽으로 둘러싸인 정사각형 건물이 드러났다. 이 건물 바닥 복판은 약 50㎝ 깊이의 정사각형으로 꺼져 있었다. 이 건물 밑에서 똑같은 건물이 발견됐다. 벽엔 기도할 대처럼 두 손을 보은 상징이 새겨져 있었다. 도대체 이것은 무엇일까. 그 구조에서 일반주거지는 아닌 게 분명해졌다. 발굴단은 두 손의 상징에서 신앙과 밀접한 건물이라 추정, 신전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 건물 안에선 토기와 옥수수는 발견되지 않았다. 석기뿐이었다. 따라서 도기를 발명 못했고 농경생활도 몰랐던 시대의 건물임이 확인됐다. 이런 건물은 그 뒤 코로슈 부근에서 계속 발견된다.

이 발굴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문명발전단계의 원칙이란 게 있다. 선사시대엔 농경이 먼저 발달하고, 이어서 토기가 발명되며 그 뒤에 정착생활에 따른 신전이 발생하는 게 세계고대문명에 예외 없이 적용되는 순서다. 페루고대문명은 농경―토기―신전의 발전단계원칙을 완전히 뒤엎고 있을 뿐 아니라 정반대의 순서(신전―토기―농경)로 발전해갔음이 코토슈 발굴로 밝혀진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신전을 만들 아무런 사회 경제적 배경이 없었는데도 그들은 정신생활을 통합하는 제사의 장소로 신전을 세웠다.

약 4000년 페루문명의 여명기에서 이들은 물질보다 정신을 앞세우는 歷史(역사)를 준비하고 있었을까. 그렇다면 잉카민족의 선조들은 세계에서 가장 수양된 종족이었단 말인가. 어쨌든 이것은 잉카문명의 엉뚱한 서역을 상징하고 있다. 아즈테크와 마야처럼 잉카문명은 미스터리 투성이이다. 이집트와 맞먹는 石造(석조)건축기술, 미케네에 못지않은 황금세공기술을 가졌던 잉카문명은 16세기까지 쇠를 몰랐다. IQ150의 천재가 구구단을 모르고 있었던 셈이다. 잉카제국의 공용어 케츄아語(어)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언어로 통한다. 천문학적인 音系(음계)를 가졌기 때문에 새소리와 개구리울음까지 정확하게 모방할 수 있다. 그러나 잉카민족은 이 언어를 옮겨놓은 문자를 갖지 못했다. 차라리 문자 만들기를 잊어 먹었다는 게 옳은 표현이 된 것 같다.

잉카제국의 최대 미스터리는 평등한 사회조직. 잉카제국은 인류가 건설한 가장 평등하고 박애적인 사회였다는 게 인류학자들의 주장이다. 17세기 유토피아 사상이 유럽을 휩쓸고 있을 때 잉카는 理想(이상)주의자들이 추구하는 모델이 됐다. 스페인 정복자 아버지와 잉카 皇女(황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스페인 학자 잉카 카르실라소 데 라 베가(Inca Garcilaso de la Vega)는 《잉카皇統記(황통기, Comentarios Reales de los Incas)》에서 잉카를 사회보장제도가 완비되고 백성의 권익이 최우선적으로 고려되는 이상향으로 그렸다.

이태리의 토마소 캄파넬라(Tommaso Campanella)는 ‘태양의 도시’에 잉카를 모델로 한 미래의 유토피아를 제시했고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적주의자 모렐리(Étienne-Gabriel Morelly)는 ‘바질리아드’에서 유토피아는 이미 신대륙에서 실현됐다고 썼다. 18세기에 들어가면 잉카민족은 고귀한 야만인의 이미지를 갖게 된다. 야만생활을 하면서도 휴머니즘을 잃지 않는 잉카민족 타입의 주인공이 대중소설에 수없이 등장하는 것이다. 배고픔을 해결하기 전에 신전부터 먼저 세운 페루의 인디언은 과연 정신제일주의를 표방하는 聖民(성민)이었을까.


유토피아 約史

잉카는 과연 유토피아였던가. 이 사실을 밝히기 위해 일생을 바친 학자가 수두룩하다. 美國(미국)의 필립 민즈(Philip Ainsworth Means)는 선배학자의 연구를 집대성, 유토피아의 사회조직을 분명히 한 사람. 하버드大(대) 출신의 민즈는 1931년 《안데스의 고대문명(
Ancient Civilizations of the Andes)》이란 대작을 발표했다. 이 책에 따르면 잉카는 박애주의자인 皇帝(황제)를 정점으로 한 家父長(가부장)적인 이상사회였다.

