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詩人의 눈에 비친 大人物
趙甲濟의 名文 추천/徐廷柱(서정주)가 본 李承晩은 으뜸 가는 가장 순수한 모습의 朝鮮人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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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이 판매금지 시킨 이유
  
   우리나라의 가장 거대한 인물에 대해 가장 위대한 문장가가 쓴 傳記(전기)는 가장 널리 알려지지 않은 책이 되고 말았다. 대시인 徐廷柱(서정주)의 《雩南 李承晩傳(우남 이승만전)》이 그 책이다.
  
  이 책은 1947년 아직 대한민국이 출범하기 전에 徐廷柱 씨가 「전기의 집필자로 위촉되어 매주 두 차례씩 (雩南을) 만나뵙고 그분 생애의 이야기들을 그분에게서 직접 口授(구수)받아 노트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쓰여졌다는 점에서 다른 전기와 크게 다르다. 「李承晩이 말한 李承晩의 생애」란 밀도와 實感(실감)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정보가치는 무겁다. 더구나 大詩人(대시인)의 안목에 잡힌 巨人(거인)의 초상이란 점에서 깊이는 남다르다. 이 傳記는 그러나 출간되자마자 李承晩 대통령의 지시로 판매가 금지되고 말았다.
  
   李承晩 대통령은 1949년 여름에 三八社(삼팔사)에서 출판된 徐廷柱 著의 전기를 받아보고는 경무대에 근무하던 金珖燮(김광섭) 시인에게 한 마디 했다고 한다.
  
   『徐廷柱는 그래 얼마만큼이나 되는 시인인가?』
   『좋은 시인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저의 집 어른도 못 모시어 봤나?』
  
   徐廷柱 씨는 「서양에서 반세기 이상을 사시며 공부도 많이 하신 우남 선생이시니 잘 이해해주실 걸로 알고 이분의 이름 밑이나 딴 누구의 이름 밑에서도 두루 존칭 붙이는 걸 생략했던 것인데, 이분의 이 나라 사람으로서의 전통적인 마음에 거슬렸던 것이리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李대통령은 특히 아버지 李敬善(이경선)의 이름에 경칭을 생략한 데 대하여 대단히 화가 나서 직접 경찰에 지시하여 서점에 깔린 책들도 압수해버렸다.
  
   글쓰는 사람이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 이가 있으니 자신의 글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막는 바로 그 사람이다. 그럼에도 徐廷柱는 이 전기의 재간행(1995년)에 붙인 서문에서「나는 내 일생에서 나를 낳게 하신 내 親父(친부) 외에 두 분의 정신적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왔다」면서 「한 분은 내 교육을 바로 이끌어주신 朴漢永(박한영) 스님이시고 다른 한분은 徹天(철천)의 民族自主獨立魂(민주자주독립혼)을 각성시켜주신 우남 이승만 어른 바로 그분이시다」라고 썼다.
  
   기자는 徐廷柱 씨의 初版自序(초판자서)의 첫 문장을 명문으로 꼽는다.
   <여기 그의 70여의 생애를 한 거찬 意志(의지)로써만 貫徹(관철)하였고, 또 관철하면서 있는 한 朝鮮(조선)사람이 있다. 舊한국 말엽으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한 世紀(세기)에 가까운 이 민족의 변화 많은 세월 속에 있어, 아마 그는 누구보다도 조선사람으로서 변화하지 않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一生(일생)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또 한 사람의 일생쯤 소비된대도 아까울 게 없다. 그만큼 그는 저 뭇 묏부리와 丘陵(구릉)들을 대표할 수 있는, 뛰어난 한 峻嶺(준령)이 되기 때문이다.>
  
   약 40년간 미국생활을 했고 미국의 일류대학들만 골라서 공부를 했지만 李承晩의 魂은 가장 조선적인 조선사람의 것으로 남아 있더란 徐廷柱의 이 말은 인간 李承晩을 논할 때 결론으로 삼을 만하다.
   徐廷柱 씨가 왜 이런 결론에 이르렀는가에 대해서는 월간조선 1995년 3월호에 그가 쓴 글('雩南과 나')이 답해준다. 이 글에 따르면 李承晩은 매주 찾아오는 徐廷柱에게 가끔 漢詩(한시)를 읊어주곤 했는데 어느 날 『자네는 시인이라면서?』라고 하더니 베개 옆에 놓아두었던 빛 좋은 사과를 한 개 건네주면서 『이거나 하나 먹어보게』라고 권한 뒤 미국 망명 시절에 쓴 漢詩를 들려주더라고 한다.
  
