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과 한민통에 대한 대법원의 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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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월29일 서울고등법원 제3형사부(재판장 신영철, 판사 김태용, 박순관)는 金大中 전 대통령이 1980년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던 내란음모 등 사건에 대해서 재심을 청구한 데 대하여 아래와 같이 선고했다.
  
   <원심판결중 피고인에 대한 부분을 파기한다. 이 사건 공소사실 중 내란음모와 계엄법 위반의 점은 각 무죄, 이 사건 공소사실중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의 점과 외국환관리법 위반의 점은 각 면소.>
  
   金大中 전 대통령은 재심청구의 이유를 세 개로 들었다. 첫째, 내란음모에 대하여 金피고인은 1980년 봄의 회동은 '순수한 민주회복을 위한 의사표시의 방법으로서 학생운동을 통하여 국민여론에 반영하도록 시도한 것에 불과하며 국헌문란의 목적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둘째, 계엄법 위반의 점에 대하여 金大中 피고인은 '계엄당국의 허가 없이 회동한 것은 사실이나 그런 집회는 사실상 묵인 내지 허용되고 있었고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셋째,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의 점에 대하여 金씨는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일본본부는 대한민국 지지를 기본정책으로 내걸고서 조국의 민주회복과 평화통일을 달성하기 위하여 결성된 단체이므로 결코 反국가단체가 아닐 뿐 아니라 나는 이 단체와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고등법원 재판부는 내란 음모, 계엄법 위반의 점에 대하여는 무죄를 선고했다. 그 이유는 이러했다.
   <전두환 등이 1979년12월12일 군사반란 이후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확대 선포를 시작으로 1981년1월24일 비상계엄의 해제에 이르기까지 한 일련의 행위는 내란죄이다. 피고인의 행위는 이러한 헌정질서 파괴범행을 저지하여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이므로 이 부분을 유죄로 인정한 원심판결은 유지될 수 없다.>
  
   이 재판부는 그러나 金大中 피고인에게 적용되었던 국가보안법 등 위반혐의에 대해서는 다른 판단을 했다.
  
   재판부는 우선 1995년 제정 5.18 특별법에 규정된 재심대상 판결 내용에 내란음모와 계엄법 위반은 들어가지만(헌정질서 파괴 행위에 대한 저지, 반대행위로 유죄를 받은 경우이므로) 국가보안법 위반은 재심 사유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金大中 피고인에게 적용되었던 국가보안법 위반(반국가단체 수괴 등 혐의), 반공법 위반, 외환관리법 위반에 대해서는 유죄 인정을 파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만, 金피고인이 1987년7월10일자로 이 사건 선고의 효력을 상실케 하고 피고인을 복권케 하는 특별사면을 받았으므로 형사소송법 제326조 제2호에 따라 이 부문에 대해서는 免訴(면소) 판결을 선고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 판결은 그 뒤 확정되었다. 金大中씨가 1980년 봄에 내란을 선동했다는 부분은 무죄가 되었으나 그가 국가보안법상의 反국가단체인 한민통에 가입한 사실은 무죄가 된 것이 아니다.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할 수 없는 이유는 다른 판결에 의해서도 한민통이 국가보안법상의 反국가단체임이 여러 차례 확정되었으므로 이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金大中씨는 反국가단체 결성 부분을 포함한 모든 범죄사실에 대한 선고를 실효케 하는 특별사면을 이미 받았으므로 국가보안법 위반 등 부분에 대해서는 免訴, 즉 공소권이 없다는 선고를 하게 된 것이다.
  
