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역사를 알면 세계사가 보인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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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어느 지역을 여행할 때는 반드시 그 나라나 지방의 역사를 개관한 책을 읽는다. 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그를 여행한 2004년 3월에도 그러하였다. 역사개관을 알아야 내가 여행하는 도시, 내가 구경하는 건물의 의미를 전체적인 맥락속에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큰 인식의 틀이 없이 건물과 거리 하나 하나에만 卽物的으로 반응하다가는 감탄과 피로 속에서 여행의 의미가 실종되기 십상이다. 역사는 오늘을 만들어낸 토양이다. 어느 나라의 특징, 민족성, 음식도 다 역사적 産物이다.
     네덜란드(Netherlands)와 벨기에와 룩셈부르그를 우리는 베네룩스 3국이라 부른다. 영어로는 「저지대 國家群」이란 의미로서 Low Countries라 한다. 이 지역은 16세기에 네덜란드가 맨첨 독립국이 되기 전까지는 역사상 하나의 단위로서 기능했고 그 뒤에도 合從連橫(합종연횡)을 거듭하기도 했다. 지금은 세 나라가 뚜렷한 문화적, 정치적 개성을 지닌 국가로 서 있으나 역사적 공통분모는 크다.
     게르만족이 살던 이 지역에 문명이 들어온 것은 율리우스 시저가 서기 전 59-52년 사이 이 지방의 정복을 끝낸 때였다. 로마 지배는 3세기까지이고 그 뒤 이 지역은 게르만족의 대이동기를 맞아 큰 혼돈상태로 들어갔다. 7-8세기 게르만족의 일파인 프랑크족이 프랑스와 독일을 석권하면서 이곳 저지대를 점령했다. 프랑크족은 저지대 주민들을 기독교로 강제 改宗시켰다. 프랑크 왕국의 샬레마뉴 大帝가 지금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대부분을 정복하여 西유럽을 거의 통일하고 죽자 이 大帝國은 다시 분열되고 저지대도 지방 영주들 중심으로 나눠졌다.
     로마-프랑크族에 이어 이 지역에 나타난 것은 지금의 노르웨이쪽에서 내려온 바이킹族이었다. 이들은 저지대의 강을 타고 내륙으로 들어와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다. 이에 대응하여 영주들도 城을 쌓고 정부의 모습을 갖추었다.
    
     부르고뉴 지배 시절의 번영
    
     12세기에 들어서자 상인들과 기술자들이 영주들과 계약을 맺었다. 상인들과 기술자들은 영주의 정복사업을 지원하는 대신에 영주로부터 여러 가지의 보호를 받는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런 약속은 서면으로 이뤄졌다. 나중에 국제법의 규범이 이 지역에서 생기고 EU의 본부가 이 지방에 들어서게 되는 데는 권력을 법으로 통제하는 오랜 역사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독일 도시들을 중심으로 한자 동맹이 생기자 저지대의 도시들도 이에 가입했다. 14세기말부터 저지대의 여러 도시국가들은 서서히 부르고뉴 公國에 의해 병합되어 나간다. 부르고뉴 공국은 프랑스의 중심부에 있던 나라인데 좋은 지도자들을 만나면서 국력이 급팽창하여 지금의 독일-프랑스 접경지대 알사스 로렌을 점령하고 北上하여 저지대로 진출하여 15세기에는 이 지역의 지배자가 된다. 지금은 포도주 왕국이 된 부르고뉴 지방에 뿌리를 둔 부르고뉴 公國은 저지대의 도시국가들을 강력하게 통치하면서 자율성을 많이 규제하였으나 정치적 안정을 부여함으로써 경제적 번영을 가져왔다. 저지대의 경제활동은 맥주 생산, 그림, 보석, 도자기 제작과 무역 등이었다. 저지대 사람들의 근면성과 오랜 상업의 전통이 좋은 지도자와 어울려 15세기의 번영을 가져왔다.
     프랑스의 디종 근방 부르고뉴 지방에 가보면 프랑다스(베네룩스 지방을 프랑스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다)風의 건물들이 많은데 이 公國이 저지대를 지배하면서 수입한 건축법 덕분이다. 1506년 저지대의 통치권은 부르고뉴 공국에서 스페인 왕 카를로스1세(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는 칼 5세)에게 넘어갔다. 칼은 합스부르그 王家 사람인데 그는 독일의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했다.
     당시 유럽의 나라들은 왕들의 私有物처럼 취급되었다. 합스부르그 왕가 출신인 부르고뉴의 필립공(Phillip the Fair)은 스페인의 조안나 공주와 결혼했다. 필립은 아들이 태어나자 그에게 저지대 지역을 선물로 주었다. 이 아들이 16세기 유럽의 覇者가 되는 카를로스였다.
     카를로스는 스페인의 지배하에 들어온 저지대를 아주 너그럽게 다스렸다. 저지대는 상업과 공업의 결합으로 해서 유럽에서 가장 소득이 높은 지역이 되었다. 이런 황금기는 종교개혁과 이에 대한 反動의 광풍이 휘몰아치면서 피비린내 나는 투쟁기로 접어든다.
    