   일신범범수천간(一身泛泛水天間)
   만리태양기왕환(萬里太洋幾往還)
   도처심상형승지(到處尋常形勝地)
   몽혼장재한남산(夢魂長在漢南山)
   (하늘과 물 사이를 이 한 몸이 흘러서
   그 끝없는 바다를 얼마나 여러 번 오갔나
   닿는 곳곳에는 명승지도 많데만
   내 꿈의 보금자리는 서울 남산뿐)
  
   李承晩의 시낭송을 듣던 徐廷柱 시인은 순간, 「 내 가슴 속이 문득 복받쳐오르며, 저절로 두 눈에선 눈물방울이 맺혀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여기 누워계신 이 영감님이 쇠약해져 들어가던 李朝(이조) 말기부터 이 나라 자주독립운동의 대표자로서 3·1운동 직후에는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맨 처음 대통령이시다. 그 뒤 다 늙은 할아버지가 되어 귀국하시도록까지 오직 이 민족의 해방만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다니시면서도 마지막까지 그 가슴속에 못박아 가지고 다녔던 그 한남산! 그 한남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徐廷柱 씨의 속에서도 어느 사이인지 그를 한 민족의 아버지로서 확인하는 『아버지!』하는 감동이 안 솟아날 수가 없었다고 한다.
  
   李承晩은 광복된 뒤 돌아와 추억의 남산을 찾아 이런 漢詩를 남겼다.
  
   도원고구산여연(桃源故舊散如煙)
   분주풍진오십년(奔走風塵五十年)
   백수귀래상해변(白首歸來桑海變)
   사양휘루고사전(斜陽揮淚故祠前)
   (복삿골의 옛벗들 연기처럼 흩어져
   어수선히 지나간 오십년이여
   모두 변한 터전에 흰머리로 돌아와
   옛 사당 앞 비낀 햇살에 눈물 뿌리다니)
  
   기자는 1996~1997년 보스턴 근교의 하버드 대학에서 머물면서 李承晩이 이곳 대학원을 다닐 때 하숙했던 집(在美동포가 살고 있다)에 가 보았다. 기자는 徐廷柱 씨가 가졌던 경탄의 수수께끼를 풀고싶었다. 李承晩은 미국에서 살면서 어떻게 조선인의 魂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었을까, 그는 미국인들에 대한 열등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
  
   기자의 결론은 다음 세 가지였다. 李承晩의 타고난 인간의 그릇, 미국의 일류대학(조지 워싱턴 대학-하버드 대학-프린스턴 대학)을 다닌 학력, 그리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詩心(시심)이 그를 으뜸 가는 조선인으로 남아 있게 하였던 것이리라. 반면에 徐載弼(서재필)은 미국 생활 속으로 들어가 정착하면서 점차 조국과 멀어져갔고 한국어도 서툴게 되어갔다. 徐廷柱의 이승만 傳記에 두 사람을 비교한 아주 상징적인 장면이 있다.
  
   갑신정변의 실패 뒤 미국으로 망명했던 徐載弼이 일시 귀국하여 協成會(협성회) 모임에서 강의할 때였다. 서재필이 토론 도중에 문득 생각난듯이 청중들에게 박수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여러분은 아직 모르겠지만 미국에서는 남이 연설할 때 잘하면 손바닥을 마주 때려 박수라는 것을 하는 법이오. 여러분도 잘 한다고 생각되거든 그렇게 해보시오.』
  
   그러나 이때 이승만에게는 『아무리 미국이 좋다 하여도 이런 것까지는 흉내낼 필요가 없지 않은가』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 또 한번 徐박사를 고쳐보면서 『자, 그럼 우리 박수 합시다』라고 큰소리를 내어버렸다. 李承晩은 못마땅한 생각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를 두고 徐廷柱 씨는 傳記에서 「이 두 사람의 그 뒤의 생애는 『손뼉을 칠 수 있는 사람』과 『칠 수 없는 사람』의 사이와 같은 차이가 없지 않았다」고 썼다.
  
