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가 김정일에게 비참하게 당하였을 때
딕 체니, “라이스와 힐이 김계관에게 속아 北核 문제를 망쳤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딕 체니, “라이스와 힐이 김계관에게 속아 北核 문제를 망쳤다!”

-회고록에서 부시의 비참한 임기말 상황 폭로: ‘합의를 위한 합의’에 집착하다가 금융제재, 테러지원국 제재, 敵性國 교역 제재를 다 풀어주고 自滅하다.

-“라이스와 힐은 재무부 금융제재팀을 북한의 下手人으로 전락시켰다.”(미 재무부 前 차관보 자라테 회고록) 

趙甲濟(조갑제닷컴 대표)

 

분석가는 많지만…

“머리가 좋은 사람이 부족하여 망한 나라는 없다. 용감한 사람이 없을 때 망하는 것이다.”

나는 1980년대 말부터 북한의 핵문제를 취재하여 왔다. 중요한 고비 때 용감한 사람이 한국과 미국의 정권 수뇌부에 있었더라면 해결할 수 있었던 문제이다. 1994년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 핵시설 폭격을 검토할 때 金泳三(김영삼) 대통령이 말리지 말고 더욱 적극적으로 나섰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2005년에 시작된 북한 지배층에 대한 미국의 국제적 금융 제재를 2년 뒤 풀어주지 않았더라면?
북한의 핵문제를 정교하게, 이론적으로 분석하는 이들은 수도 없이 많이 보았지만 이를 국가생존 차원의 문제라고 인식하고, 고민, 결단하는 공직자를 만난 적은 없다. 논평가와 구경꾼은 많았지만 死生決斷(사생결단)하는 전략가와 행동파는 없었다. 북한 정권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처지에서 포위망을 뚫고, 네 번이나 핵실험을 하면서, 實戰(실전)배치 상황까지 끌고 올 수 있었던 것은, 죽기 아니면 살기 식의 ‘벼랑 끝 전술’로 나왔고 한국과 미국이 구경꾼의 자세로 임하였기 때문이다. 한국과 미국엔 김계관이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모사드의 정보

2006년 10월9일 북한이 최초의 핵실험을 하였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다음 날 북한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면서 한 문장을 덧붙였다.
<북한이 핵무기나 핵물질을 국가나 非국가 단체에 移轉(이전)하는 행위는 미국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될 것이며, 미국은 그러한 행위의 결과에 북한의 책임을 확실하게 물을 것이다.>
여섯 달이 지난 2007년 4월 중순 부시 대통령의 안보 보좌관 스티브 해들리의 사무실에서 딕 체니 부통령은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 국장 메이어 다간을 만났다. 다간은 시리아의 사막 알키바에서 건설 중인 시설물의 사진을 내어놓고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결론은 북한이 영변의 원자로와 같은 가스냉각식 흑연 감속로를 지어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난 35년간 이런 型(형)의 원자로를 운영하고 있는 나라는 북한뿐이었다.
이스라엘 측은 체니에게 한 북한인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는 영변의 핵연료 제조 책임자인데 시리아의 원자력위원회 책임자와 함께 있는 모습이 찍혔다. 이 북한인은 6자회담의 북한 대표단 일원으로 활동한 사실도 확인되었다. 모사드는 비슷한 시기 한국의 국가정보원에도 체니에게 제공한 정보와 같은 설명을 하였다. 
이스라엘 측은 이 정보를 제공한 뒤 미국에 이 시설을 폭격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문제를 놓고 백악관에서는 수개월 동안 極秘(극비) 협의가 계속되었다. 대통령 안보보좌관 해들리가 주관한 이 협의에는 체니 이외에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 그리고 합참의장, CIA 부장, 국가정보국 국장이 참석하였다.


폭격이냐 외교냐?