     종교전쟁의 狂風
    
     카를로스가 죽자 필립(펠리페) 2세가 스페인왕이 된다. 스페인의 전성기이자 쇠락기의 시작을 열게 되는 필립 2세는 근엄한 카톨릭 신자였다. 그는 자신을 세계 카톨릭의 수호자라고 생각했고 신교도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탄압하기 시작했다.
     1517년 독일의 신학자 마틴 루터가 교황청을 정면에서 공격함으로써 불을 붙인 종교개혁의 바람은 저지대로 들어왔다. 저지대 지역은 상공업이 발달하고 자유분방한 사회풍조였으므로 신교가 확산될 조건이 성숙되어 있었다. 이때 아나뱁티스트(Anabaptists)로 불린 종파가 저지대에서 퍼져나갔다. 이들은 一夫多妻制(일부다처제)를 채용했고 원시 공산주의자 같은 행동을 했으며 평등을 과시하기 위하여 여름에는 裸體(나체)를 드러내기도 했다.
     저지대 신교도 가운데서도 프랑스 사람 칼빈이 창시한 칼빈주의자들이 가장 행동적이었다. 이들은 상공업에 열심히 종사하고 전투적이었다. 그들은 1566년에 저지대 全域의 카톨릭 성당들을 부수고 불태웠다. 그 흔적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재미 있는 것은 지금은 카톨릭 신도가 신교도보다도 더 많다) .
     저지대의 상인들은 필립 왕의 重課稅 정책이나 상업의 규제에도 반발했다. 스페인의 필립2세는 1568년 알바公을 지휘관으로 삼아 1만 명의 진압군을 파견했다. 종교전쟁, 이념전쟁은 정통과 이단의 대결이므로 늘 참혹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스페인 진압군은 전쟁에서 포로를 인정하지 않고 살육했다. 이에 지금의 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그 저지대 사람들이 봉기하여 그 뒤 80년간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계속된다.
     네덜란드(이때는 베네룩스 지역 전체를 의미) 독립전쟁의 지도자는 프랑스 오랑즈 출신의 윌리엄 침묵公이었다. 침묵公이라 불린 이유는 그가 종교문제를 토론대상으로 하기를 거부한 때문이다. 윌리엄公은 관용의 원칙을 제시했다. 이는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네덜란드의 독립정신이 된다.
     궁지에 몰리던 윌리엄공의 네덜란드 독립군은 1572년 영국 해적의 도움을 받아 起死回生한다. 「바다의 거지들」이란 별명이 붙은 이 해적들은 윌리엄공을 도와 스페인을 쳤다. 이들은 네덜란드의 운하를 이용하여 내륙 깊숙이 침입하였다. 그들은 스페인 진압군이 장악하고 있던 도시와 마을들을 차례차례로 탈환해갔다. 이해 말에 가면 암스테르담을 제외한 全지역이 독립군 손에 넘어갔다. 스페인의 필립 2세는 알바공을 해임하고 알레산드로 파르네세를 진압군 사령관으로 보냈다. 그는 반격작전으로 나와 1570년대는 일진일퇴했다.
    