   아무리 영어를 잘해도 『웁스!(oops!)』라는 말은 어색하여 『아!』라고 하고, 아무리 일본어를 잘해도 『하이』라는 말은 입에서 잘 떨어지지 않는 것, 한국인의 습관과 미풍양속에 대한 본능적인 집착, 이런 토착성을 李承晩은 끝까지 버리지 않았기에 조선인의 혼을 가장 순수하게 유지할 수 있었으리라. 이 土種(토종) 조선인됨에서 李承晩의 무서운 주체성이 우러나온 것이다.

 어제 이화장에서 李仁秀 선생을 만났더니 1961년에 하와이를 찾아가서 모시게 된 李承晩의 인상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가장 좋은 모습의 조선인이고 조선 선비였습니다. 가장 순수한 原形이라고 할까요. 아버님을 뵙고 처음으로 한국인이란 게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런 아버님을 비난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분의 수준이나 크기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버님을 알려면 어느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徐廷柱 씨의 전기는 李承晩의 생애의 매듭이 된 가장 극적인 장면들을 정확히 잡아낸다. 李承晩이 여섯 살 때[그 때 그의 이름은 承龍(승용)] 천연두를 앓은 후유증으로 눈이 먼 적이 있었다. 이 소년의 눈을 틔어준 것은 서울 진고개의 일본인 의사였다. 병원으로 업혀 들어간 이승만 소년은 이제껏 맡아보지 못했던 쌩긋한 내음새에 코를 찡그리고는 『왜내 난다. 가자』라고 했다고 한다. 「왜(倭)내」는 李承晩이 처음으로 접한 개화의 문명이었다.
  
   이 책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守舊(수구)세력이라고 불릴 수밖에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여러번 낙방하면서도 과거시험에 매달리던 그가 1894년의 갑오경장으로 科擧(과거)가 폐지되자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서당 친구 신긍우의 권유로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개화파의 길을 걷게 되는 대전환이다. 이때 이승만은 이미 결혼한 나이 스물의 청년이었다. 李承晩의 급제에 모든 희망을 걸고 있으면서 無爲徒食(무위도식)하던 아버지 李敬善은 낙담한다.
  
   <『새로 된 시험제도라는 것이 있기는 한 모양입니다마는···』
   승만은 자기의 침묵이 하도 딱하여 거의 억지로 한 마디 되뇌어 본다. 그러자 아버지의 소리는 한층 더 날카로와지며 『뭐? 시험제도라니? 그깐놈들에게 붙어서 그래 개화당이 돼? 어림도 없는 소리다. 선비는 죽어도 군색해선 안되느니라. 가령, 백이숙제같이 산채를 씹다가 죽을지언정, 어찌 그 까짓 왜놈배들에게 부동한단 말이냐? 그럴 리야 없겠지만, 꿈에라도 너는 그따위 시험제도 같은 건 생각지도 말고, 이 난세에 性命(성명)을 보존할 생각을 해라. 고르지 못한 때에 묻혀서 사는 것은 예로부터 있던 길이다. 알겠느냐?』>
  
   李承晩의 漢學(한학) 실력은 과거를 재수, 삼수, 四修(사수)하는 과정에서 쌓아올린 것이다. 배재학당에서 일단 서양문물에 접하자마자 순식간에 李承晩은 가장 급진적인 개화파로 돌변한다. 漢字실력이 바탕이 된 덕분인지 선교사 부인으로부터 영어도 빨리 배웠다.

 한국인으로서 영어에 가장 능통한 인물로 기록되어야 할 이승만 대통령은 청와대 경호 직원의 중학생 아들이 영한사전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고 충고를 하였다고 한다.

 '영어보다 國語가 더 소중하단다. 國語를 잘해야 英語도 잘 하게 된다.'
     
     1899년 만 24세의 中樞院 議官(중추원 의관) 이승만은 고종을 李堈(이강)에게 讓位(양위)시키고 일본에 망명 중이던 개화파 朴泳孝(박영효)를 맞아들여 혁신내각을 수립한다는 일종의 쿠데타 계획에 관계했다가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질 처지까지 갔다. 그는 미국인 선교사들의 救命(구명)운동으로 종신형을 받았다. 그 뒤 약 6년간 한성감옥에서 생활했다. 이 獄中(옥중)이야말로 그 뒤의 李承晩을 만들어낸 단련과 극기의 교육장이었다. 여기서 남긴 잡문, 詩, 번역문 등은 獄中雜記(옥중잡기)로 불리는데 수년 전 연세대 柳永益(유영익) 교수에 의해 정리 발표되었다. 그 가운데는 142首(수)의 漢詩가 있다. 秋夜不寐(추야불매)란 제목의 산문은 李承晩의 뛰어난 감수성을 엿보게 한다. 한문으로 쓰여진 이 글의 번역문은 이러하다.
  