체니 부통령은 부시 대통령이 경고한 대로 미국이 원자로 시설을 폭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라이스, 게이츠 등 다수는 “확인된 정보가 아니다” “시리아가 이라크의 미군에 보복을 할 것이다”의 이유를 대면서 신중론을 폈다. 결론이 나지 않자 체니 부통령은 2007년 6월14일 대통령과 갖는 週例(주례) 오찬에서 미군에 의한 폭격을 건의하였다. 부시는 다른 참모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겠다면서 확대회의를 소집하였다.
6월17일은 일요일이었다. 그날 저녁 백악관의 대통령 숙소에 안보 관련 부서 책임자들이 모였다. 부시는 “정확한 정보냐”고 물었고, 국가정보국 국장 마이크 맥코넬은 “시리아의 시설물이 원자로라는 데 강한 자신감이 있다”고 답했다. 이날 두 가지 대책이 논의되었다. 외교적 방법과 폭격이었다. 前者(전자)는 이 문제를 유엔과 국제원자력위원회에 통보, 국제적 공감대를 형성, 시리아가 원자로 건설을 포기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체니는 시리아나 북한과 같은 깡패 국가가 그런 방식의 외교적 압박에 굴복할 리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미국이 하든 이스라엘이 하든 군사적 방법만이 有效(유효)할 것이다’고 했다.
이틀 뒤 이스라엘의 애후드 올메르트 수상이 워싱턴을 방문하였다. 부시 대통령과 회담한 올메르트 수상은 체니 부통령과 따로 만나 다시 한 번 미국의 군사적 조치를 권유하면서 미국이 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이 행동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임을 명백히 하였다.
그 직후 국가안보회의에서 체니는 다시 한 번 미국에 의한 군사적 대응을 제안하였다. 부시 대통령은 “부통령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나요?”라고 물었다. 한 사람도 손을 들지 않았다. 부시는 이 문제를 외교적으로 풀기로 결론을 내린 뒤 라이스 장관에게 이스라엘이 어떻게 나올 것 같으냐고 물었다. 라이스는 “이스라엘이 협조적으로 나올 것이다”고 답하였지만, 체니는 “우리가 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이 폭격할 것이다”고 반박하였다.
7월 중순 부시 대통령은 올메르트 수상에게 전화를 걸어 외교적 방법을 선택하여야겠다고 말하였다. 실망한 수상은 이런 요지로 반박하였다.
“우리의 운명을 유엔이나 국제원자력기구 같은 데 맡길 순 없다. 시간이 없다. 원자로에 연료가 들어가기 전에 부숴야 한다. 연료 裝塡(장전) 뒤에 폭격하면 방사능 오염의 위험성이 있다.”
2007년 9월6일 밤 이스라엘의 F-15 편대는 시리아 영공을 침범, 알키바의 원자로를 완벽하게 파괴하고 돌아왔다. 이스라엘은 미국에 폭격 사실을 비밀에 붙일 것을 부탁하였다. 그렇게 하면 시리아의 지도자 바샤르 아사드도 공개적인 반응을 삼갈 것이라고 했다. 시리아는 폭격을 당하고도 침묵하고 서둘러 건물 잔해를 치웠다. 북한 기술자들이 그 직후 시리아를 방문, 事後(사후) 대책을 논의하는 것도 포착되었다. 부시 행정부는 북한이 ‘핵물질의 移轉(이전)’이란 금지선을 넘었다는 것을 확인하고도 직접적인 응징을 하지 않았다. 미국 국방부는 격화된 이라크의 內戰(내전)에 말려들어 있었고, 국무부의 라이스 장관과 크리스토퍼 힐 6자회담 대표는 북한을 상대로 막후교섭을 진행 중이었으며,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전쟁에 대한 비판적 여론에 직면, 지지율이 폭락하는 등 레임덕 증상을 보이고 있을 때였다.


딕 체니의 ‘라이스-힐 고발장’

