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희는 말한다(상) - 5백일에 걸친 김현희 증언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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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金日成에서 탈출
  
   金日成 거부엔 시간 걸려
  
  김현희(金賢姬)는 한 번도 金日成을 직접 대면한 적은 없다. 중학생 때 어떤 행사에서 金日成에게 꽃다발을 바치는 화동(花童)으로 뽑혔으나 옷의 칼러에 흠이 묻어 있는 것이 발견돼 그 행사 직전에 교체되었었다고 한다. 金賢姬는 88년 1월15일의 사건전 모 발표 때도 金日成에 대한 외경심은 변치 않고 있었다고 한다. 金日成에 대한 비난은 기독교 신자가 예수를 욕하는 것과 같은 배교(背敎)행위이므로 내면적인 정리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金賢姬를 26년간 덮어씌우고 있었던 「유일신 金日成」의 우상을 부수는 데는 수사관들의 끈질긴 설명이 필요했다. 수사관들은 중·고교 역사 교과서를 갖다 주고 읽게 한 뒤 질문을 던지는 식으로 金日成의 허구를 지적해 나갔다고 한다. 『세종대왕을 봐라. 한글과 측우기를 만드는 등 얼마나 찬란한 업적을 남겼나. 그런데 우리 역사책에는 불과 몇 페이지만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너희 역사책은 온통 김일성에 대한 기술로만 채워져 있지 않은가. 심지어 한국의 독립도 김일성의 덕분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김일성의 동상이 도대체 몇 개나 되나. 그것이 몇 억년이나 계속될 줄 아는가. 죽으면 다 없어질 것인데』
  
  지구과학 교과서를 읽게 하고는 『김일성은 신이 될 수 없는 인간이다』고 설명해 주었다. 이러는 과정에서 김현희(金賢姬)는 인식의 혼란을 일으켰다. 1988년 10월 서울올림픽이 끝난 직후에 텔리비전에 金日咸이 외국방문객과 악수하는 장면이 나왔다. 이를 지켜보던 金賢姬는 『나쁜놈!』이라고 내뱉었다(金賢姬는 金日成의 뒷머리에 흑이 있다는 것을 서울에 와서 텔리비전에 비친 것을 보고 처음 알았다고 한다). 金은 金日成이라고 존칭 坪?쓰니까 『무슨 불경죄를 저지른 것처럼 어색했다』고 한다. 金賢姬는 요사이 텔리비전을 통해서 방영되는 북한의 金日成 우상화 집회에서 열광하는 군중들 모습을 보고는 퍽 쑥스러워 하더란 것이다. 자신이 출연했던 영화를 보고 어색해하는 것과 비슷한 심리다. 북의 생활이 하나의 연극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북에서 온 사람들이 金日成을 욕하게 되면 수사관들은 그때부터는 안심한다고 한다. 金日成에 대한 외경심은 지독한 증오심으로 전환되는 것이 보통이다. 金日成은 북한 사랑들의 존재 이유이며, 그들이 살아가는 근거이고, 모든 가치의 근원이다. 金賢姬처럼 태어나서부터 金日成에 대한 맹목적 존경심을 강제 받은 세대일수록 金日成으로부터의 탈출에는 시간이 걸린다.
  
  金日成을 거부한 뒤, 김현희(金賢姬)는 삶의 근거를 잃은 사람처럼 허전해 하였다. 金日成이 金의 가슴속에 차지하고 있던 자리는 너무나 컸던 것이다. 한 수사관은 『지금 金賢姬는 金日成을 대신 할 가치체계를 찾고 있는 셈이다. 당장은 金과 수사관들 사이에 맺어진 인간적 신뢰가 그 공간을 일부 메우고 있다. 수사관이 바뀌면 섭섭하다고 눈물을 흘린다. 종교를 갖게 되면 그 공간은 완전히 메워질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金賢姬의 종교에 대한 지식은 매우 얕았다. 예수는 모르고 「예수쟁이」는 알고 있었다고 한다. 종교와 미신의 해독성을 선전하는 영화에서 「예수쟁이」란 말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맹자와 공자의 이름만은 기억한다. 물론 유교와는 별개의 개념에서 부모들이 평소 대화에서 가끔 『맹자왈, 공자왈』 했으므로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다는 것이다. 金은 천주교와 천도교가 같은 것인 줄 알고 있더라고 한다. 金은 교회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있다면 저들이 꾸민 교회일 것이다』 고 했다.
  
