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그의 시대(1) - 만주에서 돌아오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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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正熙와 그의 時代① - 파란만장한 한 생애의 실증적(實證的) 연구
  
  가난 속에서 태어나 대구사범과 교사를 거쳐 만군장교가 된 朴正熙는 만리장성에서 무슨 활동을 했던가. 비밀독립군설의 진위와 누님 朴在熙가 털어놓는 [내 동생 朴正熙]
  滿洲에서 돌아오다
  
  <1987년 1월 월간조선>
  
  편집자 주
  
  朴正熙란 이름은 한 시대를 대표하고 있다. 그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당대의 한국인은 그의 영향권 아래서 역사상 변화가 가장 빨랐던 한 시대를 살았다. 朴正熙와 그의 시대는 바로 오늘의 삶의 대전체였던 것이다. 朴正熙의 사후(死後) 그에 대한 기사가 숱하게 쏟아져 나왔다. 그의 생전에 막혔던 정보의 자연적 유출현상이었다. 이제, 朴正熙에 대한 칭송과 비판의 교차도 어느 정도 이뤄졌으니, 객관적 입장에 서서 풍설과 사실을 가려내어 이 [작은 거인]을 제대로 그려볼 시점이 된 것 같다. 현대사의 고비고비에서 朴正熙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과의 인터뷰 樗?중심으로 하여 朴正熙와 그의 시대를 실증적으로 탐험하려고 하는 것은 감상적 회고담을 찾자는 게 아니라 [내일을 향한 증언]을 발굴하기 위함이다.
  
   동생의 출생·죽음의 입회인 박재희(朴在熙)
  
  1979년 10월27일 새벽 대통령특별보좌관 박진환(朴振煥)은 崔광수 의전수석비서관으로부터 {빨리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청와대로 가는 길에 탱크를 두 대나 보았다. 청와대 입구에선 낯선 군인이 검문을 했다. 불안해졌다. 청와대 본관으로 가니 직원들이 접견실에 병풍을 치고 탁자를 갖다붙이고 있었다. 마침 林芳鉉대변인이 보여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각하께서 돌아가셨읍니다}
  {어디서…}
  {궁정동에서? 朴특보는 더 물을 수가 없었다. 청와대 현관으로 나섰다. 밤공기는 싸늘했다. 누군가가 들것을 들고 들어왔다. 하얀 시트로 덮여 있었다. 키가 작은 것을 보고 朴특보는 {각하다}고 생각했다. 접견실 병풍 뒤에 시신을 안치했다. 그 5년 전 陸英修여사의 몸이 눕혀졌던 바로 그 자리였다. 새벽3시쯤 촌 할머니 같은 분이 달려왔다. 관 앞에 퍼져 앉더니 {정희야! 니가 이게 우짠 일고…} 하면서 통곡했다. 이 할머니는 朴대통령보다 네 살이 많은 바로 위의 누님 朴在熙였다.
  
  {동생은 그때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정장으로 잠자듯 관속에 누워 있었읍니다. 머리의 총상이 없다면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같이 편안한 표정입디다. 시신을 덮은 태극기가 너무 작아 발이 나와요. 큰 것을 가져오라고 시킨 뒤 다리를 만져보니 아직도 굳지 않았더군요. 원통하고… 정치는 안해야 하고 생각했읍니다} 62세에 죽은 동생을 지켜본 것은 朴正熙의 일곱형제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 朴在熙 할머니였다. 朴할머니는 62년 전 朴正熙의 출생 때도 목격자였으니 파란만장한 동생의 생애를 그 시종에서 다 입회한 셈이 된다. 필터회사 사장인 아들 韓熙昇(36)부부와 함께 서울시 서대문구 창천동?2층 주택에서 조용하게 살고 있는 朴在熙할머니(73세)는 지난 10월6일 필자에게 동생을 가끔 [각하]라고 부르면서 담담하게 이야기해갔다. 朴正熙는 청소년기를 통해서 나이차이가 가장 작은 누님 朴在熙와 친했었다고 한다.
  
