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희는 말한다(완) - 국제공작전선의 낮과 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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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소리없는 전쟁
  
  공작원 안내자가 되다
  
  전충남(全忠男)은 하늘아래 첫 동네라는 양강도 백암군의 백두산 기슭(연안읍)에서 1957년에 났다. 아버지는 사회안전부 요원이었다. 全씨는 2남4녀 중 장남. 그는 16세 때인 1973년 11월 연암임업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 징집돼 노동당 제6부(작전부) 산하 686연락소에서 1년간 대남 공작원 교육을 받아왔다. 74년 10월에 이 연락소가 금성정치군사대학으로 명칭과 편제가 개편되면서 이 대학 기관과에 편입돼 3년간 교육을 더 받았다. 그는 77년 1월엔 이 대학 안내 반에 편입돼 1년 6개월간 다시 간첩 안내원 교육을 받고 1978년 7월에 노동당 작전부 산하 원산 연락소 53방향 안내원이 되었다.
  
  만 6년간의 교육으로 全씨는 사격. 단도던지기, 격술, 잠수, 수영에는 달인의 경지에 이르렀다. 지난 73년에 집을 나온 뒤 全씨는 한번도 휴가를 가지 못했다. 가족들과의 면회도 없었다. 가족들과 딱 한번 만나긴 했다. 1979년에 원산연락 소 전투원들이 백두산 답사를 하고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였다. 全씨의 친구가 가족에게 알려 全씨의 부모와 형제 일곱 명이 백암역에서 같은 기차에 탔다. 그들이 길주역에서 내릴 때까지 2시간 동안 차중 면회가 이루어진 것이다. 1981년 7월에 全씨는 대일 공작원을 안내하는 임무를 띠고 일본의 시마네 현 마쓰다시 해안에 상륙하였다. 80t급 공작모선이 일본어선으로 위장하여 근해에 떠 있는 사이 7명의 요원들이 자선에 갈아타 해안에서 5백m 거리까지 접근, 안내조장과 全씨는 잠수 수영으로써 먼저 상륙하였다.
  
  바위 뒤에 대기 중이던 접선대상자를 암호로 확인한 뒤 자선에 연락. 통일 전선부 소속 공작원을 상륙케하고 돌아온 것이었다. 全씨는 자신이 안내해준 공작원이 서툰 사람 같았다고 했다. 『육지로 접근하는 선상에서 불안하여 그랬는지, 저보고 남한에 친척이 있느냐고 그래요. 있으면 자기가 찾아가 안부를 전해주겠다는 취지였는데. 제대로 된 공작원은 그런 말을 하지 않지요』 1982년 6월에는 부산 청사포 해안에 침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원산을 출발하기 전에 18명의 전투원들 (안내원)은 이런 선서를 했다고 한다.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피치 못할 최악의 경우. 위대한 수령님께서 주신 정치적 생명을 영원히 빛내기 위하여 수령님께서 교시하신 바와 같이 살아도 깨끗하게 살고 죽어도 깨끗하게 죽고 너절하게는 살지 않겠다는 혁명적 인생관을 갖고 서슴없이 자폭하겠습니다』
  
  청사포 침투는 해안에 무인 포스트를 설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全씨는 모선의 조타수로 참여하였으므로 상륙하지는 않았다. 1982년 10월 초순 全씨는 공작원 안내원의 임무를 띠고 부산 다대포에 상륙하였다. 밤을 틈타 육지로부터 1천5백 m 떨어진 해상까지 접근, 반 잠수상태로 대기하고 있는 자선에서 안내조장, 全씨, 공작원 등 3명은 서로의 손목을 나일론 끈으로 묶어 연결 한 뒤 잠수수영으로 해안에 접근 공작원을 상륙시킨 뒤 귀환했던 것이다. 全씨는 이때 상륙시킨 공작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40대 남자였습니다. 다대포로 접근하는 모선상에서 3일간 같이 있으면서 한국제 담배를 얻어 피웠습니다. 그는 대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 경험자 같았습니다』
  