   <하루 종일 문을 닫고 앉았다 누웠다 하며 책을 본다. 저녁 종소리가 그치자마자 작은 창살에 어둠이 깃든다. 심부름하는 아이가 등에 불을 켜니 새어나오는 불빛이 희미하게 비친다. 모두가 잠자리에 드니 고요하기가 승방(僧房)에서 참선(參禪)에 들어간 스님과 같다.
  
   창살에 기대어 밖을 내다보니 뜰에 있는 나무가 침침하게 보인다. 약한 바람이 서서히 불어와 볼을 스쳐가니 울어대는 귀뚜라미 소리가 호소나 하듯이 귓가에 요란하다. 어느 집에선가 시름에 잠긴 아낙네의 다듬이 소리가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고, 담장 너머에선 순시하는 야경꾼의 징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한다. 성긴 버들가지가 서늘함을 보내오고 그윽한 난초가 향기를 풍긴다.
  
   밤은 어찌하여 이리도 깊어가기만 하는가? 종소리 북소리 멀리서 들리는데 누구의 시름인가? 날은 추워지는데 편지는 늦어지고 임금의 교사(사면장)도 다소 더디나 보다. 작년이고 금년이고 백발은 늙어감을 재촉하니 남은 날이 며칠이던가? 황가(皇家)에 일은 많은데 이 한 몸 왕옥(王獄)에 갇혔구나. 그만 두어라. 말해도 미치지 못하리로다. 아! 명(命)이로다. 운수에 달렸구나.
  
   무릇 선비로서 혼란한 나라에 처한 자가 참으로 능통한 권도(權道)로 헤쳐나가지 못할 바에는 다만 자기 한 몸이라도 잘 가누어 기미(機微)를 살피고 변화에 대처해야 한다. 걱정해서 무엇하리오. 나도 이제부터 쉬리로다.>

언론의 난
[ 2016-01-31, 10:30 ] 조회수 : 22495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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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백수     2016-02-23 오전 8:13
본문 감동적입니다. 탐미주의 우파님의 댓글 또한 여러모를 깊이 생각케하는 깨우침이어서
감사합니다.
   白丁     2016-02-01 오전 7:22
英雄은 英雄을 알아보고 大人은 大人만이 알아보는 법. 李承晩 대통령은 金九 선생 정도를 알아보는 수준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巨木이지요.
   탐미주의 우파     2016-01-31 오후 6:40
歷史에서 '만약'은 부질없는 것이라고들 합니다.
하지만 '만약'이 역사의 은밀한 한 斷面을 엿볼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게 쓸데없는 空想만은 아닐 것입니다.

만약 靑年 李承晩이 科擧시험에 합격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자유민주주의자 李承晩'이 아닌 '성리학자 李承晩'?
언뜻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지만 정말 그리 되었다면
한반도의 運命은 어떻게 달라졌을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또 만약 청년 李承晩과 서당친구 신긍우와의 만남이 없었고,
그래서 배재학당에 입학하지 못했더라면?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꾸는 大사건은
실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알 수 없는 작은 사건들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운명적 만남들이 함께 쌓여 이루어지는 듯합니다.

어쩌면 이 세상에 우연(偶然)이란 것도 없는지 모릅니다.
甲과 乙이 서로 뜻하지 않은 지점에서 서로 딱 마주친 것을 흔히 우연이라고 하지만,
甲은 甲대로 乙은 乙대로 그 자리에 꼭 가지 않으면 안 될 사정이 있었으므로
기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必然, 즉 運命인 셈이니 말입니다.

하여,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작은 사건도 경시하지 말 것이며,
우연처럼 보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 또한 귀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유신     2016-01-31 오후 1:03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나?
서정주 시인 같은 훌륭한 시인의 눈에는
이승만 같은 민족의 지도자가 보이는 것이고
좌파찌질이들 눈에는 테러리스트 김구가
훌륭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
조선은 언론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각설이패들
정치판 휘젓고 있는 좌파찌질이들 치워버리면
나라가 조용해질것
온 백성은 고통의 마지막 한숨들을 몰아쉬고
있는데 저것들은 한 몫 잡아보겠다고
끼리끼리 짝짜쿵 살판이 났다니까
나라가 안 망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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