   아기 지우려고 발버둥친 어머니
  
  {며느리까지 보신 어머님이 정희를 임신하셨을 때는 쉬희(貴熙)언니가 은용표(殷龍杓)씨와 결혼한 뒤였읍니다. 언니는 정희가 난 해에 딸을 낳았지요. 나이 마흔다섯에 임신한 어머니는 그 나이에 딸과 함께 아기를 밴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또 집안이 원체 가난하여 식구가 하나 더 느는 것이 큰 일이었읍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기를 지우려고 백방으로 얘를 썼읍니다. 간장을 한 사발이나 마시고 앓아 누우셨고, 밀기울을 끓여서 마셨다가 까무라치기도 했답니다. 아무리 해도 애기가 뱃속에서 계속 노니까 수양버들 강아지의 뿌리를 다려 마시고는 정신을 잃어버렸어요. 한 닷새만에 건강을 되찾았는데 아기가 놀지 않더랍니다. 이제 됐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지나니까 또 놀더래요. 그 뒤 어느날 어머니는 일부러 디딜방아의 머리를 배에다 대고 뒤로 자빠져버렸어요. 낙태를 시키려고 스스로 방아에 깔려버린 것이지요. 그때 나는 다섯 살이었는데 이 광경을 보고 어머니가 죽는다고 울고불고 했답니다.
  
  어머니는 허리를 못쓸 정도로 다치셨는데, 뱃속 아기는 여전히 놀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할 수 없다, 아이가 태어나면 솜이불로 둘둘 싸서 아궁이에 던져버리리라, 작심하고 아기 지우는 일을 포기했답니다. 정희가 태어나던 날의 기억은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그날 저는 집에서 혼자가 되어 놀고 있었읍니다. 갑자기 어머니 생각이 나서 [엄마야!] 하고 찾아도 안 보여요. 방문을 열어 보니까 어머니가 이불을 덮어쓰고 끙끙 앓고 있지 않겠읍니까. 저는 어머니가 또 아기 지우는 약을 잡수시고 그러고 계시는 줄 알고는 겁이 나서 아버지를 찾으러 우리 논으로 뛰어갔읍니다.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꽃신을 신고 달렸읍니다. 돌밭에 넘어져 발등에서 피가 솟구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 5리는 뛰었을 거예요. 나락을 베고 계시던 아버지가 달려오시더니 대님을 풀어서 저의 상처를 동여맨 뒤 업고서 집으로 왔습니다}
  
   화로에 쳐박혀 화상 입다
  
  {삽짝 문을 들어서는데 아기울음이 들리더군요. 아버지와 함께 방으로 뛰어들어가 보니 어머니는 아기를 깨끗이 씻어 옆에 뉘여 놓고는 불덩어리같은 당신의 몸을 이불로 감싼 채 앓고 계셨읍니다. 아기가 보얗고 예쁘던 기억이 납니다. 어머니는 젖꼭지가 말라붙어서 정희는 모유 맛을 모르고 자랐읍니다. 밥물에다가 꽂감을 넣어 끓여서 그 물을 숟가락으로 정희에게 떠먹였읍니다. 이게 우유 대용이었읍니다. 변비가 생겨 혼이 난 적도 있읍니다. 정희가 두 살 때, 아직 기어다닐 적인데 어머니가 정희를 큰 형님(장남 東熙씨의 아내)에게 맡겨놓고 출타를 하셨어요.
  
  형님은 바느질을 하고 계셨던 것 같은데 정희가 기어다니다가 문지방 아래로 떨어졌어요. 그 아래에는 화로가 놓여 있었는데 정희는 벌건 화로로 쳐박히면서 한 바퀴 굴렀어요. 시뻘건 숯을 온몸에 뒤집어쓰고 말았어요. 머리카락과 눈썹이 다 탔어요. 형님과 나는 정희의 얼굴에서 숯을 털어내고 입속에 들어간 숯을 끄집어내는데 정신이 팔려 양쪽 저고리의 소매에 불이 붙어 타들어가는 것을 뒤늦게 알았어요. 저고리를 찢다시피하여 불을 껐는데 양쪽 팔뚝이 심한 화상을 입었읍니다. 아버지는 황토를 물에 짓이겨 이 상처에다가 바르고는 베조각으로 감아놓았어요. 화기가 빠지고 한 달만에 겨우 딱지가 앉았는데, 그때의 화상 흉터는 정희가 죽을 때까지 남아 소매가 짧은 옷을 입지 않았지요. 이 사건 뒤에 보았던 정희가 까무잡잡하게 되더군요}
  