체니 부통령은 2011년에 출판한 회고록 《나의 시대에(IN MY TIME)》서 ‘좌절’이란 제목의 章(장)을 만들어 2007년의 對北(대북)협상 실패를 신랄하게 비판, 폭로하고 있다. 라이스와 힐이 김정일과 김계관에게 속는 정도가 아니라 대변인 역할을 하였다고 공격하였다. 그는 부시 대통령이 이들에게 휘둘려 對北(대북)제제의 두 틀(테러지원국 지정, 무역제재 규정)을 허무하게 없애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金大中(김대중)과 盧武鉉(노무현) 전 대통령의 對北(대북)굴종 정책에 대한 비판과 비슷한 맥락의, ‘라이스-힐의 배신’에 대한 일종의 고발장이다.
체니는 對北정책이 어긋나기 시작한 단초는, 2006년 10월 말 북경에서 있었던, 6자회담 미국 대표 힐과 북한 대표 김계관의 단독 회담이었다고 지적하였다. 이는 미국의 6자회담 원칙에 배치되는 것이었다. 부시 대통령이 6자회담을 구상한 이유는 북한에 대하여 미국·한국·중국·일본·러시아가 단합된 압박을 가하자는 것이었다. 힐-김계관 회담은, 다른 나라들을 제치고 미국과 북한이 따로 협상해선 안 된다는 정신을 깬 접촉이었다는 비판이다. 두 달 반 뒤인 2007년 1월 힐은 라이스의 허락 하에 베를린에서 북한 대표단과 다시 만났다. 체니는 미국 대표단이 북한 대표단을 위하여 만찬까지 열어준 것을 비꼰다.
<그들이 가장 확실한 금지선을 넘었는데도 우리는 그들에게 잔치를 베풀다니!>
라이스의 《더 없는 명예: 워싱턴 시절의 회고록(2011년)》에 따르면, 힐 차관보가 독일의 메르켈 총리를 만나기 위하여 베를린에 도착한 라이스를 찾아와 흥분된 표정으로 보고하였다고 한다. 김계관이, 영변 원자로를 폐쇄하고 추방한 IAEA(국제원자력기구) 사찰단을 다시 받아들이겠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뭘 원하지요? 경수로입니까?”
힐은 “그게 아니고, 돈을 돌려 달라고 합니다”고 했다.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에 동결된 북한 관련 계좌 2500만 달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힐은 “김계관이 상부의 지시를 넘어서는 언질을 준 것 같다”면서 “즉시 답변을 해줘야 한다”고 졸랐다. 라이스 장관은 백악관으로 전화를 넣어 부시 대통령에게 간략한 보고서를 보낼 터이니 신속히 결정해달라고 하였다. 몇 시간 뒤 부시 대통령에게 다시 전화를 하였다. 대통령은 회담을 진행하라고 허락하였다. 뒤돌아보면 이것은 큰 실수였다. 북한은 6자회담이 아닌 美北 단독 협상을 이용, 임기 말의 부시 정부를 농락하면서 국제 금융제재라는 포위망을 벗어날 뿐 아니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도 빠진다. 


협상을 위한 협상에 매몰되어 목표 상실


라이스와 힐이 북한에 끌려가는 과정을 지켜본 체니는 <이들 외교관이 어떤 형태의 거래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다 보니 北核(북핵) 포기라는 목표를 잃어버렸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半信半疑(반신반의)하는 부시 대통령도 라이스와 힐에게 ‘비핵화로 가는 길이 맞나?’라고 여러 번 물었다. 그때마다 두 사람은 현실과 동떨어진 말로 대통령을 안심시키려 했다고 한다. 체니 부통령은 미국의 가장 큰 실수는 2007년의 2월13일의 6자회담 합의라고 썼다.  
2007년 2월13일, 6자회담은 ‘(2005년)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조치 합의’를 발표하였다. 북한의 영변 핵시설 폐쇄·봉인, IAEA 감시·검증요원의 영변 복귀, 對北 중유 5만 톤 제공(약속 이행시 추가로 95만 톤 제공), 美北(미북) 및 日北(일북) 관계 정상화 추진에 합의하였다. 2·13 합의에는 이런 문장이 들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테러지원국 지정으로부터 해제하기 위한 과정을 개시하고 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對적성국 교역법 적용을 종료시키기 위한 과정을 진전시켜 나간다는 공약을 상기하면서, 미합중국은 미·북 관계정상화 실무그룹 회의를 통해 도달한 컨센서스에 기초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조치들과 병렬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공약을 완수할 것이다.>
미국은, 핵실험, 영변 핵시설 재가동 등 북한의 違約(위약)에 대하여 벌을 주기는커녕 2005년 9월19일에 약속하였던 의무를 이행하겠다는 또 다른 약속만 믿고 對北(대북)제재의 근간을 해체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이런 약속을 받아내자마자 북한은 또 다시 억지를 부리기 시작한다. 3월의 6자회담에서 북한은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 은행에 동결된 2500만 달러의 북한 관련 예금을 해제하여, 돌려주지 않으면 회담에 불참하겠다면서 퇴장해버렸다.


