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의 선생 히틀러의「민족」전술

배진영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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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5월21일, 再군비를 선언한 후 히틀러가 유럽 여러나라들을 향해 「평화」를 약속하는 의회연설을 했을 때, 여기에 남다른 기대를 건 사람이 있었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首相 쿠르트 폰 슈슈니크였다.
   1934년 7월25일 그의 전임자인 엥겔베르트 돌푸스가 오스트리아 나치당원들에 의해 암살된 후 수상에 취임한 슈슈니크는 「독일에게 간섭할 구실을 주는 일을 일절 피하면서, 어떻게든 히틀러로 하여금 현상유지로 만족하게 하는 방법을 확보하게 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의회 연설에서 『독일은 오스트리아의 內政에 간섭하거나, 오스트리아와 倂合(병합), 혹은 合邦(합방)을 할 의도를 갖고 있지 않으며, 또 그러기를 희망하지도 않는다』고 한 히틀러의 言明은 그에게는 하나의 복음이었다.
  
  -오스트리아 강탈-
  
  1936년 7월11일 체결된 독일·오스트리아 조약은 오스트리아의 主權에 대한 존중과 內政불간섭 원칙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슈슈니크는 오스트리아 內 나치정치범들에 대한 特赦(특사), 「책임있는 정치적 지위」에 나치당원을 임명할 것을 密約(밀약)했다.
  이보다 앞선 1936년 3월7일, 독일군의 라인란트 진주를 보고하기 위해 열린 의회 석상에서 히틀러가 『우리들은 유럽에서의 영토적 요구를 가지고 있지 않다. …독일은 결단코 평화를 파괴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언한 것도 슈슈니크에게는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슈슈니크의 그러한 기대와는 달리 히틀러는 1937년 중반 이후 수 차례에 걸쳐 군부에게 「오스트리아에 대한 무력간섭」을 준비할 것을 지시했다. 오스트리아의 정치적·외교적 후원자임을 자임하고 있던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에 대한 회유작업도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는 동안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나치를 선동하여 끊임없이 사회혼란을 조장했다. 自國의 首相을 암살한 자들이 特赦를 받아 나오고, 그 동료들이 要職(요직)에 진출하는 상황 속에서 國法 질서와 公權力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혼란은 가중되었다.
  
  상황이 무르익자 1938년 2월12일 히틀러는 자신의 산장인 베르흐테스가르텐으로 슈슈니크를 불러들였다. 여기서 히틀러는 갖은 협박과 공갈 끝에 슈슈니크로부터 수감 중인 오스트리아 나치 분자들을 모두 사면하고, 나치 동조자 자이스 잉그바르트를 경찰·보안을 관장하는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하겠다는 동의를 얻어냈다.
  
  强迫(강박)에 못 이겨 히틀러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슈슈니크도 그것이 오스트리아의 독립에 종지부를 찍는 행위임을 모르지 않았다.
  마지막 몸부림으로 슈슈니크는 3월9일 「자유롭고 독립된 기독교사회주의적 통일 오스트리아를 바라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묻는 국민투표를 오는 3월13일 실시한다고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이 소식을 접한 히틀러는 격노했다. 독일군이 국경으로 집결하고 베를린으로부터 협박이 이어지자 3월11일 슈슈니크는 결국 국민투표 방침 취소를 선언했다.
  하지만 히틀러의 요구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히틀러는 슈슈니크를 해임시키고 잉그바르트를 수상으로 임명할 것을 요구했다. 빌헬름 미클라스 오스트리아 대통령은 이러한 요구에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
  전국 곳곳에서 나치에 의한 크고 작은 폭동이 잇달아 발생하는 가운데 독일군의 침공위협이 계속되자 그는 결국 베를린의 요구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리고 신임 首相 잉그바르트의 요청이라는 형식을 빌어 「오스트리아 內의 유혈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3월12일 독일군이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었다. 같은 날 국민학교·중학교 시절을 보낸 오스트리아의 린츠에 도착한 히틀러는 열광하는 군중들 앞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몇 년 전 내가 이 거리를 떠날 때, 나는 오늘 나의 마음을 가득 채워주고 있는 것과 똑같은 신념의 맹세를 가슴 속에 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숱한 세월이 지난 지금, 그 신념의 맹세를 이룩한 나의 깊은 감격을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神의 섭리가 독일의 지도자가 되도록 이 마을로부터 나를 불러냈다고 하면, 그렇게 하도록 나에게 한 사명을 내려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이란 내 사랑하는 고향 땅를 독일에 복귀시키는 것 말고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나는 그 사명을 믿고 그것을 위하여 살며 또 싸웠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사명을 다했다고 믿는 바입니다』
  
  - 「민족」이란 환상에 빠진 얼간이들의 최후 -
  
  그러나 그것은 신의 섭리도, 사명도 아니었다. 그것은 테러와 기만, 공갈과 협박을 수단으로 하여 정권을 잡고, 권력을 유지해 온, 호전적·침략주의적인 이웃을 두고도, 같은 게르만 민족이라는 환상에 빠져 상대방의 善意와 양식에 국가의 생존을 의지하려 했던 얼간이들이 불러들인 殃禍(앙화)였을 뿐이다. 그 얼간이들 가운데 하나였던 슈슈니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강제노동수용소였다.
  
  
  
출처 :
[ 2003-01-04, 20:2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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