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 대통령을 몰아낸 판, 검사들이 읽으면 기분이 나빠질 글
영국의 찰스 1세에게 사형 판결을 내린 판사들의 최후 이야기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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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이 국가다'고 했던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가 유럽 대륙을 석권하던 17세기는, 절대왕조 전성기였다. 영국에선 절대왕조를 깨는 움직임이 전개되었다. 영국의 황금시대를 연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1603년에 죽자 영국인들은 스코틀랜드王을 초빙, 영국왕 제임스 1세로 세웠다. 그는 스코틀랜드왕으로 있을 때 王權神授說에 관한 책을 쓴 이였다. '참다운 군주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이므로 하나님에게만 책임을 진다'는 신념을 가진 이였다. 자연히 그는 귀족(주로 地主)으로 구성된 議會와 자주 충돌하였다. 제임스 1세가 죽은 뒤 즉위한 아들 찰스 1세도 의회를 무시하려 하였다. 1628년 의회는 '권리 請願'을 채택, 王의 독재를 견제하였다.  
   
이때 중요한 인물이 역사에 등장한다. 올리버 크롬웰은 鄕紳, 즉 지방有志 출신이었다. 농사를 짓던 그는 캠브리지 대학을 중퇴한 뒤 런던에서 법률학교를 졸업하였다. 1628년 국회의원으로 뽑혔다. 다음 해 찰스 1세는 의회를 해산, 專制를 강화하였다. 크롬웰은 청교도였고, 키가 컸으며, 날카로운 눈매에, 목소리가 우렁찼다. 말은 논리정연하여 의회 지도자로 주목을 받았다. 
  
1642년 議會와 王은 드디어 內戰을 시작한다. 양쪽이 군대를 가졌다. 의회군에 가담한 크롬웰은 기병대를 이끌고 참전하였다. 그가 조직한 기병대는 鐵騎兵(Ironsides)으로 불렸다. 이 부대는 軍律이 엄하였다. 보초를 서던 중 잠을 자다가 발각되면 사형에 처해졌다. 무기를 버려도 죽음이었다. 비무장 시민을 약탈하면 엄벌에 처했다. 그 대신 부대원들끼리는 민주적 토론이 이뤄졌다. 모두가 청교도였으므로 왜 싸우느냐에 대한 自覺이 확고하였다. 말하자면 이념형 군대였다. 찬송가를 軍歌처럼 부르면서 敵陣으로 돌진하였다. 
  
크롬웰은 王軍을 상대로 결정적 승리를 두 번 거뒀다. 1645년 6월14일 네즈비 전투에서 크롬웰 군대는 王軍을 무찌르고 포로를 5000명이나 잡았다. 찰스 1세는 고향인 스코틀랜드로 도망갔다. 스코틀랜드는 40만 파운드를 받고 그의 신병을 잉글랜드 의회에 넘겼다. 1647년 찰스 1세는 다시 도망을 가서 군대를 조직, 內戰이 再演되었다. 의회군은 또 다시 승리, 찰스 1세를 붙들었다. 
  
의회의 지도자 크롬웰은 왕을 135명으로 구성된 재판부에 넘겼다. 재판부는 의원, 군인, 법률가들이었다. 專制와 반역죄로 사형이 선고된 찰스 왕은 1649년 1월30일 화이트홀 궁전 앞에 만들어진 처형대에서 집행인이 휘두른 도끼로 목이 날아갔다. 
  
의회는 그해 5월 王政을 폐지하고 공화제를 선언하였다. 크롬웰은 王이 되라는 간청을 거부하였다. 王이 암살되거나 廢位되는 경우는 있어도 정식 재판을 거쳐 死刑이 집행된 경우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특히 유럽 대륙에서 절대왕조가 전성기를 맞고 있을 때였으므로 찰스 1세의 처형은 큰 충격을 주었다. 150년 뒤 프랑스에서 일어난 대혁명 때 루이 16세 부부가 단두대에서 처형되는데, 영국 청교도 혁명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크롬웰은 護民官이란 이름으로 10년간 독재를 하였다. 議會는 분열되었으나 군대가 그를 지지하였다. 이 기간 크롬웰은 舊敎세력인 아일랜드를 점령하고, 해양강국으로 떠오르던 네덜란드와 전쟁을 하여 이겼다. 크롬웰은 청교도 혁명을 민중혁명이 아닌 부르조아지 혁명으로 생각하였다. 농민보다는 地主와 상공업자를 重視하였다. 그는 '나라가 병이 들었을 때는 가난한 사람보다는 富者 손에서 고생하는 편이 낫다'는 말도 했다. 보통선거권과 자유 평등을 주장하는, 몰락농민과 수공업자들의 水平派 조직을 武力으로 억눌렀다. 
  