   김일성 우상화의 실상
  
  지난해 10월의 노태우(盧泰愚)대통령 UN총회 연설은 시차관계로 밤늦게 한국에 텔리비전으로 중계되었다. 金賢姬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지 않고 텔리비전을 시청했다. 다음날 金은 수사관들에게 연설이야기를 꺼냈다. 수사관들이 『보지 못했다』고 하니까 『나라의 어른이 연설을 하는데 어떻게 안 들을 수가 있느냐』고 수사관들을 나무라더라고 한다. 김현희(金賢姬)는 서열의식, 집단의식이 강하다고 한다. 윗사람에 대한 존경심과 단체나 국가의 이익을 우선시키는 사고방식이 강해 수사관들은 『金이 우리보다도 훨씬 보수적이다』고 말하고 있다. 金이 한국의 현상 가운데서 가장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데모라는 것이다. 『왜 저렇게 해서 나라를 못되게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해방돼야 할 곳은 북한인데…』라고 고개를 갸우뚱거린다고 한다. 권위에 순응하는 金의 체질은 오랜 북한생활에서 굳어진 것이며. 그것은 金日成·金正日 부자에 대한 개인숭배 교육의 소산이기도 하겠다.
  
  金賢姬가 말한 「金日成·金正日 우상화 실태」는 이러하였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진은 각 가정과 직장에서 가장 넓고 깨끗한 방에 의무적으로 부착토록 하고 온갖 정성을 다하여 관리토록 하고 있다. 당에서 수시로 위생검열을 나와 사진 상태를 점검한다. 사진에 먼지가 쌓였거나 보존상태가 나쁘면 비판을 된다」 「주민들은 평소에는 김일성과 김정일 사진 밑에 항상 조화(비닐꽃)를 꽂아두고 있으나 4·15(김일성 생일) 등 명절날에는 꽃병에 생화를 꽂고 그 앞에서 전 가족이 절을 한다. 특히 정월 초하루에는 『새해 설인사 받으세요』라고 인사한 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른다. 대개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더 열성적으로 섬기고 있다」「회의 등 모든 집회시작 전에는 반드시 주최측에서 선전한 김일성·김정일 찬양노래 두 곡을 순서대로 가창 토록 하고 있다」 「86년경 김정일이 자신을 찬양하는 『향토의 별 김정일』이라는 디스코 풍 노래를 보급시키기 위해 『디스코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것이 몸푸는 데 좋다』라고 지시하자 한때 전국적으로 디스코 음악과 춤이 유행하였다.
  
  당시 평양에서는 대학생을 중심으로 모란봉, 유원지 등 야외에서 중공에서 유입된 디스코풍의 노래와 춤이 성행, 기존의 김일성 부자 찬양노래가 퇴색하게 되자 김정일이 『디스코춤과 노래를 없애라』고 지시하여 중앙당에서 각 대학을 대상으로 디스코음악을 철저히 단속한 바 있다」 「북한은 74년경부터 평양시 용성구역에 『장수연구소』를 설치하고 저명의사, 생물학자를 망라 김부자의 장수비결을 찾는 연구를 하고 있다. 김부자에게 무공해 자연식품을 제공키 위해 『1호 농장』(평양시 용성구역)을 운영, 김부자 전용 사과·배 등 과일(『8호 사과』과 『8호 배』로 호칭), 장수에 좋다는 『만경초, 버섯』을 특별재배하고 있으며, 사과와 배는 달게 하기 위해 사탕가루를 물에 타서 준다」「북한의 최고단위 화폐인 1백원권 지폐에는 김일성 초상화가 그려져 있어 구겨지거나 때가 묻지 않도록 잘 보관하여야 하므로 모든 주민들이 사용하기를 기피하여 일반적으로 50원권 이하가 통용되고 있다」
  