   다대포에서 붙들리다
  
  그 1년 뒤 全씨 팀에게는「1년 전에 침투시켰던 공작원을 다대포 해안의 상륙 지점에서 다시 접선. 모선까지 데리고 와 귀환시켜라」는 지시가 떨어 졌다. 그해 12월말까지 주민등록 일 제 갱신이 끝나면 활동이 어렵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북한 공작기관은 서둘러 대동복귀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1983년 11월 30일 全忠男씨가 탄 80t급 공작모선은 일본어선으로 위장하여 원산을 출발했다. 이 모선은 5문의 중기관총과 무반동포로 중무장돼 있었다. 20명이 타고 있었다. 12월3일 오후 모선은 쓰시마 근해에 도착했다. 안내 조장으로 승진한 全씨의 지휘하에서 이상규(李相圭)씨 등 4명의 안내원이 자선으로 옮겨 탔다.
  
  『우리는 본선을 한 바퀴 돌면서 인사를 한 뒤 부산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습니다만 상륙 준비 작업에 몰두하는 바람에 곧 잊어버렸습니다. 젊어서 그런지 죽는다는 위험이 실감으로 와 닿지 않았습니다. 장난 같이도 느껴지고요. 여기서는 말끝마다 인간의 존엄성 운운하면서 생에 대한 애착을 강조하지만 북쪽에서는 당을 위해 목숨을 초개 같이 버려야 한다고 수없이 들어왔기 때문에 죽음의 공포에 대해 면역이 돼 버린 것입니다』 12월 3일 밤 9시40분께 자선은 다대포에서 약 1km 떨어진 해상까지 접근했다. 여기서 全씨와 李相圭씨는 체코식 자동권총, 벨기에제 권총, 수류탄으로 무장하고 워키토키를 지닌 채 잠수상태에서 해안에 접근 상륙하였다. 두 사람은 목책을 넘어 화장실로 보이는 건물에 다가가려고 하였다. 李相圭씨는 목책 밑에서 기다리고 全씨가 낮은 포복으로 다가가 화장실 모퉁이를 도는데 잠복근무하고 있던 군인들이 덮쳤다.
  
  『머리에 몽둥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번쩍 하더군요. 조건 반사적으로 권총 방아쇠를 당기려고 하니 힘이 쪽 빠지더군요. 상규를 향해 「수류탄 던져!」라고 했습니다. 「나를 죽여 달라」는 뜻이었습니다』 全씨는 기습을 당할 때 쥐고 있던 워키토키를 눌러 긴급사태발생 신호를 보냈다. 자선에서 이 신호를 수신 발포하면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47 노트의 최대속력을 낼 수 있는 5 t짜리 자선은 기관총 1정, 7호 발사관 1문, 수류탄 4발, 자폭용 폭약 30kg, 자동보총 2정으로 무장돼 있었다. 공군기가 조명탄을 터뜨려 대낮처럼 밝은 다대포 근해에서 해군 초고속초계정은 자선을 추적하다가 선체를 들이받아 침몰시켰다. 선체의 옆구리를 받았기 때문에 선미에 설치된 자폭용 폭약은 터지지 않았다. 3명의 안내원은 자선과 운명을 같이했다. 붙들린 지 이틀 뒤부터 全씨와 李씨는 순순히 자백을 하기 시작했다. 全씨는 『붙들린 뒤 혀를 깨물었으나 죽지 않습디다. 죽을 방법이 없어졌으니 살 방법을 구해야 했고. 그것은 자백하는 길 뿐 이었습니다』고 했다.
  
  『이왕 자백을 할 바에야 진실 되게 하자고 결심했습니다. 거짓말 하나를 하자면 몇 개의 다른 거짓말을 만들어야 하고 그러자면 수사관들의 신뢰를 잃게 되고 살 목숨도 죽게 될 것이라고 계산했습니다』 金賢姬는 한국사회의 풍요로움을 눈으로 본 뒤 자백을 시작했지만 全씨는 살기 위해 자백을 시작했고 金日成에 대한 증오심은 그 뒤의 일이었다. 『金日成이한테 속아 살았다는 것을 알고는 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도 갑자기 심장이 정지되는 듯 한 공포에 사로잡힐 때가 있었습니다. 누가 옆에서 보지나 않나 하고 두리번거리다가도 여기가 남한이란 사실을 다시 깨달아 안도하곤 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金日成이도 한 목숨, 나도 한 목숨인데 어떻게 우리 전투원들을 보고 자폭하라고 그토록 강조할 수 있나 하는 분노가 서서히 생겨나더군요. 주체사상은 모든 것의 근본은 인간이라고 했는데 金日成 부자의 실천 방식은 전혀 딴판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3중 영웅 남창문
  