부시, 노무현에게 화를 내다

6자회담에서 9·19 합의가 나오기 나흘 전인 2005년 9월15일 미국 재부무는 미국 애국법 311조 규정에 따라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 은행을, (북한 정권 등을 위한) 불법자금 세탁 우려 기관으로 지정, 미국 금융기관에 대하여 이 은행과의 거래를 금지시켰다. 미국 재무부와 국무부는 특별 팀을 만들어 북한의 달러 위조, 마약거래, 무기수출 등 범죄행위를 추적, 여기서 벌어들인 돈이 북한 정권의 유지 및 핵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사상초유의 간접적 금융제재에 나선 것이다. 국제금융기관은 이 조치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마카오 당국은, 예금 인출사태로 BDA가 파산 직전에 몰리자 경영권을 인수하고 북한 관련 계좌 52개(2500만 달러)를 동결하였다.
북한이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운영 중이던 골드스타 은행도 업무가 정지되었다. 북한 은행과 거래하면 애국법 311조에 저촉되어 미국의 금융기관과 거래를 할 수 없게 된다는 공포심이 확산되어가면서 북한은 정상적인 금융거래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중국의 은행들도 북한 거래를 기피하게 되었다. ‘현금거래’가 아니면 무역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매년 10억 달러를 위조달러, 위조담배, 마약밀매, 무기수출 등 범죄로 벌어들이던 김정일 정권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이런 가운데 그해 11월의 부산 APEC 총회에 참석한 부시 대통령이 경주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만났다. 필자는 이 회담 내용을 월간조선(月刊朝鮮) 2006년 1월호에서 이렇게 썼다.
<서울의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2005년 11월 경주에서 열린 韓·美 頂上(정상)회담 때 마카오 은행에 대한 미국의 금융제재 건은 당초 議題(의제)로 잡히지 않았었다고 한다. 외교부와 청와대 실무자들도 부시 대통령에게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답이 뻔할 뿐 아니라 두 나라 관계를 오히려 서먹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고 해 의제에서 빼버렸다는 것이다. 우리 정부는 이 무렵 미국의 제재조치가 단순한 금융사건이 아니라 對北 압박 전략의 일환이며 부시 대통령의 특명으로 이뤄진 사안이란 점을 잘 몰랐던 것 같다.  
頂上회담에서 盧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에게 미국의 조치가 北京(북경) 6者회담에 장애가 된다면서 선처를 요청했다고 전한다. 부시 대통령은 “이것은 범죄행위에 관한 것이므로 북한의 불법 核개발을 다루는 6者회담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잘랐다는 것이다. 한참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부시 대통령은 盧대통령을 향해 “만약 북한이 한국의 지폐를 위조해서 유통시킨다면, 한국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정색을 하고 물었다고 한다. 화가 난 표정이었다고 전한다. 
盧대통령은 頂上회담 후 鄭東泳(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불러 자신의 역할을 설명하고 북한 측에 통보해 주도록 지시했다는 미확인 첩보도 나돌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국의 대통령이 反국가단체의 국제범죄에 대해서 동맹국의 대통령을 설득하는 변호사役을 자임한 꼴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배석하였던 버시바우 미국 대사는 퇴임 후 이렇게 말하였다.
<방코델타아시아 은행의 북한 계좌를 동결한 데 대해서 노무현 대통령은 크게 우려했습니다. 兩國(양국) 정상이 이 문제를 놓고 심한 논쟁을 1시간 넘게 계속했습니다. 결국 경주 회담은 역사상 최악의 정상회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칼자루를 잡은 북한

2006년 10월9일의 북한 핵실험은, 군사적 필요성 이외에 국제금융 세계에서 迷兒(미아)가 되어버린 북한이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하여 선택한 전술이라는 면이 있다. 북한은 이로써 유엔의 제재를 불렀지만 한편으론 對美(대미) 외교 전략으로 상황을 逆轉(역전)시키려 한다. 라이스와 힐이 이 전략에 말려들어 북한과 단독 회담을 이어가다가 결국 이용당한다. 북한은 2007년 2·13 합의로 새로울 것도 없는 영변 핵시설 봉인 등 의무이행을 약속하고 막대한 경제원조와 제재완화를 약속 받자마자 ‘BDA 자금을 돌려주지 않으면 회담에 불참하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도둑이 형사 앞에서 “훔친 장물을 나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수사에 협조하기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격이었다.
어떻게든 북한을 상대로 합의(비록 거짓말투성이라도)를 얻어내겠다고 결심한 라이스와 힐은 놀랍게도 북한의 이런 厚顔無恥(후안무치)한 요구를 다 들어주기로 한다. 라이스는, 부시 대통령을 설득, 對北금융제재를 創案(창안)한 재무부에 ‘돌려주라’는 지시를 하게 만든다.
경찰청장이, 달러 위조범을 체포한 형사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돌려주라”고 지시한 꼴이 되었다. 저간의 상황에 대한 흥미로운 책이 나왔다.
미 재무부의 테러 금융 담당 차관보였던 후안 C. 자라테가 쓴 《재무부의 전쟁(2013년)》이란 책이다. 자라테는 국제범죄집단 같은 북한 정권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고도 정치적 판단에 의하여 구제해줄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울분에 넘친 표현으로 묘사하고 있다.
2007년 3월 초 對北금융제재를 지휘하던 미국 재무부 팀은 북경에서 북한 대표를 만나는데, 이제는 북측이 칼자루를 잡은 듯 위압적으로 나왔다. 미국 대표단은 BDA에서 동결한 북한 관련 자금을 ‘찾아가라’고 하면 고맙게 생각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북한 측은 “그 돈으로 해서 국제금융기관에서 북한이 따돌림을 받고 있으니 돌려줄 때는 국제금융기관을 통하여 송금해달라”고 나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에게 찍힌 국제범죄의 烙印(낙인)을 지우고, 세계의 금융기관에 대하여 ‘앞으로 북한과 거래해도 미국의 제재를 받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보내려 하였던 것이다.