   지금도 계속 신문받아
  
  김현희(金賢姬)는 우리 정보기관에 의해서 가장 철저히 신문받고 분석된 북한 사람일 것이다. 金이 북쪽에서 보낸 25년간의 경험을 모두 뽑아내 북한을 이해하는 정보로 처리해놓겠다는 것이 기관측의 의도이다. 金賢姬가 안기부 수사관에게 진술한 KAL858관련 사항만 해도 2백자 원고지로 쳐서 1만 장 이상에 이른다. 그 일부는 제1심 재판에 검찰 측 자료로서 제출되었다. 이 자료는 金賢姬의 전기에 해 당한다. 날짜별로, 때로는 시간단위로 그의 북녘생활이 무미건조하게, 상세히 기록돼 있다. 지금도 金賢姬는 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안기부가 관할하는 어느 밀실에서 아침에 깨어나 밤에 잠들 때까지 계속해서 신문을 받고 있다. 안기부에서는 그를 피고인으로 대하고 있다. 『金賢姬는 어떤색의 루즈를 바를까』하고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다. 金에게는 화장이 허용되지 않고 있다. 로션정도를 여자수사관인 주면 바를 때는 있지만 눈화장이나 입술화장은 할 수 없다. 불구속상태로 재판받는다고 하지만 구치소에 있지 않을 뿐 완벽하게 통제된 생활을 하고 있다.
  
  남북대치상황에서 金의 선전적 가치는 한 정보기관종사자의 표현을 빌면 『몇 개 사단의 화력과 맞먹는다』고 한다. 우리 정부가 金의 신병을 확보하고 金의 테러행위를 국제 사회에 계속해서 제기함으로써 북한측에 쐐기를 박았기 때문에 서울올림픽에 대한 또 다른 테러를 북한이 시도할 수 없었으리란 분석도 있다. 외교관을 아버지로 두고 있는 金은 북한 중상류 가정출신으로서 남한에 온 희귀한 경우이다. 金을 통해서 북한 상류층의 삶과 여대생의 의식 등을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金賢姬는 새로운 유형의 공작원이다. 중국인이나 일본인으로 위장 할 수 있는 국제적인 감각을 두루 갖추도록 거액을 투자하여 만들어낸 국제화시대의 엘리트공작원인 것이다.
  
  테러리스트 金을 통해서 북한의 대남공작조직의 실상과 그들의 계획이 알려지고 있다는 점이 북한측에게는 매우 아픈 구석인 것이다. 金覽姬의 짧은 생애와 변모과정은 분단국가의 삶이 어떠한가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좋은 주제이기도 할 것이다. 복사기가 어떤 것인지를 모르는 金賢熙는 남한의 보통사람들에게는 미국인이나 일본인보다도 더욱 생경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한 金이 또 18년간의 金日成식 교육과 8년간의 밀봉 교육으로 무장된 金이 남쪽의 햇볕을 받은 지 불과 8일만에 북한체제를 증오하는 쪽으로 대전환 했다는 것은 진실 앞에서 허구의 바벨탑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한글 지은이 몰라
  
  金賢姬를 맡고 있는 한 여자 수사관은 『정말 그럴까, 설마 그럴까, 하는 심정으로 金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결론적으로는 북한이 과연 그렇구나 였다』고 말했다. 金賢姬의 진술기록을 보면 날짜나 장소가 소상히 적혀 있어 『정말 이렇게 기억할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대목이며 몇 군데 있다. 대공 수사관들에 따르면 북한사람들은 생활이 남한처럼 번잡하지 않고 단순하므로 기억할 만한 것도 적어 그는 잊어먹지 않는다고 한다. 대학중퇴의 학력을 가진 金賢姬는 한국역사에 대한 지식이 남한의 유치원생보다도 낮은 지경이라 고 한다. 金은 『남쪽이 북쪽보다도 우리의 역사와 전통을 더 아끼는 것 같다』는 감상을 말하기도 했다. 『북조선에서는 金日成 우상화의 방해가 된다고 민족정신의 뿌리를 오히려 말살하고 있다』고 金은 말했다.
  