   박성빈(朴成彬), 동학란 가담인가, 진압인가
  
  朴正熙는 1917년 11월14일(음력 9월30일)에 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동에서 났다. 그가 났을 때 아버지 朴成彬은 46세, 어머니 백남의(白南義)는 45세였다. 호적상 장남은 朴東熙로 당시 22세였다. 실은 그 위에 남자아이가 하나 났으나 두 살 때 죽어 호적에 올려지지 않았다. 朴正熙의 밑으로 형제들이 대략 3∼4세 터울로 났다. 차남이 朴武熙, 장녀가 朴貴熙, 3남이 朴相熙, 4남이 朴漢生 차녀가 朴在熙, 5남이자 막내가 朴正熙였다. 朴正熙의 바로 위의 형이 漢生은 결혼을 안한 상태에서 19세 때 죽었다. 朴正熙가 났을 때 朴東熙는 이미 결혼하여 같이 살고 있었고 朴貴熙는 칠곡의 殷씨 문중으로 시집가서 살고 있었다.
  
  朴正熙가 1970년 4월26일에 직접 쓴 [나의 소년시절](1984년 5월로 월간조선에 실림)이란 원고에는 아버지에 대해서 쓴 대목이 있다. [선친께서는 소시에 무과과거에 합격하여 효력부위(效力副尉)란 벼슬까지 받았으나 당시의 부패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반항도 하여 20대에는 동학혁명에도 가담하였다가 체포되어 처형직전에 천운으로 사면되었다고 한다. 선친께서는 가사에도 관심이 적고 호주(豪酒)로 소일하면서 가산을 탕진하였다. 하는 수 없이 외가의 양해를 얻어 외가의 선산인 상모동의 약1천6백평짜리 위토(衛土)를 소작하기로 하여 상모동으로 이사를 했다]
  
  朴成彬의 행적에 대해서는 엇갈리는 기록이 많다. 정광모(鄭光模)의 [청와대](1967년)에는 朴成彬이 동학군을 진압한 공로로 강원도 영월의 군수로 임명됐다고 쓰여져 있다. 대통령공보비서관이었던 김종신(金鍾信)이 쓴 [朴正熙대통령](1970년)에는 朴成彬이 동학군의 지도자로 가담했다가 체포됐으나 고종의 사면령에 의해 출옥했다고 적혀 있다. 1964년에 朴成彬의 무덤에 세워진 비석엔 그가 무과에 급제, 영월현감에 임명됐으나 동학란이 터져 부임하지 못했다고 새겨져 있다. 1977년에 나온 [가까이에서 본 朴正熙대통령](송효빈.宋孝彬)에는 朴成彬이 부과에 급제, 평남의 영변현감으로 임명됐으나 왕조의 부정부패 때문에 실제로 근무한 적은 없다가 적혀 있다.
  
   좌절한 아버지의 민첩한 적응
  
  朴成彬이 합격했다는 효력부위는 서반(西班 무반)의 정9품 자리다. 그러나 현감은 동반(東班 문반)의 종6품자리다. 아무리 행정질서가 엉망인 때라 해도 짧은 기간에 무반에서 문반으로, 다시 네 품계를 뛰어오를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朴正熙도 무과급제에만 언급한 것으로 보아 벼슬에 실제로 오르지는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朴在熙할머니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는 벼슬하시겠다고 논밭을 팔아서 서울에 자주 올라가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산을 많이 날렸다고 들었어요. 동학군에 가담했다가 살아나오셨는데, 워낙 말씀을 잘했기 때문이랍니다. 3백명 중에서 혼자서만 살아나셨다는 거에요}
  
  朴正熙가 [나의 소년시절]에서 [동학란]이라 쓰지 않고 [동학혁명]이라고 쓴 것은 주목할 만하다. 동학란이 혁명으로 재평가받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에 들어와서였고, 그 용어도 동학운동·동학농민전쟁·동학혁명 등으로, 정리가 아직 돼 있지 않을 때에 [동학혁명]이라면서 아버지의 가담사실을 밝힌 것은 朴대통령의 의식구조를 엿보게 하는 하나의 힌트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70년대 이후엔 朴成彬이 동학군을 토벌했다는 주장은 사라지게 된다.
  
