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통을 끊어놓지 않는 게릴라 토벌은 헛수고!”
《6·25전쟁의 현장》(18) / 지리산 빨치산 토벌대 ‘白야전전투사령부’는, 1만9000여 명의 공비를 捕殺(포살)해 국군과 유엔군의 후방 안정을 도모했다

鄭淳台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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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제8군은 대규모 공세를 지양하면서 고지쟁탈전을 계속했다. 1952년 12월 말까지 개최된 휴전회담은 군사분계선(MDL·Military Demarcation Line)의 획정요령에만 합의한 채 회담은 정체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피투성이의 고지쟁탈전을 계속하게 되었다. 유엔군 측은 휴전회담에서 공산군 측의 비타협적 태도가 명백해지자, 航空戰力(항공전력)을 최고도로 발휘해 적에게 타격을 가하고, 휴전 시에는 유리한 조건을 조성하려고 했다. 이것을 스트랭글(Strangle·목 졸라 죽임) 작전이라고 했다.

밴플리트의 군사작전 계획, 리지웨이가 반대

 회담이 시작된 7월10일의 전선은  지그재그 線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 선에서 휴전하면 한국의 국방에 큰 불안감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서부의 전선은 서울 북방 50km의 임진강변이고, 중·동부전선은 문자 그대로 뒤죽박죽이었다.  
 당시 전선의 진용을 보면, 유엔군의 전선은 西로부터 미 제1군단(미 제3·제25·제1기병사단, 한국 제1·제9사단, 영연방 제28·제29여단, 벨기에·그리스·태국·필리핀 대대), 미 제9군단(미 제7·제24, 국군 제2·제6사단), 미 제10군단(미 제2사단·제1해병사단, 국군 제7·제8사단), 국군 제1군단(수도사단·제3·제11사단)으로 되어 있었다.
 한편 공산군 측은 西로부터 북한군 제1군단, 중공군 제65·제64·제47·제42·제26·제20군(중공군의 군은 국군의 군단에 해당함), 북한군 제5·제2·제3군단을 제1선으로, 그 후방에는 중공군 6개 군, 북한군 1개 군단이 받치고 있었고, 서부 및 중부에는 중공군이, 동부에는 북한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당시 국군과 유엔군은 병력면에서는 공산군에 비해 열세였지만, 화력과 기동력에서는 절대적 우위에 있었다. 그럼에도 전투가 주로 해발 1000m 전후의 험준한 산악지역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화력과 기동력의 우세를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없었다. 차량보다는 지게와 같은 원시적인 장비가 운반수단으로 유리했고, 야포보다는 박격포와 같은 휴대하기 간편한 무기가 더욱 효율적이었기 때문에 병력의 열세였던 국군과 유엔군은 많은 어려움에 봉착했다.

 유엔군은 7월 하순부터 10월 중순에 걸쳐 斷續的(단속적)으로 공세로 나왔다. 그 목표는 △압력을 계속 가해 회담의 진전에 기여하고, ▲전선을 방어에 유리하게 정비하고, △적의 보급지역(양구군의 亥安面의 펀치볼 및 평강—철원—김화를 연결하는 철의 삼각지 등)에 제약을 가하며, ▲보다 견고한 고지를 확보해 戰後(전후)의 안전을 도모하고, ▲자칫 침체하기 쉬운 士氣(사기)를 높여 필승의 신념을 가지도록 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7월의 동부전선 공격은 豪雨(호우)로 일시 연기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공산군 측도 교통환경이 비교적 양호한 서부전선에서는 유엔군의 화력이 우세하여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투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중동부 산악지역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그 결과, 중부·동부 전선은 고지쟁탈전의 격전지가 되었다.
 중동부전선의 피의 능선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 백마고지 전투, 저격능선 전투, 동부전선의 351고지 전투 등이 대표적 사례이다. 특히 피의 능선 전투에서 4km×5km 정도의 조그마한 高地를 탈환하는 데 3000여 명의 인원손실과 4만여 발의 포탄이 소모되었다.
 고지쟁탈전의 폐해를 절감한 미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은 限定(한정)목표의 공격으로서는 문제 해결이 어렵다고 보고, 동해안의 통천군에 상륙작전을 감행해 북한군을 격멸하려고 했지만, 워싱턴의 意向(의향)에 충실한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 대장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피의 능선’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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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의 능선 전투는 1951년 8월18일부터 9월5일까지 미 제2사단과 국군 5사단 제36연대가 강원도 양구군 東面 月雲里(동면 월운리) 일대의 ‘피의 능선’을 공격하여 북한군 제12·제27사단을 격퇴한 전투이다. 능선이란 산등을 따라 이어진 봉우리의 선을 말한다. 
 휴전회담이 난항하던 1951년 8월,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중장은 동부전선의 국군 제1군단과 미 제10군단에게 ‘피의 능선’과 펀치볼(양구군 해안면) 지역의 공세를 지시했다. 이에 미 제10군단장은 군단 예비인 국군 제5사단의 제36연대를 미 제2사단에 배속시킨 다음, 북한군 진지에서 미 제2사단 主진지를 관측할 수 있는 橫隔室 高地群(횡격실 고지군·후에 ‘피의 능선’이라 불림)을 탈환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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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능선 전투 세부지형도



 橫隔室 高地群(횡격실 고지군)이란 위의 지도 <피의 능선 세부지형>에서 보듯 호텔이나 모텔의 객실처럼 능선에 의해 횡으로 칸이 지어진 지형을 말한다. 펀치볼이란 6·25 당시 공산군 측의 보급기지였던 亥安面(해안면)인데, 외국의 종군기자가 그 북쪽 加七峰(가칠봉)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 화채그릇(punch bowl)처럼 생겼다고 해 붙인 이름이다. 피의 능선 동쪽인 펀치볼의 주위는 가칠봉·大愚山(대우산)·도솔산·大岩山(대암산) 등 1000m 이상의 고지가 빙둘러 싸고 있다. 
 필자는 2016년 4월15일 14시, ‘피의 능선’ 가운데 최고봉인 해발 983m의 수리봉OP(관측소)에 오르기 위해 양구군의 東面과 亥安面(해안면)을 이어주는 다리인 東面橋(동면교)에서 21사단 崔鳳均(최봉균) 주임원사를 만났다. 현지에서 6년간 근무한 그의 안내로 필자는 ‘피의 능선 전투’ 현장을 답사하면서 작전환경 등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당시, 북한군은 능선의 서측에는 북한군 제12사단 제1연대를, 동측에는 제27사단 제14연대를 배치함으로써 2개 사단 지원체제를 갖추었다. 또한 북한군은 미군의 강력한 포격에도 견딜 수 있도록 有蓋壕(유개호)를 구축하고 고지의 後斜面(후사면)에도 교통호를 준비했다. 진지 전방에는 지뢰를 5000여 발이나 매설했다.   

 강원도 양구군 동면 일대는 태백산맥의 지맥이 뻗어 있는 산악지대이다. 이 지역은 60도 안팎의 심한 경사를 이룬 표고 800∼1300m 의 고지군과 협소한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어 지형의 기복이 심하며 삼림이 울창하다.
 1951년 8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줄기차게 퍼붓던 장맛비가 그치자, 미 8군은 장마로 인해 중단했던 공격을 재개하기로 했다. 이와 같은 제8군의 방침에 따라 미 제2사단은 ‘피의 능선’ 주봉인 983고지 공격에 나섰다. 983고지는 月雲里 부근의 캔사스 선으로부터 북쪽으로 약 3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캔사스선(Kansas Line)은 임진강 하구∼전곡∼화천저수지∼양양으로 연결되는 선으로서, 38선 북방 5∼15km지점에 선정하여 38선을 전술적으로 방어하려고 선정되었다. 983고지(수리봉)는 文登里(문등리)와 沙汰里(사태리) 계곡의 중간에 위치한 731·983·940·773고지로 이루어진 길이 8km의 횡격실 능선(피의 능선)의 주봉이다. 능선 전체가 남쪽으로는 급경사를 이루어 방어에는 유리한 반면, 공격에는 대단히 불리한 지형이다.
 뿐만 아니라 이 일대를 장악한 북한군이 아군의 방어선인 캔사스線과 후방지역을 깊숙이 관찰하여 부대이동과 보급지원은 물론 아군의 모든 군사활동을 포격으로 제한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 제2사단의 피해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1951년 8월18일, 미 제10군단과 미 제2사단의 7개 포병대대 126문이 퍼부은 30분간의 공격준비사격에 이어 06시30분에 미 제2사단에 배속된 국군 제36연대는 공격을 개시하여, 5일 만인 8월22일 11시30분 主峰(주봉)인 983고지를 탈환했다. 敵의 진지에는 자전거 체인으로 발목이 묶여 있는 기관총 사수 등 북한군의 병사의 시체가 쌓여 있었다.
 공격준비사격(Preparation fire)이란 공격제대가 공격을 개시하기 전에 적의 진지, 물자, 화력지원수단, 통신시설, 지휘소, 관측소 등을 파괴, 敵 와해 및 제압을 위한 지상포, 공중폭격 도는 함포에 의해 실시되는 다량의 맹렬한 사격을 의미한다. 
 983고지는 탈환 바로 그날 저녁, 북한군의 역습에 의해 탈취당했다. 국군 제36연대는 복원과 편성을 위해 철수했다. 미 제10군단장 바이어스 소장은 “국군 제36연대가 983고지를 탈취당한 것은 공격목표를 ‘피의 능선’ 지역으로 제한한 전술적 오류에 있다”고 판단했다. 군단장의 판단에 따라 미 제10군단은 8월31일 06시 가용 가능한 전 부대를 투입하여 全 정면에서 공세를 감행했지만, 결과는 지지부진했다.

 그러나 ‘피의 능선’ 좌측에서 공격하는 국군 제7사단과, 우측의 加七峰(가칠봉)에 대한 미 제38연대의 공격이 호조를 보임에 따라 북한군은 후방이 차단당할 위기에 놓였다. 9월3일, 국군 제1해병연대는 이웃에 위치한 亥安盆地(해안분지·펀치볼)을 점령했다.
 이에 북한군은 9월3일, 11km 북방인 931고지로 은밀히 철수했다. 미 제9연대는 조심스러운 전진을 계속해 9월5일 14시경 983고지(수리봉)을 점령했다. 19일간에 걸친 전투 결과, 피아간 합계 1만7000여 명의 사상자로 인해 능선 전체가 피로 물들었다 하여 ‘피의 능선(Bloody ridge)’이라 불리게 되었다.  

 필자가 수리봉을 답사했던 2016년 4월5일, OP(관측소) 바로 밑 무명고지에서는 유해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때까지 발굴된 시신은 모두 28구. 수리봉 정상에 오르면 금강산으로 향하는 31번 국도 북쪽으로 북한의 철책이 보이고, 그 너머로 북한군에게 빼앗긴 ‘斷腸(단장)의 능선’이 드러난다. ‘단장의 능선’이란 이름은 ‘스탠 카터’라는 종군기자가 931고지 전투 시 구호소에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해!”라고 울부짖는 부상병을 목격하고, 이곳을 ‘Heart break ridgeline’라고 명명해 보도한 데서 비롯되었다. 
‘단장의 능선’ 동쪽으로는 휴전선 바로 아래인 ‘펀치볼’을 둘러싸고 있는 1000m이상의 고지인 가칠봉·도솔산·대암산이 솟아 있다.

국군 8사단, 바위 투성이 ‘펀치볼’에 동굴진지 구축 

 미 해병1사단은 1951년 8월31일부터 9월20일까지 북한군 제3군단을 공격해 ‘피의 눙선’과 인접한 강원도 양구군 亥安面(해안면)의 펀치볼(Punch bowl)을 탈취했다. 그로부터 약 6개월 후인 1952년 4월, 국군 제8사단(최영희 준장)은 미 제1해병사단으로부터 펀치볼 전선을 인수했다.
 국군 제8사단은, 1951년 12월1일∼1952년 3월15일 白야전사령부(백선엽 소장) 예하에 들어가 지리산 공비 토벌 임무를 끝내고, 포천 부근에서 재정비 훈련을 거친 후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어 펀치볼 전선을 맡았던 것이다.  
 그러나 펀치볼을 인수한 제8사단의 형편이 매우 난감했다. 미 해병1사단은 진지를 전혀 만들어놓지 않고 펀치볼을 떠났던 것이다. 미 제1해병사단 측은 펀치볼 일대가 “바위투성이로, 壕(호)가 파지지 않아, 중공군의 공격 시에는 彈幕(탄막)으로 저지해 왔다”고 변명했다.
탄막(Barrage)이란 방어선이나 방어지역에 대한 돌파를 방해함으로써 아군부대나 시설을 방호할 목적으로 형성된 砲火(포화)의 장벽을 말한다. 
 彈幕(탄막)에 의한 저지는 풍부한 화력을 보유한 미 해병사단이라면 가능했겠지만, 포병 화력이 빈약한 국군 사단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국군 사단은 고작 2개 포병대대만을  보유하는 형편이었다. 당연, 동굴진지를 파지 않으면 적의 공격에 견디기 어려웠다. 제8사단은 바위산에 구멍을 내는 연구에 착수했다. 

 ‘펀치볼’을 답사하기 前, 필자는 그것이 중학교 시절에 주먹(punch)을 단련시키기 위해 기둥에 달아놓고 힘껏 치던 ‘샌드백’ 쯤인 것으로 오해했다. 그러나 미군의 종군기자가 명명한 ‘Punch bowl’은 술·설탕·우유·레몬·향료로 만든 花菜(화채)를 담는 둥그런 큰 사발이란 뜻이다. 그들에게 양구군 해안면 분지의 모습이 꼭 그렇게 보인 것 같다. 여기서의 해안은 ‘海岸’[바닷가]이 아니라 亥安(해안)인 것도 필자는 이때 처음 알게 되었다.
 돼지 亥(해), 편안할 安(안)이란 이름에는 사연이 있었다. 주민들에 따르면 원래 이 분지에 뱀이 들끓었는데, 뱀의 天敵(천적)인 돼지를 많이 데려와 방목했더니, 뱀이 사라져 사람 살기에 편안해졌다고 해서 命名(명명)된 것이라 한다.
 펀치볼은 ‘용늪’으로 유명한 대암산(1304m) 북쪽에 있다. 隕石(운석·별똥) 낙하의 충격으로 분지가 형성되었다는 說도 있다. 주변의 산지는 變成岩(변성암), 분지 내부는 花崗岩(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침식분지이다. 해발 1000m 이상의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군사적 요충이EK. 바닥의 高度(고도)가 해발 420∼500m인 亥安盆地(해안분지·펀치볼)의 하천은 아주 좁은 협곡을 통해 인제군의 麟北川(인북천)으로 흘러나간다. 
      
 1952년 봄, 제8사단의 崔榮喜(최영희) 사단장이 미국에 군사 유학을 떠남에 따라 그 후임으로 李炯錫(이형석·일본 육사 45기) 준장이 부임했다. 이형석 장군은 舊 일본군 보병 중좌로서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 鐵道隊(철도대) 사령관으로 복무하다가 일제의 패전 후 귀국했던 인물이다. 철도대 사령관 경력자에게 工兵(공병) 작업은 매우 익숙한 업무였다.   
 호를 파기 위해 여러 시도를 했는데, 결국 바위산에 총탄을 퍼부어 일단 구멍을 내고, 거기에다 지렛대를 밀어 넣고 암석을 쪼개는 工法(공법)을 시도했다. 당시는 에어콤프렛셔와 같은 도구를 쉽게 구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일제히 호를 파기 시작하자, 사단의 全正面(전정면)에서 일대 총격전이 벌어진 듯했다. 대치하던 중공군도 깜짝 놀라 갑자기 斥候(척후)를 늘리고, 그날 밤은 부대를 집결시켰다.
 국군과 미군과 임무를 교대하면 중공군의 위력정찰이나 위협공격이 감행되는 것은 常例(상례)였다. 제8사단의 진지구축에 자극된 것일까, 적의 공격이 예상보다 빨랐다. 제21연대 정면에서 적의 집결이 두드러졌다.  

 孔國鎭(공국진) 제21연대장은 제8사단을 비롯해 미 10군단에도 직접 전화해서 포병 3개 대대를 모아 彈幕(탄막)을 준비했다. 지휘계통만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평소의 인맥이 지원의 정도에 영향을 끼치던 시절이었다.
 밤이 깊어지던 무렵, 적의 포격이 개시되었다. 그 포격은 오랜 기간의 대치로 인해 주변 지리에 익숙했던 만큼 정확했다. 드디어 적진으로부터 돌격개시의 신호탄이 올랐다. 이에 孔國鎭(공국진) 연대장은 彈幕(탄막)사격으로 맞받아쳤다.
 밤이 밝았다. 연대의 손해는 거의 없었지만, 陣前(진전)에는 적의 시체가 무수하게 널려 있었다. 橫穴式(횡혈식) 참호의 덕택이었다. 이후 제23연대 병사들은 아무 지시가 없어도 바위산에다 구멍부터 파는 습관이 생겼다고 한다.

 필자는 2014년 6월26일 ROTC 6기 출신 예비역 장교 92명의 ‘前方(전방) 안보현장 견학’에도 참가해 펀치볼을 둘러보았다. 요즘은 사과·더덕·시래기·고랭지 채소 재배가 활발해 郵送(우송)으로 전국으로 팔려나가고 있다. 특히, 기후변화가 극심한 이곳의 ‘시래기’는 잊을 수 없는 별미이다. 그때 견학코스는 금강산이 관측되는 乙支전망대, 제4땅굴, 양구전쟁기념관 등이었다.
제4땅굴 광장 한켠에는 1990년 3월의 제4땅굴 수색 때 북한군이 매설한 목함지뢰를 밟아 산화한 군견(독일산 세피드)인 ‘헌터 少尉(소위)’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헌터는 국군 장병들을 대신해 목숨을 바친 전공에 의해 소위로 추서되었다.
필자의 제4땅굴 두 번째 방문 하루 전날인 16년 4월4일에도 제4땅굴 아랫동네에서 지뢰사고가 발생했다. 이곳 농장에서 일하던 우즈베키스탄人 노동자가 소변을 보기 위해 길 없는 비탈로 조금 내려가다가 6·25 전쟁 당시에 매설된 것으로 보이는 지뢰를 밟아 중상을 입었다고 한다. 남의 나라에 돈 벌러 왔다가 참변을 당한 그 분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이다.     
 