   이 재심선고로 인해 金大中 피고인에게 내려졌던 국가보안법 위반죄가 잘못된 것으로 확정되었으므로 한민통 가입이 정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판결문을 왜곡하는 것이다. 金大中씨가, 북한정권이 대한민국을 파괴하기 위해 설립 추진한 한민통에 가입했었다는 사실은 이번 재심에도 불구하고 뒤집어지지 않았다. 2004년, 한민통의 주요간부들이 해외 민주인사로 둔갑하여 한국에 들어와 金大中씨를 만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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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락 당시 정보부장은 1987년10월호 신동아 인터뷰에서 김대중 납치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구체적으로 金大中 씨의 어떤 활동이 그토록 유해하다고 생각했습니까?
  『…하… 이건 내가 했다고… 스스로 말하는 전제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고, 내 입장을 한번 잘 들어봐 주세요. 내가 1972년 5월24일날 金日成이를 만났을 때 金日成이 하는 말이 『남쪽에는 통일방식을 달리 하는 민주인사들도 많데요』 이런 말을 합디다. 그때 내가 상당히 쇼크를 받았어요. 역시 통일문제에 대한 의견이 이러쿵저러쿵 나오는 것은 우리의 약점이구나 하는 것을 내가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 뒤 내가 국회에 증언 나가서 金日成이가 말한 것을 솔직히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통일에 대해서는 발언을 상당히 주의해야 되겠다는 것을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金大中씨가 미국에서 소위 「한국민주화촉진국민회의」를 만들어가고 있을 때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연설도 하고, 그러다 보니까 모이는 사람들이 다 민주인사는 아니고 정말 위험스러운 인사들도 있었어요… 이 분이 캐나다에도 가도 또 그런 것을 만들고, 또 이제 일본에도 만들고, 장차에는 유럽에도 만든다는 이야기도 있었어요. 또 그 중의 어떤 사람들은 국민회의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망명정부를 세우자 하는 이야기를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나, 솔직히 그때 남북대화에 미쳤어요. 내 목숨을 걸고 평양에 가서 인제 전쟁을 막고, 그리고 통일의 길로 서서히 나아가자는 일념에서 어떻게 하면 통일을 성공시키느냐 하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그 무렵일 거예요. 월남에서 월남과 호지명 군대 간의 회담이 끝내 베트콩이 참여하는 3者회담으로 갔는데, 그 당시 LA나 일본에 보내지는 북한지령은 자꾸 그 조직에 적극 참여하라든지, 관심을 표명하라는 지령이 많이 가고 있었습니다. 또 상당한 反韓신문에서도 그런 방향으로 연락이 가는 첩보를 내가 탐지했고… 그럴 때, 나는 남북대화를 해오는 당사자로서 느끼기에 이렇게 가다가는 망명정부가 이루어지든 안 이루어지든 간에 그건 다음 문제로 치고, 자칫 잘못하면 金日成이가 남쪽의 박정희뿐 아니라 해외에 있는 민주인사까지 포함시켜서 3者회담으로 나가자 하는 그런 가능성이 눈에 환히 보였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내가 이북 놈들하고 대화할 때마다 통일에 대해서 딴 의견이 남쪽에 있지 않느냐 하는 이야기를 아주 밥먹듯이 해요. 그것이 나에게는 큰 고충이고, 이러다가는 남북대화는 어렵다, 또 해외에서 무슨 조직이든 汎세계적인 조직을 만들어서 反韓활동, 反정부활동을 한다는 것은 대화를 위해서는 도움이 안 된다,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 없기를 바라지만 일부인사가 주장하는 대로 망명정부가 이루어졌을 때는 이 나라 꼴이 어떻게 되겠느냐 하는 이러한 기우도 나에게는 사실상 없지 않았어요. 그러한 점을 고려해서 결국은 윤리적으로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이 사람을 본국으로 데려와야 되겠다 하는 그러한 생각이 참 많았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납치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당시 해외에서의 金大中씨 활동이나 조직을 너무 과대평가하신 것은 아닌가요? 당시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金大中씨의 그 단체는 조직이나 기구를 제대로 갖춘 상태가 아니었잖습니까?
  
  
  『첩보보고가 들어왔어요…』
  
  
  
  ―첩보에는 어떤 경우 과장이 있지 않습니까?
  
  『과장이 있었는지 모르지… 여하튼 그런 보고를 읽었어요. 물론 내가 조금 과대평가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사람이 미치다 보면 조그마한 것도 크게 보이게 마련이에요. 내가 남북대화를 하다 보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유리한 고지에 서느냐, 하다 보니까 우리의 취약점이 크게 보일 수 있는 법이에요』
  
  ―그 무렵 金大中씨가 공화국 연방제를 주장한 것도 납치 사건의 한 요인이 됐습니까?
  