  북쪽의 역사교육에 대한 金의 증언은 이러하다. 「인민들이 역사를 알면 김일성 숭배 의식이 약화된다는 이유로 역사사실에 대한 서적발간이나 텔리비전방영, 신문게재 등은 제한하고 있다. 고등중학교 3학년 때 1주일에 1시간 정도씩 간단히 훑어보는 식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그것도 김일성 가계의 혁명 역사에 초점을 맞추어 강의하고 김일성 혁명역사 이전시대에 관해서는 각종 민중의 란, 지배계층의 민중수탈을 간단히 언급할 뿐이며 학생들 역시 교과서도 없고 시험도 없어 무관심하게 듣고 흘려버리는 실정이다. 역사적 인물이나 현존인물을 막론하고 김일성 부자 이외에 인민들이 숭배하는 인물이란 존재할 수 없으므로 학생들이 감동할 만한 역사적 사건, 역사인물에 대해서는 전혀 가르치지 않아, 한글은 누가 창제하였는지도 알지 못한다. 현대사에 있어서는 안중근과 김구선생을 간단히 소개하고 있으나 그 내용 역시 김구 선생이 원래 반공주의자였으나 평양 방문시 김일성에게 감화되어 공산주의를 지지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가르치고 있다. 고구려의 역사는 조금 배웠으나 김유신, 왕건, 이성계의 이름도 몰랐고 역대 왕의 이름도 거의 아는 것이 없다.
  
  신문관들이 질문할 때 『차라리 알고 있는 역사적 인물이 누구누구냐고 묻는 것이 훨씬 빠를 것이다』라고 하면서 창피해 한 적 있다」 金賢姬는 일식과 월식이란 말뜻조차 모른다고 한다. 수사관이 『아무렴 그런 것을 모를려고… 학교에서 가르쳐주지도 않았나?』라고 의아해했다. 金은 『우주의 신비를 가르쳐주면 김일성이가 죽으니까요』라고 했다. 요즈음 金賢姬는 『金日成은 인민을 무식하게 만들어놓고 지배하려 한다』고 말하고 있다. 金賢姬는 6·25를 북침으로 알고 있는데, 수사관들이 일본에서 나온 사진집을 갖다 주면서 『우리가 선수를 쳤다면 어떻게 부산까지 밀릴 수 있었겠느냐』고 설득했다고 한다. 金賢姬는 그러나 미국에 대한 반감은 완전히 씻지 못하고 있어 무심코 『미제놈!』이란 말을 쓰기도 한다는 것이다. 金日成 혁명사상이 북한사람들의 기본사상이고, 전문지식을 전공자만 알면 된다는 것이 북한의 교육방침인 것 같다. 그래서 상식이나 교양은 너무나 얕을 수밖에 없다.
  