위력 상실한 인해전술·운동전·포위섬멸전

 1951년 여름은 중공군에 있어 가장 견디기 어려운 시기였다. 유엔군은 언거푸 夏季(하계)와 秋季(추계)에 공세를 발동, 중공군의 방어진지를 차례로 잠식했다. 중공군의 人海戰術(인해전술), 運動戰(운동전), 포위섬멸전은 모두 봉쇄되어 위력을 잃고 말았다.
 중공군 측이 인정하듯 “운동전의 후기(1951년 여름을 지칭), 중공군은 近接戰(근접전)을 감행하려 했지만, 상대에게 접근할 수 없었다. 이에 야간작전을 감행하지만, 하룻밤에 상대를 섬멸할 수 없고, 단기결전을 걸어보지만 膠着局面(교착국면)에 빠지고 만다는 매우 곤란한 상황에 조우했다”(중국국방대학 교수 徐焰의 말).
 그러나 이러한 난국의 단계를 벗어나고부터 중공군은 다시 기력을 회복, 유엔군의 공격을 격퇴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의 후반부에 이르면 소규모의 공세도 再발동했고, 그들의 失地(실지)를 회복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일본의 東洋學園大學(동양학원대학) 교수 朱建榮(주지안롱)은 “이 변화는 의용군(중공군)의 전술대전환 및 중국 수뇌부의 우수한 戰略調整能力(전략조정능력)에 의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다음은 사사키 하루다카 著 《朝鮮전쟁 韓國編》에 소개된 서 그의 ‘중국군의 참전과 不毛의 對峙戰(대치전)’ 중에서 인용한 것이다.
 
<중국의용군(중공군)은 고도로 집중된 指導(지도)와 지휘 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국내의 최고지도자 毛澤東(모택동)과 의용군(중공군) 총사령관 彭德懷(팽덕회)는 긴밀한 연휴를 취해 전장에 있어 변화무쌍한 쌍방의 태세를 세밀하게 연구, 이용 가능한 여러 찬스를 놓치지 않았다. (중략) 1951년 여름과 가을 유엔군의 공격에 고전하는 가운데 의용군(중공군)은 또다시 전술의 대전환을 신속히 단행한다. 그 사이 북조선인민군(북한군)과 의용군(중공군)의 일부 부대가 산악지대에서 坑道(갱도)를 파서 미군의 공세에 대항해 성공했기 때문에 그 경험은 즉각 全軍(전군)에 소개되었다.>
       
 1951년 8월22일, 유엔군 항공기의 ‘개성 上空(상공) 침범’을 이유로 공산군 측은 휴전회담을 중단시켰음은 앞에서 거론했다. 이에 유엔군 측은 공산군 측을 교섭의 테이블에 앉히기 위해 10월5일 全전선에 걸쳐 秋季(추계) 공세를 개시했다. 그 주요 목표는 전선의 약점을 수정하고, 유리한 지점을 차지한다는 것이었다. 10월 중순에는 거의 기대했던 線(선)에 진출했지만, 공산군의 격렬한 저항에 의해 획득한 땅에 비해 희생이 너무 컸다.
 중공군의 坑道(갱도), 즉 땅굴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술할 것이다. 어떻든 유엔군의 춘계와 추계 공세는 공산군 측이 휴전회담에 임하는 태도에도 변화를 불러왔다. 유엔군의 압박에 견딜 수 없었던 것인가, 아니면 땅굴을 뚫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한 움직임인가는 단정할 수 없지만, 공산 측은 유엔 측이 요구하고 있던 휴전교섭의 再開(재개)에 동의했다.
 
 이리하여 1951년 10월25일, 유엔 측의 요구에 따라 군사회담은 중립지역인 板門店(판문점)으로 장소를 옮겨서 재개되었다. 회담장소를 판문점으로 옮겨오기 전까지 유엔군은 협상과정에서 공산군 측의 선전·선동과 계략에 말려들어 번번히 헛다리를 짚고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미군기가 회담장소의 상공을 침범했다” “미군이 세균전을 벌리고 있다” 따위의 데마고그를 일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판문점도 회담 장소로는 부적당했다. 그것은 제공권과 제해권을 확실히 장악한 유엔군이 휴전을 서두른 대가로 38선 바로 북쪽인 황해도의 곡창뿐만 아니라 개성과 예성강 서쪽의 연안과 옹진 등 38선 以南 영토까지 확실하게 포기한 바보짓이었다.
 수도 서울의 안전을 위해서는 최소한 예성강 하구까지는 회복했어야 했지만,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 측은 다소 양보를 하더라도 終戰(종전)을 서둘러야 한다는 기본방침에 쫓겨 이와 같이 어처구니없는 양보를 하고 말았다. 迂餘曲折(우여곡절)을 거친 후 1951년 11월27일 ‘현재의 接觸線(접촉선)을 토대로 한다’는 유엔 측의 주장에 따라 제2議題(의제)인 군사경계선 획정 원칙이 타결을 보기에 이르렀다.

지금은 敵 OP가 된 351고지를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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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城통일전망대 서쪽 8m에 위치한 717OP(관측소)에서 바라본 351고지와 월비산



 1951년 7월10일부터 11월11일까지 동해안 최북단에서 벌어진 351고지 전투는 우리 戰史(전사)에서 諸兵(제병) 협동·합동작전으로 승리한 본보기로 손꼽힌다. 협동작전은 전술적 목표를 확보하기 위해 보병·기갑·포병·공병·방공·항공 기타 전투지원 및 전투근무지원부대 등 2개 이상의 諸(제)병과부대를 동시 통합하여 운용하는 작전을 말하며, 합동작전은 육·해·공군이 전투자산을 상호 지원하며 작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351고지는 강원도 고성군 月飛山(월비산·459m)으로부터 동쪽 2km지점에 위치한 우리 동부전선의 최북단 돌출부였다. 따라서 동해안 지역으로 침투하는 적에게 직접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는 감제고지였다. 또한 인근에는 강릉∼원산을 연결하는 해안도로(7번 국도)가 있어 교통의 요충이기도 했다. 감제란 상대적으로 높은 지점에서 관측하거나 사격에 의해 적의 활동을 방해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필자는 육군본부 軍史연구소의 협조를 얻어 2016년 4월의 8일간 동해안으로부터 서해안까지 248km의 남방한계선(GOP)을 답사했다. 때마침, 우리 군에서 해상도발저지훈련을 실시해 대포 소리가 계속 쿵! 쾅! 거리며 산과 바다를 흔들었다. 그래도 고성 통일전망대에는 가족 단위의 관광객이 적잖게 눈에 띄었다.
 그 첫 답사지역인 高城 통일전망대에 올라 금강산 동쪽 끝인 해금강 지역을 관찰했지만, 북한군이 차지한 351고지와 월비산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고성전망대에서 내려와 그 서쪽 8km에 위치한 717OP(Observatory Post·관측소)로 이동해 전방의 351고지와 월비산을 정면에서 관찰했다.
 717관측소 서쪽의 내륙방면은 해발 700∼1000m의 험준한 산악지대이며, 동해안 방향은 300∼500m 내외의 야산지대와 개할지로 이어져 있다. 이 지역을 동서로 갈라놓은 南江은 금강군(북한의 점령지역이지만 고성통일전망대 서남방에 위치함)에서 발원해 北流(북류)하다가 삼일포 근처에서 東流하는 적벽강에 합류되어 동해로 흘러든다. 강폭은 60∼80m, 수폭은 20m 내외로 깊지가 않아 도보부대의 渡涉(도섭·걸어서 강을 건넘)이 가능하다.
 작전지역 내 주요 고지군은 월비산과 351·208·148·187·339고지가 있다. 이 중 월비산은 표고 459m로서 작전지역에서 가장 높다. 이 고지는 동해안의 7번 국도와 무명도로 그리고 남강 일대를 감제 관측할 수 있는 군사작전상 중요한 요충지이다. 이곳에서 서북쪽으로 18km 지점에 금강산의 주봉인 비로봉(1638m)이 있다. 
 351고지 전투는 1951년 10월 중순부터 1953년 휴전(7월27일) 직전까지 국군 수도사단(그 후 제11·제5·제15사단)이 북한 제19사단(그 후 제9·제7·제3사단)사이에 일곱 차례의 쟁탈전이 벌어진 곳이다. 여기서 부대별 월비산·351고지 전투를 간단히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수도사단의 월비산·351고지 전투>
∎국군 제1군단장 백선엽 소장은 동해안 쪽의 월비산과 351고지를 확보하지 않고서는 작전의 장악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수도사단장 송요찬 준장에게 두 고지를 탈취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수도사단의 제1기갑연대가 1951년 10월10일 351고지를 공격해 목표를 탈취했다.
∎이어 10월12일부터 3일간. 수도사단의 제1기갑연대는 월비산을 목표로 공격을 감행했지만, 북한군 제19사단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간신히 월비산 동쪽의 261고지와 북쪽의 350고지까지 진출하는 데 그쳤다.
1951년 10월15일 공격을 재개한 제1기갑연대는 유엔 공군기의 지원과 함께 월비산 정상으로 돌진해 백병전 끝에 목표를 탈취했다.
1951년 11월16일, 수도사단은 攻取(공취)한 월비산과 351고지를 국군 11사단에 인계하고, 白야전사령부(白善燁 장군이 이끌던 부대에 배속되어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에 임했다.

<국군 제11사단의 월비산·351고지 전투>
∎수도사단으로부터 월비산과 351고지를 인수받은 국군 제11사단은 이틀 뒤인 51년 11월18일 저녁, 북한군 제9사단의 1개 대대가 월비산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으나 격퇴했다.
∎그러나 그 다음날 3개 방향에서의 공격으로 월비산을 빼앗겼고, 이어 351고지도 적의 습격으로 피탈당했다.
∎국군 제11사단은 수차례 공격을 강행한 끝에 351고지를 차지했지만, 월비산은 탈환하지 못했다. 그 후 제11사단은 351고지를 국군 제5사단에 인계하고 후방으로 이동해 부대를 정비했다.

<국군 제15사단의 351고지 전투>

∎국군 제5사단으로부터 351고지를 인수한 제15사단은 북한군 제7사단과 대치하고 있었다. 휴전협상의 타결이 임박했던 1953년 6월2일, 북한군은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351고지를 탈취했다.
1953년 6월16일, 국군 제15사단장은 병력손실이 많음을 이유로 탈환작전을 중지해 351고지는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휴전협정을 앞두고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혈전을 벌이는 상황에서 군단 예하 모든 포병과 공중화력이 이 고지전에 참여했다. 비록, 마지막에 351고지는 북한군에게 피탈되었지만, 거기서 더 이상 전선이 밀리지 않은 덕에 현재 38선 북쪽인 양양 洛山寺(낙산사), 설악산과 속초, 그리고 巨津(거진)·杆城(간성) 등을 우리 수복지역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38선上의 양양군 현북면 基士門里(기사문리)로부터 고성 통일전망대가 위치한 고성군 현내면 松峴津里(송현진리)까지 길이 80km의 폭 6∼20km의 땅이 회복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우리 동해안 영토 북부가 돌출한 엄지손가락의 모습이다. 
 351고지 전투는 용문산 전투와 유사하게 제병협동·합동작전을 수행한 전투이다. 특히 한국 공군은 351고지에 대해 1951년 10월28일부터 1953년 6월까지 총 1538 소티(Sortie·1소티는 항공기 1機의 1회 출격을 의미함)를 출격해, 敵의 핵심시설 및 진지·벙커 등을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작전기간 중 한국 공군의 전투기 8기를 잃었고, 전투조종사 6명이 적탄을 맞아 전사했다.

전략폭격의 효과

 고지쟁탈전의 폐해를 절감한 미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이 이런 소모전을 지양하고, 중동부전선에서 대규모의 공세작전을 실시하여 상황을 일거에 반전시키려 했지만,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이 휴전회담에 큰 장애가 될 것이라는 이유로 승인하지  않았음은 앞에서 썼다. 그 대신에 휴전회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범위 내의 지상작전은 승인했다.
 이와 같은 통제로 인해 미 제8군은 대규모 공세를 지양하면서 고지쟁탈전을 계속했다. 1952년 12월 말까지 개최된 휴전회담은 군사분계선(MDL·Military Demarcation Line)의 획정요령에만 합의한 채 회담은 정체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피투성이의 고지쟁탈전을 계속하게 되었다. 
 유엔군 측은 휴전회담에서 공산군 측의 비타협적 태도가 명백해지자, 航空戰力(항공전력)을 최고도로 발휘해 적에게 타격을 가하고, 휴전 시에는 유리한 조건을 조성하려고 했다. 이것을 스트랭글(Strangle·목 졸라 죽임) 작전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대규모 공중폭격에 대해 공산군은 ‘空中封鎖戰役’(공중봉쇄전역) 혹은 ‘窒息戰’(질식전)이라고 불렀다. 
 1951년 7월30일, 미 제5공군은 F80×90機(기)로 평양의 對空砲火(대공포화)를 제압하고, 354機의 전투폭격기로 평양·鎭南浦(진남포)·江界(강계), 원산, 羅津(나진)의 군사목표를 공격했다. 당초, 함경북도의 국경도시인 나진은 소련 영토에의 침범을 두려워해 폭격금지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공중정찰 결과, 시내에 많은 물자가 쌓여 있어, 停車場(정차장)·철도자재·차량 등이 공격목표로 되었다. 두만강 하구에 인접한 나진은 소련에서 들어오는 전쟁물자의 到着港(도착항)으로서, 대규모 貯油(저유)시설도 있었으며, 소련의 군사물자가 이곳에서 戰線(전선)으로 수송되고 있었다.

 1951년 8월25일, B29×35機(기)가 나진을 공격했다. 300여 톤의 폭탄을 투하, 97%가 목표에 명중했다. 워싱턴은 이들 목표에 대한 폭격을 허가하긴 했지만, 휴전교섭이 결렬시키는 과도한 空爆(공폭)은 자제케 했다.
 평양과 軍隅里(군우리) 소재의 공장 몇 개를 제외하고, 북한의 주요 공장들은 이미 파괴되었던 만큼 공산군은 만주와 시베리아로부터 군수품을 실어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때 공산군은 평양 남방 55km인 沙里院(시리원)線 이남에 東西(동서)로 60개 사단을 배치하고 있었다. 전투 계속을 위해서는 각 사단마다 1일 40톤의 물자가 필요해, 전체로는 매일 최소한 2400톤의 물자가 보급해야 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중공군과 북한군은 戰線(전선) 후방으로부터의 장거리 수송을 트럭과 철도에 의존하고 있었고, 이를 위해 하루에 2톤 트럭(소련제) 1200대가 필요했다. 여기에 安東(안동·지금의 중국 단동)으로부터 前線(전선)까지의 往復日數(왕복일수)를 5일로 하면 공산군은 安東으로부터 沙里院(사리원) 남방의 전쟁터까지 나날의 보급을 위해 모두 6000대의 트럭이 필요했다.
그러나 20톤 적재 능력의 철도貨車(화차)에 실으면 120량의 화차로, 1일 보급량의 수송이 가능했다. 또 북한군과 중공군은 휘발유를 중국·소련으로부터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철도수송은 더욱 중요시되고 있었다. 
 미 제5공군은 自隊(자대)만으로서는 敵(적)의 철도망을 완전 파괴하는 데 6∼8개월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했다. 공격기한을 3개월로 단축시키기 위해 동해안의 철도 차단은 해군의 협조를 요청했고, 공군은 주요 철도선과 교량에 대한 공격을 단행했다. 스트랭글(목졸라죽임) 작전의 主 목표는 철도로 집중되었다.    

 한편 철도망에 대한 공격의 영향으로 중공군의 자동차 수송 의존도가 증가해, 중공군의 트럭 손해는 1개월에 약 7500 대에 달했다. 이것은 소련·중공에서 1개월간에 생산되는 트럭의 4분의 1에 상당했다.
 1951년 8월18일에 개시된 북한 철도망에 대한 작전은 현저한 성공을 거두었다. 10월 초순부터 시작된 유엔군의 秋季(추계)공세목표는 夏季(하계)공세 때보다 용이하게 달성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북한군의 탄약 부족 현상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당초에는 철교가 파괴되어도 공산군 측의 수리는 놀랄 정도로 재빨랐다. 또 낮에는 교량의 깔판을 떼어냄으로써 파괴된 듯 위장하고, 밤에는 깔판을 다시 걸어 열차를 운행시키고 있었다. 미군 전투기들은 많은 시한폭탄을 투하했다. 다음은 당시 중공군 부사령관 겸 後勤(후근· 병참)사령관 洪學之(홍학지)의 회고록에서 발췌한 것이다.