  『그해 6월23일 金日成이가 체코 총서기인가 뭔가가 평양에 왔을 때 고려연방제를 말한 것은 자기 나름대로의 철학에 의한 통일론인 만큼 그것을 시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필이면 이름을 왜 공화국 연방제를 내걸어요. 나는 진짜 기절할 정도로 쇼크를 받았어요. 이제 남북대화는 다 틀렸구나 하는… 나는 너무나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그 사람이 아마 틀림없이 일본에 와서인가 일본에 오기 직전인가 아니었나 싶어요. 지금도 그 말 들으면 온몸에 소름이 끼쳐요. 어떻게 할 수가 없나 봐요』
  
  
  李厚洛 중앙정보부장은 1973년8월8일 金大中씨를 도쿄에서 납치하여 서울로 데려온 이유에 대해서 朴대통령의 특명을 받아 진상조사를 하고 있던 李龍澤 수사국장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김대중씨가 친북인사들과 함께 한민통을 결성하여 사실상 망명정부로 만든다는 첩보가 있었다. 이렇게 되면 이 망명정부가 김일성과 직접 대화하여 연방제 통일을 획책하고 우리 정부를 괴뢰시하려 할 것이다. 북한정권이 金大中씨의 평양 방문을 추진하고 있다는 정보도 들어왔다. 친북인사들이 김대중씨와 조총련 의장 한덕수의 면담을 주선하고 있다는 첩보도 있었다. 우리로서는 김대중씨를 한민통 결성 이전에 데리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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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정권의 지령으로 만들어진 韓民統의 초대 의장으로 추대된 金大中씨는 취임하기 직전인 1973년8월8일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서 도쿄에서 납치되어 강제 귀국당했다. 1981년 우리 대법원은 金大中씨의 한민통 관련 역할을 국가보안법상의 「反國家단체 구성 및 수괴」로 확정했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약칭 韓民統-편집자 注) 일본본부는 정부를 참칭하고 대한민국을 변란할 목적으로 불법조직된 反國家단체인 북괴 및 反國家단체인 재일조선인 총연합회(편집자 注 - 약칭 조총련)의 지령에 의거 구성되고 그 자금 지원을 받아 그 목적수행을 위하여 활동하는 反國家단체라 함이 本院의 견해로 하는 바이오(하략)」라고 했다.
  月刊朝鮮은 1998년에 「金大中의 韓民統 조직 및 내란 음모 사건」 수사·재판기록을 구할 수 있었다. 金泳三 정부 때 이뤄졌던 12·12사건 및 5·18사건 재판 때의 참고 자료로서 金大中 사건 기록이 법정에 제출되었고 이를 계기로 하여 이 미공개 자료가 우리 손에 넘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 주목할 만한 자료가 駐日한국 대사관에서 1980년 여름에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로 보낸, 영사증명서가 붙은 「조총련·한민통 일본 본부·金大中 관계」에 대한 심층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를 육군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로 보낸 梁一根(계엄사 합동수사본부 소속 육군준위)작성 보고서에 의하면 1980년 7월3일에 합동수사본부가 駐日 한국 대사관에 한민통 일본본부, 同 기관지 民族時報, 同 중요구성 간부들의 성격과 활동상황에 대하여 조회를 했고 그 回報로서 온 것이 이 보고서란 것이다. 영사증명서가 붙은 것은 법정에 제출될 때 이 문서의 공신력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다.
  이 韓民統 일본본부 보고서는 200자 원고지로 약 400장이나 된다. 駐日대사관에 근무하는 정보부 요원들이 그동안 축적했던 정보철을 근거로 하여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 駐日대사관의 보고서가 중요한 것은 이 자료가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되어 金大中 피고인에게 유죄를 확정짓는 핵심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 자료는 李厚洛중앙정보부장이 왜 金大中씨를 납치하여 데리고 오도록 지시했는가 하는 의문을 푸는 데 있어서도 중요 자료이다. 그 핵심 부분을 요약한다.
  
