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올림픽은 국가발전의 계기, 평창올림픽은 쇠퇴의 계기?
북한의 개입을 차단한 서울올림픽은 성공하였고 북한이 온 평창올림픽은 실패하였다고 기록될지 모른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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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년간 서울 특파원을 지낸 구로다 가쓰히로 산케이 신문 객원 논설위원은 최근 펴낸 취재기 '날씨는 맑지만 波高는 높다'(조갑제닷컴 출판)에서 서울올림픽을 높게 평가하였다.

 <북한은 오지 않았지만 중국과 소련을 위시한 대부분의 공산권 국가가 참가하여 서울올림픽은 대성공으로 막을 내렸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이후 소련 및 공산권의 붕괴, 동서 대립과 냉전 시대의 종언(終焉)이라는 세계사적인 대변화가 일어난다. 서울올림픽이 그 계기가 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서울올림픽이 동서 대립을 끝내게 했다!”

 이 점은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역사 인식’의 문제인데, 서울올림픽의 유치에서부터 개최까지 현장에서 취재한 나로서는 전적으로 동의(同意)하고자 한다.

 그런 가운데 한국은 우선 1990년, 소련과의 국교정상화를 이루게 된다. 그해 6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한소(韓蘇) 정상회담에서 합의에 도달한 다음, 9월에 정식으로 국교를 맺었다. 나도 노태우 대통령과 동행하여 샌프란시스코로 취재를 갔는데, “반공국가 한국이 여기까지 오다니…”하며 실로 감개무량했다.

 이때 한국에서는 ‘1904년 이래 86년만의 국교 수립’이라고들 했다. 1904년이라면 러일전쟁이 시작된 해이다. 러일전쟁을 계기로 러시아는 한국(한반도)으로부터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올림픽이 국가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면 평창올림픽은 국가 쇠퇴의 전환점이 될지 모른다. 북한의 개입을 차단한 서울올림픽은 성공하였고 북한이 온 평창올림픽은 실패하였다고 기록될지 모른다.  

 '당신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을 꼽으라'면 나는 1988년 9월 17일 서울올림픽 개회식을 시청한 직후를 꼽겠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치면서 눈시울이 촉촉해졌던 그때의 그 감동은 '이게 바로 우리의 모습이고 우리의 힘이다'는 확인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광야를 질주하는 듯한 박력과 화려한 색채감과 아기자기한 섬세함, 그리고 무서운 조직력과 충돌 직전까지 갔다가 휘어지는 유연함이 「벽을 넘어서」라는 메시지로써 통일돼 장대한 '한국의 이미지'를 연출했던 개회식은 단순한 공연 행사가 아니라, 한국에 대한 세계인의 이미지를 근본적으로 바꾼 역사적 대사건이었다.
  
 나는 개,폐회식을 준비한 故 박세직(朴世直)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 등 관계자들을 여러 번 만나 이 대성공의 요인들을 알아본 적이 있다.
  
 첫째는 서울올림픽의 목표를 높게 잡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朴 위원장은 '5최(最)'의 목표를 제시하였다. 最多의 참여, 最高의 성과, 最善의 화합, 最適의 안전, 最大의 절약을 목표로 설정하고 '서울올림픽은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데 있어서 5000년 역사에 처음인 절호의 기회다. 여기서 실패하면 우리는 만고(萬古)의 역적이 되고 만다'고 직원들을 몰아붙였다.
  
 둘째는 개·폐회식의 중요성을 간파하여 집중 투자한 점이다. 서울올림픽은 서울시가 주최하지만 세계인의 축제이므로 각 경기가 텔레비전에 비쳐졌을 때는 한국을 유별나게 선전할 방법이 없었다. 한국은 참가국 160개의 하나일 뿐이었다. 서울올림픽조직위에서는 일찌감치 개·폐회식이야말로 주체적으로 한국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프로그램이라는 판단을 하고, 이 준비에 전력투구했다.
  
 朴 위원장은 사석(私席)에서 '서울올림픽 준비의 80%는 개·폐회식 준비이고 그 중에서도 개회식 준비가 80%이다'고 말한 바 있다. 나는 유능한 경영자의 첫째 조건으로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파악하고, 거기에 자원을 집중시킬 수 있는 판단력과 추진력'을 꼽고 싶다. 조직위원회는, 서울올림픽의 성패는 텔레비전에 의해서 결판난다는 점을 정확히 파악하였던 것 같다. 텔레비전에 의한 이미지 조작이 '제2의 현장'을 창조하여 全세계 시청자들의 뇌리에 한국의 인상을 깊게 심어줄 것이므로, 개·폐회식은 무엇보다도 텔레비전에 근사하게 비쳐져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셋째, 조직위는 '새로운 우리 것'을 보여주었다. 부채춤 같은 한국의 상투적 이미지를 배제하고 순수하면서도 신선한 이미지를 발굴, 속도감 있게 이들을 연결함으로써 의외의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속도감(speed), 뚜렷한 주제(subject), 신선한 충격(suprise)의 '3S'가 개,폐회식을 어떤 드라마보다도 재미있게, 그릭 감동적으로 보이도록 한 비결이었다.
  
 넷째, 개·폐회식에는 철학과 메시지가 있었다. 개회식의 메시지는 「벽을 넘어서」였다. 서울올림픽의 모토는 '화합과 전진'이라는 다소 딱딱한 낱말이었다. 개·폐회식 자문위원 이어령(李御寧) 씨(전 문화부장관)가 그 특유의 언어감각을 발휘하여 '화합과 전진'을 '벽을 넘어서'란 생동하는 말로 구체화시켰다. 서울올림픽의 정신과 개,폐회식의 기조가 개방시대의 세계 조류와 맞아떨어지면서 「벽을 넘어서」는 이 시대의 철학적 메시지가 되었다.
  