<시한폭탄 중 가장 위협적인 것으로 ‘나비폭탄’을 꼽을 수 있다. 이 폭탄은 폭탄 안에 수백 개의 또 다른 소형폭탄이 장착되어 있다. 전투기에서 투하되는 순간, 공중에서 탄피가 터지면서 수많은 소형폭탄이 바람을 타고 ‘나비’처럼 떠다니다가 지면에 닿으면 폭발대기 상태로 접어든다. 이때 차량이나 行人(행인)이 건드리는 등 외부압력을 가하면 즉시 터져 엄청난 피해를 주는 것이다.
 당초 ‘나비’가 찾아들면 병사들은 우선 “걸음아, 나 살려!”라는 식으로 먼 곳으로 몸을 피한 뒤 소총을 발사해 ’나비 사냥‘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던 중 병사들이 재치를 발휘해 미군들로부터 노획한 전화선과 철사 등으로 폭 60∼100m인 대형 그물을 만들어 ’나비 사냥‘에 나섰다.
 병사들은 ‘나비’가 나타나면 준비해 둔 그물로 받아 이를 몰아 한꺼번에 처리하곤 했다. 도로에 가로 놓인 대형 시한폭탄은 소총으로 무력화시키는 것 이외에 물에 집어넣어 시한폭탄의 시계 톱니바퀴의 움직임을 정지시키는 방법도 썼으며 아예 뇌관을 뜯어내기도 했다.>

 
‘難攻不落의 지하 만리장성’

뇌관을 제거시킨 시한폭탄은 중공군에게 참으로 요긴하게 쓰였다. 그 폭약 때문이었다. 다음은 이어지는 중공군 후근사령관 洪學之(홍학지)의 증언이다.

<당시 전방에는 이미 坑道陣地(갱도진지) 구축을 개시해 도처에서 엄청난 양의 폭약을 필요로 했다. 물론 후방에서 폭약을 수송해 오기는 했지만, 너무 멀고 또 공습 때문에 넉넉하지 못했다. 그러던 차, 대형 시한폭탄은 폭약의 보충에 안성맞춤이었다.
 대형 폭탄 1개에서 폭약 600∼700kg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미군은 아군 후방에 들여보낸 공작원들을 통해 이런 상황을 감지한 모양이었다. 그 후 대형 시한폭탄 투하는 사라졌다.>

 위의 증언에서 주목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다시 중공군이 유엔의 航空優勢(항공우세)에 대항하기 위해 坑道陣地(갱도진지), 즉  땅굴을 뚫고 있었다는 것이다. 원래 북한 땅에는 日帝(일제) 강점기에 뚫은 금광 갱도가 많이 널려 있었는데, ‘땅굴 뚫기 선수’인 중공군이 1951년 가을 이후 이를 확대·보완해 1년 만인 1952년 가을에 東西 길이 250km, 남북의 폭 20∼30km의 갱도진지를 완성시켰던 것이다. 이때 중공군의 갱도진지의 構築(구축) 수법은 오늘날 북한군의 땅굴 파기로 계승되었다.
 이런 북한의 땅굴이 휴전 60여 년간에 걸쳐 군사분계선을 뚫고 40∼50km 이상 南下했다고 해도 계산상으로 결코 불가능한 일이라 할 수 없다. 적병이 상상하지도 않았던 곳에서 두더지처럼 불쑥 튀어 나온 사례는 세계의 戰史(전사)에서 수두룩하다.    
 또 하나는 미군의 적군, 즉 6·25 때의 중공군과 북한군, 월남전 때의 월맹군과 베트콩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군의 물자를 이용했다는 점이다. 상대의 물자로 아군의 전력을 증강하는 것은 兵法(병법)에서 말하는 善之善(선지선)이다. 심지어 우리 국군에서도 동맹군인 미군이 遺棄(유기)한 물자는 매우 유용하게 쓰였다.

 1968년 1·21사태(金新朝 등 북한 124軍 소속 게릴라 31명의 청와대 습격기도 사건) 직후에 필자가 前方 GOP 소대장으로 복무했던 때의 일이다. 소대원들은 소대의 地下벙커와 교통호를 직접 축조했다. 우리가 사용했던 자재는 6·25 전쟁 때 미군이 설치한 후 그냥 내버려두고 갔던 DMZ 안의 무수한 철조망과 탄피 등이었다. 그때 농민의 자제가 다수였던 우리 소대원들은 그런 것들을 수거해 그것으로 못과 철사 등을 만들고 야전삽으로 찍어낸 목재를 기둥으로 세워 地下벙커를 훌륭하게 건설했다.
 지금, 우리 군은 북한군의 땅굴전략을 無力化(무력화)시키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북한의  핵실험 이전까지, 굶주리는 북한 주민을 돕는 식량·비료 지원은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지만, 현시점에서 북한군의 備蓄 兵糧(비축 병량)이 될 쌀이나 적 陣地(진지)의 보강에 필요한 시멘트 등의 지원은 사실상 利敵(이적)행위다.          
 유엔 공군은 1951년 8월의 철도 폭격에 이어 給水(급수)·給炭(급탄) 시설, 信號所(신호소), 操車場(조차장), 역, 수리공장 등 갖가지 시설을 폭격했다. 이 때문에 중공군과 북한군의 수송력이 격감했다.    
 이와 같은 폭격은 무려 10개월간 계속되었다. 미국의 極東軍(극동군)만으로도 8만7522機가 출격, 戰果(전과)는 철도 절단 1만9000개所, 트럭 파괴 4만3211대, 기관차 파괴 276량, 철도화차 파괴 3820량에 달하는 심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유엔 공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52년 봄이 되어도 공산 측 대표는 판문점의 휴전회담에 있어서 타협의 징후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스트랭글 작전에도 불구하고 적의 兵站線(병참선) 차단에 성공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다음은 중공군 부사령관 겸 후근사령관 洪學之(홍학지)의 회고록 중 관련 부분의 발췌이다.

<1951년 7월부터 1952년 6월까지 미군은 공군의 70%를 집중해, 거의 1년간 ‘질식전’을 전개, 각종 수단을 동원해, 아군(중공군)의 후방수송을 파괴했다. 그러나 아군(중공군)의 수송은 중단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1952년 5월 중순, 철도수송은 도리어 1개월 반을 앞당겨 임무를 달성했다.>

 1952년 5월31일, 밴플리트 8군사령관은 기자회견에서 “유엔군의 공군과 해군이 총력을 기울여 공산군의 보급을 차단하려 했지만, 공산군은 믿을 수 없는 만큼 완강하게 물자를 전선으로 운반해 우리를 놀라게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스트랭글 작전이 실시되지 않았더라면 적은 몇 배의 砲迫彈(포박탄)을 우리 머리 위로 내려 보냈음에 틀림없으며, 따라서 空爆(공폭)은 적의 전투능력을 減殺(감쇄)했던 주요 요소였다“고 강조했다. 

“땅굴 팔 때는 7防의 要件을 고려하라”

1951년 여름·가을 방어 작전 후 중공군은 일반적인 야전공사, 이를테면 참호·교통호 구축만으로는 유엔군과 持久戰(지구전)을 벌이는 것이 힘들다는 데 공감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땅굴이었다. 여름 방어 작전 후기, 특히 가을 방어 작전에서 중공군 병사들은 폭격을 피하기 위해 산기슭에 단순한 규모의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그러던 것이 기존 땅굴을 보다 깊이 파낸 뒤 이웃한 2개의 땅굴을 서로 연결해 말발굽 모양(U)의 땅굴로 발전시켰다. 미군의 폭격이 시작되면 중공군 병사들은 잽싸게 땅굴로 들어가 몸을 숨길 수 있고, 한국군과 유엔군의 보병이 다가올 때면 뛰쳐나가 白兵戰(백병전)을 벌일 수 있어 一石二鳥(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다음은 중공군 부사령관 洪學之의 증언이다.
 
<이 같은 땅굴이 일부 전선에서 예상 외로 좋은 효과를 거두자 彭德懷(팽덕회) 사령관은 좋은 평가를 내렸다. 1951년 10월 지원군(중공군) 사령부는 全軍(전군)에 땅굴공사를 적극적으로 전개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인민지원군(중공군)의 全전선에 걸쳐 땅굴 파기 열풍이 불어 닥쳤다. 이러한 열풍은 지원군의 防禦前哨(방어전초)에까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한국군과 유엔군은 지상에서 야포를 쏘았지만, 중공군은 지하에서 폭약을 터뜨려 땅굴 만들기에 주력했다. 지상과 지하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쿵!’ ‘쾅!’ 거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중공군의 땅굴 만들기 장비는 무엇이었을까? 이어지는 洪學之의 증언.

<지원군(중공군) 병사들은 한 손에 총, 다른 한 손에는 곡괭이를 잡고 땅꿀 파기에 온 힘을 쏟았다. 처음 시작할 때는 前線(전선)마다 조그만 대장간을 만들어 못 쓰게 된 폭탄 조각·고철을 있는 대로 긁어모아 곡괭이, 호미, 끌 등 땅굴 뚫는 도구를 만들었다. 제12군의 경우 8개월 동안 40여 곳의 대장간을 만들어 1만6천여 점의 땅굴 뚫는 도구를 만들었다.
 그러나 땅굴 파기가 계속 확대되면서 도저히 수요를 채울 수 없었다. 그래서 공병지휘소는 瀋陽(심양)에 기재처를 만들어 땅굴 파기 기재의 생산·수송을 책임지게 했다. 또 평양, 三等(삼등), 陽德(양덕)에는 땅굴기재 공급기지를 세워 일선부대 등에 기재를 공급했다.>
 
 1952년 2월, 유엔군은 중공군이 땅굴 공사에 주력하는 것을 알고, 중형 포탄과 폭탄 등을 집중적으로 투하해, 일부 不實(부실) 땅굴이 무너졌다. 당연히 壓死(압사)하는 중공군 병사들이 많았다. 언 땅이 풀리면서 자연 붕괴하는 땅굴도 적잖았다.

<지원군(중공군)사령부는 땅굴을 팔 때 반드시 다음과 같은 7防(방)의 요건을 고려하도록 전군에 지시했다. 즉, 공습에 안전하고(防空), 포격에 무너지지 않고(防砲), 독가스에 당하지 않으며(防毒), 비(防雨)·습기(防濕)·불(防火)·추위(防寒)를 피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 일곱 가지 필수조건이었다.>    

1952년 봄까지의 6개월 만에 중공군은 先頭陣地(선두진지)만으로 190km에 달하는 땅굴(坑道)을 팠다. 이제 중공군은 땅굴을 중심으로 하는 방어 시스템을 구축하기로 결정했다.

“지하 만리장성 형성”

 1952년 4월26일∼5월1일 중공군 사령부는 軍참모장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는 땅굴공사가 갖는 작전상의 역할에 대해 인식을 통일했다. 땅굴은 유엔군의 火力(화력)으로부터 중공군의 병력과 물자를 보존하는 데 효과적일 뿐만 아니라 한국군·유엔군에게 기습공격으로 타격을 가할 수 있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1952년 5월 말까지 중공군 제1선 방어진지에 땅굴공사가 기본적으로 완성됐다. 중공군 사령부는 6월 中和(중화)∼沙里院(사리원)∼伊川(이천)∼회양을 연결하는 제2선에 땅굴을 파서 방어선을 두텁게 했다.
 이어 1952년 8월 말, 중공군은 東西 해안에 집중적으로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중공군 제1선 제1제대 6개 軍[군단]은 땅굴 약 200km, 참호·교통호 약 650km, 각종 화기엄폐물 1만여 개를 건설했다.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동서 250km의 모든 전선에 폭 20∼30km의 방어선을 갖추었고, 땅굴을 핵심으로 하는 據點式(거점식) 진지방어체제를 이룩했다. 중공군 지도부는 ‘難攻不落(난공불락)의 地下 만리장성’을 만들었다고 자랑했다. 땅굴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우리가 대처해야 할 문제라는 점에서 洪學之의 회고록을 다시 인용한다.

<땅굴을 핵심으로 한 據點式(거점식) 방어체계는 참호 방어체제와 거점 방어체계가 발전한 것이며, 아군(중공군)이 처음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러한 방어체계 형성은 아군(중공군) 방어 작전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중략) 1952년 5월 이후 아군(중공군)의 진지가 공고해짐에 따라 아군은 전선 전반에 걸쳐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소·분대 전술을 십분 활용했다. 저격병을 동원해 전선에서 상대의 돌출된 중대·소대 진지를 집중적으로 공략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진지마다 배치된 특등사수, 명사수들은 땅굴진지에 몸을 숨긴 채 상대의 노출된 목표물을 명중시켰다. 1952년 5∼8월 사이, 저격활동만으로 상대 병력 1만3천여 명을 살상했다.>

 공산군에 있어 땅굴은 인명 보존의 효과 외에도 물자보존에도 유리했다. 1952년 상반기, 중공군 병참부대는 미군의 ‘窒息戰’(질식전·Strangle)에 맞서 땅굴로 된 지하창고를 대량으로 건설했다. 1952년 5∼6월, 중공군 후근사령부는 차량 1200여 대의 물자를 수용할 수 있는 창고를 만들었다고 한다.
 땅굴진지의 완성에 의해 유엔군의 北上은 막대한 병력 손실 없이는 불가능해졌다. 또한, 땅굴을 중심으로 하는 방어전에의 全面(전면) 전환은 國共內戰(국공내전) 이래 중공군이 사용해온 運動戰(운동전)이라는 기본전술의 변화를 의미했다.
 그 대전환은 兵站(병참)지원, 각 軍種(군종)·兵種(병종)의 협동작전 등 近代的(근대적) 작전양식으로의 進化(진화)를 의미했고, 중국의 군사전략과 전술의 조정에도 직결되었던 것이다. 중공군은 한국전쟁에서의 시련을 거쳐, 게릴라戰法(전법), 運動戰(운동전) 밖에 몰랐던 前近代的(전근대적) 군대로부터 在來戰(재래전)이라면 미국과도 겨룰 수 있는 근대적 군대로 급성장했던 것이다.  
  
땅굴진지의 약점: 혀가 갈라지고 코피가 난다

 땅굴은 여러 가지 장점을 지니고 있었으나 문제점도 적지 않았다. 다음은 이와 관련한 중공군 부사령관 겸 후근사령관 洪學之(홍학지)의 회고이다.

<가장 심각한 것은 병사들이 하루 종일 햇빛을 볼 수 없고, 등잔불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이다. 등잔불은 포탄의 탄피나 주전자 뚜껑, 찻잔 등 닥치는 대로 구할 수 있는 그릇에다 솜으로 심을 만들어 꽂고 콩기름을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점이 잇따라 나왔다. 통계적으로 볼 때 1개 소대가 60여m의 땅굴에 들어가 있으면서 8개의 등불을 켜게 된다. 중대 전체로는 30여 개의 등불을 켠다는 계산이다. 속담에 “물 한 방울이 바다를 이룬다”고 하듯이 燈(등) 하나에 콩기름을 쓰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지만, 1개 대대, 1개 연대가 모조리 등잔불을 켠다고 하면 기름 사용량은 엄청나게 되는 것이다.
 또 등잔불 하나를 잠깐 켠다면 문제가 아니지만, 오랜 기간 켜야 한다면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당시 某부대 9중대는 16개의 땅굴을 지키고 있었는데, 총길이가 600여m가 되었다. 한 달에 400 근의 콩기름을 소모했다.
 그러다 보니 1개 軍[군단]에서 매월 10만 근의 콩기름을 사용했다. 어떤 곳에서는 아예 식용기름을 등잔불 켜는 데 轉用(전용)할 정도로 심각한 실정에 이르렀다.> 

 1960년대에 이미 북한군은 全 국토의 요새화를 이룩했다고 자랑해 왔다. 휴전 이후에도 중공군의 땅굴을 꾸준히 계승·발전시켜 왔다는 얘기이다. 그렇다면 우리 국군이 주시해야 할 북한 땅굴의 약점은 무엇인가. 다음은 그 약점을 간파할 수 있는 중공군 후근사령관 洪學之의 증언이다.

<기름등을 켤 경우 땅굴 안에 산소가 부족하기 쉽다. 오랫동안 호흡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만성 기관지염에 걸렸다. 그래서 다들 기름연기를 줄이는 방법을 생각했다. 燈(등) 주둥이에 깡통 한 개를 덮어 놓는다, 깡통 안에 숯을 넣는다, 등불 주둥이에서 올라가는 연기는 직접 숯에 흡수돼 공기오염을 줄여준다. 병사들은 이런 등불을 節油無煙燈(절유무연등)이라 불렀다.>

땅굴이 주로 산기슭에 있다 보니 식수난이 심각했다. 대개 水源(수원)이 멀리 떨어져 있고, 더구나 유엔군의 폭격·포격이 치열했던 만큼 물 깃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땅굴 안의 병사들은 식수가 부족해 혀가 갈라지고 코피가 터지는가 하면 음식을 제대로 씹어 넘기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지원군(중공군) 후근사령부는 생각다 못해 땅굴마다 시멘트 저수통을 만든 뒤 여유가 있을 때 탄피를 두드려 만든 물통 등으로 물을 길어 저장하는 방법으로 식수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기도 했다. >

 약사와 의사에 따르면 눈이 침침해지고 혀가 갈라지고 질병은 식수 부족보다 피로와 영양부족, 그리고 스트레스 때문이다. 당시 중공군이나 북한군에게 비타민A·비타민E 등의 건강보조제가 있을 턱이 없었다. 지금도 북한군 병사들은 면역력 약화 및 정력 감퇴 등의 早老(조로)현상을 보이고 있다.   

