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공산권이 싫어 목숨을 걸고 탈북하였는데 이와 반대인 사람을 모스크바에서 1994년 3월에 만났다. 그냥 막 사람이 아니라 남한 최고의 대학을 나온 운동권이다. 말쑥한 피부에 무엇이든 흥미를 가지는 수재이다.
나는 길을 걷거나 화장실에서도 외우던 로어(러시아 어)였지만 그를 떼지는 못했다.(물론 폐쇄 북한 속이란 한계가 있었지만). 하지만 그는 얼마나 머리가 좋은 지 그 짧은 기간 로어를 떼고 레닌그라드 대학 전임강사 노릇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똑똑 머저리, 아니 책상머리라고 해야 할까. 그는 책으로 읽은 공산주의자들처럼 소련과 북한을 추종하는 이였다. 반정부 시위 최루탄에 한 눈이 실명될 정도의 열혈 운동권 꼴통이었다.
그는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소련 대표단이 놀랄 만큼 환영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 공로로 소련 정보기관이 그를 영입하여 소련에 직접 가게 되었다. 남한에서 체포될 처지에서 때마침 좋은 도피처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소련에 간 그것이 운동권에서 확고히 돌아서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를 이렇게 만든 영향에서 나도 한 몫을 했다고 본다. 그에게 북한 실상을 상세하게 전하게 된 것이다. 그는 탈북자로서 처음 나를 만나게 된다며 인터뷰를 하였다.
그가 나를 찾아온 사연은 이랬다. 한국 언론계에서 유명한 조갑제 월간조선 편집장의 임무를 받고 왔다는 것이다. 하도 조갑제 소리를 해서 누구냐고 물었더니 특종을 가장 많이 한 기자라고 한다. 왜 유명한지는 그때는 몰랐지만 추후 보니 역사의 흐름을 바꿀 만큼 활약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영향력 하나가 귀순자를 탈북자로 변명(變名)케 하였다. 이보다 더 큰 영향력은 해외 탈북자들을 유엔난민(UNHCR)으로 영구히 보호받게 작용한 것이다.
좀 빗나간 얘기이지만 필자가 요즘 역사 연구하다가 놀란 것이 있다. 남한에서 역사 왜곡의 대표적 인물은 김구이다. 김구의 실체 핵심을 가장 명확히 보여준 근거는 유어만 보고서이다. 김구 실체를 가장 근거 있고 용감하게 밝혀낸 것이 <테러리스트 김구>를 쓴 정안기 교수이다. 정안기 칼럼에 보면 유어만 보고서를 처음 발굴해낸 것이 조갑제라는 것이다. 역사의 감초라고 해야 할까 언론계의 대통령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런 <역사의 감초> 조갑제가 어떻게 황성준 운동권 꼴통에게 준 임무가 러시아 내에 탈출한 북한 사람들을 취재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겨울 산딸기 따러 가는 격이었다. 잡히면 죽는 이들이기에 꼭꼭 숨어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현장에 과감하게 뛰어 들어보니 한겨울에도 산딸기가 보였다. 나 잡아가라 하면서 뻣뻣하게 모스크바 한인 교회에 다니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첫 인터뷰에서 귀순자 소리가 듣기 싫고 격에 맞지 않는다고 하니 그럼 뭘로 말했으면 좋겠냐고 한다. 북한을 탈출했으니 탈북이라고 하면 되지 뭘 그러냐고 하니 즉시 그거 참 좋겠네요 하며 의기투합이 되었다. 이 인터뷰 내용대로 월간조선 조갑제 편집장도 수긍하였는지 그대로 기사화되었고 이것이 국내외를 떠들썩하게 만든 특종이 될 줄이야.
이 특종에 아사히 신문, 더 타임스, 월스트리스트 저널 등 외신들이 줄을 이어 찾아왔다. 그 중 월스트리스트 저널 로제트라는 여기자에게 탈북자로서 국제적 보호 받을 길이 없느냐에 답으로 UNHCR를 안내받았다. UNHCR가 모스크바에 생긴 것은 인터뷰 한 해 전인 1993년이라고 한다.
