再婚, 그리고 두 자녀에 대한 미안함
소설가 김동인(金東仁)의 항변(15-2) “나는 첫 도박에 실패를 하고 지금 둘째 도박에 손을 걸어 놓은 뒤 그것이 들어맞기만 바라고 있습니다.”

嚴相益(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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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 출신인 김동인(金東仁)은 평양 사투리가 많고 어휘가 풍부하지 못했다. 소년 시절을 일본에서 보낸 탓도 있었다. 글쟁이들은 아내를 얻는데도 문학적인 요소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염상섭은 이광수(李光洙)의 소설 문장이 그렇게 화려한 것은 부인의 어학코치 덕이라고 알려주었다. 염상섭은 최남선이 하는 잡지사의 편집 책임자로 근무하고 있었다. 비평을 쓰던 그가 쓴 ‘표본실의 청개구리’란 작품을 읽고 김동인은 불안을 느꼈다. 그 풍부한 어휘는 경이(驚異)였다.

조선 말(末)은 이인직(李人稙)의 독무대였고 그 다음은 이광수(李光洙)의 독무대였다. 이광수가 상해에 가서 독립신문에 관여할 무렵은 김동인 그 자신이 조선 문학계의 독무대를 차지했다고 생각했다. 새로이 거물 염상섭이 나타난 것이다. 김동인이 그 무렵 한 여성을 소개받았다. 김경애(金瓊愛)였다. 그녀는 평남 용강군 출신으로 그보다 열한 살 아래였다. 당시로서는 평양 군악(軍岳)의 의명학교(義明學校)와 숭의여중을 나온 배운 여성이었다. 김동인은 그녀와 몇 번을 만난 후 이런 편지를 보냈었다.

<저는 그대의 얘기를 친구들에게 솔직히 털어놓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놀라는 것 같았습니다. 친구들이 나에 대해 취한 태도를 몇 가지 들어 보겠습니다.
 “또? 그래, 할 용기가 있나?”
이것은 잠시 내 얼굴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던 주요한(朱耀翰)의 말이었습니다.
 “그건 기쁜 일이야. 그렇지만 이번 사람은 어때?”
이것은 춘원(春園)의 말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잃어버리지 말아. ”
이것은 염상섭(廉想涉)의 충고였습니다.
 “또 뛰면 또 얻고, 또 뛰면 또 얻고 그게 제일이지. 하하하”
이것은 K의 평이었습니다.
 “좋은 부인 맞아서 가정의 위안을 얻으세요.”
이것은 서해 최학송(崔鶴松)의 축복이었습니다.
 “나는 축복할 따름일세.”
 이것은 그동안 내 마음을 잘 알던 안서 김억(金億)의 축복이었습니다. 친구들의 여러 충고 앞에서 나의 대답은 꼭 한 가지였습니다. 당신은 가정에서는 착한 지어미가 되고, 어린애에게는 좋은 어머니가 될 자격과 품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그런 귀여운 여성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대에게는 경박(輕薄)한 그림자가 없습니다. 현대의 여자 그러니까 여학교를 졸업한 여자들 치고 무게가 있는 사람은 발견하기가 힘듭니다. 소위 모던이라는 말과 경박(輕薄)이란 말은 지금에 있어서는 같은 의미로 통용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 가운데서 그대를 발견했다 하는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그대는 무거운 사람이었습니다. 말 한 마디도 속으로 몇 번을 생각한 뒤가 아니면 입 밖에 내지 않는 가벼운 그림자는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소위 유행이라는 것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유행에 반감까지 가지고 있는 것은 역시 문학에 대해 일시적 유행을 경멸하는 나의 성격과 공명되는 점이 많았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첫 선물로 어떤 유행품을 보냈을 때에 노골적으로 그것을 사절하고 이 다음 유행이 다 식은 뒤에 쓰겠다고 그냥 싸 둔 그대였습니다. 내가 그대와 약혼을 하겠다면서 어머님께 여쭈었을 때, 어머님은 여러 방면으로 그대를 알아봤습니다. 어머님은 가난은 하지만 점잖은 집안의 딸이라는 것과 그대의 성질이 매우 얌전하다는 것을 알아내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님은 만족하셨습니다.
 점잖은 집안에서 성장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을 형성하는 큰 요소가 됩니다. 야비한 집안에서 난 사람은 야비하게 됩니다. 얌전하다 하는 것은 나와 같이 전처의 소생이 둘이나 있는 사람의 결혼 문제에는 나의 어머님으로는 당연히 생각지 않을 수가 없는 큰 문제입니다. 그대와 약혼에 앞서서 나는 모든 걸 솔직히 털어놨습니다. 나는 재산이 없습니다. 전처(前妻)의 소생이 둘이나 있습니다. 성질이 교만하며 방탕아였습니다. 고정된 수입은 없습니다. 이것이 나의 정체였습니다. 소설가로만 알고 있던 나의 정체가 이러한 것을 알았을 때 그대의 여린 마음은 놀랐겠지요. 나도 물론 이런 고약한 인격을 그대에게 알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청혼을 하면서 나는 조금이라도 거짓의 도금(鍍金)을 하기가 싫었습니다. 그 경악에서 깨어난 뒤에 그대가 한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제가 다만 현모(賢母)가 되고 양처(良妻)가 될 수 있을지 이것이 의문이야요.”
당신은 모든 걸 이해하고 부모님의 승낙을 얻으러 고향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대는 한낱 얌전한 처녀만은 아니었습니다. 거기는 숨어있는 커다란 과단성이 있었습니다. 그대의 고향에서 몇몇 사람이 나에 대한 악평을 불어넣어 혼인을 방해하던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결혼이 된 것은 그대의 과단성이었습니다. 엮어 내리자면 어찌 이것뿐이겠습니까만, 무게와 얌전함과 과단성 이만하면 넉넉할 것입니다. 그대는 미인은 아닙니다. 그대에게는 표정의 움직임이 적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도 완전한 인격 앞에는 소멸되어 버리는 문제일 것입니다. 나의 사업인 문학에 대하여 아직 이해가 그다지 없는 것도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몇 날 가지 않아 이해할 줄 믿습니다. 당신의 애정이 풍부한 온화한 성격과 그것을 장식하는 인격적 무게와 과단성, 그것만 있으면 그밖의 온갖 다른 문제는 모두 태양 앞의 눈과 같이 사라져 버릴 사소한 문제로 압니다.
아내를 잃은 뒤에, 사흘이 지나지 못하여 새 아내를 구하려고 눈이 벌겋게 되어 돌아가는 이 세태에서 3년 동안을 결혼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던 것은 그대 같은 이상적 인격이 현대 여성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라고 보고 단념했던 것입니다. 결혼이란 것은 인생의 가장 커다란 도박입니다. 틀렸다가는 일생을 망치는 커다란 도박입니다. 나는 첫 도박에 실패를 하고 지금 둘째 도박에 손을 걸어 놓은 뒤에 그것이 바로 들어맞기만 나의 정성을 다하여 바라고 있습니다.>