  어쨌든 朴成彬이 동학군에 관련되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가 현감 등 벼슬자리에 있지 않았다면 동학군을 진압하는 쪽이 아니라 가담하는 쪽에 섰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 고령 朴씨 28세손으로 알려진 朴正熙의 집안은 조부 때까지는 경북 성주의 철산이라는 마을에서 살았다. 선대에는 무관들이 많이 났다고 하나 후대에는 벼슬과는 인연이 멀어진 집안이었다. 朴成彬은 선산 약목에 사는 수원白씨문중의 처녀한테 장가를 들면서 약목으로 이사를 왔다가 다시 상모동으로 옮긴 것이다. 朴成彬은 단순한 농부는 아니었던 듯하다.
  
  시국에 민감하고 권력의지도 있었으나 일찍 좌절하여 시골에서 실의의 나날들을 보낸 사람이었던 것 같다. 양성철 교수(켄터키 대학)는 [한국의 두 체제―朴正熙와 金日成](1981년 미국 Sckenkman출판사)이란 연구서에서 [朴成彬은 농부도 아니고 양반에도 끼지 못했다. 이런 사회적 신분이 그로 하여금 새로운 변화, 즉 한국의 일본식민지화에 민감하게 적응할 수 있게끔 했을 것이다. 그의 두 아들을 서당이 아니라 신식학교에 보낸 것이 그 증거다]고 썼다. 양 교수는 또 朴正熙가 많은 형제 중에 막내로 태어난 것이 그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나이 많고 힘센 사람들 사이에서 자라면서 사회를 약육강식의 세계로 파악하게 됐고, 여기에서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행동양식을 터득하게 됐으리란 분석이었다.
  
   영양실조로 밤눈 어두워져
  
  朴正熙의 큰형들은 나이로 치면 아버지뻘 되고 큰 누나는 출가했으므로 같이 어울릴 수 있는 가족은 在熙누나뿐이었다. 朴在熙에 따르면 {어머니는 뱃속의 정희를 떼려고 했던 것을 후회하시고 각별이 막내를 사랑하게 됐다}고 한다. {정희가 아홉 살 때 우리 마을의 두 어린이와 함께 구미보통학교에 입학했읍니다. 정희를 제외한 두 아이는 얼마간 다니다가 스스로 퇴학해버렸어요. 부모가 학교에 가서 철봉등 체육하는 것을 보고 와서는 저러다가 우리 아이가 병신 되겠다면서 학교에 못 다니게 하고는 서당교육을 시켰던 것입니다.
  
  우리 마을에서 학교까지는 왕복 40리였읍니다. 마을에는 시계가 하나도 없어 어머니는 동쪽에서 밝은 별이 두개째 떠오를 때에 맞추어 아침을 짓기 시작하여 정희가 등교시간을 놓치지 않게 했읍니다. 정의는 등교 때는 짚신을 한 켤레 더 차고 갔어요. 그것은 돌아올 때 신는 것이지요. 정희는 어둑할 때가 되어야 집으로 돌아왔읍니다. 어머니나 내가 마중을 나가 기다리면 저 끝에 쬐그만한 아이가 촐랑촐랑 걸어오는 거예요. 하루에 40리를 걷느라고 지쳐빠진 정희를 업고 오면 등뒤에서 쌔근쌔근 잠이 들기도 했읍니다.
  