왜 북한 남자의 키는 남한 남자보다 15cm나 작은가
 

 2016년 2월 북한이 제4차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감행하자, 한국 정부는 지난 10여년 동안 開城(개성)공단의 가동을 위해 개성 지구에 보냈던 전기를 끊었다. 그 전기는 개성 지구의 食水(식수) 생산에도 사용되고 있었다. 남북 관계가 좋았을 때는 年 20만∼30만의 쌀과 엄청난 시멘트도 보냈다. 북송된 쌀은 북에서 군량미로 비축되고, 시멘트는 땅굴진지 보완 공사에 轉用(전용)되었을 것이다.
 인도적·전략적 見地(견지)에서 전기·쌀·시멘트를 북한에 보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의 수도권을 노리는 적을 강화시킨다는 점에서 매우 신중한 대처가 필요했다.    
 6·25전쟁 당시, 전쟁터에서는 “해는 미군 것이요, 달은 중국군의 것”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중공군은 공군의 지원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행군이나 수송 등 모든 작업을 야간에 치러야 했다. 중공군은 장기간 미숫가루를 식사 代用(대용)으로 먹어 영양이 부족한 데다 땅굴공사를 진행하면서 극도의 피로가 쌓여 많은 병사들이 夜盲症(야맹증)에 걸렸다. 물론, 비타민A 등 필수 영양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다음은 중공군 후근사령관 洪學之의 회고.

<야맹증 환자의 속출은 아군(중공군)의 야간작전 수행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지원군 부사령관 겸 후근사령관인 나는 이 문제 해결에 골머리를 앓았다. 우리는 중국에서 땅콩, 신선한 채소, 동물의 肝 (간) 등의 식품을 수송해 왔지만, 절대량이 부족해 별다른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이럴 즈음, 조선인들이 야맹증을 치료하는 전통 민간요법을 추천해 왔으며, 이로써 큰 효험을 보았다. 하나는 솔잎을 삶아 탕으로 마시는 것이다.(중략)
 솔잎을 큰 솥에다 넣고 1시간 남짓 삶아 그 물을 마시면 된다. 맛은 약간 쓰지만, 6∼7일 거푸 마시면 눈이 다시 밝아지는 것이다. 조선 천지에 소나무가 있으니 솔잎 탕을 만드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두 번째는 올챙이를 먹는 것이다. 이것도 민간요법이다. 올챙이는 개구리로 변하는 것이니 얼마나 영양가가 높겠는가? 방법은 살아 있는 올챙이를 잡아 주전자 안에 넣고 물을 조금 붓는다. 팔팔 끓인 뒤 마시면 된다. 하루에 2∼3번 마시면 효과를 볼 수 있다. 조선은 도처에 강이나 못이 있어서 올챙이가 특히 많아 구하기가 수월했다. 우리는 각 부대에 올챙이를 잡아 끓여 마시도록 했다. 이 두 가지 민간요법에다 식품공급이 꾸준히 개선돼 영양을 보충하자 야맹증은 곧 사라졌다.>

 
 短期戰(단기전)에서 땅굴은 매우 유효하지만, 長期戰(장기전)에서는 병사들의 무덤이 되기 쉽다. 땅굴 속에 보관해 둔 무기와 장비는 벌겋게 녹슬게 마련이다. 필자도 1년간 전방의 지하벙커에서 기거해 보았지만, 잠을 자려고 침상에 누으면 천정으로부터 온갖 벌레가 뚝뚝 떨어져 얼굴 위로 기어 다녔고, 자고 나면 온몸이 물에 젖은 듯 눅눅해졌으며, 한창 나이였는데도 불구하고 한동안 눈이 침침해졌다.
 도시 출신인 필자는 농촌 출신 병사들보다 체질적으로 野戰(야전)에 약하다는 점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래서 兵法(병법)에서 “募兵(모병)은 농촌에서 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 같다. 그때, 필자는 본능적으로 소나무 잎이 입에 당겨 틈만 나면 한 웅큼씩 뜯어서 입안에 집어넣고 그냥 꾹꾹 씹고 다녔다. ‘솔잎 탕’은 아니더라도 ‘솔잎 즙’은 먹은 셈이었다.
 인공위성이 촬영한 북한 땅을 살펴보면 그곳은 나무가 별로 보이지 않는 민둥산 투성이다. 김정일 생존 당시, 식량 증산을 위해 ‘다락밭’을 造成(조성)한다고 산의 나무를 벤 끝에 비만 오면 황폐해진 산지의 土砂(토사)가 흘러내려 강을 매웠고, 그로 인해 홍수가 빈발함으로써 북한 땅을 불모지로 만들었다. 지금 북한 땅, 즉 ‘어둠의 왕조’에는 소나무나 올챙이조차 自生(자생)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땅굴 생활을 오래 하면 內部(내부)의 산소 부족 등으로 폐질환을 앓기 쉽고, 정력 감퇴, 체격 왜소, 면역력 약화 등도 피하기 어렵다. 지금 북한 남자의 키가 남한 남자보다 무려 15cm 이상 작은 데는 영양 결핍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原罪(원죄) 중 하나가 10여년 간의 열악한 환경 속의 軍복무와 땅굴 생활에 있음을 결코 輕視(경시)할 수 없다.

 2012년 8월, 중서부전선의 최일선인 사미천(임진강의 지류) 철책을 지키는 승전대대(옛 고랑포 대대 주둔지)의 GOP소대에 19세의 북한군 병사가 귀순해 왔다. 사미천은 서울 북방 60km, 개성 동쪽 30km 지점이며, 1950년 10월, 백선엽 준장의 국군 제1사단이 평양 공략을 위해 이곳 고랑포에서 北上했다.
 바로 고랑포의 사미천 GOP소대에서 1968년 필자는 소대장으로 복무했다. 2016년 4월14일 14시경, 필자는 48년 만에 사미천 철책선소대를 찾아갔다. 필자를 안내한 비룡사단 지승호 중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귀순 당시의 그 북한 병사는 키 155cm, 몸무게 40kg으로 매우 왜소했다. 귀순 2년 후(2014년)에 그를 비룡사단에서 초빙했는데, 그는 아반테 승용차를 손수 운전해서 왔다. 이때의 그는 키 165cm, 몸무게 56kg으로 변해 있었다. 제빵회사에 취업한 그는 자기 머리칼을 노랑색으로 염색한 멋쟁이였다.”

 필자가 사미천 철책에서 근무할 때 그 북방 3∼4km에 있었던 북한군 하사관학교의 피훈련 병사들이 ‘담력훈련과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밤중에 자주 다가와 우리 쪽을 향해 총질을 하고 도주했었다. 북한 정권은 백성과 군인들을 잘 먹이지 못하면서도 돈 드는 핵무기와 마사일 개발에 광분하고 있다.    
   이런 악행으로 민족 DNA의 劣性化(열성화)에 광분해 온 金哥(김가) 정권 3代는 민족사에서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 이런 진실을 북한 병사들에게 알려줘야 할 前方(전방)의 對北(대북) 스피커 방송을 한동안 철거한 것은 이런 金哥(김가) 왕조의 역사적 과오를 묵과하는 이적행위였다.     
 48년 전, 사미천은 “물 반, 물고기 반”이라고들 했다. 필자는 사미천에서 잡은 물고기로 튀김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2016년 4월14일 답사 때, 사미천 GOP 병사들에게 조갑제닷컴이 선물하는 《宋의 눈물》, 《이순신의 절대고독》 등을 전달하면서 “요즘도 사미천에서 물고기를 많이 잡아 먹느냐?”고 물었다.
 옛 병사들보다 체격이 훨씬 커졌고 영양상태도 좋아 보이는 사미천 철책선 소대 병사들은 “사미천에 물고기가 많은 것 같지만, 잡지는 않는다”고 대답했다. 눈짐작으로도 사미천은 그때처럼 깊지가 않고 군데군데에 작은 모래톱들이 형성되어 있었다.
 

敵의 제2전선… 지리산 빨치산

 6·25전쟁은, 일선에서 정규군 간의 전투 이외에도 아군의 후방지역에서 非정규군(게릴라부대)과의 전투도 동시에 벌어졌다. 6·25전쟁이 複合(복합)전쟁이라고 불리는 까닭이다.
 6·25남침전쟁이 일어나자 智異山(지리산)에 숨어있던 공비들도 준동하기 시작했다. 남로당 간부였던 李鉉相(이현상)의 제2병단은 낙동강전선을 방어하던 국군과 유엔군의 후방으로 침투하여 광범위한 지역에서 북한군의 釜山 공략작전을 지원했다.
 그러나 이현상은 유엔군의 仁川상륙작전에 의해 전세가 역전되자, 200여 명으로 줄어든 외로운 잔당을 이끌고 도주의 길에 올랐다. 그들이 북부 강원도 금강산 남방인 洗浦郡(세포군) 후평리에 도착한 것은 1950년 11월 초순이었다.
 후평리에서는 6·25 남침전쟁 초기에 司法相(사법상) 겸 서울시인민위원장으로 敵治下(적치하)의 서울에 들어와 있던 李承燁(이승엽)이 ‘조선인인유격대 총사령관’의 직책을 달고 후퇴하는 패잔 낙오병·기관원 등을 수습해서 유격대로 편성해 다시 남하시키는 공작을 하고 있었다. 이승엽은 이현상에게 反轉(반전)·南下 명령을 하달했다. 이승엽·이현상은 둘 다 朴憲永(박헌영)의 直系(직계)이며, 舊(구) 조선공산당 시절부터의 동지였다.
 이승엽으로부터 남한 유격대의 통일적 지도를 위임받은 이현상은 유격대를 再편성했다. 그는 제2병단 당시의 舊대원들(그때까지 麗順반란사건의 관련 사병들이 상당수 남아 있었음)을 基幹(기간)으로 하고, 후퇴 중이던 소위 ‘의용군’(남한 출신으로 징집된 적군) 중 낙오병, 그리고 당원과 부역자 등을 지원 형식으로 포섭해서 대열을 정비·보강하고, 1950년 11월 중순에 국군과 유엔군의 北進(북진) 물결을 거슬러 다시 南下(남하)의 길에 올랐다.
 남하 중의 이현상 부대는 충북 남부인 永同(영동) 부근에서 京釜線(경부선)의 열차통행을 위협하다가 충북·경북·전북 3도의 접경지대인 民周之山(1242m)에 일시 머물었다. 이어 이들은 전북의 북동부 무주 德裕山(덕유산·1614m)에 이르러 ‘송치골’이란 곳에다 거점을 잡았다.
 1951년 5월 중순, 이 송치골에서 이현상 주재 하에 처음으로 ‘남한 6道黨(도당) 위원장 회의’가 열려 남한 전역에 대한 유기적인 빨치산 조직체계를 형성하고 투쟁방안을 협의했다.
 
 이현상은 송치골 회의에서 남한 빨치산의 총수가 되었고, 각 道 유격부대는 사단 편제로 개편되어 이현상이 사령관인 ‘南部軍(남부군) 사령부’의 지휘 하에 들게 되었다. 1951년 8월, 700명 규모의 남부군은 경남 산청군 丹城面(단성면)의 立石마을에 도착했다. 그때의 감격을 李泰(이태)의 수기 《南部軍(남부군)》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동무들! 저기가 달뜨기요. 이제, 우리는 智異山(지리산)에 당도한 것이요!” (중략) 달뜨기는 그 옛날 여순(반란)사건의 패잔병들이 처음으로 들어섰던 지리산 初入(초입)―남부군은 기나 긴 여로를 마치고 종착지인 지리산에 들어선 것이다. 제2병단 이래 3년여의 그 멀고 험난했던 길을 이제 다시 그 출발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여순(반란) 이래의 舊(구)대원들이 마치 고향을 그리워하듯 입버릇처럼 되뇌이던 달뜨기—. 이현상이 ‘지리산에 가면 살 길이 열린다’고 했던 빨치산의 메카 지리산에 우리는 마침내 당도한 것이다.>
     
 남부군은 이후 立石(입석)마을→熊石峰(웅석봉·1099m)을 거쳐 산청군 矢川面 德山里(시천면 덕산리)와 三壯面 大浦里(삼장면 대포리)에서 그들의 지리산 진입을 막는 경찰대의 보루를 뚫고 지리산에 잠입했다. 그것에 대해서는 뒤에서 거론할 것이다.           
 1950년 가을, 유엔군의 북진 중에 미 제9군단이 게릴라 토벌작전을 벌였고, 국군 제3군단(제2‧제5사단)이 창건되면서 미 제9군단의 임무를 승계했고, 그 후에도 미 제1해병여단, 국군 제11사단 등도 게릴라 토벌을 계속해 왔다. 

 여기서 당시의 전·후방 사정을 잠시 살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51년 늦봄에 이르러 게릴라 활동이 약간 움츠러들면, 유엔군은 全사단을 제1선으로 불러들이고, 후방에는 국군 경비대대 10개를 배치, 補給幹線(보급간선)의 경비 및 치안의 유지를 맡기고 있었다.
 1951년 7월10일, 휴전회담이 시작되고, 협상에서 공산 측의 高자세를 꺾기 위한 유엔군의 공세가 개시되자, 게릴라 활동도 또다시 활성화했다. 게릴라부대인 남부군은 점차 지리산에 집결하여 ▲휴전회담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한 압력 ▲유엔군 공세에 대한 견제 ▲월동준비 등을 노리고 1951년 9월 말경부터 습격·약탈·방화·납치 등을 잇달아 저질렀다. 그 수는 약 2만 명. 군사조직을 지니고 박격포까지 장비하고 있어 경비대대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白善燁 장군의 지리산 토벌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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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공비토벌 상황도


 1951년 10월 하순, 판문점에서 재개된 정전회담이 우여곡절을 겪을 무렵, 또다시 지리산 일대가 소란스러워졌다. 지리산 토벌에 참가했던 金點坤(김점곤·1962년 육군 소장 예편 후 경희대 교수 역임) 장군의 증언에 의하면 빨치산들은 월동준비를 하고 휴전회담을 지원하기 위해 제2전선의 활동을 강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부지구전투사령부(金容培 준장)는 10여개의 예비연대 및 경찰대대를 통솔해서 토벌에 노력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가 오르지 않았다. 사태를 우려한 한국 정부는 정규군에 의한 토벌을 미 제8군에 요청했다.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대장은 동해안에서 적과 전투중인 국군 제1군단장 白善燁(백선엽) 소장을 비밀리에 서울로 불러, 지리산 게릴라의 토벌을 협의했다. 白 소장은 제1선으로부터 추출한 수도사단(宋堯贊 준장)과 제8사단(崔榮喜 준장)으로 지리산 토벌부대를 편성했다. 이후 이 부대는 ‘白야전전투부대’라 불렸다.
 실제로 사령부의 편성에 착수한 것은 1951년 11월 하순. 작전 개시는 12월1일로 지정되었고, 따라서 작전 준비기간은 10일간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사령부의 주요인사는 ▲사령관  백선엽 소장(직전에 제1군단장) ▲참모장  김점곤 대령(직전에 제12연대장) ▲고급참모 孔國鎭 대령(직전에 제1군단 작전참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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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국진 대령(예비역 육군 준장)

 작전방침은 1951년 11월16일부의 육본작전명령 제26호에 의해 하달되었지만, 실은 지리산 지구의 토벌에 익숙했던 공국진 참모가 기안했다고 한다. 그가 기안했던 작전계획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⓵ 지리산 지구에서 준동하고 있는 共匪(공비)는 새로 북에서 남하한 것이 아니다. 아마, 여순반란사건의 잔당, 낙동강 전투 이래의 북한군 패잔병, 북한군의 점령 중에 세뇌당해 이제 와서 歸鄕(귀향)이 가능하지 않는 자 등의 집합체일 것이다. 
 ⓶ 공비와 양민의 식별이 어렵다. 잘못하면 토벌하지 않는 쪽이 오히려 나은 결과가 된다. 따라서 전략촌 구상을 철저하게 구체화해 공비와 양민의 분리를 꾀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강력한 정부의 지원과 지도를 필요로 한다.
 ⓷ 기동력을 기습의 요소로 삼는다. 제8사단은 차량 기동에 의해 북방으로부터, 수도사단은 해상 기동에 의해 남방으로부터 일거에 지리산을 포위해 “한창 자고 있는 사이를 습격” 하는 형태로 기습한다.
 ⓸ 포위망을 압축하면 게릴라는 당연히 틈을 노려 도피할 것이다. 그러나 그 퇴로는 예측 가능하기 때문에 미리 경찰대를 배치하여 포착한다.
 ⓹ 경찰대가 놓친다면 중점지구에 병력을 집중 轉用(전용)해 추격·토벌하고, 이를 몇 번이라도 되풀이한다.

