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대학 이야기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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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대학을 창립하기로 결의했던 1636년 매사추세츠만(灣)회사의 이사회는 그 의의(意義)를 이렇게 설명했다.

[하느님이 우리를 뉴 잉글랜드에 안전하게 인도해주신 뒤에 우리는 집을 짓고 일용품을 만들었으며 신을 찬양하기 위한 적당한 처소도 마련했다. 그리고 자치기구도 설립했다. 이제 우리가 다음에 할 일은 교육을 발전시키고 이를 후손들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우리의 성직자들이 흙으로 돌아갈 때 글을 모르는 목사들한테 교회를 맡겨 놓는 일이 벌어질까 염려한 나머지 이 학교를 설립하기로 했다.]

이 대학은 일종의 신학교로 출발한 셈이다. 하버드의 첫 번째 교수직도 신학교수였다. 필자가 니먼 펠로우로서 연수를 하고 있던 1997년 통계에 따르면 재단의 기금이 110억 달러였는데 지금은 300억 달러를 넘는다. 하버드 기금관리 회사(Harvard Management Company)는 이 현금을 효율적으로 투자하여 한때는 年평균 이자수익이 26%나 되었다. 이는 미국 기업의 평균 수익률보다 네 배쯤 높은 것이다. 하버드 대학의 학보(學報)인 크림슨紙에는 가끔 기금관리회사가 독재국가들에 투자하고 있다는 폭로기사가 실리기도 한다.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상과대학원)을 비롯하여 돈벌이에 관해서는 최고의 두뇌들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기금증식이 이처럼 경이적으로 잘되고 있는 것은 철저한 돈 본위의 대학경영 때문이다.

기금을 운영하는 회사는 직원들이 수백 명이나 되는 금융회사이다. 기금운용 책임자의 연봉은 400만∼600만 달러 수준이다. 미국 메이저 리그의 일류선수와 비슷한 봉급이다. 기자가 청강한 케네디 스쿨(정치행정대학원)의 [역사로부터의 추론] 강좌를 가르친 老교수는 대통령학의 태두(泰斗) 리처드 뉴스타트였는데 그의 공식직함은 [더글러스 딜런 행정학 교수]이다. 더글러스 딜런이란 사람이 낸 기금으로 운영되는 교수직이란 뜻이었다.

하버드란 대학 이름도 젊었을 때 죽은 존 하버드란 목사가 도서를 기증한 것을 기리기 위하여 붙여준 것이다. 돈을 기부한 사람이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철저하게 돈값을 매겨주는 것이다. 하버드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일 뿐 아니라 가장 부자 대학이다. 미국에서 가장 부자이니 세계에서 가장 부자 대학일 것이다. 기금과 500여 개소의 건물 값을 보태면 하버드 대학의 자산가치는 1000억 달러에 육박하지 않을까? 여기에는 90개가 넘는 도서관에 소장된 1300만 권의 책과 특수자료,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7대 박물관과 미술관에 소장된 희귀(稀貴)유물, 예술품, 동식물 표본 같은 것은 포함되어 있지도 않다.

기금을 기준으로 미국에서 두 번째로 부자인 대학은 예일, 세 번째가 텍사스 대학, 이어서 李承晩이 박사학위를 받았던 프린스턴 대학, 캘리포니아주에 있어 서부를 대표하는 명문 스탠포드 대학)이다. 이 다섯 대학 중 텍사스 대학을 제외한 나머지 네 대학은 주간지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가 매년 실시하는 미국 대학 순위 매김에서 늘 10등 안에 든다. 명문대학을 만드는 두 요소는 돈과 시간이다. 기금(基金)과 역사란 얘기이다. 기금은 급조할 수가 있지만 역사는 그럴 수가 없다.