  정희는 몸이 약했어요. 새벽밥이라 잘 먹지 못했고, 겨울엔 도시락이 꽁꽁 얼어서 먹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기도 했어요. 그래서인지 한때 밤눈이 어두워졌어요. 밤만 되면 봉사 비슷하게 되어 변소에도 못가요. 제가 업어다가 변소에 데려다 주고 데려오곤 했읍니다. 소의 지레를 먹였더니 다시 밝아졌어요. 정희가 검정고무신을 처음 신게 된 것은 5학년 때였읍니다. 아버지가 사다주셨어요. 그것을 품에 꼭 안고 자더니 다음날 학교 갈 때는 짚신을 신고 고무신은 학교에 가서 신는다고 들고 가더군요. 정희는 또 아버지에게 자그마한 갈쿠리와 지게를 만들어달라고 했어요. 공일 같은 날에는 뒷산에 올라가 빨간 갈비를 끌어모아 묶음을 만들어 두어요. 아무도 손을 못대게 해요. 이것을 차곡차곡 쌓아두었다가 어머니한테 팔아달라고 해서 돈이 생기면 공책과 연필 등을 사곤 했읍니다. 정희는 줄곧 급장에다가 1등을 했읍니다. 일요일엔 서당에 가서 한문공부도 하곤 했읍니다. 정희가 보통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저는 상주 사람 한정봉(韓禎鳳)씨에게 시집을 갔읍니다. 韓씨는 소년시절에 일본에 건너가서 토목공사로 재산도 꽤 모은 이였습니다}
  
   줄곧 1등만 한 국민학교시절
  
  朴正熙 자신의 표현을 빌면 상모동은 [한량없이 가난한 사람들만이, 90여 호가 6개 소부락으로 나뉘어져 옹기종기 살고 있는] 마을이었다. 이 마을에서 朴正熙 이전에 보통학교에 다닌 이는 朴相熙형뿐이었다. 朴正熙가 쓴 [나의 소년 시절]에는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절절한 묘사가 많다. [큰 인물은 훌륭한 어머니 밑에서 나온다]는 말이 이 가정에도 들어맞았던 것 같다. 대구사범 시절 朴正熙의 집에 놀러가 하룻밤을 묵었던 동기생 ㄱ씨는 {그의 어머니는 60이 다 되었는데도 미인이었다. 몸은 아들처럼 작았지만 빈틈없고 자상한 전형적인 한국형 어머니였다}고 말했다. 남편을 대신하여 살림을 책임진 그의 어머니는 막내를 거의 편애하였던 것 같다. 수업료를 대기 위해 어머니가 계란과 쌀을 팔고, 좋아하던 담배까지 줄여가면서 애를 썼고, 돈이 없으면 계란 몇 개를 양말 속에 집어넣어 주었는데 朴正熙는 이것을 문방구에 가져가서 학용품과 물물교환했다는 것이다.
  
  朴正熙는 4학년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 급장과 반(38명)의 수석을 독점했다. 6학년 성적표에 따르면 12과목 중 10과목이 10점 만점이었다. 체육에선 9점. 6학년 때의 수업일수는 2백49일. 그는 3일을 결석했다. 그의 건강상태에 대한 평가는 [나이에 비해 키와 체중이 떨어지고 체력도 약하다]는 것이었다. 朴正熙의 다른 형제는 모두 몸집이 컸다. 朴正熙는 보통학교 시절에 왕복 40리의 무리한 등하교 때문에 발육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 같다고 자가진단을 하기도 했었다. 그의 일곱 형제 가운데 비명에 간 사람은 취학 경력이 있는 朴相熙, 正熙 형제였다. [지식이 죽음에의 지름길]이 되기도 했던, 질풍노도의 시대에서 그래도 朴正熙의 훗날을 만든 첫째 관문은 그의 보통학교 입학이었다.
  
  유여촌이 1970년 구미동부국민학교 교장시절에 직접 취재를 하여 쓴 [소년 박정희]란 책에는 朴正熙가 가장 존경했던 相熙형이 일본고관의 구미방문에 맞추어 일본경찰에 예비검속되어 며칠간 유치장 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반일감정을 갖게 되었다는 대목이 있다. 20대 청년 朴相熙는 그때 결혼하여 구미에서 살면서 동아일보 지국장일을 보고 있었다. 지국장은 신문판매뿐 아니라 지방기사도 써올리는 기자이기도 했다. 예비검속될 정도라면 그는 일제경찰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찍혀있었다는 얘기다. 朴在熙씨는 {동생이 상희오빠의 책을 훔쳐보다가 혼이 나는 것을 몇 번 봤다}고 기억한다.
  
