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글]이규민칼럼-新실세들의 ‘준비안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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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注) 이 글은 오늘자 동아일보에 실린 것입니다.
  
  역사라는 열차가 굽잇길을 돌 때마다 지식인들은 밖으로 튕겨 나간다고 카를
  마르크스는 말했다. 거대한 정치변화가 발생하면 열차를 지배하던 기득권 세력
  도 나가떨어지게 마련이다. 역사의 변화 방향을 예측하고 몸의 중심을 미리 옮
  겼던 사람들만이 주인공으로 그 열차에 남게 된다. 현실 정치에서 대통령 선거
  는 구배가 가장 큰 역사의 굽잇길에 해당한다.
  
  
  총체적 변화를 수반하는 대선에서 승리해 역사의 열차에 남게 된 집권자측은
  모든 것이 가능할 것 같은 자신감에 젖기 쉽다. 미국의 경제학자 허버트 스타
  인의 말대로 대통령(당선자)과 그 참모들은 자신들의 취임으로 세상이 달라지
  고 구정권의 어려운 문제들이 일거에 해결될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루
  아침에 신분이 수직 상승한 측근들은 세상이 자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주목
  하고 언론들이 머리기사로 취급해 줄 때 자칫 오만의 길로 들어서기 십상이다.
  
  
  ▼´과시용´ 의심가는 재벌정책들▼
  
  
  
  
  아니나 다를까, 대선 끝난 지 불과 한 주일도 지나지 않아 당선자 쪽 신(新)실
  세들은 앞으로 ‘세상 다스려 나갈 법’을 말하기 시작했다. 유난히 많은 것
  이 재벌정책이다. 예를 들면 총수의 전횡을 막기 위해 전체 이사의 절반 이상
  을 사외이사로 하겠다는데 이 말은 정치에 비유하자면 대통령의 전횡을 막기
  위해 국회를 강제로 여소야대로 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와 같다. 상장사 임원
  의 보수를 세상에 공개토록 한다는 주장은 임원들의 목에 소득액이 적힌 광고
  판을 걸어 종로거리에 세우자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쯤 되면 새 정권이 기
  업 임원의 봉급을 정해주지 않는 것을 고맙게 생각해야 할 지경이다. 재벌정책
  이 대개 이런 식이다. 재벌이 잘못하면 정교하게 그 부분만 치료해야지 충치
  가 있다고 모든 이빨을 흔들어 놓는다면 밥은 누가 먹여 준단 말인가.
  
  
  경제정책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득실이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대단히 조심스럽
  게 다뤄져야 한다. 경제관료들이 오랜 시간 고민해 만든 정책을 실세들이 단번
  에 부정하고 하루아침에 다른 것을 내놓을 때 누가 그것을 신뢰할 수 있을까.
  설익은 밥은 체하기 쉽다. ‘생각 없이 말하는 것은 겨누지 않고 총을 쏘는 것
  과 같다’는 말도 있다. 요즘 선 밥에 체하고 총소리에 놀란 국민이 한둘이 아
  니다. 정책이란 것이 그냥 한번 던져 본 다음에 ‘아니면 말고’ 식으로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국민은 어설픈 정책의 실험대상이 아니다.
  
  
  그 말들이 우발적 주장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애드벌룬을 띄워 민심의 풍향
  을 보기 위한 것인지는 모른다. 불과 며칠 만에 정책적 검토를 다 마쳤을 리
  없다면 혹 상승된 신분에 도취해 개인이 즉흥적으로 내놓은 자기 과시용 말들
  은 없을까. 요즘 신실세들과 정부 고위 공직자들이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뒤 고
  급 한정식집들에서 북적댄다는 소문은 측근들 ‘말’의 또 다른 목적을 짐작
  케 해 준다.
  
  
  물론 이런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사람 마음속에 억제할 수 없는 유혹이
  살아 숨쉬는 것은 5년 전에도 다르지 않았다. ‘말 안 듣는 은행장 목을 치겠
  다’는 70년대 독재정권식의 섬뜩한 협박에서부터 각종 이권 사업에 대한 선심
  성 약속에 이르기까지 당선자측의 ‘준비 안 된’ 말들은 그때도 난무했었다.
  참다 못한 김대중 당시 당선자가 측근들을 불러 입 조심을 주문한 게 한두 번
  이 아니지만 지금처럼 함구령은 그때도 효력이 오래가질 못했다. 명함조차 새
  기지 못하게 했다니 당선자가 오죽하면 그랬을까.
  
  
  ▼건의대상은 국민 아닌 당선자▼
  
  
  갑자기 신분이 상승한 측근들이 멋대로 위세를 과시토록 방관했던 대통령들은
  바로 그들 때문에 예외 없이 욕(辱)된 말로를 맞았다. 대를 잇는 정권의 실패
  에 국민은 지금 분노조차 포기할 만큼 지쳐 있다. 그런 역사는 이쯤에서 끝내
  야 한다. 새 정권이 그 길을 걷지 않기를 진심으로 그리고 간절하게 바라는 마
  음에서 제언하자면 제발 역대 정권과는 시작부터 다르게 해 달라는 것이다.
  
  
  그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좋은 정책구상이 떠올랐을 때 실세들은 국민에게 대
  고 말하지 말라. 세 번 생각한 다음에 당선자에게 먼저 건의하라. 이 얼마나
  쉬운 일인가.
  
  
  이규민 논설위원실장 kyumlee at donga.com
  
  
출처 :
[ 2003-01-07, 20:3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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