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 對 마드리드, 해양문화 對 대륙문화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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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9월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갔을 때 가이드로 나온 한국 여대생에게 물었다.
  
  "지난 월드 컵 때 스페인이 한국한테 억울하게 졌다고 야단이었는데 혹시 봉변을 안 당했어요?"
  
  "봉변요? 대접을 받았답니다. 스페인-한국戰을 할 때 여기 바로셀로나 사람들은 모두 한국을 응원했어요. 한국이 승부차기로 이기자 자기 일처럼 기뻐했답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우승한 스페인 팀엔 FC 바르셀로나 팀 소속 선수가 여섯 명 있었다. 세계最高의 미드필더로 꼽히는 사비 에르난데스도 들어 있었다. 이들이 과연 스페인 팀을 위하여 全力을 다할지 의문을 품는 사람들도 있었다. FC 바르셀로나의 대표인 호안 라포르타씨는 "우리 팀은 全 세계에 팬을 갖고 있다. 우리는 세계의 팀이다. 우리는 일본 팀이고, 미국 팀이며, 아프리카 팀이다."라고 했다. 타임誌 기자가 "스페인 팀은 아닌가요?"라고 묻자 라포르타씨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나는 스페인 대표팀에 대하연 아무 생각이 없어요. 우리 팀원 여섯 명이 거기서 뛰어도 나는 관심이 없습니다."라고 했지만 열심히 뛰었다.
  
  왜 바로셀로나 사람들은 스페인을 이렇게 싫어하는가? 이래 가지고 통일국가를 어떻게 유지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설명은 길다. 오랜 역사적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셀로나를 州都로 하는 카타루니아 自治州는 마드리드를 수도로 하는 스페인에 속해 있지만 행정, 문화 등 여러 면에서 自治를 하고 있다. 특히 스페인어와 함께 가타루니아어를 같이 쓴다. 유럽에서는 自國語가 있으면 독립국을 만드는 경우가 많다. 同族은 종족 개념이 아니라 같은 말을 쓰는 이들의 집합체이다.
  
  카타루니아 지방 사람들은 예술적, 문화적으로 뛰어난 이들이 많다. 건축가 가우디, 첼로의 카잘스, 聲樂의 호세 카레라스, 미술의 미로, 다리, 피카소, 그리고 서울올림픽 때의 국제올림픽위원장 사마란치가 이곳 출신이다. 1992년 이곳에서 올림픽이 열렸고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하였다. 피카소는 출생은 말라가이지만 바르셀로나에서 미술을 공부하였고 그의 미술관이 이곳에 있다.
  
  바르셀로나의 이름은 카르타고의 名將 한니발과 관련이 있다. 그의 아버지는 카르타고의 식민지였던 이곳을 다스리는 총독이었다. 한니발 家門을 "바르시" 집안이라고 했는데 그 말에서 바르셀로나란 이름이 나왔다고 한다.
  
  바르셀로나 지방은 카타루니아라고 불리는데 中世 때 지금의 프랑스와 독일을 통일하였던 프랑크 왕국에 예속된 적이 있어 프랑스와 친근한 편이다.
  
  987년 프랑스 왕에 대한 충성을 거부, 독립한 카타루니아 公國은, 12세기부터 王族끼리의 결혼으로 인접한 아라곤 王國과 연합국을 형성하였다. 바르셀로나 영주가 자동적으로 아라곤 왕국의 王이 되었다.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아라곤-카탈루니아 연합국은 막강한 해군력을 건설, 지중해를 무대로 하여 번영하였다. 한때는 말타, 코르시카와 사르디니아(지금은 이탈리아 소속), 아테네를 영유하였다. 아라곤은 시실리와 남부 이탈리아에 걸친 "나폴리-시실리 왕국"을 정복하기도 하였다.
  