 공비토벌작전에서 白 사령관이 가장 고심했던 것은 어떻게 하면 주민의 신뢰를 얻는가 하는 것이었다. 토벌의 당초, 주민의 협력은 극히 소극적이었다. 주민은 군에 일종의 두려움과 의심을 갖고, 겉으로만 복종하는 체했다. 居昌(양민학살)사건 등이 발생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 이유에 대해 육군본부가 발간한 《공비토벌史》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이때까지의 토벌은 미온적으로 철저성을 결하고 있었다. 토벌해도 곧 철수하는 것으로서, 공비는 즉각 되돌아와서 군에 협력한 주민들을 숙청했다. 따라서 주민은 공비의 뜻에 반하지 않았던 셈이다. 또 군경의 비위행위도 적지 않았고, 寢所(침소) 및 음식물의 제공을 강요한다든지, 노무를 강제했던 사례조차 있어 주민의 반감을 사고 있었다.>


“숨통을 끊어놓지 않는 게릴라 토벌은 헛수고다”

 여순반란 사건 이후 지리산은 위험지대였다. 군경도 잠시 들어갔다가 곧 철수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토벌군은 빨치산 요새로 일컬어지던 지리산 및 回文山(회문산), 덕유산 등을 어렵잖게 토벌하고 매일 매일 게릴라를 추격해서 捕殺(포살)했다. 주민들은 센 쪽에 붙게 마련이다. 
 더욱이 白야전사는 스스로 보급하고, 宿營(숙영)은 공공시설 및 천막에서 해결해서, 조금의 민폐도 끼치지 않았다. 그뿐인가, 공비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자에게는 상금을 주고, 공비가 들어오면 서둘러 달려와 토벌했다. 그리고 공비에 의해 불탄 마을의 복구를 원조하고, 생계도 도와주었다. 물론 공비처럼 미곡을 징발하는 일도 없었고, 노동을 강제하는 일도, 가담을 강요하는 일도 없었다.
 한편 공비는 매일 격멸되어 전날의 위세를 잃어가고 있었다. 더욱이 衣食(의식)에 궁하고, 숨을 장소도 잃은 공비는 생존을 위해 주민을 습격하는 일이 잦게 되었다. 주민에게는 군에 편드는 것이 得(득)이었고, 안전했다. 원래 공비가 없으면 생활이 어렵지도 않고, ‘2중 징세’를 당하는 일도 없게 마련이었다. 또 마을의 自警(자경) 및 不意(불의)의 방문객(토벌군 및 빨치산)을 위해 不寢番(불침번)을 서지 않아도 되었다.
 군을 믿기 시작한 주민은 드디어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나아가 정보를 제공하고, 스스로 마을 지키게 되었다. 이에 대해 백선엽 장군은 공비 토벌의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군은 강하고, 또 올바르다는 것이 공비 토벌의 전제이다. 공비의 주력을 때려 그 分散化(분산화)를 기하고, 경찰과 협력해서 그 하나하나를 捕捉(포착)한다. 그리고 戰果(전과)와 실적을 주민에게 주지시킨다. 이리하여 주민이 군에 편드는 것이 得(득)이라고 믿어주면 성공한 것과 마찬가지다. 주민과 일체로 된 데다 추격에 이은 추격, 토벌에 이은 토벌로 공비의 숨통을 끊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토벌은 공비와의 끈기 겨루기에 다름 아니다. 지휘관은 굳은 결심, 불굴의 투지, 堅引持久(견인지구)의 정신이 필요하다. 부대는 자칫하면 小成(소성)에 만족하거나, 피로한 나머지 숨통을 끊는 것을 게을리 하기 쉽다. 숨통을 끊는 일격을 가하지 않으면 게릴라 토벌의 의미는 없다…. 중국 공산당이 농촌을 제 편으로 만들어 國府軍(국부군)을 치고 도시를 제 손에 넣은 것처럼 게릴라 토벌에서는 게릴라를 쳐서 주민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면 자연히 치안이 회복 된다….>

“토벌에 3개월이나 걸린 것은 빨치산사령부를 놓쳤기 때문”
        
토벌 당시의 김점곤 참모장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그 후 알게 된 것이지만, 在來(재래) 공비는 월동을 주장하고, 북으로부터 파견된 南部軍(남부군)은 휴전회담을 지원하기 위한 무력활동을 주장해서, 의견불일치로 되었던 것 같다. 정보에 의하면 남파 게릴라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월동준비 및 지하로 숨는 준비도 제대로 갖추는 것 없이 지휘소를 설치해서 너무 큰 그룹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것을 때리는 데에는 김치 및 식량을 모아놓고 있는 근거지를 치면 뿌리 없는 풀 신세에 처한 빨치산의 捕捉(포착)은 용이할 것이라 생각했다. 군은 게릴라의 근거지를 覆滅(복멸)하고 逃散(도산)하는 게릴라는 경찰부대가 포착하는 것으로 하고, 지구의 주민은 전략촌에 疏開(소개)시키는 것으로 했다.
 1951년 12월1일을 기해 지리산 공격을 시작했지만, 첫날에는 반격해 오는 빨치산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 행동에 통일성이 없고,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그 후 조사에 의하면 빨치산 지휘부는 토벌군의 동향을 알고 반격할까, 回避(회피)하여 分散(분산)할까를 토의했지만, 결론을 내지 못한 가운데 기습을 받았던 듯했다. 제1선에서 적과 대치하고 있던 정예 2개 사단이 2∼3일로 지리산을 포위한다는 것은 게릴라의 기동척도로는 예상 가능치 않았을 것이다.
 주지하듯 지리산의 포위망을 4일 걸려서 쳤지만, 매일 포위망을 압축하자, 빨치산은 분산을 기도했다. 실은 지금까지는 빨치산이 반격을 가하면 군경이 물러가는 사례가 많았다. 이른바 微溫的(미온적)인 토벌이었던 것으로서, 이번에도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던 것 같지만, 매일매일 한발 한발 바짝 추적하는 토벌군에게 공포를 느낀 듯했다.    
 그래서 白야전사는 빨치산의 최고지휘부인 남부군사령부의 포착을 노려 기동예비대 2∼3개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제1선의 보고와 요청에 응해 逐次(축차) 사용하고 있던 중에 예비대를 모두 사용하고 말았다. 예비대 1개를 사용할 때마다 새로 예비대를 만들었지만, 길 없는 險山(험산)의 야간 이동이 많았기 때문에 제시간에 예비대를 쓰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빨치산의 사령부인 듯한 縱隊(종대)가 警戒幕(경계막)을 돌파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전후의 사정으로 생각해도, 또 無線(무선)정보로 판단해도 진짜 같았다. 그래서 사령부 요원을 비롯한 所在(소재)의 병력으로 추격대를 임시 편성해 급히 추격하고, 그 後尾(후미)를 따라잡아 약 200 명을 전사시켰지만, 주력은 白雲山(백운산)으로 도망해 들어갔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것으로서, 이 토벌이 3개월이나 걸린 것은 이때 빨치산 사령부를 놓친 때문이었다. 빨치산 토벌은 상식적으로는 장기간이 필요하지만, 나는 그때 빨치산사령부를 포착·제거했더라면 극히 단기간에 토벌을 끝냈고, 이것이 휴전회담에 좋은 결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지리산의 細石平田(세석평전) 및 老姑壇(노고단) 주변의 근거지를 토벌했는데, 여기엔 온돌을 갖춘 아지트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래서 추측한 대로 김치를 비롯한 식량 및 의류, 약품 등이 비축되어 있고, 여성들까지 모아두고 있었다. 
 이어 주민의 疏開(소개)에 착수했다. 목적은 빨치산이 되돌아와도 휴식소와 식량을 제공하지 않고, 주민을 납치해 세력을 보충하는 길을 막고, 빨치산의 情報源(정보원)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베트남에서처럼 대규모 수용시설을 만드는 것은 시간도 자재도 없었고, 또 만들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疏開(소개)된 사람은 농민이어서, 각자의 경지로부터 4km 이상은 떠나지 않는 것으로 정했기 때문이었다. 농민을 경지로부터 떼어놓으면 그 농민이 게릴라化할 두려움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4km 사방의 주민을, 그 지구에서 수용력이 가장 큰 마을에 모아 거주시키고, 필요한 경우에는 군용 천막을 빌려주고, 집을 짓는 자금을 교부했다. 그리고 이 마을을 경찰 및 예비연대에서 경호했다.
 이리하여 3개월간의 토벌을 매듭지었지만, 노획무기는 81mm박격포를 비롯해 소총 3900정이었고, 포로는 수만에 달했다. 뜻밖에 수가 많았던 것이다.
 또 빨치산의 구성도 생각보다 複雜多岐(복잡다기)했다. 대별해도 여수·순천반란 이래의 빨치산, 前 공산당원, 북으로부터의 파견대·문화공작대·政訓隊(정훈대), 낙동강변에서 무너진 북한 제2·제4·제6·제7·제9사단 등의 잔당,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한 자, 심파(공산주의 동조자), 납치되어 있던 良民(양민) 등이었다. 따라서 지휘부인 남부군도 이들을 용이하게 통일 지휘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上意下達(상의하달)을 중시하는 공산주의자가 조직에 실패했던 이유는, 물정을 잘 아는 在來(재래)의 빨치산과 사정을 모르고 임무에 충실했던 新來(신래)의 자와의 相剋(상극)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하더라도 이 토벌에서 가장 인상에 남았던 것은 ‘北’의 악독함과 집요함, 그리고 극도로 잔인한 빨치산의 수법이었다.>   

지리산 공비 토벌의 기지였던 사천비행장
 
  2015년 3월, 필자는 빨치산 南部軍(남부군)의 준동지구였던 지리산 일대를 답사했다. 泗川邑城(사천읍성) 부근의 숙소에 들기 위해 河東(하동)고개에서 2번 국도를 타고 100여리를 東進(동진)했다. 河東―완사(진양호 남쪽) 간 2번 국도 곳곳에서 2차선을 4차선으로 확장하는 공사가 진행중이었다.
 하동군의 橫川面(횡천면)에서 北川面(북천면)으로 넘어가는 구간에서 만난 早春(조춘)의 눈 덮인 산야는 仙境(선경)이었다.  횡천에서 북쪽으로 지리산 자락을 조금 오르면 ‘道人(도인)마을’로 이름난 靑鶴洞(청학동)이다.
 북천면을 벗어나면 바로 院田(원전). 원전으로부터 晋陽湖(진양호) 남단에 걸린 浣沙橋(완사교)를 지나면서 그 마을의 이름이 모래 沙(사)의 浣沙가 아니라 ‘빨 완(浣) 비단 사(紗)’의 浣紗로 바꾸면 훨씬 운치 있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요즘은 값싼 중국산 비단 때문에 좀 수그러졌지만, 예로부터 ‘진주 비단’은 이름이 높았다. 
 새암실고개 바로 밑 유수제1터널 앞에서 ‘사천공항→’이라는 교통표지판을 발견하고, 1049번 지방도로로 접어들었다. 慶全線(경전선) 유수역 앞을 지나 구불구불 좁은 길을 달리다가 축동면 塔里(탑리)에서 길을 바꿔 1002번 지방도로로 泗川空港(사천공항) 옆을 지나 泗川邑城(사천읍성) 인근 숙소에 도착했다. 초저녁에 굳이 가로등도 없는 좁은 지방도로를 달려 사천공항을 둘러본 이유가 있었다.
 사천공항은 지리산 공비 토벌 당시의 핵심기지였다. 白야전전투사령관의 白善燁(백선엽) 소장은 사천비행장에서 발진한 무스탕機를 타고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을 현장에서 지휘했다.
戰時(전시)에 최전선 2개 사단을 뽑아 후방작전에 투입하는 것은 일대 모험이었다. 그만큼 공비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특히 3개 道(도)가 만나고 산악이 중첩된 지리산 일대는 공비들의 심장부였다.
 “白 장군은 게릴라戰에 경험이 많다고 하니 작전을 맡아 주어야겠소. 작전에 차출될 병력은 2개 사단이오. 어느 사단을 선정할지는 귀관의 의견에 따르겠소.”
 밴플리트 8군사령관은 지도를 펴놓고 게릴라 토벌작전의 뼈대를 설명했다.

―大田 이남 지역은 작전기간 중 한국 정부에서 계엄을 선포한다.
―1개 사단은 해상기동으로 麗水(여수)에 상륙해 남에서 북으로, 1개 사단은 陸路(육로)로 이동해 북에서 남으로 각각 지리산을 포위·공격한다.   
―한국 공군은 지상부대를 직접 지원한다.
―작전의 세부계획을 육군참모총장 지시와 협조를 받아 수립한다.
―제8군과 유엔군사령부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미 극동사령부는 방송, 전단 살포 등 심리전을 지원한다.

 밴플리트 8군사령관은 2차 세계대전 후 그리스 군사지원단장으로 그리스軍을 도와 공산 게릴라를 소탕하는 데 공로를 세웠던 對게릴라전 전문가였다. 백선엽 장군은 지리산 공비 토벌에 동원될 부대를 宋堯讚(송요찬) 준장의 수도사단과 崔榮喜(최영희) 준장의 제8사단을 지명했다. 그동안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을 현지에서 수행해 오던 西南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金容培·김용배 준장)와 각급 경찰부대도 백선엽 소장의 지휘 하에 들어갔다. 흥미로운 것은 이때 지리산 토벌작전에 참가한 국군 장군 4명은 훗날 모두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다. 지리산 공비 소탕전에 국군의 에이스들을 기용했다는 얘기이다.
 江陵(강릉)비행장에 배치되었던 한국 공군의 무스탕 전투기 편대들도 鎭海(진해) 기지를 거쳐 泗川(사천)비행장에 이동 배치되어 對地(대지)공격 지원 채비를 마쳤다. 다음은 백선엽 장군의 회고.

<포위망이 지리산 정상 근처로 좁혀지자 공군의 활약이 눈부셨다. 타격부대는 전폭기 조종사들이 공비와 식별할 수 있도록 對空布板(대공포판)을 휴대하고 움직였다. 사단에 배속된 空地(공지) 연락장교가 항공 지원을 요청하면 인근  사천비행장에서 무스탕기 편대들이 단시간 내에 출격해 쫓기는 공비들에게 기총소사와 폭격을 가했다.
 나는 정찰기에서 공군의 무스탕기 움직임까지 소상하게 볼 수 있었다. 이때 활약한 파일럿은 金斗滿(김두만), 金成龍(김성룡), 金信(김신), 周永福(주영복), 玉滿鎬(옥만호), 張盛煥(장성환), 張志良(장지량) 등으로 당시 영·위관급이던 이들은 훗날 모두 공군참모총장이 되었다. 지금은 지리산을 횡단하는 등산코스인 노고단에서 반야봉과 세석평전을 거쳐 천왕봉에 이르는 능선에 공비들의 시체가 쌓였다. (중략)
 정찰기 타는 것도 위험했다. 지리산에는 강풍이 휘몰아치는 날이 많았기 때문에 항상 난기류였다. 에어포킷(air pocket)에 걸려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듯한 아찔한 경우를 하루에도 여러 번 겪었다. 정찰기로 우리나라 곳곳을 다녀봤지만, 지리산 상공과 대관령, 문경세재 상공은 늘 불안한 곳이다.>


 필자도 浦項에서 光陽까지 헬리콥터로 이동하면서 지리산 부근을 지나친 적이 있다. 조종사는 “일기가 불순할 때 지리산 주위를 한 바퀴 도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했다.
東京(동경)에서 인쇄해 온 전단도 넓은 지리산이 하얗게 덮힐 정도로 공중에서 살포되었다. 토벌기간 중 살포된 전단은 992만 장에 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남부군》의 저자 李泰 씨에 따르면 공비들은 이 전단을 공책, 담배 마는 종이, 뒤를 닦는 휴지 등으로 사용했고, 여성 공비들은 생리대로 애용했다고 한다.
 2015년 3월2일 아침, 사천공항과 그 곁의 공군비행장 앞에서 사진을 촬영하고 사천IC를 거쳐 남해고속도로를 달리다가 하동IC를 빠져 나와 19번 국도로 접어들었다. 섬진강 하구인 이곳에서 花開(화개)장터까지가 그 유명한 ‘하동포구 80리’이다. 하동읍을 지나면 李重煥(이중환)의 《擇里志》(택리지)에 화개와 더불어 山水(산수)가 아름답고 찬양한 岳陽(악양)이다.
 지리산 남쪽 기슭의 경승지 岳陽面(악양면)은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전남 光陽(광양)을 마주하고 있다.  光陽(광양) 쪽에 솟은 白雲山(1218m)도 절경이다. 이런 근사한 곳에 중국의 景勝地(경승지)에서 따온 岳陽樓(악양루)니 姑蘇城(고소성)이니 하는 따위의 이름을 붙이는 우리 古來(고래)의 事大主義(사대주의)가 한심스럽다는 느낌을 지을 수 없다. 우선 중국의 경승지를 흉내 낸 ‘岳陽’(악양)이란 이름부터 바꿔야 할 것 같다.

國寶의 총알 자국, 그리고 공비 1만9000명 捕殺

 1951년 12월1일 밤까지 수도사단은 光陽(광양)·河東(하동)·院旨洞(원지동)에, 8사단은 南原·雲峰(운봉)·咸陽(함양)으로 진출해 공격개시선에 집결했다. 작전개시 시각은 12월2일 아침 6시였다. 지리산을 포위한 3만여 병력이 산꼭대기를 향해 포위망을 좁혀 들어갔다. 토끼몰이와 같은 개념이었다. 다음은 백선엽 장군의 회고이다.

<나는 포위망을 좁히는 2개 사단을 타격부대, 작전지역 외곽 통로와 도주로를 차단하는 경비연대와 경찰부대를 저지부대로 구분했다. 타격부대의 틈을 뚫고 달아나는 공비를 남김없이 토벌하자는 구상이었다. 포위망을 좁혀가며 산골의 가옥과 시설을 모두 소각해 다시는 공비들이 거점으로 이용할 수 없도록 하고, 주민들을 구호소로 소개시켰다.
작전 첫날, 나는 화개장터 근처 兄弟峰(형제봉·1115m) 쪽으로 나가 보았다(注: 형제봉은 악양면과 화개면의 경계에 위치). 수도사단 26연대(연대장 李東和 대령)는 공비들과 정규전이나 다름없는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공비들은 박격포까지 쏘며 대항했고, 사방에 총성이 끊이지 않았다. 
 나는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주간에는 거의 정찰기를 타고 있었다. 부대와 공비의 움직임을 직접 내 눈으로 보고 사단장, 연대장에게 작전을 지시했다. 부대들이 상황 변화에 따라 순발력 있게 움직여 주어야 했으므로, 예하 지휘관들을 가장 많이 독려했던 전투가 바로 이 작전이었다고 기억된다.>

 白야전전투사령부는 경찰부대 등에 의해 지리산 外周(외주) 90km에 차단선을 구성하여 주민과의 접촉을 저지하고, 그 사이 비밀리에, 그것도 재빨리 수도사단과 제8사단을 이동시켜서 지리산을 포위했던 것이다. 그리고 12월2일, 제8사단을 북부로부터, 수도사단을 남부로부터 공격시켜 차례로 포위망을 압축, 12일간에 걸친 토벌전에서 약 3500 명의 공비를 捕殺(포살)했다. 이를 1기 작전이라고 한다.
 그러나 광대한 포위망을 벗어나 도주한 빨치산도 많았다. 白야전전투사령부는 즉각 추격에 나서 수도사단은 지리산 북방의 덕유산을 포위하고, 제8사단은 지리산 서북방 回文山(회문산)을 포위했다. 그리고 휴식의 틈도 주지 않고 압축·토벌, 12월 말까지 4000여 명의 공비를 사살하고, 4000여 명을 붙잡았다. 이것이 제2기 작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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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전남 담양에서 붙잡힌 빨치산과 부역자들. /<격동기의 현장>(눈빛社 刊) 촬영


 이어, 다시 지리산으로 도망쳐 온 공비들을 포위해 이것을 포살했다.<제3기 작전> 1952년 1월 말에 작전을 종료했을 때 白야전전투사령부는 모두 1만9000여 명의 공비를 捕殺(포살)했다. 이로써 국군과 유엔군의 후방은 안정을 되찾았다.      
 岳陽亭(악양정)을 지나면 곧 화개장터이다. 화개장은 조선시대에 섬진강의 水運(수운)을 바탕으로 번성했던 정기시장이었다. 국내에서 강우량이 가장 많은 화개천 골짜기에는 유별나게 다락논이 많았다. 지금 화개면은 음식점과 숙박업소가 많은 관광마을로 바뀌었다. 다음은 李重煥(이중환·1690∼1752)의 지리서인 《擇里志》에 기록된 絶句(절구)이다.