     80년 독립전쟁 끝에 네덜란드 탄생
    
     1579년 저지대 네덜란드는 분열했다. 네덜란드의 북부지역은 신교도가 많고 反스페인 감정이 강했다. 이들 지역은 「지역연합」(United Provinces)을 결성했다. 남부지역은 카톨릭 신도가 많고 反스페인 감정이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이들은 스페인과의 투쟁에 있어서도 북부지역처럼 決死항전의 자세를 취하지 않고 타협노선을 선택하여 투쟁대열에서 이탈했다. 타협적인 남부지역은 나중에 벨기에의 기반이 되었고 투쟁적인 북부지역은 끝까지 스페인에 항전하여 독립을 쟁취하는데 곧 네덜란드이다. 1588년 스페인의 필립2세는 無敵함대를 이끌고 네덜란드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영국을 징벌하기 위해 나섰다가 엘리자베스 1세의 영국 해군에 의해 괴멸당했다. 1609년 드디어 스페인과 네덜란드는 휴전을 했지만 1618년에 지금의 체코 프라하에서 30년 전쟁이 터지자 그 일환으로 다시 전투가 벌어졌다. 1648년 30년 전쟁을 끝내는 웨스트팔리아 조약에서 유럽의 열강이 네덜란드의 독립을 보장하는 조항을 넣음으로써 스페인-네덜란드의 80년 전쟁은 마침표를 찍는다.
     17세기는 흔히 네덜란드의 세기라고 불린다. 독립을 쟁취한 네덜란드는 造船·해운·무역·공업 등 해양력을 기반으로 하여 해외에 진출, 세계 도처에 그들의 흔적을 남겨놓았다. 스페인은 네덜란드와 싸울 때에도 곡식을 수송할 때는 네덜란드 배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덜란드 독립군은 이 운송수입을 對스페인戰에 썼다.
     16세기의 암스테르담은 네덜란드가 무역으로 벌어들인 富로 세계에서 가장 번창하는 도시가 되었다. 이 富가 수많은 예술인들을 이 도시로 끌어들였다. 네덜란드의 세계 진출은 6대주 5대양을 넘나드는 스케일이었다.
     ·네덜란드의 東印度회사는 향료와 아시아의 사치품 및 중국의 도자기들을 수입하여 돈을 벌었다. 동인도 회사는 군대도 보유한 일종의 국가였다.
     ·1621년에 세워진 西印度 회사는 아프리카와 미국 사이의 무역을 독점했다. 아프리카 사람들을 붙들어 노예화하여 미국으로 수출했다. 惡名 높은 노예 무역을 개척한 것이다.
     ·동인도, 서인도 회사를 위해 일하는 네덜란드 탐험가들이 발견하거나 정복한 곳은 말레이시아, 뉴질랜드, 스리랑카, 모리셔스, 남아프리카, 인도네시아, 대만 등이다.
     ·네덜란드 사람 헨리 허드슨은 1609년 맨해턴 섬을 발견하고 이를 뉴 암스테르담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곳에 네덜란드 사람들이 정착했다. 네덜란드는 영국과 전쟁을 한 뒤 휴전조약을 맺으면서 이곳을 영국에 넘겨주고 남아메리카의 수리남을 받았다. 영국인들은 뉴 암스테르담을 뉴욕이라고 그 이름을 바꾸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일본에도 진출하여 나가사키에 근거지를 마련했다. 도쿠가와 막부는 네덜란드 사람들이 宣敎보다는 장사에 관심이 있는 데 안심하고 나가사키를 통해서 서양문물을 받아들였다. 그 전에 일본에 온 포르투갈 사람들은 선교를 한다고 해서 추방되었다.
     ·1653년에 제주도에 표착한 하멜 등 30여명의 네덜란드 선원들은 동인도회사 소속으로서 나가사키로 가는 길이었다. 하멜 이전에도 朴燕 등으로 이름을 바꾼 네덜란드 선원 세 명이 한국에 표착하여 살았다. 한국과 서양의 최초 접촉이 네덜란드 사람에 의하여 이뤄진 것이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기본적으로 종교전쟁이었으나 네덜란드는 독립후 종교적 관용정책을 폈다. 칼빈주의가 정부의 공식종파가 되었으나 유태인, 카톨릭, 다른 신교들에게도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카톨릭 교도들은 스페인 편에 섰기 때문에 공개적인 장소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예배를 보아야 했다.
     ·해양문화와 실용정신이 꽃피고 정치적 종교적 자유분위기 속에서 國富가 충실해지자 예술과 학문도 함께 발전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이름을 날린 인물들은 렘브란트(화가), 스피노자(철학자), 휴이겐스(천문학자·토성의 띠를 발견하였고 추 시계를 발명 ) 등이었고,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도 네덜란드의 자유롭고 너그러운 분위기가 좋아 이곳에 와서 20년간 살았다.
     ·청교도들을 태운 메이플라워호가 미국의 플리머스에 도착하게 된 배경도 네덜란드와 관계가 있다. 이 청교도들은 영국인이었는데 종교적 박해에 직면하자 자유를 찾아 네덜란드로 피난 갔다가 신천지 미국의 소식을 듣고 영국을 거쳐 대서양을 건넜던 것이다. 메이플라워호의 상륙은 미국의 독립정신을 상징하는 自由魂의 신대륙 상륙을 의미했다. 플리머스가 있는 매사추세츠주의 별명은 지금도「미국의 정신(The Spirit of America)」이다.
    