하버드 대학교(Harvard University) 전체 학생은 약 1만8천명이다. 하버드 대학(Harvard College)의 학생수는 그 3분의 1인 6천여 명이고 나머지는 대학원생들이다. 교수들은 약 2천1백 명이다. 그들 중 정교수는 약 8백 명이다. 정교수들만이 항구적 고용이 보장되어 있다. 부교수, 조교수는 계약제이므로 항상 불안하다. 미국에서 이혼율이 매우 높은 편에 속하는 것이 이들 조, 부교수 직종이다. 정교수가 되기 위하여 휴일도 없이 공부에 열중하다 보니 가정을 제대로 돌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버드의 행정직원들은 9천3백여 명이다. 여기에 하버드 의과대학 부속병원들에 속해 있는 의사들 약 7천4백명을 보태면 하버드 대학교의 고용인원은 약 1만9천명이다. 학생수를 더하면 약 3만5천명이 하버드라는 작은 지구촌을 형성하고 있다. 학부 학생들의 약 70%가 장학금이나 수업료 대출, 또는 부업의 혜택을 학교로부터 받고 있다.

하버드가 가진 이 시간의 무게, 역사가 단절되지 않고 쌓여갈 때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 맛이 우러나는가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 하버드 야드라고 불리는 중앙 교정(校庭)이다. 이 교정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은 중앙도서관 와이더너의 정면 계단이다. 이 계단은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을 찍는 장소로 애용된다. 아침에 이 앞을 지나칠 때 자주 부딪치게 되는 것이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사진을 찍는 한국인 부모들이었다. 부모로부터 '너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이 대학에 들어오도록 해봐'란 말을 듣고 있을 저 아이들이 자라서 하버드에 다닐 때쯤 다시 시간을 내어서 이 너그러운 대학에서 한 일년을 더 보내야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다.

와이더너 도서관

이 와이더너 도서관은 다른 대부분의 건물들처럼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다. 인물과 건물에 신화나 전설을 붙이기를 좋아하는 미국 사람들. 이것이 바로 역사가 짧은 그들의 역사 만들기 수법이다. 이 도서관의 이름은 1912년 처녀 항해에서 유빙(流氷)과 충돌하여 침몰했던 영국의 호화여객선 타이타닉號에 탔다가 죽은 하버드 졸업생 해리 엘킨스 와이더너에서 딴 것이다. 그의 어머니가 아들을 잊지 못해 2백만 달러를 하버드에 기부하여 도서관을 신축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 어머니는 기부금을 내면서 두 가지 조건을 붙였다고 한다.

하나는 모든 학생들에게 수영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기숙사 식당에서 하루에 한번씩은 아이스크림(아들이 좋아했다고 한다)을 내놓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두 가지 조건은 잘 준수되지 않고 있으나 이 도서관은 3백만 권을 소장한 미국 제2의 도서관(1위는 의회도서관)이 되었다. 아무 책이나 읽다가 거기에 적혀 있는 참고 도서나 논문을 구해보려고 이 도서관에 오면 거의 틀림없이 찾아낼 수가 있다. 이 하버드 야드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구경거리는 존 하버드 동상이다. 워싱턴에 있는 링컨 기념관의 링컨 동상을 제작한 조각가 다니엘 체스트 프렌치의 작품이다.

이 동상은 세 가지 거짓말로 유명하다. 1884년에 제작된 이 동상에 적혀 있는 '존 하버드, 창립자, 1638'이 다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하버드의 초상화는 남아 있지를 않아 조각가 프렌치는 셔먼 호어라는 학생을 모델로 삼아 조각을 했다. 하버드는 창립자가 아니고 기부자일 뿐이다. 창립년도도 1636년이다. 그래도 이 존 하버드의 구두코를 잡고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이 너무 많아 도금이 허옇게 벗겨져 있을 정도이다. 하버드의 이름이 붙은 건물이 하버드 야드에는 하나가 남아 있다. 하버드 홀이 그것인데 두 번 불이 나 지금 건물은 같은 장소에 세워진 세 번째 건물이다.

두 번째 건물시절에 여기에는 물리학 실험실이 있었다. 미국 독립의 한 주역(主役)으로서 피뢰침을 발명했던 벤저민 프랭클린은 이 건물에서 실험을 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이 건물에는 하버드가 기증했던 도서들이 소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불이 나는 바람에 다 타버렸다. 다만 한 학생이 슬쩍하여 가지고 나왔던 한 권의 책만 남게 되었다. 이 학생은 이 귀중한 책을 총장에게 자진신고 형식으로 돌려주었다. 총장은 감사를 표한 뒤에 즉각 그 학생을 제적해버렸다고 한다. 건물의 크기에서 와이더너 도서관과 쌍벽(雙壁)을 이루고 있는 것이 맞은편에 보이는 전몰자 추모교회이다.