잉카제국엔 화폐가 없었다. 모든 가치는 토지에 귀속. 토지는 공유됐다. 이 토지로부터의 수확은 3分(분)된다. 3분의 1은 잉카의 國敎(국교)인 태양신 숭배를 위해, 다른 3분의 1은 황제를 위해, 나머지 3분의 1은 아이유공동체를 위해 바쳐진다. 아이유는 잉카사회의 단위조직체. 잉카판 키브츠다.

농토의 경작권을 분배하는 방식도 공평했다. 신혼부부가 생활할 수 있는 농경지의 넓이가 1토보. 이 부부 사이에 남자아기가 태어나면 1토보, 여자아기가 탄생했을 땐 반 토보가 분배된다. 남자아기가 자라 결혼하면 1토보는 신혼가정에 넘어간다. 여자아기가 출가했을 땐 “부모가 원하면 반토보는 그냥 가지고 필요 없으면 국가에 반환된다”고 민즈는 말했다.

잉카민족은 마야족처럼 수학에 뛰어났다. 그들은 세금조사와 인구조사에서 수학실력을 한껏 발휘했다. 위정자들은 노동력에 따라 인구를 10단계로 구분했다. 50~60세는 경노동에만 종사하도록 배려됐고 60세 이상은 노동이 면제된다. 잉카위정자들은 국세자료를 키프라불리는 장부에 기록했는데 현대 페루정부의 행정력도 못 미칠 정확도를 자랑한다.

잉카의 사회보장제도는 완벽했다. 식량이 남으면 창고에 쌓아두고 흉년에 대비했으며 불우청소년과 노인들에게 무료배급. 행인들을 위해선 무료숙박소 탄보가 있었다. 안데스 산맥을 해안과 내륙에서 두 줄로 종단하는 연장 9000㎞의 산복도로에 따라 접점이 설치된 탄보 안엔 식량과 숙박시설이 완비돼 나그네는 마음 놓고 여행할 수 있었다.

탄보 밖에도 차스키란 조직이 있었다. 도로의 요충지에 설치된 오두막집인데 이 차스키 안엔 다리 힘이 좋은 전령이 기다리고 있다가 각종 정보를 쿠스코로 전달하곤 했다. 안데스 산맥에 길게 걸쳐있는 잉카제국을 통제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도로망과 정보망 탓이었다. 민즈는 잉카제국의 사회상을 이렇게 요약했다.

“잉카의 정치는 준엄했지만 결코 부정은 없었다. 귀족은 호화로운 생활을 했지만 서민의 행복을 결코 잊지 않았다. 황제는 무거운 세금과 부역을 요구했으나 그거에 상당하는 반대급부를 잊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잉카문명의 배경을 요약해본다. 잉카제국은 15세기 초 건설이 완성돼 16세기에 사라졌지만 그 배경엔 3000년이 넘는 문화의 축적이 있었다. 코토슈 神殿(신전)문명(서기전 2000년)을 이은 것은 차핀문명이었다. 차핀은 페루의 마라니은강 상류에 있는 유적. 이 유적의 표시적출토품은 표면이 검게 광택 나는 차핀토기. 이 토기는 페루전체에 걸쳐 발굴된다. 즉 차핀문명의 주인공을 페루를 통일했다는 증명이다. 이 세대가 짧게 끝나면 지방적 분화가 시작된다. 지방마다 특징 있는 토기가 다양하게 발달한다. 즉 통일 뒤에 온 혼란기를 가리키는 현상. 이 혼란기는 서기 600년께 끝나고 제통합의 정권이 나타난다.

세계最高(최고)의 티티카카호수(해발 3800m)에서 시작된 독특한 토기는 에콰도르~칠레의 안데스 산맥에 고르게 분포돼 있음이 발굴로 확인됐다. 이 문화는 도시문명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것도 서기 9세기 경에 쇠퇴, 곧 지방분립의 현상이 일어난다. 즉 티티카카型(형)토기層(층)을 걷어내면 통일성이 없는 다양한 스타일의 토기가 나타난다. 15세기 안데스 산맥엔 제3의 통합이 이뤄진다. 이것이 잉카제국의 탄생이다. 12세기 쿠스코에서 시작된 彩文(채문)토기가 안데스 산맥을 석권하는 게 이를 증명한다. 이것이 토기를 통해 살펴본 안데스 約史(약사).

 

(‘잉카의 몰락’편 마침)

언론의 난
[ 2015-09-11, 16:34 ] 조회수 : 25033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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