동쪽 나라 화개동은,
항아리 속의 별다른 천지여라.
仙人이 옥 베개를 밀치며 잠을 깨니,
세대는 벌써 천년이 지났는가.

花開장터는 떠도는 인생의 3거리
 
 花開洞(화개동)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렌다. “연방 꽃망울을 터뜨리는 동네”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1980년 여름, 필자가 여기서 나흘을 묵었던 때까지만 해도 花開(화개)는 위의 絶句(절구)를 방불케 하는 마을이었다.
 지리산의 골짜기로부터 흘러내리는 花開川(화개천)의 맑은 물은 화개장터 바로 밑에서 섬진강 本流(본류)로 흘러든다. 지금은 섬진강 本流(본류) 위로 경남과 전남을 있는 南道大橋(남도대교)가 걸려 있지만, 그때는 섬진강 兩岸(양안) 사이를 굵은 동아줄을 매어놓고, 나룻배의 船頭(선두)가 이 동아줄을 잡아당기면서 물살이 거센 兩岸(양안)을 오갔다.
 나룻배의 승객은 전라도에서 화개초등학교로 등‧하교 하는 학동들과 장 보러 오는 사람들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화개천변으로 나가 세수를 하면 은어 떼가 깡총 뛰어올라 하얀 배를 반짝이며 필자의 얼굴 가까이로 다가오곤 했다. 

 화개장터는 김동리의 단편소설 《역마》의 무대이기도 하다. 화개장터의 酒母(주모) 옥화의 아들 성기와 떠돌이 체 장수의 딸 계연은 서로 눈이 맞아 정분이 났지만, 곧 계연이 성기의 이모임이 밝혀졌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번민하던 성기, 그러나 그는 역마살이 낀 사내답게 엿장수가 되어 섬진강변을 따라 河東邑(하동읍) 쪽으로 길을 떠난다. 화개장터는 이렇게 역마살이 낀 사내와 여인이 오가며 잠시 만났다가 이리 갈까, 저리갈까, 돌아갈까로 망설이는 ‘인생의 3거리’가 아니겠는가?
 해방동이인 필자는 6·25 발발 당시에 그냥 헤는 나이로 여섯 살. 그때 우리 또래가 부르던 노래는 時代相(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대충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아버지는 피난 가다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형님은 빨치산으로, 동생은 국방군으로. 형님아, 손을 들어라! 동생아…♬”
 이 노래에서 형제는 기구한 운명의 장난이라 해야 할까, 빨치산과 국방군(국군의 당시 호칭)으로서 조우했던 것이다. 同族相殘(동족상잔)의 비극이란 이런 것이었다.    

 화개장터 거리에서 1023번 지방도로를 타고 ‘벚꽃길’을 5km 쯤 달리다가 雙磎寺(쌍계사)로 들어가는 용강교에 올라 花開川(화개천)을 건넜다. 화개천 바닥에는 10년 전에만 해도 집채 만한 바위돌이 무수하게 어우러져 있었다. 상계사의 ‘계’ 字는 시내 溪(계)가 아닌 돌 石 변의 磎(계)로 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러나 누가 슬쩍 자기 집 정원석으로 옮겨놓았는지, 화개천 바닥에는 지금 큰 바위돌이 사라져가고 있다. 
 쌍계사는 신라 문성왕 2년(840) 진감선사가 개창한 고찰이다. 쌍계사에는 국보 47호 眞鑑禪師 大空塔碑(진감선사 대공탑비)가 있다. 진감선사 대공탑비에 대해서는 《월간조선》 2003년 1월호 <鄭淳台의 국보기행>에서 기술했다.
 이 탑비에는 군데군데에 총알자국이 나 있다. 공비토벌 때 생긴 상처이다. 쌍계사에만 오면 35세 때의 필자가 다섯 살 먹은 아들을 업고 쌍계사 인근 佛日瀑布(불일폭포)에 올라간 일이 생각난다. 불일폭포에서 산길을 조금만 더 오르면 靑鶴洞道人村(청학동 도인촌)이다. 쌍계사 寺下村(사하촌)에 있는 ‘지리산 산채집’에서 점심을 먹고, 지리산역사관을 찾아 1023번 지방도로를 그대로 北上(북상), 10여km를 달려 1023번 지방도로가 끝나는 大成里(대성리)의 의신마을에 도달했다.

南部軍 사령관 李鉉相의 최후

 의신마을의 지리산역사관은 찾아간 날이 얄궂게도 월요일이라 휴관이었다. 2003년 여름 휴가 중의 필자가 이곳을 찾았을 때는 지리산 빨치산 부대인 南部軍(남부군)의 사령관 李鉉相(이현상)이 사살된 빗점골과 관련한 사진 자료 등이 전시되고 있었다. 빗점골은 의신마을에서 碧宵嶺(벽소령)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李泰의 수기 《南部軍》에는 이현상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953년 9월18일 11시5분, 드디어 남한 빨치산의 총수 이현상이 전투경찰 제2연대 소속 경사 김용식 이하 33명의 매복조에 걸려, 빗점골 어느 골짜기에서 10여발의 총탄을 맞고 벌집처럼 되어 쓰러졌다.
기록에 의하면 그 얼마 전 구례군 토지면 산중에서 생포한 前 남로당 전남도당 의무과장이며 제5지구 기요과 副과장인 이형련(당시 29세 京城醫專 출신 의사)의 자백으로 이현상이 빗점골 부근에 잠복중이라는 것을 알고, 西警司(白야전전투사령부 해체 이후 그 임무를 계승한 西南지구전투경비사령부)의 4개 경찰연대를 총동원해서 수색했으나 일단 실패하고, 그 작전에서 생포한 제5지구 간부 강건서·김진영·김은석 등으로부터 상세한 정보를 얻어 매복조를 배치했다는 것이다.
 이때 이현상의 나이로 53세. 그의 피 묻은 유류품은 그 후 창경원에서 일반에게 공개됐다. 그의 시중을 들던 河여인은 이현상의 권고로 그보다 훨씬 전에 귀순하여 우여곡절 끝에 지금(편집자注-1988년 6월)도 어디인가에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안다.
 공교롭게도 이현상의 죽음과 전후해서 그의 동료이며 상사이던 조선인민유격대 사령관 이승엽을 비롯한 남로당系 간부들이 (북한에서) ‘미국간첩’의 죄명으로 사형대에 서고, 그 죄상 속에 남한 빨치산이 들어 있었다는 사실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남과 북에서 버림받은 고독한 ‘혁명가’도 짙어가는 지리산의 가을과 함께 마침내 파란 많던 생애를 마치고 만 것이다.>
        
 1953년, 이현상은 52세의 중년이었다. 그는 대한제국의 말기였던 1901년 충남(당시는 전북) 금산군 郡北面 外富里(군북면 외부리)의 中農(중농) 가정에서 태어났다. 고향의 소학교 시절인 1910년 국권은 일본에게 강탈당했다. 高敞高普(고창고보)를 다니다가 서울 중앙고보로 전학한 그는 그곳을 중퇴하고, 보성전문 別科(별과)를 졸업했다.  
그는 학창시절부터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했고, 1925년에는 朴憲永(박헌영) 밑에서 金三龍(김삼룡)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했다. 1928년 조선공산당(별칭 ML당)이 日帝(일제) 경찰의 단속으로 붕괴되자, 박헌영을 중심으로 李觀述(이관술)·權五稷(권오직) 등과 함께 경성 콤뮤니스트 클럽(약칭: 京城콤클럽)을 만들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日帝(일제) 경찰의 탄압이 강화되어 동료 공산주의자들이 투옥·전향이 속출하자, 이현상은 지리산에 숨었다. 당시 光州((광주)형무소에 투옥된 박헌영은 일제 관헌에게 공산당 비밀조직을 불지 않으려고 자기 똥을 자기가 집어 먹는 등 미친 척했다고 한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박헌영은 형무소에서 나와 조선공산당을 재건했고, 그것이 남로당으로 개편된 후, 이현상은 연락부장이 되었다.
 朝鮮精版社(조선정판사) 사건 등에 의해 남한에서 공산당 활동이 非합법화되자, 동료 남로당원들은 대거 월북·도피했다. 그러나 이현상은 북한 정권의 요직을 차지한 동료들과 달리 여순반란사건 직후인 1948년 11월에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조선정판사 사건이란 조선정판사 사장 朴洛鍾(박낙종) 등이 공산정권 수립을 위한 당의 자금을 마련하고 경제를 교란시킬 목적으로 서울 소공동 74번지 近澤(근택)빌딩 소재 인쇄소에서 1945년 10월20일부터 6차례에 걸쳐 위조화폐를 대량 찍어낸 남로당원의 조직적 범죄행위였다. 주범인 박낙종 등은 그후 木浦(목포)교도소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남로당은 반란군의 잔여세력을 시급히 수습해 유격대로 戰力化(전력화)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때 지리산에 은신한 경험이 있는 이현상이 자진해 지리산에 들어갔다. 그가 이 반란군 잔여세력을 基幹(기간)으로 부근의 野山隊(야산대), 그리고 반란에 동조하다가 도피했던 민간인을 규합해서 조직한 것이 이른바 ‘지리산 유격대’이며, 1949년 7월부터는 그 명칭이 제2병단으로 개칭되었다.

 이현상의 사살 당시인 1953년, 필자는 西警司(서경사)의 소재지인 南原에서 龍城국민(초등)학교 3학년에 재학중이었다. 그때 필자는 이웃(동춘동)에 사는 秋순경이란 분이 가지고 있던 《지리산 공비 토벌…》이라는 확실치 않은 제목의 46배판의 두꺼운(약 500페이지) 등사판 보고서(交戰현장 약도 등 첨부)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紙質(지질)이 좀 거친 갱지였는데, 그 첫 장만은 아트紙(지)였다. 아트紙엔 사살된 李鉉相(이현상)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사살 당시의 이현상은 사살된 후 갈아입힌 옷인지 모르겠지만, 美製(미제) 전투작업복 하의와 시커먼 총알 자국이 난 하얀 런닝셔츠 차림에 농구화를 신은 살찐 50대 중년의 몸매였다.
 秋순경은 지리산 토벌에 참여했다가 부상을 당해 남원 자택에서 한동안 쉬고 있었는데, 동네 꼬마들에게는 빨치산과의 전투장면을 실감나게 얘기해 주었다. 그는 당시 경찰의 구호였던 “순경아저씨가 나는 좋아요”의 역할 모델이었다.    
 필자는 李鉉相이 사살된 빗점골에 접근하기 위해 ‘푸른 저녁의 고개’라는 뜻의 碧宵嶺(벽소령·1403m) 쪽을 향한 林道(임도)로 답사 차량을 몰았다. 1km 쯤 올라간 지점에서 차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前方(전방)에 전날 내린 함박눈이 쌓여 있어 차량운행은 무리였다. 이현상이 사살된 빗점골 부근을 林道(임도)에서 잠시 바라보기만 하고 답사차량을 돌렸다.

《남부군》의 저자 李泰의 인생행로

 의신마을에서 화개장터로 도로 내려와 19번 국도에 올라 섬진강을 왼쪽으로 끼고 西進(서진)했다. 곧 경상남도 하동군 花開面(화개면)과 전라남도 구례군 土旨面(토지면)의 경계를 알리는 교통 표지판이 보인다. 토지면 外谷里(외곡리)에서 1023번 지방도로를 타고 5km 쯤 오르면 ‘국보 53호 東부도’와 ‘국보 54호 北부도’로 유명한 燕谷寺(연곡사)이고, 그 북쪽 1km에 빨치산이 근거지로 삼았던 ‘피아골’이 있다. 李泰(이태)의 《남부군》에서는 빨치산의 축제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피아골에서 이현상으로부터 상훈을 수여하는 식이 거행되었다. (중략) 그날 밤 피아골에서는 춤의 축제가 벌어졌다. 풀밭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 둘레를 돌며 ‘카추샤의 노래’와 박수에 맞춰 남녀 대원들이 러시아식 포크 댄스를 추며 흥을 돋우었다. 피어오르는 불빛을 받아 더욱 괴이하게 보이는 몰골들의 남녀가 발을 굴러가며 춤을 추는 광경은 소름이 끼치도록 야성적이면서도 흥겨웠다.>

《남부군》의 저자 李泰(이태·1997년 별세)씨와 필자의 만남을 잠시 언급하고 가야 할 것 같다. 1988년 7월 《남부군》 초판이 발간되어 일대 선풍을 일으키고 있던 무렵, 필자는 ‘도서출판 두레’의 편집자에게 李泰 씨와의 인터뷰를 주선해 달라고 요청했다.
 만날 일시와 장소는 7월 어느 토요일 오후 1시 전철 2호선 성내역(지금의 잠실나루역) 앞 두 번째 교각 아래로 정했다. 약속시각에 만난 그를 택시에 태워 필자의 방이동 집으로 직행, 약 5시간 동안 인터뷰 했다. 인터뷰를 마친 후 李泰 씨를 전철역까지 바래다주려고 택시를 함께 탄 뒤 그의 모습을 촬영하려고 카메라를 들이댔는데, 그는 재빠르게 손으로 카메라를 탁! 치고 택시를 세우더니 뛰쳐나갔다. 그리고는 차도를 가로질러 달렸는데, 얼마나 동작이 재빠르던지 뒤따라간 필자의 시야에서 곧 사라졌다.   
 당시, 세간의 관심은 李泰(이태)라는 가명을 사용한 《남부군》의 저자가 도대체 누구냐는 것이었다. 실은, 그는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尹潽善(윤보선) 제1야당 후보의 스피치 라이터로 활약한 공로로 제6대 전국구 국회의원(民政黨 소속)이 되었던 李愚兌(이우태) 씨였다. 그때 필자의 인터뷰 기사는 <월간경향>과 <경향신문>에 보도되었다      
 남부군의 총수 이현상 밑에서 보도과장으로 복무했던 그는 1922년 11월25일 충북 堤川(제천)에서 국민(초등)학교 교사 李錫平(이석평)의 아들로 태어났다. 청주중학을 거쳐 國學大學(국학대학·1967년 友石대학교에 흡수됨)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조선신문학원을 거쳐 6·25동란 발발 직전에 合同通信(합동통신) 기자가 되어 언론계에 入門(입문)했다. 곧 서울신문사로 옮겼는데, 6·25 남침 초기 敵治下(적치하)의 서울에서 북한의 선동매체 ‘조선통신사’의 기자가 되었다.
 1950년 7월, 그는 조선통신사 全州(전주)지사의 책임자가 되어 전주로 내려갔다. 전주에 도착한 지 2개월만인 9월15일, 유엔군의 仁川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퇴로가 막힌 그는 상급자들을 따라 조선노동당 전북도당 유격사령부가 있는 전북 순창군 龜林面(구림면)의 如粉山(여분산) 골짜기에 도착, 빨치산의 학습을 받았다.
 그 후 그는 빨치산부대의 소대장이 되어 소대원들을 이끌고 매복전에 나서는 등 9개월 동안 回文山(회문산) 등 노령산맥 속에서 유격전을 겪었다.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한계점에서 무수히 死線(사선)을 오간 끝에 그는 상부의 명령으로 전북유격대를 떠나 1951년 6월 南部軍(남부군)에 편입되었다.
 지리산 ‘아흔아홉 골’을 아지트로 삼고 있던 李鉉相(이현상) 직속 남부군의 운명도 시시각각 기울어지고 있었다. 1951년 12월부터 이듬해(1952년) 3월에 걸쳐 지리산 지구에 白야전전투사령부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전개되었다. 
 白야전전투사령부의 작전기간 중 戰果(전과)는 육본 자료에 따르면 사살 5800명, 포로 5700 명이었다. 미군 자료에는 우리 군경이 사살한 숫자만 9000 명에 달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백선엽 장군은 회고록《軍과 나》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당초, 우리는 지리산에 3800 명, 그 주변 산에는 4000 명 이상의 무장공비가 있을 것으로 추정했으나 실제 사살 및 포로 수는 이 추정치를 훨씬 넘어섰다. 이는 공비들이 예상보다 강했고, 아울러 공비들에 포섭된 비무장 입산자도 많았음을 반증한다. 지리산 근처 부락 장정들은 상당수 공비들에 의해 자기네 세상이 되면 면장, 군수, 우체국장 등 감투를 줄 것이라는 유혹에 현혹되어 입산했음이 심문 결과 밝혀졌다. 이들의 허리춤에서는 그간 소중히 간직했던 ‘임명장’이 적지 않게 발견됐다.
 공비들은 이들을 우선 자기가 살던 마을로 내보내 ‘반동분자’를 처단하게 했다. 자기 가족과 이웃에게 먼저 몹쓸 짓을 하게 함으로써 나중에 자기 마을로 탈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많은 입산자들이 자수도 못하고,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白야전전투사령부의 解隊(해대·1952년 3월15일)와 동시에 그것을 基幹(기간)으로 한 국군 제2군단이 재건되어 전방으로 복귀한 후 지리산 공비잔당의 토벌은 서남지구경비사령부가 담당했다. 李泰는 1952년 3월19일 토벌대에 생포되었다.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뻔했으나 그의 淸州(청주)중학교 동기동창인 경찰연대의 연대장이었던 李成雨(이성우) 경무관의 도움으로 전향하여 사회에 복귀하게 된다.
 그는 尹潽善(윤보선) 대통령 후보의 선거사무장이던 鄭海永(정해영) 의원을 만남으로써 정계에 진입하게 되었다. 정해영 의원은 대동연탄의 오너로서 재력가였는데, 李泰씨는 대동연탄의 소매점 경영을 생업으로 삼고 있다가 鄭의원에게 스카웃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6대 국회에 전국구 의원으로 진출했고, 1971년 제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제1야당인 新民黨(신민당) 후보로 고향인 堤川(제천)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5共 시절에 金泳三(김영삼) 재야지도자가 만든 민주산악회에 그는 창립 맴버로 참여, 산악대장을 맡기도 했다. 1994년 무렵, 李泰 씨와 필자는 서너 번 만나 식사를 함께 한 일이 있다. 
      