  全씨에 따르면 1980년 6월에 서해 서산 앞 바다에서 해안침투를 기도하던 공작선이 발각됐다. 선장이 자폭용 폭약을 터뜨렸는데 김광현(金光賢)씨(당시42)라는 나이 든 안내원이 폭풍에 몸이 날리는 바람에 살아서 붙들렸다. 나머지 9명은 해군함정예서 구명정을 던져주는 것도 거부하고 수류탄을 던지며 저항하다가 피격되거나 자폭으로써 전멸했다. 金正日은 全씨가 너절하게 살아났다고 비난하고는 변절자라고 낙인을 찍고 대학교에 다니는 金씨의 딸 등 가족들까지 어디론가 추방해버렸다는 것이다. 나이든 안내원은 생에의 애착이 있어 곤란하다면서 그 뒤로는 안내조를 주로 총각전투원들로 편성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자폭을 위한 훈련을 많이 합니다. 총화시간에 어떻게 하면 자폭을 잘 할 수 있는가를 토론하기도 하지요. 자살 법에 대한 연구검토이지요. 자선은 보통 5t 정도인데 30kg짜리 자폭용 다이나마이트를 장착하여 두었습니다. 선장이 판단하여 이것을 터뜨리게 하고 있습니다.
  
  한때는 선수에 폭약을 붙여 남한 배에 부딪쳐 같이 터지는 방법도 연구했는데 그 폭약이 파도를 맞고도 그 충격으로 폭발하는 등 위험이 많아 포기했습니다. 자폭하기 전에는 「김정일의 만수무강을 축원한다」는 전문약호를 보내도록 돼 있고, 1980년의 미조도 사건 때는 6여 명이 자선과 함께 전멸하면서 그런 전문을 보냈습니다』 全씨에 따르면 모선으로 30회 이상 침투한 사람. 자선으로 20회 이상 침투한 사람. 그리고 안내원으로 12회 이상 침투한 전투원에게 영웅칭호를 준다고 한다. 남창문이라는 60대 고참 전투원은 60회 이상 남한에 침투, 그런 영웅칭호를 두개나 받았는데 1979년 7월 삼천포 근해 미조도 사건에서 자폭하여 죽음으로써 북한에서 유일한 3중 영웅이 되었다고 한다.
  
  金日成은 통일이 된 이후에 그의 고향 이름을 남창문으로 바꾸도록 명령했다는 것이다. 『침투조로 뽑히면 모두들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침투실적을 올려야 후배들에게도 위신이 서지요. 사실 그렇게 위험하기만 한 일은 아닙니다. 일본에 공작원을 상륙시키는 일은 더 쉽고 남한침투에서 발각될 확률도 10% 이내 일 것입니다』 작전부 원산 연락소에는 약 4백명의 전투원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연락소는 남포, 해주, 청진, 평강, 개성 등등에 흩어져 있으니 간첩침투를 지원 엄호하는 인력만 해도 수 천명이나 된다는 얘기다. 『침투 중 들켜서 전투가 벌어지고 그러다가 죽은 사람만 해도 제가 아는 한 50명 이상이었습니다. 1980년에만 해도 한강하구로 수중 침투하다가 3명, 횡간도에서 3명, 83년 8월 제는 독도근해에서 일본으로 공작원을 침투시킬 목적으로 가던 원산 연락소 공작모선이 남한 비행기의 공격을 받아 5명이 죽었습니다』
  