  재일거류 민단 단장을 역임한 조영주(曺寧柱. 78세)는 朴相熙를 이렇게 기억한다. {나는 그때 일본의 다찌메이간 대학 및 교오또 대학원을 다니며 사회주의사상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방학때 고향에 오면 친구인 朴相熙나 黃泰成과 자주 어울려 사상문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는 주로 내가 이야기를 많이 하는 입장이었다. 黃과 朴은 전혀 개성이 달랐다. 朴은 정열적이고 의분심이 강하고 민족주의적인데 黃은 냉철하고 코스모폴리탄적이었다. 黃은 골수사회주의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이지만 朴은 그렇게 되기엔 너무 순진하고 뜨거운 사람이었다}
  
   황민(皇民)으로의 인간개조 교육
  
  {동생 정희는 대구사범에 응시했읍니다. 저의 집에서는 학비를 댈 엄두도 못내고 해서 내심으로는 진학을 포기했으면 하고 있었어요. 구미보통학교의 교장과 교사들이 오히려 우리 부모를 설득하여 시험을 치도록 했읍니다. 어머니는 정희가 시험에서 떨어지도록 빌었다고 해요. 합격하고 진학 못하면 한이 생긴다고 차라리 떨어지길 바란 거지요} 1932년 1월 朴正熙는 대구사범의 입학시험에 응시, 합격했다. 그해 4월1일에 제4기생으로 입학했다. 朴正熙는 구미보통학교의 제11회 졸업생이었다. 이 학교가 생긴 이래 대구사범에 합격하기는 朴正熙가 처음이었다. 입학시험 당시 응시자는 한국 및 일본인 학생을 합쳐서 1천70명이었다. 이 가운데서 일본학생 10명 한국인학생 90명을 뽑았다.
  
  당시 전국에는 경성사범, 평양사범, 대구사범 등 3개의 관립사범학교가 있었다. 경성사범은 일본인 50명, 한국인 50명씩 뽑았고, 평양·대구사범은 9대1의 비율로 한국인을 많이 뽑았다. 사범학교의 교육목표는 가난하면서도 우수한 한국인 소년들을 뽑아서 황국신민화의 정신에 투철한 교사로 만들어놓는 일이었다. 한국소년으로부터 민족혼을 빼앗고 그대신 야마또 정신을 집어넣어 정신적 일본인으로 개조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인간개조를 위해서 학교당국은 가혹하게 한국인학생들을 통제했다. 전원을 기숙사에서 머물게 하여 24시간을 교육하고 감시하였다. 교과서 이외의 책은 학교당국의 검열도장을 받은 뒤라야 읽을 수 있었다.
  
  한국잡지 [개벽], 일본잡지 [개조], 李光洙의 [이순신] 정도도 금서였다. 이를 어기면 정학·퇴학이었고, 퇴학과 동시에 감옥으로 가기도 했다. 1백 명이 입학해도 졸업은 70명쯤 밖에 못했다. 30%가 주로 금서를 읽다가 쫓겨나는 것이었다. 방학 때 집에 가면 고등계 형사들이 수시로 찾아와서 언동이나 독서상황을 점검하고, 책들을 뒤져 낙서나 밑줄 친 부분을 조사하곤 했다. 교련도 일반 학교보다는 훨씬 심했다. 현역 대좌(대령급)가 교련책임자로 부임, 준사관학교 정도의 혹독한 훈련을 시켰다. 대좌는 서열이 교장 다음으로서 학생뿐 아니라 교사들도 감독했다.
  