  『郭東儀는 북한 간첩』이라 단정
  
  이 보고서는 金大中씨와 함께 한민통 일본본부(이하 韓民統으로 약칭)를 만든 郭東儀(곽동의), 裵東湖(배동호), 金載華(김재화) 등 핵심 요원들이 본인들은 민단 비판 세력으로 위장하고 있으나 실은 조총련의 조종을 받는 북한 간첩·친북인사들이라고 단정하는 한편 그들의 조직적, 사상적 뿌리를 세밀하게 소개하고 있다.
  裵東湖, 郭東儀 등은 한민통 조직 전부터 「조총련의 사주를 받아 反민단 세력을 규합하여 민단유지간담회를 조직, 주한미군 철수 등 북괴활동에 동조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는 「1970년 4월경 곽동의는 민단유지간담회 회원 중 북괴 간첩인 尹孝同의 안내로 북해도 하코다데 해안에서 북괴 공작선편으로 入北하여 對南공작 지령을 받고 同年 5월경 歸日하여 民團 파괴활동에 박차를 가했다」고 주장했다. 郭東儀는 나중에 金大中이 의장으로 추대된 한민통에서 조직국장이 된다. 이 보고서는 이들이 金大中씨에게 접근하여 한민통을 결성하기에 이르는 과정을 이렇게 썼다.
  
  1.「1971년 1월경 배동호, 곽동의 등은 북괴 지령에 의거하여, 한국 과학기술처에서 교토대학에 유학중인 李東一에게 3000만 엔의 자금 제공을 전제로 미군을 몰아내야 한다고 교양하는 등 포섭공작을 진행했다」
  2.「동년 7월 民團 조직을 근본적으로 와해하기 위해 베트콩파를 주축으로 한 反민단 청년 학생을 동원, 민단 東京 본부를 습격하여 유혈 난동의 참극을 연출하는 등 그 정체가 탄로되어 배동호, 김재화, 곽동의, 정재준, 김종충, 조활준, 김은택, 김군부 등 주동 분자들이 民團에서 제명 또는 축출당하자 노골적으로 親북괴세력으로 표출되어 非합법 투쟁으로 급선회하였음」
  3.「이와 같은 과정에서 1971년 1월경 新民黨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金大中이 일본에 오자 배동호는 고양일 등을 통해 金大中에게 접근하여 同人의 체류비, 여비를 지원하는 등 인연을 맺어 그 후 金大中이 일본에 올 때마다 접촉, 교분을 다졌음」
  4.「1972년 10월11일 지병 치료차 일본에 온 金大中은 同年 10월17일 유신을 맞이하자 귀국을 단념하고 해외에서 전체동포들을 총집결시켜 정부 타도를 목표로 한 조직적 투쟁을 전개할 것을 선언하여 배동호, 곽동의, 김재화, 정재준, 조활준, 김종충 등 베트콩파 중심 인물들의 호응을 얻는 한편 7월6일경 미국 워싱턴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회 미국본부를 결성한 데 이어 同年 7월10일경 일본에 돌아와 배동호 등 베트콩파 중심 인물들을 규합하여 한민통 일본본부 결성에 착수하였음」
  