   말 안 통하기도
  
  북에서 온 사람들을 신문하면 말이 안 통하는 부분이 많다고 한다. 똑같은 낱말이라도 의미가 크게 달라진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金賢姬에게 『아가씨!』라고 부르면 화를 낸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아가씨!」란 말이 남한의 술집에 나오는 천한 여자란 뜻으로만 쓰이기 때문이다. 「시끄럽다」는 말도 남쪽에서는「소음이 난다」는 뜻이지만 북쪽에서는 「절차가 시끄러워서…」식으로 복잡한 상황을 설명하는 뜻으로 쓰인다. 「바쁘다」는 말도 북에서는 「밥먹기도 바쁘다」는 식으로 「어렵다」는 뜻을 주로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金賢姬는 남한화, 일본화, 중국화 등 이른바 「적구화(敵區化)」의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북쪽 사람들을 신문할 때처럼 의사소통이 어렵지는 않았다고 한다. 金은 밀봉교육을 받을 때 한국에서 발행된 일한사전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지난해 1월의 기자회견 때 金賢姬는 『속죄한다』는 표현을 썼었다. 북한에서는 「그런 용어는 북조선사람들이 쓰지 않는다. 우리는 사죄란 말을 쓴다」는 성명을 냈었다. 안기부 수사관이 『왜 그런 말을 썼느냐?』고 나무랐더니 金은 『속죄와 사죄는 뉴앙스가 다르단 말이에요』라고 말하더란 것이다.
  
  수사관들은 金賢姬에게 「미팅」이란 말의 뜻을 설명하는데 애를 먹었다고 한다. 북쪽에서는 남녀가 집단적으로 「미팅」할 기회가 거의 없으므로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북한의 남녀는 약속장소를 주로 큰 건물 앞, 또는 지하철 구내의 어디로 정한다고 한다. 그래서 「어디앞」이 약속장소의 대명사처럼 돼 있다고 한다. 金賢姬가 몇 번 안되는 서울외출을 한 뒤 궁금하게 생각한 것 가운데는 가게의 상품진열방식이 있었다. 바깥에 물건을 진열해두는 것을 보고 『저러면 훔쳐가지 않느냐』고 묻더란 것이다. 빨래를 바깥에 널어놓은 것을 보고도 그런 질문을 했다. 金賢姬는 평양에서 아파트 생활을 했었다. 『우리는 김치독을 모두 아파트 뜰에 파묻어둡니다. 누가 김치를 훔쳐갈까 봐 뚜껑 위에다가 나무상자를 만들어 덮어두고 열쇠로 잠가둔답니다』
  
   공해에 약한 북의 사람들
  
  金賢姬를 포함한 북으로부터 온 사람들이 한결같이 서울생활에서 가장 불편한 점으로 지적하는 것이 있다. 서울시내의 나쁜 공기와 복잡한 거리다. 공해가 별로 없는 곳에서 자란 그 들은 오염된 공기에 대한 내성이 약하여 기관지에 큰 고통을 느낀다고 한다. 종로, 광화문 등 복잡한 서울시내로 외출하는 것도 꺼려한다고 한다. 자동차를 타면 멀미하는 사람들이 만다. 1985년의 남북한 고향방문단 교류가 있었을 때 일이다. 북쪽에서 온 방문단이 판문점에서 버스에 올랐다. 방문객들은 모두 수첩을 껴내더니 바깥을 관찰하면서 열심히 메모하 기 시작하였다. 버스가 서울시내로 진입하자 그들은 건물의 외벽에 도배를 한 듯한 간판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 어지럽게 늘어선 간판들을 보고 적고 하더니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저 곳 에서 삽시간에 대부분의 북한 승객들이 구토에 동참하였다. 그 뒤로는 버스 에 탄 뒤 바깥을 일부러 보지 않으려고 애쓰더란 것이다. 안기부의 한 수사관은 『전향한 간첩이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을 때 혼내 주는 방법이 있다. 그를 데리고 종로 1가에서 2가까지만 걸어도 강물처럼 흐르는 인파와 차량의 물결에 질려 손을 들고 만다』고 했다.
  
