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오늘, 全斗煥, 군 동원 준비 지시
"10·26이 부산에서 일어났어요. 4·19도 대구 마산 부산 서울 호남으로 파급되었고 10·26도 부산 마산 대구 서울 제주로 퍼져나갔어요. 부산 마산 대구의 이 영남 일대 삼각형이 문제야."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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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년 전인 1987년 6월19일 全斗煥 대통령은 전날 부산에서 있었던 대규모 시위 보고를 받고 군대를 동원, 진압한다는 계획을 검토한 적이 있다. 대책회의 기록은 아래와 같다. 이 계획은 실천되지 않았지만 그날 광화문 일대의 언론과 官街에선 '오늘 오후에 비상계엄령이 펴진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날 회의는 全 대통령이 강경조치를 검토한다는 소문을 내어 야당과 운동권의 자제를 유도하기 위한 고도의 심리전이었다. 군대를 동원하면 88년 서울 올림픽도 개최하기 어렵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盧泰愚 민정당 대통령 후보와 의논하여 국민들의 직선제 요구를 받아들이는 이른바 6.29 선언 준비에 들어간다.   


  군 병력 출동을 준비!
  
   1987년 6월19일 오전 10시 반 全斗煥 대통령은 안기부장, 국방장관, 3군 참모총장, 수방사령관, 보안사령관 등 軍 고위 관계자들을 청와대 집무실로 소집, 비상조치를 전제로 한 군병력배치 계획을 결정하고 시달했다.
  
  
   한미 연합사에 각 시·도 사단 진입을 통보하라
  
   (전국의 지역별 비상시 병력배치 계획에 관한 보고와 서울 지역의 병력배치 계획에 관한 보고를 들은 뒤)
   대통령: 한미 연합사령부에 통보해야 될 사단의 이동은 통보하라. 통보 안해도 되는 사단은 하지 말고.  대전과 대구에 1개 사단을 내려보내고 2개 여단은 전남·광주로 돌리라. 부산은 1개 사단과 1개 연대를 보내서 1차로 부산과 대구, 마산의 시위사태를 진압해야겠어. 서울은 4개 연대를 배치해서 주요 대학에 배치하도록 해. 군에 가스탄은 충분히 보유하고 있는가.
  
   李基百 국방부 장관: 20일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풀 가동을 지시했습니다.
  
   대통령: 대학교는 휴업령을 내리면 될 거고 방학기간이므로 학부모들께는 알리는 조치를 해야 돼. 내일 새벽 4시까지 전부 진입하도록 해야돼요. 학교에 아무도 없을 때를 택해서 들어가고 농성자들은 검거하고. 농성, 데모의 배후 연계 사항을 밝혀서 그 뿌리를 1,2개월 안으로 뽑아야 합니다.
  
   이것은 계엄선포가 아니라 비상조치입니다. 계엄령에다 플러스 알파를 하는 게 비상조치야. 군부 동원도 할 수 있고 군법회의도 할 수 있고 정당해산까지도 가능해요. 안기부 등에서 준비가 다 돼 있지. 지금 학원사태는 중앙의 지휘부가 두뇌전을 하고 있어. 좌경 세력들은 정부가 손놓고 넘어가는 것처럼 보고 사기가 오르고 있는 것 같아.
  
   安武赫 안기부장: 데모 학생들에 대한 작전은 6월25일까지는 끝낸다는 계획입니다. 학생 간부들은 부산을 거점으로 하려 하고 있습니다.
  
   부산-마산-대구의 영남 삼각형이 문제야…
  
   대통령: 10·26이 부산에서 일어났어요. 4·19도 대구 마산 부산 서울 호남으로 파급되었고 10·26도 부산 마산 대구 서울 제주로 퍼져나갔어요. 부산 마산 대구의 이 영남 일대 삼각형이 문제야. 일차적으로 경찰이 검거를 맡도록 해야 돼요.
  
   안기부장: 부산은 학생들이 나오면 구경하는 시민들이 나옵니다. 지금까지는 경찰 병력이 모자라서 학생들이 학교에서 모여서 시내로 가는 게 아니라 시내에서 바로 모이고 있습니다.
  