  베트콩派 人士들과 韓民統 조직
  
  駐日한국대사관의 보고서는 金大中씨가 배동호, 곽동의, 김재화 등이 조총련의 조종을 받는 인사들이란 사실을 알았을 것이라고 기록했다.
  「특히 1973년 3월경 당시 민단 가나가와 현본부 의장 박성준이 金大中에게 배동호, 곽동의는 조총련과 합작하여 베트콩파와 한 패거리가 되어 反韓 활동을 하면서 民團을 망치고 있다는 경고를 한 바 있으므로 同 배동호, 곽동의를 비롯한 베트콩파들은 북괴 또는 조총련의 사주를 받아 민단을 와해하고 반국가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보며(下略)」
  이 보고서는 「1973년 8월4일경 東京 팔레스 호텔에서 金大中 주재하에 위 배동호, 김재화, 정재준, 조활준, 김종충, 양상기 등이 회합하여 한민통 일본본부의 정강정책 및 임원구성을 확정함에 있어」 5항으로 「한반도를 중립화하고 남북 연방제에 의한 점진적 통일을 실현한다」고 했다고 기록했다. 이 보고서는 또 「임원 구성은 의장에 金大中, 부의장에 김재화 정재준 김용원, 상임고문에 배동호, 고문에 양상기 김재술 유석준, 조직국장에 곽동의, 사무국장에 조활준, 국제국장에 김종충 등으로 결정했다」고 썼다.
  이 보고서는 한민통의 성격을 이렇게 요약했다.
  「한민통은 표면상으로는 反민단 투쟁 단체인 양 위장하고 있으나 金大中의 구상에 의하여 결성되어 조총련의 배후 조종을 받고 있음. 한민통을 주도하는 곽동의는 북괴에서 간첩교육을 받은 간첩이고, 배동호 역시 곽동의와 사상적으로 밀착한 용공분자로서 조총련과 연대 투쟁체제를 구축하고 북괴의 목적 사항 실행을 위해 각종 행사를 공동 개최하는 등 대한민국 전복과 적화통일을 위하여 공동투쟁을 전개하고 있음」
  
  한민통 자금 내역
  
  이 보고서는 조총련이 韓民統에 대해서 지원한 자금의 내역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쪾「조총련은 한민통에 反韓 데모 동원, 反韓 집회 개최, 북괴 및 조총련 선전 활동 등 비용으로 활동 高潮期(고조기)인 1973년 8월~1975년 12월은 매월 1000만 엔, 최성황기인 1976년 1월~1977년 12월은 매월 1000만 엔, 퇴조기인 1978년1월~1979년 7월은 매월 500~1000만 엔, 再고조기인 1979년 8월~1980년 2월은 매월 1000만 엔 등을 지원하여 왔음」
  쪾「1971년 3월25일 곽동의는 조총련 중앙위원회 부의장 김병식으로부터 민단 와해 공작 및 대남공작 사업 자금 5000만 엔을 받았다는 확실한 첩보가 있음」
  쪾「金大中에 대하여는 1972년 10월~1973년 8월 베트콩파인 김종충이 金大中의 한민통 조직 등 활동비조로 10여 차례에 걸쳐서 약 1000만 엔, 배동호가 金大中의 滯日 호텔비 및 한민통 조직 자금 보조비 명목으로 5차례에 걸쳐 500만 엔, 渡美 여비 1회 2000달러, 정재준 등 베트콩파 사업가들이 金大中의 체류비, 활동비, 여비 등 명목으로 4차에 걸쳐 약 2000만 엔 등을 제공하여 金大中은 同자금으로 일본 한민통 및 미국 한민통 조직 자금으로 사용하였다고 하며, 그 중 김종충 및 배동호가 金大中에게 제공한 자금은 同人 등이 특별한 사업이나 수입원이 없는 자들인 것으로 보아 조총련에서 지원한 것이 확실시되고 있음」
  駐日대사관의 영사 증명 보고서는 金大中씨와 협력하여 韓民統 일본본부를 조직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하였던 郭東儀, 裵東湖, 金載華는 조총련의 조종을 받는 북한 간첩이나 하수인들이라고 기록하고 이들의 신상 정보를 자세하게 실었다.
  郭東儀는 광복 직후 「남로당에 가입 활동하다가 1948년 12월 남해군 인민위원장 박종환의 지령에 의해 밀항 渡日」했다고 한다. 그는 리츠메이칸 대학에 재학중이던 1950년 9월경 조총련 요원에게 포섭되어 「재일 학도의용군으로 한국전에 참전하여 작전 방해 공작 후 월북하라」는 지령에 의해 입대했다고 한다. 그는 부평 미군 탄약 중대에 복무중 기회를 잡지 못해 同 부대에서 탈영하여 再밀항 渡日했다고 이 보고서는 기록했다.
  곽동의는 1960년경부터는 조총련으로부터 月 10만 엔의 보수를 받으며 民團 조직 와해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70년 4월경 북한 간첩 윤효동에게 포섭되어 북괴 공작선편으로 입북, 간첩 교육과 민단 파괴, 대남 공작 지령을 받은 후 同年 5월에 귀환한 그는 조총련 부의장 김병식으로부터 민단 와해 및 대남공작 자금으로 5000만 엔을 받았다는 것이다.
  「郭東儀는 1973년 7월13일부터 8월4일 사이 배동호, 조활준, 김종충 등을 조종하여 金大中과 한민통 일본본부를 결성하도록 하고 자신이 同 조직국장에 취임하였다. 1977년 8월13일 조총련 중앙본부로부터 그간 한민통이 조총련의 의도대로 효과적인 反韓 활동을 전개하여 왔고 북괴가 의도하는 민주·민족통일 해외 한국인 연합을 결성하여 연대 투쟁 체제를 구축하는 데 공헌한 대가로 특별자금 5000만 엔을 받아 개인 주택 구입에 사용함으로써 비난을 받은 사실이 있음」
  