   어부 납치 교사로 써
  
  독도근해 사건에서 공작모선은 우리 공군의 무장 헬리콥터로부터 포격을 받고 침몰하였다. 이 포격으로 5명이 죽었다. 나머지 15명은 침수되는 모선에서 자선을 분리하는 데 성공, 이 자선에 옮겨 타고 50 노트의 맹 속도로 북쪽으로 달아났다는 것이다. 이 모선은 일본으로 가는 배였으므로 자폭장치가 돼 있지 않았다고 한다. 모선이 침몰한 뒤 난수표가 든 비닐봉지가 떠올라 우리 쪽이 수거하였다. 그 뒤로는 비닐봉지 안에 철판을 넣어 자폭과 동시에 반드시 가라앉도록 하고 있다는 것이다. 全씨는 『이 사건 때 살아온 사람들은 거의가 화상을 입고 있었고 고막이 나가버린 사람들도 많았다』고 했다. 全씨는 일본인이나 한국인을 납치하는 데는 동원된 적은 없으나 남한에서 납치되어 온 어부를 본 적은 있다고 했다.
  
  『이 어부를 우리는 남한 실정을 가르치는 교사로 썼습니다. 결혼도 시켰습니다. 일개 어부가 텔리비전을 갖고 있다고 해서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가 그 어부에게 북한 사회의 좋은 점을 이야기하라고 했더니 평등이라고 하더군요. 여기 와서 가만히 생각 하니 그때 그 어부가 말한 것은 「같이 못 사는 평등」을 비웃으면서 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全씨는 1978년에 금성정치군사 대학을 졸업할 때 동기생이 1백50명이었다고 했다. 통일전선부, 작전부, 연락부 소속 요원들이었다. 통일전선부의 피교육자들은 무장선전대였다는 것이다. 무장선전대는 남한에서 소요사태가 빚어지면 남한의 반정부 세력으로 위장하여 개입하도록 된 특공조직이었으나 곧 해산돼버렸다고 한다.
  
  1980년 5월에 광주사태가 일어나자 金正日은 무장선전대의 해산을 후회했다고도 한다. 全씨는 1987년에 한국전력에 경리원으로 취직, 한국사회로 편입돼 완전히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 서울 목동 아파트에서 생활하면서 승용차를 몰고 다니며 교통순경한테 걸릴 때의 요령있는 처신술까지 익힌 全씨는 미혼이다. 全씨는 『1983년 여름에 원산에서 남한 텔리비전 방송을 몰래 보았는데, 이산가족 찾기가 한창이더군요. 북한에서는 「지금까지 뭘 하고…」라면서 남한을 욕했습니다. 우리도 울고불고 하는 장면이 도무지 지겨워 텔리비전을 꺼버렸습니다. 제가 이산가족이 되고 보니 요사이 그런 방송이 나오면 눈물이 저절로 쏟아집니다』
  
  『남북한이 통일되면 어떤 문제가 일어날 것 같으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사상의 차이에 따른 갈등은 문제가 안 된다고 봅니다. 북한 사람들은 40여년간 속아 살아왔다는 것을 알면 그 동안 배웠던 김일성주의를 벗어 던져버릴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문제는 남쪽사람들의 자본주의가 북쪽으로 확산될 때의 일입니다. 정직하고 어리석으며 돈벌이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북한사람들이 남한사람들에게 이용되고 나서 뒤늦게 「야, 우리가 속았다」고 화를 내기 시작하면 남북한간에 지역 감정이 깊어지지 않을까요』 全씨도 『스트레스란 말이 남한에서 왜 유행인지 알겠더라』고 했다. 『좋은 것이 너무 많고 그 좋은 것을 다 차지하겠다는 욕심이 충족되지 않으니까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 아닙니까? 북쪽에서는 욕심 낼 것도, 경쟁할 대상도 별로 없으니까 마음이야 편하지요. 그런 가운데서 작은 것에서 행복을 찾으려 하고요』
  
  全씨는 아직도 남한의 대도시에서는 보기 드문 순진한 웃음과 편한 표정을 갖고 있다. 그는 남한의 여자들에 대해서 『여자답지 못하다』고 비판하면서 이런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북쪽에 있을 때 산악훈련을 하다가 눈을 만나 헤맸습니다. 외딴집을 찾아 들어가 잠에 골아 떨어졌습니다. 잠을 깨어 일어나 보니 밤중인데 그 집의 소녀가 잠도 안 자고 젖은 군화를 부엌의 아궁이 불로 말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여자가 남쪽에서는 드문 것 같아요』 全씨는 『남한 사회가 겉으로는 자유롭고 허술한 것 같지만 살아보니 학교 선후배 고향사람 같은 인맥이 없으면 뿌리를 내리기가 어렵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고도 했다. 그래서 全씨는 북쪽에서 귀순해 온 사람들과 남쪽에서 활동하다가 붙들린 사람들로 구성된 모임에 자주 나가 어울린다고 했다.
  