   대통령: 그러면 부산에는 군 병력을 투입하면서 통금 조치를 할 필요가 있어요. 부산은 내일 새벽 4시까지 군 병력을 보내도록 해요.
  
   대통령의 밝은 표정
  
   6월18일은 재야 세력이 최루탄 추방결의의 날로 정해 6·10시위에 이어 전국적으로 대규모 시위를 벌인 날이었다. 데모는 특히 부산 지역에서 격렬하게 벌어져 8만여 명이 시내 중심부를 6시간 동안이나 장악, 자정을 넘어 19일 새벽 3시까지 시청을 위협하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대통령은 19일 아침 8시 반 집무실에서 있은 鳩首(구수)회의에서 군을 동원해서라도 빨리 진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건의를 받고 오전 10시 반 군 고위 간부들을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는 이미 일요일인 6월14일 상춘재 앞뜰의 모임에서 대통령으로부터 비상사태에 대비한 준비 지시를 받았던 안기부, 국방부측에 의해 비상시 군 동원 계획이 보고되었고 대통령은 可用병력과 현황을 점검하고 각 지역에 파견할 부대 이름과 배치 장소, 주요 시설 등을 시달했다.
  
   이 날 밤 8시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해서 비상조치권을 발동하는 절차를 밟고 9시에 생방송을 통해 비상조치에 관한 담화를 발표한다는 전제 아래 군의 준비태세를 일차 점검한 것이다.
  
   일견 사태는 매우 긴박하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군 핵심간부들과의 회의에서 全 대통령의 표정에는 긴장감이나 무거운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명랑하다고 할 정도로 활기가 있었다.
  
   나는 이 회의가 끝난 뒤 李鍾律 공보 수석비서관으로부터 비상조치에 즈음한 담화문을 작성하라는 얘기를 들었으나 비상조치의 구체적인 내용은 병력 출동 이외에 나온 것이 없었다. 막상 초안을 쓰려고 보니 군 고위관계자 모임에서의 대통령 지시 내용이 병력 배치에 관한 사항 이외에는 매우 막연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대통령은 안기부에서 준비가 다 되었다고 했지만 그 내용에 대해서는 다시 점검한 것도 없었고 실무적으로 협조된 것도 없었다.
  
   거기에다 또 한 가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이 날 오후 2시에 예정돼 있었던 릴리 주한 미국대사와의 면담 계획이 아무런 변경 없이 그대로 진행된다는 점이었다. 오전에 비상조치를 결심해서 강행할 생각이었다면 미국대사를 만나는 것은 조치를 취한 이후로 연기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역시 군대동원 지시는 이날 오후 4시 반 경 유보됐다.
  
   고도의 심리전
  
   全 대통령은 집권 말기인 1986년 하반기부터 비상조치나 군부 동원에 관한 얘기를 많이 했다. 政局이 어려워지기 시작한 86년 말에는 실제로 비상조치권 발동에 관한 일부의 건의를 받고 검토를 시킨 일도 있었다.
  
   87년에 접어들어 정부 여당이 밀리는 상황으로 나가면서 각종 회합에서 비상조치를 언급하는 회수는 더욱 빈번해지는 것을 목격했다. 全 대통령은 그러면서도 자신의 속을 털어놓을 상대에게는 군부 동원은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것임을 확실히 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심리 전술을 통치에 援用,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군부 동원의 실감을 줄 수 있다는 계산 아래 힘을 과시하려는, 바둑으로 말하면 ‘捨石作戰(사석작전)’같은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全 대통령 자신은 퇴임 후 이 때의 상황에 언급, “나는 이미 극적인 방안을 결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 동원 지시는 별개 문제였다”면서 “군 동원 지시는 치안 차원에서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서 예방적 효과도 감안해서 지시한 것”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극적 조치’는 물론 직선제 수용과 金大中씨 사면·복권을 가리킨다. 

  출처: 월간조선 1992년 1월호에서 발췌
  필자: 김성익(전 대통령 비서실 비서관)
  
언론의 난
[ 2017-06-19, 10:13 ] 조회수 : 1645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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