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계 일본군
소설가 김동인(金東仁)의 항변(30) 일본의 위상이 세계적인 강국(强國)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嚴相益(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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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조선계 일본군

일본의 위상이 세계적인 강국(强國)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일본의 대륙침략과 병행해서 조선주둔 일본군 장교들 사이에 비밀리에 조선인들을 군인으로 만드는 문제가 검토되고 있었다. 조선인에게 총을 주었을 때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가 그들의 우려였다. 일본인과 동일하게 총을 주는 병역법의 개정은 조선인이 철저히 일본화되어야 했다. 일제(日帝) 당국은 조선인들의 심적인 변화를 관찰하면서 조심스럽게 실험했다. 먼저 조선인 출신 헌병보조원, 경찰에게 총을 주어보았다. 특별한 저항이 없었다. 다음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의 문호를 열어 조선인도 일본군 장교가 되는 길을 열어보았다. 별 무리가 없었다. 그 다음으로는 조선인만의 중대를 편성해서 동 만주 국경에 배치해 봤다. 만주의 여러 조선인 중대에 무기를 지급했지만 반항은 없었다. 그 정도면 조선인을 일본군으로 활용해도 좋겠다는 결론이 났다.

1937년 6월 일본 육군성(陸軍省)은 조선주둔 일본군 사령부에 ‘조선인 병역문제에 관한 의견’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조선의 일본군 사령부 참모장 가노는 시험적으로 지원하는 조선인 청년 소수를 현역병으로 복무시켜 보자고 제안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인 지원병 제도의 실시를 천황에게 상주해서 정부방침으로 확정했다. 1938년 최초의 조선인 지원병 400명이 모집되고 그 중 1기생 202명이 6월15일 지원병 훈련소에 입소했다.

육군 지원병제가 실시되자 조선인의 지도자급으로 알려진 조병상(曺秉相) 같은 인물은 장남과 차남을 일본군에 입대시키면서 매일신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번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는 조선인들의 애국심을 저울질하는 중대한 시금석이 되어있다. 사람마다 내선일체(內鮮一體)란 말을 입에 올리지만 참다운 내선일체는 내지인과 반도인이 융합하는 이외에는 별 도리가 없다”

남경을 향해서 진격 중이던 마쓰이 이와네 대장 휘하의 일본군은 남경의 교외인 우화대(雨花台)에 육박했다. 장개석(蔣介石) 정권이 자리 잡고 있던 남경이 함락됐다. 그 축하행사가 조선 전체를 떠들썩하게 했다. 각급 학교 학생들이 동원되어 낮에는 가두행진 밤엔 제등행렬로 불야성을 이루었다. 중국을 대국이라고 생각하던 조선 사람들 중에는 중국의 수도를 일본군이 단번에 점령해 버렸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생각이 변했다. 총독부는 반도의 100만 학도가 중국대륙에 진군할 야망으로 불타게 하는 선동정책을 전개했다. ‘출정병사를 보내는 노래’가 조선의 방방곡곡 역두(驛頭)와 징병검사장에서 메아리쳤다. 군가의 물결, 일장기의 물결, 지시문 명령서의 물결이 조선반도에 꽉 찼다. 신문의 활자들은 연일 승전소식으로 가득했다.

동경의 시사잡지 <모던일본>의 1940년판을 보면 기자의 조선인 지원병 훈련소 방문기가 있다. 그 내용은 이랬다. 

*

1940년 5월28일 경성의 동쪽, 경성 춘천간 개설된 사설철도 성동역에서 8시20분 묵동행을 기다리며 역 식당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지도를 펼쳐보니 조선총독부 육군병 지원자 훈련소는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북덕리에 있었다. 성동역에서 30분 정도 가니까 공덕리 입구 묵동역이었다. 묵동은 작은 간이역이었다. 이 간이역은 훈련소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역의 남쪽으로 10정 정도 앞쪽 낮은 언덕 위에 위치한 빨간 벽돌건물이 훈련소였다. 두 개의 높은 굴뚝에서 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훈련소에는 300명의 생도가 있었다. 이번이 4기 훈련생으로 제1기, 제2기가 200명, 3기와 이번이 300명 합해서 1000명의 병사를 내보내는 셈이었다.

훈련소는 내일이 졸업식이어서 지원병들이 떠들썩했다. 이발하는 이, 청소를 하는 이, 짐정리를 하는 이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대강당에는 조선인 지원병 출신으로 전사한 이인석, 이형수 상등병의 사진이 걸려있었고 정면에는 미나미 총독의 ‘의용봉공(義勇奉公)’이라는 네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강당 뒤쪽의 병영이 그대로 숙사(宿舍)였다.

한 반에 50명, 여섯 반으로 나뉘어 있었다. 여기에 먼저 들어온 지원병이 나가면 새롭게 다음 지원병이 입소하기 때문에 소위 초년병 시절의 고생이 없이 모두 자유롭게 훈련을 하면서 일등병이 된다. 군대보다 편하다. 지원병은 매일 아침 6시에 기상하여 황궁(皇宮)과 이세신궁(伊勢神宮)을 향한 절,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 바다로 가면이라는 노래의 합창, 황국신민의 체조를 마치고 아침식탁에 앉는다. “잘 먹겠습니다”라고 우렁차게 인사를 하고 보리밥에 반찬으로 배를 채운다.