  밀항한 남로당 간부 裵東湖, 金大中에 접근
  
   배동호는 8·15 해방 후 경남 진주에서 남로당 간부로 활동하다가 1949년 初경 밀항, 渡日하여 조총련과 연계하여 反韓활동을 펼쳤다는 것이다. 그도 郭東儀와 마찬가지로 1971년 1월 조총련 중앙부의장 김병식으로부터 민단 와해공작 자금 5000만 엔을 받았다고 駐日대사관의 영사증명서 보고는 주장했다. 이 보고서는 金大中과 배동호의 관계를 자세히 적고 있다.
  「1971년 1월 하순경 일본 동경 소재 데이고쿠 호텔에서 당시 渡日중에 있던 고양일 등의 소개로 金大中과 접촉하여 同 김대중 미국 여비조로 미화 3000달러를 조달, 제공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 후 金大中이 渡日時마다 접촉. 1971년 11월 도쿄 신주쿠 소재 옥호 미상 통닭집에서 베트콩파 정재준, 조활준, 곽동의 등과 같이 滯日중이던 金大中을 초청하여 대통령 낙선을 위로하고 同人의 反정부 투쟁을 격려. 1972년 10월~1973년 8월간 金大中의 일본 체류비 및 한민통 조직 자금 보조비 명목으로 5차에 걸쳐 500만 엔 제공(同자금은 조총련에서 지원한 것이 확실시되고 있음)하는 등으로 金大中과 친숙한 처지임」
  
  한민통 사람들 가운데 최연장자인 金載華는 다채로운 前歷을 가진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경남 밀양군에서 1903년에 출생한 그는 1925년에 일본 上智대학을 1년 중퇴했다. 그는 1950년부터 3년 간은 한국 측인 在日 거류민단 단장으로 있었다. 駐日 대사관 보고서는 「金載華는 1945년 10월경 조총련의 前身인 재일 조선인 연맹 중앙위원 겸 아키다 현 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1946년 10월경 조선인 거류민단으로 위장침투하였다」고 적고 있다. 1967년 김재화는 「조총련 중앙부의장 이심철, 同 중앙위원 서종실, 同 사무국장 김병식 및 배동호, 곽동의, 윤혁효 등과 수차에 걸친 모의 끝에 북괴 對南전략에 따라 대한민국 국회에 침투하기로 모의, 新民黨 전국구 후보에 출마할 것을 결정하고 同人들이 모금한 3500만 엔을 국내에 반입함으로써 국내에서 구속, 입건되었다」.
  金載華는 「同 사건 판결에서 무죄 선고되었으나 同 판결시 (재판부가) 동 자금을 배동호, 곽동의 등이 모금하여 제공한 것을 인정하면서 同人 등이 조총련과 연계 활동한다는 점을 입증할 수 없다는 취지로 그 이유를 들었으나 同人들의 정체가 확인된 지금은 同 자금이 조총련의 자금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이 보고서는 기록했다.
  