1932년에 세워질 때는 1차세계대전에서 전사한 하버드 출신들을 추모하기 위한 건물이었다. 그 뒤에 치러진 2차대전, 한국전쟁, 월남전쟁 전사자도 함께 추모한다. 매일 추모기도회가 열리고 매주 예배가 있어 일반 시민들도 참여한다. 이 추모교회의 뒤편에 있는 성당처럼 보이는 높은 건물은 추모당(Memorial Hall)이라 불리는 건물이다. 이것은 남북전쟁 때 북군편에서 싸우다가 전사한 하버드 출신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1878년에 건축한 것이다. 하버드 교정(校庭)의 대표적인 두 건물이 戰死者를 기념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은 이 대학의 성격을 말해준다.

청교도들의 정신적인 구심점으로서 또 미국의 건국과정과 궤(軌)를 함께 하면서 발전해온 이 대학은 지금 세계를 내려다보면서 미국의 국익을 수호하는 엘리트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다. 애국심을 깔고서 진리를 추구하는 국가주의적인 교육기관이다. 국가 국민 국익을 떠난 보편적 지식의 추구가 전무(全無)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쪽은 소수파이며 다수파를 깨어 있게 하는 역할로 존재할 뿐이다. 하버드 학풍의 주류는 어디까지나 미국을 중심으로 하고 미국적 가치관을 기준으로 한 보편성의 추구인 것이다.

와이더너 도서관의 계단에 서서 교정을 내려다보면 건물들을 통해서 전달되는 이미지가 神, 국가, 진리이다. 이 이미지를 나는 [진리=교양에 기초한 전문지식, 국가=애국심, 신=보편적인 인류애]로 해석해보았다. 개인 국가 세계를 관통하는 교양, 지식, 애국심, 인류애라는 이 단어들을 하나의 행동윤리로 내면화할 수 있는 인간을 양성하는 것이 하버드의 목표가 아닌가 생각되었다. 개인과 국가와 세계가 서로 싸우지 않고 교양과 애국심과 인류애가 서로 질투하지 않으면서 하나의 논리로써 연결되고 통합되는 그런 인간과 국가와 세계를 우리는 선진(先進)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버드 학부 신입생들은 고교 졸업생 5백만명 중 최상층부에 속한 1천8백명으로 보면 된다. 2000년 졸업생이라 하여 관심을 끌었던 1996년 신입생의 경우 1만8천2백명이 입학 신청을 하여 10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신청자 중 1백64명은 미국판 수능시험에서 만점을 받은 학생들이었다. 1987년 이후 [USA 투데이]가 매년 선정한 최우수 고교 졸업생 1백99명 중 1백1명이 하버드에 입학했다.

대학의 명성을 상징하는 로드 장학생 선발수에 있어서도 하버드는 5년 연속 전국 1등을 하고 있었다. 1996년에는 한국교포 학생이 명단에 들어있었다. 하버드 교정에서 한국인들이 기가 죽지 않는 이유는 신입생들의 민족구성 통계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신입생들의 19%가 아시아인들이다. 그들 중 3분의 2가 동양4개국(중국, 대만, 일본, 한국)이다. 학부, 대학원생을 다 포함한 통계에 따르면 한국 학생수는 캐나다, 일본, 중국, 대만, 영국 다음의 제6위이다. 인구 비율로 치면 대만 다음으로 2위가 된다. 일류 지향의 한국인들이 국내를 벗어나 세계에 도전하다가 이런 성적을 남기게 된 것 같다.