‘4대 福地’ 중 세 곳이 지리산 자락에

 李重煥(이중환)의 《擇里志》는 나라 안에서 가장 기름진 땅 4곳 중 3곳이 지리산 기슭인 南原(남원)·九礼(구례)·晋州(진주)에 펼쳐져 있다고 기록했다. 이런 福地(복지)를 품은 지리산은 먹을 것과 水量(수량)이 풍부해 게릴라의 장기 생존이 가능한 肉山(육산)이 되었다.     
 求禮郡 土旨面(구례군 토지면)의 19번 국도변에는 石柱關 七義士廟(석주관 7의사묘)가 있다. 정유재란 때(1597년) 석주관에서 왜적과 맞서 싸우다 전사한 7명의 순국열사를 모신 사당이다. 土旨(토지)초등학교 앞을 지나면 곧 雲鳥樓(운조루)가 보인다. 조선 영조 52년(1776)에 柳爾冑(유이주)란 武官(무관)이 7년간의 대공사로 건립한 대저택이다. 건립 당시 99 칸이었으나 현재는 60여 칸만 남아 있는 조선 시대의 전통 양반가옥이다.
 반야봉 → 노고단 → 형제봉 → 천행치 → 병풍산 아래에 위치한 운조루는 지리풍수적으로 金環落地(금환낙지), 즉 금가락지가 땅으로 떨어진다는 吉地(길지)이다. 李重煥(이중환)의 《擇里志》, 卜居總論(복거총론)에서는 구례를 한반도의 4대 福地(복지) 중 하나로 꼽았다.   

<땅이 기름지다는 것은 땅이 오곡과 목화 가꾸기에 알맞은 것을 말한다. 논에 볍씨 한 말(斗)을 종자로 하여 60말을 거두는 곳이 제일이고, 40∼50말을 거두는 것이 다음이며, 30말 이하는 땅이 매말라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다. 나라 안에서 가장 기름진 땅은 전라도의 南原(남원)·九禮(구례)와 경상도의 星州(성주)·晋州(진주)이다. 그곳은 논에 한 말 종자를 뿌려서 최상은 140말을 거두고, 다음은 100말을 거두며, 최하로 80말을 거두는데, 딴 고을은 그러지 못하다.> 

 재미있는 것은 한반도에서 제일 기름진 4곳 가운데 九禮(구례)·南原(남원)·晋州(진주) 등 3곳이나 지리산 기슭에 펼쳐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이런 福地(복지)를 품은 지리산은 먹을 것과 水量(수량)이 풍부해 흔히 ‘肉山(육산)’이라고 불린다.
토지면의 운조루를 지나면 섬진강변에 하얀 모래사장이 펼쳐진 馬山面 沙圖里(마산면 사도리)다. 사도리의 모래밭은 高麗(고려) 태조 王建(왕건)의 스승인 道詵(도선) 대사가 풍수지리학의 妙理(묘리)를 터득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19번 국도의 冷泉里(냉천리)에서 18번 국도를 타고 5km 쯤 북상하면 華嚴寺(화엄사)이다.
 화엄사는 백제 성왕 22년(544)에 연기 祖師가 창건한 절이다. 경내에는 동양 최대의 목조 건물인 국보 67호 覺皇殿(각황전), 국보12호 각황전 앞 石燈(석등), 국보35호 四獅子(4사자)3층석탑 그리고 보물 4점이 있다. (月刊朝鮮 2003년 1월호 ‘鄭淳台의 국보기행’ 참조)  
 다시 19번 국도의 芝川里(지천리) 4거리에서 길을 바꿔 861번 지방도로를 따라 10리 쯤 북상하면 신라 흥덕왕 3년에 개창되었다는 泉隱寺(천은사)에 이른다. 861번 지방도로는 우리나라 국립공원 제1호 지리산을 남북으로 縱斷(종단)하는 유일한 차도이다. 천은사 앞에서 ‘결빙구역’이라는 표지판과 함께 통행금지의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었다.
 이곳 도로의 상황을 살펴보니 그래도 차선 한 칸만은 열어 두고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에라!” 시암재까지 10여km를 작심하고 달렸다. 시암재 휴게소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지리산 자락에 펼쳐진 눈 덮힌 산야와 취락이 수채화와 같다. 다음은 《남부군》에서 인용한 대목이다.
 
<시암재는 1953년 11월28일 빨치산 57사단장이며 경남도 유격대 사령관인 李永檜(이영회)가 사살된 곳으로 전해진다. 사살 당시, 이영회의 나이 26세로 麗順(여순)반란사건의 잔당이다. 검붉은 얼굴에 다부진 인상을 풍기던 중키의 젊은이였다. ‘유격전의 귀신’이라고 불리울 만치 실전에 능했고, 경남부대를 혼자 손으로 지탱했다. 19세 때 국방경비대에 들어가 光州(광주) 4연대에서 야포를 담당하다가 麗水(여수) 14연대로 전속된 후 1948년 여순반란이 일어나자, 사병 계급이면서 중대를 이끌고 반란에 가담했다. 지리산에 입산한 후 1949년 7월 소위 南部軍의 前身(전신)인 ‘인민유격대 제2병단’이 편성될 때 제5연대장이 된다….
 이영회에게는 ‘옥순’이란 이름의 같은 또래 애인이 있었는데, 누군가가 그것을 비판하자, 그는 쓸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내 나이 스물에 입산해서 風餐露宿(풍찬노숙), 사람답게 살아본 적이 하루도 없다. 앞으로도 나는 이렇게 살다가 죽을 것이 뻔하다. 내게도 이 세상에 태어나 서로 사랑한 한 사람의 여인쯤 있어도 좋지 않을까?”라고 변명하더라고 했다.>

빨치산 간부의 여인들

 지리산 빨치산 중에도 간부급들의 행적을 추적해 보면 거의가 다 山中妻(산중처)를 곁에 두고 있었다. 그들 역시 일반 공비와는 다른 특권층이었다.
 해발 1000m의 시암재 휴게소에 들러 커피 한잔을 하면서 찻집 아가씨에게 “여기서 老姑壇(노고단·1507m)까지 올라가려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라고 물으니 “눈이 많이 내리면 미끄러워 2시간 걸립니다” 라고 답하더니만, 필자의 형색을 쓰윽 살펴보고는, “안 가는 게 좋겠습니다” 라는 충고까지 했다.
 시암재에서 1km 쯤 완만한 오르막길을 달리면 해발 1100m 정도의 성삼재. 성삼재에서 굽이굽이 내리막길을 2km쯤을 살살 기듯 내려가면 861번 도로 옆에 해발 750m의 심원마을의 입구가 보인다. 자칭 ‘하늘 아래 첫 동네’라 불리는 곳으로 10여 가구가 민박 영업을 하고, 흑염소와 토종닭을 키워 팔고 있다. 高度(고도)가 높아 여름에 모기가 없다고 한다. 
 심원마을에서 구불구불 2km쯤 더 내려가면 전라남·북도의 道界(도계)인 달궁3거리이다. 달궁3거리(돌고개)에서 좌회전해, 737번 지방도로에 오르면 鄭嶺峙(정령치·1305m)를 거쳐 雲峰(운봉) → 남원에 이르는 지름길인데, 그 初入(초입)의 오르막에 눈이 많이 쌓여, 설사 그리로 가려 해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냥 861번 지방도로를 따라 1∼2km 더 내려가면 달궁마을 → 德洞里(덕동리) → 伴仙里(반선리)이고, 반선리 앞 시냇가에 지리산전적기념탑이 세워져 있고 거기서 500m 쯤 올라가면 남로당 전북도당의 근거지였던 뱀사골이다.
 뱀사골에 이르니 2015년 2월에 故人(고인)이 된 옛 답사동료(당시의 사진기자)였던 권태균 교수와의 추억으로 가슴이 찡했다. 20년 전 어느 여름날의 답사 때 우리 둘은 뱀사골에 들자마자 팬티만 입은 채 물속으로 풍덩 뛰어들었었다. 그때만 해도 그 주위엔 요즘과 달리 인적이 없었다.

여순반란사건의 지휘자 金智會와 洪淳錫이 사살당한 반선마을
 
 반선마을은 麗順(여순)반란 때(1948년) 반란군을 지휘했던 金智會(김지회)와 洪淳錫(홍순석)이 사살당한 곳이다. 반선마을의 주막에서 잠을 자다가 습격을 받은 김지회는 총탄을 맞은 채 도주했는데, 1주일 후에 그 시신이 600여m 떨어진 숲속에서 발견되었다. 이때 김지회의 동거 녀로서 먼저 체포되었던 간호원 출신 조경순(당시 19세)이 이곳으로 불려와 부패한 시체 1구를 김지회의 것으로 확인해 주었다. 그녀는 끝내 전향을 거부해 총살되었다.
 여기서 잠시 지리산 ‘舊(구)빨치’의 子宮(자궁)이었던 여순반란사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1948년 10월19일 오후 8시경 麗水(여수) 주둔 14연대의 1개 대대가 제주도 4.3 사태 의 토벌작전에 차출되어 다음날 아침 麗水港(여수항)을 출항할 준비를 하고 있던 중, 연대 인사계의 선임상사였던 池昌洙(지창수)가 40명의 당 세포들을 동원해, 병기고와 탄약고를 장악한 다음에 비상 나팔을 불어 출동부대인 제1대대와 잔여 2개 대대의 병력을 연병장에 집합시켰다.
 연단에 오른 지창수는 ▲제주도 출동 거부 ▲경찰 타도 ▲北南통일을 위해 인민군으로 행동할 것 등을 선동하자, 대부분의 사병들은 환호로써 이에 호응했다. 당시 軍內(군내)에는 좌익 세력이 크게 暗躍(암약)하고 있었다. 국방경비대(국군의 前身)의 모병 때 美軍政(미군정)은 신원조회 같은 것을 아예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분을 위장·잠입한 좌익은 물론 좌익사건에 관련된 자라고 해도 얼마든지 입대가 가능했다.   
 약 3000명의 동조자를 확보한 반란부대는 지창수의 지휘로 여수 시내로 돌입해 경찰관서를 습격하고, 10월20일 未明(미명)까지 여수 시내를 완전 장악했다. 뒤이어 여수에 산재하던 좌익 단체원과 학생 등 600여 명이 반란부대에 합세하여 시내 중요 기관을 모조리 접수했다.
 
 이 무렵부터 반란군의 총 지휘는 제14연대 對전차포중대장이던 金智會(육사 3기 출신의 중위)가 맡게 되었다. 下士官(하사관)인 지창수가 남로당 내부의 서열이야 어떻든, 實兵(실병) 지휘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장교였던 김지회가 반란군을 지휘했던 것으로 보인다. 10월20일 9시30분, 김지회가 지휘하는 2개 대대 규모의 반란부대가 열차 편으로 順天(순천)을 향해 北上했고, 順天에 주둔해 있던 14연대의 2개 중대가 선임중대장 洪淳錫(홍순석·김지회와 동기인 육사 3기 출신의 중위)의 지휘로 반란군에 합류했다. 그러나 여수-순천의 반란은 국군 토벌대에 의해 10월25일까지 모두 진압되었다.
 順天(순천)에서 만난 필자의 친구는 뜬금없이 “왜, 여수와 순천에 기독교 교회당이 많은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인구 각각 25만∼30만씩인 여수·순천에 가보면 유별나게 교회가 눈에 많이 띄였다. 知人(지인)은 그 시대적 아픔을 이렇게 말했다.

“여순반란 때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반란군들이 기독교인들을 대거 학살했다. 반란이 진압된 후에는 군경이 오랜 기간에 걸쳐 반란 동조자를 색출했는데, 그때 ‘나는 OO교회에 다닌다’고 하면 그것이 일단은 좌익 혐의를 벗는 ‘면죄부’가 되었다. 이것이 敎勢(교세) 번창의 이유 중 하나였다.' 

 이때 반란군 패잔병 약 1000 명이 光陽(광양)의 白雲山(백운산·1218m) 그리고 지리산의 華嚴寺(화엄사)골과 熊石峰(웅석봉) 계곡 등 산악지대로 숨어들었는데, 같은 해 말에는  그 수가 350 명 정도로 격감했다. 이듬해인 1949년 4월9일 뱀사골에서 金智會(김지회)·洪淳錫(홍순석) 등이 사살된 당시에는 그 수가 다시 200 명 정도로 줄어 있었다. 반란 후 6개월만이었다. 그렇다면 《남부군》의 저자 李泰 씨는 여순반란사건을 어떻게 기술했을까?   
 
<결과적으로 이 반란사건은 남로당이나 평양 당국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돌발 사태였으며, 남로당이 그 동안 애써 심어놓은 군부 내의 세포 조직을 깡그리 노출시켜 肅軍(숙군) 작업으로 뿌리가 뽑히고 마는 결정적 손해를 가져 왔다. 반대로 국군으로서는 내부의 이질 분자를 완전 색출·제거하고, 커다란 위기에서 군을 재건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만일, 이 반란사건이 없었던들 6·25의 양상은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김일성에게 처형당한 남로당수 朴憲永의 죄명은 ‘미제 간첩’

 사실, 6·25 동란의 초기에 낙동강전선까지 후퇴를 거듭했지만, 국군에서 부대 단위로 적군에 항복한 사례는 하나도 없었다. 후일 남로당 숙청 때, 평양당국은 朴憲永(박헌영) 등이 미국의 使嗾(사주)를 받은 간첩으로서, 군부 내의 남로당 세포를 노출시키기 위해 일부러 반란사건을 일으킨 것이라는 죄목을 뒤집어씌우기도 했다.  
 뱀사골에서는 1953년 12월, 전북도당 부위원장 曺秉夏(조병하)가 국군 제5사단 토벌대에 의해 생포되었다. 그는 함경북도 明川(명천)의 빈농 출신으로 6·25 남침 前에 노동당 함북도당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다가 1950년 여름 전북으로 파견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고향의 지주 아들이며 소꿉동무였던 ‘某 장군’의 손에 생포되어 전향을 권고받았으나, 끝내 반항을 그치지 않고 자결을 기도하다가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최후를 마쳤다.
 조병하가 뱀사골 비트(비밀 아지트)에서 생포될 때, 방준표(사망한 노동당 전북도당위원장)의 애인으로 알려졌던 신단순도 같이 있었는데, 신단순도 긑내 투항을 거부하고 처형됨으로써 먼저 간 애인 방준표의 뒤를 따랐다. 평안도 출신으로 가냘픈 미인이던 그녀에게는 그 후 북한정권으로부터 ‘영웅’ 칭호가 수여됐다고 한다. 
 반선리에서 861번 종단도로를 타고 20여리 북상해 實相寺(실상사) 앞을 지났다. 실상사는 九山禪門(9산선문) 중 최초의 가람이다. 한국불교는 禪宗(선종)과 敎宗(교종)이 양립하면서 전개되어 왔다. 그 과정에서 禪(선)은 불교 수행자들이 구도의 길로 나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수행의 관문으로 자리잡았다. 禪(선)의 가르침이 이 땅에 처음으로 뿌리를 내린 곳이 바로 지리산 實相寺(실상사)이다. 실상사로부터 국보 제10호 3층석탑이 있는 百丈庵(백장암) 앞을 지나 引月(인월)에 이르러 24번 국도로 길을 바꾸어 南進(남진)했다.

 引月에서 지리산 서쪽 기슭의 雲峰(운봉)까지 약 15리, 그 중도의 도로 안쪽 시냇가에 조선왕조의 창업(1392년)의 계기가 된 荒山大捷碑(황산대첩비)가 세워져 있다. 고려 말(1380년), 함경도 출신의 무장 李成桂(이성계)가 왜구를 크게 무찌른 것을 기념하기 위해 1577년에 건립되었다. 왜장 阿只拔都(아지발도)가 이성계의 화살에 맞아 죽을 때 흘린 피로 물들었다는 전설 상의 ‘피바위’도 있다. 매년 8월16일에 황산대첩제가 열려오고 있다.
 운봉을 지나 소백산맥 分水界(분수계)인 가파른 여원재(480m)를 넘는 24번 도로를 10여km 달리면 남원의 젖줄인 蓼川(요천)의 상류. 요천교를 건너 바로 19번 국도로 길을 바꿔 달리면 곧 ‘國樂(국악)의 성지’라 일컫는 남원이다.
 남원시는 운봉지역을 제외한 전역이 섬진강유역에 속해 있다. 그 支流(지류)인 요천은 맑고 수량도 풍부하다. 요천변의 범람원에 자리한 남원은 현재 인구가 6만에 불과하지만, 삼국통일 후 신문왕 5년(685)에 小京(소경)이 설치되었고, 조선시대에도 都護府使(도호부사)가 주재한 큰 고을이었다.
 남원은 섬진강의 물길로 南海(남해)와 통하고, 또 경남의 咸陽(함양)에서 경남-전북의 도계인 팔랑치(513m)를 넘어오면 나오는 첫 번째의 큰 고을이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고려 우왕 때 이성계에게 격파된 왜구도 함양-팔랑치를 거쳐 남원에 침입하려 했다.