훈련소에서는 다시 1000명의 지원병을 수용할 수 있도록 증축공사를 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2년에 걸려 가까스로 1000명의 지원병을 배출했지만 앞으로 한 번에 1000명을 입소시켜 연 3회 3000명의 지원병을 내보낼 계획이라고 한다. 그걸 위해서는 지금의 4배 정도의 건물이 필요하다고 했다. 제5기생 1000명 입소일도 다가와 벌써부터 준비에 한창이다. 8월까지 주야간으로 73만 엔 규모의 대공사를 준공시킬 예정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3천명의 지원병 모집에 8만3000명의 지원자가 쇄도한 것을 생각하면 증축은 앞으로 더 이루어질 것이다. 주임교수는 우미다 대령이고 교관으로 모리모토, 다나카가 근무하고 있다.’

당시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시오하라 도키사부로는 1939년 발행된 일본 시사잡지 <모던일본>에 기고한 글에서 1938년 지원병 제도를 라디오에서 발표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3000명 가량이 지원했고 그중 400명을, 1939년 약 1만2300명의 지원자 중에서 600명을 뽑았다고 기록했다.
 
1940년 12월1일 일본천황 히로히토가 참석한 회의에서 도조 히데키 수상은 미국과의 전쟁이 임박했다고 하면서 이렇게 발언했다.  

“우리 일본의 요구가 외교수단을 통해 달성되기는 이미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국력으로 보거나 전략상으로 보아 현재의 상태에서 그냥 있어서는 안 됩니다. 국운을 걸고 대일본제국이 도약할 기회가 성숙됐습니다. 우리 육해군은 오로지 폐하에의 충성과 군국에 대한 애국일념으로 불타고 있습니다.”

유럽이 히틀러의 독무대였다. 히틀러는 폴란드에 이어 노르웨이 침공 작전을 개시했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단번에 점령하고 프랑스 영토로 깊숙이 진공했다. 좌익에 머리를 흔들던 프랑스 사회는 오히려 히틀러를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일본은 군부가 권력을 장악했다. 참모본부는 내각을 총사직시켰다. 새로운 육군대신에 도조 히데키가 임명됐다. 헌병사령관 출신인 그는 군의 과격파 대표였다. 미국은 일본에 석유와 철강류의 수출을 막는 경제봉쇄 조치를 취했다. 인도차이나는 네덜란드와 불란서의 식민지 영향권이었다.

일본군은 네덜란드가 독일에 항복한 틈을 이용해 인도차이나로 진군해서 석유자원을 확보하려고 계획했다. 이어서 일본 군부는 미국에게 중국대륙에서의 일본 기득권을 인정하고 중경(重京)의 장개석(蔣介石) 정부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라고 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일본은 모든 해외파견 병력을 철수하라고 맞받아친 상황이었다. 그날의 동경의 어전회의는 도조 수상의 개전(開戰)주장으로 매듭지어졌다. 일본의 육해군은 그날로 전투태세 돌입 명령을 받았다. 육군은 행동개시와 함께 홍콩, 말레이, 필리핀, 인도차이나 등을 점령할 예정이었다. 전략물자 확보가 목적이었다. 해군은 연합함대사령관 야마모도 이소로쿠로 하여금 하와이에 있는 진주만을 기습해서 미국의 태평양함대를 궤멸시켜 태평양의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한다는 계획이었다.

1941년 12월8일 날이 밝기 전,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지휘하는 연합함대는 진주만 근처에 접근했다. 200여 대의 항공기와 특수 잠함정(潛艦艇)이 미국의 태평양함대를 공격했다. 진주만은 거대한 화염과 검은 연기로 뒤덮였다. 미국함대의 전멸이었다. 홍콩이 함락되고 영국전함 프린스 오브 웰즈와 레파르즈호가 격침됐다. 말레이반도에 상륙한 일본군은 파죽시세로 남진하여 싱가포르까지 점령했다. 일본군 남양방면 총사령관 야마시타 중장은 항복하러 온 영국군 퍼시벌 사령관에게 고함을 쳤다.
“무조건 항복이냐 아니냐 대답만 하라?”

일본군은 영국군의 항복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군은 필리핀에 상륙해서 바로 수도 마닐라를 점령하고 맥아더를 쫓아버렸다. 인도차이나의 자바, 수마트라 등에 상륙한 일본군 부대들은 석유지대를 모조리 장악해 버렸다. 괌과 웨이크 섬도 점령했다. 미얀마로 진격한 일본군은 랭군을 점령하고 영국군을 인도 국경 너머로 쫓아버렸다. 남양지역을 점령한 일본군은 전리품의 표시로 수많은 고무공을 만들어 전국의 아동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일본이 싱가포르를 점령하고 동남아 일대를 석권했다. 일본 전체는 전승(戰勝)무드에 젖어 있었다. 축하의 거리행진이 연일 이어지고 있었다.


(계속)

[ 2018-06-11, 11:01 ] 조회수 : 1272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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