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총련의 日本 뿌리-재일본조선인연맹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 4층의 본관, 도서관, 강당, 기숙사 등이 차례대로 만들어졌다. 강당과 도서관이 그랬던 것처럼 교직원, 재학생들이 스스로 시멘트를 다듬어 기둥을 세우고, 못을 박아 완성한 건물도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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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 직후인 1945년 10월15일, 도쿄 히비야 공회당에서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의 결성 대회가 열렸다. 참여 인원은 각 파벌의 대표가 400명이었다.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지만 강한 영향력을 가졌던 것은 전후 합법화된 일본 공산당이었다.

이는 이전의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의 '일국일당(一國一黨)' 방침에 따른 것으로 재일조선인 공산주의자가 공산당에 가입하는 경위가 됐다. 총련은 어떻게든 조련의 계보를 잇는 조직인 것처럼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1949년 조련이 강제해산 명령을 받은 뒤, 1955년 출범한 총련은 일본공산당으로부터 북한으로 조직의 우두머리를 갈아탄 조직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초대 권력자 김일성의 신임을 얻어 총련의 초대 의장에 오른 한덕수 지도부는 재일조선인의 권리옹호, 생활개선 등의 본래 역할을 망각한 채 북한의 대변자가 되어 조선학교 교육은 이를 위한 ‘정치도구’로 변질됐다.

원래 조선학교는 귀국을 강하게 원했던 재일 1세가 모국어를 못하는 일본에서 자란 자녀들 때문에 조선어를 가르치기 위해 조련 시대에 만들어진 ‘국어강습소’가 모태가 됐다. 종전 후 초토화된 일본은 가난했다. 그러나 재일한국인들은 훨씬 더 가난했다. ‘전승국민’을 외치며 무법행위를 반복하며 기승을 부렸던 세력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재일한국인들은 빈곤과 차별을 겪고 있었다.

일본인이 살지 않는 하천 부지와 저습지(低濕地)를 불법 점거하여 막사를 짓고 돼지를 키우며 고철 줍기, 밀주, 곱창구이 등을 팔면서 겨우 생계를 유지했다. 그들은 조국인 한반도로 돌아가 곤경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모국어를 가르치는 학교가 필요했다. 국어 강습소에 다니는 어린이 수가 1946년에는 4만 명을 넘어섰다. 그러나 밀항선에 높은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한반도로 돌아간 사람들에게 기다린 것은 종전 후 일본보다 더 극심한 빈곤과 차별이었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많았던 것은 앞서 언급했다. 그들은 점점 사회주의를 통해 빈곤과 차별을 벗어나는 유토피아가 있다고 생각했다.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의 우위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어지던 시대이다. 북한을 지지하고 총련에서 희망을 찾았던 재일한국인 사회의 사람과 자금이 조직에 흡수되어 모일 수밖에 없었다.

<朝大의 교육시스템>

朝大 창설은 총련 결성 이듬해에 이뤄졌다. 1956년 4월10일 도쿄도 기타구 주죠 소재의 도쿄조선중고급학교 내 부지에 2년제 학교로 창립됐다. 교원은 10명, 재학생은 60명으로 출발했지만 조선학교는 이로써 초-중-고-대학이라는 초등교육에서 고등교육까지 자체적으로 일관된 교육시스템을 완성시켰다. 그리고 조선학교 교원을 朝大에서 양성하여 각 학교로 보내고, 조직에 순응한 청소년을 재생산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총련이 간행하는 공적 자료 등에는 당시 교사(校舍) 사진이 게재되어 있다. 막사처럼 생긴 목조의 단층집 구조로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교사는 舊일본 육군의 무기고였다고 한다. 입구에는 ‘조선대학’이라고 적힌 나무 간판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현재 코다이라市의 朝大 캠퍼스(약 2만평)로 옮긴 것이 3년 후인 1959년이다. 당초 총련, 朝大 측이 이 사실을 숨기고 ‘공립산업’이라는 유령회사까지 만들어 트랜지스터라디오 공장으로 포장했던 것에 대해서는 앞에서 밝혔다. 주변 주민들은 ‘새로운 일자리가 될 것’이라고 환영했으나, 실제로 뚜껑을 열어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조선대학이 됐다는 것이다.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 4층의 본관, 도서관, 강당, 기숙사 등이 차례대로 만들어졌다. 강당과 도서관이 그랬던 것처럼 교직원, 재학생들이 스스로 시멘트를 다듬어 기둥을 세우고, 못을 박아 완성한 건물도 적지 않았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를 했다. 학교 경비도 재학생이 밤새도록 당번을 교대로 섰다. 이듬해인 1960년에는 재학생 수가 500여 명에 달했다.

언론의 난
[ 2017-11-12, 22:36 ] 조회수 : 182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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