북한의 下手人으로 전락한 미 재무부
 
자라테 전 차관보는 <부시-라이스-힐은 북한의 이런 요구를 수용, 우리를 北의 하수인으로 전락시켰다>고 불평하였다. 이미 쏟아진 물을 다시 그릇에 담는 작업은 쉽지가 않았다. 동결이 해제된 북한 자금을 받아서 북한으로 송금해주겠다는 금융기관이 나타나지를 않는 것이었다. 중국 은행조차 미국의 부탁을 받고도, 그런 송금에 연루되지 않으려 하였다. 크리스 힐은 백방으로 알아보았으나 실패하였다. 미국 은행이 북한의 불법성 자금을 돌려주는 치욕적인 일을 맡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결국 뉴욕 연방 준비 은행이 나서야 했다. 
2007년 6월 BDA는 북한 관련 계좌의 2500만 달러를 동결 해제, 마카오의 금융 위원회에 넘겼다. 위원회는 뉴욕의 연방 준비 은행으로 이 돈을 보내고, 이 은행은 러시아의 중앙은행으로 보냈다. 부시 대통령이 독일에서 열린 G8 정상회의에 참석한 푸틴 대통령에게 설명, 양해를 받은 것이다(미국 대통령이, 독재자의 호화판 생활과 핵개발에 들어갈 것이 뻔한 불법자금 세탁을 돕기 위하여 푸틴에게 매달리는 모습이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은행으로 송금했고, 이 은행에 개설되어 있던 북한 무역은행 계좌로 입금되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북한 정권은 국제금융기관으로부터 면죄부를 받은 셈이다.
자라테는 회고록에서 북한의 협상 기술을 극찬하였다.
<입장이 뒤바뀌어 미국이 문제아가 되었다. 북한은 프로처럼 교묘하게 상황을 逆轉(역전) 시켰다. 우리는 (북한에 대한) 국제적 압박이 最高潮(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손을 들고 지렛대를 던져버렸다.>
 자라테는 북한에 굴복한 결과를 이런 요지로 정리하였다.
<미국이 깡패국가들을 응징하기 위하여 금융제재를 한다고 해도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어 언제 원칙을 포기할지 모르니 믿을 수 없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우리를 지지하던 동맹국들이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다. 북한은 100달러 위조지폐 생산을 계속하고 있다. 북한의 국제범죄 행위는 해결되지 않은 상태이다. 우리는 북한 정권과 지도층을 지탱하는 자금을 감시하는 체제를 구축한다는 목표 달성에 실패하였다.>


라이스, 북한 자극한다고 저자세

다시 체니의 회고록으로 돌아간다. 체니는, 對北금융제재라는 중요 카드를 포기한 라이스가  북한이 시리아에 원폭 제조용 원자로를 비밀리에 건설하고 있다는 정보를 對北 압박 카드로 쓰지 않으려 하였다고 비판하였다. 라이스 국무장관은 시리아 원자로 문제를 제기하면 북한을 자극, 6자회담이 어렵게 될 것이라고 걱정하더라고 한다. 답답해진 체니는 호주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담에 참석하러 가는 부시 대통령에게 건의하였다.
“후진타오 중국 주석을 만날 때 시리아 원자로 건설 문제를 제기하고 서로 마음이 통하는 대화를 통하여 중국이 북한을 압박하도록 해주세요.”
부시는 그러나 이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2007년 2월의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조치 합의’(2·13 합의) 사항에 대한 초기조치가 마무리되자 6자회담 참가국들은 그해 9월27일~30일간 중국 베이징에서 제6차 6자회담 2단계 회의를 가졌다. 이 회담에서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제2단계 조치 합의(10·3 합의)’ 가 도출되어 10월3일 6자회담 참가국들에 의해 승인되었다. ‘10·3 합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모든 북한 핵시설 연말까지 불능화
② 모든 북한 핵 프로그램 연말까지 신고
③ 북한 핵 물질·기술·노하우 移轉(이전) 금지
④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 과정 개시
⑤ 對적성국 교역법 적용 종료 추진
⑥ 미·북, 일·북 관계정상화 노력
⑦ 중유 100만 톤 상당 경제·에너지 지원