  한국에서 민주화운동이 힘을 쓸 수 있었던 한 이유는 복사기와 전화의 대량 보급으로 정부에 의한 언론통제에 한계가 드러났기 때문이라고 분석하는 이들도 있다. 남한의 전화보급대수는 올해말에 1천 2백70여만 대에 이를 전망이다. 북한의 전화보급대수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1백만대 이하일 것이라고 전기통신공사의 한 전문가는 추산했다. 북한사람들이 공해뿐 아니라 문명의 이기로부터도 대단히 멀리 있는 것을 金賢姬는 이렇게 증언하였다. 『개인 전화는 항일 혁명투사나 당 부부장급 이상의 고위간부의 집에나 설치할 수 있다. 일반 주민들은 특별한 용무가 있을 경우에 한하여 직장, 기업소의 전화를 이용한다. 지방으로 전화를 걸 경우엔 미리 전보를 쳐서 언제. 어느 관공서의 전화 앞으로 나와 있으라고 연락을 해둔 뒤 건다. 그 나마 잘 들리지 않는다」 「북한은 대동강, 삼지연, 全나무 등의 상표로 흑백 텔리비전을 생산하고 있다. 칼러 텔리비전은 생산하지 못하고 일제 히다찌를 수입하여 북한의 상표명인 진달래. 목단 등을 부착, 판매하고 있다. 평양 대학생들은 학습을 위한 녹음기 소유 욕구가 크며, 일반 주민들은 텔리비전 냉장고 시계·외출용의상·신발·스타킹·내의 등을 갖고 싶어한다. 공급 물량자체가 모자랄 뿐 아니라 아무나 살 수 없으므로 암시장에서 비싸게 거래되고 있다」
  
   여자로서의 김현희(金賢姬)
  
  여자로서 金賢姬는 그 정신연령이 공작원으로 뽑힌 18세에서 정지된 상태라고 한 수사관은 말했다. 연애의 경험이 없으니 이성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 같은 것도 기억에 별로 남아 있 지 않다고 한다. 『결혼은 어떻게 하려고 했느냐』고 수사관이 물었더니 『당에서 정해주는 사람과 하면 되는 것이죠』하면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金은 『아마도 남자 공작원과 짝지어졌을 것이다』고 했다. 키 1m 65cm 몸무게 54kg 金賢姬는 늘 부끄러움을 타는, 남한에서는 보기 힘들게 된 전통적인 한국의 여인상이다. 그러나 金은 남쪽 여성들처럼 다정다감하다든지 센스가 있다든지, 또는 마음이 여린 것 같지는 않다. 金日成과 당에 모 든 정성을 바치도록 끊임없이 교육되고 훈련받은 탓으로 감성적 정감이 솟아날 수 있는 샘이 말라 버린 것이다. 金日成이 金賢姬의 여성다운 감성까지 독점하고 있는 것이다.
  
  金賢姬의 사랑은 주로 가족에 대한 것이다. 친구에 대한 정도 별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 金의 여동생(25)은 중학교의 음악 교사(첼로전공)이며, 남동생(23)은 평양 외국어대 아랍어과를 나와 평양청년 축전에 대비 연수 중에 있었다고 한다. 金은 특히 남동생을 보고싶어 한다. 여동생은 중학생 때 아코디언 연주자로 뽑혀 金日成이 외국손님을 환영하는 행사에 나가 로동신문에 金日成 과 함께 찍은 사진이 실린 적도 있었다. 金은 초대소 생활 중 워낙 자주 자리를 옮기고 교사·지도원이 자주 바뀌어, 헤어지고 만나는 데 따른 감정변화가 무디고, 아주 사무적이라 한다. 金은 또 참을성과 오기가 대단하다. 감기 기운이 있어 약을 먹으라고 권하면 『일 없어요』라면서 버티고 북쪽의 못 사는 생활을 꼬집으면 열등감을 자극 받아서인지 아주 싫어한다고 한다. 金賢姬는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도 무딘 편이라고 한다.
  
  꽃 이름도 별로 아는 것이 없고. 노래도 음치는 아니지만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공작원 교육을 받을 때 배운 남한 노래로는「노란샤쓰 입은 사나이」 「하숙생」 「돌아와요 부산항」 등이 있으나 즐겨서 부르지는 않는다고 한다. 중국, 일본 노래도 공작원 교육 때 배워 알고 있는 것이 더러 있다. 金의 발성법은 가성을 주로 하여 수사관들이 웃으면 부끄럽다고 더 이상 부르지 않는다고 한다. 인민학교 때 손풍금(아코디언)의 연주법을 배웠었다고 한다. 『무슨 색깔을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무슨 색깔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런 물건을 선택 할 수 있나요? 물건이 부족하여 파는 사람이 주는 대로 선택해야 하니까 색깔은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고 말하곤 한다.
  