 이런 이미지의 일관성과 통일성과 역사성이야말로 서울올림픽이 세계사적인 의미를 갖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나는 서울올림픽 개·폐회식의 성공 비결이 우리 것을 우리 식으로 당당하게 보여준 주체성이라고 믿는다. 가장 특수한 것이 가장 보편적이라는 것을 實證했다고 할까.
  
 「벽을 넘어서」라는 메시지를 대중적으로 확산시킨 것은 올림픽 주제가 「손에 손잡고」였다. 「손에 손잡고」는 한국, 동구 공산국가 등 세계 곳곳에서 민주화를 주도하던 민중의 힘을 상징하고, 「벽을 넘어서」는 이념과 민족의 장벽을 무너뜨리며 자유를 확대해가고 있는 세계사의 큰 흐름을 요약한 것이었다. 「손에 손잡고」는 한때 동독에서도 금지 가요가 되었는데 '벽을 넘어서'란 가사 때문이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시기를 즈음해 이 노래는 동구권 민주화 현장의 데모 노래로 널리 불려졌다고 한다. 그 전 중국의 천안문사태 때도 이 노래는 시위 학생들의 애창곡이었다.
  
 약 900만 장(테이프, 음반, 콤팩트디스크 등)이 팔려 동양인이 부른 노래로서는 사상 最多의 판매량을 기록한 「손에 손잡고」의 성공에서는 국제적 감각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다. 당초 국내에서는 한국 작곡가, 작사가와 한국 가수가 참여해서 국적 있는 주제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여론이 강했다. 朴世直 조직위원장은 이런 여론을 누르고 국제적인 관점에서 노래를 제작하는 방향으로 추진했다. 세계적인 이탈리아인 작곡가 모로데, 세계적인 미국인 작사가 휘트로크에게 일을 맡기고, 노래는 별로 유명하지 않은 한국인 보컬그룹 코리아나, 판매 및 제작은 세계 최대의 다국적 음반회사 폴리그람에 의뢰하였으며, 이들 요소를 통합, 조정한 것은 조직위였다.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자원들을 잘 조합시켜 세계적인 유행가를 만든 것이다.
  
 주제가를 만들 때 만약 개·폐회식 때처럼 민족적 입장에서 접근했더라면 실패하였을 것이다. 주제가를 듣게 되는 사람은 세계 각국의 각양각색 사람들인데, 이들에게 한국식 노래를 강요하다시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사줄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자연히 국제적인 시각에 서서 보편적인 감각의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개·폐회식의 경우는 고객, 즉 세계의 시청자들을 이미 확보해놓은 상태였으므로 우리 것을 일방적으로 보여 줄 수 있었다. 민족적 관점에서 특수한 이미지를 자신있게 밀어붙일 수 있었다는 얘기다. 사는 사람의 시장(buyer's market)에서는 국제성을, 파는 사람의 시장(seller's marker)에서는 지역성을 부각시킨 것이 서울올림픽 상술(商術)의 성공 요인이었다.

 2008년 북경 올림픽 직전 한 외국인 기자가 88 서울 올림픽과 한국의 민주화 사이의 관련성을 취재하기 위해 나를 찾아왔다. 그 기자는 '한국이 민주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북한의 위협을 받아가면서 서울 올림픽을 성공시켰고 그 올림픽이 한국의 북방정책을 가능하게 했으며 부분적으로는 소련 및 동구 공산권 붕괴에도 영향을 끼친 것이 경이롭다'고 말했다.   
 서울 올림픽의 성공에 큰 역할을 한 세 사람은 全斗煥, 盧泰愚, 朴世直씨이다. 全斗煥 전 대통령은 1981년 국제올림픽 위원회에 서울 개최를 신청하도록 결단했고, 그 뒤에도 올림픽의 성공을 위해 擧國的(거국적)인 지원을 하도록 정부를 독려했다. 盧泰愚 전 대통령은 서울 올림픽 유치 작전을 지휘했고 올림픽 조직위원장으로 일하기도 했으며, 올림픽 성공 후 북방외교로써 소련·동구권·중국과 수교했다. 朴世直씨는 올림픽 개막 당시 조직위원장이었다. 그는 서울 올림픽이 역대 올림픽 중 가장 정확하게 효율적으로 운영되고, 그리하여 흑자까지 남길 수 있도록 했다.
  
 특히 全斗煥 대통령은 1985~1987년의 민주화 격동기에 평화적 정권교체와 서울 올림픽 개최라는 2大 국정목표를 성공시키기 위해 뚝심있게 밀고 나갔다. 그가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와 함께 6·29 선언을 통해서 직선제 개헌을 수용한 이유 중의 하나도 서울 올림픽을 기필코 성공시켜야 한다는 계산이 있었다. 체육관 선거로 뽑힌 대통령으로는 서울 올림픽을 축복속에서 진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전두환-노태우 정부는 국내의 민주화와 북한의 도전이란 협공을 견디어내면서 민주화와 서울 올림픽 성공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지금껏 지속되고 있는 1987년 민주체제는 이 두 사람의 합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 체제를 가능하게 했던 핵심이 서울 올림픽이었다. 민주화와 서울올림픽은 운명적으로 묶여 있었다. 전두환·노태우 두 사람은 서울 올림픽에 관한 한 私心(사심)이 없었고, 국민들도 정파적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서울 올림픽을 성공시키려고 했다. 한국인이 가장 순수했을 때가 그 시절이었다. 서울 올림픽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일념이 집권층의 군대 동원을 말렸고, 시위대의 과격화에 제동을 걸었다.


[ 2018-02-13, 03:11 ] 조회수 : 917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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