이 합의의 핵심은 <모든 북한 핵 프로그램 年末(연말)까지 신고>였다. 이날 노무현 대통령은 평양에서 김정일을 만나고 있었다. 김정일은 북한의 6자회담 대표 김계관을 불러 합의 사항을 설명하도록 하였다. 공개된 ‘김정일-노무현 회담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김계관(북한 외무성 副相): “신고에서는 우리가 핵계획, 핵물질, 핵시설 다 신고합니다. 그러나 핵물질 신고에서는 무기화된 정형은 신고 안 합니다. 왜? 미국하고 우리하고는 교전상황에 있기 때문에 적대상황에 있는 미국에다가 무기 상황을 신고하는 것이 어디 있갔는가. 우리 안한다.”
 
모든 핵 프로그램을 다 신고한다고 약속한 북한이 대한민국 대통령 앞에서 핵폭탄과 관련된 핵물질은 신고하지 않겠다고, 즉 핵심적인 약속을 지키지 않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盧대통령의 반응이 놀랍다.
 
·노무현 대통령: “수고하셨습니다. 현명하게 하셨고, 잘 하셨구요. 나는 공개적으로, 핵문제는 6자회담에서 서로 협력한다, 이것이 원칙이다, 그러니까 6자회담 바깥에서 핵문제가 풀릴 일은, 따로 다뤄질 일은 없습니다. 단지 남북 간에 비핵화 합의 원칙만 한 번 더 확인하고, 실질적으로 풀어나가는 과정은 6자회담에서 같이 풀어나가자 이렇게 갈 거니까요.”


“약간 돈 사람”
  
북한이 무기화된 핵물질은 신고하지 않는다고 억지를 부려도 우리 대통령은 따지지도 않고 오히려 “현명하게 하셨다”고 칭찬한다. 그는 이날 김정일 앞에서 핵문제와 관련하여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다(국정원 공개 노무현-김정일 대화록).
“그동안 해외를 다니면서 50회 넘는 정상회담을 했습니다만 그동안 외국 정상들의 북측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때, 나는 북측의 대변인 노릇 또는 변호인 노릇을 했고 때로는 얼굴을 붉혔던 일도 있습니다. 남측에, 가서 핵문제 확실하게 이야기하고 와라 주문이 많죠. 그런데 그것은 되도록 가서 판을 깨고… 판 깨지기를 바라는 사람의 주장 아니겠습니까? (중략) 나는 지난 5년 동안 북핵문제를 둘러싼 북측의 입장을 가지고 미국하고 싸워왔고, 국제무대에서 북측의 입장을 변호해 왔습니다.”  
핵무장하지 않은 나라의 국군통수권자가 핵무장한 敵을 위하여 동맹국과 싸웠다고 敵將(적장) 앞에서 자랑한 것은 利敵(이적)을 넘어 정신적 正常性(정상성)을 의심하게 한다. 로버트 게이츠 당시 미 국방장관이 그 직후인 2007년 11월에 노무현을 만났다. 게이츠 전 장관이 쓴 회고록에 의하면 盧 당시 대통령은 게이츠에게 “아시아의 가장 큰 안보 위협은 미국과 일본이다”고 말하더라고 한다. 게이츠는 “나는 그가 반미주의자라고 결론 내렸고 약간 돌았다고 생각했다”고 썼다.
 