1658년 크롬웰은 말라리아에 걸려 急死하였다. 나이 59세였다. 아들이 護民官 자리를 승계하였으나 오래 가지 못하였다. 議會의 결정으로 王朝 회복이 이뤄졌다.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다시 영국의 王으로 추대되었다. 
  
찰스 2세가 맨 처음 한 일은 크롬웰에 대한 복수였다. 일종의 국립묘지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치되었던 크롬웰의 屍身을 꺼내 剖棺斬屍를 하였다. 그는, 아버지가 처형된 날인 1월30일에 크롬웰의 머리를 잘라내 창에 꽂아 웨스트민스터 홀의 바깥에 세워 두게 하였다. 크롬웰의 머리는 그 뒤 24년간 걸려 있었다. 1685년 이후 크롬웰 머리는 여러 사람 손을 거치고 경매에 붙여지기도 하였다. 해골이, 캠브리지에 있는 시드니 서섹스 대학(캠브리지 대학 소속. 청교도가 세운 학교. 크롬웰이 다닌 적이 있다) 교회에 묻힌 것은 剖棺斬屍 400년 뒤인 1960년이었다. 

찰스 1세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집행하는 데 관련된 판사 등 59명 중 생존자 31명이 보복을 당하였다. 12명은 교수형을 당하고, 19명은 종신형을 받았다. 이들에게 적용된 범죄는 大逆罪였다. 왕을 몰아내거나 체제를 폭력으로 바꾸려는 범죄이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大逆罪는 사형이다. 만약 검찰이나 법원이 증거를 조작하거나 증인을 협박, 허위 진술을 받아내 불법으로 헌법기관인 현직 대통령을 몰아내려 한다면 이 역시 대역죄(내란, 國憲문란 등)에 해당할 것이다. 특검이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 건으로 김기춘, 조윤선 씨 등을 구속하였는데 '블랙리스트란 말은 찰스 2세가 작성한 보복 대상자 명단에 붙인 별명이었다.  
  
찰스 2세가 크롬웰의 屍身을 훼손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王權 약화의 大勢는 막을 수 없었다. 
  
찰스 2세가 죽은 뒤 王位를 계승한 제임스 2세는 가톨릭 교도였다. 그는 성공회를 탄압하고 가톨릭 세력을 부활시키려 하였다. 여기에 위기를 느낀 新敎 세력과 議會는 쿠데타를 꾸민다. 네덜란드 지도자이던 오렌지 家門의 윌리엄公은 제임스 2세의 딸인 매리의 남편이었다. 부부는 신교도였다. 윌리엄公은 프랑스의 루이14세에 대항하여 네덜란드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영국王 자리에 앉게 되면 對프랑스 연합전선을 꾸미는 데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영국 議會는 윌리엄公이 네덜란드 군대를 이끌고 영국을 침공, 제임스 2세를 추방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윌리엄公이 이끄는 1만5000명의 네덜란드軍은 영국에 상륙했다. 영국군의 신교도 장교들은 침공군과 맞서 싸우기는커녕 탈영하기 시작하였다. 영국왕 제임스 2세는 勢가 불리함을 깨닫고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영국 의회는 윌리엄公과 매리에게 의회가 결의한 '권리 선언'을 받아주면 왕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제의한다. '권리 선언'의 핵심은, 議會의 同意 없이는 왕이 課稅나 법률의 변경을 하지 못한다는 약속이었다. 이 약속은 1689년 '권리 장전'이란 이름으로 공포된다. 왕이 主權을 의회에 넘긴 것이다. 영국은 지금도 국민主權國이 아니라 의회主權國이다. 이렇게 하여 윌리엄 3세-메리 2세 공동王이 등장하였다. 1688년에 이뤄진 이 쿠데타를 '명예혁명'이라고 한다. 無血 혁명이란 의미이다. 1642~1688년 사이 46년간 벌어진 內戰, 王의 처형, 王政 복구, 크롬웰의 剖棺斬屍를 감안한다면 無血이란 표현이 적당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영국은 유럽에서 맨 처음으로 국민들이 王의 목을 친 나라이다. '전쟁 없이는 국민국가가 없고, 혁명 없이는 민주주의가 없다'는 말대로 국민이 王의 목을 친 혁명을 맨 처음 치른 것이 영국이었다. 프랑스는 그 150년 뒤, 독일은 270년 뒤 왕의 목을 치거나, 왕을 추방하였다. 
  