‘사랑의 메카’ 南原에 설치된 白야전전투사령부

1951년 11월15일 南原(남원)에 설치됐던 白야전전투사령부는 1952년 3월15일 토벌의 임무를 마치고 해체되었다. 그해 3월31일, 국방부 보도과는 이 작전기간 중의 토벌전과의 누계를 사살·생포 2만1051명이라고 발표했다. 백선엽 장군은 사령부의 위치와 미군의 협조 등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남원에서 운봉 가는 길목의 초등학교에 사령부를 설치하자, 미 고문단과 치안국(지금은 치안본부로 승격해 있음) 요원이 합류했다. 60여 명으로 구성된 미 고문단은 작전 연락, 통신, 공중연락 및 심리전을 주로 담당했다. 선임자인 윌리엄 다즈 중령은 그리스에서 밴플리트 사령관의 게릴라 전을 보좌했던 인물로서 밴플리트가 특별히 보낸 전문가였다. 치안국에서는 崔致煥(최치환·국회의원, 경향신문 사장 역임, 김무성 새누리당 前 대표의 장인)  경무관이 치안국장을 대리한 연락관으로, 李成雨(이성우·李泰의 청주중 동기동창), 辛相默(신상묵·신기남 국회의원의 선친) 경찰연대장이 작전을 돕기 위해 합류했다. 朴炳焙(박병배·5선 국회의원 역임) 전북도경국장을 위시해서 각 도의 경찰국장도 전력을 다해 협력했다.>

 남원의 鎭山(진산)은 蛟龍山(교룡산·520m)이다. 시가지 북쪽에 솟은 이 산에는 남원을 지키던 교룡산성이 있다. 남원 고속버스터미널→남원시청→충정로의 두 번째 로터리에서 용성로로 접어들면 바로 용성초등학교 교문이다. 필자는 1953년에 용성초등학교 3학년 재학생이었다.
 그때의 필자는 몰랐지만, 白善燁 장군은 “공비토벌을 위해 그때 남원방송국을 개국시켰다. 남원방송국은 공비들에 대한 투항 권유 방송을 밤낮으로 송출했다. 현지 주민들에게는 공비들에게 협조하지 말라는 경고 방송을 내보냈다”고 회고했다.    
 당시, 필자가 동춘동 집에서 용성국민학교에 등교할 때 ‘서남지구경비사령부(서경사)’ 앞길을 지나갔다. 이번 답사에서 확인했지만, 그곳이 지금의 下井洞(하정동) 하늘중학교 자리이다. 하늘중학교 앞에서 동쪽으로 직진하면 소설《춘향전》의 이몽룡과 성춘향이 만났다는 ‘사랑의 메카’ 廣寒樓(광한루)이다.  
 白야전사령부의 주둔 위치에 대해 남원의 종합관광안내센터, 남원경우회 등에 문의했으나 60여년 전의 일이라 알지 못했다. 남원시청 문화계에 문의했더니, 담당 공무원은 “동림교 부근의 주택가에 위치해 있던 梁海焌(양해준) 8∼9대 국회의원(故人)의 전통한옥 저택 앞 野地(야지)에 군용 천막을 치고 白야전전투사령부가 들어와 있었다”고 했다. 그 저택에는 현재 양해준 의원의 장조카가 거주하고 있는데, 그의 증언이라고 전했다.
 
 梁 의원의 장조카는 그 시절 자기 집 앞에서 백선엽 장군을 비롯해  金點坤 대령(참모장), 孔國鎭 대령(작전참모), 류양수 대령(정보참모), 그리고 丁來赫 대령(육군본부 작전과장) 등 훗날에 장군·대학교수·국방장관·국회의장 등으로 크게 영달한 인물들을 자주 보았다고 한다.
 白야전전투사령부의 위치에 대해 백선엽 장군은 “南原에서 雲峰(운봉) 가는 길목의 국민학교에 설치되었다”고 증언했던 만큼 그곳이 지금의 중앙초등학교인 것으로 짐작된다. 중앙초등학교는 운봉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고, 남원시가지의 남쪽을 흐르는 요천에 걸린 동림교와 양해준 의원의 옛 한옥저택 부근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해준 의원의 한옥저택과 필자는 색다른 인연이 있다. 梁 의원은 ‘선거 빚’을 갚기 위해 先代(선대)로부터 물러받은 한옥저택을 뚝 잘라 절반을 매도했다는데, 그 절반이 1975년 무렵에는 요정이 되어 있었다. 당시 제1야당 新民黨(신민당)의 당권경쟁에 나선 某 유력 정치인은 전당대회 대의원 포섭을 위해 호남을 순회했는데, 당시 야당 출입 기자였던 필자는 그를 수행 취재했다가 남원에 들러 예의 그 요정 모임에 합석했다.

 古來(고래)로 전라도의 南原은 경상도의 晋州(진주)와 짝하여 色鄕(색향)으로 이름 높다. 李重煥(이중환)의 《택리지》에도 예로부터 山紫水明(산자수명)하고 物産(물산)이 풍부한 남원과 진주는 우리나라의 ‘4대 福地(복지)’에 포함되어 있음은 앞에서 썼다.
南道唱(남도창)에 맞춰 술잔이 두어 순배 돌았을 무렵, 큰 비녀를 뒷머리에 一字로 찌르고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50대 여성 한 분이 가만히 들어와 잠시 주위를 살피더니만, 가장 만만하게 생각했던 듯 末席(말석)에 앉은 갓 서른의 필자 옆에 앉았다. 그 후에 안 사실이지만, 그녀는 우리 국악계의 유명인이었다.
 그 자리에 온 사연을 은근히 물어본 즉, 그날의 座長(좌장)이 8·15 해방 몇 년 전 서울 某대학의 입학시험에 합격한 후 , 南原에 놀러왔다가 그녀를 만나 연애한다고 대학 등록금을 모두 탕진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30년의 세월이 흐른 후 이날의 모임에 나온 것은 아마도 크게 출세한 옛 情人(정인)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白야전전투사령부가 해체된 후에는 軍警합동부대인 西南지구경비사령부, 약칭 西警司(서경사)로 재편되어 토벌작전을 인계받았다. 서경사의 사령관은 金容培(김용배) 준장, 부사령관은 李成雨(이성우) 경무관이었다. 서경사의 主力은 107예비연대, 제1·제2경비대대 등 군부대와 제203·제205·제207 경찰연대였고, 전남·전북·경남의 3도 경찰국, 지리산 주변 1市 12개 郡의 경찰기동대 등이 그 작전 지휘 하에 들어가 여전히 사단 규모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南部軍의 진입로 矢川삼거리

 2015년 3월5일 오전10시경, 필자는 통영∼대전 간 35번 고속도로의 丹城(단성) IC를 진입했다. 지금의 단성은 山淸郡(산청군)의 1개 面이지만, 1914년의 병합 전까지만 해도 단성군의 군청 소재지인 단성읍이었다. 지리산 공비가 설치던 6·25동란 시기에는 “함양·산청 간다”는 말이 “죽으러 간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였다.
 단성IC 바로 옆 南江邊(남강변·단성면 사월리)에 木花始培地(목화시배지)가 있다. 목화시배지는 고려 말의 문신 文益漸(문익점·1329~1400)이 그의 장인인 鄭天益(정천익)과 함께 목화재배와 綿織(면직)에 성공한 곳이다.
 문익점은 고려 우왕 때 사신단의 제3인자인 書狀官(서장관)으로 元나라에 갔다가 지금의 중국·베트남의 접경 지역인 雲南行省(운남행성)으로 流配(유배)되었다. 1363년, 그는 해외 반출이 금지되었던 그곳의 優良(우량) 목화씨를 붓두껑 속에 넣어 귀국했다. 헐벗은 백성들에게 옷을 입게 한 공로로, 그는 死後(사후)에 조선 왕조로부터 정1품 영의정으로 追贈(추증)되었다.   
 단성에서 20번 국도를 타고 矢川面 中山里(시천면 중산리)로 향했다. 중산리는 남한의 산 중에서 가장 높은 天王峰(천왕봉·1915m)에  오르는 데 있어 최단코스이다. 中山관광지 내에는 ‘지리산 빨치산 토벌 전시관’이 있다. 중산리 계곡에 가기 전에 둘러보아야 할 데가 두 곳 있다. 德山(덕산)의 山川齋(산천재)와 矢川(시천)3거리이다.
 단성IC에서 20번국도를 10km 쯤 달리면 천왕봉에서 발원하는 德川江(덕천강)의 흐름을 만난다. 덕천강변을 끼고 다시 10여km를 달리면 矢川(시천). 시천을 중심으로 한 덕천강 상류지역은 湺(보)와 논이 많아서 농업지역으로 중시되어 왔다.    
 최근 4차선으로 확장된 20번 국도를 그냥 달리다가 德山(덕산)의 山川齋(산천재)와 矢川(시천)3거리를 놓칠 뻔했다. 최근 확장된 20번 국도는 직선화·속도화를 추구해 과거 20번 국도의 도로변에 위치한 역사의 현장을 우회하고 있다.      

 산천재는 南冥 曹湜(남명 조식)의 교육현장이다. 남명은 동갑인 退溪 李滉(퇴계 이황)과 더불어 ‘조선중기 儒學(유학)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지만, 그의 역사적 공로는 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임진왜란 때 의병들 중 戰功(전공)을 가장 높았던 것이 바로 實踐道學者(실천도학자)인 남명의 제자들이었다.
 그것은, 평소 兵法(병법)을 중시해 칼을 차고 제자를 가르쳤던 남명의 가르침 때문이 아니겠는가? 남명의 문하에서는 郭再祐(곽재우), 金沔(김면)·鄭仁弘(정인홍), 趙宗道(조종도), 李大期(이대기) 등 기라성 같은 의병장들이 배출되었다. 
 이때 慶尙右道(경상우도)의 의병들은 우리나라 縱深(종심) 깊숙이 들어온 왜군에 대해 게릴라전, 매복전 등을 전개했다. 北上(북상)하던 왜군은 兵站線(병참선) 보호를 위해 漢陽(한양)∼東萊(동래)를 연결하는 嶺南大路(영남대로·조선조의 4大路 중 하나)의 50리마다 진지를 설치하고 40∼50명씩 병력을 주둔시켰지만, 의병들의 습격 때문에 그 유지가 불가능했다. 보급로가 막히거나 위협당한 왜군은 굶주린 끝에, 결국은 패전의 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산천재 앞마당에서 西北向(서북향)하면 지리산의 제1봉인 天王峰(천왕봉)과 마주서게 된다. 산천재에서 옛길(2차선)을 따라 1km쯤 西進(서진)하면 남진해 오는 50번 국도와 만나는 德川江邊(덕천강변)의 시천 3거리. 이곳이야말로 지리산공비 討伐史(토벌사)에서 놓칠 수 없는 현장이다.

 1951년 10월, 鏡湖江(경호강)을 건너 熊石峯(웅석봉 1099m)의 어느 골짜기에 들어선 빨치산 연합부대는 거기서 하룻밤을 노숙하며 지리산의 출입구인 巨林(거림)골, 大源寺(대원사)골, 中山里(중산리)골 등 세 계곡의 어귀인 矢川(시천)·三莊(삼장) 두 面의 경찰 보루를 일시에 격파할 작전을 준비했다.
 빨치산 부대는 1950년 9월 후퇴하는 북한군을 따라 금강산 기슭인 강원도 세포군 후평리까지 북상했지만, 거기서 새로운 지령을 받고 反轉(반전)해 오대산 → 태백산 → 소백산 → 월악산→속리산 → 민주지산 → 웅석봉 등을 거쳐 1년 만에 지리산에 복귀하려 했다. 熊石峰(웅석봉)은 1948년 늦가을에 14연대 반란의 패잔병들이 처음으로 정착했던 智異山塊(지리산괴)의 한 봉우리로서, 산청읍과 단성면의 경계지대에 솟아 있다.
 웅석봉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려 간 감투봉(768m)과 二方山(715.7m)의 산줄기가 덕천강과 만나는 곳에 시천면의 소재지인 德山(덕산)이라는 장터거리가 있고, 그 북쪽 10리 거리에 삼장면 소재지인 大浦里(대포리)가 있다. 이 두 개의 面 소재지는 지리산의 중요 출입구인 3개 계곡을 봉쇄할 수 있는 요충이어서 경찰의 보루가 설치되어 있었고, 덕산에서 남서쪽 1km 지점의 院里(원리) 부근에도 덕산의 외곽 방어를 위한 경비초소가 있었다. 이 세 개의 진지는 서로 거리가 가까울 뿐만 아니라 경찰수비대의 인원·장비가 모두 상당했다.  .
 빨치산 측에서도 전례 없이 신중한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빨치산 병력은 700명. 다음은 李泰(이태)의 수기 《남부군》의 관련 기록이다.

<전투서열은 가장 중심부가 되는 덕산리 공격을 승리사단 주력 150(명)이, 대포리를 여단과 지대 약 200(명)이, 원리 초소를 기타 연합부대 150여명이 담당했으며, 외곽방어로는 군·경 응원부대가 공격해 올 丹城(단성) 쪽의 동부 능선에 승리사단 1개 구분대 약 50 명이 배치되고, 덕천강 건너편에서 하동군 玉宗面(옥종면)으로 통하는 外公(외공)마을 고개에 이르는 남부 측면에 경남 815부대와 산청군당 50여 명이 배치되어 작전지역 일대를 봉쇄했다…
 덕산을 점령한 (승리사단의) 서울부대는 단성에 접한 동부 능선의 방어를 대구부대와 교대하라는 (남부군 지휘부의) 명령을 받고 아침도 못 먹은 채 고지로 올라갔다. 덕산에서 동쪽으로 15리 쯤 위치한 단성면 소재지는 당시 전투경찰연대의 거점이었다. 덕산전투가 예상 외로 며칠 끌었기 때문에 대병력이 공격해 올 것은 당연했다….> 
  

빨치산의 거점 중산리계곡—천왕봉에 이르는 지름길

덕산 3거리에서 院里(원리)의 德川書院(덕천서원) → 外公里(외공리) → 內公里(내공리)를 거치는 40여리를 달려 20번 국도가 끝나는 中山里(중산리)에 도착해, 中山관광지 입구의 ‘빨치산토벌전시관’에 입장했다. 1층에는 6·25동란 前後(전후) 시기의 지리산 빨치산의 태동과 실체에 관한 자료, 2층에는 빨치산의 생활 그리고 지리산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 등에 관한 자료를 전시해 놓고 있다. 다음은 中山里(중산리)와 天王峰(천왕봉) 일대에 대한 《남부군》의 기록이다.  

<남부군은 다시 중산리골로 이동한 후 천왕봉을 오르기 시작했다. 토벌군이 배치되지 않은 간격을 찾아 대피하는 것이다. 천왕봉과 반야봉, 그리고 칠성골·백무골 등 험하고 응달진 북변 골짜기는 그 겨우내 토벌군 초소가 별로 배치되지 않던 ‘구멍’이었다. 눈이 깊고 바람이 세어 겨울철엔 짐승조차 찾지 않는 골짜기이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곳은 항상 빨치산이 즐겨 찾는 은신처가 되었던 것이다.
 지금은 등산객의 발길이 잦지만, 당시의 천왕봉 부근은 빨치산만이 드나드는 그야말로 禁斷(금단)의 지역이며 비경 중의 비경이었다. 중산리 登攀口(등반구)에서 정상까지 9km, 가파르고 지루한 산길이 계속되고 法界寺(법계사)서 부터는 눈에 덮힌 바위벽도 있지만, 기동사단은 눈길을 헤치며 단 몇 시간 만에 천왕봉 정상에 올라섰다.>

 천왕봉(1915m)으로 오르는 중도에 法界寺(법계사)가 위치해 있다. 법계사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해발 1450m에 위치한 사찰이다.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창건되었다는 이 고찰은 여순반란사건 때 불탔으나 그 후 복원되었다. 요즘은 법계사의 전용 버스가 신도들을 싣고 중산리 등반구∼법계사 밑을 왕래하고 있다. 천왕봉도 이제 훨씬 가까워진 셈이다. 중산리 입구 빨치산토벌전시관은 8개의 빨치산 아지트, 4개의 빨치산 토벌코스, 1만8000m² 규모의 야외전시장이 전쟁 前後(전후)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중산리계곡 바로 남쪽의 巨林(거림)골은 남부군의 武器트(무기+아지트)가 위치했던 곳이다. 거림골은 철쭉으로 유명한 細石平田(세석평전)에서 시작되는 거림골 本流(본류)와 연하봉(1667m)과 촛대봉(1703m)에서 비롯되는 도장골, 한벗샘에서 발원하는 ‘자빠진골’ 등의 支流(지류)가 모여 이뤄진 계곡이다. 거림골 접근로는 20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하부댐(시천면 신천리) 바로 북쪽에서 1047번 지방도로 좌회전, 10km쯤 西進(서진)하면 된다. (계속)

언론의 난
[ 2016-08-22, 10:08 ] 조회수 : 52087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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