     평화지상주의에 빠져 쇠퇴
    
     영국은 네덜란드의 독립을 지원했지만 동인도회사의 해양 독점에 반발하여 두 나라는 1652년 이후 여러 번 전쟁을 벌였다. 승부는 일진일퇴로 엇갈렸고 양국은 유럽의 정세에 따라 우방이 되었다가 敵이 되기도 했다.
     1672년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가 네덜란드로 쳐들어왔다. 네덜란드는 인구도 적은 데다가 해군 中心 국가였으므로 프랑스 육군을 당할 수 없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오렌지 家門의 윌리엄 3세를 위기에 대처할 지도자로 추대하고, 프랑스의 침략을 유발했다고 해서 실력자 드 위트를 암살했다. 윌리엄 3세는 세계 외교사에 남을 만한 기획을 한다.
     그는 프랑스 루이 14세의 야심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영국과 동맹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영국왕 제임스 2세의 딸이자 그의 사촌인 매리와 결혼했다(당시 유럽의 王家는 국적을 초월하여 서로 결혼했다).
     제임스 2세는 크롬웰이 죽은 뒤 복귀한 왕인데 영국의 귀족들은 왕이 카톨릭을 회복시키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들은 네덜란드의 윌리엄공을 왕으로 추대하여 불러들이는 공작을 진행했다. 1688년 영국인들은 윌리엄公으로 하여금 영국으로 쳐들어오도록 초대했다. 제임스 2세는 사태를 눈치 채고는 프랑스로 망명했다. 1689년, 윌리엄공은 영국왕, 매리는 왕비로 추대되었다.
     영국의 통치자가 된 윌리엄왕은 스페인, 독일의 몇개 도시국가, 네덜란드, 스웨덴을 묶어 反프랑스 대동맹을 구축했다. 이 대동맹은 루이 14세의 군대를 차례로 격파하였다. 루이 14세는 1697년에, 1678년 이후 정복한 영토를 포기하는 데 동의했다.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네덜란드는 國力 소모가 많았다. 이것이 18세기 네덜란드의 쇠퇴를 가져온다.
     네덜란드가 자랑하던 해군력도 약해지고 그 틈을 타서 영국과 프랑스가 세계 식민지화에 나선다. 상인들도 무역보다는 금융업으로 돌고 장기적인 투자보다는 번 돈으로 사치를 하는 데 열심이었다. 국토보존에 필수적인 堤防의 관리도 허술해졌다. 네덜란드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전쟁을 피하려고 하는 평화주의 분위기에 휩싸여 투지를 잃은 나라가 되어버렸다.
     국내 정치도 내분으로 얼룩졌다. 1790년대에 프랑스 혁명군이 쳐들어오자 네덜란드는 환영일색이었다. 나폴레옹은 네덜란드를 홀란드 왕국이라 이름붙인 다음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를 왕으로 임명했다. 네덜란드가 프랑스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어 다시 독립국이 된 것은 1815년 워털루 결전 이후에 열린 비엔나 회의에서였다.
    