로제트 여기자와 통역으로 송광호 지방 연합 모스크바 특파원과 함께 UNHCR에 찾아가 이사벨이란 프랑스 출신 여직원을 만났다. 이사벨은 북한 사람으로서는 처음 등록하는 내가 제1번이라고 한다. 이것이 좌왕우왕하던 정부의 해외 탈북자 정책을 바로잡는 계기가 되고 황장엽을 비롯한 탈북자 입국의 절차로 자리잡는 역사적 순간이 되었던 것이다. 이 특종으로 말미암아 월간조선은 관훈언론상을, 황성준은 모스크바 조선일보 특파원으로 임명되었다.
운동권 꼴통 황성준에 대한 얘기를 이어가자. 사실 그는 탈북자인 나보다도 더 방황하는 것 같은 인상도 받았다. 알고 보니 그는 공산 종주국 소련에 직접 와 보고 심경의 변화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 많은 사연 중 한 가지만 이야기하려 한다.
소련 사람들은 거리를 지나다 긴 줄을 만나면 무작정 그 뒤에 서있는다. 항상 물자 부족에 시달려 있는 속에서 긴 줄이 섰다는 것은 뭔가 팔기 때문이다. 하루는 그 긴 줄을 따라가 보니 계란을 팔더라는 것이다. 긴 줄을 오래 서있었다고 해서 물건을 다 사는 것이 아니다. 제한된 물건을 팔기 때문에 오래 기다려도 물건이 없으면 닭 쫓던 개 신세가 되는 것이다. 운이 좋게도 물건이 떨어지기 전에 그 귀한 계란을 사게 되었다. 계란을 못 산 뒤에 선 사람들 그 중 소련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노인들, 빈손으로 돌아가기 전 퀭하니 하늘을 쳐다보는 그들.
인간은 간사하게도 그 중 나는 계란을 샀다는 쾌감이 생긴다고 한다.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가다가 그만 얼음판 길에 미끄러져 나자빠진다. 그 귀한 계란들도 박살이 났다. 이와 함께 운동권 꼴통 황성준도 박살이 났다. 그는 대표적 보수 언론이라는 조선일보 기자로 활약했고 문화일보 논설위원으로 그리고 반 운동권 인사로 활약하고 있다.
그는 최루탄인 사과탄 파편에 맞은 한쪽 눈 때문에 40년 지난 아직도 고생하고 있다. 1986년 민주화 혁명 때에 극렬 시위분자로서의 훈장을 받은 꼴이다. 4·19혁명을 촉발시킨 최루탄 맞아 희생된 열사 다음으로 그가 될 뻔했다. 민주화 보상 대상으로 충분히 되지만 놀랍게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대선주자 김문수와 불굴의 민주인사인 장기표가 받지 않아 대단하다 했는데 황성준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적으로 받고 싶지만 아이고! 기자 생활도 하고 받은 것이 많은데 뭘! 하며 받지 않았다고 한다. 범상한 인간이 아닌 꼴통은 꼴통인데 양심적인 꼴통이었다. 요즘 요직들에 올라 설치는 민주화 인사들과 근본 차이가 이것이다. 뭐 잘못 알고 개긴 건 개긴 대로 인정하고 또 순수한 양심은 있어야 한다. 양심 팔며 아무리 높은데 올라가 봤자 이런 양심적 꼴통에 비길 수가 없다.
글이 나간 후 통화를 직접 해보았는데 웃기는 하지만 깊은 우려도 한다. 헐뜯지 못해 하는 이들이 자기를 소련 간첩으로 몰 소지도 있다는 것이다. 소련 당국으로부터 주택이나 직장, 고위층 배급은 받았으나 미인까지는 소개받지 않았다고 한다. 소련 당국이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은 사실이나 간첩까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소련에 간 덕에 좌파적 운동권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한다. 그래도 못 믿겠으면 역사적으로 자기를 보면 된다고 한다. 1990년 소련에 3개월 갔다가 다시 1991년 소련에 갔었는데 그 후 소련이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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