김대중의 誤判, “북엔 농축우라늄 없다”

체니 회고록에 따르면 라이스도 핵 프로그램 신고를 제대로 하지 않는 북한 편을 들었다고 한다. 북한은 무기화된 핵물질뿐 아니라 농축 우라늄 보유 현황에 대한 신고도 거부하였다. 2002년 핵 위기가 시작된 원인이 농축 우라늄이었는데 이를 일단 덮자는 게 라이스의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라이스는 북한이 1단계로 플루토늄만 신고하기로 했고, 농축 우라늄에 대하여는 크리스토퍼 힐과 북한 측 상대의 비공식 대화에서 북측이 그 존재를 인정한 사안임으로 앞으로 잘 해나갈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체니는, 비공식 대화록 자체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곤 이렇게 불평하였다.
<군비통제 과정에서 이런 일은 처음 본다. 북한의 허위 신고를 우리가 받아들이기로 하였을 뿐 아니라 북측이 거짓 신고를 하였다고 인정하는 말을 크리스 힐의 귀에다가 하였다는 사실까지도 수용하여야 했으니 말이다. 부시 대통령에게 라이스는 되풀이하여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이 무렵, 그러니 2007년 4월 중순 프랑스의 르몽드紙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인터뷰하였다. 기자가, “북한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에 관련해서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지?”라고 물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렇게 답하였다.
“난 제임스 켈리의 (2002년) 발언 내용에 매우 놀랐다. 그의 대화 상대였던 북한 대표들은, 실제로 가동되고 있는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이 존재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들은,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시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북한에 실제로 가동되고 있는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낸 사람의 놀라운 誤判(오판)인데, 당시 북한이 농축 우라늄을 신고하지 않겠다고 버티던 상황의 반영이 아닌지 모르겠다.


“협상으론 핵을 폐기시킬 수 없다”

2008년 1월4일 백악관에서 열린 定例(정례) 정보 보고회에 국가정보국장이 세 명의 북한 전문 요원을 데리고 왔다. 부시 대통령은 그들에게 핵심적인 질문을 던졌다.
“진행 중인 협상의 결과로서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할 것 같은가?”
세 전문가는 낙관적이지 않다고 답하였다. 북한이 자신들의 생존이 핵무기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므로 미국이 무슨 양보를 하든지 핵무기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개최된 국가안보회의(NSC)에서 부시 대통령은 배석한 6자회담 대표 힐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힐을 대신하여 라이스 장관이 답변에 나섰다. 요지는 북한이 영변의 원자로를 해체하는 것이 중요한 첫 단계이므로 이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부시가 체니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들은 농축 우라늄 활동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그들은 시리아로 핵물질을 확산시킨 점도 부인합니다. 그들이 신고한 내용이 거짓말인 줄 알면서 우리가 이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북한이 핵 활동을 덮도록 도와주는 일밖에 하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말한 체니는 대통령에게 물었다.
“북한이 완벽한 신고를 하지 않으면 테러지원국 지정에서 해제하거나 對적성국 교역 규제 대상에서 빼주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까?”
부시는 “절대로 안 된다”고 다짐하였다. 
북한은 농축 우라늄 프로그램과 관련이 있는 것이라는 의심이 있는 고압 알루미늄 관을 미국에 넘겨주었다. 여기서 농축 우라늄 성분이 검출되었다. 플루토늄 생산에 대한 방대한 문서를 넘겼는데 여기서도 微量(미량)의 농축 우라늄 성분이 나왔다. 그럼에도 북한은 2008년 6월26일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에 핵활동을 신고하였는데 농축 우라늄과 핵확산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 직후 부시는 북한에 대한 對적성국 교역 규제를 풀고 미 의회에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해제할 방침을 전달하겠다고 발표하였다.
2008년 6월27일 북한은 영변 원자로의 냉각탑을 폭파시키는 쇼를 보여주었다.
두 달 뒤, 북한은 미국이 테러지원국 해제 조치를 미루자 영변 시설의 해체를 중단시키고, 재처리 시절을 재가동한다고 발표하였다.