밥 돌의 농담

1997년 4월 하버드 대학의 정치행정대학원인 케네디 스쿨의 초청연사로 나온 밥 돌 前 공화당 대통령후보는 농담을 몇 번 했다. 하버드가 있는 케임브리지市의 전화번호부에서 1백명을 무작위로 뽑아 미국을 통치하라고 해도 클린턴보다 더 잘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 '하버드 대학 덕분에 21세기에 가면 내 주소가 워싱턴 DC의 펜실베이니아街 1600번지가 될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돌은 미국적십자사 총재로서 하버드 법대 출신이다. 차기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 후보가 되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하버드는 케네디, 프랭클린 루스벨트, 시어도어 루스벨트 등 여섯 명의 미국 대통령을 배출했다. 교수진에서는 34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나왔다. '하버드는 어떻게 지배하는가'란 책은 이 대학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데 하버드 출신들을 람보에 비교했다. 냉전의 지휘자들이 주로 하버드 출신이고 특히 월남전을 망친 많은 고관들이 하버드 출신이라고 지적했다. 1997년 6월5일의 하버드 대학 졸업식은 이런 하버드의 국가주의적 성격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이날 행사는 마셜 플랜 발표 50주년을 기념하여 매들린 K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졸업식 기념연설을 했다.

1947년에 당시 미 국무장관이던 조지 마셜이 하버드의 졸업식 기념연설에서 西유럽의 경제재건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西유럽을 소련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원대한 구상을 발표하였다. 이 마셜 플랜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덕분에 서방 자유세계가 냉전에서 소련에 승리하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날 졸업식에서 하버드 총장 닐 L 루딘스틴은 [하버드는 미국 대학이다]는 말로써 연설을 시작했다.

'많은 학자들과 학생들이 하버드로 오는 이유는 우리가 미국 대학이기 때문이다. 하버드는 뚜렷한 국가적 개성을 가진 사회에 뿌리를 둔 대학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하버드의 미래가 국제화의 추세를 넓혀갈 것임은 분명하지만 우리는 그런 국제화를, 확립되어 있는 우리의 가치관과 정통의 틀 안에서 추진해갈 것이다.'

요컨대 미국 중심의 국제화를 하버드의 진로(進路)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국익과 미국적 가치관의 수호 및 확산이 하버드의 대명제인 것이다.

하버드의 뿌리를 찾아서

하버드가 구현하고 있는 미국 사회 주류의 사상을 이해하는 것은 건국정신의 이해이면서 동시에 오늘날 이 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英美계통 가치관의 본질을 이해하는 길이다. 1517년 독일의 가톨릭 승려 마르틴 루터가 [95개 명제]를 발표하여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 교황과 성당의 부패를 고발함으로써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다. 루터가 주장한 핵심은 인간은 성경을 통해서 하느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지 가톨릭처럼 권위주의적인 계급구조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하느님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인간과 절대자 사이에 있는 교황의 중계역할을 부정한 것이다. 이 주장에 동조하는 봉건영주와 국가들이 생겨나면서 유럽은 백년을 넘게 종교분쟁에 휩싸였다. 이 종교 분쟁에서 어느 쪽에 섰느냐에 따라서 나라의 성격이 바뀌게 되었다. 대체로 영국 독일 스칸디나비아 같은 투톤族 나라들이 루터 편을 들어서 개신교(改新敎) 국가가 되었고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같은 라틴系 국가들이 가톨릭 국가로 남았다. 종교개혁을 받아들인 나라들에서는 그 뒤에 산업혁명과 민주화가 상대적으로 잘 진행되어 이 나라들이 제국주의 시대의 패권을 잡게 되었다. 스위스에서도 종교혁명을 받아들여 많은 州가 로마 교황의 지도력을 거부하게 되었다. 제네바市는 프랑스 신학자로서 종교박해를 피해서 망명한 존 칼빈을 종교개혁의 지도자로 모셨다. 칼빈은 이 도시를 자신의 신학에 따라서 통치하게 되었다. 그의 유명한 저작인 [그리스도교의 원칙](1536년)은 아주 주목할 만한 구원관(救援觀)을 내놓았다.