  15세기 후반 이 아라곤 왕국의 페르디난도 왕과 마드리드 중심의 카스틸 왕국 이사벨라 여왕이 결혼, 카스틸-아라곤 연합왕국을 만든다. 이 왕국이 1492년, 콜롬부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그해, 그라나다에 남아 있던 이슬람 왕국을 멸망시키고 거의 800년에 걸친 기독교-이슬람 전쟁을 승리로 마감한다.
  
  그 뒤 스페인은 카스틸 王國 중심으로 통일되기 시작한다. 아라곤의 페르디난도 王은 부인이 먼저 죽은 뒤 북쪽의 나바라 王國을 합병, 처음으로 스페인 통일王國을 건설한다. 통일된 스페인의 수도는 마드리드로 정해지고 아라곤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아라곤-카타루니아(바르셀로나) 사람들의 마드리드 중앙정부에 대한 反感이 강해졌다.
  17세기 중반엔 프랑스 군대를 불러들여 독립을 꾀하기도 하였다. 18세기 초 스페인 王位 계승전쟁 때 카타루니아는 마드리드의 스페인 왕국에 맞섰다. 1714년 9월11일 스페인軍은 바르셀로나를 점령, 반란을 진압, 의회를 해산하였다. 카타루니아 지방은 지금도 이날을 국경일로 기념한다.
  
  1930년대 후반, 스페인 內戰 때도 바르셀로나는 프랑코 군대에 저항하는 공화파의 마지막 거점이었다. 이 도시는 무정부주의자, 공산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 등 좌익들의 온상이었다. 나중엔 자기들끼리 죽이는 內紛을 일삼다가 自滅하였다.
  
  좌익 공화파 지원군으로 참전하였던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은 "카타루니아에 敬意를 표함"이라는 제목의 手記를 써 좌익의 실체를 고발하였다. 오웰은 反스탈린 트로츠키주의자 단체에 소속되었는데, 스탈린의 지령을 받은 親蘇세력이 이들을 공격, 지도부를 집단처형하였다. 오웰 부부도 파리로 탈출, 귀국하였다. 이 경험에서 오웰은 나치 파쇼와 스탈린주의는 인간말살의 전체주의로서 결국 같은 이념이라는 先覺에 도달하였다. 오웰은 공산주의를 비판한 手記를 출판해주려는 편집자를 찾는 데 애를 먹었다. 오웰의 傳記 영화엔 좌익 눈치를 보면서 출판을 거절하는 편집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자네는 진실보다 신념을 더 重視하는 인간인가?"
  
  오웰은 바르셀로나의 체험을 딛고서 공산주의의 악마성을 그린 불후의 명작 "1984" "동물농장"을 쓰게 된다. 프랑코는 바르셀로나를 점령한 뒤 카타루니아 語의 사용을 금지시켰다. 1975년 프랑코가 죽은 뒤 새로운 헌법에 의하여 카타루니아 지방은 자치권을 회복하였다.
  
  카타루니아 지방은 스페인에서 산업혁명을 가장 먼저 시작하여 富를 축적하였다. 이런 富와 지중해 문화의 전통이 결합되고 이곳 특유의 반골정신이 깃들면서 바르셀로나는 새로운 潮流의 문화와 예술을 만들어내는 요람이었다. 자유, 개방의 해양문화, 엄숙 전제적 대륙문화의 충돌이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의 대결, 그 바탕에 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은 이곳 출신 사마란치 위원장의 오랜 꿈이 결실된 것이다. 개막식에서 마드리드 출신 프라시도 도밍고와 바르셀로나 출신 호세 카레라스가 함께 노래를 부른 것은 스페인과 카타루니아 지방의 화합을 상징하는 공연이기도 하였다.
  
  카타루니아州의 넓이는 강원도와 비슷한 3만2000 평방 킬로미터, 인구는 스페인의 약16%인 740만 명.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가우디가 완성하지 못한 聖가족성당 등 5개이다.
  
[ 2018-10-09, 18:15 ] 조회수 : 348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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