   귀순자와 붙들린 사람의 차이
  
  -귀순자 그룹과 全씨처럼 붙들렸다가 전향한 사람들은 차이가 있을 것 같은데?
  『다르지요. 귀순자들은 북한체제에 견디지 못했거나 그 체제를 싫어하여 자발적으로 넘어왔는데 대하여 우리는 체제 충성파였으니까요』
  이 말에는 어떤 사회의 모범생이 그 사회의 낙오자들에게 갖는 우월 의식이 스며 있는 듯하였다. 정부의 한 전문가는 『金賢姬나 全忠男같은 사람들은 당이 믿고 선택할 정도로 그 사회에서는 모범적 자질을 가진 사람이었고, 귀순한 사람들은 그런 면에서는 질이 떨어지는 그룹이라 한국 사회를 보는 눈과 적응방법에서도 큰 차이가 있다』고 했다. 全씨는 『여기서 살다가 보니 자연히 여당 편이 되더라』면서 『남한 사람들은 북한을 실제보다 좋게 보고, 북한 사람들은 남한을 실제보다도 나쁘게 본다. 학생과 야당이 주장하는 논리가 워낙 북한의 현실과는 멀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全씨는 金正日을 83년 여름에 세 번 대면한 적이 있다고 했다. 金正日이 가족을 데리고 총석정 앞에 있는 죽도에 피서 왔을 때 全씨 등 전투원들은 잠수하여 전복·성게 등을 따서 金正日에게 갖다바치는 쇼를 하였다. 金正日은 데리고 온 남매 광남, 광옥에게 해산물에 대하여 설명을 해주더란 것이다. 두 번째는 金正日이 원산근해에 낚시하러 왔을 때 차출돼 사격시범과 격파시범을 보인 일이었다. 세 번째는 金正日 앞에서 그의 호위병들과 사격 시합을 벌일 때였다. 『金正日이 거만하다는 느낌을 받았으나 그때로서는 나쁜 사람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내일 듯한 여자가 화장실에 가는데 수행원들이 90도로 허리를 꺾어 절을 하는 것을 보고는 너무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모든 것을 결정해주는 고민
  
  全씨는 金正日이 북한의 모든 일에 간여하여 직접 결정해 주어야 사회가 돌아가는 사회주의 체제의 비효율성을 재미있게 설명하기도 했다. 『1982년에 金正日이 어떤 공장을 방문했더니. 한 노동자가 담배 배급을 못 받아 곤란을 겪고 있다고 했습니다. 金正日은 돌아오는 차 중에서 「노동자들이 저런데 나부터 담배를 끊어야겠다」고 혼잣말처럼 했답니다. 이 말을 들은 부하들이 연일 연구·검토한 끝에 당원들부터 금연하여 노동자들이 담배를 피울 수 있도록 하자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난데없이 우리 전투원 세포의 연합회의가 소집되더니 초급당 비서가 나타나 금연 쪽으로 회의를 유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담배이기에 선뜻 금연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반대의사를 밝히는 사람도 없었 고요. 초급 당에서 압력을 넣고, 설득도 하고 하여 겨우 다음날에 금연 결의를 했지요. 우리는 필터담배를 보급 받아 왔었는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우리 신세에 담배 못 피운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워낙 불평이 심해서 전투원들에게만은 허용한다는 결재를 金正日로부터 받았지요. 여섯달 뒤 담배공급사정이 좋아져 금연조치는 풀렸습니다』 『金正日은 심지어 우리 전투원들이 이용할 일제버스의 수입까지 직접 결재를 했습니다』
  