벌거벗은 미국

2008년 10월9일 대통령 집무실에서 부시 대통령은 체니, 라이스, 그리고 안보 보좌관 스티브 해들리를 불렀다. 미국이 오바마-매케인의 大選(대선) 정국으로 들어간 때였다.
북한이 신고한 핵 프로그램을 어떻게 검증할 것인가를 놓고 토론이 벌어졌다. 검증 방법에 대하여 북한과 합의한 문서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대통령이 따지고 들자 라이스 장관은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이다.
“대통령 각하, 외교는 때론 이렇게 움직입니다. 문서화된 합의가 항상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체니는 회고록에서, 라이스의 이 말에 격분한다.
<이 말은 완벽한 誤導(오도)이고, 자신이 하는 일과도 어긋났다. 그는 대통령에게 합의가 없더라도 있는 척하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핵무장하고 테러를 지원하는 나라를 상대로!>
부시는 10월11일 라이스가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빼주는 서명을 하도록 했다. 체니는 <비참한 순간이었다>고 했다. 부시가 자신의 원칙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고, 클린턴 시절의 접근 방식을 비판하였던 그가 같은 실수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벌거벗은 것은 북한이 아니고 미국이었다.
그 후의 사태 전개는 라이스와 힐이 북한에 속았거나 자신과 부시를 속였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해제된 직후인 10월 말, 북한은 檢證(검증)이 영변의 플루토늄 원자로 부지에 한정될 것이며, 11월12일엔, 흙이나 폐기물 試料(시료)를 가져나갈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12월11일 북한은 힐이 말한 ‘구두 합의’를 무시할 것이라고 했다.  
2009년 4월 북한은 장거리 미사일 발사 시험을 하였다. 5월엔 2차 핵실험. 9월엔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의 존재를 인정하였다. 2010년 11월엔 해커 박사를 영변에 초청, 농축 우라늄을 위한 원심분리기 공장을 보여주었다. 2011년 2월, 국가정보국의 짐 클레퍼 국장은 상원에서 한 증언에서 <북한은 상당 기간 농축 우라늄을 생산하기 위하여 노력해왔으며 영변 이외에도 다른 농축 관련 시설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하였다.


김계관을 수입해야?

부시 행정부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對北 강경론자였던 체니는 회고록에서 부시의 對北정책이 실패한 교훈을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첫째, 정책의 목표를 잃어선 안 된다. 국무부는 교섭과정에서 北核폐기가 아니라 북한과 합의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하고 말았다.
둘째, 강한 입장에서 협상을 해야 한다. 원칙을 지켜야 하고 필요하다면 회담을 깨고, 군사력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
셋째, 금지선을 지켜야 한다. 북한이 시리아에 영변型(형) 핵무기용 원자로를 수출한 사실을 알고도 응징하지 않은 것은 실수였다.
넷째, 전략적으로 思考(사고)해야 한다. 북한이 핵실험을 했을 때와 그들이 시리아에 원자로를 지어 주고 있음을 알았을 때 우리는 중국을 앞세워 강한 압박을 넣었어야 했는데, 기회를 놓쳤다.
다섯째, 미국은 동맹국과 함께해야 하는데, 일본과 한국을 소홀히 했다.
여섯째,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북한은 제네바 非核化(비핵화) 협정을 맺은 뒤에도 우라늄 농축과 對시리아 원자로 수출을 했다. 이런 수법을 우리한테도 적용했다.
라이스 국무장관은 회고록에서 북한에 끌려 다니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괴상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비판하였지만 그가 한 일도 나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체니의 비판을 의식한 듯, “여러 번, 부통령에게 대안이 무엇이냐고 물었지만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였다”고 했다.
라이스와 체니의 회고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북한 핵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미국의 지도층이 한국 정부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시리아에서 발각된 北韓型(북한형) 원자로를 이스라엘이 폭격하자고 하였을 때 미국의 최고 지도층이 연일 회의를 열면서 대책을 논의하였던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한국 정부가 북한의 핵문제 해결을 위하여 군사력을 사용하겠다고 나섰다면 미국도 한국을 이스라엘처럼 존중하였을 것이다.
가장 전투적으로 나서야 할 한국인들이 국가 생존의 문제를 남의 일처럼 구경거리로 삼으니 체니도 라이스도 북한 외교에 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죽고 사는 문제를 외국에 맡겨놓고 ‘웰빙’에 집착하는 나라의 국민들은 라이스를 욕할 권리가 없다. 북한과 교섭 해본 미국인들의 회고담에선, 死生決斷(사생결단)하는 북한 지도층에 질린 듯한, 때로는 존경하는 심리가 感知(감지)되기도 한다. 북한의 핵외교를 主導(주도)하여, 세계를 들썩이게 한 김계관을 한국이 수입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는 우스개가 우습지 않다. 사생결단으로 나오는 敵을 상대로 방관자의 입장을 취하겠다면 노예가 되는 길밖에 없다. 야윈 늑대 앞에서 살찐 돼지처럼 살겠다면 뜯어 먹히는 수밖에 없는 법이다. 

   

[ 2018-03-10, 12:04 ] 조회수 : 1076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멸공!     2018-03-10 오후 2:28
참 귀한 글이로다. 역사적 가치 있는 귀중한 자료다.

맨위로월간조선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코나스넷  |  리버티헤럴드  |  뉴데일리  |  뉴스파인더  |  뉴포커스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