그는 인간이 구원을 받아서 천국에 갈 것인가 말 것인가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하느님이 창세기(創世記) 때부터 이미 누가 구원을 받을 것인가를 결정해 놓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인데 칼빈은 무궁한 하느님의 지혜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인간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구원이 예정되어 있지 않다면 천국에 갈 수가 없다. 그러면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타락한 생활을 할 것인가. 칼빈은 누가 구원을 받을지는 알 수 없으나 누가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인가 하는 사실은 확실히 알 수가 있다고 했다. 타락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확실하게 지옥으로 떨어질 자들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지옥행(地獄行) 열차를 타지 않으려면 평소 사회생활과 신앙생활을 건실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엄격한 도덕률과 근면성을, 그는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는 인간의 조건으로 제시한 것이다. 인간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건실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절묘한 논리가 탄생했다.

 칼빈의 淸富사상

이 윤리는 그 때 유럽에서 형성되고 있었던 시민계층의 행동철학으로 받아들여지기에 적합하였다. 말하자면 역사의 흐름과 맞는 神學이 되었다. 이 사상은 그 뒤에는 프로테스탄트의 윤리로 확대되고 자본주의의 정신으로 연결되었다. 돈을 버는 행위를 천한 것으로 보는 종교의 일반적인 경향과는 달리 칼빈주의는 인간의 경제활동은 신성한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파악했다. 돈벌이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신성한 가치를 지니려면 돈을 벌고 특히 쓰는 행위가 정당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인간이 돈을 버는 것은 개인의 부(富)를 증식한다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몫을 잘 관리하여 크게 키우는 행위이다.

그리하여 그 富를 사회에 환원하여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빛내는 행위이다. 이러한 칼빈주의의 경제관은 청부(淸富)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경제활동을 경멸했던 주자학의 청빈(淸貧)사상과 정반대이다. 청빈사상은 위선적이고 선언적이며 패배적인 생각이라면 청부사상은 적극적이고 실용적이며 실천적이다.

이 칼빈주의는 개신교의 주류(主流)신학이 되어 프랑스의 위그노派, 독일과 네덜란드의 개혁교회, 스콧랜드의 장로교, 그리고 영국 청교도의 신학적 근거가 되었다. 미국의 건국정신은 이 영국 청교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렇게 된 데는 재미있는 역사의 우연이 있었다.
16세기 초 영국왕 헨리 8세는 원래 로마 교황과 사이가 좋았다. 헨리 8세는 루터의 영향을 차단하는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로마 교황으로부터 [신앙의 수호자]란 칭호까지 받았다. 그런데 헨리 8세와 결혼한 스페인의 아라곤 왕국 캐서린 공주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 남아(男兒)를 출산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헨리 8세는 로마 교황에게 이혼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보통 때 같으면 이런 요청은 허락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는 사정이 묘하게 꼬이게 되었다. 헨리 8세의 왕비 캐서린은 스페인의 전성시대를 연 카를로스 5세의 숙모였다. 카를로스 5세는 합스부르그 왕조(王朝) 출신으로서 스페인왕뿐 아니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겸하고 있었다. 스페인과 네덜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그리고 이탈리아의 일부도 통치하고 있었다. 당시 유럽은 세속적인 권력은 카를로스 5세가, 정신적 권위는 로마 교황이 나누어 갖고 있는 형국이었다. 로마 교황은 카를로스 5세의 후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숙모 캐서린과 영국왕 헨리 8세가 이혼하는 것을 허용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화가 난 헨리 8세는 영국 교회와 로마 교황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는 앤이라는 여자와 결혼해버렸다. 이 사건은 유럽에서 로마의 교황권이 약화되는 중대한 계기가 된다. 하나 재미있는 것은 헨리 8세가 아들을 얻기 위해서 맞아들였던 앤은 딸을 낳았다는 사실이다. 이 딸이 커서 엘리자베스 1세가 되고 그의 치세(治世)에 영국은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여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극단적인 개혁파 청교도

그런데 영국 교회를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로 논쟁이 일어났다. 칼빈주의의 원칙을 도입하여 영국 교회에 남아있는 가톨릭적인 잔재를 청소하자는 개혁세력을 퓨리턴(Puritan)이라고 불렀다. 영어로 퓨리파이(Purify), 즉 청소한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이 퓨리턴, 즉 청교도 중에는 영국 교회자체를 부정하고 완전히 결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극단적인 개혁파가 있었다. 이들을 분리교도(Separatists)라고 부르게 되었다. 미국에 건너간 이들이 이 분리주의자들이었다. 당시로서는 가장 개혁적인 기독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미국으로 건너가 이상향을 건설하려고 했다는 이 점이 미국의 국가적 성격을 상당 부분 규정했다.