   싸늘한 전쟁의 희생자들
  
  신상옥(申相玉)씨에 따르면 영화를 촬영할 때 배우들이 타고 다니는 버스의 창문에 종이를 발라 안에서 옷을 갈아입도록 해주는 것도 당 간부가 金正日 결정을 얻어 시행하더라고 했다. 金正日도 이런 관료주의가 답답했던지 『변소 가는 것도 일일이 보고하고 가지』라고 핀잔을 주더라고 한다. 1985년 6월28일 국가안전기획부는 일본을 거점으로 하여 활동하던 북한의 거물간첩 신광수(辛光洙)(당시 57세)를 붙들었다고 발표했다. 辛은 1980년 4월에 일본 미야자키 현 아오지마 해안에서 일본인 요리사 하라타다아키(당시 44세)를 납치, 북한 공작선에 태워 북한으로 데리고 갔었다고 자백했다. 辛은 일본에서 조총련 오사카 상공회 이사장 이삼준(李三俊)(당시 49세)을 포섭, 李三俊이 경영하는 중국요리점 보해루(寶海樓)의 요리사 하라타다아키를 놀러가자고 미야자키 해안까치 꾀어낸 뒤 대기 중이던 네 명의 북괴공작원과 합세하여 그를 자루 속에 집어넣어 납치했다는 것이다.
  
  辛은 북한에서 이 하라타다아키의 인적사항, 학·경력, 가족사항, 과거 생활 전력, 중화요리법까지 익혀 하라타다아키로 변신하였다. 그는 여섯 달 뒤 일본으로 몰래 들어와 하라타다아키의 이름으로 된 여권, 운전면허증, 국민건강보험증을 발급 받아 스위스, 프랑스, 소련 등을 거쳐 북한을 네 차례나 왕래하였음이 밝혀졌었다. 하라타다아키의 납치 목적은 신분 위장을 위한 자료(이 경우, 실물자료) 수집이었다. 안기부는 이 정보를 일본 경찰에 알려주었으나 일본경찰은 하라타다아키의 실종과 보해루의 위치 등을 확인하고도 북한의 눈치를 봐서 인지 위신 때문인지 수사를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양국의 정보기관 사이가 경색되기도 했다고 한다.
  
  金賢姬는 KAL858편 폭파임무를 맡지 않았더라면 마카오 국적의 여권을 가지고 일본을 거점으로 남한을 자주 드나들면서 간첩활동을 했을 것이다. 金正日이 직접 지휘한다는 대외정 보조사부의 주요 임무는 한국에 쉽게 들어갈 수 있는 제3국 여권의 취득이나 위조이다. 아주 큰 여권 위조 전문 인쇄공장까지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안기부에선 판단하고 있다. 여권을 위조하려면 그 인적사항이 그럴 듯해야 한다. 하라타다아키를 납치한 것도 그런 인적사항과 관련된 정보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김승일(金勝一)이 갖고 있던 하찌야 신이찌 명의의 위조여권이 만들어진 과정도 그러했다. 미야모도 아키라(한국명 이경우(李京雨))라는 재일 동포 간첩이 실존인물인 신이찌에 접근, 여권발급업무를 대신해주면서 신이찌의 인적사항·해외여행 관계 기재사항을 알아내 金勝一의 위조여권에 그대로 옮겨 기재토록 했던 것이다.
  
  북한, 한국, 일본, 중국에 걸친 극동지역의 개방화·국제화가 진행될수록 이 지역의 첩보공작전선에서는 납치, 위장, 위조, 침투, 자폭 등 「더러운 전쟁」이 싸늘하게, 그러나 더욱 치열하게 계속될 것이다. 金賢姬와 전충남(全忠男)은 그런 국제 첩보전의 무대에서 사라진 수많은 「이름 없는 전사들」의 후예였다. 두 사람은 金正日의 지시대로 자살을 시도했으나 살았고, 살았기에 충직한 金日成 신봉자에서 극렬한 金日成 증오자로 바뀌게 되었다. 두 사람 모두 이제는 「그때 죽지 않았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남한에서 얻은 새로운 삶을 두고 기뻐하기도 하고 고민도 하고 있다.(끝)
  
출처 : 월조
[ 2003-06-30, 15:0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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