  한편 교과과목은 전인교육을 지향했다. 영어, 국어(일본어), 조선어, 한시, 작곡, 경제학, 교육철학, 서예, 미술, 체육 등등. 특히 교사로서 필요한 실기교육을 중요시했다. 朴正熙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금오산아 잘 있거라]는 유행가까지 작사·작곡하고, 상당한 수준의 그림을 그리며, 피아노를 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의 교육 덕분이었다. 朴正熙는 축구부에 들었고, 군용나팔에 능했으며, 검도와 기계체조도 잘했다고 한다. 이 학교졸업생들은 {우리는 황민화 교육과 함께 폭이 넓은 교양교육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기명 유신(其命維新)]의 뿌리
  
  교사사관학교와도 같은 대구사범에서의 5년은 朴正熙의 인격형성에 큰 자국을 남겼다. 24시간 학교안에 머물렀으므로 그 5년은 일반학교의 10년과 맞먹는 경험이었다. 朴正熙의 생애를 지배해온 규격적인 삶이 시작된 것이 여기였고 행동과 생각의 틀이 잡힌 것도 이 학교에서였다고 볼 수 있다. 학교당국의 황민화교육정책이 가혹하면 할수록 반작용 또한 거세어지게 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리라. 朴正熙의 동기생들은 한결같이 가장 감수성이 예민할 때 민족차별의 실상을 경험함으로써 반일적으로 되더라고 했다. 한국인학생과 일인학생의 차별은 새벽6시기상에서 밤10시 취침때까지 항상, 도처에서, 눈에 띄게 이루어졌다. 일인학생들은 도서검열을 받지 않았고 졸업 뒤엔 봉급도 60%나 더 받았다. 朴正熙의 재학시절엔 후지하라라는 일본인 지리교사가 학생문제 담당이었다. 그의 별명은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악질 형사 자벨. 형사처럼 처신하여 학생들이 쓰고 찢어서 버린 휴지조각을 쓰레기통에서 거두어 가서 일일이 맞추어 꼬투리를 찾기도 했다.
  
  그때 대구사범엔 박관수(朴寬洙.교육학) 김용하(金容河.교육학) 염정권(廉廷權.한문) 구자균(具滋均)·김영기(金永驥.조선어) 신현길(申鉉吉.상업) 등 한국인 교사가 여섯 명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 朴正熙의 동기생들에게 가장 깊은 감명을 준 것은 金永驥와 廉廷權교사였다. 金교사는 총독부 도서관에서 일하다가 교사가 된 사람으로 그때 30대였다. 조선어학회의 한글통일안을 교재로 삼아 알뜰히 한글을 가르쳤다. 朴正熙가 그 나이로는 비교적 정확한 맞춤법으로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도 金교사의 덕분이었다.
  
  金교사는 조선어시간에, 그때는 금지되어 있는 조선사를 가만 가만히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이울곡(李栗谷)의 10만 양병설을 설명하면서 {그때 우리가 정신을 차렸더라면 임진왜란이란 치욕을 당하지 않았을 것 아니냐}고 열을 내면 선생이나 학생이 다같이 흐느껴 울었다고 한다. 4기생들이 입학하기 전해에 대구사범의 영어교사였던 현준혁(玄俊赫)은 사회주의 사상을 가르쳤다고 구속되었다. 뒤에 국내파 공산당의 거물이 되어 金日成에게 암살된 玄교사도 전기(前期)의 학생들에게 많은 사상적 영향을 끼쳤다. 朴正熙의 동기생들이 졸업한 뒤 金永驥교사와 최장윤(崔長潤) 등 학생 30여 명은 지하독립운동을 했다고 구속되어 그 중 5명은 고문으로 옥사했고 崔씨 등은 해방으로 출옥했다.
  