한국에선 1960년 4월에 국민들이 권력자를 민중봉기로 몰아내는 기록을 세웠다. 영국인들이 17세기에 한 일을 310년 뒤에 한 것이다. 북한은 아직도 王의 목을 치지 못하고 있다. 
  
비록 剖棺斬屍당했지만 크롬웰의 역사적 기여에 대한 평가는 파묻을 수 없었다. 토마스 칼라일은 '영웅숭배론'에서 크롬웰을 영국 最高의 영웅으로 평가하였다. 미카엘 H. 하트라는 사람이 만든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끼친 100대 인물 랭킹'엔 크롬웰이 41등에 올랐다. 국민의 이름으로 王의 목을 친 사건은 절대왕조의 弔鐘이 되었다. 이는 議會와 국민의 권리를 강화해가는, 인류의 민주주의 대장정에서 획기적 사건이었다. 
  
영국 민주주의 발전의 시발점은 1215년의 마그나 카르타(대헌장) 제정이다. 귀족, 교회, 도시민들이 존 왕을 압박하여 받아낸 여러 가지 약속이다. 시민들이 왕의 목을 친 것은 그 434년 뒤였다. 암살이나 쿠데타 없이 평화적으로 정권을 주고 받자는 약속을 하고 이게 지켜지기 시작한 것은 마그나 카르타 반포 473년 뒤였다(1688년의 명예혁명). 이런 과정을 볼 때 한국의 어린 민주주의가 앞으로 쿠데타도 혁명도 內戰도 없이 순탄하게 발전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매우 순진한 희망임을 알 수 있다. 북한노동당의 대한민국 전복공작과 從北세력의 준동이 결합되어도 이를 방치한다면 한국은 피를 더 흘리게 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北의 핵위협이 있다. 한국은 아직 미래가 결정되지 않은 나라이다.

언론의 난
[ 2017-03-19, 02:40 ] 조회수 : 8325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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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학     2017-03-19 오후 10:00
1970년 Cromwell이란 영화가 나왔었는데 이 영화에 나오는 찰스1세(Alec Guinness 분)의 사형집행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더군요. 찰스왕은 통치에는 실패했지만 영화에 의하면 매우 의연한 자세로 사형을 당했어요. 여유있게 복면을 하고있는 두명의 사형집행관과 농담도 해 가면서. 오히려 사형집행을 추진한 Cromwell(Richard Harris 분) 쪽이 초조해 하는것 같았어요. 유튜브에 Cromwell을 치면 영화가 뜹니다.
   동탄사람     2017-03-19 오전 10:25
조선말 친일파가 한일합방 하듯이 지금은 친중파에 의하여 한반도의 중국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보여진다. 친일파 욕하는 재미로 사는 사람들이, 종북파, 친중파에는 입을 다물고 있는 기이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
   적은자     2017-03-19 오전 8:53
1차대전 후 독일의 민주주의의 시작이었던 바이마르 공화국이 히틀러라는 광인에게 접수되기까지 25년 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서기까지, 독일은 2차세계대전에서 6백만 이상의 군인이 죽어야 했고, 동서독이 분리되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6.25 전쟁을 통해 수백만의 인명의 희생 위에 세워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역사를 모르거나 왜곡하려는 세력에 의해 큰 위협 아래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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