영국의 동쪽 스크루비에 있던 분리주의 집단은 종교적 박해를 피해서 1607년에 네덜란드로 이주하였다. 여기서 10여 년 살다가 보니 문제가 생겼다. 네덜란드의 칼빈주의 신도들은 이 분리주의자들에게 종교의 자유는 허용했으나 일자리는 하층민 수준으로 제한하였다. 선원, 병사로 나아가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네덜란드의 습관에 동화되어 조국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다. 이들이 영국을 떠난 것은 조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인데 이곳에 오래 살다가는 후손들이 동화되어버리겠구나 하는 걱정이 생겼다. 그렇다고 영국으로 다시 돌아가기는 싫고, 그리하여 이 분리주의자들은 미국으로 건너가서 새로운 영국,  즉 뉴 잉글랜드를 건설하자는 꿈을 키우게 되었다.

그때, 즉 1620년 무렵 워싱턴 남쪽에 있는 지금의 버지니아 지방에서도 영국인들이 식민지를 개척하고 있었다. 버지니아 회사라는 식민지 회사가 개척민을 데리고 와서 농사를 짓고 담배를 재배하고 있었다. 분리주의자들 35명은 이 버지니아 회사로부터 토지사용권을 얻어서 주식회사를 설립한 뒤에 이 회사소속으로서 총 1백2명의 이주자들을 모집하여 1620년 9월 영국의 플리머스항(港)을 떠나 미국으로 출발하였다. 이들을 태운 1백80t짜리 메이플라워호(號)가 대서양을 건너 그해 12월에 도착한 곳이 지금 매사추세츠州에 속하는 해변으로서 플리머스라고 이름지었다. 이들은 원래는 버지니아로 가려고 했으나 폭풍 때문에 이곳에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메이플라워는 다음해 4월까지 머물면서 겨울에는 이주민들의 피난처로 쓰였다. 혹독한 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순례자(Pilgrims)로 불리게 된 이들 중 반이 죽었다. 근처에 있는 인디언들에게 약점을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시체를 묻어도 표시를 남기지 않았다. 다음해에는 근처에 살고 있던 인디언들로부터 옥수수 재배법을 배워서 풍작을 이루었다. 이를 기념하여 추수감사절이 생겼다. 보스턴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쯤 달리면 도착하는 플리머스港에는 메이플라워號의 복제품과 최초의 상륙자가 밟았다는 돌, 그리고 민속촌으로 재현된 농장이 있다.

이 플리머스 농장에는 청교도 복장을 한 사람들이 영국 억양의 중세영어를 써가면서 관광객들을 즐겁게 한다. 비행기가 상공으로 날아가는 것을 가리키면서 '무슨 새가 저렇게 크지'라고 능청을 떨고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코리아, 코리아, 그런 나라도 있나'라고 고개를 갸우뚱한다. 청교도들이 건설한 이 농장에는 교회, 감옥, 요새가 있다. 인간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시설인 것이다. 종교적인 열정으로써 뭉쳤다고 해도 질서를 유지하면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감옥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순례자들은 영국의 보호로부터도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당시로선 어느 나라의 주권 아래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들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규율을 잡지 않으면 공멸(共滅)할 것이라는 공포에서 자신들이 선출한 대표자들이 만든 법에 복종하겠다는 서약을 하게 되었다. [메이플라워 맹약]이라고 불리는 이 약속을 기초로 하여 자치기구를 설립했다. 교회의 간부들이 자치기구의 간부를 겸하였다.

언론의 난
[ 2017-12-06, 23:18 ] 조회수 : 1084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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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목천리     2017-12-07 오전 10:13
아래 '네덜란드 역사'도 그렇고, 선생님 참으로 대단하세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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