  郭東儀는 金載華의 사위, 김종충은 金大中의 국민학교 동창
  
  金載華는 또 「1971년 5월 제7대 국회시 新民黨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을 때부터 金大中을 알게 된 이래 한민통 일본본부 발족 후에는 金大中 의장의 不在 기간중 의장대리직에 취임했다」. 그는 「1980년 3월1일 金大中이 복권되어 정치활동을 재개함에 따라 同人의 한민통과 관련된 취약점을 은폐하려는 수단으로 同年 3월24일 임시중앙대회를 개최하고 金大中을 한민통 의장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자신이 의장직에 취임하였다」. 한민통의 조직 책임자인 郭東儀는 金載華의 사위이다.
  쪾한민통 일본본부 사무국장 趙活俊은 경남 남해 출신으로서 1948년에 밀항, 渡日한 인물. 와세다 영문과를 졸업했다. 그는 「1969년 5월경 당시 일본 교토 대학에 재학중이던 경향신문사 기자 양준용의 소개로 金大中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 「金大中을 裵東湖의 활동조직에 연계시키고자 연락 역할을 담당하면서 金大中의 滯日중 매주 1~2회 회합을 주선하는 등 교량적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1971년 11월경에는 도쿄 신주쿠 소재 통닭집에서 배동호, 곽동의, 정재준 등과 金大中의 대통령 낙선 위로연을 주선하는 등 金大中과 친숙한 처지」라고 駐日 대사관 보고서는 주장했다.
  
  한민통 일본본부 부의장 鄭在俊은 경북 경산 사람. 그는 「1961년 5월경 당시 조총련 산하 통일평론사 사장이던 서종실의 배후 조종하에 배동호, 곽동의 등과 같이 당시 소속하고 있던 민단內 소위 유지간담회를 조직, 민단 와해 활동을 전개했고, 1972년 10월~1973년 8월 베트콩파 사업가들과 야합하여 金大中의 일본 체류비, 한민통 조직 활동비, 여비 등 명목으로 4차에 걸쳐 약 2000만 엔을 지원하였다」는 것이다.
  
  韓民統 일본본부 국제국장 김종충은 金大中씨보다 두 살이 많은 전남 신안군 하의면 출신이다. 그는 명치대학 상학부를 졸업한 뒤 인쇄업을 경영하였다.
  駐日한국대사관 보고서는 「(김종충은) 1972년 10월~1973년 8월까지 金大中이 滯日(체일)중에 同人의 체제 경비 및 한민통 경비조로 日貨 1000만 엔을 조총련으로부터 조달하여 제공하였고 나고야 거주 前示 베트콩파 박병채 등 친지 4~5명으로 하여금 日貨 400만 엔을 제공하도록 주선하여 한민통의 활동자금을 제공하였다」고 한다.
  
  駐日 대사관 정보부팀이 작성한 문건
  
  이 보고서의 끝에는 駐日 대사관의 일등 서기관 鄭樂衆(영사) 명의로 「위의 사실을 증명함」이라는 영사증명이 붙어 있다. 당시 駐日대사는 金正濂씨(朴 대통령 시절의 비서실장)였다. 金씨는 『그런 종류의 문서는 정보부 공사가 정보부 본부와 직접 연락하여 처리하지 대사에게 보고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당시 駐日한국 대사관의 정보부 공사는 이상구씨. 그는 『그 문서를 본 적이 없다. 아마도 대공수사관이던 鄭樂衆씨가 작성했을 것이다』고 말했다.
  鄭樂衆씨는 『내가 부하 직원들을 시켜서 함께 만든 보고서이다』고 말하고 『지금도 그 보고서의 정확성을 믿는다』고 했다.
  上記 보고서는 駐日 대사관의 정보담당관들이 다년간 韓民統을 관찰하면서 축적한 정보를 정리한 것이지 갑자기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준다. 조총련의 자금이 한민통으로 지원된 부분에 대한 정보는 구체적인데 한민통 내부에 정보부의 정보망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 2019-05-12, 16:5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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