  廉교사도 한문시간에 민족정신을 불어넣은 분으로 꼽히고 있다. 그는 해방 뒤 여운형(呂運亨)의 근로인민당 청년부장으로 일한 민족주의자였다. 대통령시절에 돋보인 朴正熙의 서예 및 한문실력을 廉교사 덕으로 돌리는 이들이 많다. 朴正熙는 10월 유신 5년쯤 전에 어느 대구사범동기생에게 [기명유신](其命維新)이란 글을 써주면서 {이거 알지?}라고 했다. 그 동기생은 퍼뜩 廉교사가 가르쳐주던 [주수구방 기명유신(周雖舊邦 其命維新·주는 옛나라이지만 그 개혁으로써 천명을 새롭게 했다는 뜻)]이란 글귀가 생각났다. 10월 유신이 선포되었을 때 그는 비로소 朴正熙가 유신이란 개념을 오랫동안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 발상의 뿌리가 사범학교 시절에까지 거슬러 오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삼 교육의 중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배속장교 총애 받아 교련조교로
  
  朴正熙의 대구사범시절은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던 1930년대였다. 교육환경도 이에 따라 더욱 옥죄어졌다. 朴正熙의 동기생들에게 교육철학을 가르쳤던 일본인 교사 기시요네사꾸(岸米作)는 그의 회고록(1980년)에서 이렇게 썼다. [5·15사건, 국제연맹탈퇴, 2·26사건이 잇따르면서 생도지도의 강화가 시달되었다. 교사에게까지도 국민복에 전투모, 머리짧게깎기 등이 권장되었다. 현역의 배속장교가 눈을 부라리는 분위기 아래서 교육은 지도에서 훈련으로, 훈련에서 단련으로 엄격해져가기만 했다.
  
  학생들이 등교하고 없는 기숙사를 사감을 동원하여 뒤져서 사상관계 책이나 조선어 노트(그때는 조선어 사용이 금지되어 있었다)를 조사하는 등 특고경찰과 같은 행동도 했다. 기숙사로 돌아온 학생들이 흩어진 책들을 보고서 분노와 반항심을 가질 것은 당연했다] 이런 체제 아래서도 朴正熙는 모범생이었다. 그는 관비생이었다. 학급(한 학년이 50명씩의 두 학급으로 구성)석차가 상위 30∼40% 그룹에 들어 한달에 7원씩의 돈을 계속해서 받았다. 7원에서 기숙사비 5원을 뺀 2원은 용돈이다. 지금 물가로는 그 2원이 4만∼5만 원쯤에 해당할 것이다.
  
  朴正熙의 성적은 중상 정도였다. 그는 한번도 교칙을 위반한 적이 없고 교사가 시키는 대로 불평없이 따라 했다. 그의 동기생들은 朴正熙가 도무지 자기 의견을 드러내지 않는 학생이라서 일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적어도 친일적인 학생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반일감정을 말이나 행동으로써 잘 나타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朴正熙는 다른 한국인 학생들과 같이 金永驥선생을 존경했으나(대통령이 된 뒤에도 그랬다), 철저한 군국주의자인 배속장교 아리까와(有川)대좌도 좋아했다고 한다.
  
  동기생들에 따르면 아리까와는 일본육사와 육군대학을 나온 대단한 엘리트였다. 한국인뿐 아니라 한국에 나와 있는 일본인들까지도 내놓고 멸시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아리까와가 학생 朴正熙를 아주 총애했다는 것이다. 朴正熙는 교련과목에는 뛰어났다고 한다. 몸은 작지만 날쌔며 구보, 사격, 검도, 총검술 등 모든 부문에서 출중했다. 아리까와는 교련시간 때 朴正熙를 불러내 동작의 모범을 보이는 훈련조교로 부리곤 했다.
  
  동기생들은 朴正熙을 말이 적고, 눈매가 무섭고, 규칙에 잘 따르며, 다부지고, 정의감이 강한 학생으로 기억하고 있다. 학급에선 싸움선수인 石米守를 나쁜 놈이라고 나무란 일은 동기생들 사이에선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어느 동기생은 이렇게 평했다. {그는 말이 앞서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타이프였어요. 학생 때나 대통령 때나 사석에선 왜놈, 왜놈 했지만 반일운동에 적극 가담하지는 않았읍니다. 용기가 없어서라기보다는 승산이 없을 때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朴正熙를 포함한 저희들은 동방요배나 신사참배를 했읍니다. 그것을 거부하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읍니다. 거부하면 퇴학이니까요. 절은 하지만 속으로는 딴 생각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자위했습니다}
출처 : 월조
[ 2003-06-30, 14:4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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