     네덜란드는 짜지 않다
    
     이때 북부의 네덜란드와 남부의 벨기에는 네덜란드 연방 왕국으로 묶여서 독립했다. 카톨릭 국가인 벨기에는 1830년 연방체제에 반발하여 네덜란드에 대항하는 봉기를 했고 1839년 유럽의 열강들이 압력을 넣어 네덜란드는 벨기에의 분리 독립을 허용하였다.
     네덜란드는 1차 세계 때는 중립을 지킬 수 있었으나 2차 세계 대전 때는 독일군이 프랑스로 쳐들어가는 길목으로 삼았다. 5년간 계속된 나치 독일의 점령기간에 네덜란드의 저항은 미미했다. 네덜란드에 많이 와서 살던 유태인들은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도 큰 피해를 입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이 나치의 유태인 사냥에 협조한 탓이라고도 한다. 안네 프랑크 가족도 희생자들 중 일부였다.
     戰前에 네덜란드에서는 14만 명의 유태인들이 살았다. 그 가운데 약9만 명이 암스테르담에 살았다. 이는 이 도시 인구의 약13%나 되었다. 독일에서 박해가 심해지자 유태인들은 옛날부터 종교자유가 널리 보장되었던 네덜란드로 피해왔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14만 명의 유태인들 중 戰後에 알아보니 2만5000명만이 살아 남았었다고 한다.
     네덜란드의 국토면적은 약4만 평방 킬로미터인데 24%는 海水面보다 낮다. 堤防의 길이는 약2400 킬로미터이다. 인구는 1560만 명인데 인구밀도가 유럽에서 1등이다. 네덜란드를 Dutch라고 부르는데 더치란 말이 붙은 단어는 일단 개성이 있는 의미로 쓰인다. 짜다, 지독하다 등의 의미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 반대이다. 1인당 기준으로 외국에 대한 원조액을 계산하면 네덜란드가 세계에서 1등이다.
     네덜란드의 독립이 종교의 자유, 상공업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결과여서 그러한지 네덜란드 사람들은 제도와 법률면에서 개인적 자유를 최대한도로 보장한다. 안락사, 동성애, 일부 마약, 매춘이 허용되고 있다. 국제법의 창시자 그로티우스가 네덜란드 사람이고 헤이그에 국제사법재판소가 있다.
    
     히딩크의 감동적인 사인
    
     개인적 자유를 거의 신성시하는 네덜란드 사람들은 행동이 매우 실용적이다. 허례허식을 최대한 생략한다. 네덜란드 왕도 공식석상에 넥타이를 풀고 나타난다고 한다. 암스테르담을 종일 차로 둘러보는 가운데 넥타이를 맨 사람을 세 명 보았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또 뚱보가 드물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남녀 공히 세계에서 평균 키가 가장 크다. 남자는 182.5cm, 여자는 170cm이다. 그런 사람들이 날씬하기까지 하니 도시 풍경이 활기차다.
     네덜란드 사람들의 건장한 체격은 일상화되어 있는 자전거 출퇴근 덕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여성의 화장도 매우 옅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개인으로서, 또 국가로서 해볼 만한 성취와 실수를 다 해보았기 때문에 위선과 假飾(가식)과 부자유를 이런 식으로 벗어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곳이야말로 가장 성숙된 인격과 國格을 가진 나라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히딩크의 지도력에 감동하는 것은 쉽지만 그런 히딩크를 만들어낸 네덜란드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필자가 소속된 여행단은 지난 3월말 전자회사 필립스의 고향인 네덜란드의 공업도시 아인트호벤에 가서 이 도시 축구팀 감독인 히딩크 부부를 만나 점심을 함께 한 적이 있었다. 일행중에 한 분이 암스테르담의 안네 프랑크 기념관에서 산 책을 내밀면서 사인을 부탁했다.
     나의 맞은 편 자리에 있던 히딩크 감독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만년필로 문장을 써서 돌려주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귀하가 이 책을 통해서 우리 역사의 아주 심각한 부분을 알게 된다는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입니다」였다. 안네 프랑크 가족 등 많은 유태인들이 네덜란드 사람들의 密告 또는 협조에 의해 나치에 끌려가 희생되었다는 점에 대한 반성이 담긴 글이었다. 그냥 습관적으로 사인을 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깊이 한 다음 의미 있는 글을 써놓는 히딩크 감독의 인격에 새삼 느끼는 바가 있었다.
    
언론의 난
[ 2017-12-06, 15:33 ] 조회수 : 1299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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