김동인(金東仁)은 1930년 6월 김경애(金瓊愛)와 약혼한다. 다음해인 1931년 4월18일 김동인은 평양 서문 밖 교회에서 김경애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 얼마 후 김동인은 고향에 있는 아이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일환(日煥)아 옥환(玉煥)아 지금의 어머니는 대단히 좋은 사람이다. 매사를 전실(前室) 자식인 너희들과 의가 상하지 않도록 세밀하게 주의를 하면서 행동한다. 아버지인 나는 그걸 보면서 아주 기쁘단다. 그러나 그 사이가 과연 친엄마와 자식 사이처럼 틈이 없을까? 아버지는 보고 있단다. 너희가 만약 친엄마라면 떼를 쓰면서 해달라고 하거나 억지 부릴 일을 아버지에게 하는 것을 그리고 너의 지금의 어머니가 친자식 같으면 혼을 내 줄 일을 억지로 웃으면서 말리고 하는 걸 말이다. 이런 일을 볼 때마다 아버지의 마음은 쓸쓸해진다. 어리광과 억지는 아이들의 정서에 좋은 거름이 되는 거란다. 그리고 그건 생모(生母)에게만 할 수 있는 거란다. 이 아버지는 네가 밸을 부리면 먼저 역정을 냈었다. 네가 어리광을 부리기에 아버지는 너무 엄격했다. 이 세상의 누구보다 가장 너희들을 사랑하면서 어리광을 받아줄 사람은 이 넓은 세상에 아버지 하나밖에 없는 줄 알면서 너에게 너무 엄격했다. 미안하구나.’

1930년 9월 발간된 잡지 ‘여성시대(女性時代)’에 김동인이 새로 약혼한 김경애에게 보낸 글이 실려 있다.

(계속)

언론의 난
[ 2017-09-11, 10:32 ] 조회수 : 862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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