   인간으로 돌아왔으니 죽어도…
  
  金賢姬는 여자공작원으로 단련되긴 했지만 벌레 하나도 죽일 수 없는 성품이라고 한다. 그 런 여자가 1백15명을 죽인 비행기 폭파범이란 사실은 믿어지지가 않는다. 金은 주범인 김승일(金勝 一)의 수행원격으로 범행과 관련된 결정에 직접 참여하지 못했었다. 金은 金勝一 의 바람잡이 역할만 했었다. 이런 종속적인 역할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덜 느낀 데다가. 1백15명이 죽는 처참한 현장을 본 적이 없기에 비교적 덜 괴로워했었다고 한다. 폭탄을 비행기 선반 위에 두고 내려 버린 행위는 결과적으로는 1백15명을 칼로 찔러 죽인 것과 똑같았으나 살인행위는 간접적이었으므로 양심의 가책도 간접적인 것이다. 사할린 상공에서 KAL007점보기를 격추시킨 소련 요격기의 조종사는 미사일 발사 단추를 손가락으로 누르는 행위만 했을 뿐이다. 그 결과는 2백69명의 생명을 권총으로 일일이 사살한 것과 꼭 같았으나 그 조종사의 심적인 괴로움은 한 사람을 직접 찔러 죽인 것보다도 덜했을 모른다. 기계를 매개로 한 간접 살인이 무서운 것은 범행자에게 이러한 양심의 가책까지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한 수사관은 『金賢姬가 붙들리지 않고 북한으로 귀환했다면 영웅대접을 받고 영원히 양심의 가책을 잊어버렸을 것이다. 남한으로 붙들려와 비로소 자신의 범행이 몰고 온 참담한 결과를 인식하고 뉘우치게 된 것은 金을 인간으로 되돌린 셈이 되었다. 金賢姬에게는 다행한 일이었다. 당장 사형된다고 해도 인간의 모습을 되찾고 죽게 되었으니까』라고 했다. 1심 공판에서 金賢姬는 이렇게 말했다. 『북한 인민들은 자기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김일성과 김정일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고 있습니다. 김일성이 저주스럽고 인민들은 불쌍합니다. 제가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유족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죽어서 유족들의 슬픔과 죽은 분들의 넋을 달랠 수 있다면 기꺼이 죽겠습니다』
  
  金賢姬는 사형선고를 받은 뒤 사면형식으로 목숨을 건질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안기부에서는 한번도 『살려주겠다』는 언질을 준 적은 없다고 한다. 金은 1차 공판때 유족들로부터 욕을 먹고 나서 안기부로 돌아와서 이렇게 말하더라고 한다. 『제가 독약을 먹고 죽었어야 했는데… 돌멩이로 맞아 죽어서라도 저분들의 분노를 풀어줄 수 있다면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 저를 이렇게 만든 김일성이가 저주스럽습니다』 金賢姬는 재판정에선 야유를 받으면서도 일곱 시간 꼿꼿이 앉아 화장실 한번 가지 않고 나지막한 목소리로써 차분하게 진술하여 『역시 공작원으로 단련된 여자답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변호인이 『북한은 金피고인이 범인이 아닌데 남한 당국에 의하여 조작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고 물었다. 金賢姬는 『북한이 나를 일본여자로 위장시키고 독약까지 주어 자살하도록 시켰으니 그런 식으로 뒤집어씌울 계획은 처음부터 만들지 않았겠느냐』 고 반문했다.
  
출처 : 월조
[ 2003-06-30, 16:3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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